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 아침, 정은은 전화 때문에 잠에서 깼다.날이 어슴푸레하게 밝자, 그녀는 눈을 비볐는데, 겨우 7시도 안 된 것을 발견했다. 정은은 하품을 하며 눈을 떴지만 머리는 여전히 멍했다.그녀는 핸드폰을 받았고, 목소리는 금방 깨어나서 약간 잠겼다.“아빠, 왜 이렇게 일찍 전화하신 거예요?”소진헌은 잠시 침묵하다가, 다소 당황한 어조로 말했다. [정은아, 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찾아오셨어.]정은은 미처 이해하지 못했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요? 그게 누구신데요?”[네 엄마 친부모님. 네 진짜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찾아오셨어.]정은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침대에서 뛰어내렸다. “지금 표 끊어서 돌아갈게.”오후 12시, 비행기가 착륙했다.정은은 공항을 나와 얼른 택시를 잡았다.집 앞에 도착하기도 전에, 정은은 별장 밖에 차 두 대가 세워진 것을 보았다.한 대는 벤틀리, 다른 한 대는 특수 제작한 롤스로이스였고, 번호판도 고급스러운 번호였다. 둘 다 일반인이 쉽게 탈 수 있는 차가 아니었다.이웃들이 지나가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고급차는 흔하지만, 벤틀리는 돈만 있으면 살 수 있었다.하지만 그 롤스로이스는 돈이 있어도 살 수 없는 차였다.특히 특수 번호판까지 달린 차라면, 재벌 가문이거나 국가에 큰 공헌을 한 사람일 것이다.정은은 입술을 깨물며 마음이 무거워졌다.문을 열고 들어가자, 정원에서 땅을 파고 있는 소진헌이 보였다.그는 어쩔 줄 모르는 아이처럼 땅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손에는 삽을 들고 진흙을 이리저리 뒤적이고 있었고, 발 옆에는 빈 화분이 몇 개 놓여 있었다.화초를 가꾸는 것 같지 않았는데, 그냥 손에 무언가를 잡고 있어야 마음이 놓이는 듯했다.정은은 현관문을 바라보았다. 문이 열려 있었고, 안에서 말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아마도 그녀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일 것이다.정은은 서둘러 집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소진헌 앞으로 걸어가
정은은 서둘러 소진헌을 달랬다. “엄마가 친부모님을 찾은 건 좋은 일이에요.”이미숙은 과거가 없는 사람이었다.예전에는 뿌리를 찾으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이미 희망을 접었다.때로는 자신을 소설 속 인물에 대입하기도 했다. 비참한 어린 시절, 부모님이 원수에게 암살당한 이야기들...그러나 후에 이미숙은 더 이상 이런 일로 고민하지 않았고, 더 이상 기대를 하지 않았다.하지만 정은은 어머니가 가족에 대한 갈망을 품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그래서 소진헌이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찾아왔다고 말했을 때, 그녀는 엄청난 기쁨을 느꼈다. 이미숙을 위한 기쁨.하지만 소진헌은 당장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엄마가 어떤 분인지, 두 분은 오랜 시간을 함께 하셨으면서도 모르시겠어요? 겉으로는 부드럽고 온화하지만, 속은 매우 단호하신 분이잖아요.”“한번 결심한 일은 절대로 흔들리지 않으실 거예요. 아빠, 그동안 함께한 정을 생각해 보세요. 왜 이렇게 자신이 없으세요? 엄마가 저와 아빠를 버리고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와 떠나실 것 같아요?”소진헌은 잠시 침묵에 잠겼다.‘그래. 우리 사이의 감정이 어떻게 쉽게 사라질 수 있겠어? 게다가 우리에게 정은이라는 딸까지 있잖아!’이렇게 생각하자, 소진헌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 “일리가 있네. 나도 잠시 생각이 꼬였어...”정은이 말했다. “가요, 우리 같이 들어가요.”“그래.”그렇게 부녀는 함께 집 안으로 들어갔다.미리 마음의 준비를 했지만, 소파에 앉아 있는 현빈을 보자, 정은은 완전히 멍해졌다.남자는 단정하게 앉아 있었고, 평소의 느슨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눈빛은 진지했고, 표정 역시 엄숙했다.그와 함께 앉아 있는 두 노인을 보자, 정은은 다시 한번 놀랐다.현빈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였다.예전에 J시에서 우연히 몇 번 만난 적이 있는, 매우 친절한 두 사람이었다.그때 그녀는 자유분방한 현빈이 이렇게 자상한 어르신을 모시고 있다는 사실에 무척 놀랐다.이렇게 다
봉수진은 지금 현빈의 조언을 듣고 눈 치료와 몸조리를 꾸준히 해온 걸 다행으로 여기고 있었다.그녀의 시력은 점점 회복되고 있었다.그래서 봉수진은 외손녀의 얼굴이 딸과 얼마나 닮았는지 제대로 볼 수 있었다.이미숙은 정은과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사이란 사실에 놀랐다.그래서 정은은 그들의 첫 만남에 대해 이야기했다.이춘재는 감개무량했다. “네 엄마와 나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널 찾아다녔어. 국내외를 다 돌아다녔는데, 이렇게 가까이 있으면서도 두 번이나 놓쳤다니... 다행히 이번에는 놓치지 않았어.”여기까지 말하자, 봉수진은 정은과 현빈이 더 일찍 만났단 걸 떠올렸다. 이것은 정말 하늘이 정한 인연이었다.“정은은, 말하자면 현빈은 네 사촌 오빠야. 그동안 전혀 눈치채지 못했어...”현빈은 아까부터 말이 없었다. 얼굴은 굳어 있었고, 표정도 어두웠다.정은은 잠시 멈칫하다가, 곧 반응하며 웃으며 말했다. “오빠.”현빈은 주먹을 꽉 쥐었고, 눈빛은 더욱 어두워졌다.봉수진은 이를 눈치채지 못하고 웃으며 말했다. “현빈이 조금만 더 눈치가 빠르고 신경을 썼더라면, 우리는 더 일찍 만났을 텐데.”이춘재는 손을 저으며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현빈과 정은이가 이런 인연을 맺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해. 너무 욕심을 부리면 안 돼.”“그래요. 이걸로 충분하죠... 정말.”살아생전에 이미숙을 찾은 것만으로도 이미 다행이었으니 더 이상의 욕심은 부리지 말아야 했다.정은은 컵을 들고 미소를 지었고, 현빈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평소의 여유로움과는 달리, 그의 침묵은 이상할 정도로 깊었다.이미숙은 두 아이의 관계에 대해 놀랐지만, 그보다는 지난 몇 년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더 궁금했다.그녀는 이미 부모님에 대한 기억을 거의 다 떠올렸다.지난번 유보영과의 다툼으로 이마를 다친 이후, 기억들이 점차 떠오르기 시작했다.이춘재와 봉수진을 직접 만나며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으니, 이미숙의 기억은 마치 퍼즐이 완성된 듯 채워졌
“심 대표님!” 정은은 현빈의 말을 끊으며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지금 무슨 말을 하려고 있는지,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똑똑히 생각하고 나서 다시 말해요.”“너도 알잖아?” 남자는 정은을 자신의 품에 가두며 양손으로 벽을 짚었다.“알면 어떻고 모르면 또 뭐가 달라지는데요? 지금 우리는 그런 관계로 발전할 수가 없어요...”“무슨 관계?”현빈은 입꼬리를 치켜올리며 말했다. “말해봐, 무슨 관계냐고?”“우린 사촌 오빠와 사촌 동생 사이잖아요.”“너 아직 모르지? 우리 어머니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친딸이 아니셔. 즉, 우리는 혈연관계가 없단 말이야!”정은은 잠시 멍해졌다. “혈연이 있든 없든, 우리 사이는 불가능해요.”“나는 당신을 좋아하지 않으니까.”‘또 이 말이네! 항상 그 말밖에 없어!’현빈은 정은의 어깨를 잡고 있는 손에 살짝 힘을 주었다. “왜 나를 좋아하면 안 돼? 넌 강도겸과 같은 쓰레기까지 사랑했었잖아. 왜 나는 안 되는 거야? 정은은...”그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나에게 이렇게 잔인하게 굴지 마, 제발.”냉정함, 이성, 현빈은 그런 것들 다 필요 없었다.그는 어젯밤 다 하지 못한 말을 마저 하며, 정은이 도망칠 기회를 주지 않으려 했다.그러나...“그만해요.” 정은은 고개를 돌렸고, 눈에는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현빈은 씁쓸하게 웃었다.잠시 후, 그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왜 더 듣지 않는 거야? 왜... 나에게 조금의 기회도 주려 하지 않는 거냐고? 너도 두려운 거지? 우리 사이에 다른 가능성이 있을까 봐.”“아니요.” 정은은 고개를 살짝 저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는 냉정했다. “말하지 말라는 이유는 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해서예요. 왜냐하면 지금부터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든, 우리는 남매일 뿐이고, 남매로만 지낼 거예요.”말을 마치고, 정은은 남자의 품에서 빠져나와 화장실로 향했다.현빈은 그대로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한참 지나서야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 “하... 남매?”
현빈은 술집을 찾아갔고, 앉자마자 독한 술 몇 병을 따서 한 잔 한 잔 마셨다.그 사이 어떤 여자가 와서 말을 걸었지만 예외 없이 모두 그에게 쫓겨났다.현빈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도록 술을 마시다가 앞이 잘 보이지 않을 때에야 호텔로 돌아왔다.도중에 현빈은 머리가 어질어질하여 눈을 감으면 정은의 얼굴이 떠올랐다.그는 자신이 왜 항상 한 걸음 늦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전에 현빈은 도겸에게 졌고, 이제 또 이 빌어먹을 사촌 오빠라는 신분 때문에 졌다.‘하나님은 여태껏 날 돌본 적이 없어!’택시에서 내린 현빈은 비틀거리며 호텔로 들어갔다.엘리베이터를 탈 때, 향기로운 냄새가 콧구멍으로 파고들었고, 이어서 부드러운 몸이 달라붙었다. 여인은 일부러 가슴으로 현빈의 팔을 문지르며 대담하게 집적거렸다.그리고 목소리는 더욱 달콤하고 애교가 넘쳤다.“오빠, 왜 혼자서 술을 마신 거예요? 많이 취한 것 같은데, 내가 같이 방으로 들어가줄게요...”현빈은 알코올 때문에 평소보다 반응이 좀 느렸지만, 결국 손을 들어 여자를 뿌리쳤다. “꺼져! 날 건드리지 마!”현빈의 혐오스러운 반응은 마치 무슨 몸에 더러운 거라도 묻은 것 같았다.여자는 화가 나서 입을 삐죽거리며 퉤 소리를 질렀다. “네가 뭔데 감히 날 밀어내는 거야?! 술주정뱅이가 누구한테 차였는지, 감히 날 뿌리쳐?!”그녀의 말 한마디가 마침 현빈의 정곡을 찔렀다.현빈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턱을 살짝 들었는데, 눈빛의 한기는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만 같았다.여자는 움츠러들었다가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 돌아섰다.현빈은 눈을 드리우며 갑자기 정은에 전화를 걸고 싶었다.그러나 핸드폰을 확인하니 벌써 새벽 1시가 넘었다.그는 머뭇거리며 끝내 번호를 누르지 않았다.마침 이때 두 호텔 직원이 지나가다가 현빈이 정말 심하게 취한 것을 보고 앞으로 다가와서 물었다.현빈은 룸 카드를 꺼내 자신을 방으로 돌려보내라고 분부했다.한 직원이 그를 부축했고, 다른 한 사람은 룸 카드를 들고 방문을 열
이미윤은 자료에 있는 주소를 따라 이미숙이 지금 살고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그녀는 철제 대문 밖에 서서 고개를 들어 눈앞에 있는 별장을 살펴보았다.동네 밖에서 보기엔 그저 그런 것 같았는데, 안으로 들어가니 의외로 괜찮았다.이미숙이 이런 작은 동네에 와서도 별장에 살고 있다니, 정말 신기했다.‘하...’이미윤은 차갑게 웃었다.‘이미숙은 어릴 때부터 운이 좋았지.’심지어 절에 가면 스님이 두 손을 모아 이미숙은 부귀영화를 누릴 운명이라고 말할 정도였다.그런데 이미윤은 늘 옆에 있어도 마치 투명인간이 된 것처럼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이미숙이 있는 곳이라면 이미윤은 무시당했다.정원 너머로 이미윤은 대문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눌렀다.문을 연 사람은 소진헌이었다.그는 어르신들의 입맛을 알아보았고, 밀가루 음식을 좋아한다고 들은 후 만두를 만들고 있었다.반죽을 하던 중, 초인종이 울렸다.문을 열자 화려한 옷차림에 오만한 표정의 낯선 여자가 서 있었다.“누굴 찾으세요?”이미숙은 소진헌을 훑어보았다.키도 크고, 생김새도 괜찮지만 스타일이 너무 촌스러워 그저 평범한 중년 남자 같았다.품위가 없고, 매력조차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소진헌 씨?” 이미윤이 물었다.“네, 맞습니다만, 누구시죠?”이미윤은 은근히 놀랐다.‘이미숙이 이런 남자와 결혼했다니.’소진헌은 예의상으로 대답했을 뿐, 이미윤이 자신을 그렇게 쳐다보는 것에 불편함을 느꼈다.그리고 침묵을 지킬 때, 뒤에서 이미숙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언니?”거실에서, 이미윤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이미숙은 뜨거운 물 한 잔을 건넸고, 웃으면서 말했다.“커피랑 차 싫어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입맛 여전히 그대로겠지?”오기 전에 이미윤은 이미숙이 어떻게 변했을지를 상상해 보았다.수십 년의 떠돌이 생활로, 아마 이미숙은 삶에 지쳐 예전의 모습은 남아있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혼자 고독하게 지내거나, 평범한 사람과 결혼해 뚱뚱하고 못생기게 됐을지도. 돈이 없으면 원래 아름답던 얼굴도
”한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은 좋은 일이야.”이춘재가 감찬했다.소진헌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이미숙은 그제야 이미윤에게 소진헌을 소개한 적이 없다는 것이 생각났다.“이 사람은 내 남편이야.”“안녕하세요.” 이미윤은 살짝 웃었다. “제부는 정말 잘생기셨고, 재능이 넘쳐나는 것 같네요.”지금 이미윤은 더 이상 까다로운 눈빛으로 그를 보지 않았다.소진헌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하세요.”예의를 차렸지만, 은근히 거리감을 가지고 있었다.다른 사람들은 발견하지 못했을지도 모르지만, 이미숙은 그동안 소진헌과 오랫동안 함께 했기에, 이 말을 듣자마자 이상함을 감지했다.그녀는 소진헌을 바라보았다.소진헌은 오히려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이미숙애개 이따가 다시 이야기하자고 표시했다.‘왠지 모르겠지만, 처형이 좀 이상한데... 그리고 불편해’.그래서 소진헌과 너무 다정하게 굴지 않았다.“아빠, 만두를 빚으실 거예요 말 거예요? 어?”정은은 주방에서 나오자 거실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인 것을 보고 그 자리에서 멍해졌다.그리고 눈빛은 이미윤에게 떨어졌다.이미숙은 웃으며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정은아, 이리 와.”정은은 고분고분 걸어갔다.“언니, 내 딸 정은이야. 정은아, 이분은 네 이모야, 얼른 인사해.”눈이 마주치자, 정은은 이미윤을 잠시 훑어보더니 영리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이모.”이미윤은 평온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실제로는 마음속으로 이미 거칠고 사나운 파도가 일었다.‘그날 벤츠 매장에서 재석과 함께 있었던 그 여자아이가 아니야?’이미윤은 당시 사진을 찍어 강서원에게 보내기도 했다.강서원에게 재석이 연애를 했냐고 물었지만, 강서원은 긍정적인 대답을 하지 않고 그대로 얼버무렸다.‘지금 그 태도를 생각해보면, 아들의 여자친구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런 것 같은데?정은을 바라보는 이미윤의 눈빛은 갑자기 의미심장해졌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다시 미소를 지으며 애정이 넘쳐나는 말투로 말했다.“미
다행히 현재 봉수진은 소진헌이라는 사위가 꽤 마음에 들었다.부드럽고 자상하며 세심하고 키와 생김새도 나쁘지 않았다.심지어 연성대학교를 나와 지금은 중점 고등학교에서 물리 선생님을 하고 있었으니, 비록 큰 부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변변한 직장이었다.“이 계란과 표고버섯이 정말 맛있네.”봉수진은 한 입 맛보고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이춘재는 이미 한 접시 다 먹었고, 이제 두 접시를 먹고 있었다.“이 쇠고기로 만든 거 좀 먹어봐, 정말 간이 잘 됐어...”소진헌은 칭찬을 받자 좀 쑥스러워 어수룩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입맛에 맞으니 다행이네요. 제가 많이 만들었으니 이따가 모자라면 더 삶으면 돼요.”“소 서방도 서 있지 말고 빨리 앉아서 같이 먹어. 아침 일찍 일어나서 만드느라 수고했어...”소진헌은 대답을 하며 그릇에 만두를 담은 뒤 이미숙의 옆에 앉았다.“수고는 무슨, 다 당연한 일을 한 거죠.”온 가족이 화기애애했지만, 옆에 앉아 있는 이미윤은 오히려 남처럼 보였다.이 화목한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았다.그녀는 입가를 구부리고 웃으며 말했다.“아버지, 어머니, 제가 레스토랑에 자리를 예약했는데. 이따 점심에 나가서 드실까요? 미숙이 다시 찾은 기념으로 말이에요.”이춘재는 이 말을 듣고 참지 못하고 눈살을 찌푸렸다.바깥 레스토랑은 기름과 소금에 신경을 쓰지 않았으니, 봉수진의 현재 상태로는 전혀 먹을 수 없었다.이미숙은 잠시 멈칫했다.“밖에서 먹으려면 외출을 해야 하잖아. 너무 번거로우니 그냥 집에서 먹는 게 낫겠어. 마침 정은이 아버지도 요리 솜씨를 좀 선보일 수 있고. 그이는 밥을 꽤 잘하거든.”소진헌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마침 오늘 장을 봐야 하니까, 이따가 시장에 갈게요. 점심은 그냥 집에서 드세요.”봉수진은 기뻐서 미소를 지었지만 입으로는 계속 말했다.“너무 수고하는 거 아니야?”“수고는 무슨, 제 영광이죠!”이춘재도 덩달아 웃으며 입에 소고기 만두를 입에 넣었다.“그래, 그럼 우리 점심에 소 서방의
정은은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 안전벨트를 매고 창밖을 슬쩍 바라봤다. 공장은 호텔에서 10km 떨어진 개발지구에 자리 잡고 있었다.은혁이 운전대를 잡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 구역은 첨단 기술 산업 클러스터로 지정돼 있어서, 기술 협력 프로젝트도 대부분 그쪽으로 집중되고 있어요.” “정은 씨가 찾는 그 새로운 감온 정확도 소재는 우리랑 CG그룹이 공동 개발한 건데, 지금까지 1세대부터 3세대까지 세 가지 버전이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집중했고, 중간중간 전문적인 질문도 빠짐없이 던졌다. 은혁이 답할 수 있는 부분은 성의껏 설명했지만, 구체적인 수치나 실험 조건처럼 세세한한 부분은 바로 대답하기 어려운 것도 있었다.약 20분 후, 두 사람은 공장에 도착했다. 은혁이 미리 연락해 둔 덕분에, 정문 앞에는 담당자가 나와 있었다.정은은 안내받아 간단히 실험실과 공장을 둘러봤다. 연구 구역과 생산라인은 전혀 겹치지 않게 구획이 나뉘어 있었고, 현장도 전반적으로 정돈된 느낌이었다.정은이 요청한 소재의 1세대와 2세대는 이미 완제품으로 확보되어 있었지만, 3세대는 아직 실험 단계였기에 정식 생산은 되지 않았다. 따라서 실험실에서 직접 합성해야 했다.“시간은 얼마나 걸리죠?” 정은이 은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은혁은 옆에 있는 연구원을 바라봤다.“8시간 정도 걸릴 것 같아요. 내일 오전엔 제품 받아보실 수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관련 비용은 정산대로 처리해 주세요. 최종 결정되면 한 번에 입금할게요.”은혁은 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비용은 무슨 비용... 정은 씨, 우리 사이에 뭘 그렇게 딱딱하게 굴어요.”정은은 침착하게 말했다. “그럴수록 더 딱딱하게 해야죠. ‘친할수록 돈 문제는 분명하게.’ 이건 기본이에요. 더군다나, 우리 둘은 그냥 ‘친구’일 뿐인데, 은혁 씨가 도와주는 것만 해도 충분히 고마워요.”“게다가 실험실도 예산이 따로 있는 조직이고, 모든 비용
실험실에서 진욱은 오늘만 몇 번째인지 모르게 재석을 힐끔거렸다. 결국 참지 못하고 다가갔다. “재석아, 너 오늘 길 가다 돈 주웠냐?”실험대 앞에서 입꼬리를 내릴 줄 모르던 재석의 손이 잠깐 멈췄다. “데이터 정리는 다 됐어? 3차 실험 가능성 평가 보고서는 언제 낼 건데?”“하, 이 사람 분위기 다 깨네.” 진욱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근데 말이야, 오늘 아침에 네가 샌드위치 먹는 거 봤거든.”“그래서?”“정은이가 해준 거지? 다 알아. 너희 둘, 다시 잘 되는 거야? 그것도 아니면, 이제 미련 접은 거야?” 재석은 살짝 고민하다가, 이제는 말해도 되겠다 싶어 입을 열려고 했다.바로 그때, 핸드폰에서 톡 알림이 떴다. 정은이었다.[도착했어요. 샌드위치는 맛있었어요?]재석은 바로 답장했다.[맛있었어.]정은은 곧장 자신의 일정을 재석에게 알려줬다.[지금 호텔 체크인하고, 오후엔 공장 갈 거예요.][응, 알겠어.]1분 정도 지났지만, 그다음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 재석은 괜히 허전해졌다.‘예전에도 이렇게 대화했었는데... 왜 지금은 이걸로는 부족하지?’정은과 더 오래 이야기하고 싶었다. 더 많은 말, 더 사적인 얘기, 더 가까운 거리. 그 마음은 마치, 가려운 곳을 손톱 끝으로 슬쩍 긁은 느낌. 절대 시원하지 않았다. 그냥 더 간지러워질 뿐.‘그냥, 정은이한테 세게 할퀴어지고 싶은데...’“누구랑 톡하냐?” 진욱이 슬쩍 핸드폰을 들여다보려 다가왔다.재석은 피할 틈도 없이 화면을 들킨 셈이 됐다. “뭘 감춰. 정은이랑 메시지 주고받는 거잖아. 왜? 뭐가 부끄럽다고.”“됐고.” 재석은 핸드폰을 집어넣고, 실험대에서 내려왔다. “오늘 점심은 내가 쏜다. 뭐 먹고 싶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몇 초 멈췄다. 옆에 있던 미진이랑 태민이 눈을 마주쳤다. “교수님,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갑자기 점심을요?”재석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먹고 싶은 거 생각나면 전 교수한테 말해.
비행기 이륙 직전, 은혁이 정은에게 제한했다. “정은 씨, 내 마일리지로 좌석 업그레이드해 줄게요.”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은혁의 얼굴에 아쉬움이 스쳤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로 돌아갔다. 잠시 후, 다시 다가와 말했다. “내가 정은 씨 옆자리로 바꿨어요.”비즈니스석에서 이코노미석으로 자리를 바꾸다니, 웬만한 사람이면 거절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은혁 씨,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돼요.” 정은은 단호한 어조였다.‘처음으로 이렇게까지 분명하게 말한 것 같아.’정은은 연애 한 번 안 해본 소녀가 아니었다. 은혁의 눈빛에 담긴 감정이 어떤 건지, 모를 리 없었다.하지만 그동안 굳이 선을 긋지 않은 건, 은혁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며, 오히려 몇 번이고 도와줬기 때문이었다. 이번 Z시 출장도 은혁의 도움 덕에 가능했던 일이었다.게다가 은혁이 고백도 안 했고, 정은이 불편할 정도로 다가온 것도 아니었으니까... 정은도 자신이 먼저 딱 잘라 말하는 게 오히려 예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그리고 그때의 정은은 솔로였고, 재석이 입을 열게 하기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의 자극은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정은은 이미 재석과의 관계를 정리했고, 은혁은 더 적극적으로 다가오고 있으니, 그녀도 이제 더 늦기 전에 확실히 은혁에게 말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래야 서로 상처받지 않을 테니 말이다.은혁은 정은의 말에 잠시 당황한 듯하다가, 이내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난 정은 씨 옆자리에 있는 게 좋아서 그래요.”정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즈니스석 티켓을 사 놓고 누구랑 자리를 바꾸든, 그건 상대방의 자유니까. 굳이 뭐라고 할 필요는 없지.’그 후, 정은은 노트북을 열고 일에 집중했다. 은혁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틈틈이 정은을 흘끗거렸다.그러다 손을 들어 승무원을 불렀다. “저기요. 잠깐만요.”“네, 손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결국 재석은 아쉬움 가득한 눈빛으로 정은의 손을 놓았다. 그러고는 조용히 열쇠를 건네받아 현관문을 열어주었다.“정은아, 잘 자.”그 한마디.‘정은아’라는 이름이 너무나 자연스럽고도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마치 수천 번은 불러본 것처럼.그 말에 정은은 순간 멍해졌다.‘왜 내 이름을 듣고도 가슴이 이렇게 설레지?’“네, 당신도 잘 쉬어요.”둘은 그렇게 짧은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문 안으로 들어갔다.그날 밤. 정은은 평소와 달랐다. 샤워를 마친 뒤 늘 하던 루틴, 논문 체크나 프로젝트 정리는 손도 대지 않았다.대신, 자기도 모르게 핸드폰을 들고 재석의 SNS를 열었다.‘뭐 하는 거야? 나...’그런데 이상하게, 자꾸만 궁금해졌다. ‘이 사람, 평소에 어떤 거 올리지?’재석은 SNS 설정 따위는 하지 않은 사람이었다.맨 아래까지 내리는 데 몇 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포스트 총수, 대략 서른 몇 개. 그중 90%는 논문, 연구, 산업 동향 공유.‘진짜 성실한 연구자 모드네...’그나마 정은과 관련 있는 건 얼마 전 실험실이 SCI 논문 게재됐을 때 서비대학교 공식 계정에서 축하 포스팅한 걸 공유한 것뿐이었다.[축하합니다.]짧고 건조한 멘트.그 밑엔 전진욱과 조미진이 ‘좋아요’를 눌러뒀다.‘이게 전부야?’그렇게 핸드폰을 내려놓으려던 순간, 알림이 하나 떴다. 재석이 새로운 글을 올렸다.정은은 무심코 눌러봤다. [r = a(1 - sinθ)]‘...어?’정은의 손가락이 멈췄다. 이 수식, 익숙했다. 너무 익숙해서 순간 심장이 멈칫했다.댓글 첫 줄엔 진욱이 있었다.[극좌표 함수? 밤에 안 자고 뭐 하세요? 조 교수님?]조미진과 손태민은 말없이 ‘좋아요’만 눌렀다. 하지만 두 사람은 속으로 ‘다음 연구 주제가 광학 쪽인가?’ 생각하며 혼란스러워했다.아무도 몰랐다. 이 수식의 진짜 의미를.‘r = a(1 - sinθ)’, 하트곡선.‘설마 이게, 그거? 진짜 그거... 맞아?’정은은 손끝을
“그럼... 고백하기 전까지, 혼자서 그렇게 많이 고민한 거예요?”“응.”“어쩐지...”정은이 아주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뭐라고?” 재석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이젠 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가요...”둘은 손을 꼭 잡고 복도로 향했다. 조용한 밤, 서로의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걷던 중, 재석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정은도 따라 멈춰 서며 돌아봤다.“왜요?”“정은아, 우리 지금... 사귀는 거 맞지?”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두 사람이 꼭 잡은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그렇게 생각 안 해요? 조금 전부터 내가 ‘재석 씨’라고 부른 거 못 느꼈어요?”“혹시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정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 지었다.“흠,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평소에도 꿈에서 날 자주 본 모양이네요?”재석의 몸이 순간 굳더니, 양 볼이 순식간에 빨개졌다.‘진짜 자주 꿨나 보다?’재석은 눈을 못 마주친 채, 그저 두 사람이 맞잡은 손만 바라보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진짜 좋아.”‘정은이도, 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구나.’‘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구나.’같은 계단, 같은 복도, 수없이 함께 걸어온 길. 그동안은 늘 친구라는 이름으로, 앞서거나 뒤따르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왔지만, 오늘은 처음으로, 손을 잡고 나란히 오르는 계단.정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근데, 왜 나랑 은혁 씨한테 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재석은 목소리를 낮추며, 살짝 눈을 피했다.“미안. 계산하러 나갔다가... 우연히 통화하는 거 들었거든.”정은의 눈이 살짝 커졌다.그리고 머릿속으로 자신이 통화 중 했던 말을 하나하나 되짚어봤다.‘공항에서 보자, 기대된다, Z시 출장... 뭐 이상한 말한 것도 없는데...?’그런데도 재석은 그걸 ‘여행 약속’으로 받아들였고, 그걸로 인해 혼자 삭이다가 결국 아래층에서 고백까지 해버린 거였다.“너희, Z시에 여행 간다고 했잖아.”
정은이 멍해 있는 사이, 재석이 한 걸음 다가섰다. 늘 부드럽고 점잖던 그가, 이 순간만큼은 전에 없던 강한 기운을 뿜어냈다. ‘이 남자... 이런 눈빛도 있었나?’정은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등이 벽에 닿는 순간, 재석은 어느새 바로 눈앞에 와 있었다.정은이도 이제야 제대로 실감이 났다. 재석이 자신보다 훨씬 크다는 걸. 그리고 지금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내려다보면, 자신이 마치 남자의 품 안에 갇힌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도.재석이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이제 좀 알겠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그때 네가 학업이 먼저라고 했을 때, 난 받아들였어.”“그런데 장은혁한텐 기회를 줬지. 정은아...”그가 고개를 더 숙이자,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목선에 닿았다. 순간, 정은의 팔에 소름이 쫙 돋았다. “너, 나한테 너무 불공평해.”그 마지막 한 마디는 묘하게 서글픈 기운이 섞여 있었다.정은은 입술을 달싹이며 뭔가 말하려 했지만, 재석은 그녀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알아, 내가 지금 어떤 입장인지. 묻고 따질 자격도 없고, 네가 누구를 좋아하든, 그건 네 자유라는 것도 알아.”“이 말 꺼냈다가, 우리 사이가 끝날 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근데... 계속 참다 보니까 알겠더라.”‘난... 그렇게까지 쿨한 사람이 아니었어.’“그래서 이제 참지 않기로 했어.”‘어떻게 되든, 그건 네가 정해.’그렇게 말한 재석은 고개를 숙인 채 멈췄다. 마치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처럼.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용한 밤공기 속에서, 정은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울렸다.“이제, 제가 말해도 될까요?”“응...”“재석 씨.”정은은 처음으로 재석을 그렇게 불렀다.“고개 들어요. 나 좀 봐요.”재석의 어깨가 순간 굳어졌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그는 이미, 거절당할 각오까지 끝냈다.그런데 눈이 마주친 순간, 정은의 두 눈 속에서 재석이 본 건... 눈물이 아닌, 웃음이었다.억지로 짓는
“헤어졌다고요?”정은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몰랐어?!”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진욱은 눈을 반짝이며 의자째로 다가오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본격적인 ‘TMI’를 털어놓기 시작했다.“M시 출장 갔다 오고 며칠 안 돼서, 재석이가 바로 짐 싸서 수아를 내보냈다니까?”정은은 그 말을 듣고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재석과 수아 사이에 어떤 감정선이 있었는지, 그동안 몇 번 스쳐 지나갔던 장면들이 퍼즐처럼 빠르게 떠올랐다.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눈빛 속엔 미묘한 기류가 스쳤다.“아마 진짜 많이 좋아했나 봐. 그러니까 정리할 때도 그만큼 아프고, 오래 걸리는 거겠지. 조금만 시간 지나면, 태민이도 정리될 거야.”진욱은 이어서 말했다.“네.”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대답했다.그 이후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남의 연애는, 들을 수는 있어도 깊게 얘기하지 말아야 해. 괜히 나서 봤자... 괜히 끼어든 꼴만 되니까.’...해가 지고, 붉은 노을이 건물 유리에 비치기 시작할 무렵. 정은은 마침내 작업을 끝냈다.진욱은 기다렸다는 듯 프로그램을 열고 기능 하나하나를 테스트했다.그리고 30초쯤 흐른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어어!! 복구됐어! 됐다! 돌아왔어! 다시 쓸 수 있어!!”미진도 덩달아 벌떡 일어나 양손을 번쩍 들었다.“살았다, 진짜!! 여태 손으로 데이터 입력한 거 생각하면... 이건 거의 기적이야!”진욱은 시계를 힐끗 보더니, 정은을 향해 말했다.“지금 이 시간까지 남아서 도와준 우리 정은이, 완전 수고 많았어! 조 교수...”“응...?”갑작스레 이름이 불리자, 재석은 몇 초간 멈칫하다가 고개를 돌렸다.진욱은 능청스럽게 말했다.“아니, 정은이가 이렇게 큰일 해줬는데, 감사 표시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적어도 밥 한 끼는 사야지.”“맞아요, 맞아요. 조 교수님, 이건 진짜 밥으로도 모자라요.” 미진이 곧장 거들었다.재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략 1년 전, 정은은 한동안 재석의 실험실을 빌려 쓴 적이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전진욱, 조미진 등과 인연이 닿았다.처음엔 서로 어색하고 낯설었지만, 몇 달이 지나면서 조금씩 가까워졌고, 지금은 가볍게 농담도 주고받을 만큼 편해졌다.그러던 어느 날, 진욱은 우연히 정은이 실험 데이터를 처리하는 속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 너무 빠른 게 아닌가 싶어서 슬쩍 물어봤더니, 정은은 코딩도 할 줄 아는 공대 만능 캐릭터였다. 그녀는 직접 짠 프로그램으로 데이터를 자동 정리하고, 다차원 분류와 정렬까지 가능하다고 했다.“와, 뭐야... 완전 반칙인데?”진욱은 결국 정은에게 부탁해 실험실 맞춤형 프로그램 하나를 따로 제작해달라고 했고, 그 이후, 데이터 정리는 그야말로 신세계를 맞이했다. 진욱은 쓸 때마다 감탄하며 말했다.“진짜... 정은이 덕분이야. 이게 사람을 살리네.”하지만 어제 그 기특한 프로그램이 갑자기 먹통이 됐다. 손태민이 고쳐보겠다고 덤볐지만, 결과는... 풍비박산이었다. ‘이젠 누가 손댔다간 진짜 박살 나겠어...’ 결국 정은에게 SOS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재석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오늘 시간 돼? 안 되면, 며칠 뒤도 괜찮고...]진욱은 훨씬 급했다. 말 그대로 살려달라는 마음이었다.[야, 오늘 안 데려오면... 나 여기서 바로 싸버린다! 진짜라고, 어?!]그는 어제 약 먹고 좀 괜찮아진 줄 알았건만, 밤새 배가 또 난리였다. 오늘 아침부터 실험실 화장실은 진욱의 전용이 되었다. 오전에만 6회 방문.그 말은, 그냥 협박 아니었다. 진짜 실현 가능성이 있었으니 말이다.정은은 상황을 듣고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시간 돼요. 지금 바로 갈게요.”[그래. 그럼 내가 정문 앞으로 갈게.]‘굳이 마중까진 필요 없는데...’ 뚝-정은이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 ...10분 뒤, 정은은 학교 정문 앞에서 재석과 마주쳤다. 두 사람은 실험실로 걸어가며 프로그램
“언니, 이건 굳이 우리 의견 물을 필요도 없지 않아요? 언니가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가는 거죠. 저희한텐 뭐든 시키기만 하세요. 무조건 따라갈게요!”민지가 단호하게 말하자, 서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맞아요, 저흰 누나 믿고 가는 거예요. 결정은 누나가 해요.”정은은 그 말에 잠시 멍해졌다가,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너희들... 나 그렇게 믿어도 돼? 나도 가끔 실수하거든?”민지는 마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정은 언니가 실수했다면, 그건 100% 저랑 서준 오빠가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뜻이에요.”“그건 좀 과장이지만...”‘그래도... 이런 믿음을 받는다는 게 참 따뜻하네.’세 사람은 그렇게 식사를 마쳤다.계산은 서준이 맡았고, 정은과 민지는 먼저 주차장으로 향했다. “언니, 먼저 가요. 전 서준이 데리러 갈게요.”“응? 굳이?”“우리 집이랑 방향이 같잖아요. 서준이는 차도 없으니까, 그냥 태워다 주는 거죠, 헤헤.”“그래, 알겠어. 그럼 조심히 가. 운전 천천히 하고.”“네. 언니도 잘 들어가요!”...두 ‘파트너’와 방향을 맞춘 정은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자료 조사부터 시작해 ‘신소재 최적화 계획안’을 정리하고, 모든 내용이 빠짐없이 정리됐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확인했다.벌써 밤 10시. 정은은 핸드폰을 들고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냈다.[장은혁 씨, 시간 돼요? 상의드릴 게 하나 있어요.]그 시각, 은혁은 거실 소파에 앉아 어머니인 황희숙 여사의 ‘진실 공방’에 시달리고 있었다.“너 외할아버지한테 전화 왔어. 오늘 도시락 들고 회사 갔다며? 근데 그냥 말도 없이 두고 사라졌다고 난리야. 게다가 누가 너랑 어떤 여자가 같이 있는 걸 병원 약국에서 봤다던데? 솔직히 말해봐. 너, 여자 친구 생겼지?”은혁은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아니 외할아버지는 왜 또 엄마한테 바로 전화해요? 진짜 너무하신다니까요...”“이 자식 봐라, 말버릇 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