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석은 수업이 끝나자마자 바로 달려왔기에 손에 교과서를 들고 있었다.미진이 대답했다.“방금 태민과 정은이 속산 시합을 했는데, 진 사람이 저녁을 쏜다고 했거든요. 그래서 저녁에 무엇을 먹을지에 대해 토론하고 있었어요.”재석은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정은은 눈웃음을 머금고 있었고,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마치 모든 간극이 사라진 것처럼. 정은은 이미 진정으로 그들과 친구가 된 것 같았다.재석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그래, 그럼 모두들 오늘 일찍 퇴근하고, 태민이 밥 사기를 기다리자.”“네?” 미진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교수님, 저 아직 진 사람이 누군지 말하지 않았는데, 왜 태민에게 한턱 내라고 하시는 거예요?”“태민이 진 거 아니야?”“맞아요...”이 순간, 태민은 엄청난 상처를 받았다!“수아야, 넌?” 미진은 담담하게 물었다.“전 갈 시간 없어요.”...결국 그들은 포장마차에서 먹기로 정했다.비록 미진은 태민에게 제대로 한 끼 사야 한다면서 크게 떠들어댔지만, 레스토랑을 선택할 때 오히려 태민의 사정을 고려했다.태민은 가정 형편이 그리 좋지 않았다. 부모님은 모두 시골 사람이었고, 집의 모든 돈을 다 써서야 그는 박사 과정을 순조롭게 마칠 수 있었다.최근에 실험팀에 가입한 후, 태민도 돈을 조금 벌 수 있었지만, 매달 부모님에게 돈을 부쳐야 했기에 사정이 그리 넉넉하지 않았다.포장마차는 비싸지 않고 또 맛이 좋았기에 가장 좋은 선택이었다.비록 지난번에 재석이 선택한 레스토랑만큼 고급스럽지는 않지만, 분위기가 떠들썩해서 모두들 배불리 먹었다.돌아가는 길에 재석은 앞을 바라보며 능숙하게 운전을 하고 있었고, 정은은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그는 눈빛을 살짝 돌리면 보석처럼 반짝이는 여자아이의 눈빛을 볼 수 있었는데, 흥분의 기색이 역력했다.재석은 웃음을 금치 못했다.“그렇게 기뻐?”“네, 그럼요. 방금 미진 언니가 먼저 나에게 내일 보자고 인사하신 거 있죠? 전 교수님도 자신이 가장 아끼던 속산 노트를 나에게
처음에는 정상이었지만, 두 볼에 홍조가 나타나더니 점차 붉어졌고, 지금은 귀까지 빨개졌다.10초도 안 되는 사이에 재석의 얼굴에 이런 변화가 생기자, 정은은 정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차 안이 너무 답답해서 그런가 봐.”정은은 재빨리 자신의 차창을 내렸다.“이제 좀 괜찮아요?”“응.”...재석은 정은을 데려다준 다음, 최근에 시작한 실험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았단 것을 떠올리며 다시 실험실로 돌아갔다.정은은 소파에 누웠다. 실험실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다는 기쁨이 지나간 후, 그녀는 온몸이 나른해져 소파에서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그리고 눈을 감으면 머릿속에서 차 안의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모든 장면이 유난히 선명하게 나타났다. 재석의 뼈마디가 분명한 손이 자신의 머리 위에 떨어졌을 때, 그 부드러운 힘은 정은으로 하여금 자신이 누군가의 보호를 받고 응원을 받고 있다는 착각이 들게 했다...‘착각이 아닐 수도 있겠지? 선배님은 정말 날 응원하고 있어. 하지만... 그뿐이야.’정은은 소파에 누워 있었기에 눈을 살짝 뜨면 바로 천장이 보였다.전의 세입자는 이곳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었다. 주방 연기에 그을려 누렇게 변한 흔적도 있었고, 진흙이 튄 흔적도 있었다.정은은 청소를 했지만, 벽지를 붙이든 조명기구로 가리든 그 더러운 흔적들은 여전히 존재하며 지울 수가 없었다.언뜻 보기에는 쉽게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서 자세히 관찰하거나, 불빛을 밝게 켜면 모든 추악함이 드러날 것이다.남에게 형편없는 자신을 들켜 미움받기보다는 처음부터 거리를 두는 것이 낫다.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 않으면 자신의 결점도 잘 보이지 않을 것이다.이 점을 깨닫자, 정은은 숨을 내쉬며 자신의 가슴을 만졌다.‘그래, 이제 심장도 두근거리지 않아. 정상으로 돌아왔어.’그녀는 일어나서 욕실로 걸어갔다.‘일단 샤워하고 푹 자자. 무슨 일 있으면 내일 다시 이야기하자고! 내일 말하고 싶지 않으면 모레가 있잖아. 모레, 글피, 그렇게 하루하루 미루면서 날
말을 마치자, 수민이 계속 물어볼까 봐 두려운 듯 정은은 얼른 화제를 돌렸다.“아, 배고프다. 레스토랑 예약했죠? 얼른 밥 먹으러 가자.”도심에 샤브샤브 맛집이 하나 있는데, 인기가 많아서 주말에 항상 줄을 엄청 섰다. 수민은 2주전에 미리 예약해서 다행히 대기 필요없다.샤브샤브 가게 근처에 바로 고기 파는 시장이다. 모두 시장에서 직접 재고해 온 것으로, 원재료가 너무 신선하고 깨끗하다.평소에 매운 것 즐겨먹었던 정은은 가끔 담백한 샤브샤브를 먹으니 꽤 맛있다고 생각했다.특히 이 가게의 국물은 소뼈로 끓여냈다. 보글보글 끓기 시작하자, 고기를 넣지 않아도 향기가 퍼졌다.수민은 앉자마자 메뉴를 가져왔다.“이거, 이거, 그리고 이거... 각각 2인분씩 주세요.”그녀는 이번 주에 야근을 하느라 살이 많이 빠졌다. 모처럼 나와서 긴장을 푸는 것이니 당연히 제대로 먹어줘야 했다.‘살이 쪄도 괜찮아. 운동으로 살을 뺄 수 있지만, 절대로 굶을 순 없어!’정은은 한 상 가득 올라온 고기와 야채를 보고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이거 다 먹을 수 있을까?”‘두 사람이 이렇게 많이 시키다니. 낭비가 아닐까?’수민은 눈썹을 치켜세우다 무언가를 떠올렸다.“너한테 말하는 걸 깜박했네. 방금 큰어머니가 나더러 우리 오빠에게 전화를 하라고 했어. 이번 주에 집에 돌아오라고 말이야. 방금 전화할 때, 오빠는 마침 쉬고 있다고 했고, 나도 오빠를 이곳으로 불렀어. 에헴... 정은아, 내가 제멋대로 결정했다고 날 탓하는 거 아니지?”정은은 국물을 마시다가 이 갑작스러운 소식에 기침을 하더니 사레가 들릴 뻔했다.수민은 정은의 반응이 이렇게 큰 것을 보고 약간 영문을 몰랐다.“너는 우리 오빠는 친하지 않은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놀라는 거지?”‘두 사람은 이웃인 데다가, 지금은 또 같은 실험실에서 과제를 하고 있으니 매일 붙어 다니는 거랑 다름이 없잖아? 그럼 사이가 엄청 친할 텐데.’그리고 수민이 재석을 부르는 것도 다른 이유가 있었다. 정은이 있는 기회
재석도 차를 몰고 왔고, 두 사람은 또 같은 층에서 지내고 있었기에 정은은 그와 함께 돌아갔다.낡은 아파트 단지에는 차고가 없어서, 재석은 맞은편 백화점에 가서 차를 세운 다음 다시 아파트로 걸어와야 했다.두 사람이 백양나무 숲을 지날 때, 세찬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버들개지가 하늘에서 하늘하늘 춤을 추니 마치 흩어진 하얀 눈송이와 같았다.“에취.”정은은 저도 모르게 재채기를 했다.“미안해요, 난... 에취.”연이어 재채기를 하자, 재석은 정은에게 알레르기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재빨리 주머니에서 휴지를 꺼내더니 그녀에게 건네주었다.“먼저 코를 가리고 숨을 너무 크게 쉬지 마.”재석이 시킨대로 하자, 정은도 재채기를 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발걸음을 재촉하며 집으로 돌아갔다.문 앞에서 작별인사를 한 후, 정은은 재빨리 문을 닫고 몸을 돌려 재채기를 여덟 번이나 했다.겨우 멈췄지만 코가 새빨개졌다.J시는 뭐든 다 좋았지만, 매년 떠도는 버들개지 때문에 정은은 정말 죽을 지경이었다. 이곳에서 7, 8년 넘게 지냈어도 그녀는 여전히 습관이 되지 않았다.10분 뒤, 정은은 뜨거운 물 한 잔을 들이켜고 나서야 좀 편안해졌다.그녀는 냉장고를 열고 식재료를 꺼내며 내일 실험실로 가져갈 점심을 준비하기 시작했다.음식을 다 포장한 다음 주방을 정리하니 벌써 11시가 다 되었다.정은은 쓰레기통을 바라보았다. 안에는 계란 껍데기와 썩은 채소가 있었기에 그녀는 한숨을 쉬며 아래층으로 내려가 쓰레기를 버렸다.돌아오는 길, 미처 계단에 들어서지도 않았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응, 선우야, 무슨 일 있어?”[정은 누나, 조심해요! 지금 도겸 형이 누나 집으로 찾아갔는데, 저도 막을 수가 없었어요! 형 오늘 술을 좀 많이 마셨으니 누나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정은은 경계하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대답하기도 전에 한 검은 그림자가 갑자기 튀어나왔다.“아...”“정은아...”남자는 온몸에 술 냄새를 풍기며, 취한 얼굴이 벌겋게
도겸은 손을 거두어들이며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안절부절못했다.“미안해, 정은아. 나, 난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 나,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난 단지 네가 내 곁에서 멀리 도망치는 걸 원하지 않았을 뿐이야...”“내 몸에 손 대지 마!” 정은은 머리를 안으며 아파서 눈물까지 흘리기 직전이었다.이때, 선우가 마침내 도착했다. 현빈도 그와 함께 찾아왔다.“괜찮아?” 현빈은 도겸을 넘어 정은의 곁으로 걸어갔다. 그의 말투는 무척 다급했다.선우의 전화를 받았을 때, 현빈은 마침 비즈니스 연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이변이 없는 한, 그는 오늘 저녁 60억에 달하는 계약을 체결할 수 있었다.그러나 정은에게 무슨 일 생길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고, 현빈은 직접 손님을 내팽개치며 자리를 떠났다.그렇게 미친 듯이 액셀을 밟으며 10분 만에 달려온 그는 마침 골목 어귀에서 선우를 만났다.두 사람은 눈을 마주치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정은의 집으로 곧장 달려갔다.아니나 다를까, 도겸은 술주정을 부리고 있었다.정은은 도겸의 접근을 원하지 않았지만, 동시에 현빈의 호의를 거절했다.뒤로 물러서자 남자에게서 나는 그 독특한 향기가 좀 옅어졌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이제 괜찮아요.”현빈은 정은의 어지러운 머리카락에 시선을 돌렸다. ‘두피가 빨개졌는데도 능청스럽게 괜찮다고 말하다니.’그는 마음이 아팠다.“넌 여자야, 그렇게 강인한 척할 필요가 없단 말이야!”정은이 대답하기도 전에, 도겸이 먼저 소리를 질렀다.“심현빈, 네가 무슨 자격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거지?!”“내 입이 나한테 달렸으니, 나도 마음대로 말할 수 있는 거 아니야? 네가 뭘 어쩔 건데?”도겸은 펄쩍펄쩍 날뛰고 있었지만, 그에 비해 현빈은 무척 평온했다. 그러나 현빈의 눈빛은 어둡고 무서웠다.도겸은 차갑게 선우를 바라보았다.“이런 자식을 불렀다니, 이게 무슨 뜻이야? 날 무시하는 거야? 아니면 이 자식이 내 앞에서 내 여자를 꼬시는 것을 지켜보라는 거야?
도겸은 몸이 비틀거렸다.“그게 무슨 뜻이야?”“내 말을 정말 모르는 거야? 하긴, 넌 네가 엄청 잘 숨겼다고 생각하겠지. 그러나 정은 씨는 바보가 아니잖아.”도겸은 오히려 그 말을 왜곡했다. 그는 현빈의 옷깃을 잡더니 눈빛이 매서웠다.“너 도대체 정은에게 무슨 말을 한 거야?!”“허, 넌 아직도 너희들이 헤어진 이유를 모르는 것 같군.”“네가 다 아는 것처럼 말하지 마!”“나야 당연히 알지...”“닥쳐!”현빈은 도겸을 뿌리치더니 자신의 옷깃을 정리했다. 그리고 차갑게 도겸을 바라보았다.“지금 네 꼴 좀 봐라, 집이 없는 개와 다름이 없잖아...”이때 선우가 소리를 쳤다.“그만 좀 하세요! 형들 말 좀 작작 하면 죽는 거예요?! 친구들끼리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 거냐고요?”도겸과 현빈은 동시에 말했다.“누가 이 자식과 친구라는 거야?!”“난 이런 친구 없어.”선우는 말문이 막혔다.도겸은 현빈을 가리키며 경고했다.“정은에게서 떨어져. 그렇지 않으면...”“그렇지 않으면 어쩔 건데?”“나도 내가 무슨 짓 할지 몰라!”현빈이 말했다.“여기서 나한테 독설을 퍼부어도 소용없어. 내가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이 정은 씨에게 고백을 할 거야. 하지만 영원히 변하지 않는 사실은 바로--”그는 또박또박 말했다.“네가 이미 정은 씨를 잃게 되었다는 거지! 돌이킬 수도 없고, 만회할 수도 없어. 만약 정은 씨의 혐오를 더 사고 싶지 않다면, 자각 좀 해. 더 이상 매달리지 말고. 그렇지 않으면 정은 씨를 점점 더 멀리 밀어낼 뿐이야.”현빈은 말을 마치고 도겸을 넘어 선우의 어깨를 두드렸다.“네가 수고 좀 해. 다시는 술주정 부리지 못하게 잘 지켜보고.”말을 마치며 현빈은 성큼성큼 떠났다.선우는 제자리에 서서 넋을 잃은 도겸을 바라보더니 마음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이럴 줄 알았더라면 애당초 왜 정은 누나를 그렇게 대한 거야?’“선우야...”“도겸 형.” 선우는 얼른 앞으로 가서 도겸을 붙잡았다.“우리 그만 돌아갈까요?
도겸은 들은 체 만 체했다.계단에 도착할 때, 선우는 그제야 쫓아오더니 도겸을 붙잡았다.“형, 그만 떠들고 이제 그만 돌아가요! 어차피 정은 누나도 문을 열어주지 않을 거예요...”“정은에게 줄 게 있어.”선우는 어리둥절해했다.“뭔데요?”도겸은 주머니에서 알레르기를 치료하는 비염 연고 한 통을 꺼냈다.“요즘 알레르기 때문에 재채기를 할 거야. 이걸 정은에게 가져다줘야지...”그 순간, 선우는 갑자기 코끝이 찡했다.‘그렇게 사랑했던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그래.”도겸은 고개를 끄덕였다.“난 정은에게 약을 주러 왔어... 이것만큼은 꼭 정은에게 줘야 해... 꼭...”말하면서 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도겸은 눈앞이 어두워지며 몸도 나른해졌다.선우는 얼른 그를 부축하며 차로 끌고 갔다. 그러나 골목 어귀에 주차된 SUV를 바라보며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별장에 도착할 때, 시간은 이미 새벽 1시였다.가정부가 문을 열자, 선우는 얼른 말했다.“좀 부축해줘요! 형은 술에 취했으니까 이따가 해장국 좀 만들어 주세요...”부탁하고 나서야 선우는 차를 몰고 떠났다.연희는 이미 침대에 누웠다. 한창 자고 있을 때, 갑자기 아래층에서 소리가 들려왔다.일어나기 싫었지만 도겸을 위해, 재벌 집안으로 시집가기 위해 연희는 졸음을 참으며 외투를 걸치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가서 물 좀 따라줘요. 내가 오빠 부축할 테니까.”연희는 앞으로 다가가더니 도겸을 부착하려 했다.“하지만 작은 사모님, 지금 몸이 불편하시잖아요...”가정부는 임신한 연희에게 무슨 일 생길까 봐 걱정했다.성인 남자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연희는 짜증을 내며 손을 흔들었다.“내 몸은 내가 잘 알고 있으니까, 이모님은 그냥 내가 시키는 대로 해요.”“그럼 알겠어요.” 왕미자는 이 말을 잘 듣고 도겸을 그녀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연희는 도겸을 부축하자마자 하마터면 바닥에 쓰러질 뻔했다.남자는 인사불성이 되도록 취해서 지금 모든 무게가 그녀에게 떨어졌다.“잠, 잠
‘정은아... 너무 보고 싶어... 제발 내 곁으로 돌아와, 응?’도겸에게 대답하는 것은 어두컴컴한 거실과 창밖의 휘몰아치는 차가운 바람뿐이었다....이튿날 정은은 아침 일찍 깨어났다. 세수하고 밥을 한 다음, 실험실로 갈 준비를 했다.문을 닫을 때, 그녀는 문 손잡이에 종이봉투가 걸려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그 안에는 알레르기를 치료하는 비염 연고가 들어 있었다.게다가 그녀가 자주 쓰는 그 브랜드였다.정은은 사방을 둘러보았다.‘누가 보낸 거지?’이때 정은의 눈빛은 맞은편 문에 떨어졌다. 그녀는 연고를 보더니 또 종이봉투를 자세히 살펴보았다.문을 두드리며 재석에게 물어보려던 참에 문이 갑자기 열렸다.재석은 엄숙한 표정으로 걸어 나왔고, 정은을 보자 얼른 발걸음을 멈추었다.정은은 남자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차리며 물었다.“무슨 일이에요?”재석은 정색했다.“일단 실험실에 가자. 걸으면서 얘기해.”“네.” 정은은 자신도 모르게 긴장해지기 시작했고, 연고에 관해 물어보는 것도 잊어버렸다.도중에 재석은 전화 한 통을 받았다.저쪽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 그는 안색이 변하더니 말투도 약간 무거워졌다.“응, 알았어. 지금 가고 있으니까 곧 도착할 거야.”전화를 끊자, 재석은 정은이 묻기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말했다.“실험실의 컴퓨터에 갑자기 문제가 생겨서 이번 주의 실험 데이터가 전부 사라졌어. 아직 회복되지 않았지만 최악의 경우...”재석은 잠시 멈추었다.“모든 데이터가 분실되면서 실험을 다시 해야 할지도 몰라.”정은은 눈살을 찌푸렸다.“실험실의 데이터는 모두 백업되지 않았나요?”“컴퓨터는 잠시 꺼졌을 뿐인데, 다시 켜보니 백업한 데이터도 30% 정도밖에 안 남았어.”데이터가 유출되지 않도록, 또 컴퓨터를 끊김 없이 사용하기 위해, 그들은 매달 실험실의 데이터를 정리해야 했다.지난 월요일은 마침 월말이어서 방금 데이터를 정리했다.이치대로라면 컴퓨터에 일반적으로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을 대비해
정은은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 안전벨트를 매고 창밖을 슬쩍 바라봤다. 공장은 호텔에서 10km 떨어진 개발지구에 자리 잡고 있었다.은혁이 운전대를 잡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 구역은 첨단 기술 산업 클러스터로 지정돼 있어서, 기술 협력 프로젝트도 대부분 그쪽으로 집중되고 있어요.” “정은 씨가 찾는 그 새로운 감온 정확도 소재는 우리랑 CG그룹이 공동 개발한 건데, 지금까지 1세대부터 3세대까지 세 가지 버전이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집중했고, 중간중간 전문적인 질문도 빠짐없이 던졌다. 은혁이 답할 수 있는 부분은 성의껏 설명했지만, 구체적인 수치나 실험 조건처럼 세세한한 부분은 바로 대답하기 어려운 것도 있었다.약 20분 후, 두 사람은 공장에 도착했다. 은혁이 미리 연락해 둔 덕분에, 정문 앞에는 담당자가 나와 있었다.정은은 안내받아 간단히 실험실과 공장을 둘러봤다. 연구 구역과 생산라인은 전혀 겹치지 않게 구획이 나뉘어 있었고, 현장도 전반적으로 정돈된 느낌이었다.정은이 요청한 소재의 1세대와 2세대는 이미 완제품으로 확보되어 있었지만, 3세대는 아직 실험 단계였기에 정식 생산은 되지 않았다. 따라서 실험실에서 직접 합성해야 했다.“시간은 얼마나 걸리죠?” 정은이 은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은혁은 옆에 있는 연구원을 바라봤다.“8시간 정도 걸릴 것 같아요. 내일 오전엔 제품 받아보실 수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관련 비용은 정산대로 처리해 주세요. 최종 결정되면 한 번에 입금할게요.”은혁은 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비용은 무슨 비용... 정은 씨, 우리 사이에 뭘 그렇게 딱딱하게 굴어요.”정은은 침착하게 말했다. “그럴수록 더 딱딱하게 해야죠. ‘친할수록 돈 문제는 분명하게.’ 이건 기본이에요. 더군다나, 우리 둘은 그냥 ‘친구’일 뿐인데, 은혁 씨가 도와주는 것만 해도 충분히 고마워요.”“게다가 실험실도 예산이 따로 있는 조직이고, 모든 비용
실험실에서 진욱은 오늘만 몇 번째인지 모르게 재석을 힐끔거렸다. 결국 참지 못하고 다가갔다. “재석아, 너 오늘 길 가다 돈 주웠냐?”실험대 앞에서 입꼬리를 내릴 줄 모르던 재석의 손이 잠깐 멈췄다. “데이터 정리는 다 됐어? 3차 실험 가능성 평가 보고서는 언제 낼 건데?”“하, 이 사람 분위기 다 깨네.” 진욱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근데 말이야, 오늘 아침에 네가 샌드위치 먹는 거 봤거든.”“그래서?”“정은이가 해준 거지? 다 알아. 너희 둘, 다시 잘 되는 거야? 그것도 아니면, 이제 미련 접은 거야?” 재석은 살짝 고민하다가, 이제는 말해도 되겠다 싶어 입을 열려고 했다.바로 그때, 핸드폰에서 톡 알림이 떴다. 정은이었다.[도착했어요. 샌드위치는 맛있었어요?]재석은 바로 답장했다.[맛있었어.]정은은 곧장 자신의 일정을 재석에게 알려줬다.[지금 호텔 체크인하고, 오후엔 공장 갈 거예요.][응, 알겠어.]1분 정도 지났지만, 그다음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 재석은 괜히 허전해졌다.‘예전에도 이렇게 대화했었는데... 왜 지금은 이걸로는 부족하지?’정은과 더 오래 이야기하고 싶었다. 더 많은 말, 더 사적인 얘기, 더 가까운 거리. 그 마음은 마치, 가려운 곳을 손톱 끝으로 슬쩍 긁은 느낌. 절대 시원하지 않았다. 그냥 더 간지러워질 뿐.‘그냥, 정은이한테 세게 할퀴어지고 싶은데...’“누구랑 톡하냐?” 진욱이 슬쩍 핸드폰을 들여다보려 다가왔다.재석은 피할 틈도 없이 화면을 들킨 셈이 됐다. “뭘 감춰. 정은이랑 메시지 주고받는 거잖아. 왜? 뭐가 부끄럽다고.”“됐고.” 재석은 핸드폰을 집어넣고, 실험대에서 내려왔다. “오늘 점심은 내가 쏜다. 뭐 먹고 싶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몇 초 멈췄다. 옆에 있던 미진이랑 태민이 눈을 마주쳤다. “교수님,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갑자기 점심을요?”재석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먹고 싶은 거 생각나면 전 교수한테 말해.
비행기 이륙 직전, 은혁이 정은에게 제한했다. “정은 씨, 내 마일리지로 좌석 업그레이드해 줄게요.”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은혁의 얼굴에 아쉬움이 스쳤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로 돌아갔다. 잠시 후, 다시 다가와 말했다. “내가 정은 씨 옆자리로 바꿨어요.”비즈니스석에서 이코노미석으로 자리를 바꾸다니, 웬만한 사람이면 거절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은혁 씨,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돼요.” 정은은 단호한 어조였다.‘처음으로 이렇게까지 분명하게 말한 것 같아.’정은은 연애 한 번 안 해본 소녀가 아니었다. 은혁의 눈빛에 담긴 감정이 어떤 건지, 모를 리 없었다.하지만 그동안 굳이 선을 긋지 않은 건, 은혁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며, 오히려 몇 번이고 도와줬기 때문이었다. 이번 Z시 출장도 은혁의 도움 덕에 가능했던 일이었다.게다가 은혁이 고백도 안 했고, 정은이 불편할 정도로 다가온 것도 아니었으니까... 정은도 자신이 먼저 딱 잘라 말하는 게 오히려 예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그리고 그때의 정은은 솔로였고, 재석이 입을 열게 하기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의 자극은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정은은 이미 재석과의 관계를 정리했고, 은혁은 더 적극적으로 다가오고 있으니, 그녀도 이제 더 늦기 전에 확실히 은혁에게 말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래야 서로 상처받지 않을 테니 말이다.은혁은 정은의 말에 잠시 당황한 듯하다가, 이내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난 정은 씨 옆자리에 있는 게 좋아서 그래요.”정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즈니스석 티켓을 사 놓고 누구랑 자리를 바꾸든, 그건 상대방의 자유니까. 굳이 뭐라고 할 필요는 없지.’그 후, 정은은 노트북을 열고 일에 집중했다. 은혁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틈틈이 정은을 흘끗거렸다.그러다 손을 들어 승무원을 불렀다. “저기요. 잠깐만요.”“네, 손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결국 재석은 아쉬움 가득한 눈빛으로 정은의 손을 놓았다. 그러고는 조용히 열쇠를 건네받아 현관문을 열어주었다.“정은아, 잘 자.”그 한마디.‘정은아’라는 이름이 너무나 자연스럽고도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마치 수천 번은 불러본 것처럼.그 말에 정은은 순간 멍해졌다.‘왜 내 이름을 듣고도 가슴이 이렇게 설레지?’“네, 당신도 잘 쉬어요.”둘은 그렇게 짧은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문 안으로 들어갔다.그날 밤. 정은은 평소와 달랐다. 샤워를 마친 뒤 늘 하던 루틴, 논문 체크나 프로젝트 정리는 손도 대지 않았다.대신, 자기도 모르게 핸드폰을 들고 재석의 SNS를 열었다.‘뭐 하는 거야? 나...’그런데 이상하게, 자꾸만 궁금해졌다. ‘이 사람, 평소에 어떤 거 올리지?’재석은 SNS 설정 따위는 하지 않은 사람이었다.맨 아래까지 내리는 데 몇 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포스트 총수, 대략 서른 몇 개. 그중 90%는 논문, 연구, 산업 동향 공유.‘진짜 성실한 연구자 모드네...’그나마 정은과 관련 있는 건 얼마 전 실험실이 SCI 논문 게재됐을 때 서비대학교 공식 계정에서 축하 포스팅한 걸 공유한 것뿐이었다.[축하합니다.]짧고 건조한 멘트.그 밑엔 전진욱과 조미진이 ‘좋아요’를 눌러뒀다.‘이게 전부야?’그렇게 핸드폰을 내려놓으려던 순간, 알림이 하나 떴다. 재석이 새로운 글을 올렸다.정은은 무심코 눌러봤다. [r = a(1 - sinθ)]‘...어?’정은의 손가락이 멈췄다. 이 수식, 익숙했다. 너무 익숙해서 순간 심장이 멈칫했다.댓글 첫 줄엔 진욱이 있었다.[극좌표 함수? 밤에 안 자고 뭐 하세요? 조 교수님?]조미진과 손태민은 말없이 ‘좋아요’만 눌렀다. 하지만 두 사람은 속으로 ‘다음 연구 주제가 광학 쪽인가?’ 생각하며 혼란스러워했다.아무도 몰랐다. 이 수식의 진짜 의미를.‘r = a(1 - sinθ)’, 하트곡선.‘설마 이게, 그거? 진짜 그거... 맞아?’정은은 손끝을
“그럼... 고백하기 전까지, 혼자서 그렇게 많이 고민한 거예요?”“응.”“어쩐지...”정은이 아주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뭐라고?” 재석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이젠 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가요...”둘은 손을 꼭 잡고 복도로 향했다. 조용한 밤, 서로의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걷던 중, 재석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정은도 따라 멈춰 서며 돌아봤다.“왜요?”“정은아, 우리 지금... 사귀는 거 맞지?”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두 사람이 꼭 잡은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그렇게 생각 안 해요? 조금 전부터 내가 ‘재석 씨’라고 부른 거 못 느꼈어요?”“혹시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정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 지었다.“흠,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평소에도 꿈에서 날 자주 본 모양이네요?”재석의 몸이 순간 굳더니, 양 볼이 순식간에 빨개졌다.‘진짜 자주 꿨나 보다?’재석은 눈을 못 마주친 채, 그저 두 사람이 맞잡은 손만 바라보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진짜 좋아.”‘정은이도, 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구나.’‘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구나.’같은 계단, 같은 복도, 수없이 함께 걸어온 길. 그동안은 늘 친구라는 이름으로, 앞서거나 뒤따르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왔지만, 오늘은 처음으로, 손을 잡고 나란히 오르는 계단.정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근데, 왜 나랑 은혁 씨한테 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재석은 목소리를 낮추며, 살짝 눈을 피했다.“미안. 계산하러 나갔다가... 우연히 통화하는 거 들었거든.”정은의 눈이 살짝 커졌다.그리고 머릿속으로 자신이 통화 중 했던 말을 하나하나 되짚어봤다.‘공항에서 보자, 기대된다, Z시 출장... 뭐 이상한 말한 것도 없는데...?’그런데도 재석은 그걸 ‘여행 약속’으로 받아들였고, 그걸로 인해 혼자 삭이다가 결국 아래층에서 고백까지 해버린 거였다.“너희, Z시에 여행 간다고 했잖아.”
정은이 멍해 있는 사이, 재석이 한 걸음 다가섰다. 늘 부드럽고 점잖던 그가, 이 순간만큼은 전에 없던 강한 기운을 뿜어냈다. ‘이 남자... 이런 눈빛도 있었나?’정은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등이 벽에 닿는 순간, 재석은 어느새 바로 눈앞에 와 있었다.정은이도 이제야 제대로 실감이 났다. 재석이 자신보다 훨씬 크다는 걸. 그리고 지금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내려다보면, 자신이 마치 남자의 품 안에 갇힌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도.재석이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이제 좀 알겠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그때 네가 학업이 먼저라고 했을 때, 난 받아들였어.”“그런데 장은혁한텐 기회를 줬지. 정은아...”그가 고개를 더 숙이자,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목선에 닿았다. 순간, 정은의 팔에 소름이 쫙 돋았다. “너, 나한테 너무 불공평해.”그 마지막 한 마디는 묘하게 서글픈 기운이 섞여 있었다.정은은 입술을 달싹이며 뭔가 말하려 했지만, 재석은 그녀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알아, 내가 지금 어떤 입장인지. 묻고 따질 자격도 없고, 네가 누구를 좋아하든, 그건 네 자유라는 것도 알아.”“이 말 꺼냈다가, 우리 사이가 끝날 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근데... 계속 참다 보니까 알겠더라.”‘난... 그렇게까지 쿨한 사람이 아니었어.’“그래서 이제 참지 않기로 했어.”‘어떻게 되든, 그건 네가 정해.’그렇게 말한 재석은 고개를 숙인 채 멈췄다. 마치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처럼.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용한 밤공기 속에서, 정은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울렸다.“이제, 제가 말해도 될까요?”“응...”“재석 씨.”정은은 처음으로 재석을 그렇게 불렀다.“고개 들어요. 나 좀 봐요.”재석의 어깨가 순간 굳어졌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그는 이미, 거절당할 각오까지 끝냈다.그런데 눈이 마주친 순간, 정은의 두 눈 속에서 재석이 본 건... 눈물이 아닌, 웃음이었다.억지로 짓는
“헤어졌다고요?”정은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몰랐어?!”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진욱은 눈을 반짝이며 의자째로 다가오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본격적인 ‘TMI’를 털어놓기 시작했다.“M시 출장 갔다 오고 며칠 안 돼서, 재석이가 바로 짐 싸서 수아를 내보냈다니까?”정은은 그 말을 듣고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재석과 수아 사이에 어떤 감정선이 있었는지, 그동안 몇 번 스쳐 지나갔던 장면들이 퍼즐처럼 빠르게 떠올랐다.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눈빛 속엔 미묘한 기류가 스쳤다.“아마 진짜 많이 좋아했나 봐. 그러니까 정리할 때도 그만큼 아프고, 오래 걸리는 거겠지. 조금만 시간 지나면, 태민이도 정리될 거야.”진욱은 이어서 말했다.“네.”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대답했다.그 이후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남의 연애는, 들을 수는 있어도 깊게 얘기하지 말아야 해. 괜히 나서 봤자... 괜히 끼어든 꼴만 되니까.’...해가 지고, 붉은 노을이 건물 유리에 비치기 시작할 무렵. 정은은 마침내 작업을 끝냈다.진욱은 기다렸다는 듯 프로그램을 열고 기능 하나하나를 테스트했다.그리고 30초쯤 흐른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어어!! 복구됐어! 됐다! 돌아왔어! 다시 쓸 수 있어!!”미진도 덩달아 벌떡 일어나 양손을 번쩍 들었다.“살았다, 진짜!! 여태 손으로 데이터 입력한 거 생각하면... 이건 거의 기적이야!”진욱은 시계를 힐끗 보더니, 정은을 향해 말했다.“지금 이 시간까지 남아서 도와준 우리 정은이, 완전 수고 많았어! 조 교수...”“응...?”갑작스레 이름이 불리자, 재석은 몇 초간 멈칫하다가 고개를 돌렸다.진욱은 능청스럽게 말했다.“아니, 정은이가 이렇게 큰일 해줬는데, 감사 표시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적어도 밥 한 끼는 사야지.”“맞아요, 맞아요. 조 교수님, 이건 진짜 밥으로도 모자라요.” 미진이 곧장 거들었다.재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략 1년 전, 정은은 한동안 재석의 실험실을 빌려 쓴 적이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전진욱, 조미진 등과 인연이 닿았다.처음엔 서로 어색하고 낯설었지만, 몇 달이 지나면서 조금씩 가까워졌고, 지금은 가볍게 농담도 주고받을 만큼 편해졌다.그러던 어느 날, 진욱은 우연히 정은이 실험 데이터를 처리하는 속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 너무 빠른 게 아닌가 싶어서 슬쩍 물어봤더니, 정은은 코딩도 할 줄 아는 공대 만능 캐릭터였다. 그녀는 직접 짠 프로그램으로 데이터를 자동 정리하고, 다차원 분류와 정렬까지 가능하다고 했다.“와, 뭐야... 완전 반칙인데?”진욱은 결국 정은에게 부탁해 실험실 맞춤형 프로그램 하나를 따로 제작해달라고 했고, 그 이후, 데이터 정리는 그야말로 신세계를 맞이했다. 진욱은 쓸 때마다 감탄하며 말했다.“진짜... 정은이 덕분이야. 이게 사람을 살리네.”하지만 어제 그 기특한 프로그램이 갑자기 먹통이 됐다. 손태민이 고쳐보겠다고 덤볐지만, 결과는... 풍비박산이었다. ‘이젠 누가 손댔다간 진짜 박살 나겠어...’ 결국 정은에게 SOS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재석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오늘 시간 돼? 안 되면, 며칠 뒤도 괜찮고...]진욱은 훨씬 급했다. 말 그대로 살려달라는 마음이었다.[야, 오늘 안 데려오면... 나 여기서 바로 싸버린다! 진짜라고, 어?!]그는 어제 약 먹고 좀 괜찮아진 줄 알았건만, 밤새 배가 또 난리였다. 오늘 아침부터 실험실 화장실은 진욱의 전용이 되었다. 오전에만 6회 방문.그 말은, 그냥 협박 아니었다. 진짜 실현 가능성이 있었으니 말이다.정은은 상황을 듣고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시간 돼요. 지금 바로 갈게요.”[그래. 그럼 내가 정문 앞으로 갈게.]‘굳이 마중까진 필요 없는데...’ 뚝-정은이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 ...10분 뒤, 정은은 학교 정문 앞에서 재석과 마주쳤다. 두 사람은 실험실로 걸어가며 프로그램
“언니, 이건 굳이 우리 의견 물을 필요도 없지 않아요? 언니가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가는 거죠. 저희한텐 뭐든 시키기만 하세요. 무조건 따라갈게요!”민지가 단호하게 말하자, 서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맞아요, 저흰 누나 믿고 가는 거예요. 결정은 누나가 해요.”정은은 그 말에 잠시 멍해졌다가,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너희들... 나 그렇게 믿어도 돼? 나도 가끔 실수하거든?”민지는 마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정은 언니가 실수했다면, 그건 100% 저랑 서준 오빠가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뜻이에요.”“그건 좀 과장이지만...”‘그래도... 이런 믿음을 받는다는 게 참 따뜻하네.’세 사람은 그렇게 식사를 마쳤다.계산은 서준이 맡았고, 정은과 민지는 먼저 주차장으로 향했다. “언니, 먼저 가요. 전 서준이 데리러 갈게요.”“응? 굳이?”“우리 집이랑 방향이 같잖아요. 서준이는 차도 없으니까, 그냥 태워다 주는 거죠, 헤헤.”“그래, 알겠어. 그럼 조심히 가. 운전 천천히 하고.”“네. 언니도 잘 들어가요!”...두 ‘파트너’와 방향을 맞춘 정은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자료 조사부터 시작해 ‘신소재 최적화 계획안’을 정리하고, 모든 내용이 빠짐없이 정리됐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확인했다.벌써 밤 10시. 정은은 핸드폰을 들고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냈다.[장은혁 씨, 시간 돼요? 상의드릴 게 하나 있어요.]그 시각, 은혁은 거실 소파에 앉아 어머니인 황희숙 여사의 ‘진실 공방’에 시달리고 있었다.“너 외할아버지한테 전화 왔어. 오늘 도시락 들고 회사 갔다며? 근데 그냥 말도 없이 두고 사라졌다고 난리야. 게다가 누가 너랑 어떤 여자가 같이 있는 걸 병원 약국에서 봤다던데? 솔직히 말해봐. 너, 여자 친구 생겼지?”은혁은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아니 외할아버지는 왜 또 엄마한테 바로 전화해요? 진짜 너무하신다니까요...”“이 자식 봐라, 말버릇 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