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에게 지금 다른 생각이 있었지만, 그 전에 좀 더 기다려야 했다.‘계약이 만료되어야만 움직일 수 있어.’...이날, 정은은 평소대로 외출하며 도서관에 가려고 했다.밖에 나오자마자 재석을 만났다.그는 최근에 새로운 과제를 준비해야 했기에 무척 바빴고, 며칠 밤을 새워 금방 실험실에서 돌아왔다.“선배님, 좋은 아침이에요.”정은은 웃으며 그에게 인사를 했다.“사실 학교 밖에서는 직접 내 이름을 불러도 되는데.” 재석은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참, 네 의견을 묻고 싶은데. 전에 너에게 말했던 그 완성하지 못한 과제 기억하니?”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과제는 지금 그녀가 접촉하고 있는 과제 방향과 매우 부합되었다.게다가 그것은 오랜 고민 끝에 나온 과제였기에, 이대로 포기하기엔 매우 아쉬웠다.“잘 생각해 봤어? 계속 연구하고 싶지 않아?”정은은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럼요! 하지만... 지금 실험실이 없어서 데이터 부분을 완성할 수 없어요. 그래서...”모든 결론은 데이터가 필요하며, 수없이 많은 실험 기록에서 데이터를 얻을 수 있었다. 정은은 재료도 없고 도구도 없었기에 실험을 전혀 전개할 수 없었다.“내 실험실에 오면 돼.”잠시 멈칫하더니, 재석은 한마디 덧붙였다.“무료로 써.”재석의 실험실은 비록 최근에 설립되었지만, 있어야 할 설비가 하나도 빠지지 않았고, 모두 현재 세계 차원에서 가장 선진적인 기자재였다.“그래도 돼요?” 정은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이 세상에 공짜가 있을까? 그것도 나한테 이런 좋은 기회가 떨어지다니.’“내 말이 농담처럼 보여?”정은은 잠시 망설이다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정말 고마워요!”재석은 담담하게 웃으며 눈빛에 미소가 번쩍였다.실험실은 실학동 8층에 있었다.서비대학교의 실험실은 수량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매 실험팀에 주어진 정원도 제한이 있었다.그러나 재석의 실험실은 비교적 특수했다. 그들은 직접 기업
재석이 말했다.“아무 시간이나 실험실을 사용할 수 있고, 매일 출근도장을 찍을 필요가 없어. 넌 시간이 있을 때 오기만 하면 돼.”정은은 현재 오미숙이 그녀에게 준 논문을 이해해야 할뿐만 아니라, 관련 분야의 최신 연구성과에도 관심을 돌려야 했다.이제 또 하나의 정식 논문 과제를 완수해야 했기 때문에, 그야말로 숨 돌릴 틈조차 없었다.재석은 이런 일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정은의 능력으로, 시간을 합리적으로 계획하고 적극적으로 추진한다면, 절대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곧이어 그는 또 정은에게 실험실의 주의사항을 알려주었다.실험실마다 역할이 달랐기에 주의사항도 달랐다. 정은은 열심히 들으며 중요한 점을 적기도 했다.“현재 내가 이끄는 실험팀만 이 실험실을 사용하고 있어. 나 말고도 네 명의 팀원이 더 있는데, 기회 되면...”말이 끝나기도 전에 안경을 쓴 마흔 살 정도 하는 남자가 탕비실에서 걸어 나왔다.그는 몸집이 크고, 근육까지 있어 언뜻 보기에는 건장한 반달곰 같았다.그런데 손에 보온컵을 들고 있었는데, 구기자가 둥둥 떠 있었다. 안에는 심지어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났다.“어? 조 교수, 우리 팀에 신입이 들어온 거야?” 남자는 정은을 훑어보았지만, 불편한 정도는 아니었다. 반면 궁금해하는 동시에 자제했다.‘예의가 있고 분수가 있는 사람이군.’“소개할게. 전진욱, 내 동료이자 실험팀 성원 중 하나야. 서비대에서 기초물리를 가르치고 있어.”“안녕.” 진욱은 방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고, 무서웠던 얼굴은 순식간에 어수룩해졌다. 그야말로 얌전하기 그지없는 사람이었다.정은은 잠시 놀라서 말을 잇지 못했지만, 얼른 웃으며 악수했다.“전 교수님, 안녕하세요. 저는 소정은이라고, 소 교수님의...”‘어...’“친구야.”전진욱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재석을 바라보더니 시선은 마지막에 정은의 얼굴에 떨어졌다.‘조 교수가 친구를 데리고 실험실을 참관하러 온 것을 본 적이 없는데...’“젊은 아가씨, 그렇게 긴장하지 마. 날 전 교수님이라
부츠를 신은 긴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여자는 카멜색 코트에 흰색 니트를 입고 입었고, 손에는 회색 에르메스 가방을 들고 있었다.머리부터 발끝까지 정교함을 드러냈다.수아는 재석을 본 순간, 눈빛이 밝아졌다.“조 교수님, 좋은 아침이에요!”“좋은 아침.” 재석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수아야, 소개해 줄게. 우리 팀에 새로 들어온 멤버인데, 소정은이라고 해. 너보다 두 살 어려.” 태민은 가장 먼저 그녀에게 이 소식을 공유했다.수아는 그제야 오늘의 실험실에 한 사람이 더 많아진 것을 발견했는데, 웃음이 그대로 굳어졌다.정은이 오기 전, 수아는 실험팀의 막내였고, 모두들 그녀에게 양보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그러나 수아도 확실히 그럴 자격이 있었다.콜롬비아대학에서 졸업한 다음, 또 서비대에서 박사 과정을 공부하고 있었으니, 그야말로 얼굴과 지혜를 가진 미녀였다.게다가 재석의 실험팀에 성공적으로 진입할 수 있었으니, 그 연구능력, 학술수준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정은이 차례대로 인사를 하자, 수아는 눈썹을 치켜세우더니 간단하게 얼버무린 다음, 손을 거두어들였다.그녀는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정은은 오히려 수아가 자신을 향한 적의를 느낄 수 있었다.옆에 있는 미진은 두 여자아이를 훑어보더니 말을 하지 않았다.재석이 입을 열었다.“사실 정은 씨는 우리 실험팀에 가입한 성원이 아니야.”“...네?”“정은 씨는 자신의 실험 과제가 있는데, 단지 우리의 실험실을 빌려 쓰고 있을 뿐이야.”‘실험실을 빌린다고?’태민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조 교수님은 종래로 실험실을 남에게 빌린 적이 없는데. 어떻게 이번에...’다른 사람들도 같은 의혹이 들었다.미진과 진욱은 눈을 마주쳤고, 수아는 미간을 세게 찌푸렸다....재석은 정은을 단독실험대로 데려갔다.“앞으로 이곳은 네 실험대야. 무슨 필요한 것 있으면 나에게 말할 수 있고, 칠판에 적을 수도 있어. 매일 다른 사람들이 와서 재료를 보충할 거야.”정은은 고개를 살짝 끄
지금 수아는 정은을 향한 시기를 숨기기조차 귀찮았다.사람들은 수아가 이렇게 나올 줄 몰라, 분위기가 잠시 어색해졌다.이때, 태민이 나서서 분위기를 풀며 수아에게 말했다.“수아야, 그 실험 데이터는 내가 이미 널 도와서 계산한 적이 있는데, 빨라도 내일 오전에야 결과가 나올 거야. 다들 모처럼 시간이 있으니, 함께 밥을 먹고 긴장을 풀면 얼마나 좋아... 게다가 조 교수님도 평소에 바빠서 입을 열 틈이 없는데. 오늘 교수님이 한턱 낸다고 하시니 우리도 당연히 가야 하지 않겠어?”수아는 마음이 불편했다. 그의 마지막 말을 듣고서야 수아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들었다. 재석의 아름다운 얼굴은 조금 차가웠고, 하얀 셔츠는 그를 천사처럼 보이게 했다. 마치 속세에서 멀리 떨어진 신처럼, 수아는 그런 남자를 보며 저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다.결국 그녀는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그래요, 나도 모두의 흥을 깨고 싶지 않네요.”태민은 한숨을 돌렸지만 또 은근히 좀 서운했다.‘이 큰 아가씨는 정말 까칠하다니깐. 역시 조 교수님만이 수아의 생각을 좌우할 수밖에 없어.’...사람들은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다음 레스토랑으로 갔다.재석은 미리 예약했는데, 한식집이었다. 음식 맛이 매운 편이었지만, 많은 인기를 끌고 있었다.미진은 매운 음식을 좋아해서, 오늘 회식 장소에 너무 만족했다.태민은 가장 활발했다. 실험실에 젊은 여자가 적었기에, 그는 정은을 여동생처럼 대하며 열정적으로 불렀다.“정은아, 뭘 먹고 싶으면 마음대로 시켜. 절대로 사양하지 말고. 우리 조 교수님은 줄곧 대범하고 통이 크시거든. 뭘 먹고 싶어?”미진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은근히 농담을 했다.“평소에 태민의 말을 믿으면 안 되지만, 오늘 이 말은 사실이야.”“에이 조 교수님, 저 좀 봐주시면 안 돼요? 다음에는 그런 말하지 마세요.”그가 고의로 농담을 하자, 분위기는 단번에 달아오르기 시작했다.정은은 태민에 대한 인상이 꽤 좋았기에, 지금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오직 수아만
곧 요리가 올라왔다.진욱은 향기를 맡자, 배가 꼬르륵 소리 짖기 시작했다. 그는 닭볶음탕을 먹었는데, 고기가 연하고 간이 잘 배었다.“맛있네! 이렇게 제대로 된 닭볶음탕을 먹어 본 적이 없는데, 오늘 정말 잘 왔네.”태민은 듣자마자 얼른 맛보았다.“확실히 괜찮네요! 수아야, 너도 조금 먹지 않을래?”“아니요, 다이어트 중이라서요.”태민은 재빨리 닭고기를 자신의 접시에 놓더니 웃으며 말했다.“그럼 네가 다이어트 끝나면, 우리 둘이 따로 이곳에 와서 먹자...”수아는 어이없어서 눈을 부라렸다.“누가 당신과 함께 오고 싶다는 거예요?”저쪽은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고, 미진도 기분이 꽤 좋았다. 그녀는 정은을 보더니 약간 궁금해하며 물었다.“정은아, 아직 네 나이에 대해 안 물어봤는데. 너 올해 몇 살이야? 9월에 대학원 1학년이면 22? 23?”미진은 그저 생각나는 대로 물었을 뿐, 다른 뜻은 없었다.정은도 아무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담담하게 대답했다.“아니요. 올해 26살이에요.”그러나 다른 사람들도 있었기에, 이 말을 듣고 표정이 이상해졌다.‘26살에 대학원에 합격한 거야? 이건 좀...’태민은 말을 하지 않은 재석을 훔쳐보았다. 그의 표정은 담담했고, 천천히 식사를 하고 있었으니, 이미 알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수아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마침내 웃음을 지었다.“26에야 대학원에 합격한 거야? 그럼 얼마나 애를 썼을까? 몇 번 시험을 봤는데?”수아가 입을 열자 태민은 재빨리 식탁 밑에서 팔로 그녀를 밀었다. ‘이런 말 하면 안 되는데. 정은 씨는 조 교수님이 데리고 들어온 사람이잖아.’애석하게도 수아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저리 가요,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예요!’정은은 담담하게 대답했다.“한 번요. 전체적으로 볼 때 필기시험과 면접시험은 그리 어렵지 않았어요.”“그래?” 수아는 단지 정은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느꼈다.“정말 그렇게 간단하다면, 왜 대학을 졸업한 후에 바로 시험을 보지
이때 미진은 갑자기 입을 열었다.“만약 예비 과정에서 박사 과정까지 마치고 싶다면, 서비대에는 확실히 일부 전공의 학생들이 그 기회를 신청할 수 있어, 하지만 문턱이 무척 높거든. 정은아, 넌 대학 떄 뭘 전공했어?”“생물정보학이요.”“생명과학원?” 미진은 태민을 바라보았다.“이건 태민이 네가 더 잘 알 텐데. 생물정보학이라는 전공에 그 기회가 있는 거야?”순간, 수아를 포함한 모든 시선이 태민에게 집중되었다.“어...”태민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생각했다.“이치대로라면 이 전공은 예비 과정에서 박사 과정까지 마칠 수 있는 기회가 없을 거예요...”수아는 벌떡 일어서서 차갑게 정은을 바라보았다.“사실이 눈앞에 놓여 있는데, 지금 또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그러나 미진은 태민의 말에 주의를 기울였다.“태민아, 이치대로라니? 그게 무슨 뜻이야? 또 다른 예외가 있다는 거야?”태민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매년 생명과학원에는 '조건식 모집 정원'이 1~2개씩 있는데, 국제올림픽학과 경기대회에서 금메달을 딴 학생에게 주어질 거예요.”“조건식 모집 정원이 뭐야?”“간단히 말해서, 금메달 조건을 갖추고 동시에 기타 관련 자격에 부합하는 학생은 학원과 조건을 이야기할 수 있어요. 예를 들면 전액 장학금, 대학원 진입 자격 등등. 어차피 조건을 제가하기만 하면, 학원은 종합적으로 고려할 거예요. 물론 마지막에 동의할지 말지는 학원에게 달렸죠.”“즉, 이 조건이 있다면, 그 자격을 얻을 수 있는 거야?”“그렇죠, 하지만 이건 매우 어려워요. 박사 과정에 진입할 기회는 누구나 원하지만, 이런 제의를 받아들이는 학원이 매우 적거든요. 제가 알기로는, 최근 10년, 심지어 20년 동안 생명과학원이 준 박사 과정 진입 자격은 단 두 개뿐이었어요. 하나는 송지혜 교수님의 제자 진일민이었고, 다른 하나는 오미선 교수님의 제자인 것 같은데. 이름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어요. 그 여학생은 그해 올림픽 물리, 화학, 생물, 정보학 등 4개 학과 경기대회에서
미진은 말을 하지 못했다.‘지금 자기 자랑을 하는 거야! 너무 말이 안 되잖아!’진욱은 밥을 먹다가 이런 놀라운 사실을 알 줄은 몰랐다.“네가 바로 교수님이 말씀하신 그 ‘아쉬운 천재’였구나! 전혀 생각지도 못했는데... 그럼 올해 대학원 교수님은 누구로 정했어?”“오미선 교수님이요.”진욱은 손뼉을 쳤다.“이야, 우리 교수님 정말 야단나셨네!”오직 수아만이 계속 자리에 서 있었다. 방금 전의 도발과 득의양양은 순식간에 어색함과 궁핍함으로 변했다. 지금 제자리에 서 있어도 아니고, 앉아 있어도 어색했다.다행히 태민은 제때에 입을 열어 이 어색함을 풀어주었다.“수아야, 먼저 앉아.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내가 집어줄게. 채소는 다 내 쪽에 놓을게. 넌 고기 많이 먹어...”“고마워요.” 수아는 그제야 앉았다.태민은 또 정은을 바라보며 미안함을 드러냈다.“미안해, 정은아. 수아는 성격이 원래 이래서, 좀 까칠하긴 해. 그러나 나쁜 마음은 없어. 앞으로 너도 알게 될 거야.”‘나쁜 마음은 없다고?’정은은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정말 그랬으면 좋겠는데.’“내가 수아를 대신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할 테니까, 마음에 두지 마.”“누가 나 대신 사과하라고 했어요?! 어이가 없어!”수아는 화가 나서 태민의 발을 세게 밟았다.태민은 하마터면 소리칠 뻔했지만 결국 참았다. 다만 얼굴이 빨갛게 질렸다.미진은 동정이 담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정은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마음에 두지 않을 거예요.”손태민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됐어, 그나저나 궁금한 거 있는데, 너 그 당시 왜 입학 자격을 포기하고 대학 입시에 참가한 거야? 결국 서비대에 갔잖아? 그럼 왜 지름길을 선택하지 않은 거야?”“아마도 고등학교를 3년 동안 다녔으니, 자신의 능력이 어떤지 시험해 보고 싶어요?”“그게 다야?”“다른 이유가 더 필요한가요?”‘그냥 재미로 삼아서 수능을 본 거구나.’이제 오해가 풀리자, 분위기도 점점 화목해졌다.모두들 먹으면서 이야기를
‘이게 뭐야? 익숙한 말투는 마치 두 사람이 이미 여러 번 동행한 적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잖아. 심지어 동거했을 수도...’미진은 사라진 차를 보며 천천히 시선을 거둬들인 뒤, 태민의 손을 꼬집었다.“야, 내가 잘못 본 거 아니지?”태민은 아파서 이를 악물었다.“조 교수님, 다음에 자신을 꼬집으세요!”‘어떻게 매번 나만 다치는 건데!’조미진은 아주 당당하했다.“넌 젊고 회복력이 강해서 괜찮아.”진욱은 웃으며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뒷짐을 지더니 산책을 하며 집으로 돌아갔다.수아의 안색은 그야말로 보기 흉해졌다. 그녀는 태민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차에 올라탄 다음 먼저 갔다.태민은 눈을 드리우며 눈 속에 떠오르는 실망을 감추었다.‘괜찮아, 어차피 익숙해졌으니까.’그는 자신을 위로했다.‘정성이 지극하면 바위에도 꽃이 필 거야. 언젠가는 수아도 날 바라보겠지.’...재석과 정은은 다른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 전혀 몰랐다.아파트에 도착하자 두 사람은 앞뒤로 위층으로 올라갔다.등불은 발소리에 따라 층층이 켜졌다가 꺼졌다. 정은은 남자의 우뚝 솟은 뒷모습을 보았는데, 불빛에 두 사람의 그림자는 길쭉해졌고, 서로 겹쳐져 정은은 마치 오랫동안 재석과 알고 지낸 착각이 들었다.“오늘 고마웠어요.”그녀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조용한 복도에서 메아리를 쳤다.재석은 오늘 기분이 아주 좋은 것 같았다. 그녀는 재석의 표정을 볼 수 없었지만, 그의 느긋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내가 집에 데려다 줘서? 아니면 밥을 사줘서?”“둘 다요. 나에게 밥을 사준 것에 감사할 뿐만 아니라, 나를 집에 데려다 준 것에 감사해요. 그리고 또 실험실을 나에게 빌려준 것에 더욱 감사하고요.” 그리고 방금 내가 바로 오미선 교수님의 학생이라고 밝혀줘서 고마워요.”7층에서 재석은 발걸음을 멈추었다.뒤돌아보니, 정은은 약간 숨을 헐떡이며 마지막 계단을 오른 후 한 걸음 한 걸음 자신의 앞으로 걸어와, 그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그럼... 고백하기 전까지, 혼자서 그렇게 많이 고민한 거예요?”“응.”“어쩐지...”정은이 아주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뭐라고?” 재석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이젠 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가요...”둘은 손을 꼭 잡고 복도로 향했다. 조용한 밤, 서로의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걷던 중, 재석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정은도 따라 멈춰 서며 돌아봤다.“왜요?”“정은아, 우리 지금... 사귀는 거 맞지?”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두 사람이 꼭 잡은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그렇게 생각 안 해요? 조금 전부터 내가 ‘재석 씨’라고 부른 거 못 느꼈어요?”“혹시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정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 지었다.“흠,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평소에도 꿈에서 날 자주 본 모양이네요?”재석의 몸이 순간 굳더니, 양 볼이 순식간에 빨개졌다.‘진짜 자주 꿨나 보다?’재석은 눈을 못 마주친 채, 그저 두 사람이 맞잡은 손만 바라보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진짜 좋아.”‘정은이도, 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구나.’‘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구나.’같은 계단, 같은 복도, 수없이 함께 걸어온 길. 그동안은 늘 친구라는 이름으로, 앞서거나 뒤따르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왔지만, 오늘은 처음으로, 손을 잡고 나란히 오르는 계단.정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근데, 왜 나랑 은혁 씨한테 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재석은 목소리를 낮추며, 살짝 눈을 피했다.“미안. 계산하러 나갔다가... 우연히 통화하는 거 들었거든.”정은의 눈이 살짝 커졌다.그리고 머릿속으로 자신이 통화 중 했던 말을 하나하나 되짚어봤다.‘공항에서 보자, 기대된다, Z시 출장... 뭐 이상한 말한 것도 없는데...?’그런데도 재석은 그걸 ‘여행 약속’으로 받아들였고, 그걸로 인해 혼자 삭이다가 결국 아래층에서 고백까지 해버린 거였다.“너희, Z시에 여행 간다고 했잖아.”
정은이 멍해 있는 사이, 재석이 한 걸음 다가섰다. 늘 부드럽고 점잖던 그가, 이 순간만큼은 전에 없던 강한 기운을 뿜어냈다. ‘이 남자... 이런 눈빛도 있었나?’정은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등이 벽에 닿는 순간, 재석은 어느새 바로 눈앞에 와 있었다.정은이도 이제야 제대로 실감이 났다. 재석이 자신보다 훨씬 크다는 걸. 그리고 지금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내려다보면, 자신이 마치 남자의 품 안에 갇힌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도.재석이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이제 좀 알겠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그때 네가 학업이 먼저라고 했을 때, 난 받아들였어.”“그런데 장은혁한텐 기회를 줬지. 정은아...”그가 고개를 더 숙이자,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목선에 닿았다. 순간, 정은의 팔에 소름이 쫙 돋았다. “너, 나한테 너무 불공평해.”그 마지막 한 마디는 묘하게 서글픈 기운이 섞여 있었다.정은은 입술을 달싹이며 뭔가 말하려 했지만, 재석은 그녀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알아, 내가 지금 어떤 입장인지. 묻고 따질 자격도 없고, 네가 누구를 좋아하든, 그건 네 자유라는 것도 알아.”“이 말 꺼냈다가, 우리 사이가 끝날 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근데... 계속 참다 보니까 알겠더라.”‘난... 그렇게까지 쿨한 사람이 아니었어.’“그래서 이제 참지 않기로 했어.”‘어떻게 되든, 그건 네가 정해.’그렇게 말한 재석은 고개를 숙인 채 멈췄다. 마치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처럼.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용한 밤공기 속에서, 정은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울렸다.“이제, 제가 말해도 될까요?”“응...”“재석 씨.”정은은 처음으로 재석을 그렇게 불렀다.“고개 들어요. 나 좀 봐요.”재석의 어깨가 순간 굳어졌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그는 이미, 거절당할 각오까지 끝냈다.그런데 눈이 마주친 순간, 정은의 두 눈 속에서 재석이 본 건... 눈물이 아닌, 웃음이었다.억지로 짓는
“헤어졌다고요?”정은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몰랐어?!”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진욱은 눈을 반짝이며 의자째로 다가오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본격적인 ‘TMI’를 털어놓기 시작했다.“M시 출장 갔다 오고 며칠 안 돼서, 재석이가 바로 짐 싸서 수아를 내보냈다니까?”정은은 그 말을 듣고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재석과 수아 사이에 어떤 감정선이 있었는지, 그동안 몇 번 스쳐 지나갔던 장면들이 퍼즐처럼 빠르게 떠올랐다.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눈빛 속엔 미묘한 기류가 스쳤다.“아마 진짜 많이 좋아했나 봐. 그러니까 정리할 때도 그만큼 아프고, 오래 걸리는 거겠지. 조금만 시간 지나면, 태민이도 정리될 거야.”진욱은 이어서 말했다.“네.”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대답했다.그 이후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남의 연애는, 들을 수는 있어도 깊게 얘기하지 말아야 해. 괜히 나서 봤자... 괜히 끼어든 꼴만 되니까.’...해가 지고, 붉은 노을이 건물 유리에 비치기 시작할 무렵. 정은은 마침내 작업을 끝냈다.진욱은 기다렸다는 듯 프로그램을 열고 기능 하나하나를 테스트했다.그리고 30초쯤 흐른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어어!! 복구됐어! 됐다! 돌아왔어! 다시 쓸 수 있어!!”미진도 덩달아 벌떡 일어나 양손을 번쩍 들었다.“살았다, 진짜!! 여태 손으로 데이터 입력한 거 생각하면... 이건 거의 기적이야!”진욱은 시계를 힐끗 보더니, 정은을 향해 말했다.“지금 이 시간까지 남아서 도와준 우리 정은이, 완전 수고 많았어! 조 교수...”“응...?”갑작스레 이름이 불리자, 재석은 몇 초간 멈칫하다가 고개를 돌렸다.진욱은 능청스럽게 말했다.“아니, 정은이가 이렇게 큰일 해줬는데, 감사 표시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적어도 밥 한 끼는 사야지.”“맞아요, 맞아요. 조 교수님, 이건 진짜 밥으로도 모자라요.” 미진이 곧장 거들었다.재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략 1년 전, 정은은 한동안 재석의 실험실을 빌려 쓴 적이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전진욱, 조미진 등과 인연이 닿았다.처음엔 서로 어색하고 낯설었지만, 몇 달이 지나면서 조금씩 가까워졌고, 지금은 가볍게 농담도 주고받을 만큼 편해졌다.그러던 어느 날, 진욱은 우연히 정은이 실험 데이터를 처리하는 속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 너무 빠른 게 아닌가 싶어서 슬쩍 물어봤더니, 정은은 코딩도 할 줄 아는 공대 만능 캐릭터였다. 그녀는 직접 짠 프로그램으로 데이터를 자동 정리하고, 다차원 분류와 정렬까지 가능하다고 했다.“와, 뭐야... 완전 반칙인데?”진욱은 결국 정은에게 부탁해 실험실 맞춤형 프로그램 하나를 따로 제작해달라고 했고, 그 이후, 데이터 정리는 그야말로 신세계를 맞이했다. 진욱은 쓸 때마다 감탄하며 말했다.“진짜... 정은이 덕분이야. 이게 사람을 살리네.”하지만 어제 그 기특한 프로그램이 갑자기 먹통이 됐다. 손태민이 고쳐보겠다고 덤볐지만, 결과는... 풍비박산이었다. ‘이젠 누가 손댔다간 진짜 박살 나겠어...’ 결국 정은에게 SOS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재석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오늘 시간 돼? 안 되면, 며칠 뒤도 괜찮고...]진욱은 훨씬 급했다. 말 그대로 살려달라는 마음이었다.[야, 오늘 안 데려오면... 나 여기서 바로 싸버린다! 진짜라고, 어?!]그는 어제 약 먹고 좀 괜찮아진 줄 알았건만, 밤새 배가 또 난리였다. 오늘 아침부터 실험실 화장실은 진욱의 전용이 되었다. 오전에만 6회 방문.그 말은, 그냥 협박 아니었다. 진짜 실현 가능성이 있었으니 말이다.정은은 상황을 듣고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시간 돼요. 지금 바로 갈게요.”[그래. 그럼 내가 정문 앞으로 갈게.]‘굳이 마중까진 필요 없는데...’ 뚝-정은이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 ...10분 뒤, 정은은 학교 정문 앞에서 재석과 마주쳤다. 두 사람은 실험실로 걸어가며 프로그램
“언니, 이건 굳이 우리 의견 물을 필요도 없지 않아요? 언니가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가는 거죠. 저희한텐 뭐든 시키기만 하세요. 무조건 따라갈게요!”민지가 단호하게 말하자, 서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맞아요, 저흰 누나 믿고 가는 거예요. 결정은 누나가 해요.”정은은 그 말에 잠시 멍해졌다가,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너희들... 나 그렇게 믿어도 돼? 나도 가끔 실수하거든?”민지는 마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정은 언니가 실수했다면, 그건 100% 저랑 서준 오빠가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뜻이에요.”“그건 좀 과장이지만...”‘그래도... 이런 믿음을 받는다는 게 참 따뜻하네.’세 사람은 그렇게 식사를 마쳤다.계산은 서준이 맡았고, 정은과 민지는 먼저 주차장으로 향했다. “언니, 먼저 가요. 전 서준이 데리러 갈게요.”“응? 굳이?”“우리 집이랑 방향이 같잖아요. 서준이는 차도 없으니까, 그냥 태워다 주는 거죠, 헤헤.”“그래, 알겠어. 그럼 조심히 가. 운전 천천히 하고.”“네. 언니도 잘 들어가요!”...두 ‘파트너’와 방향을 맞춘 정은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자료 조사부터 시작해 ‘신소재 최적화 계획안’을 정리하고, 모든 내용이 빠짐없이 정리됐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확인했다.벌써 밤 10시. 정은은 핸드폰을 들고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냈다.[장은혁 씨, 시간 돼요? 상의드릴 게 하나 있어요.]그 시각, 은혁은 거실 소파에 앉아 어머니인 황희숙 여사의 ‘진실 공방’에 시달리고 있었다.“너 외할아버지한테 전화 왔어. 오늘 도시락 들고 회사 갔다며? 근데 그냥 말도 없이 두고 사라졌다고 난리야. 게다가 누가 너랑 어떤 여자가 같이 있는 걸 병원 약국에서 봤다던데? 솔직히 말해봐. 너, 여자 친구 생겼지?”은혁은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아니 외할아버지는 왜 또 엄마한테 바로 전화해요? 진짜 너무하신다니까요...”“이 자식 봐라, 말버릇 좀
진욱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렇게 마음이 있는 거면, 왜 정은이한테 솔직하게 말 안 해?”“겁나는 거지, 재석아? 말 꺼냈다가 거절이라도 당하면... 그땐 친구로도 남을 수 없을까 봐, 무서운 거잖아.”진욱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재석을 똑바로 바라봤다.“그건 너답지 않아. 내가 아는 재석이는, 망설이지 않고 결정하는 사람이었어. 결과가 불확실하다고 물러서는 사람 아니었잖아.”“정은이가 ‘지금은 연애 생각 없다’고 했지? 중요한 건 ‘지금은’이라는 거야. 사람 마음은 바뀌는 거고, 그때 거절했다고 지금도 똑같을 거란 보장은 없어. 알겠냐?”재석은 말없이 진욱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 말이 생각보다 깊게 박혔다. ‘지금도 똑같을까? 아니, 혹시... 지금은 조금 다를 수도 있는 걸까...’진욱은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야, 진심으로 말하는 건데, 너 계속 질질 끌면, 정은이 뺏긴다. 그리고 뺏기고 나서 울어봤자, 소용없을 거야.”“우리 정은이 인기 많은 거 너도 알잖아. 예전에도 정은이 두고 싸운 애들 있었잖아. 그리고 오늘 그 남자 봤지? 얼굴 잘생겼지, 젊지, 에너지 넘치지, 옷차림 보니까 집도 잘 사는 거 같던데?”재석은 이런 말을 아주 듣기 싫었다.“닥쳐.”진욱도 더 이상 말하기 싫었다. “칫. 드디어 위기감이 좀 드나?”‘그래, 긴장 좀 해라. 맨날 냉정한 척만 하지 말고... 이번엔 너도 좀 불안해져 봐야지.’...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집에 바래다준 뒤, 약을 가정부에게 전달하며, 복용 방법까지 하나하나 직접 설명했다. 봉수진은 저녁까지 먹고 가라며 붙잡았지만, 정은은 이미 서준, 민지와의 약속이 있었다.“외할머니, 며칠 안에 다시 올게요. 오늘은 친구들이랑 약속이 있어서요.”“그래그래, 알았어. 젊을 땐 많이 만나고 다녀야지.”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숙였고, 곧 차에 올랐다.약속 장소인 레스토랑에 도착했을 땐, 서준과 민지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테이블 위에
은혁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그러게요... 나야 뭐, 그랬으면 좋겠지만...”하지만 정은의 태도는 그리 확신을 줄 만큼의 호감은 아니었다.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분명히 좋아한다는 표시도 없는 애매한 선이 보이는 듯했다.‘그래서 더 미치겠어. 기대도 못 하고,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고... 이러니까 계속 마음이 붕 떠 있잖아...’그렇게 속으로 앓고 있었지만, 정은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봉수진의 약에 모든 관심을 쏟고 있었다.VIP 약국답게, 일 처리는 정말 빨랐다. 정성스럽게 달인 약이 곧바로 팩 단위로 나뉘어 밀봉되었고, 음용 방법까지 깔끔하게 안내되었다.냉장 보관 후, 따뜻한 물에 데워 마시면 된다는 안내였는데, 이 정도면 환자도 거부감 없이 약을 먹을 수 있을 것이었다. 약을 다 받은 후, 약 한 시간쯤 지나 두 사람은 병원을 나섰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은의 전화가 울렸다.“여보세요? 외할머니? 네, 약 다 받아놨어요.”“병원에서 달여줬어요. 네, 거기 계세요. 지금 바로 갈게요.”전화를 끊은 정은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은혁을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오늘 고마웠어요. 외할머니 모시러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아, 어... 그래요! 잘 가요!”은혁은 여자의 뒷모습이 멀어질 때까지 멍하니 서 있었다.심지어 여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후에도 한참을 그렇게 바라본 후에야 아쉬움 가득한 시선을 거두었다.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고, 화면엔 ‘황기' 두 글자가 떴다.“여보세요?”[야 이놈아! 도시락 던져놓고 도망가듯 나가버리면 어떡해?! 말도 못 붙였잖아! 뭐가 그렇게 급해? 뭐가 외할아버지보다 중요한 거냐고?!]“죄송해요... 헤헤.”황기는 순간 당황했다. ‘얘 지금 뭐야? 미쳤어? 웃음은 왜 이렇게 정직하게 새어 나오는 건데...?’...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태우고 병원을 나서는 중이었다. 바로 그때, 재석은 약을 수령하고 외래 진료실 앞 벤치에 앉아 있었다.
정은도 여기서 재석을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선배님, 병원엔 무슨 일로 오셨어요?”재석은 그제야 시선을 거둬들였다. 눈길이 정은에게 닿는 순간, 표정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난...”“날 데려다주러 온 거야.” 그 순간, 전진욱이 배를 감싸 쥐며 천천히 다가왔고, 재석 대신 대답을 건넸다.정은은 진욱을 바라보다가 눈이 살짝 커졌다. “교수님, 어디 아프세요?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요.”“하... 뭘 잘못 먹었는지, 아침부터 배탈이 나서... 약도 안 듣고... 이 사람이 막 끌고 오더라니까... 검사라도 받아보라고.”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하셨어요. 괜히 방치하다가 더 심해질 수도 있잖아요. 미리 체크하면 마음도 편하고요.”“어우, 너희 둘 미리 맞췄냐? 말이 어쩜 그렇게 똑같냐?” 진욱이 짐짓 장난스러운 말투로 투덜댔다.정은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재석을 바라봤다. “그랬어요?”재석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눈빛 속 어딘가 알 수 없는 감정이 일렁였다. ‘저 말투, 저 표정... 나만 아는 게 아닐 텐데...’“정은 씨, 이제 가야죠.” 그때, 은혁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아, 네.” 정은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희 먼저 갈게요.”그렇게 말한 후, 은혁과 나란히 병원 복도를 걸어 나갔다.재석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두 사람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눈빛 속 감정은 복잡하고도 묘했다. ‘뭔데, 저 둘은 저렇게 자연스러워...’“재석아? 야, 재석아!”진욱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재석은 고개를 돌렸지만, 눈빛 속 싸늘함은 여전했다. 진욱은 그 눈빛에 소름이 돋아 어깨를 움찔거렸다.“너... 왜 그래?”“방금 정은이가 ‘저희’라고 했어.”“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재석을 바라봤다. 몇 초간 멍하던 그는 그제야 이해가 된 듯 말했다. “아... 그 ‘저희’? 그게 뭐 어때서? 같이 왔으니까 ‘저희’지. 그럼
얼마 지나지 않아 황 원장은 처방전을 프린트해서 정은에게 건넸다.“수고 많으셨습니다, 원장님.”정은이 공손히 인사하자 황 원장은 손을 휘저었다.“아이구, 무슨... 이 아가씨는 인사도 참 반듯하게 잘하네요. 말도 예쁘게 하고, 얼굴도 예쁘고. 이런 손녀가 있으면, 어디 내놔도 자랑이겠네요.”봉수진은 바로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럼요. 우리 손녀는 어디 하나 빠지는 데가 없어요.”황 원장은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장난스럽게 물었다.“이렇게 예쁜 아가씨한테 남자 친구가 없을 리 없는데? 그렇죠?”봉수진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없어요! 보통 남자애들은 우리 정은이랑 안 어울려요.”“허허, 그래도 우리 손자 정도면 꽤 괜찮은데...?”황 원장이 살짝 떠보자 봉수진은 손사래를 쳤다.“아이구, 그 얘긴 그만해요. 정은이 아직은 시집 안 보낼 거예요. 지금이 제일 곁에 두기 좋을 때라니까요.”‘아이고, 또 시작이다...’정은은 속으로 헛웃음 치며 처방전을 가방에 쏙 넣고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났다.“저, 약 지으러 먼저 다녀올게요!”...진료실 문을 나서는 순간, 정은은 누군가와 부딪혔다.“아, 죄송해요!”고개를 돌려 상대방을 본 순간 정은의 걸음이 멈췄다.“은혁 씨?”은혁은 보온 도시락 통을 들고 서 있었다.“정은 씨! 또 보네요. 우리 진짜 인연인가 봐요? 하하...”“여긴... 병원인데? 누가 입원하셨어요?”정은이 도시락을 보며 물었다.“아, 아니에요. 저 입원실 온 거 아니고요! 외할아버지가 이 병원 의사세요. 오늘 외래 당번이라 저희 어머니가 직접 도시락을 싸주셨는데, 제가 대신 가져다드리러 온 거예요.”“혹시 외할아버지 성함이 황 씨?”“네! 황기 원장님이세요. 한약재 이름에서 따오셨대요, 혹시... 아는 분이세요?”‘어머나, 진짜 인연인가?’정은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오늘 저희 외할머니 진료도 황 원장님한테 받은 거예요.”“정말요? 세상에... 진짜 대박. 어쩐지 자꾸 마주치네요.”은혁은 정은 손에 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