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은 이미 어둑어둑해지고 방 안은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지언과 재석 형제는 잠시 말없이 앉아 있었지만, 오래 가만히 있질 못하는 건 역시 재석이었다.그는 걸레로 식탁을 닦고, 밥그릇과 젓가락을 가지런히 놓으며 분주하게 움직였다.정은이 음식만 들고 나오면 곧바로 식사가 시작될 것이다.그 모습을 지언이 가만히 바라보다가, 불현듯 낯설게 느꼈다.‘이거... 완전히 남편 기다리며 부엌에서 분주히 챙기는 새댁 아니야?’누가 감히 상상이나 했겠는가?물리학계에서 이름만 대도 알 만한 조재석 교수가, 늘 학문 앞에 군림하던 그 사람이,지금은 식탁 앞에서 걸레질에 밥상 세팅까지 하고 있다는 사실을.지언은 본능적으로 혀를 찼다.재석이 고개를 돌려 형을 힐끗 보더니, 마치 지언의 생각을 짐작했다는 듯 담담하게 말했다.“형, 어색해? 이거, 형도 곧 하게 될 일이야.”‘조재석, 이게 형 놀리기까지 하네?’지언은 속으로 기가 찼다.‘내가 식탁이랑 냄비 앞을 뱅뱅 돈다고?’‘난 한 대기업의 대표인데, 그것도 카리스마형 알지?’하지만 그 다음 재석의 한 마디가 그대로 비수를 꽂았다.“형, 변리아 선생님한테 밥 한 번 안 해줬어? 애들 분유 타본 적 없어?”지언이도 못 하겠다고는 차마 말하지 못했다.재석은 여전히 담담했다.“그러니까 형, 거기서 거기인데 괜히 나만 놀리지 마. 우리 형제끼리 뭐 하러 상처 주고받아.”그 말에 지언은 고개를 끄덕였다.‘일리 있네. 입 닫는 게 상책이야.’하지만 평화는 채 2분도 못 갔다.지언이 다시 입을 열었다.“근데, 너 정은 씨랑... 다시 시작한 거야?”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재석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바뀌었다. 입꼬리는 저절로 올라가고, 눈매는 활짝 휘어졌다.‘만약 감정이 색깔로 드러난다면, 지금 이 녀석 등 뒤에는 핑크빛 하트가 펑펑 터지고 있겠지.’지언은 그런 동생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응, 맞아.”지언이는 더 할 말이 없었다.‘이건 그냥 자기 애인밖에 모르는 바보 같은 달콤한 남친
일주일 동안 연락이 완전히 끊긴 뒤, 지언은 드디어 리아의 전화를 받았다.벨이 울리자마자 그는 숨을 고르고, 상대가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먼저 쏟아냈다.“변리아 씨, 지금 아주 진지하게 말할게요. 나 요즘 당신이 뭘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어요.”“왜 연락이 안 됐는지도 모르겠고요. 하지만 하나만은 분명히 알아둬야 해요.”지언의 목소리가 잠시 떨렸다.“난, 당신이 너무 걱정돼요.”그는 이어서 단호히 말했다.“계속 이렇게 숨기고, 얼버무리고, 회피만 한다면... 우리 관계를 다시 생각해야 할 것 같아요.”“믿음 없는 사랑은 오래 못 가니까, 서로 감추기만 하는 연인은 결국 끝까지 못 가요.”이 말은 갑자기 튀어나온 말이 아니었다.며칠을 곱씹고, 수없이 다듬은 뒤, 드디어 입 밖으로 꺼낸 것이었다. 마음속에서는 이미 모든 각오를 해 두었다.‘최악의 경우... 그냥 끝내는 거지.’그는 끝없는 기다림 속에서 조바심만 쌓이고, 의심이 꼬리를 물고, 결국 신뢰마저 사라지는 관계라면 차라리 잘라내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지언은 리아의 수많은 반응을 예상했다. 화를 낼 수도 있고, 침묵할 수도 있고, 심지어는 이별을 말할 수도 있다고.하지만, 리아의 대답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음...]짧게, 자기가 듣고 있다는 표시를 한 뒤.[지언 씨, 호주로 좀 올래요? 와서 나를 데리고 집에 가요. 그리고 겸사겸사 여행도 좀 하고... 우리 실험실의 사랑꾼 보스, 지언 씨의 정 많고 미련 많은 막냇동생도 한 번 보는 게 어때요?]지언이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대답이 이게 다야? 끝? 진짜 이걸로 끝이라고?’리아는 조금도 미안해하지 않고 자기 성격대로 말을 툭 던졌다.[지언 씨, 빨리 대답해요. 안 올 거면 말고요.]“그럼... 갈게요.”결정을 망설이는 건 곧 아내 될 사람을 무시하는 꼴이었다.그렇게, 지언은 결국 호주로 향했다.호주 공항에 발을 내디디자마자, 지언은 수환에게서 다급한 구조 메시지를 받았다.그는 현지 최대 조직폭력배에
“저거... 우리 형 같은데?”재석은 눈을 꼭 감았다가 다시 뜨며 확인했다.정말이었다.변리아와 조지언이 타고 온 배가 부두에 닿고, 두 사람이 섬에 발을 디뎠을 땐 이미 사방이 어둑어둑했다.리아가 정은을 보자마자 단숨에 한마디 내뱉었다.“먹을 거 있어요? 배고파 죽겠네요.”정은은 짧게 대답했다.“있어요.”“그럼 난 고추잡채랑 감자조림...”마치 식당에서 메뉴를 고르듯 자연스러웠다.정은은 머릿속으로 금방 계산했다. 냉장고에 재료가 다 있었다.“알겠어요.”리아는 눈이 동그래졌다. 진심으로 놀라고 기뻤다.‘아, 드디어 제대로 된 밥을 먹을 수 있겠네...’지난 며칠간 리아가 어떻게 끼니를 때웠는지는 리아 본인만 알았다. 굶지만 않으면 된다는 마음으로 내내 대충 먹고 넘어갔다.짜든 싱겁든, 달든 시든, 맛있든 맛없든 상관없었다.그런데 막상 손에서 일이 끝나고 마음에 여유가 생기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정은이 차려주던 밥상이었다.그 옆에서 지언이 슬쩍 눈길을 주며 말했다.“그럼 나랑 정은 씨가 한 요리, 뭐가 더 좋아요?”리아는 1초도 고민하지 않았다.“그야 당연히 정은 씨 음식이죠! 지언 씨가 밥이 될 수 있겠어요? 배부르게 해줄 수 있겠냐고요. 음식처럼 냄새만으로도 군침 돌게 할 수 있나요?”살벌한 3연타 질문.지언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 눈빛에 묘하게 장난스러운 물결이 번졌다.“왜 못 해요?”리아가 할 말을 잃었다. 지언은 살짝 웃으며 덧붙였다.“나도 요리가 될 수 있는데요?”리아는 지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지언은 아예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난... 이미 씻어놨으니까, 언제든 주인님이 드시면 돼요.”리아는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이 인간, 왜 이 자리에 그런 말을 해? 진짜 경찰 불러야 하는 거 아니야?’사실 지언이 제대로 작정하고 리아를 꼬시기 시작하면, 리아는 절대 지언을 이길 수 없었다....리아는 발걸음을 가볍게 옮기며 정은을 따라 주방으로 향했다. 입으로는 그럴듯하게 포장했다.
마치... 부드럽게 보이게 하는 필터를 씌우기라도 한 듯.정은이라는 사람 자체도, 그녀 뒤로 펼쳐진 풍경도, 온통 한 폭의 유화처럼 아름다웠다.정은을 바라보던 재석은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재석 씨?”정은이 이름을 불렀다.“무슨 생각 해요? 멍하니 웃고 있네.”“너.”‘네 생각...’3주 동안, 정은은 이런 종류의 말을 재석 입에서 여러 번 들었지만, 매번 들을 때마다 어쩐지 촌스러워서 웃음이 터졌다.“제발 전해산 교수님 흉내 좀 내지 마세요. 그 스타일은 이미 구식이에요. 젊은 사람이 하면 안 어울려요.”그나마 다행인 건, 재석의 잘생긴 얼굴과 맑은 눈빛이었다. 아니었으면 당장 ‘느끼한 아저씨’로 낙인찍혔을 게 뻔했다.“알았어. 내일 전해산 교수님께 꼭 말씀드려야겠다. 정은이가 교수님 보고 ‘늙었다’고 했다고.”“내가 언제 그런 뜻으로 말했어요?”재석의 대꾸에 정은은 너무나 어이가 없었다.노을 지는 하늘, 눈부신 바다.주황빛 구름이 하늘 한쪽에 걸려 있었고, 황금빛 빛살이 구름의 가장자리를 선명히 그려냈다.“잠깐 앉을래요?”정은은 재석이 오래 서 있으면 힘들 것이 걱정돼 벤치로 이끌었다.재석이 먼저 앉았다. 그런데 갑자기 팔을 뻗어, 옆에 앉으려던 정은을 그대로 품에 끌어당겼다.정은은 정신 차릴 틈도 없이, 남자의 허벅지 위에 앉아버렸다.“왜, 이 표정은? 내가 내 여자친구 안는 건 안 돼?”‘내 여자친구.’그 단순한 이름은, 사실 재석이 그토록 원했으나 오랫동안 부르지 못했던 호칭이었다.정은은 그 진지한 눈빛과 마주하다가,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좋네. 공짜로 쿠션 하나 얻었는데, 불만 없지?”재석도 따라서 웃었다.그리고 정은의 허리를 두른 팔에 힘을 조금 더했다. 하지만 그녀가 불편하지 않을 만큼만, 절묘한 선에서 멈췄다.같은 노을빛 아래 정은과 재석이 옥상에 있는 동안, 올리버와 하린은 바닷가에 있었다.그동안의 치료와 돌봄 덕분인지, 하린의 상태는 눈에 띄게 호전되고 있었다.얼굴과 몸에 남아
전화기 너머, 전해산 교수가 기묘하게 조용해졌다.진욱은 순간 신호가 끊긴 줄 알고 핸드폰을 귀에서 떼어 확인했다.‘아니네...’통화는 멀쩡히 이어지고 있는데, 말이 없는 건 전해산이었다.“형? 아직 계세요?”잠시 후, 전해산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너 방금, 정은이가... 조재석의 학생이었던 전 여자친구라고 했냐?]“네. 두 사람 몇 년 동안 사귀었어요. 그러다... 뭐, 여러 가지 오해 때문에 헤어졌죠.정은이가 이번에 호주 간 것도 그즈음이고요. 정은이가 형한테 얘기 안 했어요?”전해산은 대답 대신 긴 침묵으로 일관했다.진욱은 몇 초 더 기다렸고, 그제야 힘 빠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알았다. 이따 얘기하자.]뚝-통화가 끊겼다.진욱은 멍하니 화면을 내려다보다가 뒤늦게 소리쳤다.“세상에! 설마 형이 지금까지 정은이랑 재석 관계를 몰랐던 거야? 그래서 재석이 섬에 들어와 정은이 붙잡으려는 걸, 연구팀 전부가 그냥 ‘바람둥이’라고 생각한 거냐고?!”미연은 곰곰이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그러자 옆에서 하늘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아빠, 바람둥이가 뭐야?”진욱은 딸의 질문에 대답 대신 이마를 짚었다....맥스 군도, 작은 건물 안.주광빈 교수는 화장실을 다녀오다가 전해산 교수를 발견했다.전해산은 핸드폰을 손에 쥔 채, 의자에 앉아 있었다.“전 교수님, 설마 갑자기 여기서 망부석?”“말 시키지 마세요. 지금은 충격 완화 중입니다.”주광빈은 물을 따라 마시며 옆으로 다가갔다.“뭔 일인데 그래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세이렌에게 영혼을 빼앗기기라도 했어요?”전해산이 고개를 저었다.“그것보다 더 센 것 같습니다.”큰숨을 몰아쉬며, 전해산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혹시 조재석 교수님 전 여자친구가 누군지 알아요?”“학생 아니에요? 다들 그렇게 아는데. 온 학교가 아는 사실인데 왜요?”“맞아요. 전 여자친구가 학생이라는 건 우리도 알았죠.”전해산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근데 왜
“엥? 우리 형이 먼저 카톡을 보내다니, 이거 진짜 드문 일인데... 도대체 무슨 일이지?”진욱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평소에는 늘 자기가 먼저 전해산에게 안부를 묻는 처지였고, 그나마 전해산이 마지못해 두세 마디 답해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다.전해산이 먼저 연락을?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예전, 재석이 호주로 떠나기 전에는 진욱이 거의 매일 카톡을 보냈다. 은근슬쩍 정은의 근황을 캐묻느라, 체면이고 뭐고 다 내려놓고 들이댔다.하지만 재석이 떠난 뒤로는 굳이 물어볼 이유도 없어서, 진욱도 연락을 그만뒀다.그런데 오늘, 카톡 창에 뜬 첫 미확인 메시지를 열어본 순간...[진욱아, 물어볼 게 있는데. 조재석, 혹시 바람둥이 아니냐?]진욱은 얼이 빠졌다. 상대방이 답이 없자, 전해산은 반 시간 뒤에 또 보냈다.[말하기 곤란하지? 알지, 조재석이 너희 실험실 책임자잖아. 걱정 마, 진짜 안 새 나가!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나랑 너만 아는 거야! 조재석은 절대 모른다!][믿어봐, 형을!]그로부터 또 30분 뒤...[진짜야, 겁내지 마!][차라리 이모티콘으로만 답해도 돼!][바람둥이면 ‘Y’, 아니면 ‘N’!]또다시 삼십 분 후...[아 맞다, 오늘 토요일이지. 아직 자나 보다...][일어나면 꼭 답해라!][...]진욱은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입을 쩍 벌렸다. 곁에서 미연이 고개를 내밀었다.“뭐야, 당신 표정 왜 그래? 대체 뭐라고 온 거야? 나도 보자.”진욱은 멍한 얼굴로 핸드폰을 건넸다.잠시 후, 미연 역시 똑같은 표정을 지었다. “조 교수님이 바람둥인지 아닌지? 이게 무슨 질문이야?”진욱은 두 손을 들어 어깨를 으쓱했다.미연은 핸드폰을 다시 돌려주며 말했다.“뭐가 어려워. 그냥 솔직히 물어보면 되잖아.”진욱은 잠시 고민하다가, 메시지 창에 손가락을 올렸다.그리고 조심스레 한 줄을 입력했다.[방금 일어났어요.]거의 실시간으로 전해산의 답장이 날아왔다.[드디어 깼구나! 자, 이제 말해봐!]진욱의 입술이 씰룩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