통화 버튼만 누르면 정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녹색 버튼, 마지막 한 번의 클릭만으로...하지만 재석은 끝내 손가락으로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핸드폰을 천천히 접어 주머니에 넣고, 혼자 지하철역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집 문 앞에 서서, 재석은 무심코 고개를 돌려 맞은편 문을 바라봤다.30초...1분...3분...그 사이, 그는 얼마나 바랐던가?그 문이 ‘딱’ 하고 안에서 열리고, 정은이 예전처럼 걸어 나와 환하게 웃으며 말해주기를 간절히 바랐다...‘어, 우연이다.’하지만 10분이 지나도록, 그 문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집 안에 들어온 재석은 소파에 앉았다.눈앞에 정은은 없었지만, 곳곳에 그녀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소파 위에 놓인 부드러운 담요를 집어 안았다.아직도 희미하게 스민 그녀의 향기가 남아 있었다.재석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파묻었다.잠시라도, 거짓인 줄 알면서도, 그 꿈속에 숨고 싶었다.마치 현실을 외면하고 머리를 땅속에 파묻는 타조처럼.창밖엔 달빛이 차갑게 번져, 막 돋아난 나뭇가지의 새순을 비췄다.분명 봄은 왔지만, 3월의 따스함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바람은 여전히 차고 매서웠다.달은 끝없이 고요하고 싸늘했다....같은 밤, J시의 한 고급 주택가.정원 한켠에서.“이 시간에 무슨 일이에요?”불쑥 나타난 남자를 보며, 변리아는 놀란 눈길을 보냈다.조지언은 그 말에 미묘하게 눈썹을 올렸다.“왜? 반갑지 않아?”리아는 그를 위아래로 훑어본 뒤, 비켜섰다.“일단 들어와요. 밖에 바람 차니까요.”말을 마치며 돌아서는 리아가 한마디 덧붙였다.“문은 꼭 닫아요.”“응...”지언이 코끝을 한번 긁적이며 대답했다.그는 직접 철제 현관문을 닫고, 리아의 뒤를 따랐다.“애들은요?”“벌써 자요.”“이렇게 일찍이에요?”리아의 발걸음이 잠깐 멈췄다.“지금 몇 시인지나 확인하고 하는 소리예요? 애들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 잘 크는 거 몰라요?”“흠... 이제 알았네요. 미안해요. 애들 기
“하지만 경계선을 분명히 긋지 않으면, 너랑 정은 사이는 계속 부딪힐 거야.”“이거 참... 어렵네.”진욱이 재석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돌아섰다.“아니, 나한테 조언해 준다면서? 그 조언은 어디 갔어?”진욱이 뒤돌아보며 말했다.“미안, 내가 섣불렀다.”“다들 모인 김에 한 가지 발표할 게 있습니다.”진욱이 손뼉을 두 번 쳐 주의를 끌었다.태민이 고개를 돌렸다.“전 교수님, 뭔데요?”“오늘 저녁 내가 낼게. 뭐 먹을지 정하자.”“어라, 오늘 무슨 날이에요? 철옹성 같은 전 교수님이 지갑을 다 여네?”미진이 웃으며 놀렸다.“에헴...”무슨 철옹성이니 짠돌이니, 말은 맞아도 좀 은근하게 못 하나? 은근하게!결국 다수결로 한식이 아닌, 서양식으로 결정됐다.진욱이 고개를 돌려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참, 고르기도 잘 고른다...”퇴근 후, 일행은 예약된 식당으로 향했다.아까워 죽겠지만, 진욱은 시내에서도 손꼽히는 고급 레스토랑을 예약했다. 1인당 비용이 상당했다.자리에서 진욱은 빈티지 와인까지 한 병 땄다.“전 교수님, 밥도 반이나 먹었는데 왜 쏘시는 건지 아직 말씀 안 하셨어요.”태민이 물었다.미진이 끼어들었다.“그걸 꼭 물어야 아나? 우리 전 교수님이 요즘 ‘여왕님의 남자’로 등극하셨잖아. 그것도 법적으로 인정받은, 명실상부한 그거. 이 정도면 축하해야지.”“헉, 전 교수님, 재결합하셨어요?”태민이 놀라서 물었다.“역시 너, 실시간 검색어는 안 보는구나.”“죄송합니다...”미진은 진욱의 의기양양한 표정을 한 번 훑었다. 리가 있었다면 당장에라도 하늘로 치솟아 한 바퀴 돌았을 기세였다.그리고 옆자리에 앉아 있는 재석을 바라봤다.‘하... 뭐라고 해야 하나? 누군 웃고, 누군 울고...’‘많은 경우, 사람의 기쁨과 슬픔은 절대 같지 않아.’일행이 식당을 나왔을 때는 이미 하늘이 까맣게 가라앉아 있었다.태민은 호출한 택시를 타고 가장 먼저 떠났다.리아는 직접 운전기사가 마중을 나와 태워 갔다.비싼 로고가
“조 교수? 재석아!”전진욱의 목소리는 끝내 거의 고함이 됐다.“응? 왜?”“너, 지금 무슨 일 있지?”진욱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재석을 위아래로 훑었다.재석은 그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돌려 컴퓨터 화면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계속 작업했다.진욱은 마치 금지품 냄새를 맡은 탐지견처럼, 순식간에 재석의 코앞까지 파고들었다.“너 뭔가 이상하다. 아주 많이 수상해.”“내가 점이라도 봐줄까?”진욱이 손가락을 꼽으며 단정적으로 말했다.“정은이랑 관련 있지?”재석의 눈빛이 순간 멈췄다.“너희 싸웠냐?”“아니.”“말 돌리긴.”재석이 짧게 말했다.“헤어졌어.”진욱은 거의 10초 동안 그대로 굳어 있다가, 뒤늦게 의미를 깨닫자 폭발하듯 소리쳤다.“뭐?! 뭐라고?! 헤...”“쉿!”재석이 재빨리 손으로 진욱의 입을 막았다.“작게 좀 말해.”“으응.”진욱이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그제야 재석은 손을 놓았다.“누가 먼저 얘기한 거야? 왜 헤어졌는데?!”진욱의 목소리는 여전히 컸다.재석은 말없이 시선을 피했다.멀찍이서 대조군 실험을 하던 변리아의 손이 순간 멈췄다.‘헤어졌다고?’곧 리아는 스스로 흥분했던 것이 무색했다. 강서원의 행동을 보면, 지금이 아니더라도 결국은 그렇게 될 거라는 건 시간문제였다.연회 당일, 리아도 현장에 있었다. 게다가 재석보다 훨씬 일찍 정원에 도착해, 정은과 강서원이 말싸움하는 장면을 목격했다.‘재석이를 위한 거다’, ‘중요하지 않은 사람은 버릴 수 있다’, ‘재석이를 충분히 사랑하지 않으니까 먼저 놓아줘야 한다’...강서원의 입에서 술술 흘러나오는 말들을 들으며, 리아는 그 자리에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정은 씨 잘 참는다... 나였으면 벌써 한 대 날렸을 거야.’‘미래 시어머니? 괜히 비위 맞출 필요 없지.’‘아직 아들하고 이어질지 아닐지도 모르는 사이에 벌써 ‘시어머니’ 행세라니...’‘도대체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오는 건지...’리아는 속에서 주먹이 단단히 쥐어지는 걸 느꼈다.그
재석의 손이 허공에서 굳어버렸다.“이유요? 조 교수님처럼 영리한 분이라면, 이미 마음속에 답이 있을 텐데요. 다만 믿고 싶지 않아서, 이렇게 저한테 다시 확인하려는 거겠죠.”“정은아...”재석을 바라보는 정은의 눈빛엔 여전히 온기가 있었지만, 입에서 나온 말은 단호하고 냉정했다.“조 교수님은 조 교수님 나름의 책임과 도리가 있고, 저는 저만의 자존심과 지향이 있어요.”“이미 그 둘이 공존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면, 왜 서로 놓아주지 않는 거죠? 자유롭게...”재석이 고개를 저었다.“난 안 놔. 네가 약속했잖아. 쉽게 포기하지 않겠다고... 그런데 왜 인제 와서 물러서는 거야?”“미안해요. 노력했어요... 버텨보려고도 했어요. 하지만 노력만으로 바꿀 수 없는 것도 있어요.”정은은 오래전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서영숙에게 온 마음을 쏟았지만, 돌아온 건 차가운 거부와 모욕뿐이었다.강도겸을 위해 7년을 버텼던 자신에게, 조재석을 위해 또 다른 7년을 바칠 여유는 없었다.‘이게 강서원 여사가 말한 ‘사랑이 부족하다’는 걸까?’‘하지만 이제 상관없어.’‘7년 동안 배운 걸 왜 또다시 7년을 버려가며 반복해야 하지?’‘그러면 과거의 7년은 무슨 의미가 있겠어.’강도겸은 강도겸이고, 조재석은 조재석이다.누굴 사랑할지, 누가 사랑할 가치가 있는지... 정은은 더 이상 누구에게도 증명할 필요가 없었다.“연회 날, 강서원 여사님하고 얘기 다 끝냈어요. 결국... 완전히 틀어졌죠. 강서원 여사님의 아들은 여사님께 그대로 돌려 드렸고, 대신 강서원 여사님이랑 결혼기념일을 보내려던 남편을 내가 데리고 갔죠.”“망설이긴 했어요. 근데 결국 강서원 여사님이 깨닫게 해줬죠. 사람은 다 자기만의 이기적인 마음이 있다는 걸. 저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래서 강서원 여사님과 오미선 교수님 사이에서... 나는 교수님을 선택했어요.”정은은 일을 끝까지 몰아붙이지 않았다. 그저 조기봉에게 사실만 전했고, 호주로 함께 갈지 말지는 그의 선택이었다.강서원이 보여준
오미선 교수의 장례는 고인의 뜻에 따라 최대한 간소하게 치러졌다.하지만 추도식 날, 영정이 놓인 빈소 안팎은 꽃과 근조기로 가득 찼다.학교에서 보낸 것과 동료와 제자들이 보낸 것, 학부모들이 보낸 것도 있었다.빈소 바깥 복도 양쪽까지 빽빽하게 들어찼다.자식이 없었던 오미선 교수 대신, 정은이 직접 영정을 들고 상주로서 손님들을 맞았다.마치 친딸처럼 찾아온 모든 조문객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호주 병원에서 발급받은 진단서와 검사 기록은 한 장도 빠짐없이 국내로 가져왔다.그 안에는 오미선 교수가 PO-X 바이러스 감염에 의한 급성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 명확히 기록돼 있었다.관련 부처의 심사 끝에, 오미선 교수는 ‘순직 열사’로 추서되어, 국립묘지에 안장됐다....묘비 앞에 선 정은은 허리를 숙여 붉은 동백꽃 한 다발을 내려놓았다.꽃송이는 영정 바로 아래에 놓였다.붉고 또렷하며, 활짝 피어 있었다.“교수님, 올해 동백이 유난히 예쁘게 피었어요. 교수님이 가장 좋아하셨잖아요.”“집 정원은 걱정 마세요. 제가 자주 가서 돌볼게요. 교수님이 아끼던 꽃들, 절대 소홀히 안 할 거예요.“아, 애영 아주머니가 며칠 전에 선물 바리바리 들고 오셨어요. 손주가 태어나서 이제 돌 지난 지 얼마 안 됐다네요. 교수님께 선물도 드리고...”‘하지만 웃으며 왔다가, 결국 눈물로 돌아간 애영 아주머니...’정은은 고개를 숙였다.“제가 마음대로, 교수님이 주신 비취 팔찌 한쪽을 드렸어요. 교수님도 그러셨을 거잖아요. 기쁠 때는 기억이 되고, 힘들 땐 도움이 되니까.”바람이 살짝 스쳤다.이른 봄의 기운이 바람에 묻어 있었다.정은은 묘 앞에 주저앉아 한참을 이야기했다. 목이 마르면 물을 마셨다가,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교수님, 해가 지네요. 다음에 또 올게요.”묘비 속 사진을 바라보며 살짝 웃은 뒤, 정은은 몸을 돌렸다.석양의 빛이 영정 위에 내려앉아, 마치 사진 속 사람에게 황금빛 후광을 드리운 듯했다.바람이 스치고, 동백 향이 은근
“몇 살인데... 아직도 예전처럼 우는 거예요?”“누가 울었다고 그래요. 안 울었어요.”“네, 네. 안 울었어요.”수십 년 전에도 주고받았던 대화가, 세월을 건너 다시 반복됐다.조기봉과 오미선은 여전히 예전의 그들이었지만, 또 같지 않았다.“기봉 씨... 방금 꿈꾼 것 같아요. 기봉 씨 꿈.”“내 꿈? 무슨 꿈이에요?”조기봉은 울음을 삼키며 최대한 담담하게 물었다.오미선의 시선이 서서히 멀어졌다. 기억 속 어딘가로 잠겨 들어가는 듯했다.“기봉 씨가 사람들이랑 내기하고 대회에 나간 거예요. 팀원들이 참 단합 잘 돼서, 결국 1등을 했죠.”“그런데 처음부터 끝까지, 기봉 씨는 저한테 한 번도 도움을 청하지 않았어요. 우린 아무런 접점도 없었죠. 난 조교, 기봉 씨는 학생. 서로 보이긴 하지만 절대 겹치지 않는 평행선처럼.”“틀렸네요. 그 꿈, 현실과 완전 반대였어요.”“그럼... 현실은 내가 내기하고 대회에 나갔다가 도중에 팀원들한테 버려져서 혼자가 됐고, 그때 기봉 씨가 손 내밀어 줬죠. 우리 둘이 함께 난관을 뚫고 나가서, 결국 1등을 했어요.”“그리고... 우린 연애를 시작했죠. 몰래... 난 동료 몰래... 기봉 씨는 친구들 몰래...”“식당 앞에서 우연히 만난 척하면서 당당히 같이 밥 먹고... 스치듯 지나가면서, 마침 손이 부딪힌 김에 슬쩍 잡기도 하고...”“학교 은행나무길 옆, 아무도 모르는 구석에서... 내가 처음으로 기봉 씨한테 입 맞췄어요. 심장이 모터처럼 뛰는데, 기봉 씨는 날 풋내기라고 놀리면서도... 사실 기봉 씨에게도 내가 첫사랑이었잖아요.”오미선의 눈빛이 조기봉의 말에 스며든 추억 속으로 젖어 들었다.그동안 마음 깊숙이 숨겨놨던 장면들이 하나씩 피어올랐다.“아직도 기억하네요.”“잊을 수가 없어요. 평생 못 잊어요.”오미선이 힘겹게 손을 들어, 조기봉의 얼굴을 쓰다듬으려 했다.세월이 흘러 청년의 모습은 사라졌지만, 그 순간만큼은 옛날의 기봉이 그대로 보였다.“기봉 씨... 날 잊어요.”“와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