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또 뭐가 달라지겠는가?감정은 장난이 아니었고 게임도 아니었으니, 그것을 선택하면 전심전력으로 상대방을 대해야 했다.그러나 정은은 아직 완성해야 할 과제가 그렇게 많고, 그렇게 많은 실험을 끝내지 못했다.학문의 드넓은 바다와 높은 정상, 그녀는 이제 막 그 깊은 세계로 첫발을 내디디며, 과학 연구의 길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그렇게 많은 일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으니, 지금 사랑에 빠질 여유가 어딨겠는가?재석은 정은의 말을 듣고 마음이 조금 무거워졌다.하지만 이것은 예상했던 일이기도 했다.만약 쉽게 사랑에 빠진다면, 그것은 정은이 아니었을 것이다.“알았어.” 재석은 갑자기 한숨을 내쉬며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그 미소는 점점 눈가로 번져갔다.정은도 웃으며 말했다. “선배님, 군고구마 달아요?”재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달아.”“그럼 다음에 또 사줄게요.”“그래.”두 사람은 집 앞에서 작별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집으로 들어갔다.정은은 가장 먼저 그 푸른 장미의 포장을 뜯은 뒤, 두 개의 꽃병에 나누어 꽂았다.푸른 장미는 집에 있던 흰색 안개꽃과 함께 집안을 눈부시게 만들었다.그녀는 꽃병 하나를 거실 탁자 위에 놓았다.그리고 다른 꽃병을 들고 재석의 집 문을 두드렸다. “선배님, 이거 받아요. 거실 탁자 위에 놓으면 예쁠 거예요.”재석은 고개를 숙였다. 아름답게 핀 푸른 장미와 깨끗한 안개꽃은 마치 푸른 하늘과 흰 구름처럼 순수하고 눈부셨다.한순간, 그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랐다.정은이 장미를 반으로 나누어 자신에게 준 것에 놀랐고, 현빈의 치밀한 계획이 그녀에게는 평범한 일로 여겨졌다는 사실에 웃음이 나왔다.“선배님, 왜 불을 안 켠 거예요? 집이 너무 어둡잖아요.” 정은의 재석의 뒤를 바라보며 말했다. 거실 전체가 어둠 속에 잠겨 있었고, 커튼도 빈틈없이 쳐져 있었다.재석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들어오자마자 바로 침실로 들어갔거든. 그래서 거실의 불을 켜지
이튿날 아침, 정은은 전화 때문에 잠에서 깼다.날이 어슴푸레하게 밝자, 그녀는 눈을 비볐는데, 겨우 7시도 안 된 것을 발견했다. 정은은 하품을 하며 눈을 떴지만 머리는 여전히 멍했다.그녀는 핸드폰을 받았고, 목소리는 금방 깨어나서 약간 잠겼다.“아빠, 왜 이렇게 일찍 전화하신 거예요?”소진헌은 잠시 침묵하다가, 다소 당황한 어조로 말했다. [정은아, 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찾아오셨어.]정은은 미처 이해하지 못했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요? 그게 누구신데요?”[네 엄마 친부모님. 네 진짜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찾아오셨어.]정은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침대에서 뛰어내렸다. “지금 표 끊어서 돌아갈게.”오후 12시, 비행기가 착륙했다.정은은 공항을 나와 얼른 택시를 잡았다.집 앞에 도착하기도 전에, 정은은 별장 밖에 차 두 대가 세워진 것을 보았다.한 대는 벤틀리, 다른 한 대는 특수 제작한 롤스로이스였고, 번호판도 고급스러운 번호였다. 둘 다 일반인이 쉽게 탈 수 있는 차가 아니었다.이웃들이 지나가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고급차는 흔하지만, 벤틀리는 돈만 있으면 살 수 있었다.하지만 그 롤스로이스는 돈이 있어도 살 수 없는 차였다.특히 특수 번호판까지 달린 차라면, 재벌 가문이거나 국가에 큰 공헌을 한 사람일 것이다.정은은 입술을 깨물며 마음이 무거워졌다.문을 열고 들어가자, 정원에서 땅을 파고 있는 소진헌이 보였다.그는 어쩔 줄 모르는 아이처럼 땅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손에는 삽을 들고 진흙을 이리저리 뒤적이고 있었고, 발 옆에는 빈 화분이 몇 개 놓여 있었다.화초를 가꾸는 것 같지 않았는데, 그냥 손에 무언가를 잡고 있어야 마음이 놓이는 듯했다.정은은 현관문을 바라보았다. 문이 열려 있었고, 안에서 말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아마도 그녀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일 것이다.정은은 서둘러 집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소진헌 앞으로 걸어가
정은은 서둘러 소진헌을 달랬다. “엄마가 친부모님을 찾은 건 좋은 일이에요.”이미숙은 과거가 없는 사람이었다.예전에는 뿌리를 찾으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이미 희망을 접었다.때로는 자신을 소설 속 인물에 대입하기도 했다. 비참한 어린 시절, 부모님이 원수에게 암살당한 이야기들...그러나 후에 이미숙은 더 이상 이런 일로 고민하지 않았고, 더 이상 기대를 하지 않았다.하지만 정은은 어머니가 가족에 대한 갈망을 품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그래서 소진헌이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찾아왔다고 말했을 때, 그녀는 엄청난 기쁨을 느꼈다. 이미숙을 위한 기쁨.하지만 소진헌은 당장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엄마가 어떤 분인지, 두 분은 오랜 시간을 함께 하셨으면서도 모르시겠어요? 겉으로는 부드럽고 온화하지만, 속은 매우 단호하신 분이잖아요.”“한번 결심한 일은 절대로 흔들리지 않으실 거예요. 아빠, 그동안 함께한 정을 생각해 보세요. 왜 이렇게 자신이 없으세요? 엄마가 저와 아빠를 버리고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와 떠나실 것 같아요?”소진헌은 잠시 침묵에 잠겼다.‘그래. 우리 사이의 감정이 어떻게 쉽게 사라질 수 있겠어? 게다가 우리에게 정은이라는 딸까지 있잖아!’이렇게 생각하자, 소진헌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 “일리가 있네. 나도 잠시 생각이 꼬였어...”정은이 말했다. “가요, 우리 같이 들어가요.”“그래.”그렇게 부녀는 함께 집 안으로 들어갔다.미리 마음의 준비를 했지만, 소파에 앉아 있는 현빈을 보자, 정은은 완전히 멍해졌다.남자는 단정하게 앉아 있었고, 평소의 느슨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눈빛은 진지했고, 표정 역시 엄숙했다.그와 함께 앉아 있는 두 노인을 보자, 정은은 다시 한번 놀랐다.현빈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였다.예전에 J시에서 우연히 몇 번 만난 적이 있는, 매우 친절한 두 사람이었다.그때 그녀는 자유분방한 현빈이 이렇게 자상한 어르신을 모시고 있다는 사실에 무척 놀랐다.이렇게 다
봉수진은 지금 현빈의 조언을 듣고 눈 치료와 몸조리를 꾸준히 해온 걸 다행으로 여기고 있었다.그녀의 시력은 점점 회복되고 있었다.그래서 봉수진은 외손녀의 얼굴이 딸과 얼마나 닮았는지 제대로 볼 수 있었다.이미숙은 정은과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사이란 사실에 놀랐다.그래서 정은은 그들의 첫 만남에 대해 이야기했다.이춘재는 감개무량했다. “네 엄마와 나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널 찾아다녔어. 국내외를 다 돌아다녔는데, 이렇게 가까이 있으면서도 두 번이나 놓쳤다니... 다행히 이번에는 놓치지 않았어.”여기까지 말하자, 봉수진은 정은과 현빈이 더 일찍 만났단 걸 떠올렸다. 이것은 정말 하늘이 정한 인연이었다.“정은은, 말하자면 현빈은 네 사촌 오빠야. 그동안 전혀 눈치채지 못했어...”현빈은 아까부터 말이 없었다. 얼굴은 굳어 있었고, 표정도 어두웠다.정은은 잠시 멈칫하다가, 곧 반응하며 웃으며 말했다. “오빠.”현빈은 주먹을 꽉 쥐었고, 눈빛은 더욱 어두워졌다.봉수진은 이를 눈치채지 못하고 웃으며 말했다. “현빈이 조금만 더 눈치가 빠르고 신경을 썼더라면, 우리는 더 일찍 만났을 텐데.”이춘재는 손을 저으며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현빈과 정은이가 이런 인연을 맺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해. 너무 욕심을 부리면 안 돼.”“그래요. 이걸로 충분하죠... 정말.”살아생전에 이미숙을 찾은 것만으로도 이미 다행이었으니 더 이상의 욕심은 부리지 말아야 했다.정은은 컵을 들고 미소를 지었고, 현빈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평소의 여유로움과는 달리, 그의 침묵은 이상할 정도로 깊었다.이미숙은 두 아이의 관계에 대해 놀랐지만, 그보다는 지난 몇 년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더 궁금했다.그녀는 이미 부모님에 대한 기억을 거의 다 떠올렸다.지난번 유보영과의 다툼으로 이마를 다친 이후, 기억들이 점차 떠오르기 시작했다.이춘재와 봉수진을 직접 만나며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으니, 이미숙의 기억은 마치 퍼즐이 완성된 듯 채워졌
“심 대표님!” 정은은 현빈의 말을 끊으며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지금 무슨 말을 하려고 있는지,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똑똑히 생각하고 나서 다시 말해요.”“너도 알잖아?” 남자는 정은을 자신의 품에 가두며 양손으로 벽을 짚었다.“알면 어떻고 모르면 또 뭐가 달라지는데요? 지금 우리는 그런 관계로 발전할 수가 없어요...”“무슨 관계?”현빈은 입꼬리를 치켜올리며 말했다. “말해봐, 무슨 관계냐고?”“우린 사촌 오빠와 사촌 동생 사이잖아요.”“너 아직 모르지? 우리 어머니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친딸이 아니셔. 즉, 우리는 혈연관계가 없단 말이야!”정은은 잠시 멍해졌다. “혈연이 있든 없든, 우리 사이는 불가능해요.”“나는 당신을 좋아하지 않으니까.”‘또 이 말이네! 항상 그 말밖에 없어!’현빈은 정은의 어깨를 잡고 있는 손에 살짝 힘을 주었다. “왜 나를 좋아하면 안 돼? 넌 강도겸과 같은 쓰레기까지 사랑했었잖아. 왜 나는 안 되는 거야? 정은은...”그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나에게 이렇게 잔인하게 굴지 마, 제발.”냉정함, 이성, 현빈은 그런 것들 다 필요 없었다.그는 어젯밤 다 하지 못한 말을 마저 하며, 정은이 도망칠 기회를 주지 않으려 했다.그러나...“그만해요.” 정은은 고개를 돌렸고, 눈에는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현빈은 씁쓸하게 웃었다.잠시 후, 그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왜 더 듣지 않는 거야? 왜... 나에게 조금의 기회도 주려 하지 않는 거냐고? 너도 두려운 거지? 우리 사이에 다른 가능성이 있을까 봐.”“아니요.” 정은은 고개를 살짝 저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는 냉정했다. “말하지 말라는 이유는 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해서예요. 왜냐하면 지금부터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든, 우리는 남매일 뿐이고, 남매로만 지낼 거예요.”말을 마치고, 정은은 남자의 품에서 빠져나와 화장실로 향했다.현빈은 그대로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한참 지나서야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 “하... 남매?”
현빈은 술집을 찾아갔고, 앉자마자 독한 술 몇 병을 따서 한 잔 한 잔 마셨다.그 사이 어떤 여자가 와서 말을 걸었지만 예외 없이 모두 그에게 쫓겨났다.현빈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도록 술을 마시다가 앞이 잘 보이지 않을 때에야 호텔로 돌아왔다.도중에 현빈은 머리가 어질어질하여 눈을 감으면 정은의 얼굴이 떠올랐다.그는 자신이 왜 항상 한 걸음 늦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전에 현빈은 도겸에게 졌고, 이제 또 이 빌어먹을 사촌 오빠라는 신분 때문에 졌다.‘하나님은 여태껏 날 돌본 적이 없어!’택시에서 내린 현빈은 비틀거리며 호텔로 들어갔다.엘리베이터를 탈 때, 향기로운 냄새가 콧구멍으로 파고들었고, 이어서 부드러운 몸이 달라붙었다. 여인은 일부러 가슴으로 현빈의 팔을 문지르며 대담하게 집적거렸다.그리고 목소리는 더욱 달콤하고 애교가 넘쳤다.“오빠, 왜 혼자서 술을 마신 거예요? 많이 취한 것 같은데, 내가 같이 방으로 들어가줄게요...”현빈은 알코올 때문에 평소보다 반응이 좀 느렸지만, 결국 손을 들어 여자를 뿌리쳤다. “꺼져! 날 건드리지 마!”현빈의 혐오스러운 반응은 마치 무슨 몸에 더러운 거라도 묻은 것 같았다.여자는 화가 나서 입을 삐죽거리며 퉤 소리를 질렀다. “네가 뭔데 감히 날 밀어내는 거야?! 술주정뱅이가 누구한테 차였는지, 감히 날 뿌리쳐?!”그녀의 말 한마디가 마침 현빈의 정곡을 찔렀다.현빈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턱을 살짝 들었는데, 눈빛의 한기는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만 같았다.여자는 움츠러들었다가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 돌아섰다.현빈은 눈을 드리우며 갑자기 정은에 전화를 걸고 싶었다.그러나 핸드폰을 확인하니 벌써 새벽 1시가 넘었다.그는 머뭇거리며 끝내 번호를 누르지 않았다.마침 이때 두 호텔 직원이 지나가다가 현빈이 정말 심하게 취한 것을 보고 앞으로 다가와서 물었다.현빈은 룸 카드를 꺼내 자신을 방으로 돌려보내라고 분부했다.한 직원이 그를 부축했고, 다른 한 사람은 룸 카드를 들고 방문을 열
이미윤은 자료에 있는 주소를 따라 이미숙이 지금 살고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그녀는 철제 대문 밖에 서서 고개를 들어 눈앞에 있는 별장을 살펴보았다.동네 밖에서 보기엔 그저 그런 것 같았는데, 안으로 들어가니 의외로 괜찮았다.이미숙이 이런 작은 동네에 와서도 별장에 살고 있다니, 정말 신기했다.‘하...’이미윤은 차갑게 웃었다.‘이미숙은 어릴 때부터 운이 좋았지.’심지어 절에 가면 스님이 두 손을 모아 이미숙은 부귀영화를 누릴 운명이라고 말할 정도였다.그런데 이미윤은 늘 옆에 있어도 마치 투명인간이 된 것처럼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이미숙이 있는 곳이라면 이미윤은 무시당했다.정원 너머로 이미윤은 대문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눌렀다.문을 연 사람은 소진헌이었다.그는 어르신들의 입맛을 알아보았고, 밀가루 음식을 좋아한다고 들은 후 만두를 만들고 있었다.반죽을 하던 중, 초인종이 울렸다.문을 열자 화려한 옷차림에 오만한 표정의 낯선 여자가 서 있었다.“누굴 찾으세요?”이미숙은 소진헌을 훑어보았다.키도 크고, 생김새도 괜찮지만 스타일이 너무 촌스러워 그저 평범한 중년 남자 같았다.품위가 없고, 매력조차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소진헌 씨?” 이미윤이 물었다.“네, 맞습니다만, 누구시죠?”이미윤은 은근히 놀랐다.‘이미숙이 이런 남자와 결혼했다니.’소진헌은 예의상으로 대답했을 뿐, 이미윤이 자신을 그렇게 쳐다보는 것에 불편함을 느꼈다.그리고 침묵을 지킬 때, 뒤에서 이미숙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언니?”거실에서, 이미윤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이미숙은 뜨거운 물 한 잔을 건넸고, 웃으면서 말했다.“커피랑 차 싫어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입맛 여전히 그대로겠지?”오기 전에 이미윤은 이미숙이 어떻게 변했을지를 상상해 보았다.수십 년의 떠돌이 생활로, 아마 이미숙은 삶에 지쳐 예전의 모습은 남아있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혼자 고독하게 지내거나, 평범한 사람과 결혼해 뚱뚱하고 못생기게 됐을지도. 돈이 없으면 원래 아름답던 얼굴도
”한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은 좋은 일이야.”이춘재가 감찬했다.소진헌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이미숙은 그제야 이미윤에게 소진헌을 소개한 적이 없다는 것이 생각났다.“이 사람은 내 남편이야.”“안녕하세요.” 이미윤은 살짝 웃었다. “제부는 정말 잘생기셨고, 재능이 넘쳐나는 것 같네요.”지금 이미윤은 더 이상 까다로운 눈빛으로 그를 보지 않았다.소진헌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하세요.”예의를 차렸지만, 은근히 거리감을 가지고 있었다.다른 사람들은 발견하지 못했을지도 모르지만, 이미숙은 그동안 소진헌과 오랫동안 함께 했기에, 이 말을 듣자마자 이상함을 감지했다.그녀는 소진헌을 바라보았다.소진헌은 오히려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이미숙애개 이따가 다시 이야기하자고 표시했다.‘왠지 모르겠지만, 처형이 좀 이상한데... 그리고 불편해’.그래서 소진헌과 너무 다정하게 굴지 않았다.“아빠, 만두를 빚으실 거예요 말 거예요? 어?”정은은 주방에서 나오자 거실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인 것을 보고 그 자리에서 멍해졌다.그리고 눈빛은 이미윤에게 떨어졌다.이미숙은 웃으며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정은아, 이리 와.”정은은 고분고분 걸어갔다.“언니, 내 딸 정은이야. 정은아, 이분은 네 이모야, 얼른 인사해.”눈이 마주치자, 정은은 이미윤을 잠시 훑어보더니 영리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이모.”이미윤은 평온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실제로는 마음속으로 이미 거칠고 사나운 파도가 일었다.‘그날 벤츠 매장에서 재석과 함께 있었던 그 여자아이가 아니야?’이미윤은 당시 사진을 찍어 강서원에게 보내기도 했다.강서원에게 재석이 연애를 했냐고 물었지만, 강서원은 긍정적인 대답을 하지 않고 그대로 얼버무렸다.‘지금 그 태도를 생각해보면, 아들의 여자친구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런 것 같은데?정은을 바라보는 이미윤의 눈빛은 갑자기 의미심장해졌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다시 미소를 지으며 애정이 넘쳐나는 말투로 말했다.“미
“그럼... 고백하기 전까지, 혼자서 그렇게 많이 고민한 거예요?”“응.”“어쩐지...”정은이 아주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뭐라고?” 재석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이젠 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가요...”둘은 손을 꼭 잡고 복도로 향했다. 조용한 밤, 서로의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걷던 중, 재석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정은도 따라 멈춰 서며 돌아봤다.“왜요?”“정은아, 우리 지금... 사귀는 거 맞지?”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두 사람이 꼭 잡은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그렇게 생각 안 해요? 조금 전부터 내가 ‘재석 씨’라고 부른 거 못 느꼈어요?”“혹시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정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 지었다.“흠,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평소에도 꿈에서 날 자주 본 모양이네요?”재석의 몸이 순간 굳더니, 양 볼이 순식간에 빨개졌다.‘진짜 자주 꿨나 보다?’재석은 눈을 못 마주친 채, 그저 두 사람이 맞잡은 손만 바라보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진짜 좋아.”‘정은이도, 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구나.’‘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구나.’같은 계단, 같은 복도, 수없이 함께 걸어온 길. 그동안은 늘 친구라는 이름으로, 앞서거나 뒤따르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왔지만, 오늘은 처음으로, 손을 잡고 나란히 오르는 계단.정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근데, 왜 나랑 은혁 씨한테 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재석은 목소리를 낮추며, 살짝 눈을 피했다.“미안. 계산하러 나갔다가... 우연히 통화하는 거 들었거든.”정은의 눈이 살짝 커졌다.그리고 머릿속으로 자신이 통화 중 했던 말을 하나하나 되짚어봤다.‘공항에서 보자, 기대된다, Z시 출장... 뭐 이상한 말한 것도 없는데...?’그런데도 재석은 그걸 ‘여행 약속’으로 받아들였고, 그걸로 인해 혼자 삭이다가 결국 아래층에서 고백까지 해버린 거였다.“너희, Z시에 여행 간다고 했잖아.”
정은이 멍해 있는 사이, 재석이 한 걸음 다가섰다. 늘 부드럽고 점잖던 그가, 이 순간만큼은 전에 없던 강한 기운을 뿜어냈다. ‘이 남자... 이런 눈빛도 있었나?’정은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등이 벽에 닿는 순간, 재석은 어느새 바로 눈앞에 와 있었다.정은이도 이제야 제대로 실감이 났다. 재석이 자신보다 훨씬 크다는 걸. 그리고 지금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내려다보면, 자신이 마치 남자의 품 안에 갇힌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도.재석이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이제 좀 알겠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그때 네가 학업이 먼저라고 했을 때, 난 받아들였어.”“그런데 장은혁한텐 기회를 줬지. 정은아...”그가 고개를 더 숙이자,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목선에 닿았다. 순간, 정은의 팔에 소름이 쫙 돋았다. “너, 나한테 너무 불공평해.”그 마지막 한 마디는 묘하게 서글픈 기운이 섞여 있었다.정은은 입술을 달싹이며 뭔가 말하려 했지만, 재석은 그녀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알아, 내가 지금 어떤 입장인지. 묻고 따질 자격도 없고, 네가 누구를 좋아하든, 그건 네 자유라는 것도 알아.”“이 말 꺼냈다가, 우리 사이가 끝날 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근데... 계속 참다 보니까 알겠더라.”‘난... 그렇게까지 쿨한 사람이 아니었어.’“그래서 이제 참지 않기로 했어.”‘어떻게 되든, 그건 네가 정해.’그렇게 말한 재석은 고개를 숙인 채 멈췄다. 마치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처럼.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용한 밤공기 속에서, 정은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울렸다.“이제, 제가 말해도 될까요?”“응...”“재석 씨.”정은은 처음으로 재석을 그렇게 불렀다.“고개 들어요. 나 좀 봐요.”재석의 어깨가 순간 굳어졌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그는 이미, 거절당할 각오까지 끝냈다.그런데 눈이 마주친 순간, 정은의 두 눈 속에서 재석이 본 건... 눈물이 아닌, 웃음이었다.억지로 짓는
“헤어졌다고요?”정은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몰랐어?!”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진욱은 눈을 반짝이며 의자째로 다가오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본격적인 ‘TMI’를 털어놓기 시작했다.“M시 출장 갔다 오고 며칠 안 돼서, 재석이가 바로 짐 싸서 수아를 내보냈다니까?”정은은 그 말을 듣고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재석과 수아 사이에 어떤 감정선이 있었는지, 그동안 몇 번 스쳐 지나갔던 장면들이 퍼즐처럼 빠르게 떠올랐다.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눈빛 속엔 미묘한 기류가 스쳤다.“아마 진짜 많이 좋아했나 봐. 그러니까 정리할 때도 그만큼 아프고, 오래 걸리는 거겠지. 조금만 시간 지나면, 태민이도 정리될 거야.”진욱은 이어서 말했다.“네.”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대답했다.그 이후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남의 연애는, 들을 수는 있어도 깊게 얘기하지 말아야 해. 괜히 나서 봤자... 괜히 끼어든 꼴만 되니까.’...해가 지고, 붉은 노을이 건물 유리에 비치기 시작할 무렵. 정은은 마침내 작업을 끝냈다.진욱은 기다렸다는 듯 프로그램을 열고 기능 하나하나를 테스트했다.그리고 30초쯤 흐른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어어!! 복구됐어! 됐다! 돌아왔어! 다시 쓸 수 있어!!”미진도 덩달아 벌떡 일어나 양손을 번쩍 들었다.“살았다, 진짜!! 여태 손으로 데이터 입력한 거 생각하면... 이건 거의 기적이야!”진욱은 시계를 힐끗 보더니, 정은을 향해 말했다.“지금 이 시간까지 남아서 도와준 우리 정은이, 완전 수고 많았어! 조 교수...”“응...?”갑작스레 이름이 불리자, 재석은 몇 초간 멈칫하다가 고개를 돌렸다.진욱은 능청스럽게 말했다.“아니, 정은이가 이렇게 큰일 해줬는데, 감사 표시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적어도 밥 한 끼는 사야지.”“맞아요, 맞아요. 조 교수님, 이건 진짜 밥으로도 모자라요.” 미진이 곧장 거들었다.재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략 1년 전, 정은은 한동안 재석의 실험실을 빌려 쓴 적이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전진욱, 조미진 등과 인연이 닿았다.처음엔 서로 어색하고 낯설었지만, 몇 달이 지나면서 조금씩 가까워졌고, 지금은 가볍게 농담도 주고받을 만큼 편해졌다.그러던 어느 날, 진욱은 우연히 정은이 실험 데이터를 처리하는 속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 너무 빠른 게 아닌가 싶어서 슬쩍 물어봤더니, 정은은 코딩도 할 줄 아는 공대 만능 캐릭터였다. 그녀는 직접 짠 프로그램으로 데이터를 자동 정리하고, 다차원 분류와 정렬까지 가능하다고 했다.“와, 뭐야... 완전 반칙인데?”진욱은 결국 정은에게 부탁해 실험실 맞춤형 프로그램 하나를 따로 제작해달라고 했고, 그 이후, 데이터 정리는 그야말로 신세계를 맞이했다. 진욱은 쓸 때마다 감탄하며 말했다.“진짜... 정은이 덕분이야. 이게 사람을 살리네.”하지만 어제 그 기특한 프로그램이 갑자기 먹통이 됐다. 손태민이 고쳐보겠다고 덤볐지만, 결과는... 풍비박산이었다. ‘이젠 누가 손댔다간 진짜 박살 나겠어...’ 결국 정은에게 SOS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재석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오늘 시간 돼? 안 되면, 며칠 뒤도 괜찮고...]진욱은 훨씬 급했다. 말 그대로 살려달라는 마음이었다.[야, 오늘 안 데려오면... 나 여기서 바로 싸버린다! 진짜라고, 어?!]그는 어제 약 먹고 좀 괜찮아진 줄 알았건만, 밤새 배가 또 난리였다. 오늘 아침부터 실험실 화장실은 진욱의 전용이 되었다. 오전에만 6회 방문.그 말은, 그냥 협박 아니었다. 진짜 실현 가능성이 있었으니 말이다.정은은 상황을 듣고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시간 돼요. 지금 바로 갈게요.”[그래. 그럼 내가 정문 앞으로 갈게.]‘굳이 마중까진 필요 없는데...’ 뚝-정은이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 ...10분 뒤, 정은은 학교 정문 앞에서 재석과 마주쳤다. 두 사람은 실험실로 걸어가며 프로그램
“언니, 이건 굳이 우리 의견 물을 필요도 없지 않아요? 언니가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가는 거죠. 저희한텐 뭐든 시키기만 하세요. 무조건 따라갈게요!”민지가 단호하게 말하자, 서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맞아요, 저흰 누나 믿고 가는 거예요. 결정은 누나가 해요.”정은은 그 말에 잠시 멍해졌다가,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너희들... 나 그렇게 믿어도 돼? 나도 가끔 실수하거든?”민지는 마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정은 언니가 실수했다면, 그건 100% 저랑 서준 오빠가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뜻이에요.”“그건 좀 과장이지만...”‘그래도... 이런 믿음을 받는다는 게 참 따뜻하네.’세 사람은 그렇게 식사를 마쳤다.계산은 서준이 맡았고, 정은과 민지는 먼저 주차장으로 향했다. “언니, 먼저 가요. 전 서준이 데리러 갈게요.”“응? 굳이?”“우리 집이랑 방향이 같잖아요. 서준이는 차도 없으니까, 그냥 태워다 주는 거죠, 헤헤.”“그래, 알겠어. 그럼 조심히 가. 운전 천천히 하고.”“네. 언니도 잘 들어가요!”...두 ‘파트너’와 방향을 맞춘 정은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자료 조사부터 시작해 ‘신소재 최적화 계획안’을 정리하고, 모든 내용이 빠짐없이 정리됐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확인했다.벌써 밤 10시. 정은은 핸드폰을 들고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냈다.[장은혁 씨, 시간 돼요? 상의드릴 게 하나 있어요.]그 시각, 은혁은 거실 소파에 앉아 어머니인 황희숙 여사의 ‘진실 공방’에 시달리고 있었다.“너 외할아버지한테 전화 왔어. 오늘 도시락 들고 회사 갔다며? 근데 그냥 말도 없이 두고 사라졌다고 난리야. 게다가 누가 너랑 어떤 여자가 같이 있는 걸 병원 약국에서 봤다던데? 솔직히 말해봐. 너, 여자 친구 생겼지?”은혁은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아니 외할아버지는 왜 또 엄마한테 바로 전화해요? 진짜 너무하신다니까요...”“이 자식 봐라, 말버릇 좀
진욱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렇게 마음이 있는 거면, 왜 정은이한테 솔직하게 말 안 해?”“겁나는 거지, 재석아? 말 꺼냈다가 거절이라도 당하면... 그땐 친구로도 남을 수 없을까 봐, 무서운 거잖아.”진욱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재석을 똑바로 바라봤다.“그건 너답지 않아. 내가 아는 재석이는, 망설이지 않고 결정하는 사람이었어. 결과가 불확실하다고 물러서는 사람 아니었잖아.”“정은이가 ‘지금은 연애 생각 없다’고 했지? 중요한 건 ‘지금은’이라는 거야. 사람 마음은 바뀌는 거고, 그때 거절했다고 지금도 똑같을 거란 보장은 없어. 알겠냐?”재석은 말없이 진욱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 말이 생각보다 깊게 박혔다. ‘지금도 똑같을까? 아니, 혹시... 지금은 조금 다를 수도 있는 걸까...’진욱은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야, 진심으로 말하는 건데, 너 계속 질질 끌면, 정은이 뺏긴다. 그리고 뺏기고 나서 울어봤자, 소용없을 거야.”“우리 정은이 인기 많은 거 너도 알잖아. 예전에도 정은이 두고 싸운 애들 있었잖아. 그리고 오늘 그 남자 봤지? 얼굴 잘생겼지, 젊지, 에너지 넘치지, 옷차림 보니까 집도 잘 사는 거 같던데?”재석은 이런 말을 아주 듣기 싫었다.“닥쳐.”진욱도 더 이상 말하기 싫었다. “칫. 드디어 위기감이 좀 드나?”‘그래, 긴장 좀 해라. 맨날 냉정한 척만 하지 말고... 이번엔 너도 좀 불안해져 봐야지.’...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집에 바래다준 뒤, 약을 가정부에게 전달하며, 복용 방법까지 하나하나 직접 설명했다. 봉수진은 저녁까지 먹고 가라며 붙잡았지만, 정은은 이미 서준, 민지와의 약속이 있었다.“외할머니, 며칠 안에 다시 올게요. 오늘은 친구들이랑 약속이 있어서요.”“그래그래, 알았어. 젊을 땐 많이 만나고 다녀야지.”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숙였고, 곧 차에 올랐다.약속 장소인 레스토랑에 도착했을 땐, 서준과 민지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테이블 위에
은혁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그러게요... 나야 뭐, 그랬으면 좋겠지만...”하지만 정은의 태도는 그리 확신을 줄 만큼의 호감은 아니었다.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분명히 좋아한다는 표시도 없는 애매한 선이 보이는 듯했다.‘그래서 더 미치겠어. 기대도 못 하고,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고... 이러니까 계속 마음이 붕 떠 있잖아...’그렇게 속으로 앓고 있었지만, 정은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봉수진의 약에 모든 관심을 쏟고 있었다.VIP 약국답게, 일 처리는 정말 빨랐다. 정성스럽게 달인 약이 곧바로 팩 단위로 나뉘어 밀봉되었고, 음용 방법까지 깔끔하게 안내되었다.냉장 보관 후, 따뜻한 물에 데워 마시면 된다는 안내였는데, 이 정도면 환자도 거부감 없이 약을 먹을 수 있을 것이었다. 약을 다 받은 후, 약 한 시간쯤 지나 두 사람은 병원을 나섰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은의 전화가 울렸다.“여보세요? 외할머니? 네, 약 다 받아놨어요.”“병원에서 달여줬어요. 네, 거기 계세요. 지금 바로 갈게요.”전화를 끊은 정은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은혁을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오늘 고마웠어요. 외할머니 모시러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아, 어... 그래요! 잘 가요!”은혁은 여자의 뒷모습이 멀어질 때까지 멍하니 서 있었다.심지어 여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후에도 한참을 그렇게 바라본 후에야 아쉬움 가득한 시선을 거두었다.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고, 화면엔 ‘황기' 두 글자가 떴다.“여보세요?”[야 이놈아! 도시락 던져놓고 도망가듯 나가버리면 어떡해?! 말도 못 붙였잖아! 뭐가 그렇게 급해? 뭐가 외할아버지보다 중요한 거냐고?!]“죄송해요... 헤헤.”황기는 순간 당황했다. ‘얘 지금 뭐야? 미쳤어? 웃음은 왜 이렇게 정직하게 새어 나오는 건데...?’...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태우고 병원을 나서는 중이었다. 바로 그때, 재석은 약을 수령하고 외래 진료실 앞 벤치에 앉아 있었다.
정은도 여기서 재석을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선배님, 병원엔 무슨 일로 오셨어요?”재석은 그제야 시선을 거둬들였다. 눈길이 정은에게 닿는 순간, 표정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난...”“날 데려다주러 온 거야.” 그 순간, 전진욱이 배를 감싸 쥐며 천천히 다가왔고, 재석 대신 대답을 건넸다.정은은 진욱을 바라보다가 눈이 살짝 커졌다. “교수님, 어디 아프세요?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요.”“하... 뭘 잘못 먹었는지, 아침부터 배탈이 나서... 약도 안 듣고... 이 사람이 막 끌고 오더라니까... 검사라도 받아보라고.”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하셨어요. 괜히 방치하다가 더 심해질 수도 있잖아요. 미리 체크하면 마음도 편하고요.”“어우, 너희 둘 미리 맞췄냐? 말이 어쩜 그렇게 똑같냐?” 진욱이 짐짓 장난스러운 말투로 투덜댔다.정은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재석을 바라봤다. “그랬어요?”재석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눈빛 속 어딘가 알 수 없는 감정이 일렁였다. ‘저 말투, 저 표정... 나만 아는 게 아닐 텐데...’“정은 씨, 이제 가야죠.” 그때, 은혁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아, 네.” 정은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희 먼저 갈게요.”그렇게 말한 후, 은혁과 나란히 병원 복도를 걸어 나갔다.재석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두 사람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눈빛 속 감정은 복잡하고도 묘했다. ‘뭔데, 저 둘은 저렇게 자연스러워...’“재석아? 야, 재석아!”진욱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재석은 고개를 돌렸지만, 눈빛 속 싸늘함은 여전했다. 진욱은 그 눈빛에 소름이 돋아 어깨를 움찔거렸다.“너... 왜 그래?”“방금 정은이가 ‘저희’라고 했어.”“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재석을 바라봤다. 몇 초간 멍하던 그는 그제야 이해가 된 듯 말했다. “아... 그 ‘저희’? 그게 뭐 어때서? 같이 왔으니까 ‘저희’지. 그럼
얼마 지나지 않아 황 원장은 처방전을 프린트해서 정은에게 건넸다.“수고 많으셨습니다, 원장님.”정은이 공손히 인사하자 황 원장은 손을 휘저었다.“아이구, 무슨... 이 아가씨는 인사도 참 반듯하게 잘하네요. 말도 예쁘게 하고, 얼굴도 예쁘고. 이런 손녀가 있으면, 어디 내놔도 자랑이겠네요.”봉수진은 바로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럼요. 우리 손녀는 어디 하나 빠지는 데가 없어요.”황 원장은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장난스럽게 물었다.“이렇게 예쁜 아가씨한테 남자 친구가 없을 리 없는데? 그렇죠?”봉수진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없어요! 보통 남자애들은 우리 정은이랑 안 어울려요.”“허허, 그래도 우리 손자 정도면 꽤 괜찮은데...?”황 원장이 살짝 떠보자 봉수진은 손사래를 쳤다.“아이구, 그 얘긴 그만해요. 정은이 아직은 시집 안 보낼 거예요. 지금이 제일 곁에 두기 좋을 때라니까요.”‘아이고, 또 시작이다...’정은은 속으로 헛웃음 치며 처방전을 가방에 쏙 넣고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났다.“저, 약 지으러 먼저 다녀올게요!”...진료실 문을 나서는 순간, 정은은 누군가와 부딪혔다.“아, 죄송해요!”고개를 돌려 상대방을 본 순간 정은의 걸음이 멈췄다.“은혁 씨?”은혁은 보온 도시락 통을 들고 서 있었다.“정은 씨! 또 보네요. 우리 진짜 인연인가 봐요? 하하...”“여긴... 병원인데? 누가 입원하셨어요?”정은이 도시락을 보며 물었다.“아, 아니에요. 저 입원실 온 거 아니고요! 외할아버지가 이 병원 의사세요. 오늘 외래 당번이라 저희 어머니가 직접 도시락을 싸주셨는데, 제가 대신 가져다드리러 온 거예요.”“혹시 외할아버지 성함이 황 씨?”“네! 황기 원장님이세요. 한약재 이름에서 따오셨대요, 혹시... 아는 분이세요?”‘어머나, 진짜 인연인가?’정은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오늘 저희 외할머니 진료도 황 원장님한테 받은 거예요.”“정말요? 세상에... 진짜 대박. 어쩐지 자꾸 마주치네요.”은혁은 정은 손에 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