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져!”“도겸 씨...”“꺼지라고, 내 말 못 들었어?!”연희는 입술을 깨물며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그러나 남자는 그런 연희를 조금도 봐주려 하지 않았다.“그리고, 앞으로 내 허락 없이는 절대로 이 방에 발을 들여놓지 마, 알아들었어?”“왜요?” 연희는 고개를 들어 눈물을 글썽이며 도겸을 바라보았다.“여긴 안방이잖아요. 우리의 방이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왜 제가 들어올 수 없는 거죠?”“허, 우리?” 도겸은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네가 내 아내로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연희는 충격에 몸을 비틀거리더니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그러나 도겸은 그녀를 부축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심지어 구경꾼처럼 차갑게 웃으며 연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은 마치 연희에게 계속 연기하라고 비웃는 것만 같았다.“꺼져!”여자는 힘없이 돌아섰다.“잠깐만...”연희는 다시 희망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그러나 다음 순간, 도겸의 싸늘한 말이 들려왔다.“이 쓰레기들 가져가.”결국 연희는 쟁반을 들고 의기소침하게 안방에서 나왔다.“작은 사모님, 도련님께서 아직도 입맛이 없으신 거예요?”연희는 빠르게 감정을 조절하며 걱정을 하는 말투로 한숨을 내쉬었다.“그래요, 먹고 싶지 않다고 하니 내가 아무리 말려도 소용이 없네요. 이 음식들은 이모님이 알아서 처리해요. 난 다시 올라가서 도겸 씨와 함께 있어줄게요...”“네, 알겠습니다. 얼른 올라가세요. 이것은 저에게 맡기시면 됩니다.”“그래요.” 연희는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허리를 받치고 위층으로 올라갔다.그러나 등을 돌리는 순간, 그녀의 미소가 사라졌다.고개를 들어 안방을 보며, 연희는 맹세했다.‘난 언젠간 그 방이 주인이 될 거야!’그날 저녁, 도겸은 모처럼 외출하지 않았는데, 저녁 9시에 왕미자에게 음식을 들고 방에 올라오라고만 했다.연희는 바로 옆에 있는 작은 방에서 지내고 있었다. 왕미자가 드나드는 것을 듣고,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난 가정부만도 못하단 말이야?’
[무슨 약을 말하는 거야?]“그... 남자들이 먹으면 흥분해질 수 있는 약...”상대방은 침묵을 하다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남자에게 약을 먹이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넌 이미 그런 꼴로 된 거냐고?]연희는 화를 냈다.“구할 수 있는지 없는지만 말해요. 다른 일은 당신과 상관없으니까요!”[기다려.]상대방은 간단하게 대답한 다음 바로 전화를 끊었다.연희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재벌 집은 천장까지 예쁘게 꾸몄다.이런 생활을 체험해 본 그녀는 다신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그러니 난 반드시 도겸 오빠의 마음을 잡아야 해.’...아침 일찍 일어난 정은은 청소를 하고 또 점심을 준비해서야 실험실로 출발했다.오전 내내 바쁘게 돌아치며 두 조의 데이터를 완성했는데, 정은은 이 진도에 나름 만족하는 편이었다.데이터를 입력하고 제대로 저장된 것을 확인한 다음, 정은은 냉장고에 있는 도시락통을 꺼내 전자레인지로 데우려 했다.조미진은 멀리서 향기를 맡고 달려왔다.“정은아, 점심에 뭘 먹는 거야? 냄새 정말 좋다. 배달시켰어?”치킨은 노랗고 바삭하게 잘 튀겨져 향기가 코끝을 찔렀다. 그리고 브로콜리는 푸르고 마늘의 향기까지 풍기고 있었다.고기와 야채의 조합은 너무나도 완벽해서 엄청 맛있어 보였다.“배달이 아니라 제가 만든 거예요. 치킨은 아직 먹지 않았는데, 한 번 드셔볼래요?”예전 같으면 미진이라면 쑥스러워서 거절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황금빛깔의 치킨을 보니, 그녀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그럼 잘 먹을게!”말을 마치면서 바로 하나 집어갔다.치킨은 바삭바삭하고 고소하며 간도 딱 좋았다.“너무 맛있어! 네가 직접 만들었다고?”“네.”미진의 말도 과장이 아니었다. 그녀의 요리 솜씨는 보통이었고, 가족들도 요리를 잘 하지 못했다. 가끔 밖에서 외식해도 맛있는 음식을 먹지 못한 건 아닌데, 대부분 식재료가 싱싱하지 않거나 양념 맛이 너무 진했다.그러나 정은이 만든 음식은 아니었다. 식재료가 싱싱할 뿐만
“그래요.” 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주소는 단톡방에 보낼게요. 이따가 저 먼저 장을 보러 갈 테니, 선배님들은 일 끝나시는 대로 오세요.”“그래!”진욱이 말했다.“조 교수에게 통지해야 하는 거 아니야?”미진이 대답했다.“그럼 전 교수가 통지해.”“그래.”진욱은 핸드폰을 꺼냈다.“조 교수는 수업이 끝났는지 모르겠네...”오후 2시, 정은은 컴퓨터를 끄고 실험대를 정리한 다음 조용히 떠났다.문을 나서자마자 재석을 부딪쳤다.“장보러 가는 거야?”재석이 묻자, 정은은 약간 의아해했다.“벌써 안 거예요?”“응, 전 교수가 나한테 연락했어. 가자.”“네?”“마트에 가는 거 아니었어? 내가 차로 데려다 줄게.”“오늘은 안 바쁜 거예요?”“그렇게 바쁜 편은 아니야.”바쁠 수도 있고, 쉴 수도 있었는데, 문제는 그 대상에게 달렸다.“그래요, 고마워요.”정은은 택시를 잡아야 할지 말지 고민했는데, 뜻밖에도 재석이 제때에 나타났다니. 이번에는 돈을 절약한 셈이었다.잠시 후, 정은은 자신이 돈을 절약했을 뿐만 아니라, 힘까지 들이지 않았단 것을 발견했다.모든 음식과 재료들은 전부 재석 혼자서 들었다.정은은 너무 많아서 짐을 좀 덜어주고 싶었지만, 남자는 오히려 뒤로 물러서며 그녀의 손을 피했다.“아니야, 내가 들면 돼.”집에 돌아온 정은은 앞치마를 두르며 잽싸게 일을 시작했다.“참, 선배님들 뭐 안 드시는 음식 있나요?” 정은은 생각나서 물었다.“전 교수는 새우를 먹지 않아. 그것 외에 다른 사람들은 꺼리는 음식 없어.”말하면서 재석도 소매를 걷어붙이며 주방으로 걸어갔다.“내가 도와줄게.”...6시, 실험실에 있던 네 사람은 정은의 집으로 향했다.“전 교수님, 조 교수님께 통지하셨어요?” 이때 수아가 갑자기 물었다.그녀는 원래 오고 싶지 않았지만, 재석도 갈 것이라는 진욱의 말을 듣고 그제야 따라왔다.태민은 단지 자신이 설득해서 수아가 온 거라고 생각했다. ‘마침내 이 까칠한 아가씨를 설득했군.’“그럼. 하
미진은 한참 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다른 사람들도 놀란 표정을 하고 있었다.“교, 교수님...”태민은 재석과 정은을 바라보며 마치 무슨 대단한 비밀이라도 발견한 것 같았다.수아는 입술을 깨물더니 눈빛이 차가웠다.“조 교수,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지?” 진욱은 충격에서 정신을 차리고 직접 입을 열었다.“정은 씨 도와주고 있는 거 못 봤어?”“이야, 정은이 집에까지 찾아와서 도와주고 있다니. 정말 대단하구나...”진욱은 농담을 했다.“먼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이 낫지. 그리고 난 확실히 식사하길 기다리는 너보다 훨씬 나아.”“이웃? 그게 무슨 뜻이야?”정은이 나서서 설명했다.“조 교수님은 바로 제 옆집에 사시거든요. 맞은편의 그 방이에요. 오늘 오후 실험실에서 나와 장을 보러 가려던 참에 교수님을 만났고, 저를 태우고 마트에 강 거예요.”“그렇구나.” 미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난 정말 이 두 사람이 동거라도 한 줄 알았어! 깜짝이야!’태민도 가슴을 두드렸다.‘하마터면 큰 오해를 할 뻔했네. 정말 다행이다...’어두웠던 수아의 얼굴은 순식간에 미소로 가득 찼다.“이제 식사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래, 그래.” 미진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정은이 말했다.“다들 앉아서 먼저 드세요. 아직 두 가지 요리가 남았는데, 곧 올라올 거예요!”모두들 즐겁게 식사를 했다.미진은 정은의 요리 솜씨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태민도 밥을 먹느라 정신이 없었다.다이어트를 한다던 수아조차도 밥을 한 공기나 먹었다. 그녀도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요리가 너무 맛있어서 저도 모르게 많이 먹었다.‘다 소정은 때문이야...’다 먹고 주방을 치운 다음, 정은은 그들을 바래다주었다.정확히 말하면 정은과 재석이 함께 그들을 아래층으로 바래다주었다.두 사람이 이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나란히 걷고 있으니 정말 부부가 손님을 배웅하는 것만 같았다.이를 본 미진은 표정이 좀 이상해졌다.태민은 계속 수아와 말을 하느라
재석은 안경을 위로 밀며 표정에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다음 순간, 현빈은 길을 건너 정은을 향해 걸어왔다.“올라가서 정은 씨 찾으려던 참이었는데, 이렇게 마주칠 줄은 몰랐어.”“무슨 일 있어요?”“있지.” 현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표정이 심각해졌다.“우리 앉아서 얘기 좀 할까?”정은은 재석을 바라보았고, 현빈도 시선이 그에게 떨어졌다.“정말 공교롭게도 다시 만났네요, 조 교수님.”“공교롭긴요, 정은 씨를 찾아온다면 날 쉽게 볼 수 있을 텐데.”현빈은 눈을 가늘게 떴다.재석은 그의 눈빛을 바라보더니 피하지 않고 침착한 모습을 보였다.“30분 줄게요.” 정은은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충분해. 맞은편 카페에 가서 얘기하자.”이 근처에는 카페와 레스토랑이 가장 많았다. 지금은 밤이라서 학생들도 이미 집이나 숙소에 돌아갔다. 그래서 나름 조용한 편이었다.정은은 앉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무슨 일인지 말해요.”“몰디브에서 생긴 그 두 건의 돌발적인 사고를 조사했을 때, 변호사팀이 일부 증거를 수집했지만, 이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기 때문에 조사 보고에 쓰지 못했어. 최근에 그 자료들을 뒤적거리다가 뜻밖에 새로운 것을 발견했는데, 네가 관심 있을 것 같아서.”“새로운 발견이요?” 정은은 영문을 몰랐다.“이것 좀 봐...”현빈은 조사 보고서를 건넸다.“위에 빨간 펜으로 동그라미를 친 곳을 자세히 읽어봐.”정은은 의혹을 느끼며 보고서를 보았는데, 보면 볼수록 표정이 심각해졌다.“알아차렸어? 산소통에서 가스가 새거나, 선물함에서 갑자기 독사가 튀어나오거나. 이 두 가지 일을 분석한다면, 전혀 서연희 혼자서 완성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그 후 감시 카메라를 다시 조사할 때, 표시된 시간도 확실히 이 점을 증명했어.”정은은 눈살을 찌푸렸다.“그 뜻은, 서연희를 도와준 사람이 있다는 건가요?”“조사 결과를 보면 그럴 가능성이 커.”현빈은 손을 모았다.“물론, 법률재판 차원에서 지금 이런 일들을 조사하는 것은 아무
다 같은 남자였으니 현빈은 또 어찌 정은을 향한 재석의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할 수 있겠는가?티가 나지 않았지만, 재석은 정은을 좋아하고 있는게 분명했다.‘그런 감정이 존재하는 한, 절대로 내 눈을 속일 수 없어.’현빈은 발걸음을 멈추며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정은은 뒤에서 걷고 있었고, 현빈이 앞을 가로막으니 재석을 보지 못했다. 현빈이 갑자기 멈추자, 정은은 하마터면 그와 부딪칠 뻔했다.다행히 제때에 멈춰 섰다.“미안.” 현빈은 고개를 숙이고 정은을 바라보았다. “내가 뭐 하나 깜박했네.”다음 순간 정은의 손에 따뜻한 밀크티 한 잔이 나타났다.따뜻한 온도가 전해오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멍해졌다.“잘 들고 있어, 쏟으면 난 책임지지 않을 거야.”정은은 의혹을 느꼈다.“언제 샀어요?”두 사람은 내내 서로를 마주하고 앉아 있었고, 정은은 현빈이 주문하러 가는 것을 보지 못했다.현빈은 웃으며 말했다.“비밀이야.”“아.” 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이렇게 능숙한 것을 보니, 이런 수법으로 많은 여자를 꼬셨나 봐요.”“아니, 너 하나밖에 없어.”정은은 더 이상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그녀는 두 사람이 너무 가깝다고 생각하며 내색하지 않고 뒤로 물러섰다.현빈은 도망치고 싶은 정은의 마음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그녀를 너무 몰아붙이면 안 된다.‘귀여운 여우가 급한 마음에 남의 품에 뛰어들면 안 되니까.’“자, 돌아가. 난 올라가지 않을게. 너도 내가 데려다 주는 것을 원하지 않을 거야.”“그럼 잘가요.”“음.”현빈은 오랫동안 머물지 않았다. 정은이 길을 건너는 것을 본 다음, 그는 차를 몰고 떠났다.정은은 밀크티를 들고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고개를 들더니 재석이 나무 밑에 서있는 것을 보았고, 그야말로 깜짝 놀랐다.“선배님, 아직 안 올라갔어요?”“너 기다리고 있었어.”말하면서 재석은 정은의 손에 있는 밀크티를 훑어보았다.“이런 거 좋아해?”“자주 안 마시는 편은 아니에요. 가끔 한 잔 마실
”만약 부족하다면, 또 다른 얘기를 해줄 수 있는데. 한 시간 전에 우린 정은 씨 집 근처의 카페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었어. 전부 사실이니 한 번 조사해봐.”선우는 안색이 극도로 어두워진 도겸을 바라보았다.‘지금 스피커를 끄면 안 될까?’그러나 현빈은 불난 집에 부채질까지 했다.“다 들었어? 내가 다시 한번 말할 필요가 없겠지? 녹음해서 자세히 들어봐.”‘앗, 그럴 필요는 없는데! 나 좀 살려줘!’[저기, 현빈 형, 그럼 계속 일 봐요. 난 일이 있어서 먼저 끊을게요.]말이 끝나자 선우는 재빨리 전화를 끊었다.현빈은 피식 웃더니 가속 페달을 밟았다.“도겸 형...”선우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현빈 형이 하는 말 듣지 마요. 가짜일 수도 있잖아요...”도겸은 무뚝뚝하게 몸을 돌려 룸으로 돌아왔다.선우는 재빨리 따라가며 이미 망했다고 생각했다.동건은 소파에 앉아 선우에게 미친 듯이 눈짓을 했다‘이게 무슨 상황이야? 담배를 피우러 나간 사람이 표정은 또 왜 이래?’‘아, 형 좀 묻지 마요. 나 너무 힘들어요.’도겸은 종업원을 불렀다.“위스키 두 병 더 가져와. 오늘 다 마시지 않으면 너희들 그 누구도 갈 수 없어.”...새벽 2시, 술은 다 마셨지만 사람도 취한 채로 소파에 엎드렸다.도겸은 바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고, 잠꼬대처럼 가볍게 중얼거렸다.“정은아...”선우는 가까이 다가가서 들었다.동건은 담배에 불을 붙인 다음, 손가락 사이에 끼웠는데, 그 말을 듣지 않아도 대충 알아맞힐 수 있었다.“또 소정은을 부르고 있는 거야?”“음.”“싸다 싸! 그러게 애초에 왜 헤어진 거야? 기어코 소정은의 체면을 봐주지 않고 그 난리를 벌여가며 헤어졌는데, 지금은 왜 또 후회하면서 이 꼴로 된 건데. 정말 싸다 싸.”“에헴!” 선우는 가볍게 목을 가다듬었다.“말 좀 작작 해요. 이제 어떡하죠? 집에 데려다 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우리 둘 다 술을 마셨으니 누가 운전을 하겠어? 그냥 호텔에 데려다줘. 방 하나 예약
도겸은 연희를 훑어보더니 곧바로 비웃었다.“배가 아프다며? 별일 없어 보이는데.”그의 예리한 눈빛에 연희는 자신의 거짓말이 간파된 느낌을 받았다.“오빠도 집에 없으니까 나랑 말동무 해주는 사람도 없잖아요. 너무 외로워요...”도겸은 귀찮아서 바로 연희의 말을 끊었다.“외로우면 책을 보고 문제나 풀어. 너 학생 아니었어? 수업 들을 필요가 없는 거야? 대학원 시험을 보겠다고 하지 않았어? 그렇게 한가하면 가서 이모님 좀 도와주지 그래? 이모님도 엄청 바쁘신 것 같은데.”연희는 우물쭈물하며 말을 하지 못했다.도겸의 검은 눈동자는 차갑고 냉담했다.‘또 감히 이런 수작을 부려? 내가 그동안 얼마나 많이 보았는데? 정말 수준도 없어!’도겸은 몸을 돌려 떠나려고 했지만, 부드러운 몸이 뒤에서 달려들어 두 손으로 그의 허리를 꽉 감았다.그는 부드러운 가슴이 자신의 등을 가볍게 문지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도겸 씨, 가지 마요. 저도 오랫동안 도겸 씨를 보지 못했단 말이에요. 정말 너무 보고 싶었어요. 나와 함께 있어주면 안 돼요? 제가 싫어도, 이 아이를 봐서...”도겸은 이를 악물며 순식간에 연희의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혐오와 증오로 가득 찬 눈빛으로 말했다.“나한테서 떨어져! 그리고 그 아이를 가지고 날 협박하지 마. 난 지우라고 경고했지만, 오히려 몰래 우리 어머니에게 연락해? 내가 그대로 넘어갈 것 같아!”연희는 도겸의 눈빛을 피했다.“미안해요, 저는...”“경고하지만, 좀 조용히 있어. 그렇지 않으면 지금 당장 이 집에서 널 쫓아낼 수도 있으니까!”말을 마치자, 도겸은 위층으로 올라갔다.남자의 뒷모습은 차가울 정도로 무정했다.연희는 이를 악물고 심호흡을 하며 감정을 조절했다.그녀는 묵묵히 자신에게 참아야 한다고 말했다.도겸에게 시집가는 것은 그녀의 유일한 출로였고, 그녀는 이미 이를 위해 너무 많은 것을 바쳤다.‘질 수 없어. 지면 안 돼.’3초 후, 연희는 자신을 진정시키는 데 성공했다.그녀는 도겸이 가장 좋아하는
정은은 은혁의 그 아련하고 억울한 표정을 보자, 그냥 말이 안 나왔다. ‘대체 지금 머릿속에 무슨 드라마를 찍고 있는 거지...?’ ‘진짜, 할 말 없네...’오후 세 시 정각. 탑승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승객들이 하나둘 줄을 서고, 정은도 조용히 탑승했다.비행기가 거의 만석이 된 후, 은혁은 이코노미석 안에서 정은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A 열, F 열, 가운데 구역까지 샅샅이 훑었지만, 없었다.잠시 후, 탑승 문이 닫히고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승객 여러분, 곧 출발하겠습니다.”그제야 은혁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고 기내 앞쪽으로 조심스럽게 올라가 봤다.그리고, 비즈니스석 좌석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있는 정은을 발견했다.“정, 정은... 씨? 이코노미석이 아니었어요...? 나는 그게...”‘뭐지, 상황이 이상한데...?’ ‘내가 이코노미석이라 당연히 정은 씨도 그럴 줄 알았는데...’정은은 슬쩍 웃었다. “누가 그래요? 내가 이코노미석 탄다고?”“지난번에 올 때는... 그때는 분명...”“그때는 비즈니스석이랑 일등석이 매진이었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코노미석에 탄 거고, 이번엔 자리가 있어서 그냥 비즈니스로 예약한 거죠.”‘아... 나 지금까지 뭐 한 거지. 혼자 다 짐작하고, 혼자 의미 부여하고, 혼자 낭만 타령하고...’은혁은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었다.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사실 은혁 씨는 나에 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어요. 그냥... 본인이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들을 뿐이죠.”그 말에는 어떤 분노도, 원망도 없었다. 그저 담담히 사실만 전달할 뿐.은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다. ‘와... 진짜, 뼈 맞았다.’자리에 앉은 은혁은 좌석의 불편함을 바로 체감했다. 다리는 제대로 뻗지도 못하고, 의자도 푹신하지 않고, 무엇보다 공기 중에 떠도는 그 ‘답답한 사람 냄새’가 꽤 거슬렸다.‘내 마음이 아무리 복잡하다지만... 이건 좀
은혁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말문이 막힌 채, 몇 초간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진짜... 남자 친구가 있었던 거야?’ ‘아니면... 나 때문에 그렇게 말한 걸까?’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렸지만, 정은은 이미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고 없었다....그 시각, 정은은 공장 회의실에서 진승구와 협의 중이었다. 조건은 명확했고, 가격도 이견 없이 깔끔하게 정리됐다.공장장인 진승구는 시원시원한 정은의 태도에 감탄했고, 그 자리에서 바로 계약서 인쇄를 지시했다.서류가 출력되자, 두 사람은 조용히 사인했고, 정은은 먼저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좋은 협력 관계 기대하겠습니다.”진승구도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받았다. “함께하게 되어 영광입니다.”정은이 회의실을 나선 후, 문이 다시 벌컥 열렸다.“정은 씨는 어딨어요?” 은혁이었고, 숨이 가빠 보였다.“소... 소정은 씨요?” 진승구는 당황해하며 되물었다.“그래요, 그분. 지금 어딨어요? 아까 계약한다고 했잖아요? 그냥 바로 도장 찍지 말고 좀 더 시간 끌라고 했잖아요. 이틀 정도만 더 붙잡아 두지...”진승구는 식은땀을 흘리며 답했다. “아... 이미 계약 다 끝났는데요...”은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 바보야, 바보... 진짜 바보!’속으로 열 번은 외쳤다. ‘이딴 놈한테 뭘 맡기겠다고...! 아버지한테 건의해야겠네. 앞으로 공장 접대비 전액 삭감... 출장자도 식당에서 밥 먹게 하고, 노래방은? 절대 금지!’은혁은 스스로를 다독이는 척했지만, 자꾸만 뇌리를 맴도는 정은의 말 한마디에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았다.‘남자 친구가 있다... 그게 진짜든 아니든, 어제 그 말은 분명 나를 밀어내기 위한 거였어. 다 망친 거야. 다 그놈의 진승구 때문이야...’진승구도 그런 은혁을 보면서 이해가 안 됐다.‘은혁 도련님... 왜 저래...?’...정은은 과일 봉지를 하나 들고 김대영이 있는 작업실 쪽으로 향했다.“김 기사님, 누가 찾아왔어요!”“예
정은이 계속 말했다.“이미 결과 나왔어요. 기준에는 전혀 못 미치네요.”김대영은 들숨을 멈췄다. “그렇게 빨리?”‘진짜다... 이 속도면 혼자서 실험실 하나는 돌리겠다니까.’“그럼, 옷부터 갈아입고 올게. 오늘은 절대 민폐 안 끼칠게!”“감사합니다, 선생님.”“에이... 감사하긴! 당연한 거지!” ‘선생님이라니... 아저씨도 아니고, 기사님도 아니고... 선생님이라 불러주다니, 나 오늘 힘난다.’모든 준비를 마친 오전 8시. 연구실 측에서 드디어 3세대 샘플이 도착했다.정은과 김대영은 다시 책상에 마주 앉아 정밀 측정과 테스트를 시작했다. 시간은 어느덧 금방 흘러 점심시간.김대영이 말했다. “가자, 밥 먹으러.”“네.”식당으로 향하는 길, 두 사람은 오후 실험 플랜에 대해 대화를 이어갔다. 바로 그때, 헐레벌떡 뛰어오는 은혁의 머리는 약간 흐트러져 있었다.심지어 셔츠 깃은 구겨져 있었으며, 표정은 평소답지 않게 초조해 보였다.“정... 정은... 씨!”은혁은 숨이 차 헉헉거리며 말했다. “겨우 찾았어요...”정은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아침부터 계속 메시지 보내도 답이 없고, 호텔 방에도 없길래... 무슨 일 생긴 줄 알았어요.”은혁도 정은을 걱정한 그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6시 반에 나왔어요. 어제 은혁 씨 늦게 들어온 것 같길래 아직 잘 거라 생각하고, 일부러 안 깨웠어요.”정은은 솔직히 대답했다.“6시 반...”은혁은 민망한 듯 짧게 웃었다. 그리고 변명처럼 말을 덧붙였다. “나 어제... 일부러 취한 거 아니에요. 원래 술 그렇게 안 마시는데... 공장장이랑 애들이 자꾸 마시자고 해서...”“끝나고 또 노래방까지... 근데 거기, 이상한 데 아니고 진짜 건전한 곳이에요. 나 원래 그런 데 잘 안 가요.”정은은 담담하게 말했다. “괜찮아요. 오해할 일도 없고, 솔직히 말해 저랑은 큰 상관도 없는 얘기예요. 그럼, 김 선생님이랑 밥 먹으러 가볼게요.”“아
정확히 말하자면, 한 사람에게 연락해야 한다는 걸 잊었다.오후에 재석이 먼저 전화를 걸어왔다. 공장 쪽 진행 상황을 물어보는 짧은 통화였고, 그때 정은은 막 실험에 들어가 바쁜 와중이었다.“일 끝나면 내가 먼저 연락할게요, 알겠죠?”이 말은 바로 마지막에 정은이 한 한마디였다. 그리고... 그 뒤로 연락이 없었다.‘하... 진짜 미쳤어. 그 말 해놓고 까먹었다고? 이런 사람은 또 없을 거야’정은은 민망함에 얼굴을 문지르며 핸드폰을 들었고, 톡을 열자마자 미확인 메시지가 쌓여 있었다.하나같이 은혁에게 온 것들. [정은 씨, 지금 어디예요?][정은 씨, 밥은 먹었어요?][정은 씨, 같이 식당 갈래요?][...] 친절한 말들이었지만, 그 속엔 정은이 찾는 메시지가 없었다.‘아니지, 지금 연락해야 할 사람은 장은혁이 아니라...’정은은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지만, 몇 자 쓰다가 다시 전부 지웠다. 결국, 손가락이 향한 건... 영상 통화 버튼.띠-잠시 울리던 화면이 바뀌며, 재석의 얼굴이 화면에 떴다.정은이 ‘미안하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일 끝났어?]“네.” 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피곤하지 않아?]“괜찮아요. 근데... 미안해요. 공장에서 나오는 길에 바로 연락하려고 했는데, 정신이 없었어요...”[괜찮아, 언제 연락하든 난 항상 여기 있어.]‘이 말, 왜 이렇게 따뜻하지...’ 재석은 가슴속에서 뭉근한 온기가 퍼졌다.그때, 문득 정은의 시선이 멈췄다. “지금 어디예요?”[집.]“집 어디요...? 방? 아니면...”재석은 순간 멈칫했다. 정은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화장실?”화면 속, 지나치게 가까이 잡힌 남자의 얼굴. 말도 안 되게 커진 이마와 눈, 화면에 머리까지 박을 기세였다.‘잠깐만. 이거... 설마...’“설마... 지금 옷 안 입었어요?”정적. 화면 너머의 공기조차 얼어붙는 느낌.재석의 얼굴이 굳었다. [씻으려고
정은은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 안전벨트를 매고 창밖을 슬쩍 바라봤다. 공장은 호텔에서 10km 떨어진 개발지구에 자리 잡고 있었다.은혁이 운전대를 잡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 구역은 첨단 기술 산업 클러스터로 지정돼 있어서, 기술 협력 프로젝트도 대부분 그쪽으로 집중되고 있어요.” “정은 씨가 찾는 그 새로운 감온 정확도 소재는 우리랑 CG그룹이 공동 개발한 건데, 지금까지 1세대부터 3세대까지 세 가지 버전이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집중했고, 중간중간 전문적인 질문도 빠짐없이 던졌다. 은혁이 답할 수 있는 부분은 성의껏 설명했지만, 구체적인 수치나 실험 조건처럼 세세한한 부분은 바로 대답하기 어려운 것도 있었다.약 20분 후, 두 사람은 공장에 도착했다. 은혁이 미리 연락해 둔 덕분에, 정문 앞에는 담당자가 나와 있었다.정은은 안내받아 간단히 실험실과 공장을 둘러봤다. 연구 구역과 생산라인은 전혀 겹치지 않게 구획이 나뉘어 있었고, 현장도 전반적으로 정돈된 느낌이었다.정은이 요청한 소재의 1세대와 2세대는 이미 완제품으로 확보되어 있었지만, 3세대는 아직 실험 단계였기에 정식 생산은 되지 않았다. 따라서 실험실에서 직접 합성해야 했다.“시간은 얼마나 걸리죠?” 정은이 은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은혁은 옆에 있는 연구원을 바라봤다.“8시간 정도 걸릴 것 같아요. 내일 오전엔 제품 받아보실 수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관련 비용은 정산대로 처리해 주세요. 최종 결정되면 한 번에 입금할게요.”은혁은 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비용은 무슨 비용... 정은 씨, 우리 사이에 뭘 그렇게 딱딱하게 굴어요.”정은은 침착하게 말했다. “그럴수록 더 딱딱하게 해야죠. ‘친할수록 돈 문제는 분명하게.’ 이건 기본이에요. 더군다나, 우리 둘은 그냥 ‘친구’일 뿐인데, 은혁 씨가 도와주는 것만 해도 충분히 고마워요.”“게다가 실험실도 예산이 따로 있는 조직이고, 모든 비용
실험실에서 진욱은 오늘만 몇 번째인지 모르게 재석을 힐끔거렸다. 결국 참지 못하고 다가갔다. “재석아, 너 오늘 길 가다 돈 주웠냐?”실험대 앞에서 입꼬리를 내릴 줄 모르던 재석의 손이 잠깐 멈췄다. “데이터 정리는 다 됐어? 3차 실험 가능성 평가 보고서는 언제 낼 건데?”“하, 이 사람 분위기 다 깨네.” 진욱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근데 말이야, 오늘 아침에 네가 샌드위치 먹는 거 봤거든.”“그래서?”“정은이가 해준 거지? 다 알아. 너희 둘, 다시 잘 되는 거야? 그것도 아니면, 이제 미련 접은 거야?” 재석은 살짝 고민하다가, 이제는 말해도 되겠다 싶어 입을 열려고 했다.바로 그때, 핸드폰에서 톡 알림이 떴다. 정은이었다.[도착했어요. 샌드위치는 맛있었어요?]재석은 바로 답장했다.[맛있었어.]정은은 곧장 자신의 일정을 재석에게 알려줬다.[지금 호텔 체크인하고, 오후엔 공장 갈 거예요.][응, 알겠어.]1분 정도 지났지만, 그다음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 재석은 괜히 허전해졌다.‘예전에도 이렇게 대화했었는데... 왜 지금은 이걸로는 부족하지?’정은과 더 오래 이야기하고 싶었다. 더 많은 말, 더 사적인 얘기, 더 가까운 거리. 그 마음은 마치, 가려운 곳을 손톱 끝으로 슬쩍 긁은 느낌. 절대 시원하지 않았다. 그냥 더 간지러워질 뿐.‘그냥, 정은이한테 세게 할퀴어지고 싶은데...’“누구랑 톡하냐?” 진욱이 슬쩍 핸드폰을 들여다보려 다가왔다.재석은 피할 틈도 없이 화면을 들킨 셈이 됐다. “뭘 감춰. 정은이랑 메시지 주고받는 거잖아. 왜? 뭐가 부끄럽다고.”“됐고.” 재석은 핸드폰을 집어넣고, 실험대에서 내려왔다. “오늘 점심은 내가 쏜다. 뭐 먹고 싶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몇 초 멈췄다. 옆에 있던 미진이랑 태민이 눈을 마주쳤다. “교수님,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갑자기 점심을요?”재석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먹고 싶은 거 생각나면 전 교수한테 말해.
비행기 이륙 직전, 은혁이 정은에게 제한했다. “정은 씨, 내 마일리지로 좌석 업그레이드해 줄게요.”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은혁의 얼굴에 아쉬움이 스쳤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로 돌아갔다. 잠시 후, 다시 다가와 말했다. “내가 정은 씨 옆자리로 바꿨어요.”비즈니스석에서 이코노미석으로 자리를 바꾸다니, 웬만한 사람이면 거절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은혁 씨,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돼요.” 정은은 단호한 어조였다.‘처음으로 이렇게까지 분명하게 말한 것 같아.’정은은 연애 한 번 안 해본 소녀가 아니었다. 은혁의 눈빛에 담긴 감정이 어떤 건지, 모를 리 없었다.하지만 그동안 굳이 선을 긋지 않은 건, 은혁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며, 오히려 몇 번이고 도와줬기 때문이었다. 이번 Z시 출장도 은혁의 도움 덕에 가능했던 일이었다.게다가 은혁이 고백도 안 했고, 정은이 불편할 정도로 다가온 것도 아니었으니까... 정은도 자신이 먼저 딱 잘라 말하는 게 오히려 예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그리고 그때의 정은은 솔로였고, 재석이 입을 열게 하기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의 자극은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정은은 이미 재석과의 관계를 정리했고, 은혁은 더 적극적으로 다가오고 있으니, 그녀도 이제 더 늦기 전에 확실히 은혁에게 말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래야 서로 상처받지 않을 테니 말이다.은혁은 정은의 말에 잠시 당황한 듯하다가, 이내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난 정은 씨 옆자리에 있는 게 좋아서 그래요.”정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즈니스석 티켓을 사 놓고 누구랑 자리를 바꾸든, 그건 상대방의 자유니까. 굳이 뭐라고 할 필요는 없지.’그 후, 정은은 노트북을 열고 일에 집중했다. 은혁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틈틈이 정은을 흘끗거렸다.그러다 손을 들어 승무원을 불렀다. “저기요. 잠깐만요.”“네, 손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결국 재석은 아쉬움 가득한 눈빛으로 정은의 손을 놓았다. 그러고는 조용히 열쇠를 건네받아 현관문을 열어주었다.“정은아, 잘 자.”그 한마디.‘정은아’라는 이름이 너무나 자연스럽고도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마치 수천 번은 불러본 것처럼.그 말에 정은은 순간 멍해졌다.‘왜 내 이름을 듣고도 가슴이 이렇게 설레지?’“네, 당신도 잘 쉬어요.”둘은 그렇게 짧은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문 안으로 들어갔다.그날 밤. 정은은 평소와 달랐다. 샤워를 마친 뒤 늘 하던 루틴, 논문 체크나 프로젝트 정리는 손도 대지 않았다.대신, 자기도 모르게 핸드폰을 들고 재석의 SNS를 열었다.‘뭐 하는 거야? 나...’그런데 이상하게, 자꾸만 궁금해졌다. ‘이 사람, 평소에 어떤 거 올리지?’재석은 SNS 설정 따위는 하지 않은 사람이었다.맨 아래까지 내리는 데 몇 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포스트 총수, 대략 서른 몇 개. 그중 90%는 논문, 연구, 산업 동향 공유.‘진짜 성실한 연구자 모드네...’그나마 정은과 관련 있는 건 얼마 전 실험실이 SCI 논문 게재됐을 때 서비대학교 공식 계정에서 축하 포스팅한 걸 공유한 것뿐이었다.[축하합니다.]짧고 건조한 멘트.그 밑엔 전진욱과 조미진이 ‘좋아요’를 눌러뒀다.‘이게 전부야?’그렇게 핸드폰을 내려놓으려던 순간, 알림이 하나 떴다. 재석이 새로운 글을 올렸다.정은은 무심코 눌러봤다. [r = a(1 - sinθ)]‘...어?’정은의 손가락이 멈췄다. 이 수식, 익숙했다. 너무 익숙해서 순간 심장이 멈칫했다.댓글 첫 줄엔 진욱이 있었다.[극좌표 함수? 밤에 안 자고 뭐 하세요? 조 교수님?]조미진과 손태민은 말없이 ‘좋아요’만 눌렀다. 하지만 두 사람은 속으로 ‘다음 연구 주제가 광학 쪽인가?’ 생각하며 혼란스러워했다.아무도 몰랐다. 이 수식의 진짜 의미를.‘r = a(1 - sinθ)’, 하트곡선.‘설마 이게, 그거? 진짜 그거... 맞아?’정은은 손끝을
“그럼... 고백하기 전까지, 혼자서 그렇게 많이 고민한 거예요?”“응.”“어쩐지...”정은이 아주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뭐라고?” 재석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이젠 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가요...”둘은 손을 꼭 잡고 복도로 향했다. 조용한 밤, 서로의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걷던 중, 재석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정은도 따라 멈춰 서며 돌아봤다.“왜요?”“정은아, 우리 지금... 사귀는 거 맞지?”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두 사람이 꼭 잡은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그렇게 생각 안 해요? 조금 전부터 내가 ‘재석 씨’라고 부른 거 못 느꼈어요?”“혹시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정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 지었다.“흠,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평소에도 꿈에서 날 자주 본 모양이네요?”재석의 몸이 순간 굳더니, 양 볼이 순식간에 빨개졌다.‘진짜 자주 꿨나 보다?’재석은 눈을 못 마주친 채, 그저 두 사람이 맞잡은 손만 바라보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진짜 좋아.”‘정은이도, 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구나.’‘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구나.’같은 계단, 같은 복도, 수없이 함께 걸어온 길. 그동안은 늘 친구라는 이름으로, 앞서거나 뒤따르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왔지만, 오늘은 처음으로, 손을 잡고 나란히 오르는 계단.정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근데, 왜 나랑 은혁 씨한테 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재석은 목소리를 낮추며, 살짝 눈을 피했다.“미안. 계산하러 나갔다가... 우연히 통화하는 거 들었거든.”정은의 눈이 살짝 커졌다.그리고 머릿속으로 자신이 통화 중 했던 말을 하나하나 되짚어봤다.‘공항에서 보자, 기대된다, Z시 출장... 뭐 이상한 말한 것도 없는데...?’그런데도 재석은 그걸 ‘여행 약속’으로 받아들였고, 그걸로 인해 혼자 삭이다가 결국 아래층에서 고백까지 해버린 거였다.“너희, Z시에 여행 간다고 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