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은 그라프트지를 들고 함께 서비대학교로 향했다.두 사람은 구경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정은은 현빈이 확실히 박식하며 그녀가 어떤 화제를 꺼내든 그는 전부 대답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말투가 침착하고 태도까지 부드럽고 우아하여, 함께 지낼 때 다른 부담이 없었다.한참을 둘러보다가 돌담을 지날 때, 정은은 무심코 고개를 돌렸는데, 익숙한 누군가를 발견했다.재석은 금방 수업을 마쳤고, 실험실에 가려던 참에 갑자기 고개를 들자, 정은의 웃는 얼굴과 마주쳤다. 그는 멍하니 있다가 또 그녀의 곁에 서 있는 현빈을 보았다.“금방 수업을 끝낸 거예요?”정은이 먼저 입을 열었다.재석은 고개를 끄덕였다.“실험실에 가려던 참인데, 너는?”“친구 데리고 학교 구경을 하고 있었어요. 소개할게요, 선배님, 이분은 심현빈이라고 해요, 그리고 현빈 씨, 이분은 조재석 교수님이고요.”두 남자는 시선이 마주치자, 현빈은 내색하지 않고 입술을 구부리더니 손을 내밀었다.“조 교수님이셨군요. 이름 많이 들었어요.”재석도 악수를 했다.“만나서 반가워요.”조씨 가문과 심씨 가문은 모두 J시의 명문가였다. 그래서 많든 적든 서로의 이름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었지만, 이렇게 만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두 사람 사이에서 은근히 불꽃이 튀었지만, 정은은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그런데, 악수 시간이 좀 너무 긴 거 아니야?’재석은 또 현빈을 힐끗 보더니 먼저 손을 놓았다. “난 먼저 실험실에 가야 해서.”정은은 재석이 떠나는 것을 지켜봤고, 현빈은 생각에 잠긴 듯 정은을 바라보았다.“그 사람과 잘 알고 있는 사이야?”“그럭저럭이에요.”정은은 너무 많이 말하고 싶지 않았기에 현빈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그날 저녁, 정은은 또 현빈의 톡을 받았다.[오늘 학교 구경시켜 줘서 고마워.][별일 아니니, 고마워할 필요 없어요.]그녀는 핸드폰을 침대 머리맡에 놓은 다음, 침대에 누웠다.부드러운 베개는 어제 금방 말린 것인데, 은은한 비누 향기가 따뜻하면서도
재석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정은은 깨끗한 그릇과 접시를 찾아 또 깨끗한 젓가락으로 만두 두 개를 담은 다음, 그의 앞으로 밀었다.“한 번 먹어볼래요?”재석은 한순간 망설였지만, 만두 하나를 집어 입에 넣은 다음 천천히 씹었다.정은은 눈을 깜박거리며 물었다.“어때요?”그녀의 간절한 모습을 보며 재석은 고개를 끄덕였다.“맛있네.”정은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그렇죠? 내가 추천한 음식이 맛없을 리가 없잖아요?”재석도 따라서 웃기 시작했다....전선우가 심현빈에게 물었다.“현빈 형, 이제 곧 생일이지 않아요? 올해는 어떻게 지낼 거예요? 레이싱? 미녀쇼? 아니면 우리 스트리퍼를 청하는 건 어때요? 하하하...”고동건은 즉시 맞장구를 쳤다.“이 제안 괜찮네.”두 사람은 동시에 현빈을 바라보았다.그들 세 사람 중, 현빈이 가장 흥청망청 노는 사람이었다.비록 매일 양복 차림을 하고 있어 엘리트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다른 그 누구보다도 미친 존재였다.“올해는... 그냥 간단하게 생일파티를 열고 싶어.”선우와 동건은 동시에 말문이 막혔다.“왜? 무슨 문제라도 있어?”“아니, 이게 형답지가 않아서 그래요.” 선우는 현빈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오늘 약 잘못 먹었어요?”동건도 참지 못하고 눈썹을 찌푸렸다.“나 잘못 들은 거 아니지? 생일파티? 너 우리 할아버지한테 배운 거야?”‘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간단하게 생일파티를 열다니?’“설마...”선우는 눈알을 굴렸다.“여자들이 막 벗는 그런 파티예요?”동건은 벌떡 일어나더니, 두 눈 역시 반짝반짝 빛이 났다.“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냥 정상적인 그런 파티야. 금성동 개인 별장에서 열 거니까 며칠 후에 초대장 보낼게.”말이 끝나자, 현빈은 자리를 떠났다.선우와 동건은 눈을 마주치더니 일제히 창밖을 바라보았다.‘오늘 해가 서쪽에서 뜨지도 않았는데?’...다른 한편, 현빈의 전화를 받은 정은은 깜짝 놀랐다. 상대방이 자신을 생일파티에 초청하겠다는 말을 듣자, 그녀는
도겸은 눈을 부릅뜨며 저도 모르게 연희의 손을 뿌리쳤다.연희는 깜짝 놀라 눈살을 찌푸렸고, 그의 시선을 따라 바라보니, 정은이 바로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도겸은 미간을 찡그리며 현빈에게 물었다.“너 소정은까지 초대한 거야?”“응, 다 친구잖아.” 현빈은 단순하게 웃었다.“왜 나한테 미리 말하지 않았어?”현빈은 어깨를 으쓱했다.“너무 바빠서 까먹었어. 말 안 해도 괜찮은 거 아닌가?”저쪽의 정은도 도겸을 보았지만, 즉시 시선을 돌렸다.그녀는 이번에 축하를 해준 다음 바로 가려고 했다. 지금 책을 보고 자료를 찾느라 바빴기에 정은은 이런 모임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여기까지 생각하자, 정은은 곧장 현빈에게 다가갔다.“생일 축하해요. 항상 오늘처럼 즐겁고 건강하길 바라요. 이건 내가 준비한 선물이에요. 귀중한 물건이 아니니 현빈 씨가 싫어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그녀는 선물 박스를 현빈에게 건네주었다. 현빈은 받으면서 낮은 소리로 웃었다.“고마워.”그는 오늘의 주인공이었고, 눈부신 태양과 같은 존재였다. 파티가 시작된 후부터 이미 많은 사람들을 접대했기에, 지금 몸에 술기운이 조금 묻어났다.“오늘 같은 즐거운 날에 술 한잔하지 그래?” 술을 든 웨이터가 다가오자, 현빈은 와인 한 잔을 들었다.“내가 먼저 마실게.”그가 한입에 다 마시는 것을 보며, 정은도 마시지 않을 수가 없었다.원샷을 한 다음, 정은은 시간을 확인하며 이제 가봐야 한다고 말했다.현빈은 눈썹을 치켜세웠다.“시간이 아직 이른데. 그리고 모임도 이제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어. 벌써 가려고?”정은이 난처해하는 모습을 보며, 현빈은 또 말을 바꾸었다.“그럼 이렇게 하자, 좀만 더 있어. 적어도 케이크를 자르고 난 다음에 가도 되잖아.”“그래요.” 정은이 대답했다.와인 한 잔을 마신 그녀는 이미 조금 취했다. 그리고 방안의 난방이 너무 빵빵해서, 그녀는 약간 숨이 막혔다.현빈은 다른 손님을 접대하고 있었고, 정은은 웨이터에게 길을
현빈은 낮은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난 널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지 않았어.”정은은 알아듣지 못하고 두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이때, 현빈이 다시 입을 열었다.“줄곧 너와 키스하고 싶었고.”정은은 충격을 받아 한참 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그녀의 머리는 혼란스러웠고, 심지어 이 순간, 이 장면이 도대체 현실인지 꿈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이건 너무 말이 안 되잖아!’현빈은 입술을 구부렸다. 잘생긴 얼굴은 사악함과 오만함을 드러냈고, 그의 몸에서 나는 술기운까지 더하니, 점잖은 도련님 대신 여자를 마음대로 가지고 노는 바람둥이와 같았다.“왜? 많이 놀랐어?”놀란 것뿐만이 아니라 정은은 지금 머릿속이 새하얘졌다.“당, 당신...”그녀는 입술을 벌렸지만 좀처럼 말을 잇지 못했다.“그래, 난 널 좋아해.”“그게 무슨 소리예요?! 내가 어떻게 당신과...”“시도도 해 보지 않고 거절하려는 거야?”“당신은 강도겸의...”‘두 사람 절친 아니었어?’“두 사람 이미 헤어졌고, 난 네가 좋아서 지금 대담하게 구애를 하고 있는 건데, 그게 무슨 문제가 있지?”정은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며 앞에 있는 남자를 진지하게 훑어보았다.현빈은 키가 훤칠하고 잘생겼으며 또 기질이 우아하고 부드러웠다.도겸이 만약 언제 비가 올지 모르는 변덕스러운 날씨라면, 현빈은 손가락 사이를 지나가는 바람과 같았다. 형태가 없어 마치 손쉽게 얻을 수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잡을 수가 없었다.“미안해요.” 정은이 입을 열었다. “나는 당신을 좋아하지 않아요.”현빈은 마치 예상이라도 한 듯, 화를 내지 않고 심지어 가볍게 웃었다. “응, 나도 알아.”정은은 한숨을 돌리려 했지만, 현빈이 또다시 입을 열 줄이야.“그래서 난 지금 너에게 구애를 하고 있는 거지, 나와 사귀자고 고백하는 게 아니야.”정은은 할 말이 없었다.“왜 나에게 기회를 주지 않은 거야? 도겸은 눈이 멀어서 널 소중히 여기지 않았지만, 난 그런 사람이 아니거든.”현빈은 정은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너!” 도겸은 정은을 바라보았다.“너도 정말 더럽구나. 왜 하필이면 심현빈을 꼬시는 거냐고? 일이 이렇게 되니까 이제 기분이 좋은 거야?”정은은 이 말을 듣고 그저 분노와 억울함을 느낄 뿐이었다. ‘난 영문도 모른 채 이 일에 말려든 피해자인데, 나에게 무슨 잘못이 있다는 거지?’도겸의 질문에 현빈은 무서울 정도로 평온했다.그는 다친 콧등을 어루만지며, 차갑게 웃었다.“우리가 뭘 하고 있었는지, 너도 다 봤잖아?”도겸은 무뚝뚝하게 물었다.“그래서, 이제 설명도 하고 싶지 않은 거야?”“뭘 설명해? 내가 정은 씨를 좋아하는 거? 그래서 지금 정은 씨에게 구애하고 있는 거?”이 말이 나오자, 정은의 얼굴은 창백해졌다.도겸은 분노에 눈시울을 붉히며 현빈의 얼굴에 계속 주먹을 날렸다.“병신! 정은이 좋다고? 구애를 하고 싶다고?! 네가 뭔데?!”현빈은 한 대 맞은 다음, 머리가 윙윙거렸지만 가장 먼저 정은을 뒤로 감쌌다.“왜? 안 되는 거야?”현빈이 애인인 것처럼 정은을 보호하자, 도겸을 다시 한번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이를 악물며 또박또박 말했다.“당연히 안 되지!”“넌 무슨 자격으로 이런 말을 하는 거지? 이미 헤어진 전 남자친구?”“누가 헤어졌다고 그랬어? 네가 뭔데?”“허, 네가 말했잖아? 먼저 정은 씨와 헤어지자고 한 사람은 너라고. 그때 우리 모두 그 자리에 있었는데, 벌써 잊었어?”“그래.” 도겸은 냉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너 일부러 그런 거지?”현빈은 은근히 미안해했다.“미안해, 네가 먼저 손을 놓아서..”“그래도 정은은 네가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심현빈, 넌 여자가 없는 거야 뭐야? 왜 내 전 여자친구에게 손을 대려는 건데!”“강도겸, 너 좀 진정해. 지금 이 사회에서 이별을 하는 커플이 얼마나 많은데. 넌 이미 정은 씨와 헤어졌잖아. 설마 정은 씨는 영원히 다른 남자와 함께 있을 수 없는 거야? 내가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이 나타나겠지.”도겸의 머릿속에는 자기도 모르게
“야! 이게 뭐야?”“두 사람 미쳤어?!”“그만해요! 도겸 형! 현빈 형.”두 사람은 얼른 도겸과 현빈을 잡았고, 이때 선우가 먼저 말했다.“도겸 형, 화 좀 풀고 진정해요!”동건도 따라서 입을 열었다.“현빈아, 정신 좀 차려! 친구들끼리 말로 하면 될 것을 왜 싸우고 그래?!”도겸과 현빈은 동시에 말했다.“이거 놔! 놓으라고!”두 사람이 주먹을 쥐고 계속 싸우려는 것을 보니, 선우와 동건은 그들이 무슨 말을 해도 손을 놓으려 하지 않았다.“말해봐, 도대체 무슨 일이야.” 동건은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무슨 일 있으면 상의할 수 있잖아요. 다 친구니까 화기애애하게 지내요!” 선우도 입을 열어서 두 사람을 설득했다.“도겸아, 오늘은 현빈의 생일이니, 무슨 큰일이 있어도 내일 다시 얘기하자.”현빈은 손으로 입가의 피를 지우며 화가 난 도겸을 힐끗 바라보더니, 입가를 구부렸다.“내가 방금 한 말 다 진심이야. 물론 심사숙고를 거쳐서 내린 결정이기도 하니까 넌 끼어들 자격이 없어.”말이 끝나자, 현빈은 몸을 돌려 창백한 얼굴로 멍을 때리고 있는 정은에게 다가가며 외투를 벗더니 부드럽게 그녀에게 걸쳐주었다.“괜찮아? 많이 놀랐지? 내가 정은 씨 집으로 데려다줄게.”선우와 동건은 이 장면을 보고 저마다 멍해져 어안이 벙벙해졌다.‘심현빈과 소정은? 지금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야? 그래서 방금 도겸이 미쳐 날뛰기 시작한 거였구나!’정은은 이때 정신을 차렸다. 현빈이 내민 손을 보면서 그녀는 내색하지 않고 뒤로 물러서더니 몸에 걸친 외투까지 벗어 그에게 돌려주었다.“아니에요, 나 혼자 돌아가면 돼요. 두 사람의 일에 더 이상 날 끌어들이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난 장난감이 아니고, 당신들도 날 이리저리 빼앗을 자격이 없어요.”“그리고.”정은은 눈을 들어 또박또박 말했다.“우리는 앞으로 더 이상 연락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요.”이것은 현빈에게 한 말이기도 하고, 또한 멀지 않은 곳에 눈을 붉히고 있는 도겸에게 한 말이기도 했다.“정은
그러나 다음 순간, 다른 사람이 나타나서 현빈의 손을 붙잡았다.현빈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 사람을 바라보았고, 말투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당신이 왜 여기에 있는 거죠?”정은은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선배님이 어떻게...”그 순간, 정은은 하마터면 눈물을 흘릴 뻔했다.조재석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괜찮아?”정은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곧 울 것만 같았다.‘괜찮을 리가 없잖아.’“내 차가 마침 여기에 있는데, 내가 집에 데려다 줄까?”“네, 그럼 부탁할게요.”재석은 정은의 어깨를 안으며 이곳을 떠나려 했다.정은은 자기가 궁지에 몰린 쥐와 같다고 느꼈다. 절체불명의 순간, 재석이 나타나자 그녀도 마침내 마음이 놓였다.“선배님, 여긴 어쩐 일로 온 거죠?”별장 옆에는 고급 호텔이 있었는데, 재석은 마침 세미나에 참석하러 왔다. 중간에 신선한 공기를 마시려고 밖에 나왔고, 뜻밖에 이런 장면을 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마침 일이 있어서...”“잠깐만요.” 현빈은 그들을 쫓아갔다.“조 교수님, 지금 잘못 찾아온 거 아니에요? 세미나는 옆의 호텔에서 진행되고 있는데. 여기는 내 개인 별장이에요.”재석이 멈칫하자, 정은도 따라서 멈추었다.현빈은 계속 말했다.“제 손님은 내가 직접 바래다주면 되니, 조 교수님이 신경 쓸 필요가 없어요.”재석은 몸을 돌려 담담하게 그를 바라보았다.“그럼 손님의 의사를 물어본 적이 있나요?”정은은 즉시 입을 열었다.“난 조 교수님과 같이 떠나고 싶어요.”현빈은 말문이 막혔다.“정은 씨...”재석이 말했다.“가자.”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거기 서!” 정은이 두 남자와 얽히고설킨 것을 보며, 도겸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소정은, 너 어디 가려는 거야?”“집에.”“허... 이 남자의 집으로 가려는 거지?” 도겸은 재석을 가리키며 냉소를 지었다.“너 이렇게도 비천한 여자였어? 남자 없으면 못 사는 거야?”“우리가 헤어지기 전에, 넌 이미 나 몰래 다른 남자와 잤지? 소정
그러나 현빈은 오히려 냉정하게 도겸을 바라보았다.“전에 이미 물어봤었잖아? 그리고 너도 동의했고. 지금 와서 이런 얘기를 하면 또 무슨 소용이 있는 거지?”도겸은 얼마 전의 톡방 채팅 기록을 떠올리며,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정은은 더욱 온몸이 떨리더니 다리가 비틀거렸다. 재석은 제때에 그녀를 부축했다.“지금 바로 널 데리고 떠날게.”현빈은 눈을 가늘게 뜨며 재석을 막았다.“정은 씨를 어디로 데려가려는 거죠? 여긴 심씨 가문의 구역이에요. 조 교수님이 들어오고 싶으면 들어오고, 떠나고 싶으면 떠날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요.”도겸도 무엇을 의식했는지, 악독한 눈빛으로 재석을 바라보았는데. 눈에 분노가 용솟음치고 있었다.재석은 담담하게 눈을 들었고, 평소에 맑고 부드러운 두 눈은 이때 위험할 정도로 날카로워졌다.“엘리간트 호텔 세미나의 발기인은 썬바이오의 조 회장이에요. 이제 세미나도 곧 끝날 텐데. 오늘 조 회장님도 참가하셨으니, 내가 전화를 한다면, 아마 2분 안으로 달려오실 거예요. 만약 심씨 가문과 강씨 가문의 어르신들이 오늘 일어난 이 난장판을 전해 듣게 하고 싶지 않다면, 이쯤에서 멈추는 게 좋을 거예요.”소씨 가문의 권세와 지위는 결코 심씨 가문이나 강씨 가문이 맞설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재석은 직접 양가의 어르신들까지 언급했다...현빈은 잠시 망설였고, 도겸도 눈살을 찌푸렸다.“그리고, 만약 내가 잘못 기억하지 않았다면, 조씨 가문과 강씨 가문은 지금 협력 관계일 거야. 만약 이 일로 인해 두 가문의 협력에 변고가 생긴다면, 그건 결코 너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지.”재석은 담담하게 말했지만, 현빈과 도겸은 모두 그의 경고를 알아차렸다.그러나 재석은 그들의 반응에 신경 쓰지 않았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비켜요.”도겸은 어두워진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현빈은 두 눈을 가늘게 뜨더니, 물러서서 재석이 정은을 데리고 떠나게 할 수밖에 없었다.“젠장!”옆에 있는 돌을 걷어차면서, 도겸은 화병 때문에
정은은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 안전벨트를 매고 창밖을 슬쩍 바라봤다. 공장은 호텔에서 10km 떨어진 개발지구에 자리 잡고 있었다.은혁이 운전대를 잡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 구역은 첨단 기술 산업 클러스터로 지정돼 있어서, 기술 협력 프로젝트도 대부분 그쪽으로 집중되고 있어요.” “정은 씨가 찾는 그 새로운 감온 정확도 소재는 우리랑 CG그룹이 공동 개발한 건데, 지금까지 1세대부터 3세대까지 세 가지 버전이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집중했고, 중간중간 전문적인 질문도 빠짐없이 던졌다. 은혁이 답할 수 있는 부분은 성의껏 설명했지만, 구체적인 수치나 실험 조건처럼 세세한한 부분은 바로 대답하기 어려운 것도 있었다.약 20분 후, 두 사람은 공장에 도착했다. 은혁이 미리 연락해 둔 덕분에, 정문 앞에는 담당자가 나와 있었다.정은은 안내받아 간단히 실험실과 공장을 둘러봤다. 연구 구역과 생산라인은 전혀 겹치지 않게 구획이 나뉘어 있었고, 현장도 전반적으로 정돈된 느낌이었다.정은이 요청한 소재의 1세대와 2세대는 이미 완제품으로 확보되어 있었지만, 3세대는 아직 실험 단계였기에 정식 생산은 되지 않았다. 따라서 실험실에서 직접 합성해야 했다.“시간은 얼마나 걸리죠?” 정은이 은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은혁은 옆에 있는 연구원을 바라봤다.“8시간 정도 걸릴 것 같아요. 내일 오전엔 제품 받아보실 수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관련 비용은 정산대로 처리해 주세요. 최종 결정되면 한 번에 입금할게요.”은혁은 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비용은 무슨 비용... 정은 씨, 우리 사이에 뭘 그렇게 딱딱하게 굴어요.”정은은 침착하게 말했다. “그럴수록 더 딱딱하게 해야죠. ‘친할수록 돈 문제는 분명하게.’ 이건 기본이에요. 더군다나, 우리 둘은 그냥 ‘친구’일 뿐인데, 은혁 씨가 도와주는 것만 해도 충분히 고마워요.”“게다가 실험실도 예산이 따로 있는 조직이고, 모든 비용
실험실에서 진욱은 오늘만 몇 번째인지 모르게 재석을 힐끔거렸다. 결국 참지 못하고 다가갔다. “재석아, 너 오늘 길 가다 돈 주웠냐?”실험대 앞에서 입꼬리를 내릴 줄 모르던 재석의 손이 잠깐 멈췄다. “데이터 정리는 다 됐어? 3차 실험 가능성 평가 보고서는 언제 낼 건데?”“하, 이 사람 분위기 다 깨네.” 진욱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근데 말이야, 오늘 아침에 네가 샌드위치 먹는 거 봤거든.”“그래서?”“정은이가 해준 거지? 다 알아. 너희 둘, 다시 잘 되는 거야? 그것도 아니면, 이제 미련 접은 거야?” 재석은 살짝 고민하다가, 이제는 말해도 되겠다 싶어 입을 열려고 했다.바로 그때, 핸드폰에서 톡 알림이 떴다. 정은이었다.[도착했어요. 샌드위치는 맛있었어요?]재석은 바로 답장했다.[맛있었어.]정은은 곧장 자신의 일정을 재석에게 알려줬다.[지금 호텔 체크인하고, 오후엔 공장 갈 거예요.][응, 알겠어.]1분 정도 지났지만, 그다음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 재석은 괜히 허전해졌다.‘예전에도 이렇게 대화했었는데... 왜 지금은 이걸로는 부족하지?’정은과 더 오래 이야기하고 싶었다. 더 많은 말, 더 사적인 얘기, 더 가까운 거리. 그 마음은 마치, 가려운 곳을 손톱 끝으로 슬쩍 긁은 느낌. 절대 시원하지 않았다. 그냥 더 간지러워질 뿐.‘그냥, 정은이한테 세게 할퀴어지고 싶은데...’“누구랑 톡하냐?” 진욱이 슬쩍 핸드폰을 들여다보려 다가왔다.재석은 피할 틈도 없이 화면을 들킨 셈이 됐다. “뭘 감춰. 정은이랑 메시지 주고받는 거잖아. 왜? 뭐가 부끄럽다고.”“됐고.” 재석은 핸드폰을 집어넣고, 실험대에서 내려왔다. “오늘 점심은 내가 쏜다. 뭐 먹고 싶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몇 초 멈췄다. 옆에 있던 미진이랑 태민이 눈을 마주쳤다. “교수님,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갑자기 점심을요?”재석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먹고 싶은 거 생각나면 전 교수한테 말해.
비행기 이륙 직전, 은혁이 정은에게 제한했다. “정은 씨, 내 마일리지로 좌석 업그레이드해 줄게요.”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은혁의 얼굴에 아쉬움이 스쳤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로 돌아갔다. 잠시 후, 다시 다가와 말했다. “내가 정은 씨 옆자리로 바꿨어요.”비즈니스석에서 이코노미석으로 자리를 바꾸다니, 웬만한 사람이면 거절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은혁 씨,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돼요.” 정은은 단호한 어조였다.‘처음으로 이렇게까지 분명하게 말한 것 같아.’정은은 연애 한 번 안 해본 소녀가 아니었다. 은혁의 눈빛에 담긴 감정이 어떤 건지, 모를 리 없었다.하지만 그동안 굳이 선을 긋지 않은 건, 은혁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며, 오히려 몇 번이고 도와줬기 때문이었다. 이번 Z시 출장도 은혁의 도움 덕에 가능했던 일이었다.게다가 은혁이 고백도 안 했고, 정은이 불편할 정도로 다가온 것도 아니었으니까... 정은도 자신이 먼저 딱 잘라 말하는 게 오히려 예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그리고 그때의 정은은 솔로였고, 재석이 입을 열게 하기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의 자극은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정은은 이미 재석과의 관계를 정리했고, 은혁은 더 적극적으로 다가오고 있으니, 그녀도 이제 더 늦기 전에 확실히 은혁에게 말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래야 서로 상처받지 않을 테니 말이다.은혁은 정은의 말에 잠시 당황한 듯하다가, 이내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난 정은 씨 옆자리에 있는 게 좋아서 그래요.”정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즈니스석 티켓을 사 놓고 누구랑 자리를 바꾸든, 그건 상대방의 자유니까. 굳이 뭐라고 할 필요는 없지.’그 후, 정은은 노트북을 열고 일에 집중했다. 은혁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틈틈이 정은을 흘끗거렸다.그러다 손을 들어 승무원을 불렀다. “저기요. 잠깐만요.”“네, 손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결국 재석은 아쉬움 가득한 눈빛으로 정은의 손을 놓았다. 그러고는 조용히 열쇠를 건네받아 현관문을 열어주었다.“정은아, 잘 자.”그 한마디.‘정은아’라는 이름이 너무나 자연스럽고도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마치 수천 번은 불러본 것처럼.그 말에 정은은 순간 멍해졌다.‘왜 내 이름을 듣고도 가슴이 이렇게 설레지?’“네, 당신도 잘 쉬어요.”둘은 그렇게 짧은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문 안으로 들어갔다.그날 밤. 정은은 평소와 달랐다. 샤워를 마친 뒤 늘 하던 루틴, 논문 체크나 프로젝트 정리는 손도 대지 않았다.대신, 자기도 모르게 핸드폰을 들고 재석의 SNS를 열었다.‘뭐 하는 거야? 나...’그런데 이상하게, 자꾸만 궁금해졌다. ‘이 사람, 평소에 어떤 거 올리지?’재석은 SNS 설정 따위는 하지 않은 사람이었다.맨 아래까지 내리는 데 몇 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포스트 총수, 대략 서른 몇 개. 그중 90%는 논문, 연구, 산업 동향 공유.‘진짜 성실한 연구자 모드네...’그나마 정은과 관련 있는 건 얼마 전 실험실이 SCI 논문 게재됐을 때 서비대학교 공식 계정에서 축하 포스팅한 걸 공유한 것뿐이었다.[축하합니다.]짧고 건조한 멘트.그 밑엔 전진욱과 조미진이 ‘좋아요’를 눌러뒀다.‘이게 전부야?’그렇게 핸드폰을 내려놓으려던 순간, 알림이 하나 떴다. 재석이 새로운 글을 올렸다.정은은 무심코 눌러봤다. [r = a(1 - sinθ)]‘...어?’정은의 손가락이 멈췄다. 이 수식, 익숙했다. 너무 익숙해서 순간 심장이 멈칫했다.댓글 첫 줄엔 진욱이 있었다.[극좌표 함수? 밤에 안 자고 뭐 하세요? 조 교수님?]조미진과 손태민은 말없이 ‘좋아요’만 눌렀다. 하지만 두 사람은 속으로 ‘다음 연구 주제가 광학 쪽인가?’ 생각하며 혼란스러워했다.아무도 몰랐다. 이 수식의 진짜 의미를.‘r = a(1 - sinθ)’, 하트곡선.‘설마 이게, 그거? 진짜 그거... 맞아?’정은은 손끝을
“그럼... 고백하기 전까지, 혼자서 그렇게 많이 고민한 거예요?”“응.”“어쩐지...”정은이 아주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뭐라고?” 재석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이젠 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가요...”둘은 손을 꼭 잡고 복도로 향했다. 조용한 밤, 서로의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걷던 중, 재석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정은도 따라 멈춰 서며 돌아봤다.“왜요?”“정은아, 우리 지금... 사귀는 거 맞지?”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두 사람이 꼭 잡은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그렇게 생각 안 해요? 조금 전부터 내가 ‘재석 씨’라고 부른 거 못 느꼈어요?”“혹시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정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 지었다.“흠,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평소에도 꿈에서 날 자주 본 모양이네요?”재석의 몸이 순간 굳더니, 양 볼이 순식간에 빨개졌다.‘진짜 자주 꿨나 보다?’재석은 눈을 못 마주친 채, 그저 두 사람이 맞잡은 손만 바라보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진짜 좋아.”‘정은이도, 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구나.’‘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구나.’같은 계단, 같은 복도, 수없이 함께 걸어온 길. 그동안은 늘 친구라는 이름으로, 앞서거나 뒤따르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왔지만, 오늘은 처음으로, 손을 잡고 나란히 오르는 계단.정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근데, 왜 나랑 은혁 씨한테 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재석은 목소리를 낮추며, 살짝 눈을 피했다.“미안. 계산하러 나갔다가... 우연히 통화하는 거 들었거든.”정은의 눈이 살짝 커졌다.그리고 머릿속으로 자신이 통화 중 했던 말을 하나하나 되짚어봤다.‘공항에서 보자, 기대된다, Z시 출장... 뭐 이상한 말한 것도 없는데...?’그런데도 재석은 그걸 ‘여행 약속’으로 받아들였고, 그걸로 인해 혼자 삭이다가 결국 아래층에서 고백까지 해버린 거였다.“너희, Z시에 여행 간다고 했잖아.”
정은이 멍해 있는 사이, 재석이 한 걸음 다가섰다. 늘 부드럽고 점잖던 그가, 이 순간만큼은 전에 없던 강한 기운을 뿜어냈다. ‘이 남자... 이런 눈빛도 있었나?’정은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등이 벽에 닿는 순간, 재석은 어느새 바로 눈앞에 와 있었다.정은이도 이제야 제대로 실감이 났다. 재석이 자신보다 훨씬 크다는 걸. 그리고 지금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내려다보면, 자신이 마치 남자의 품 안에 갇힌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도.재석이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이제 좀 알겠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그때 네가 학업이 먼저라고 했을 때, 난 받아들였어.”“그런데 장은혁한텐 기회를 줬지. 정은아...”그가 고개를 더 숙이자,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목선에 닿았다. 순간, 정은의 팔에 소름이 쫙 돋았다. “너, 나한테 너무 불공평해.”그 마지막 한 마디는 묘하게 서글픈 기운이 섞여 있었다.정은은 입술을 달싹이며 뭔가 말하려 했지만, 재석은 그녀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알아, 내가 지금 어떤 입장인지. 묻고 따질 자격도 없고, 네가 누구를 좋아하든, 그건 네 자유라는 것도 알아.”“이 말 꺼냈다가, 우리 사이가 끝날 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근데... 계속 참다 보니까 알겠더라.”‘난... 그렇게까지 쿨한 사람이 아니었어.’“그래서 이제 참지 않기로 했어.”‘어떻게 되든, 그건 네가 정해.’그렇게 말한 재석은 고개를 숙인 채 멈췄다. 마치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처럼.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용한 밤공기 속에서, 정은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울렸다.“이제, 제가 말해도 될까요?”“응...”“재석 씨.”정은은 처음으로 재석을 그렇게 불렀다.“고개 들어요. 나 좀 봐요.”재석의 어깨가 순간 굳어졌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그는 이미, 거절당할 각오까지 끝냈다.그런데 눈이 마주친 순간, 정은의 두 눈 속에서 재석이 본 건... 눈물이 아닌, 웃음이었다.억지로 짓는
“헤어졌다고요?”정은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몰랐어?!”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진욱은 눈을 반짝이며 의자째로 다가오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본격적인 ‘TMI’를 털어놓기 시작했다.“M시 출장 갔다 오고 며칠 안 돼서, 재석이가 바로 짐 싸서 수아를 내보냈다니까?”정은은 그 말을 듣고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재석과 수아 사이에 어떤 감정선이 있었는지, 그동안 몇 번 스쳐 지나갔던 장면들이 퍼즐처럼 빠르게 떠올랐다.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눈빛 속엔 미묘한 기류가 스쳤다.“아마 진짜 많이 좋아했나 봐. 그러니까 정리할 때도 그만큼 아프고, 오래 걸리는 거겠지. 조금만 시간 지나면, 태민이도 정리될 거야.”진욱은 이어서 말했다.“네.”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대답했다.그 이후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남의 연애는, 들을 수는 있어도 깊게 얘기하지 말아야 해. 괜히 나서 봤자... 괜히 끼어든 꼴만 되니까.’...해가 지고, 붉은 노을이 건물 유리에 비치기 시작할 무렵. 정은은 마침내 작업을 끝냈다.진욱은 기다렸다는 듯 프로그램을 열고 기능 하나하나를 테스트했다.그리고 30초쯤 흐른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어어!! 복구됐어! 됐다! 돌아왔어! 다시 쓸 수 있어!!”미진도 덩달아 벌떡 일어나 양손을 번쩍 들었다.“살았다, 진짜!! 여태 손으로 데이터 입력한 거 생각하면... 이건 거의 기적이야!”진욱은 시계를 힐끗 보더니, 정은을 향해 말했다.“지금 이 시간까지 남아서 도와준 우리 정은이, 완전 수고 많았어! 조 교수...”“응...?”갑작스레 이름이 불리자, 재석은 몇 초간 멈칫하다가 고개를 돌렸다.진욱은 능청스럽게 말했다.“아니, 정은이가 이렇게 큰일 해줬는데, 감사 표시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적어도 밥 한 끼는 사야지.”“맞아요, 맞아요. 조 교수님, 이건 진짜 밥으로도 모자라요.” 미진이 곧장 거들었다.재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략 1년 전, 정은은 한동안 재석의 실험실을 빌려 쓴 적이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전진욱, 조미진 등과 인연이 닿았다.처음엔 서로 어색하고 낯설었지만, 몇 달이 지나면서 조금씩 가까워졌고, 지금은 가볍게 농담도 주고받을 만큼 편해졌다.그러던 어느 날, 진욱은 우연히 정은이 실험 데이터를 처리하는 속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 너무 빠른 게 아닌가 싶어서 슬쩍 물어봤더니, 정은은 코딩도 할 줄 아는 공대 만능 캐릭터였다. 그녀는 직접 짠 프로그램으로 데이터를 자동 정리하고, 다차원 분류와 정렬까지 가능하다고 했다.“와, 뭐야... 완전 반칙인데?”진욱은 결국 정은에게 부탁해 실험실 맞춤형 프로그램 하나를 따로 제작해달라고 했고, 그 이후, 데이터 정리는 그야말로 신세계를 맞이했다. 진욱은 쓸 때마다 감탄하며 말했다.“진짜... 정은이 덕분이야. 이게 사람을 살리네.”하지만 어제 그 기특한 프로그램이 갑자기 먹통이 됐다. 손태민이 고쳐보겠다고 덤볐지만, 결과는... 풍비박산이었다. ‘이젠 누가 손댔다간 진짜 박살 나겠어...’ 결국 정은에게 SOS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재석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오늘 시간 돼? 안 되면, 며칠 뒤도 괜찮고...]진욱은 훨씬 급했다. 말 그대로 살려달라는 마음이었다.[야, 오늘 안 데려오면... 나 여기서 바로 싸버린다! 진짜라고, 어?!]그는 어제 약 먹고 좀 괜찮아진 줄 알았건만, 밤새 배가 또 난리였다. 오늘 아침부터 실험실 화장실은 진욱의 전용이 되었다. 오전에만 6회 방문.그 말은, 그냥 협박 아니었다. 진짜 실현 가능성이 있었으니 말이다.정은은 상황을 듣고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시간 돼요. 지금 바로 갈게요.”[그래. 그럼 내가 정문 앞으로 갈게.]‘굳이 마중까진 필요 없는데...’ 뚝-정은이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 ...10분 뒤, 정은은 학교 정문 앞에서 재석과 마주쳤다. 두 사람은 실험실로 걸어가며 프로그램
“언니, 이건 굳이 우리 의견 물을 필요도 없지 않아요? 언니가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가는 거죠. 저희한텐 뭐든 시키기만 하세요. 무조건 따라갈게요!”민지가 단호하게 말하자, 서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맞아요, 저흰 누나 믿고 가는 거예요. 결정은 누나가 해요.”정은은 그 말에 잠시 멍해졌다가,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너희들... 나 그렇게 믿어도 돼? 나도 가끔 실수하거든?”민지는 마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정은 언니가 실수했다면, 그건 100% 저랑 서준 오빠가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뜻이에요.”“그건 좀 과장이지만...”‘그래도... 이런 믿음을 받는다는 게 참 따뜻하네.’세 사람은 그렇게 식사를 마쳤다.계산은 서준이 맡았고, 정은과 민지는 먼저 주차장으로 향했다. “언니, 먼저 가요. 전 서준이 데리러 갈게요.”“응? 굳이?”“우리 집이랑 방향이 같잖아요. 서준이는 차도 없으니까, 그냥 태워다 주는 거죠, 헤헤.”“그래, 알겠어. 그럼 조심히 가. 운전 천천히 하고.”“네. 언니도 잘 들어가요!”...두 ‘파트너’와 방향을 맞춘 정은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자료 조사부터 시작해 ‘신소재 최적화 계획안’을 정리하고, 모든 내용이 빠짐없이 정리됐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확인했다.벌써 밤 10시. 정은은 핸드폰을 들고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냈다.[장은혁 씨, 시간 돼요? 상의드릴 게 하나 있어요.]그 시각, 은혁은 거실 소파에 앉아 어머니인 황희숙 여사의 ‘진실 공방’에 시달리고 있었다.“너 외할아버지한테 전화 왔어. 오늘 도시락 들고 회사 갔다며? 근데 그냥 말도 없이 두고 사라졌다고 난리야. 게다가 누가 너랑 어떤 여자가 같이 있는 걸 병원 약국에서 봤다던데? 솔직히 말해봐. 너, 여자 친구 생겼지?”은혁은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아니 외할아버지는 왜 또 엄마한테 바로 전화해요? 진짜 너무하신다니까요...”“이 자식 봐라, 말버릇 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