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뜨끈뜨끈하고 쫀득한 떡국 한 그릇을 비운 슬아는 속이 든든해졌고, 그대로 다시 침실로 들어가 이불을 끌어안은 채 한숨 더 잤다.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오전이 훌쩍 지나 있었다.핸드폰을 확인한 슬아의 얼굴이 굳었다.“미쳤다, 미쳤어... 늦겠다...”슬아는 허겁지겁 패딩 하나를 걸치고 휴대폰을 움켜쥔 채 집을 나섰다.약속한 카페에 도착했을 때, 시간은 딱 맞아떨어졌다.슬아는 한 번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문을 밀어 열었다.“저... 1번이세요? 아, 혹시... 지우현 씨?”지우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슬아를 보자마자 눈빛이 환해졌다.“안녕하세요! 저는 지우현입니다. 뭐 드실래요?”한설이 직접 고르고, ‘1번 예비 후보’로 나란히 올려둔 남자답긴 했다.간단히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야 슬아는 알게 되었다.우현은 스물셋, 대학을 막 졸업했고 집안 형편은 꽤 괜찮지만 가업을 잇고 싶지 않아 대학 시절부터 연예계에 뛰어들었다고 했다.그리고 지금은 이름이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한 신인 감독이었다.“누나, 디저트도 하나 시킬래요? 단 거 좋아하시죠?”우현은 메뉴판을 슬아 쪽으로 밀어주며 웃었다.눈이 유난히 잘 웃는 얼굴이었다.슬아는 손을 저었다.“아니, 나는 괜찮아.”“살찔까 봐요?”우현이 묻자 슬아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뭐... 그런 편이지.”“알겠어요, 누나 의견 존중할게요.”“이름으로 불러.”우현은 잠깐 멈칫했다.“네, 알겠어요.”...강서원이 올해도 ‘동전 세 개’를 넣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지훈은 괜히 욕심이 생겨 만둣국을 한 그릇 더 먹었다.마지막으로 남은 그 동전까지 꼭 먹어서 새해 운을 챙기고 싶었다.하지만 이미 배는 빵빵하게 불러 있었고, 결국 지훈은 ‘랜덤 박스’를 열어보지도 못했다.그 마지막 동전은 결국 리아의 몫이 되었다.지훈은 조용히 계산해 보았다.리아는 혼자서 만둣국 세 그릇, 떡국 한 그릇을 해치웠다.이 양과 이 확률...‘이건 내가 못 이기지. 못 이겨.’지훈은 체념했다.‘리아 형수님
조씨 가문 본가.“지훈 삼촌, 왔어요!”지훈이 막 현관으로 들어서자마자, 현우가 쪼르르 달려왔다.“여기요, 삼촌 담배요. 어제 소파에 떨어져 있어서 제가 주웠어요. 근데 삼촌 담배 피워요?”현우의 커다란 눈에는 순수한 의문이 가득 담겨 있었다.지훈은 피식 웃었다.“담배 피우는 게 그렇게 이상해? 그 표정은 또 뭐야?”“아빠가 그러는데요, 보통 담배 피우는 남자는 와이프가 없대요.”“왜?”“여자들은 보통 남자가 담배 피우는 거 싫어하잖아요. 아빠도 원래는 담배 피웠대요. 근데 엄마 만나고 끊었대요.”현우는 주변을 한 번 살피더니, 목소리를 바짝 낮췄다.“비밀인데요... 아빠가 엄마한테 뽀뽀하려고 했는데, 엄마가 아빠한테 냄새난다고 했대요.”지훈이 할 말을 잃었다. ‘야, 이 자식아. 너는 말하는데, 나는 듣는 게 더 곤욕이다.’“그러니까요, 지훈 삼촌이 담배 피우는 거면, 삼촌은 여자친구 없는 거 맞죠? 어젯밤에 할머니랑 할아버지가 삼촌은 평생 혼자 살 거라고 하시던데요.”그때 지언이 안쪽에서 나와 아들을 찾다 말고 지훈을 발견했다.“조지훈, 잘 왔다. 마침 아침 먹으려던 참이었어.”지훈이 아주 짜증이 났다. “안 먹어!”단호하게 말한 뒤, 지훈은 현우와 지언을 훌쩍 지나쳐 안쪽으로 들어가 버렸다.지언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현우를 내려다봤다.“너 삼촌한테 뭐라고 했어?”“아니요. 전 그냥 사실만 말했는데요?”...다이닝룸에는 이미 다들 모여 있었다.“정은이, 리아도 어서 앉아.”오늘 아침은 강서원이 직접 준비했다. 아들들이 좋아하는 만둣국은 물론이고, 정은이 좋아하는 떡국도 따로 끓여 놓았다.“정은이는 떡국이지? 리아는 어때? 설날 아침엔 만둣국 먹는 집이야, 떡국이야?”리아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둘 다 조금씩 먹어볼게요.”“그래, 그래. 너희 먼저 앉아 있어. 내가 떠다 주마.”말을 마치자마자 강서원은 앞치마를 고쳐 매고 주방으로 들어갔다.어젯밤, 강서원은 집에 남아 있던 가사 도우미들에게 모두
“민슬아, 너 도대체 뭐가 그렇게 걱정되는 건데?”지훈의 시선은 날카로웠다.마치 슬아의 마음속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려는 것처럼.“나 점 봤어. 우리 미래가... 별로 안 좋아.”“점?”지훈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그래, 그럼 내가 물어볼게. 어젯밤에 있었던 일도 점으로 나왔어? 지금 이 순간, 내가 너한테 느끼는 이 반응도 다 봤고?”“못 봤지?”“그런데 말이야, 너 일단 옷 좀 입으면 안 돼? 나도 입어야 하고...”“안 돼! 너도 입지 마!”슬아는 말문이 막혔다.‘이 사람 진짜 무슨 병 있어?’말은 그렇게 해놓고, 결국 지훈은 가운을 걸쳤다.그리고 옷장으로 가서 잠옷 한 벌을 꺼내 직접 슬아에게 건넸다.“입어.”“너 뒤돌아 있어.”“어제 다 봐놓고 지금 와서 뭐가 부끄러워?”“뒤돌아!”“알았어, 알았어. 안 볼게. 어차피 어젯밤에 볼 건 다 봤으니까...”“너 진짜...!”...슬아는 결국 아침을 먹지 못했다.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배고픔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너무 화가 났다.옷을 입고 다시 대화를 해봤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지훈은 끝까지 책임지겠다고 했고 다시 만나자고 했다.슬아는 솔직히 말하면, 마음이 안 흔들렸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하지만 그 작은 흔들림보다... 슬아를 더 괴롭히는 건... 고동건이 말했던 ‘미래’였다.‘나랑 조지훈이 같이 있으면, 좋은 결말은커녕... 괜히 주변까지 휘말리는 거 아닐까...’게다가 또 하나.‘조지훈이 정말 큰 운을 타고난 사람이 아니면, 내가 이 사람한테 인생을 걸어버리는 건... 결국 운명도 못 바꾸는 거잖아?’‘진짜 마지막에 잘못되면 어떡해...?’‘그런데 그렇다고 사귀자고 해놓고, 나중에 다른 남자 만나러 가는 것도 말이 안 되지. 그건 너무 쓰레기잖아...’‘...’슬아는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결국 홧김에 슬아는 ‘은리’에게 지훈을 내쫓게 했다.왜 직접 안 쫓았냐면... 슬아는 밀어낼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예전엔 몰랐는데,
다음 날, 이른 아침이었다.겨울치고는 드물게 햇살이 얼굴을 내밀었다.부드러운 빛이 유리창을 통과해 창가에 내려앉았다.마치 흩뿌려진 금박처럼 잘게 부서져 반짝이며, 따뜻하게 퍼졌다.슬아는 더위에 잠에서 깼다.팔을 조금 움직이며 몸을 돌리려고 하는데, 손끝에 닿은 건 따뜻한 체온의 가슴이었다.슬아는 번쩍 눈을 떴다.정신이 번쩍 들었다.옆에 누운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기억들이 역류하듯 한꺼번에 밀려들었다.‘어젯밤에... 조지훈이 왔고...’‘조지훈이 나를 부축했고... 나는... 조지훈 등 뒤에 토했고...’‘옷을 빨아주겠다고 하다가, 내가 셔츠를 찢어버렸고...’‘조지훈이 욕실에 들어갔다가, 가운 입고 나왔고... 그리고...’‘세상에!!!’어젯밤 슬아의 모든 기억이 떠올라 버렸다.그때, 남자의 팔이 자연스럽게 슬아의 허리를 감쌌다.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귀 옆에서 울렸다.“깼어?”“응. 그, 그런데... 손 좀 풀어줄 수 있어?”“왜?”“나...”슬아는 침을 한 번 삼켰다.“좀 더워.”“알겠어.”지훈은 순순히 팔을 거뒀다.슬아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지훈이 이불 한쪽을 훌쩍 들춰 올렸다.“아! 너 뭐 해?!”슬아는 반사적으로 두 팔로 가슴을 감쌌다.“덥다며. 열어두면 바람 좀 통하잖아.”그 말을 하며 지훈은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그 바람에 이불 사이의 틈은 더 벌어졌고, 남자의 상반신이 그대로 슬아의 시야에 들어왔다.아무것도 가리지 않은 채로.슬아는 절망적인 심정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왜? 부끄러워?”지훈이 가까이 다가왔다.숨결이 귀 옆에 멈췄다.웃는 것도, 아닌 것도 같은 목소리였다.친밀함과 장난기가 묘하게 섞여 있었다.슬아의 귀가 순식간에 붉어졌다.슬아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고개를 돌려 지훈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봤다.“어젯밤에...”“알아. 우리 잤어.”“나 술에 취해서...”지훈은 곧바로 말을 끊었다.“술김에 저질렀다는 말은 하지 마. 내
슬아는 다급하게 손을 내저었다.“나 안 그랬어!”“그런데 왜 봐?”슬아는 바로 등을 돌리며, 작게 중얼거렸다.“안 봤어.”하지만 그 말투는 누가 들어도 어딘가 찔리는 구석이 있었다.지훈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몸에 묻고 찢어지기까지 한 셔츠를 마저 벗어 그대로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슬아는 다시 한번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미안해...”고개를 들었을 때, 슬아는 또다시 어지럼증을 느꼈다.몸 전체에 힘이 풀린 슬아는 뒤쪽의 술장에 기대며 간신히 버텼지만, 다리에 힘이 빠지면서 그대로 아래로 미끄러지려 했다.그 순간, 상반신이 드러난 채였던 지훈이 슬아를 그대로 안아 올렸다.슬아의 눈에는 아직 취기가 남아 있었다.초점이 흐릿했고, 어딘가 멍한 표정은 세상 물정을 모르는 아이처럼 보이기까지 했다.지훈은 슬아를 침대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아무 말 없이 욕실로 향했다.곧...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슬아는 몇 초간 멍하니 있다가 뒤늦게 상황을 인지하고 양손으로 자기 뺨을 감쌌다.“하아... 왜 이렇게 덥지?”지훈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잠시 후, 흰색 가운을 걸친 채 욕실에서 나왔다.흰 가운의 교차하는 깃 사이로 지훈의 가슴 근육은 반쯤 가려진 상태였고, 젖은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목선을 따라 흘러 가운 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꿀꺽-슬아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지훈이 갑자기 가까이 다가와 물었다.“예뻐?”슬아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어... 예, 예뻐.”슬아는 속으로 생각했다.‘분명 술에 취한 거야. 아니면 이런 말을 할 리가 없잖아.’지훈은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왜 그렇게 갑자기, 벼랑 끝처럼 이별을 통보한 거야?”“뭐?”슬아의 눈에 잠시 맑은 빛이 스쳤다.하지만 지훈은 더 가까이 다가왔다.눈앞에 가슴이 보일 정도로 거리가 좁혀졌고, 서로의 숨결이 섞이자 슬아는 다시 어질어질해졌다.“왜냐고. 응? 난 진짜 이유를 듣고 싶어.”“그건...”슬아는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너 왜 왔어?”지훈은 천천히 걸어 식탁 쪽으로 다가갔다.식탁 위에는 반쯤 남은 와인과 식어버린 음식들, 그리고 미동도 없이 늘어져 있는 뱀 하나와 거미 하나가 있었다.마치 깊이 잠든 것처럼 보였다.‘이 여자, 진짜 이 두 위험한 동물들과 설날을 제대로 보내고 있었네.’지훈이 담담하게 대답했다.“지나가다 들렀어. 그냥 한 번 보려고.”“설날에? 가족들이랑 설날 안 보내고, 여길 지나가다 들렀다고?”슬아는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왜? 그러면 안 돼?”“안 될 건 없지. 근데 말이 안 되잖아.”“존재하면 다 이유가 있는 거야.”“너는 변호사라서 말은 잘해. 내가 말로는 못 이기겠는데, 그래도 너 머리에 문제 있는 건 맞는 것 같아.”지훈은 식탁을 한 번 더 훑어보며 말했다.“와인에 스테이크라. 너 설날 잘 보내고 있네?”“그럼! 혼자라도 설날은 제대로 보내야지.”말하다 보니 슬아는 갑자기 목이 말라졌다.몸을 지탱하며 상체를 일으켜, 테이블 위에 있는 물컵을 향해 손을 뻗었다.그런데 몇 번이나 손을 뻗어도, 컵이 잡히지 않았다.슬아의 시야에는 이미 잔상이 겹쳐 보이고 있었다.다음 순간, 남자가 컵을 들어 슬아 앞으로 가져왔다.슬아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을 벌렸다.“아...”지훈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너 왜 이렇게 게을러? 나한테 먹여 달라고 하네...”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지훈의 손은 아주 정직했다.빨대를 잡아 슬아의 입가로 가져다주었다.슬아는 꿀꺽꿀꺽 몇 모금을 마시고 나서야 숨을 돌렸다.“조 변호사... 의외로 친절하네...”“흥. 이제야 알아?”“너 진짜 안 겸손하다.”“겸손해서 재판 하나 더 이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겸손해서 큰돈을 더 버는 것도 아닌데, 왜 겸손해야 해?”슬아는 말문이 막혔다.그러다 갑자기, 슬아가 벌떡 일어섰다.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아 휘청거리며 넘어질 뻔했다.그 순간, 지훈이 재빠르게 슬아를 붙잡았다.“야, 너 뭐 해?”슬아의 얼굴색이 순식간에 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