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지가 말했다.“당시 우리는 모두 있었어요.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고, 기기도 잠시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동으로 꺼졌단 말이에요. 이따가 또 써야 하는데, 누가 전원을 끊어버리겠어요?”정은은 이미 대충 그 이유를 추측해냈지만 지금은 증거가 없었다.“가자, 맞은편 실험실로.”민지는 영문을 몰랐다.“거긴 왜요? 그것은 다른 전문적인 실험실인 것 같은데. 저희와는 상관이 없어요...”서준도 수상함을 예민하게 감지하며 얼른 따라갔다.“가라면 그냥 가, 넌 왜 문제가 그렇게 많아?”‘이 자식이, 이젠 간이 부었구나!’세 사람이 맞은편 실험실에 왔는데, 아니나 다를까, 벽 모퉁이에 이미 소방 기자재가 갖추어져 있었다.“아니...” 민지는 놀라서 아연실색했다.“지난달까지만 해도 없었는데!”세 사람은 또 다른 몇 개의 실험실을 확인했다. 모두 예외 없이 부족했던 기자재는 이미 보충되었고, 전에 없었던 것도 지금은 전부 갖추게 되었다.민지는 오싹하기만 했다.“이, 이건 우리를 겨냥한 것 같은데?”전 실험실은 모두 소방설비를 갖추었지만 오직 그들의 실험실만 배제되었다. 그전에 민지는 줄곧 우연이라고 여겼다.우연히 그들이 당첨되었고, 또 우연히 붙잡혔다고. 누군가가 일부러 자신을 겨냥하고 있다는 것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정은은 냉소를 지으며 직접 두 사람을 데리고 부총장 사무실로 갔다.백두강은 한눈에 그들이 오미선이 올해 새로 모집한 대학원생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특히 정은은 올해 신입생 중 처음으로 학술지 에 논문을 발표한 천재로서, 그날 정기회의에서 만장이 들끓는 장면은 지금도 눈앞에 선했다.“정은 학생, 무슨 일로 날 찾아온 거지?”얼마 전 현빈과 재석의 연이은 타격을 떠올리며 그는 바로 웃음을 지었다.“부학장님, 저희 실험실이 강제로 시정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시나요?”백두강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런데 무슨 문제가 있지?”“문제라면 정말 많죠. 우선 왜 다른 실험실의 소방 기자재가 완전한데, 유
송지혜는 가슴을 안으며 싸늘하게 대답했다.“무슨 제보를 말씀하시는 거예요?”“시치미 떼지 마! 소방점검에서 왜 다른 실험실은 괜찮은데 유독 정은이 그들만 시정지시서를 받은 거야? 정말 송 교수와 관계가 없는 거야? 맹세할 수 있어?”송지혜는 웃으며 대답했다.“저 바쁜 사람이에요. 매일 보고서를 내고 논문을 써야 하는데, 굳이 학생들과 따질 필요가 있겠어요? 하지만 다른 사람이 시비를 걸었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네요.”‘나한테 학생이 얼마나 많은데. 가끔 소정은 그들이 꼴보기 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정상이잖아?’“넌 지금 갈수록 겁이 없어진 것 같아. 나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고 이런 일을 벌이다니. 날 안중에 두지도 않은 모양이지?!”송지혜는 눈살을 찌푸렸다.“이 일 때문에 절 부르신 거예요? 왜요? 오미선 교수를 대신해서 불평이라도 늘어놓으시게요? 허, 이건 부총장님 답지가 않은데.”백두강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이런 짓을 한 자신이 아주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멍청하기! 이번 소방점검은 학교 측이 시 소방대와 연합하여 전개한 거야.”“평소에 그들을 어떻게 배척하든 상관없어. 어차피 그건 너희들 자신의 일이니 소문이 퍼질 리가 없으니까.”“그러나 이번에 시 소방대과 관련된 일에 제보 전화 한 통으로 학교를 연루시켰다니!”한 실험실이 시정지시서를 받으면 학교도 불찰이라는 연대책임을 져야 했다.특히 소방기자재는 일반적으로 미리 실험실에 배치된 것이었기에, 학생들에게 빌려주기 전, 학교는 검사를 진행할 의무가 있으며 착오가 없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빌려줄 수 있었다.지금 시정지시서를 받았으니, 이것은 학교 측이 일을 소홀히 하고 책임을 제대로 지지 않았다는 것을 설명한다.“아직도 네가 똑똑하다고 생각하나?” 백두강은 코웃음을 쳤다.“다른 부총장에게 알려지면...”송지혜의 안색이 변했다.“이번에는 내가 널 대신해서 처리해주지. 하지만 앞으로 이런 말썽 좀 일으키지 마!”송지혜는 더 이상 거들먹거리지 않았고 잠시 머뭇
“누가 들어오라고 했지? 우리 실험실은 짐승을 환영하지 않으니까 눈치 있으면 빨리 꺼져. 너희들은 우리랑 싸워도 못 이겨.”“너 지금 누굴 욕하고 있는 거야?!” 진호는 화가 나서 얼굴을 붉혔다.서준은 담담하게 대답했다.“누가 대답하면 누굴 욕하는 거겠지. 지금 네가 스스로 자신이 짐승이라고 인정하고 있잖아?”“너...”지예는 냉소를 지었다.“뭘 그렇게 우쭐대고 있는 거야? 전교에 아무 문제가 없는데, 딱 너희 실험실만 시정을 해야 하다니. 정말 창피해서 말이 다 안 나오네. 그런데도 이렇게 나대고 있어?”“시정을 하면 적어도 몇 달은 걸려야 한다고 들었는데, 쯧쯧... 정말 아쉽다. 그동안 너희들은 실험실을 사용할 수 없잖아. 에 논문을 올리면 또 뭐가 어때서? 학교의 중시를 받지 못하잖아. 그런데도 잘났어?”정은은 웃으며 말했다.“원래 이 말은 하고 싶지 않았는데, 네 자존심에 영향을 줄까 봐 말이야. 그러나 생각해 보면, 짐승에게 인자할 필요가 없는 것 같아. 이렇게 생각하니 부담이 순식간에 사라지네.“그래, 난 는 내 논문을 올렸어. 하지만 넌 거기에 논문을 보낸 적조차 없잖아? 속으로 엄청 질투를 하겠지? 하지만 실력은 질투한다고 해서 느는 것이 아니라 안 되면 안 되는 거잖아. 말을 아무리 잘 해도 소용없어, 안 그래?”“야...”정은은 위아래로 지예를 훑어보았다.“사실 나도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너처럼 온종일 빈둥거리며 구경이나 하는 사람이 언제 실험을 하고 논문을 쓸 시간이 있는 거지?”“조금의 성과라도 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밤낮없이 실험실에 틀어박혀야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넌 그중에서 가장 한가하잖아. 의심이 좀 가는데?”여기까지 말하자 정은은 잠시 멈추더니 지예의 표정을 눈여겨보았다.“그 논문들 정말 너 혼자 쓴 거 맞아?”“그, 그게 무슨 헛소리야?! 네가 뭔데?! 내가 한가하다고? 그럼 내가 실험실에서 실험을 진행할 때...”“실험을 한 거야, 아니면 핸드
재석은 오늘 수업이 있었다.쉬는 시간에 그는 두 학생이 생명과학대학의 실험실에 시정지시서가 내려왔다며 의논하는 것을 들었다.재석은 원래 마음에 두지 않았지만, 두 사람이 ‘소정은'을 언급하는 것을 들었다.자세히 물어본 후에야 그것이 정은의 실험실이라는 것을 알았다.그는 바로 이쪽으로 달려왔고, 마침 세 사람의 대화를 들었다.“교수님.” 정은은 그에게 인사를 했다. “여긴 어쩐 일이에요? 어서 들어와요.”민지와 서준도 분분히 재석에게 인사를 했다.“나도 다 전해들었어. 소방대에서 시정 절차를 엄격하게 진행한다면 적어도 두 달은 걸릴 거야. 먼저 내 실험실로 가. 이 기구들도 다 옮겨갈 수 있어.”이것도 좋은 방법이었다.민지와 서준은 먼저 대답하지 않고 정은을 바라보았다.정은은 어느새 그들의 리더로 되었다.문제에 부딪치거나 결정을 내려야 할 때, 두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정은의 의견을 먼저 물어보았다.더군다나 두 사람은 재석이 자신들을 돕고 싶어서 이런 제안을 한 거라고 생각할 만큼 뻔뻔하지 않았다.정은은 잠시 침묵하다가 결국 완곡하게 거절했다....날씨가 추워지면서 날씨는 일찍 어두워졌다.해가 지고 어둠이 찾아왔다.작은 식당에서.“왜 거절한 거야?” 재석은 눈앞의 정은을 보면서 줄곧 참았던 의문을 물었다.실험실을 떠난 후, 두 사람은 같이 집으로 돌아갔다.정은은 점심을 먹지 않아 배가 고팠는데, 오늘 이런 일이 발생했기에 돌아가서 밥을 할 기분도 없었다.그래서 두 사람은 근처에서 인기가 많은 한 식당을 찾아갔다.재석이 말했다.“내가 살게.”정은은 거절하지 않았다.“그럼 잘 먹을게요.”남자는 미소를 지었다.식당의 장사가 너무 잘 되어서, 두 사람은 10여 분 동안 줄을 서야 들어갈 수 있었다.앉자마자 재석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정은은 놀라지 않고 가볍게 숨을 쉬었다.“선배님은 이미 나를 여러 번 도와주었잖아요. 그러나 이런 일은 그래도 내가 스스로 해결해야지, 평생 선배님의 도움에 기대할 순 없잖아요?
정은은 살짝 멍해졌다.“그럼 선배님은...”재석이 대답했다.“난 안 추워.”“고마워요.”골목에 도착하자, 재석은 정은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한 다음, 몸을 돌려 한쪽의 편의점에 들어갔다.1분도 안 되는 시간에 그는 마실 것 두 잔을 들고 나왔다.“자.”정은은 받으며 호기심에 냄새를 맡았다.“이게 뭐예요?”“홍차.”정은은 눈썹을 치켜세웠다.“이 편의점에서 이걸 판다고요?”‘왜 난 전혀 기억이 없지?’“시즌 스페셜이라 최근에 금방 팔기 시작했어.”“선배님도 홍차예요?”재석은 고개를 저었다.“아니. 난 메밀차야.”종이컵을 들고 있으니 정은은 손바닥이 따뜻했다. 외투까지 걸치고 있어 춥지 않았고 볼도 약간 붉어졌다.계단을 오를 때, 정은은 외투를 벗고 재석에게 돌려주었다.“고마워요, 선배님. 잘 자요.”그는 담담하게 웃으며 대답했다.“잘 자.”두 사람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정은은 샤워를 마치고 앉아서 논문을 보기 시작했다. 니트 외투를 입고 있으니 온몸이 따뜻해졌다.이때 핸드폰이 울렸는데, 소진헌의 전화였다.“네, 아빠.”[자다 일어난 거야?]“아니요, 논문 보고 있었어요.”[날씨가 많이 추워졌으니 너무 늦게 자지 말고, 옷 많이 챙겨입어.]“알았어요. 여긴 난방이 있어서 실내가 그렇게 춥진 않아요. 엄마는요?”[글 쓰고 있어. 참, 장조림 좀 보냈는데, 5kg 좀 넘어. 내일이면 도착할 거야.]“이렇게 많이요? 제가 그걸 어떻게 다 먹어요?”[너한테만 주는 게 아니야. 조 교수에게 절반 나눠줘. 너희들 이웃이니 직접 가져다줄 수 있잖아.]다른 한편, 재석은 집에 들어간 후, 평소처럼 외투를 옷걸이에 걸었다.그러나 이때 그는 멈칫하더니 다시 옷을 가져왔다.위에는 아직도 여인의 향기가 남아 있었다.재석은 저도 모르게 다가가서 냄새를 맡았다.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반응할 때, 재석은 흠칫 놀라더니 감전된 듯 외투를 소파에 버린 다음 욕실로 달려갔다.곧 물소리가 전해왔다.그러나 안에는 열기가 전혀
정은은 재석이 어이없어 하는 모습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얼른 들어요, 재석 삼촌. 우리 아빠가 만든 장조림 정말 맛있단 말이에요. 사람들은 돈을 줘도 못 먹어요.”“날 뭐라고 불렀지?” 재석은 한 손으로 벽을 짚으며 앞으로 다가갔다. “응?”정은은 물러설 수 없어 고개를 들어 애꿎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나도 단지 우리 아빠가 하신 말씀을 전했을 뿐인데, 내가 말한 것도 아니잖아요.”재석은 말을 하지 않았다.“선배님, 복도가 좁으니 뒤로 좀 물러서면 안 될까요?”재석은 자신이 감기에 걸렸다 것을 떠올리며, 정은에게 옮길까 봐 가볍게 한숨을 쉬고 옆으로 물러났다.정은은 속으로 감탄했다.‘선배님은 정말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인 것 같아. 매너도 있고.’재석이 장조림을 받자, 정은은 남은 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간 뒤 사진을 찍어 소진헌에게 보냈다.저쪽은 곧 답장을 보냈다.[조 교수에게 가져다주었어?][그럼요! 아빠, 선배님에게 너무 잘해주시는 거 아니에요?]‘나한테 많이 먹으라는 말씀조차 안 하셨잖아.’소진헌은 귀찮아서 직접 음성문자를 보냈다.[그럼! 친구를 대할 때는 대범해야지. 복이 있으면 함께 누리는 게 마땅해!]정은은 속으로 생각했다.‘선배님에게 이 말을 들려주어야 하는데. 아까 내가 함부로 말한 것도 아니잖아. 그런데 화가 나서 날 벽으로 몰아붙이다니?’그리고 정은은 방금 남자가 자신을 구석으로 몰아넣은 것을 떠올렸다. 그녀에게 몸을 기울인 순간, 재석의 냄새와 숨결이 정은을 단단히 에워쌌다.정은은 한심하게도 얼굴을 붉히며 심장이 두근거렸다.고등학교 때, 반의 남학생들도 이렇게 일부러 정은에게 다가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의 정은도 매번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도겸을 만나기 전, 정은은 이성의 접근에 적응하기 어려웠고, 심지어 답답함과 괴로움을 느꼈다.그동안 연애와 이별을 통해 이 버릇을 고칠 줄 알았지만, 뜻밖에도 예전으로 다시 돌아갔다니.정은은 자신의 이런 반응을 ‘고질병’으로 생각하며 다른 생각을
“우리 아빠의 명의로 된 부동산이 엄청 많은데, 여태껏 남을 내쫓은 적이 있어도 남에게 쫓아낸 적이 없단 말이에요!”“그래도 믿을 수 있는 건 자신밖에 없는 것 같아요! 학교에서 저희에게 낡은 방 하나 빌려주면서, CPRT도 없고 소방기자재도 없지만, 저희가 죽어라 낸 연구 성과는 결국 학교의 명의로 되어야 하잖아요? 세상에 이렇게 좋은 일이 어딨어요? 정말 재수가 없어요...”어릴 때부터 부족함 없이 자란 민지는 여태껏 이런 억울함을 당한 적이 없었다.“뭐가 그렇게 대단한 거예요? 낡은 방 한 칸일 뿐, 기기조차 저희가 스스로 산 거잖아요!”이 불 같은 성질은 정말 조금도 참을 수 없었다.그녀가 한바탕 욕설을 퍼붓자, 서준과 정은은 아연실색했다.“어... 많이 놀랐어요?” 민지의 둥근 얼굴에 어색함이 드러났고, 그녀는 얼른 설명했다.“저 평소에 이렇진 않지만, 가끔 성질이 나면 멈출 수가 없네요... 에헴!”서준은 침을 삼켰다.정은은 눈빛이 반짝거리더니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민지가 말한 것도 마침 내가 말하고 싶었던 거야! 우리가 계속 학교에서 실험실을 빌린다면, 영원히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가 없어.”학교에서 회수하고 싶으면 회수하고, 트집을 잡고 싶으면 트집을 잡고, 다른 팀에 주고 싶으면 줄 수 있으니까.그들은 아무 반항도 하지 못하고 그저 ‘도살’당할 수밖에 없었다.“그럼... 더 이상 학교에서 실험실을 빌리지 말까요?” 민지가 떠보았다.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서준이 물었다.“그럼 어디에서 빌려야 하는 거죠?”“왜 빌려? 민지가 그날 말한 것처럼, 우리 혼자 실험실 하나를 지으면 되잖아?”‘실험실을 짓는다고?’이 말이 나오자, 서준은 멍해졌다.민지는 멈칫하다가 곧바로 흥분해지더니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그래요! 저희가 실험실을 지을 수 있잖아요! 그러면 얼마나 편리해요!”그들만의 실험실이라면 남에게 빼앗길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고, 남의 괴롭힘을 당할 일도 없었다.정은이 말했다.“내가 자료를 찾아보았는
두 사람은 일제히 서준을 바라보았다.서준은 머리를 긁적였다.“왜 날 그렇게 보는 거야... 쑥스럽게.”“쮼, 너희 부모님은 도대체 뭐 하시는 분이셔?” 서준을 바라보는 민지의 눈빛이 순식간에 의미심장해졌다.정은이 말했다.“지난번에 네가 말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공무원이라고 하지 않았어?”보아하니 서준의 부모님은 일반 공무원이 아닌 모양이었다.그녀도 눈치 있게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민지는 보기에 생각이 없는 것 같지만, 사실 눈치가 무척 빨랐다.‘정부 내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신분을 숨겼다고 들었는데, 그럼 전에 서준이 말하지 않은 것도 다 이유가 있었어.그렇게 민지도 이 일을 붙잡고 늘어놓지 않았다.서준은 그제야 한숨을 돌렸다.“최선을 다해 해낼게요.”“좋아.”민지가 말했다.“실험실을 위하여.”“다시는 쫓겨나지 않기 위하여.”두 사람은 말을 마치고 일제히 정은을 바라보았다.그녀는 멈칫하다가 말을 이어받았다.“파이팅?”“파이팅!!!”...한다면 바로 한다고, 세 사람은 즉시 행동하기 시작했다.민지는 정은의 집을 나서자마자 자신의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아빠!”[그래, 우리 딸. 밥은 먹었어?]“아직이요...”민지는 순식간에 불쌍한 척했다.하정남은 이 말을 듣자마자 수상함을 알아차렸다. ‘우리 귀염둥이가 밥조차 먹지 않았다니. 큰일이 생긴 게 분명해.’[아빠한테 말해 봐, 도대체 무슨 일이야?]민지는 즉시 최근 실험실에서 발생한 일을 아버지에게 말했다.“정말 열 받죠?! 어떻게 우리한테 이럴 수가 있어요?”탁.하정남은 허벅지를 두드리며 말했다.[정말 사람을 너무 무시하네! 학교는 관리해야 할 것을 상관하지 않고, 두둔해서는 안 될 일만 단단히 보호하고 있군. 명문대학이 뜻밖에도 이런 짓을 하다니! 사람을 뭘로 보고!]“그래요!” 민지는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아빠, 내가 그때 입에서 나오는 대로 실험실을 하나 짓는 게 낫다고 말했거든요. 그런데 송지혜 교수의 두 학생
“그럼... 고백하기 전까지, 혼자서 그렇게 많이 고민한 거예요?”“응.”“어쩐지...”정은이 아주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뭐라고?” 재석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이젠 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가요...”둘은 손을 꼭 잡고 복도로 향했다. 조용한 밤, 서로의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걷던 중, 재석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정은도 따라 멈춰 서며 돌아봤다.“왜요?”“정은아, 우리 지금... 사귀는 거 맞지?”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두 사람이 꼭 잡은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그렇게 생각 안 해요? 조금 전부터 내가 ‘재석 씨’라고 부른 거 못 느꼈어요?”“혹시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정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 지었다.“흠,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평소에도 꿈에서 날 자주 본 모양이네요?”재석의 몸이 순간 굳더니, 양 볼이 순식간에 빨개졌다.‘진짜 자주 꿨나 보다?’재석은 눈을 못 마주친 채, 그저 두 사람이 맞잡은 손만 바라보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진짜 좋아.”‘정은이도, 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구나.’‘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구나.’같은 계단, 같은 복도, 수없이 함께 걸어온 길. 그동안은 늘 친구라는 이름으로, 앞서거나 뒤따르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왔지만, 오늘은 처음으로, 손을 잡고 나란히 오르는 계단.정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근데, 왜 나랑 은혁 씨한테 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재석은 목소리를 낮추며, 살짝 눈을 피했다.“미안. 계산하러 나갔다가... 우연히 통화하는 거 들었거든.”정은의 눈이 살짝 커졌다.그리고 머릿속으로 자신이 통화 중 했던 말을 하나하나 되짚어봤다.‘공항에서 보자, 기대된다, Z시 출장... 뭐 이상한 말한 것도 없는데...?’그런데도 재석은 그걸 ‘여행 약속’으로 받아들였고, 그걸로 인해 혼자 삭이다가 결국 아래층에서 고백까지 해버린 거였다.“너희, Z시에 여행 간다고 했잖아.”
정은이 멍해 있는 사이, 재석이 한 걸음 다가섰다. 늘 부드럽고 점잖던 그가, 이 순간만큼은 전에 없던 강한 기운을 뿜어냈다. ‘이 남자... 이런 눈빛도 있었나?’정은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등이 벽에 닿는 순간, 재석은 어느새 바로 눈앞에 와 있었다.정은이도 이제야 제대로 실감이 났다. 재석이 자신보다 훨씬 크다는 걸. 그리고 지금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내려다보면, 자신이 마치 남자의 품 안에 갇힌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도.재석이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이제 좀 알겠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그때 네가 학업이 먼저라고 했을 때, 난 받아들였어.”“그런데 장은혁한텐 기회를 줬지. 정은아...”그가 고개를 더 숙이자,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목선에 닿았다. 순간, 정은의 팔에 소름이 쫙 돋았다. “너, 나한테 너무 불공평해.”그 마지막 한 마디는 묘하게 서글픈 기운이 섞여 있었다.정은은 입술을 달싹이며 뭔가 말하려 했지만, 재석은 그녀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알아, 내가 지금 어떤 입장인지. 묻고 따질 자격도 없고, 네가 누구를 좋아하든, 그건 네 자유라는 것도 알아.”“이 말 꺼냈다가, 우리 사이가 끝날 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근데... 계속 참다 보니까 알겠더라.”‘난... 그렇게까지 쿨한 사람이 아니었어.’“그래서 이제 참지 않기로 했어.”‘어떻게 되든, 그건 네가 정해.’그렇게 말한 재석은 고개를 숙인 채 멈췄다. 마치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처럼.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용한 밤공기 속에서, 정은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울렸다.“이제, 제가 말해도 될까요?”“응...”“재석 씨.”정은은 처음으로 재석을 그렇게 불렀다.“고개 들어요. 나 좀 봐요.”재석의 어깨가 순간 굳어졌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그는 이미, 거절당할 각오까지 끝냈다.그런데 눈이 마주친 순간, 정은의 두 눈 속에서 재석이 본 건... 눈물이 아닌, 웃음이었다.억지로 짓는
“헤어졌다고요?”정은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몰랐어?!”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진욱은 눈을 반짝이며 의자째로 다가오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본격적인 ‘TMI’를 털어놓기 시작했다.“M시 출장 갔다 오고 며칠 안 돼서, 재석이가 바로 짐 싸서 수아를 내보냈다니까?”정은은 그 말을 듣고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재석과 수아 사이에 어떤 감정선이 있었는지, 그동안 몇 번 스쳐 지나갔던 장면들이 퍼즐처럼 빠르게 떠올랐다.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눈빛 속엔 미묘한 기류가 스쳤다.“아마 진짜 많이 좋아했나 봐. 그러니까 정리할 때도 그만큼 아프고, 오래 걸리는 거겠지. 조금만 시간 지나면, 태민이도 정리될 거야.”진욱은 이어서 말했다.“네.”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대답했다.그 이후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남의 연애는, 들을 수는 있어도 깊게 얘기하지 말아야 해. 괜히 나서 봤자... 괜히 끼어든 꼴만 되니까.’...해가 지고, 붉은 노을이 건물 유리에 비치기 시작할 무렵. 정은은 마침내 작업을 끝냈다.진욱은 기다렸다는 듯 프로그램을 열고 기능 하나하나를 테스트했다.그리고 30초쯤 흐른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어어!! 복구됐어! 됐다! 돌아왔어! 다시 쓸 수 있어!!”미진도 덩달아 벌떡 일어나 양손을 번쩍 들었다.“살았다, 진짜!! 여태 손으로 데이터 입력한 거 생각하면... 이건 거의 기적이야!”진욱은 시계를 힐끗 보더니, 정은을 향해 말했다.“지금 이 시간까지 남아서 도와준 우리 정은이, 완전 수고 많았어! 조 교수...”“응...?”갑작스레 이름이 불리자, 재석은 몇 초간 멈칫하다가 고개를 돌렸다.진욱은 능청스럽게 말했다.“아니, 정은이가 이렇게 큰일 해줬는데, 감사 표시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적어도 밥 한 끼는 사야지.”“맞아요, 맞아요. 조 교수님, 이건 진짜 밥으로도 모자라요.” 미진이 곧장 거들었다.재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략 1년 전, 정은은 한동안 재석의 실험실을 빌려 쓴 적이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전진욱, 조미진 등과 인연이 닿았다.처음엔 서로 어색하고 낯설었지만, 몇 달이 지나면서 조금씩 가까워졌고, 지금은 가볍게 농담도 주고받을 만큼 편해졌다.그러던 어느 날, 진욱은 우연히 정은이 실험 데이터를 처리하는 속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 너무 빠른 게 아닌가 싶어서 슬쩍 물어봤더니, 정은은 코딩도 할 줄 아는 공대 만능 캐릭터였다. 그녀는 직접 짠 프로그램으로 데이터를 자동 정리하고, 다차원 분류와 정렬까지 가능하다고 했다.“와, 뭐야... 완전 반칙인데?”진욱은 결국 정은에게 부탁해 실험실 맞춤형 프로그램 하나를 따로 제작해달라고 했고, 그 이후, 데이터 정리는 그야말로 신세계를 맞이했다. 진욱은 쓸 때마다 감탄하며 말했다.“진짜... 정은이 덕분이야. 이게 사람을 살리네.”하지만 어제 그 기특한 프로그램이 갑자기 먹통이 됐다. 손태민이 고쳐보겠다고 덤볐지만, 결과는... 풍비박산이었다. ‘이젠 누가 손댔다간 진짜 박살 나겠어...’ 결국 정은에게 SOS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재석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오늘 시간 돼? 안 되면, 며칠 뒤도 괜찮고...]진욱은 훨씬 급했다. 말 그대로 살려달라는 마음이었다.[야, 오늘 안 데려오면... 나 여기서 바로 싸버린다! 진짜라고, 어?!]그는 어제 약 먹고 좀 괜찮아진 줄 알았건만, 밤새 배가 또 난리였다. 오늘 아침부터 실험실 화장실은 진욱의 전용이 되었다. 오전에만 6회 방문.그 말은, 그냥 협박 아니었다. 진짜 실현 가능성이 있었으니 말이다.정은은 상황을 듣고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시간 돼요. 지금 바로 갈게요.”[그래. 그럼 내가 정문 앞으로 갈게.]‘굳이 마중까진 필요 없는데...’ 뚝-정은이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 ...10분 뒤, 정은은 학교 정문 앞에서 재석과 마주쳤다. 두 사람은 실험실로 걸어가며 프로그램
“언니, 이건 굳이 우리 의견 물을 필요도 없지 않아요? 언니가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가는 거죠. 저희한텐 뭐든 시키기만 하세요. 무조건 따라갈게요!”민지가 단호하게 말하자, 서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맞아요, 저흰 누나 믿고 가는 거예요. 결정은 누나가 해요.”정은은 그 말에 잠시 멍해졌다가,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너희들... 나 그렇게 믿어도 돼? 나도 가끔 실수하거든?”민지는 마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정은 언니가 실수했다면, 그건 100% 저랑 서준 오빠가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뜻이에요.”“그건 좀 과장이지만...”‘그래도... 이런 믿음을 받는다는 게 참 따뜻하네.’세 사람은 그렇게 식사를 마쳤다.계산은 서준이 맡았고, 정은과 민지는 먼저 주차장으로 향했다. “언니, 먼저 가요. 전 서준이 데리러 갈게요.”“응? 굳이?”“우리 집이랑 방향이 같잖아요. 서준이는 차도 없으니까, 그냥 태워다 주는 거죠, 헤헤.”“그래, 알겠어. 그럼 조심히 가. 운전 천천히 하고.”“네. 언니도 잘 들어가요!”...두 ‘파트너’와 방향을 맞춘 정은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자료 조사부터 시작해 ‘신소재 최적화 계획안’을 정리하고, 모든 내용이 빠짐없이 정리됐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확인했다.벌써 밤 10시. 정은은 핸드폰을 들고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냈다.[장은혁 씨, 시간 돼요? 상의드릴 게 하나 있어요.]그 시각, 은혁은 거실 소파에 앉아 어머니인 황희숙 여사의 ‘진실 공방’에 시달리고 있었다.“너 외할아버지한테 전화 왔어. 오늘 도시락 들고 회사 갔다며? 근데 그냥 말도 없이 두고 사라졌다고 난리야. 게다가 누가 너랑 어떤 여자가 같이 있는 걸 병원 약국에서 봤다던데? 솔직히 말해봐. 너, 여자 친구 생겼지?”은혁은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아니 외할아버지는 왜 또 엄마한테 바로 전화해요? 진짜 너무하신다니까요...”“이 자식 봐라, 말버릇 좀
진욱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렇게 마음이 있는 거면, 왜 정은이한테 솔직하게 말 안 해?”“겁나는 거지, 재석아? 말 꺼냈다가 거절이라도 당하면... 그땐 친구로도 남을 수 없을까 봐, 무서운 거잖아.”진욱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재석을 똑바로 바라봤다.“그건 너답지 않아. 내가 아는 재석이는, 망설이지 않고 결정하는 사람이었어. 결과가 불확실하다고 물러서는 사람 아니었잖아.”“정은이가 ‘지금은 연애 생각 없다’고 했지? 중요한 건 ‘지금은’이라는 거야. 사람 마음은 바뀌는 거고, 그때 거절했다고 지금도 똑같을 거란 보장은 없어. 알겠냐?”재석은 말없이 진욱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 말이 생각보다 깊게 박혔다. ‘지금도 똑같을까? 아니, 혹시... 지금은 조금 다를 수도 있는 걸까...’진욱은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야, 진심으로 말하는 건데, 너 계속 질질 끌면, 정은이 뺏긴다. 그리고 뺏기고 나서 울어봤자, 소용없을 거야.”“우리 정은이 인기 많은 거 너도 알잖아. 예전에도 정은이 두고 싸운 애들 있었잖아. 그리고 오늘 그 남자 봤지? 얼굴 잘생겼지, 젊지, 에너지 넘치지, 옷차림 보니까 집도 잘 사는 거 같던데?”재석은 이런 말을 아주 듣기 싫었다.“닥쳐.”진욱도 더 이상 말하기 싫었다. “칫. 드디어 위기감이 좀 드나?”‘그래, 긴장 좀 해라. 맨날 냉정한 척만 하지 말고... 이번엔 너도 좀 불안해져 봐야지.’...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집에 바래다준 뒤, 약을 가정부에게 전달하며, 복용 방법까지 하나하나 직접 설명했다. 봉수진은 저녁까지 먹고 가라며 붙잡았지만, 정은은 이미 서준, 민지와의 약속이 있었다.“외할머니, 며칠 안에 다시 올게요. 오늘은 친구들이랑 약속이 있어서요.”“그래그래, 알았어. 젊을 땐 많이 만나고 다녀야지.”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숙였고, 곧 차에 올랐다.약속 장소인 레스토랑에 도착했을 땐, 서준과 민지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테이블 위에
은혁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그러게요... 나야 뭐, 그랬으면 좋겠지만...”하지만 정은의 태도는 그리 확신을 줄 만큼의 호감은 아니었다.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분명히 좋아한다는 표시도 없는 애매한 선이 보이는 듯했다.‘그래서 더 미치겠어. 기대도 못 하고,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고... 이러니까 계속 마음이 붕 떠 있잖아...’그렇게 속으로 앓고 있었지만, 정은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봉수진의 약에 모든 관심을 쏟고 있었다.VIP 약국답게, 일 처리는 정말 빨랐다. 정성스럽게 달인 약이 곧바로 팩 단위로 나뉘어 밀봉되었고, 음용 방법까지 깔끔하게 안내되었다.냉장 보관 후, 따뜻한 물에 데워 마시면 된다는 안내였는데, 이 정도면 환자도 거부감 없이 약을 먹을 수 있을 것이었다. 약을 다 받은 후, 약 한 시간쯤 지나 두 사람은 병원을 나섰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은의 전화가 울렸다.“여보세요? 외할머니? 네, 약 다 받아놨어요.”“병원에서 달여줬어요. 네, 거기 계세요. 지금 바로 갈게요.”전화를 끊은 정은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은혁을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오늘 고마웠어요. 외할머니 모시러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아, 어... 그래요! 잘 가요!”은혁은 여자의 뒷모습이 멀어질 때까지 멍하니 서 있었다.심지어 여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후에도 한참을 그렇게 바라본 후에야 아쉬움 가득한 시선을 거두었다.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고, 화면엔 ‘황기' 두 글자가 떴다.“여보세요?”[야 이놈아! 도시락 던져놓고 도망가듯 나가버리면 어떡해?! 말도 못 붙였잖아! 뭐가 그렇게 급해? 뭐가 외할아버지보다 중요한 거냐고?!]“죄송해요... 헤헤.”황기는 순간 당황했다. ‘얘 지금 뭐야? 미쳤어? 웃음은 왜 이렇게 정직하게 새어 나오는 건데...?’...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태우고 병원을 나서는 중이었다. 바로 그때, 재석은 약을 수령하고 외래 진료실 앞 벤치에 앉아 있었다.
정은도 여기서 재석을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선배님, 병원엔 무슨 일로 오셨어요?”재석은 그제야 시선을 거둬들였다. 눈길이 정은에게 닿는 순간, 표정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난...”“날 데려다주러 온 거야.” 그 순간, 전진욱이 배를 감싸 쥐며 천천히 다가왔고, 재석 대신 대답을 건넸다.정은은 진욱을 바라보다가 눈이 살짝 커졌다. “교수님, 어디 아프세요?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요.”“하... 뭘 잘못 먹었는지, 아침부터 배탈이 나서... 약도 안 듣고... 이 사람이 막 끌고 오더라니까... 검사라도 받아보라고.”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하셨어요. 괜히 방치하다가 더 심해질 수도 있잖아요. 미리 체크하면 마음도 편하고요.”“어우, 너희 둘 미리 맞췄냐? 말이 어쩜 그렇게 똑같냐?” 진욱이 짐짓 장난스러운 말투로 투덜댔다.정은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재석을 바라봤다. “그랬어요?”재석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눈빛 속 어딘가 알 수 없는 감정이 일렁였다. ‘저 말투, 저 표정... 나만 아는 게 아닐 텐데...’“정은 씨, 이제 가야죠.” 그때, 은혁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아, 네.” 정은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희 먼저 갈게요.”그렇게 말한 후, 은혁과 나란히 병원 복도를 걸어 나갔다.재석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두 사람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눈빛 속 감정은 복잡하고도 묘했다. ‘뭔데, 저 둘은 저렇게 자연스러워...’“재석아? 야, 재석아!”진욱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재석은 고개를 돌렸지만, 눈빛 속 싸늘함은 여전했다. 진욱은 그 눈빛에 소름이 돋아 어깨를 움찔거렸다.“너... 왜 그래?”“방금 정은이가 ‘저희’라고 했어.”“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재석을 바라봤다. 몇 초간 멍하던 그는 그제야 이해가 된 듯 말했다. “아... 그 ‘저희’? 그게 뭐 어때서? 같이 왔으니까 ‘저희’지. 그럼
얼마 지나지 않아 황 원장은 처방전을 프린트해서 정은에게 건넸다.“수고 많으셨습니다, 원장님.”정은이 공손히 인사하자 황 원장은 손을 휘저었다.“아이구, 무슨... 이 아가씨는 인사도 참 반듯하게 잘하네요. 말도 예쁘게 하고, 얼굴도 예쁘고. 이런 손녀가 있으면, 어디 내놔도 자랑이겠네요.”봉수진은 바로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럼요. 우리 손녀는 어디 하나 빠지는 데가 없어요.”황 원장은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장난스럽게 물었다.“이렇게 예쁜 아가씨한테 남자 친구가 없을 리 없는데? 그렇죠?”봉수진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없어요! 보통 남자애들은 우리 정은이랑 안 어울려요.”“허허, 그래도 우리 손자 정도면 꽤 괜찮은데...?”황 원장이 살짝 떠보자 봉수진은 손사래를 쳤다.“아이구, 그 얘긴 그만해요. 정은이 아직은 시집 안 보낼 거예요. 지금이 제일 곁에 두기 좋을 때라니까요.”‘아이고, 또 시작이다...’정은은 속으로 헛웃음 치며 처방전을 가방에 쏙 넣고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났다.“저, 약 지으러 먼저 다녀올게요!”...진료실 문을 나서는 순간, 정은은 누군가와 부딪혔다.“아, 죄송해요!”고개를 돌려 상대방을 본 순간 정은의 걸음이 멈췄다.“은혁 씨?”은혁은 보온 도시락 통을 들고 서 있었다.“정은 씨! 또 보네요. 우리 진짜 인연인가 봐요? 하하...”“여긴... 병원인데? 누가 입원하셨어요?”정은이 도시락을 보며 물었다.“아, 아니에요. 저 입원실 온 거 아니고요! 외할아버지가 이 병원 의사세요. 오늘 외래 당번이라 저희 어머니가 직접 도시락을 싸주셨는데, 제가 대신 가져다드리러 온 거예요.”“혹시 외할아버지 성함이 황 씨?”“네! 황기 원장님이세요. 한약재 이름에서 따오셨대요, 혹시... 아는 분이세요?”‘어머나, 진짜 인연인가?’정은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오늘 저희 외할머니 진료도 황 원장님한테 받은 거예요.”“정말요? 세상에... 진짜 대박. 어쩐지 자꾸 마주치네요.”은혁은 정은 손에 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