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납득을 한 거야?]동건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계속 한 여자만 바라보는 척하지 않을 거냐고?]친구의 비웃음에 도겸은 여전히 무뚝뚝했고, 눈조차 들지 않았다.“그것도 다 연기일 뿐이잖아. 전에 그런 적이 없었던 것도 아닌데.”동건은 박수를 쳤고, 자신의 친구가 마침내 ‘정신을 차려서’ 무척 기뻤다.[그래, 내가 바로 안배할게. 깨끗할 뿐만 아니라 너에게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을 거야.]전화를 끊고 5분도 안 되는 시간에 동건이 주소를 보내왔다.[골든 파라다이스 1080.][내가 오래전부터 이 여자를 찜해뒀는데, 심지어 아직 처녀야. 너 줄게.]도겸은 입가를 실룩거리며 외투를 들고 외출했다.밤은 깊어 갔고, 남자와 여자는 침대에서 사랑을 속삭였다.이튿날 아침, 동건은 목욕가운을 입고 옆방에서 나왔다.어제 술을 많이 마셨기에, 자고 일어나니 벌써 점심이 되었다.골든 파라다이스는 고씨 가문의 산업이었고, 동건이 지낸 곳은 호텔이 특별히 그를 위해 특별히 남겨 둔 고급 스위트룸이었다. 이 룸은 면적이 웬만한 세 칸짜리 방보다 훨씬 더 넓었다.하품을 하며 머리카락을 뒤로 넘긴 동건은 목이 말라서 아예 와인 한 잔을 따른 다음 다시 거실로 향했다.나오자마자 한 여자의 섹시한 모습이 보였고, 밖으로 노출된 어깨에는 수많은 키스 자국이 있었다.도겸을 바라보는 여자의 눈빛은 애틋하고 불쌍했지만, 남자는 조금의 관심도 없었고, 돈을 준 다음 바로 사람을 보냈다. 동건의 의미심장한 눈빛을 마주하며 도겸은 천천히 담배에 불을 붙였다.“애정 어린 그 눈빛 좀 봐. 보는 내가 다 설레는데. 넌 왜 아무런 반응도 없는 거지? 너 정말 남자 맞아?”도겸은 싸늘하게 웃었다.“돈만 주면 뭐든 다 할 수 있는 여자가 뭐가 불쌍한 거지?”“하긴.” 동건은 술잔을 흔들었다.“좀 마실래?”“아니.”대낮부터 술을 마시는 사람은 아마 동건 이 술꾼밖에 없을 것이다.불빛이 손가락 사이에서 번쩍이자, 도겸은 가볍게 한 모금 빤 후, 또 천천히 연
[흠... 그럼 1차 심사를 통과한 걸 기념해서 내가 제대로 한턱 쏠 테니, 기분 내는 게 어때?]정은은 웃으며 말했다.“내가 사야 하는 거 아니야?”수민은 눈썹을 치켜세웠다.[우리끼리 그런 게 어딨어. 그럼 이렇게 정한 걸로. 얼른 옷 갈아입어, 내가 지금 바로 너 데리러 갈게.]핸드폰을 내려놓은 뒤. 정은은 방으로 돌아와서 옷장 안의 브이넥 꽃무늬 원피스를 선택했다.두 달이 지난 지금, 그녀의 머리카락은 이미 쇄골까지 자랐다. 날씨가 아직 좀 더웠기에 그녀는 치마 색깔과 비슷한 머리띠를 골라서 머리를 묶었다.30분 후, 수민은 도착했다는 문자를 보내왔다.신발을 갈아신은 정은은 가방을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수민은 차를 골목 앞에 세운 다음, 핸드폰을 놀면서 정은을 기다렸다. 무심코 고개를 들자, 조재석이 이쪽으로 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의 옆에는 한 학생이 있었는데, 가방을 메고 삭발을 하니 꽤 멋있었다.두 사람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재석의 표정은 줄곧 담담했고, 가끔 인정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얘기가 끝날 즘에 남자아이는 몸을 돌려 떠났다.수민은 얼른 재석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오빠!”재석은 눈을 들었고, 안경 아래의 두 눈은 여전히 담담했다.“네가 여긴 어쩐 일로 온 거야?”“정은이랑 같이 밥 먹으러 가려고요. 아까 그 사람... 오빠 학생이에요?”남자는 요즘 유행하는 아름다운 스타일의 훈남이 아니었지만, 깨끗하게 생긴 데다 잘생긴 얼굴은 또 남다른 부드러움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웃을 때 보조개 두 개까지 더하니, 수민은 마음이 설레기 시작했다!재석은 바보가 아니었으니 또 어떻게 그녀의 마음을 모르겠는가?“그 아이는 다른 학교의 석사인데, 방금 문제가 있어서 나한테 물었을 뿐이야.”수민은 계속 묻고 싶었지만, 이때 계단 쪽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정은이 내려왔던 것이다.재석은 안경을 위로 밀며 말했다.“너희들 나간다고 하지 않았어? 나 먼저 갈게.”“에이, 오빠도 우리랑 같이 밥 먹어요, 네?
고개를 들자, 남자의 턱은 거의 정은의 머리를 받치고 있었다. 만약 재석이 팔로 지탱하지 않았다면, 정은은 그의 품에 안겼을 것이다.정은은 정신을 차리며 얼른 뒤로 물러섰다.재석은 침을 삼키며 손을 거두어들였고, 모처럼 관심을 했다.“하이힐은 쉽게 넘어질 수 있으니, 힐이 없는 신발을 신는 게 더 좋을 거야.”정은은 피식 웃으며 한참 후에야 대답했다.“고마워요.” 오랫동안 기다려도 사람이 내려오지 않자, 인기척을 들은 수민은 답답한 마음에 복도를 향해 소리쳤다.“정은아? 너 맞아?”정은은 밖을 내다보았다.“갈게요, 다음에 또 봐요.”“음.”재석은 주먹을 살짝 쥔 다음,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귓가에는 아래층의 대화가 들려왔다.“왜 이제야 내려왔어?”“작은 문제가 좀 생겨서.”“우리 오빠 못 봤어?”수민은 재석이 이 근처에 산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 정은과 이웃이라는 것을 몰랐다.정은은 간단하게 응답했다. 그녀가 태연자약한 것을 보자, 수민도 더 이상 묻지 않았고, 화제를 돌리며 어디에 가서 밥 먹을지 생각했다. 결국 두 사람은 태국 요리를 선택했다.식사를 할 때, 수민은 지난번 맞선에 대해 말했다.“하나같이 건달인데다, 또 어찌나 오만한지. 왜 아무도 온종일 빈둥거리는 이 재벌 2세들을 대포로 쏘지 않는 거야?”이 바닥의 사람들은 모두 수민이 이름난 바람둥이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맞선을 보기 시작하다니, 사람들 모두 그녀가 창피함을 당하길 기다리고 있었다.집안 어르신의 강요를 받고 온 재벌 2세들은 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말끝마다 수민더러 본분을 지키며 나가서 얼굴을 내밀지 말고 집안일을 잘 처리하면 된다고 했다.수민은 어이가 없어서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이 멍청한 자식들은 능력도 없으면서. 남들이 다 자기들처럼 매일 먹고 놀면서 죽기를 기다릴 줄 아나 봐?’“그래서 난 홧김에 그 사람들의 ‘악행’을 전부 털어냈지.” 수민은 콧방귀를 뀌었다. 이 작은 도시에서 누가 누구를 모르겠는가.정은
시험장에 들어가기 전, 정은은 수험표, 펜, 그리고 필수적인 계산 도구를 전부 검사해 보았다.수민은 아침 일찍 그녀를 데려다 주겠다고 했는데, 정은은 수민이 요즘 두 개의 큰 프로젝트 때문에 바빠서 일어날 리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정은은 시험장 밖을 한 바퀴 둘러본 뒤, 수민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도 실망하지 않았다.어떤 친구들은 굳이 문자를 보내거나 시시각각 연락하지 않아도 우정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다. 정은과 수민은 여전히 수시로 상대방을 걱정하고 있으며, 인터넷에서는 이것을 ‘응답이 없어도 단단한 우정’이라고 한다.시험은 두 시간 걸렸는데, 답안지를 제출할 때, 다른 사람들은 흥분 또는 실망을 느꼈지만, 정은은 오히려 매우 평온했다.시험장을 나서자, 밖에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근처에서 택시를 잡기도 어려워, 정은은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가려고 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도 못할 때, 누군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정은 언니?”고개를 들자, 강서정이 복도 처마 밑에 서 있었다.“정말 언니였네요.”지난번에 정은의 집에 가서 소란을 피우며 그녀를 설득하지 못한 이후로, 서정은 더 이상 정은을 본 적이 없었다.6개월이 지난 지금, 서정은 정은과 강도겸이 줄곧 화해하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이번 일로, 처음에 두 사람이 정말 헤어질 수 없다고 장담했던 서영숙조차도 약간 흔들리기 시작했다.서정은 가끔 서영숙이 집에서 중얼거리며 하는 말을 들었다.“도겸이는 요즘 왜 자꾸 위병이 도진 거지? 전에 소정은과 함께 할 때는 이렇게 자주 병원에 입원한 적이 없잖아.”“서정아, 이번에 두 사람 정말 헤어진 거야?”“소정은 정말 미친 거 아니니?! 성질도 적당히 부려야지. 우리 가문에 아예 들어오고 싶지 않은 모양이야!”그동안 서영숙은 줄곧 정은이 자신의 아들과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하며, 두 사람 빨리 헤어지라는 말도 수백 번 말했다. 그러나 이번에 정말 헤어지니. 그녀는 좀 익숙하지 않은 것 같았다.서영숙은 말
정은은 서정의 뜻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저 미소를 지으며 설명하지 않았다.“언니 전에 서비대학교에서 나왔다고 했죠? 이번에 어느 학교에 들어갈 계획이에요?”“여전히 서비대학교야.”“일반대학원 석사과정이에요, 전문대학원 석사과정이에요?”“일반대학원 석사과정.”“전공은요?”“생물.”서정은 놀라움을 느꼈다. 뜻밖에도 그녀가 선택한 전공과 같았던 것이다.“이미 교수님을 정한 거예요?”정은도 숨기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응, 오 교수님.”“네? 오미선 교수님을 말하는 거예요?”“응.”서정은 지난번 오미선의 집에서 시간제 도우미로 일한 정은을 만났을 때를 떠올리더니, 표정이 이상해졌다. “설, 설마 교수님 댁에 가서 청소를 도와주면, 교수님이 승낙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그건 오해였어.”“오해요? 사실대로 말할게요. 오 교수님은 생물학 분야에서 최고의 학자이시고, 또 엄격하시기로 유명하거든요. 게다가 그동안 박사를 많이 책임지셨기에, 석사의 정원이 아주 적어요. 그래서...”서정은 잠깐 멈추었다.“그래서 오 교수님의 학생이 되려면 엄청 어려워요. 솔직히 나도 올해 오 교수님의 학생으로 되려고 이번 입학 시험에 참가한 거예요. 물론 언니는 내가 사심이 있어서 이런 말을 한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난 여전히 충고를 하고 싶어요. 지금 아직 늦지 않은 틈을 타서 다른 교수님으로 바꿔요. 성적이 나오려면 아직 멀었으니 충분히 다른 교수님에게 연락할 수 있어요.”서정은 자신이 이렇게까지 말했으니, 정은도 자신의 마음을 이해할 거라 생각했다.“고마워.” 정은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먼저 가볼게.”말을 마치자, 그녀는 바로 떠났다.서정은 멍하니 서 있었다‘뭐야? 이게 다야?’...5시에 지하철을 탄 정은은, 난방을 느끼며 거의 얼어붙을 것 같은 손가락이 마침내 조금 따뜻해졌다.가방 속의 핸드폰이 울리자, 그녀는 장갑을 벗었다. 발신자를 확인한 다음, 정은은 웃으며 목소리까지 경쾌해졌다.“네, 교수님.”[
겨울의 밤은 일찍 찾아왔기에, 7시도 안 되자, 도로 양쪽의 가로등이 줄지어 켜지더니 쓸쓸한 밤에 따뜻함을 더했다.지하철역에서 서비대학교까지 가는 길에 상업거리가 하나 있었다. 그곳에는 각종 노점이 있어 별의별 물건을 다 팔았다.정은은 다리를 건널 때, 멀지 않은 곳에서 군고구마를 파는 노점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바람 때문에 약간 아픈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돌려 재석에게 말했다.“여기서 나 좀 기다려요.”재석은 제자리에 서서 기다렸고, 2분 후에 정은은 따끈따끈한 군고구마 두 개를 들고 돌아왔다.“자요.”따끈따끈한 군고구마를 쪼개자, 김이 모락모락 났다. 한 입 먹으니 무척 달콤했지만, 너무 뜨거워서 혀를 델 뻔했다. 정은은 군고구마를 손에 넣고 호호 불었고, 또 조금씩 먹으며 단맛을 본 후, 미소를 활짝 지었다.정은은 고개를 돌려 재석에게 물었다.“선배님의 군고구마는 달아요?”재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이렇게 단 군고구마는 처음이었다.정은은 득의양양해하며 말했다.“흠, 나도 운이 꽤 괜찮은 것 같아요, 매번 고른 고구마가 엄청 달거든요.”재석은 정은의 미소에 저도 모르게 입술을 구부리더니, 눈빛에도 웃음이 넘쳤다.두 사람이 집에 도착했을 때, 시간은 이미 7시였다.문을 열자, 방안의 따뜻한 온도에 정은은 온몸이 나른해졌다. 그녀는 책과 펜을 서재로 가져갔다.탁자 위에는 여러 권의 엇갈린 책이 널려 있었는데, 정은은 하나하나 책꽂이에 꽂은 다음, 그중 한 권이 지난주 재석이 빌려준 전문서적인 것을 발견했다.그녀는 책을 들고 옆집 문을 두드렸다.재석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샤워하는 습관이 있었다. 이때 그는 마침 욕실에서 나왔는데, 머리카락이 아직 젖어 있었지만, 노크 소리에 재석은 얼른 가서 문을 열었다.“이건 선배님이 지난주에 빌려준 독일어 원판이에요. 돌려준다는 것을 깜박했네요.”은은한 박하 향기가 코끝을 맴돌자, 정은은 왠지 모르게 긴장되었다.재석은 책을 받았는데, 위에 메모지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한눈
토요일 날씨는 아주 좋았다.따뜻한 햇빛이 두꺼운 구름을 뚫었고, 정은은 조깅을 할 때 땀을 약간 흘렸다. 집에 가서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그녀는 미리 산 약을 들고 택시를 타고 오미선의 집에 갔다.“교수님, 이 약들은 모두 하루에 세 번 마셔야 해요. 지금은 날씨가 추워서 냉장고에 넣을 필요가 없으니까, 마실 때 살짝 데우시면 돼요.”오미선은 두려운 게 없었지만, 가장 싫어하는 것이 바로 한약의 냄새였다. 맛은 더럽게 없을 뿐만 아니라 냄새까지 매우 고약했다. 그녀는 시커먼 약즙을 보며 묵묵히 거리를 두었고, 다시 입을 열어 물었다.“꼭 마셔야 해?”“그럼요.”정은이 말했다.“전 이미 이모님에게 하루에 세 번 꼭 교수님을 잘 감시하라고 했어요. 절대로 잊으면 안 돼요.”오미선은 시무룩해졌다.“그래, 알았어.”그녀는 학생의 호의를 거절할 수 없었다.아이처럼 투정을 부리는 오미선을 보며, 정은은 입을 가리고 웃었다.“약은 엄청 쓰지만, 제가 특별히 빈대떡을 사왔어요. 매번 약을 드신 때, 빈대떡 한 조각을 드시면 그렇게 쓰지 않을 거예요.”방금 전까지만 해도 우거지상을 하던 오미선은 바로 웃음을 지었다.“그럼 그렇지.”잡담을 나누다, 오미선은 본론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내년에 서비대학교 생물학원은 실험팀을 설립할 의향이 있어. 이미 세 사람을 정했지만, 아직 나머지 두 명이 남은 상태야.”“거기에 두 가지 조건이 있는데, 첫째는 성적 및 각 과목의 종합 평균점이 모두 우수여야 하고, 둘째는 실험 점수가 반드시 두 번 또는 두 번 그 이상의 A를 받아야 해.”실험팀의 조건이 이렇게 엄격한 것을 보자, 정은은 좀 놀랐다.오미선은 그녀의 생각을 알아차리고, 천천히 설명했다.“이 실험팀에 들어가면 기말에 가산점이 있어. 우수 팀원은 졸업한 후, 직접 박사 과정을 시작할 수 있고. 아니면 썬바이오 테크놀로지 연구개발회사의 초대를 받아 그들의 실험실에 가입할 수 있어.”썬바이오 테크놀로지는 국제적으로도 유명한 존재였다. 그
정은도 오미선이 자신을 위해 얼마나 많은 신경을 썼는지 잘 알고 있었다.“안심하세요. 저는 꼭 교수님을 실망시키지 않을 거예요.”...집에 돌아오자, 정은은 가져온 자료를 훑어보기 시작했다.석사 과정에 비해, 이 과제는 구체적인 실험 및 연구성과와 관련된 동시에 또 실험경험에 대한 요구가 있었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더욱 어려웠다.그렇게 정신없이 읽어보다가, 이미 새벽이 다 되었다.정은은 피곤한 두 눈을 비비며 자려고 누웠는데, 침대에 눕자마자 누군가 미친 듯이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소정은- 문 열어! 네가 안에 있다는 거 다 알아!”거실과 침실을 사이에 두고도 강도겸의 목소리는 순식간에 정은의 귀로 전해졌다.“쾅쾅쾅-”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지난번 별장에서 하마터면 성추행을 당할 뻔했던 것을 생각하니, 정은은 입술이 창백해졌고, 이불을 잡고 있는 손에도 힘을 주었다.“소정은-”“문 열어--”“정은아-”정은은 귀를 막으며, 남자가 이대로 단념하고 떠나기를 바랐다.그러나 5분이 지나도 도겸은 여전히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마치 정은이 열지 않으면 평생 부수려는 기세였다.오래된 아파트는 방음이 잘 안됐고, 또 한밤중에 소란을 피웠으니 이웃들의 욕을 먹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사람들이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누구야, 한밤중에 시끄러워죽겠네. 잠 좀 자자!”“어느 미친개가 밤에 짖어대는 거야?”“더 이상 꺼지지 않으면 경찰에 신고할 거야!”정은은 어쩔 수 없이 침대에서 내려와, 슬리퍼를 신고 문 앞으로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강도겸, 지금 이게 무슨 짓이야?!” 정은은 화가 나서 이를 갈았다.“네가 집에 있을 줄 알았어.”“그래서?!”“문 열어, 빨리.”“왜? 당신이 누군데? 들어오고 싶으면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이냐고 당신이!”도겸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래, 그럼 계속 문을 두드릴게.”“당신--”“두드린다.”결국 정은은 문을 열 수밖에 없었다.도겸은 이 기회를 틈타 문을
“그럼... 고백하기 전까지, 혼자서 그렇게 많이 고민한 거예요?”“응.”“어쩐지...”정은이 아주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뭐라고?” 재석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이젠 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가요...”둘은 손을 꼭 잡고 복도로 향했다. 조용한 밤, 서로의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걷던 중, 재석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정은도 따라 멈춰 서며 돌아봤다.“왜요?”“정은아, 우리 지금... 사귀는 거 맞지?”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두 사람이 꼭 잡은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그렇게 생각 안 해요? 조금 전부터 내가 ‘재석 씨’라고 부른 거 못 느꼈어요?”“혹시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정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 지었다.“흠,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평소에도 꿈에서 날 자주 본 모양이네요?”재석의 몸이 순간 굳더니, 양 볼이 순식간에 빨개졌다.‘진짜 자주 꿨나 보다?’재석은 눈을 못 마주친 채, 그저 두 사람이 맞잡은 손만 바라보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진짜 좋아.”‘정은이도, 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구나.’‘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구나.’같은 계단, 같은 복도, 수없이 함께 걸어온 길. 그동안은 늘 친구라는 이름으로, 앞서거나 뒤따르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왔지만, 오늘은 처음으로, 손을 잡고 나란히 오르는 계단.정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근데, 왜 나랑 은혁 씨한테 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재석은 목소리를 낮추며, 살짝 눈을 피했다.“미안. 계산하러 나갔다가... 우연히 통화하는 거 들었거든.”정은의 눈이 살짝 커졌다.그리고 머릿속으로 자신이 통화 중 했던 말을 하나하나 되짚어봤다.‘공항에서 보자, 기대된다, Z시 출장... 뭐 이상한 말한 것도 없는데...?’그런데도 재석은 그걸 ‘여행 약속’으로 받아들였고, 그걸로 인해 혼자 삭이다가 결국 아래층에서 고백까지 해버린 거였다.“너희, Z시에 여행 간다고 했잖아.”
정은이 멍해 있는 사이, 재석이 한 걸음 다가섰다. 늘 부드럽고 점잖던 그가, 이 순간만큼은 전에 없던 강한 기운을 뿜어냈다. ‘이 남자... 이런 눈빛도 있었나?’정은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등이 벽에 닿는 순간, 재석은 어느새 바로 눈앞에 와 있었다.정은이도 이제야 제대로 실감이 났다. 재석이 자신보다 훨씬 크다는 걸. 그리고 지금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내려다보면, 자신이 마치 남자의 품 안에 갇힌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도.재석이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이제 좀 알겠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그때 네가 학업이 먼저라고 했을 때, 난 받아들였어.”“그런데 장은혁한텐 기회를 줬지. 정은아...”그가 고개를 더 숙이자,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목선에 닿았다. 순간, 정은의 팔에 소름이 쫙 돋았다. “너, 나한테 너무 불공평해.”그 마지막 한 마디는 묘하게 서글픈 기운이 섞여 있었다.정은은 입술을 달싹이며 뭔가 말하려 했지만, 재석은 그녀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알아, 내가 지금 어떤 입장인지. 묻고 따질 자격도 없고, 네가 누구를 좋아하든, 그건 네 자유라는 것도 알아.”“이 말 꺼냈다가, 우리 사이가 끝날 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근데... 계속 참다 보니까 알겠더라.”‘난... 그렇게까지 쿨한 사람이 아니었어.’“그래서 이제 참지 않기로 했어.”‘어떻게 되든, 그건 네가 정해.’그렇게 말한 재석은 고개를 숙인 채 멈췄다. 마치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처럼.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용한 밤공기 속에서, 정은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울렸다.“이제, 제가 말해도 될까요?”“응...”“재석 씨.”정은은 처음으로 재석을 그렇게 불렀다.“고개 들어요. 나 좀 봐요.”재석의 어깨가 순간 굳어졌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그는 이미, 거절당할 각오까지 끝냈다.그런데 눈이 마주친 순간, 정은의 두 눈 속에서 재석이 본 건... 눈물이 아닌, 웃음이었다.억지로 짓는
“헤어졌다고요?”정은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몰랐어?!”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진욱은 눈을 반짝이며 의자째로 다가오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본격적인 ‘TMI’를 털어놓기 시작했다.“M시 출장 갔다 오고 며칠 안 돼서, 재석이가 바로 짐 싸서 수아를 내보냈다니까?”정은은 그 말을 듣고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재석과 수아 사이에 어떤 감정선이 있었는지, 그동안 몇 번 스쳐 지나갔던 장면들이 퍼즐처럼 빠르게 떠올랐다.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눈빛 속엔 미묘한 기류가 스쳤다.“아마 진짜 많이 좋아했나 봐. 그러니까 정리할 때도 그만큼 아프고, 오래 걸리는 거겠지. 조금만 시간 지나면, 태민이도 정리될 거야.”진욱은 이어서 말했다.“네.”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대답했다.그 이후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남의 연애는, 들을 수는 있어도 깊게 얘기하지 말아야 해. 괜히 나서 봤자... 괜히 끼어든 꼴만 되니까.’...해가 지고, 붉은 노을이 건물 유리에 비치기 시작할 무렵. 정은은 마침내 작업을 끝냈다.진욱은 기다렸다는 듯 프로그램을 열고 기능 하나하나를 테스트했다.그리고 30초쯤 흐른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어어!! 복구됐어! 됐다! 돌아왔어! 다시 쓸 수 있어!!”미진도 덩달아 벌떡 일어나 양손을 번쩍 들었다.“살았다, 진짜!! 여태 손으로 데이터 입력한 거 생각하면... 이건 거의 기적이야!”진욱은 시계를 힐끗 보더니, 정은을 향해 말했다.“지금 이 시간까지 남아서 도와준 우리 정은이, 완전 수고 많았어! 조 교수...”“응...?”갑작스레 이름이 불리자, 재석은 몇 초간 멈칫하다가 고개를 돌렸다.진욱은 능청스럽게 말했다.“아니, 정은이가 이렇게 큰일 해줬는데, 감사 표시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적어도 밥 한 끼는 사야지.”“맞아요, 맞아요. 조 교수님, 이건 진짜 밥으로도 모자라요.” 미진이 곧장 거들었다.재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략 1년 전, 정은은 한동안 재석의 실험실을 빌려 쓴 적이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전진욱, 조미진 등과 인연이 닿았다.처음엔 서로 어색하고 낯설었지만, 몇 달이 지나면서 조금씩 가까워졌고, 지금은 가볍게 농담도 주고받을 만큼 편해졌다.그러던 어느 날, 진욱은 우연히 정은이 실험 데이터를 처리하는 속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 너무 빠른 게 아닌가 싶어서 슬쩍 물어봤더니, 정은은 코딩도 할 줄 아는 공대 만능 캐릭터였다. 그녀는 직접 짠 프로그램으로 데이터를 자동 정리하고, 다차원 분류와 정렬까지 가능하다고 했다.“와, 뭐야... 완전 반칙인데?”진욱은 결국 정은에게 부탁해 실험실 맞춤형 프로그램 하나를 따로 제작해달라고 했고, 그 이후, 데이터 정리는 그야말로 신세계를 맞이했다. 진욱은 쓸 때마다 감탄하며 말했다.“진짜... 정은이 덕분이야. 이게 사람을 살리네.”하지만 어제 그 기특한 프로그램이 갑자기 먹통이 됐다. 손태민이 고쳐보겠다고 덤볐지만, 결과는... 풍비박산이었다. ‘이젠 누가 손댔다간 진짜 박살 나겠어...’ 결국 정은에게 SOS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재석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오늘 시간 돼? 안 되면, 며칠 뒤도 괜찮고...]진욱은 훨씬 급했다. 말 그대로 살려달라는 마음이었다.[야, 오늘 안 데려오면... 나 여기서 바로 싸버린다! 진짜라고, 어?!]그는 어제 약 먹고 좀 괜찮아진 줄 알았건만, 밤새 배가 또 난리였다. 오늘 아침부터 실험실 화장실은 진욱의 전용이 되었다. 오전에만 6회 방문.그 말은, 그냥 협박 아니었다. 진짜 실현 가능성이 있었으니 말이다.정은은 상황을 듣고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시간 돼요. 지금 바로 갈게요.”[그래. 그럼 내가 정문 앞으로 갈게.]‘굳이 마중까진 필요 없는데...’ 뚝-정은이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 ...10분 뒤, 정은은 학교 정문 앞에서 재석과 마주쳤다. 두 사람은 실험실로 걸어가며 프로그램
“언니, 이건 굳이 우리 의견 물을 필요도 없지 않아요? 언니가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가는 거죠. 저희한텐 뭐든 시키기만 하세요. 무조건 따라갈게요!”민지가 단호하게 말하자, 서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맞아요, 저흰 누나 믿고 가는 거예요. 결정은 누나가 해요.”정은은 그 말에 잠시 멍해졌다가,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너희들... 나 그렇게 믿어도 돼? 나도 가끔 실수하거든?”민지는 마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정은 언니가 실수했다면, 그건 100% 저랑 서준 오빠가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뜻이에요.”“그건 좀 과장이지만...”‘그래도... 이런 믿음을 받는다는 게 참 따뜻하네.’세 사람은 그렇게 식사를 마쳤다.계산은 서준이 맡았고, 정은과 민지는 먼저 주차장으로 향했다. “언니, 먼저 가요. 전 서준이 데리러 갈게요.”“응? 굳이?”“우리 집이랑 방향이 같잖아요. 서준이는 차도 없으니까, 그냥 태워다 주는 거죠, 헤헤.”“그래, 알겠어. 그럼 조심히 가. 운전 천천히 하고.”“네. 언니도 잘 들어가요!”...두 ‘파트너’와 방향을 맞춘 정은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자료 조사부터 시작해 ‘신소재 최적화 계획안’을 정리하고, 모든 내용이 빠짐없이 정리됐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확인했다.벌써 밤 10시. 정은은 핸드폰을 들고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냈다.[장은혁 씨, 시간 돼요? 상의드릴 게 하나 있어요.]그 시각, 은혁은 거실 소파에 앉아 어머니인 황희숙 여사의 ‘진실 공방’에 시달리고 있었다.“너 외할아버지한테 전화 왔어. 오늘 도시락 들고 회사 갔다며? 근데 그냥 말도 없이 두고 사라졌다고 난리야. 게다가 누가 너랑 어떤 여자가 같이 있는 걸 병원 약국에서 봤다던데? 솔직히 말해봐. 너, 여자 친구 생겼지?”은혁은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아니 외할아버지는 왜 또 엄마한테 바로 전화해요? 진짜 너무하신다니까요...”“이 자식 봐라, 말버릇 좀
진욱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렇게 마음이 있는 거면, 왜 정은이한테 솔직하게 말 안 해?”“겁나는 거지, 재석아? 말 꺼냈다가 거절이라도 당하면... 그땐 친구로도 남을 수 없을까 봐, 무서운 거잖아.”진욱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재석을 똑바로 바라봤다.“그건 너답지 않아. 내가 아는 재석이는, 망설이지 않고 결정하는 사람이었어. 결과가 불확실하다고 물러서는 사람 아니었잖아.”“정은이가 ‘지금은 연애 생각 없다’고 했지? 중요한 건 ‘지금은’이라는 거야. 사람 마음은 바뀌는 거고, 그때 거절했다고 지금도 똑같을 거란 보장은 없어. 알겠냐?”재석은 말없이 진욱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 말이 생각보다 깊게 박혔다. ‘지금도 똑같을까? 아니, 혹시... 지금은 조금 다를 수도 있는 걸까...’진욱은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야, 진심으로 말하는 건데, 너 계속 질질 끌면, 정은이 뺏긴다. 그리고 뺏기고 나서 울어봤자, 소용없을 거야.”“우리 정은이 인기 많은 거 너도 알잖아. 예전에도 정은이 두고 싸운 애들 있었잖아. 그리고 오늘 그 남자 봤지? 얼굴 잘생겼지, 젊지, 에너지 넘치지, 옷차림 보니까 집도 잘 사는 거 같던데?”재석은 이런 말을 아주 듣기 싫었다.“닥쳐.”진욱도 더 이상 말하기 싫었다. “칫. 드디어 위기감이 좀 드나?”‘그래, 긴장 좀 해라. 맨날 냉정한 척만 하지 말고... 이번엔 너도 좀 불안해져 봐야지.’...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집에 바래다준 뒤, 약을 가정부에게 전달하며, 복용 방법까지 하나하나 직접 설명했다. 봉수진은 저녁까지 먹고 가라며 붙잡았지만, 정은은 이미 서준, 민지와의 약속이 있었다.“외할머니, 며칠 안에 다시 올게요. 오늘은 친구들이랑 약속이 있어서요.”“그래그래, 알았어. 젊을 땐 많이 만나고 다녀야지.”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숙였고, 곧 차에 올랐다.약속 장소인 레스토랑에 도착했을 땐, 서준과 민지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테이블 위에
은혁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그러게요... 나야 뭐, 그랬으면 좋겠지만...”하지만 정은의 태도는 그리 확신을 줄 만큼의 호감은 아니었다.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분명히 좋아한다는 표시도 없는 애매한 선이 보이는 듯했다.‘그래서 더 미치겠어. 기대도 못 하고,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고... 이러니까 계속 마음이 붕 떠 있잖아...’그렇게 속으로 앓고 있었지만, 정은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봉수진의 약에 모든 관심을 쏟고 있었다.VIP 약국답게, 일 처리는 정말 빨랐다. 정성스럽게 달인 약이 곧바로 팩 단위로 나뉘어 밀봉되었고, 음용 방법까지 깔끔하게 안내되었다.냉장 보관 후, 따뜻한 물에 데워 마시면 된다는 안내였는데, 이 정도면 환자도 거부감 없이 약을 먹을 수 있을 것이었다. 약을 다 받은 후, 약 한 시간쯤 지나 두 사람은 병원을 나섰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은의 전화가 울렸다.“여보세요? 외할머니? 네, 약 다 받아놨어요.”“병원에서 달여줬어요. 네, 거기 계세요. 지금 바로 갈게요.”전화를 끊은 정은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은혁을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오늘 고마웠어요. 외할머니 모시러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아, 어... 그래요! 잘 가요!”은혁은 여자의 뒷모습이 멀어질 때까지 멍하니 서 있었다.심지어 여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후에도 한참을 그렇게 바라본 후에야 아쉬움 가득한 시선을 거두었다.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고, 화면엔 ‘황기' 두 글자가 떴다.“여보세요?”[야 이놈아! 도시락 던져놓고 도망가듯 나가버리면 어떡해?! 말도 못 붙였잖아! 뭐가 그렇게 급해? 뭐가 외할아버지보다 중요한 거냐고?!]“죄송해요... 헤헤.”황기는 순간 당황했다. ‘얘 지금 뭐야? 미쳤어? 웃음은 왜 이렇게 정직하게 새어 나오는 건데...?’...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태우고 병원을 나서는 중이었다. 바로 그때, 재석은 약을 수령하고 외래 진료실 앞 벤치에 앉아 있었다.
정은도 여기서 재석을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선배님, 병원엔 무슨 일로 오셨어요?”재석은 그제야 시선을 거둬들였다. 눈길이 정은에게 닿는 순간, 표정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난...”“날 데려다주러 온 거야.” 그 순간, 전진욱이 배를 감싸 쥐며 천천히 다가왔고, 재석 대신 대답을 건넸다.정은은 진욱을 바라보다가 눈이 살짝 커졌다. “교수님, 어디 아프세요?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요.”“하... 뭘 잘못 먹었는지, 아침부터 배탈이 나서... 약도 안 듣고... 이 사람이 막 끌고 오더라니까... 검사라도 받아보라고.”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하셨어요. 괜히 방치하다가 더 심해질 수도 있잖아요. 미리 체크하면 마음도 편하고요.”“어우, 너희 둘 미리 맞췄냐? 말이 어쩜 그렇게 똑같냐?” 진욱이 짐짓 장난스러운 말투로 투덜댔다.정은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재석을 바라봤다. “그랬어요?”재석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눈빛 속 어딘가 알 수 없는 감정이 일렁였다. ‘저 말투, 저 표정... 나만 아는 게 아닐 텐데...’“정은 씨, 이제 가야죠.” 그때, 은혁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아, 네.” 정은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희 먼저 갈게요.”그렇게 말한 후, 은혁과 나란히 병원 복도를 걸어 나갔다.재석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두 사람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눈빛 속 감정은 복잡하고도 묘했다. ‘뭔데, 저 둘은 저렇게 자연스러워...’“재석아? 야, 재석아!”진욱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재석은 고개를 돌렸지만, 눈빛 속 싸늘함은 여전했다. 진욱은 그 눈빛에 소름이 돋아 어깨를 움찔거렸다.“너... 왜 그래?”“방금 정은이가 ‘저희’라고 했어.”“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재석을 바라봤다. 몇 초간 멍하던 그는 그제야 이해가 된 듯 말했다. “아... 그 ‘저희’? 그게 뭐 어때서? 같이 왔으니까 ‘저희’지. 그럼
얼마 지나지 않아 황 원장은 처방전을 프린트해서 정은에게 건넸다.“수고 많으셨습니다, 원장님.”정은이 공손히 인사하자 황 원장은 손을 휘저었다.“아이구, 무슨... 이 아가씨는 인사도 참 반듯하게 잘하네요. 말도 예쁘게 하고, 얼굴도 예쁘고. 이런 손녀가 있으면, 어디 내놔도 자랑이겠네요.”봉수진은 바로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럼요. 우리 손녀는 어디 하나 빠지는 데가 없어요.”황 원장은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장난스럽게 물었다.“이렇게 예쁜 아가씨한테 남자 친구가 없을 리 없는데? 그렇죠?”봉수진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없어요! 보통 남자애들은 우리 정은이랑 안 어울려요.”“허허, 그래도 우리 손자 정도면 꽤 괜찮은데...?”황 원장이 살짝 떠보자 봉수진은 손사래를 쳤다.“아이구, 그 얘긴 그만해요. 정은이 아직은 시집 안 보낼 거예요. 지금이 제일 곁에 두기 좋을 때라니까요.”‘아이고, 또 시작이다...’정은은 속으로 헛웃음 치며 처방전을 가방에 쏙 넣고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났다.“저, 약 지으러 먼저 다녀올게요!”...진료실 문을 나서는 순간, 정은은 누군가와 부딪혔다.“아, 죄송해요!”고개를 돌려 상대방을 본 순간 정은의 걸음이 멈췄다.“은혁 씨?”은혁은 보온 도시락 통을 들고 서 있었다.“정은 씨! 또 보네요. 우리 진짜 인연인가 봐요? 하하...”“여긴... 병원인데? 누가 입원하셨어요?”정은이 도시락을 보며 물었다.“아, 아니에요. 저 입원실 온 거 아니고요! 외할아버지가 이 병원 의사세요. 오늘 외래 당번이라 저희 어머니가 직접 도시락을 싸주셨는데, 제가 대신 가져다드리러 온 거예요.”“혹시 외할아버지 성함이 황 씨?”“네! 황기 원장님이세요. 한약재 이름에서 따오셨대요, 혹시... 아는 분이세요?”‘어머나, 진짜 인연인가?’정은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오늘 저희 외할머니 진료도 황 원장님한테 받은 거예요.”“정말요? 세상에... 진짜 대박. 어쩐지 자꾸 마주치네요.”은혁은 정은 손에 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