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아주머니.” 정은은 방금 화장실에 갔는데, 나오자마자 백지영이 가게에 서서 자신을 향해 손짓하는 것을 보았다.서영숙은 멈칫했다.백지영의 시선을 따라 바라보니,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소정은이라니!’연희도 자연히 그녀를 보았다.정은은 오늘 옅은 화장을 했고, 카멜색 트렌치코트에 갈색 스웨이드 부츠를 신으며 머리는 클립으로 간단하게 말아올렸다.편안하고 나른해 보이지만 또 독특한 매력을 선보였다.“아주머니.” 정은은 백지영의 곁으로 다가가서 자연스럽게 그녀의 팔을 안았다.“오래 기다리셨죠? 죄송해요.”그녀는 서영숙과 연희를 그냥 무시하며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서영숙은 정은이 망설임 없이 떠났지만, 자신의 아들이 오히려 잊지 않고 매일 그녀와 화해하려는 것을 생각하면 화가 치밀어 올랐다!연희는 이때 유난히 눈치가 빨라 다정하게 차 한 잔을 따라주었다.“아주머니, 오랫동안 돌아다니셨으니 많이 피곤하시죠? 얼른 물을 좀 드세요.”서영숙은 웃으며 말했다.“어머, 우리 연희는 정말 철이 들었구나. 예쁘면 그만이지만, 이렇게 다정하다니. 기본적인 예의도 없는 사람보다 훨씬 낫지.”백지영은 서영숙이 정은을 욕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담담하게 웃었다.“서 여사, 이분은?”그녀는 연희에게 눈길을 주었다.“아직 우리에게 소개하지 않았잖아요?”서영숙은 멈칫했다.연희의 뱃속에는 도겸의 아이가 있었지만, 지금 명분이 없었다. 듣기 좋게 말하면 여자친구였고, 듣기 나쁘게 말하면 그저 애인일 뿐이었다.그러니 어떻게 연희를 소개해야 할까?그리고 서영숙은 아들의 애인과 함께 쇼핑을 하러 나왔다. 만약 백지영이 이 소문을 퍼뜨린다면, 앞으로 그녀는 또 어떻게 재벌 집 사모님들 앞에서 고개를 들고 다니겠는가?재벌 집 사모님들은 입만 열면 ‘실력 있는 가문과 혼인을 해야 한다’는 말을 했으니, 만약 그녀들에게 자신이 아들의 애인과 다정하게 지낼 뿐만 아니라 사생아까지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연희는 엄청난 기대를 하고 있었다.그녀가 가
판매원은 잠시 멍해졌다.서영숙도 의혹을 느끼며 연희를 바라보았다.“아주머니, 저도 코디해 드리면 안 될까요?”서영숙은 백지영을 보았다.‘흥, 너만 옷을 코디해 주는 사람이 있나? 나도 있어!’그렇게 서영숙은 웃으며 연희에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나도 네 안목을 믿어.”이 말을 할 때, 그녀는 지난번에 자신이 연희의 안목이 나쁘다고 욕한 것을 완전히 잊어버렸다.연희는 즉시 옷을 고르러 갔다. 그리고 뒤에 있는 두 판매원에게 이 옷을 가리키기도 하고 저 옷을 가리키기도 했는데, 기세는 오히려 매우 보기 좋았다.정은은 완전히 달랐다.그녀는 옷을 선택할 때 먼저 색깔과 스타일을 본 후에 옷감을 만졌고, 마지막에 결정해서야 판매원에게 가져오라고 부탁하며 한 세트 한 세트씩 놓으라고 했다.“아주머니, 한 바퀴 돌았는데 이 두 세트가 괜찮은 것 같네요. 한 번 갈아입어 보시겠어요?”백지영은 즉시 옷을 받고 기대와 흥분을 했다.그녀는 정은의 패션 감각을 너무 믿었다. 전에 해준 코디도 정말 마음에 들었다.솔직히 말하자면, 백지영은 친딸 수민보다 정은과 함께 쇼핑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이게 바로 소울메이트겠지?’그때 연희가 다가왔다. “저도 다 골랐어요.”서영숙은 피팅룸에 갔다.그리고 서영숙이 먼저 갈아입고 나왔다. 연희는 그녀에게 빨간 탱크톱 긴 치마를 매치했는데, 위에 샤넬 외투를 걸치니 많이 젊어 보였다.서영숙은 전신거울을 보며 나름 만족스러운 편이었다.“정말 괜찮네.”연희는 겸손하게 웃었다.“아주머니가 관리를 잘하셔서 그래요. 저보다 몸매가 훨씬 더 날씬하잖아요.” 서영숙은 기분이 좋아졌다.그러나 백지영이 옆의 피팅룸에서 나왔을 때, 그녀의 웃음은 굳어졌다.정은은 백지영에게 옅은 청색의 치파오를 선택했는데, 대나무 무늬는 이 간단한 비단 옷감에 질감을 더해주었다.개량된 스타일은 몸매를 더욱 잘 드러내, 백지영의 큰 키와 단아하며 우아한 기질을 선보였다.그녀의 옆에 서있으면 서영숙은 마치 ‘정교한 아주머니’처럼 보였
정은은 웃으며 말했다.“치파오는 약간 엄숙한 숙녀 스타일인 것 같아서 다르게 바꾸면 더 나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서영숙은 안색이 무척 어두워졌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발작할 수도 없어 화를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연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자신이 이렇게 비참하게 질 줄은 전혀 몰랐다.백지영은 두 사람의 표정을 눈여겨보며 입가를 구부렸다.“어떤 사람은 돌을 진주로 여기다니. 정말 웃겨 죽겠네! 이 두 벌 다 포장해줘요, 바로 계산할게요.”백지영은 손을 들어 판매원에게 말했다.“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판매원은 싱글벙글 웃으며 카드를 긁으러 갔다.“정은아, 가자, 다른 가게에 가서 한 번 보자.”“네.”백지영과 정은이 떠난 후, 서영숙은 자신이 입은 옷을 보면서 즉시 벗어서 땅에 밟고 싶었다.방금 백지영과 함께 서 있을 때, 자신이 두꺼비처럼 된 것을 생각하면 서영숙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연희를 가리키며 말했다.“정말 재수 없어! 너 나한테 창피함을 가져다주는 거 말고 뭘 더 할 수 있지? 옷을 매치해 주는 간단한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다니, 넌 왜 이렇게 멍청한 거야?!”연희도 자신이 남보다 못하다는 것을 알고, 배를 안고 억울하게 입을 열었다.“아이를 가진 후부터 정력이 없어서요. 어젯밤 도겸 씨는 또 한밤중에 돌아왔고요. 도겸 씨를 돌보기 위해 저도 밤새 잠을 자지 못했어요. 그래서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을 건데... 정말 죄송해요. 아주머니를 실망시켜드려서...”서영숙은 연희의 배를 보며 심호흡을 했다. 자신의 친손자를 생각해서 그녀는 겨우 분노를 억눌렀다.하지만 연희가 보면 볼수록 눈에 거슬렸다.“됐어, 내 손자를 봐서 용서해 주지. 하지만 넌 품위와 안목이 어쩜 그렇게도 없는 거니! 노력하지 않고 어떻게 명문가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겠어? 나중에 널 데리고 나가면, 창피한 사람은 나라고!”연희는 이 말을 듣자마자 눈을 반짝였다. ‘명문가에 발을 들여놓다니? 강씨 가문이 날 인정한
“수고는 무슨. 아주머니와 같이 쇼핑하면 엄청 즐거워요.”정은 자신도 적지 않은 수확을 거두었다.“아, 참, 부탁할 게 하나 있는데.” 백지영은 제발 도와주길 바라는 표정을 지었는데, 너무 귀여웠다.“무슨 일이세요?”“그게 말이야, 내가 티파티를 준비했어. 모두들 함께 모여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며 다례를 토론하는 그런 파티 말이야... 원래 정한 선생님은 심화원의 오랜 다례사로서, 계약까지 체결했지만 어젯밤 갑자기 병이 도져 밤중에 병원에 호송되었지 뭐야. 아직도 위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내일이 바로 티파티인데, 그 선생님은 틀림없이 참가할 수 없을 거야. 나도 지금 적합한 사람을 찾을 수 없고. 수민이가 그러던데, 너도 차에 대해 잘 안다며? 심지어 차를 잘 끓였고. 그래서 말인데...”백지영은 잠시 멈추며 계속 말했다.“난 네가 다례 선생님을 대신해서 대리수업을 해줬으면 좋겠어. 우리에게 차문화에 대해 강의하는 동시에 차를 끓이는 기술까지 보여주는 거야.”이번 모임은 그녀가 조직한 것으로, 만약 무슨 실수라도 한다면 모든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당할 것이다.백지영은 정은의 다례를 본 적이 없었고, 유일한 정보도 수민에게서 전해들은 것이었다. 어차피 차 문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차를 만들 줄 알면 된다.백지영도 정은이 높은 수준을 갖추기를 기대하지 않았다.“그렇군요...”정은은 잠시 망설였다. 백지영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것을 보며 그녀는 마음이 약해졌다.“그래요, 그럼 주소 보내주세요.”“그래! 고마워 정은아! 네가 날 사렸구나!”그날 저녁, 정은은 재석에게 휴가를 신청했다.재석은 원인을 물었고, 그녀도 숨기지 않고 직접 티파티에 대해 말했다.그는 또 정은에게 주소까지 물어봤다.정은은 바로 톡으로 보냈다.실험실과 약 5킬로메터 정도 떨어진 불가리 호텔인 것을 보고, 재석은 또 언제 끝나는지 물었다. 오후 5시였다.[저녁에 택시를 잡기가 쉽지 않을 거야. 내일 그 근처에 학술 세미나가 있는데, 너와
백지영은 그런 강서원의 태도에 익숙해져 오히려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하지 않고 방긋 웃기만 했다.“온종일 집에서 놀아도 심심하니,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죠. 최근 티파티가 한창 인기를 끌어서 이 주제로 정한 거예요. 형님은 평소에 이런 모임에 거의 참가하지 않으셨는데, 오늘 이렇게 찾아오시다니, 정말 영광이에요. 얼른 안으로 들어가시죠...”백지영은 말을 듣기 좋게 했고, 태도도 간절했기에, 평소에 그녀가 싫은 강서원도 트집을 잡지 못했다.이윽고 서영숙도 연희를 데리고 도착했다.낯선 얼굴이 이런 자리에 나타나자, 수많은 여사님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도겸 엄마, 이 아이는 누구야?”“어디서 온 아가씨야? 정말 젊게 생겼구나!”서영숙은 오기 전에 이미 준비를 했기에 즉시 활짝 웃으며 모두들에게 소개했다.“내 친구의 딸인데, 연희라고 해. 지금 이과 대학교를 다니고 있어.”연희는 바로 미소를 지으며 현장에 있던 여사님들에게 인사를 했다.“어머! 아직 학생이구나. 어쩐지 이렇게 젊고 영리하더라니.”“그래, 이과라며? 지금 이과 대학에 다니는 여자아이는 그지 많지 않잖아.”그렇다, 이과 대학은 이과 전공을 위주로 했기에, 남자에게 더 적합했고, 물론 경쟁도 많이 치열했다.이과 전공에 응시하는 여자는 상대적으로 적었으니 자연히 더 쉽게 붙을 것이다.이게 무슨 칭찬일까?다만 모두들 알아들었지만, 유독 서영숙과 연희만 알아듣지 못했다.다른 귀부인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비록 미소를 지으며 듣기 좋은 말을 했지만 사실 서로에게 눈짓을 하며 두 사람을 비웃었다.‘지금 입고 있는 그 치마 말이야, 3년 전의 셀린느 아니야? 시대에 뒤떨어진 옷을 어디에서 끄집어냈을까? 너무 못생겼어.’‘그래, 오늘이 무슨 자리인데, 정말 촌스럽게도 입었어.’‘그 시어머니에 그 며느리 아니겠어?’귀부인들은 멍청하지 않았다. 강씨 가문의 아들이 여대생을 임신시켰다는 소문이 이미 쫙 퍼졌다.그러나 지금 서영숙은 그 여자를 당당하게 데리고 나오다니,
서영숙은 웃음이 굳어졌다.‘상대방의 반응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 좀 다른 것 같은데?’“흥, 당신이 뭐라고 우리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거죠?” 강서원은 콧방귀를 뀌며 차갑게 서영숙을 훑어보았다.“우리 사이가 잘 맞지 않아도, 그것은 우리 조씨 가문의 일이지, 남이 간섭할 차례가 못 돼요!”말을 마치서면 바로 일어서더니 다른 자리로 옮겨 앉았다.서영숙은 창피함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백지영은 이 장면을 눈여겨보았고, 서영숙을 향한 혐오를 감출 수가 없었다.강서원은 확실히 백지영과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그것은 단지 성격과 처사 방식의 차이일 뿐이었다. 비록 가끔 다른 관점으로 말다툼을 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두 사람은 여전히 한집안 식구들이었다.남과 함께 자기 가족을 욕하는 사람이 또 어디 있겠는가?‘서영숙은 정신이 나간 거야 뭐야?’강서원은 비록 다른 자리로 자리를 옮겼지만,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고개를 들면 바로 연희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쭈뼛쭈뼛 맞은편에 앉아 손발을 어떻게 놓아야 할지 모르는 데다가, 자신과 눈을 마주하면 바로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강서원은 이런 여자를 가장 싫어했다.백지영도 약간 이런 타입이었지만, 그래도 강서원은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연희와 같은 사람은 한 번만 더 봐도 자신의 눈을 더럽힐 것만 같았다.그래서 강서원은 시선을 돌리며 연희를 보지 않기로 했다.‘더러운 것을 보지 말자. 괜히 기분만 나빠지겠어.’이때 백지영이 강서원의 곁으로 걸어갔다.“형님, 이쪽은 등불이 어두우니 저쪽에 가서 앉으시는 건 어때요?”그렇게 강서원은 백지영이 마련해준 곳으로 갔다.‘응, 여기가 좋네. 드디어 서영숙과 서연희 그 두 여자를 볼 필요가 없어.’그녀는 백지영에게 ‘잘했다’는 눈빛을 주었다.백지영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어쩔 수 없지. 형님은 성격이 원래 그랬으니까. 큰 도련님도 형님을 아끼시고, 온 가족들도 양보를 했으니 나도 당연히 그런 형님을 많이 봐드려야지.’얼마
모두들 넋을 잃고 정은의 강의를 들었다.“백 여사, 이번에 청한 선생님은 꽤 괜찮은데? 어디서 찾은 거야? 왜 전에 그 늙은이가 온 거지?”티파티는 이미 여러 차례 열렸는데, 매번 다른 귀부인들이 책임졌다.이번에 마침 백지영의 차례가 되였고, 그 선생님은 또 마침 병 때문에 입원했기에 그제야 정은을 찾아온 것이었다.전에는 이런 ‘실수’가 없었다.다른 한 귀부인은 그 말을 듣고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이렇게 아름다운 선생님이 있었다면 왜 진작에 청하지 않고, 줄곧 그런 늙은이만 찾아온 거야? 이 선생님이 얼마나 좋은데?”“예쁘기도 하고 목소리도 듣기도 좋네요.”“이 선생님은 정말 괜찮네요.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마음이 편해지는 거 있죠?’연희와 서영숙은 정은이 나타난 순간 어안이 벙벙해졌다.그리고 그녀는 태연자약하게 무대에 앉아 차 문화에 대해 여유롭게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연희는 모두의 평가를 듣고 있었다. 모두들 정은이 얼마나 좋고, 얼마나 예쁘며 기질이 얼마나 뛰어난 지에 대한 칭찬이었다!‘왜? 왜 모든 사람들이 소정은을 좋아하는 거지? 하지만 소정은은 차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잖아. 그런데 어떻게 그 위에 앉아서 아주 그럴 싸하게 이 귀부인들에게 수업을 해 줄 수 있는 거냐고? 대체 소정은이 뭔데?’연희는 마음이 불쾌해졌다. 그러나 자세히 생각해보면, 그것은 질투일 뿐이었다!“잠깐만요.” 연희는 일어서더니 정은의 말을 끊었다. 그 순간, 사람들의 시선은 전부 그녀에게 떨어졌다.서영숙은 연희를 막을 겨를이 없었다.백지영도 눈살을 찌푸렸다.정은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무슨 문제라도 있어요?”연희는 웃으며 말했다.“선생님, 오늘 우리에게 차 문화에 대해 강의를 하러 오셨잖아요? 그럼 선생님은 다례사인가요? 그렇기엔 너무 젊지 않나요? 그리고 왜 당신이 한 말이 조금도 프로 같지가 않은 거죠? 심지어 다큐멘터리의 대사까지 말하시다니?”이 말이 나오자, 모두들 의논하기 시작했다.“그래, 왜 갑자기 선생님이 바뀐 거야?
‘엥?’연희는 멍해졌다.그녀는 단지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했을 뿐이니, 정은의 문제를 지적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비록 어젯밤에 공부를 했지만, 임시로 벼락치기를 한 것일 뿐, 그 지식들을 똑똑히 기억하지 않았다.연희는 눈알을 굴리더니 다시 정신을 차렸다.“지금 제가 선생님에게 묻고 있잖아요. 다례사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 화제 돌리지 마세요.”“난 지금 선생님으로서 학생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물어보며 의혹을 풀어주고 있어요. 그런데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예요? 화제를 돌리다뇨? 내가 프로가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반드시 그 이유를 말해야죠. 나는 이런 터무니도 없는 비난을 받아들이지 않을 거예요!”이렇게 강한 정은을 연희는 당해낼 수 없었다.모두들의 눈빛이 자신에게 떨어지자, 연희는 입술을 깨물며 등을 곧게 폈다.“방금 말한 것은 확실히 큰 잘못이 없어요. 그러나 다례에 관한 상식이라면 이 자리에 있는 분들 누가 모르시겠어요? 모르시더라도 인터넷에서 조금만 찾아보면 그럴듯하게 말할 수 있죠. 다례사의 등급이 다르면 강의의 깊이도 분명히 다를 거예요. 설마 오늘 우리가 그런 기초 지식을 듣기 위해서 찾아온 거라고 생각하세요?”일부 귀부인들은 이미 마음이 흔들렸는데, 이 말을 듣고 찬성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이 아가씨 말도 맞네. 만약 자격증이 없다면 선생님이 무슨 사람인지 누가 알겠어? 만약 사칭을 했다면, 이 참에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하는 건 아니겠지?”“그래, 지금 사기꾼이 그렇게 많은데. 그냥 자격증을 모두에게 보여 주는 것뿐이잖아. 그래야 모두들 안심하지. 정말 자격증이 있다면 그리 어렵지 않을 텐데?”백지영의 표정은 이미 무척 어두워졌다.정은은 그녀가 청한 사람이니, 지금 정은을 의심하는 것은 자신을 의심하는 것과 같았다.긴장과 분노를 느끼는 백지영에 비해, 강서원은 무척 여유로웠다. 그녀는 차를 천천히 마시면 이 장면을 구경했다.‘오늘 정말 잘 왔어. 구경거리가 생겼으니 정말 재밌네.’강서원은 비록 정은을 본 적이
정은은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 안전벨트를 매고 창밖을 슬쩍 바라봤다. 공장은 호텔에서 10km 떨어진 개발지구에 자리 잡고 있었다.은혁이 운전대를 잡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 구역은 첨단 기술 산업 클러스터로 지정돼 있어서, 기술 협력 프로젝트도 대부분 그쪽으로 집중되고 있어요.” “정은 씨가 찾는 그 새로운 감온 정확도 소재는 우리랑 CG그룹이 공동 개발한 건데, 지금까지 1세대부터 3세대까지 세 가지 버전이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집중했고, 중간중간 전문적인 질문도 빠짐없이 던졌다. 은혁이 답할 수 있는 부분은 성의껏 설명했지만, 구체적인 수치나 실험 조건처럼 세세한한 부분은 바로 대답하기 어려운 것도 있었다.약 20분 후, 두 사람은 공장에 도착했다. 은혁이 미리 연락해 둔 덕분에, 정문 앞에는 담당자가 나와 있었다.정은은 안내받아 간단히 실험실과 공장을 둘러봤다. 연구 구역과 생산라인은 전혀 겹치지 않게 구획이 나뉘어 있었고, 현장도 전반적으로 정돈된 느낌이었다.정은이 요청한 소재의 1세대와 2세대는 이미 완제품으로 확보되어 있었지만, 3세대는 아직 실험 단계였기에 정식 생산은 되지 않았다. 따라서 실험실에서 직접 합성해야 했다.“시간은 얼마나 걸리죠?” 정은이 은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은혁은 옆에 있는 연구원을 바라봤다.“8시간 정도 걸릴 것 같아요. 내일 오전엔 제품 받아보실 수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관련 비용은 정산대로 처리해 주세요. 최종 결정되면 한 번에 입금할게요.”은혁은 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비용은 무슨 비용... 정은 씨, 우리 사이에 뭘 그렇게 딱딱하게 굴어요.”정은은 침착하게 말했다. “그럴수록 더 딱딱하게 해야죠. ‘친할수록 돈 문제는 분명하게.’ 이건 기본이에요. 더군다나, 우리 둘은 그냥 ‘친구’일 뿐인데, 은혁 씨가 도와주는 것만 해도 충분히 고마워요.”“게다가 실험실도 예산이 따로 있는 조직이고, 모든 비용
실험실에서 진욱은 오늘만 몇 번째인지 모르게 재석을 힐끔거렸다. 결국 참지 못하고 다가갔다. “재석아, 너 오늘 길 가다 돈 주웠냐?”실험대 앞에서 입꼬리를 내릴 줄 모르던 재석의 손이 잠깐 멈췄다. “데이터 정리는 다 됐어? 3차 실험 가능성 평가 보고서는 언제 낼 건데?”“하, 이 사람 분위기 다 깨네.” 진욱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근데 말이야, 오늘 아침에 네가 샌드위치 먹는 거 봤거든.”“그래서?”“정은이가 해준 거지? 다 알아. 너희 둘, 다시 잘 되는 거야? 그것도 아니면, 이제 미련 접은 거야?” 재석은 살짝 고민하다가, 이제는 말해도 되겠다 싶어 입을 열려고 했다.바로 그때, 핸드폰에서 톡 알림이 떴다. 정은이었다.[도착했어요. 샌드위치는 맛있었어요?]재석은 바로 답장했다.[맛있었어.]정은은 곧장 자신의 일정을 재석에게 알려줬다.[지금 호텔 체크인하고, 오후엔 공장 갈 거예요.][응, 알겠어.]1분 정도 지났지만, 그다음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 재석은 괜히 허전해졌다.‘예전에도 이렇게 대화했었는데... 왜 지금은 이걸로는 부족하지?’정은과 더 오래 이야기하고 싶었다. 더 많은 말, 더 사적인 얘기, 더 가까운 거리. 그 마음은 마치, 가려운 곳을 손톱 끝으로 슬쩍 긁은 느낌. 절대 시원하지 않았다. 그냥 더 간지러워질 뿐.‘그냥, 정은이한테 세게 할퀴어지고 싶은데...’“누구랑 톡하냐?” 진욱이 슬쩍 핸드폰을 들여다보려 다가왔다.재석은 피할 틈도 없이 화면을 들킨 셈이 됐다. “뭘 감춰. 정은이랑 메시지 주고받는 거잖아. 왜? 뭐가 부끄럽다고.”“됐고.” 재석은 핸드폰을 집어넣고, 실험대에서 내려왔다. “오늘 점심은 내가 쏜다. 뭐 먹고 싶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몇 초 멈췄다. 옆에 있던 미진이랑 태민이 눈을 마주쳤다. “교수님,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갑자기 점심을요?”재석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먹고 싶은 거 생각나면 전 교수한테 말해.
비행기 이륙 직전, 은혁이 정은에게 제한했다. “정은 씨, 내 마일리지로 좌석 업그레이드해 줄게요.”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은혁의 얼굴에 아쉬움이 스쳤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로 돌아갔다. 잠시 후, 다시 다가와 말했다. “내가 정은 씨 옆자리로 바꿨어요.”비즈니스석에서 이코노미석으로 자리를 바꾸다니, 웬만한 사람이면 거절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은혁 씨,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돼요.” 정은은 단호한 어조였다.‘처음으로 이렇게까지 분명하게 말한 것 같아.’정은은 연애 한 번 안 해본 소녀가 아니었다. 은혁의 눈빛에 담긴 감정이 어떤 건지, 모를 리 없었다.하지만 그동안 굳이 선을 긋지 않은 건, 은혁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며, 오히려 몇 번이고 도와줬기 때문이었다. 이번 Z시 출장도 은혁의 도움 덕에 가능했던 일이었다.게다가 은혁이 고백도 안 했고, 정은이 불편할 정도로 다가온 것도 아니었으니까... 정은도 자신이 먼저 딱 잘라 말하는 게 오히려 예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그리고 그때의 정은은 솔로였고, 재석이 입을 열게 하기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의 자극은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정은은 이미 재석과의 관계를 정리했고, 은혁은 더 적극적으로 다가오고 있으니, 그녀도 이제 더 늦기 전에 확실히 은혁에게 말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래야 서로 상처받지 않을 테니 말이다.은혁은 정은의 말에 잠시 당황한 듯하다가, 이내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난 정은 씨 옆자리에 있는 게 좋아서 그래요.”정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즈니스석 티켓을 사 놓고 누구랑 자리를 바꾸든, 그건 상대방의 자유니까. 굳이 뭐라고 할 필요는 없지.’그 후, 정은은 노트북을 열고 일에 집중했다. 은혁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틈틈이 정은을 흘끗거렸다.그러다 손을 들어 승무원을 불렀다. “저기요. 잠깐만요.”“네, 손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결국 재석은 아쉬움 가득한 눈빛으로 정은의 손을 놓았다. 그러고는 조용히 열쇠를 건네받아 현관문을 열어주었다.“정은아, 잘 자.”그 한마디.‘정은아’라는 이름이 너무나 자연스럽고도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마치 수천 번은 불러본 것처럼.그 말에 정은은 순간 멍해졌다.‘왜 내 이름을 듣고도 가슴이 이렇게 설레지?’“네, 당신도 잘 쉬어요.”둘은 그렇게 짧은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문 안으로 들어갔다.그날 밤. 정은은 평소와 달랐다. 샤워를 마친 뒤 늘 하던 루틴, 논문 체크나 프로젝트 정리는 손도 대지 않았다.대신, 자기도 모르게 핸드폰을 들고 재석의 SNS를 열었다.‘뭐 하는 거야? 나...’그런데 이상하게, 자꾸만 궁금해졌다. ‘이 사람, 평소에 어떤 거 올리지?’재석은 SNS 설정 따위는 하지 않은 사람이었다.맨 아래까지 내리는 데 몇 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포스트 총수, 대략 서른 몇 개. 그중 90%는 논문, 연구, 산업 동향 공유.‘진짜 성실한 연구자 모드네...’그나마 정은과 관련 있는 건 얼마 전 실험실이 SCI 논문 게재됐을 때 서비대학교 공식 계정에서 축하 포스팅한 걸 공유한 것뿐이었다.[축하합니다.]짧고 건조한 멘트.그 밑엔 전진욱과 조미진이 ‘좋아요’를 눌러뒀다.‘이게 전부야?’그렇게 핸드폰을 내려놓으려던 순간, 알림이 하나 떴다. 재석이 새로운 글을 올렸다.정은은 무심코 눌러봤다. [r = a(1 - sinθ)]‘...어?’정은의 손가락이 멈췄다. 이 수식, 익숙했다. 너무 익숙해서 순간 심장이 멈칫했다.댓글 첫 줄엔 진욱이 있었다.[극좌표 함수? 밤에 안 자고 뭐 하세요? 조 교수님?]조미진과 손태민은 말없이 ‘좋아요’만 눌렀다. 하지만 두 사람은 속으로 ‘다음 연구 주제가 광학 쪽인가?’ 생각하며 혼란스러워했다.아무도 몰랐다. 이 수식의 진짜 의미를.‘r = a(1 - sinθ)’, 하트곡선.‘설마 이게, 그거? 진짜 그거... 맞아?’정은은 손끝을
“그럼... 고백하기 전까지, 혼자서 그렇게 많이 고민한 거예요?”“응.”“어쩐지...”정은이 아주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뭐라고?” 재석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이젠 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가요...”둘은 손을 꼭 잡고 복도로 향했다. 조용한 밤, 서로의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걷던 중, 재석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정은도 따라 멈춰 서며 돌아봤다.“왜요?”“정은아, 우리 지금... 사귀는 거 맞지?”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두 사람이 꼭 잡은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그렇게 생각 안 해요? 조금 전부터 내가 ‘재석 씨’라고 부른 거 못 느꼈어요?”“혹시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정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 지었다.“흠,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평소에도 꿈에서 날 자주 본 모양이네요?”재석의 몸이 순간 굳더니, 양 볼이 순식간에 빨개졌다.‘진짜 자주 꿨나 보다?’재석은 눈을 못 마주친 채, 그저 두 사람이 맞잡은 손만 바라보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진짜 좋아.”‘정은이도, 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구나.’‘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구나.’같은 계단, 같은 복도, 수없이 함께 걸어온 길. 그동안은 늘 친구라는 이름으로, 앞서거나 뒤따르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왔지만, 오늘은 처음으로, 손을 잡고 나란히 오르는 계단.정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근데, 왜 나랑 은혁 씨한테 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재석은 목소리를 낮추며, 살짝 눈을 피했다.“미안. 계산하러 나갔다가... 우연히 통화하는 거 들었거든.”정은의 눈이 살짝 커졌다.그리고 머릿속으로 자신이 통화 중 했던 말을 하나하나 되짚어봤다.‘공항에서 보자, 기대된다, Z시 출장... 뭐 이상한 말한 것도 없는데...?’그런데도 재석은 그걸 ‘여행 약속’으로 받아들였고, 그걸로 인해 혼자 삭이다가 결국 아래층에서 고백까지 해버린 거였다.“너희, Z시에 여행 간다고 했잖아.”
정은이 멍해 있는 사이, 재석이 한 걸음 다가섰다. 늘 부드럽고 점잖던 그가, 이 순간만큼은 전에 없던 강한 기운을 뿜어냈다. ‘이 남자... 이런 눈빛도 있었나?’정은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등이 벽에 닿는 순간, 재석은 어느새 바로 눈앞에 와 있었다.정은이도 이제야 제대로 실감이 났다. 재석이 자신보다 훨씬 크다는 걸. 그리고 지금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내려다보면, 자신이 마치 남자의 품 안에 갇힌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도.재석이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이제 좀 알겠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그때 네가 학업이 먼저라고 했을 때, 난 받아들였어.”“그런데 장은혁한텐 기회를 줬지. 정은아...”그가 고개를 더 숙이자,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목선에 닿았다. 순간, 정은의 팔에 소름이 쫙 돋았다. “너, 나한테 너무 불공평해.”그 마지막 한 마디는 묘하게 서글픈 기운이 섞여 있었다.정은은 입술을 달싹이며 뭔가 말하려 했지만, 재석은 그녀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알아, 내가 지금 어떤 입장인지. 묻고 따질 자격도 없고, 네가 누구를 좋아하든, 그건 네 자유라는 것도 알아.”“이 말 꺼냈다가, 우리 사이가 끝날 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근데... 계속 참다 보니까 알겠더라.”‘난... 그렇게까지 쿨한 사람이 아니었어.’“그래서 이제 참지 않기로 했어.”‘어떻게 되든, 그건 네가 정해.’그렇게 말한 재석은 고개를 숙인 채 멈췄다. 마치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처럼.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용한 밤공기 속에서, 정은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울렸다.“이제, 제가 말해도 될까요?”“응...”“재석 씨.”정은은 처음으로 재석을 그렇게 불렀다.“고개 들어요. 나 좀 봐요.”재석의 어깨가 순간 굳어졌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그는 이미, 거절당할 각오까지 끝냈다.그런데 눈이 마주친 순간, 정은의 두 눈 속에서 재석이 본 건... 눈물이 아닌, 웃음이었다.억지로 짓는
“헤어졌다고요?”정은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몰랐어?!”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진욱은 눈을 반짝이며 의자째로 다가오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본격적인 ‘TMI’를 털어놓기 시작했다.“M시 출장 갔다 오고 며칠 안 돼서, 재석이가 바로 짐 싸서 수아를 내보냈다니까?”정은은 그 말을 듣고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재석과 수아 사이에 어떤 감정선이 있었는지, 그동안 몇 번 스쳐 지나갔던 장면들이 퍼즐처럼 빠르게 떠올랐다.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눈빛 속엔 미묘한 기류가 스쳤다.“아마 진짜 많이 좋아했나 봐. 그러니까 정리할 때도 그만큼 아프고, 오래 걸리는 거겠지. 조금만 시간 지나면, 태민이도 정리될 거야.”진욱은 이어서 말했다.“네.”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대답했다.그 이후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남의 연애는, 들을 수는 있어도 깊게 얘기하지 말아야 해. 괜히 나서 봤자... 괜히 끼어든 꼴만 되니까.’...해가 지고, 붉은 노을이 건물 유리에 비치기 시작할 무렵. 정은은 마침내 작업을 끝냈다.진욱은 기다렸다는 듯 프로그램을 열고 기능 하나하나를 테스트했다.그리고 30초쯤 흐른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어어!! 복구됐어! 됐다! 돌아왔어! 다시 쓸 수 있어!!”미진도 덩달아 벌떡 일어나 양손을 번쩍 들었다.“살았다, 진짜!! 여태 손으로 데이터 입력한 거 생각하면... 이건 거의 기적이야!”진욱은 시계를 힐끗 보더니, 정은을 향해 말했다.“지금 이 시간까지 남아서 도와준 우리 정은이, 완전 수고 많았어! 조 교수...”“응...?”갑작스레 이름이 불리자, 재석은 몇 초간 멈칫하다가 고개를 돌렸다.진욱은 능청스럽게 말했다.“아니, 정은이가 이렇게 큰일 해줬는데, 감사 표시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적어도 밥 한 끼는 사야지.”“맞아요, 맞아요. 조 교수님, 이건 진짜 밥으로도 모자라요.” 미진이 곧장 거들었다.재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략 1년 전, 정은은 한동안 재석의 실험실을 빌려 쓴 적이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전진욱, 조미진 등과 인연이 닿았다.처음엔 서로 어색하고 낯설었지만, 몇 달이 지나면서 조금씩 가까워졌고, 지금은 가볍게 농담도 주고받을 만큼 편해졌다.그러던 어느 날, 진욱은 우연히 정은이 실험 데이터를 처리하는 속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 너무 빠른 게 아닌가 싶어서 슬쩍 물어봤더니, 정은은 코딩도 할 줄 아는 공대 만능 캐릭터였다. 그녀는 직접 짠 프로그램으로 데이터를 자동 정리하고, 다차원 분류와 정렬까지 가능하다고 했다.“와, 뭐야... 완전 반칙인데?”진욱은 결국 정은에게 부탁해 실험실 맞춤형 프로그램 하나를 따로 제작해달라고 했고, 그 이후, 데이터 정리는 그야말로 신세계를 맞이했다. 진욱은 쓸 때마다 감탄하며 말했다.“진짜... 정은이 덕분이야. 이게 사람을 살리네.”하지만 어제 그 기특한 프로그램이 갑자기 먹통이 됐다. 손태민이 고쳐보겠다고 덤볐지만, 결과는... 풍비박산이었다. ‘이젠 누가 손댔다간 진짜 박살 나겠어...’ 결국 정은에게 SOS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재석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오늘 시간 돼? 안 되면, 며칠 뒤도 괜찮고...]진욱은 훨씬 급했다. 말 그대로 살려달라는 마음이었다.[야, 오늘 안 데려오면... 나 여기서 바로 싸버린다! 진짜라고, 어?!]그는 어제 약 먹고 좀 괜찮아진 줄 알았건만, 밤새 배가 또 난리였다. 오늘 아침부터 실험실 화장실은 진욱의 전용이 되었다. 오전에만 6회 방문.그 말은, 그냥 협박 아니었다. 진짜 실현 가능성이 있었으니 말이다.정은은 상황을 듣고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시간 돼요. 지금 바로 갈게요.”[그래. 그럼 내가 정문 앞으로 갈게.]‘굳이 마중까진 필요 없는데...’ 뚝-정은이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 ...10분 뒤, 정은은 학교 정문 앞에서 재석과 마주쳤다. 두 사람은 실험실로 걸어가며 프로그램
“언니, 이건 굳이 우리 의견 물을 필요도 없지 않아요? 언니가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가는 거죠. 저희한텐 뭐든 시키기만 하세요. 무조건 따라갈게요!”민지가 단호하게 말하자, 서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맞아요, 저흰 누나 믿고 가는 거예요. 결정은 누나가 해요.”정은은 그 말에 잠시 멍해졌다가,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너희들... 나 그렇게 믿어도 돼? 나도 가끔 실수하거든?”민지는 마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정은 언니가 실수했다면, 그건 100% 저랑 서준 오빠가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뜻이에요.”“그건 좀 과장이지만...”‘그래도... 이런 믿음을 받는다는 게 참 따뜻하네.’세 사람은 그렇게 식사를 마쳤다.계산은 서준이 맡았고, 정은과 민지는 먼저 주차장으로 향했다. “언니, 먼저 가요. 전 서준이 데리러 갈게요.”“응? 굳이?”“우리 집이랑 방향이 같잖아요. 서준이는 차도 없으니까, 그냥 태워다 주는 거죠, 헤헤.”“그래, 알겠어. 그럼 조심히 가. 운전 천천히 하고.”“네. 언니도 잘 들어가요!”...두 ‘파트너’와 방향을 맞춘 정은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자료 조사부터 시작해 ‘신소재 최적화 계획안’을 정리하고, 모든 내용이 빠짐없이 정리됐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확인했다.벌써 밤 10시. 정은은 핸드폰을 들고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냈다.[장은혁 씨, 시간 돼요? 상의드릴 게 하나 있어요.]그 시각, 은혁은 거실 소파에 앉아 어머니인 황희숙 여사의 ‘진실 공방’에 시달리고 있었다.“너 외할아버지한테 전화 왔어. 오늘 도시락 들고 회사 갔다며? 근데 그냥 말도 없이 두고 사라졌다고 난리야. 게다가 누가 너랑 어떤 여자가 같이 있는 걸 병원 약국에서 봤다던데? 솔직히 말해봐. 너, 여자 친구 생겼지?”은혁은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아니 외할아버지는 왜 또 엄마한테 바로 전화해요? 진짜 너무하신다니까요...”“이 자식 봐라, 말버릇 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