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석은 고개를 숙이고 정은의 핸드폰을 힐끗 바라보았다. 가벼운 탄식 속에 어쩔 수 없는 기색이 서렸다.“취소해. 내가 데려다줄게.”[내가 데려다줄게...]정은의 마음이 살짝 흔들렸다. 그녀의 눈에 저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네.”차 안에는 따뜻한 바람이 불어와, 순간 차가운 공기를 밀어냈다.재석은 정은의 새빨개진 손가락을 힐끗 바라보았다.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눈사람이라도 만들었어?”‘명탐정 코난이야 뭐야?’그녀가 대답하지 않자, 재석은 더 묻지 않고 말했다.“보온병에 대추차 있어. 수납함에 일회용 컵도 있으니까 한잔 마셔.”보온병은 컵홀더에 옆에 놓여 있었다.정은이 뚜껑을 열자, 따뜻한 김이 피어오르며 달콤한 향이 퍼졌다.표면에는 몇 알의 구기자가 떠 있었지만, 조금만 더 향을 맡아 보면 달콤한 향기 속에서도 대추와 생강 특유의 알싸한 향이 느껴졌다.정은은 대추차도 끓일 줄 알고, 생강탕도 만들 줄 알았다.예전엔 도겸을 위해 자주 끓였지만, 정작 그녀 자신은 생강의 맛을 좋아하지 않았다.“차 안에서 마시면 쏟을 수도 있으니까 좀 이따 마실게요.”말을 하며 정은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뚜껑을 다시 닫았다.재석은 피식 웃었다.“설탕 좀 넣었으니까 그렇게 안 매워.”“아니, 맵다고 한 적 없는데... 그냥 좀 있다가 마시려고요!”“굳이 그렇게 강조하지 않았다면 믿었을지도.”“어린애야?”“아니거든요!”재석은 웃음기가 가득한 눈으로 정은을 바라보았다.“생강 싫어해?”“네.”“생강은 적게 넣었고, 대신 설탕을 아주 많이 넣었어. 안 매워.”정은은 의심스럽게 재석을 바라보았다.“진짜죠?”“맛만 봐봐.”“그래요...”그의 말에 정은은 결국 일회용 컵을 꺼내 조심스레 반 컵 정도 따랐다.재석은 그녀가 혹시라도 많이 따를까 봐 걱정했는데, 신중하게 따르는 모습을 보고 피식 웃었다.정은은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셨다.달콤하기는 했지만, 역시나 생강의 알싸한 맛을 감출 순 없었다.‘속았어.’그렇지만, 컵
정은은 뒤를 돌아보았다.재석이 언제 왔는지, 얼마동안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지금 눈웃음을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그 시선이 정은 발밑의 부서진 눈 조각들을 스치고 지나가자, 재석의 눈가에 담긴 웃음기가 더욱 깊어졌다.“또 눈놀이하고 있었어?”“네.”“눈사람 만들려고?”“실패했어요.”“내가 가르쳐 줄게.”말을 마치며 재석은 소매를 걷어붙였다.정은의 눈이 반짝였다. “눈사람 만들 줄 알아요?!”“원리를 알면 어려울 거 없어.”“원리까지 있어요?” 정은이 호기심을 보였다. “무슨 원리인데요?”이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재석은 손에 눈을 움켜쥐고 단단하게 뭉쳤다.“일단 이렇게 작은 눈덩이를 만들어야 해. 처음엔 외부의 힘으로 굴려야 하는데, 점점 커지면서 눈덩이가 지면을 누르는 압력이 증가하잖아? 그러면 눈덩이와 지면 사이의 눈이 살짝 녹아 물기가 생길 거야. 이 물기가 눈덩이와 땅 사이에 붙어 있다가...”“눈덩이가 굴러가면서 접촉면이 바뀌면, 압력이 줄어들면서 다시 얼어붙어 눈이 되고, 자연스럽게 눈덩이에 붙게 되는 거지. 이 과정이 반복되면 눈덩이는 점점 더 커질 거야.”정은은 이상한 눈빛을 던졌다.“왜 그런 눈빛으로 보는 건데?”“선배님, 이론만 설명해서는 소용없을 것 같은데요?”“그럼?”“한번 직접 굴려 봐요. 그러면 믿을게요.”“문제없어. 잘 봐.”5분 후.정은은 억지로 입술을 깨물고 있었지만, 웃음 참기가 너무 힘들었다.재석은 손에 쥔 부서진 눈덩이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분명히 예전에는 성공했는데... 왜 이러지?”정은이 눈을 깜빡였다. “예전에요? 언제요?”재석은 잠시 진지하게 생각했다. “음... 아마도 내가 열 살일 때? 아니면 열한 살일 때인가?”정은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웃고 싶지 않았지만, 안 웃을 수도 없었다.결국 그녀는 꾹 참고 있던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하하하하하!”재석은 할 말을 잃었다.잘난 척 좀 해보려다, 오히려 제대로 당했던
“아니... 그걸 왜 묻는 거야? 우리 연구실 연간 심사 기준 중 하나야? 설마... 요즘 연구하려면 눈덩이 굴리는 법도 알아야 하는 건가?”“나 지금 진지해! 장난치지 말고.”진욱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눈덩이 굴리는 거? 그거 어릴 적 눈밭에서 놀아본 사람이라면 다 할 줄 알지 않아? 너 못 해?”재석은 말을 하지 않았다“너 진짜 못 하는 거야?”“음...”“그럼 뭘 하고 싶은 건데?”진욱은 팔짱을 끼고 재석을 바라보았다.“밖에 눈이 꽤 쌓였더라.”“그래서?”“나가서 네가 좀 가르쳐 줘.”“뭐?”진욱은 오늘 수도 없이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에이, 설마. 설마?! 저 연구에 미친 사람이, 논문만 보면 다른 일에 신경도 쓰지 않는 사람이 이 대낮에 실험실에서 나가 눈덩이를 굴리겠다고?’“야, 내가 무슨 눈덩이 교수님이야?”재석은 말을 하지 않았다.그가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자, 진욱은 헛웃음을 터뜨렸다.“너 진심이야? 진짜 나가서 눈덩이 굴릴 거야? 여기서 논문 쓰는 게 아니라?”“응. 그러니까 가르쳐 줘.”재석은 한 번 더 강조했다.진욱은 기괴한 눈빛으로 재석을 바라보다 순간 깨달았다.‘아, 정은이가 눈을 많이 보지 못했던 것 같은데. 저번에 눈을 봤을 때 엄청 신났었지?’“좋아.”진욱이 키득키득 웃으며 말했다.“가르쳐 주는 건 어렵지 않은데, 나 실험 두 개나 남았거든? 시간 없어. 미안하지만 난 못 도와줘. 다른 사람한테 부탁해.”“내가 할게.”“진짜?! 진심이지?!”“내가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좋아! 역시 우리 조 교수님!”진욱은 눈을 반짝였다.“그런데 말이야, 조건이 하나 더 있어.”“한꺼번에 말해.”“곧 설날이잖아? 난 아직 연차도 못 썼고, 연휴랑 같이 쉴 생각인데, 괜찮지?”“요구가 점점 더 심해지네.”“동의할 거야 말 거야? 조건은 둘 다 필수야. 3초 줄게. 셋, 둘, 하나...”“할게!”“좋아! 가자, 나가서 신나게 놀아보자고!”40분 후.“아니
재석이 눈덩이를 낑낑대며 굴릴 때, 정은은 실험실에서 데이터 기록에 몰두하고 있었다.민지와 서준은 이미 집으로 돌아가고, 그녀 혼자 남았다.평소 민지가 재잘거리는 것에 익숙했기에, 아침에 실험실에 들어섰을 때 정은은 왠지 모르게 허전했다.하지만 실험대 앞에 서서 일을 시작하자 그 허전함도 금세 사라졌다.정은은 혼자 있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다.도겸이 그녀를 별장에 가두었던 그 몇 년,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졌으니까.혼자 책을 읽고, 혼자 공부하고, 혼자 밥을 하고, 혼자 먹고, 혼자 기다리는 것에.학문이라는 건 함께할 수도 있지만, 결국 혼자서도 해야 하는 일이었다.그건 정은이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점심이 되자, 정은은 오랫동안 숙이고 있던 목을 주무르며 탕비실로 향했다.아침에 준비해둔 도시락을 전자레인지에 데우고, 밥을 먹으며 휴대폰을 꺼내 SNS를 확인했다.그때, 진욱이 한 시간 전에 올린 글이 눈에 띄었다.[눈덩이 굴리다가 토할 지경이야.]함께 올라온 사진에는 크기가 일정하고 정렬된 세 줄의 눈덩이가 있었다.‘세 줄이라니?! 꽤 충격이야.’정은은 먼저 ‘좋아요’를 누르고 댓글을 남겼다.[전 교수님 정말 대단해요!]그러자 곧바로 답글이 달렸다.[대단한 건 내가 아니야, 하하하.]몇 분 후, 뭔가 더 말하고 싶었던 듯 다시 문자가 왔다.[그건 정말 대단한 게 아니라, 아주 미친 거지.][그게 무슨 뜻이에요?]그러나 진욱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딱히 깊게 생각하지 않고, 정은은 식사를 마친 후 다시 실험대 앞에 섰다.겨울은 해가 빨리 져서, 정은은 점심시간에 오래 쉬지 않았다.한번 눕기 시작하면 다시 일어나기 힘든 것도 있었고, 무엇보다 일을 빨리 끝내야 일찍 집에 갈 수 있으니까.다행히 실험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는데, 정은은 오후 네 시쯤 택시를 타고 귀가했다.골목에 들어서자, 아래층에서 눈사람을 만드는 두 아이가 보였다.꽤 정성 들인 작품을 만들고 있었다.코는 코, 눈은 눈.빨간 목도
“자, 우리 큰 눈덩이 하나 굴리자.”말하면서 재석은 이미 소매를 걷어붙이며 당장이라도 시작할 기세였다.“선배님, 그냥 눈덩이 말고, 우리 눈사람 만들어요! 네?”재석은 순간 멍해졌다.“뭐든 다 할 줄 안다면서요? 눈사람 만드는 게 더 재밌잖아요. 아, 이왕이면 좀 더 크게 만들어야겠다...”정은은 남자의 반응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두 손을 부지런히 움직였다. 조금 전 아이들이 만들던 걸 떠올리며 그대로 따라 하기 시작했다.한참 동안 재석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자 정은은 고개를 들었다.“선배?”“눈사람을... 만든다고?”“맞아요!”정은의 눈이 반짝였다.“그래.”그는 살짝 한숨을 쉬고는 그대로 쪼그려 앉았다.예상했던 것과는 좀 달랐지만, 그래도 못 할 것도 없었다.그러나 그 결과.정은은 눈앞에 놓인, 어딘가 이상한 두 덩어리의 눈덩이를 바라보았다. 간신히 위아래로 쌓긴 했지만, 둥글지도 네모지지도 않은 데다, 위가 더 크고 아래가 더 작았다.얼굴은커녕 전체적인 형태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이게 대체 뭐지?’억지로라도 무언가라고 해야 한다면 그냥 ‘두 눈덩어리’라고 하는 게 맞을 듯했다.정은은 조심스레 재석을 쳐다보았다.딱히 할 말은 없었다.재석은 민망한 듯 코를 긁적이며 헛기침했다.“그게... 아무래도 오늘따라 컨디션이 좀 안 좋은가 봐.”“괜찮아요...”정은은 재석이 더 민망해할까 봐 그렇게 말했지만, 그는 오히려 더 얼굴을 들 수 없었다.“시간도 늦었고 밖도 많이 춥네. 이제 들어갈까요?”“그래.”한번 허세를 부리다 평생 창피를 당한 셈이었다.두 사람은 나란히 계단을 올라 각자 집으로 들어갔다.거실에 들어서자마자 정은은 2초 정도 침묵했다.그리고 그다음 순간.“푸하하하하하하!”재석에게 미안하지만, 정은은 정말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한편, 재석은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소파에 털썩 앉아 급히 휴대폰을 꺼내 톡을 열었다.그리고 진욱에게 문자를 보냈다.[왜 눈사람 만드는 방법을 안 가르쳐줬어? 뭐든
[할머니께서 정성스럽게 준비하셨으니, 네가 거절하면 실망하실 거야.]정은은 원래 거절하려 했지만, 현빈이 이렇게 말하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오전 11시 30분, 현빈이 차를 몰고 도착했다.정은은 미리 나와 그를 맞았다.“왜 밖에 나왔어? 나 혼자 들어갈 수 있는데.”“못 들어오잖아요.”정은이 같이 출입 인증 구역을 통과하고 나서야, 현빈은 ‘못 들어온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았다.“출입 통제가 처음 왔을 때보다 더 엄격해진 것 같은데?”커팅식 날에 방문한 적이 있었기에, 현빈은 그때의 실험실과 비교해 보았다.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다시 설정했어요.”“위에서 보안 강화를 요구한 거야?”“그런 것도 있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요.”현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오빠는 바쁘지 않아요? 이렇게 시간 내서 밥까지 챙겨올 시간이 있다니?”“바빠도 와야지. 할머니께서 특별히 맡기신 ‘임무’니까.”“임무요?”두 사람이 생활 구역에 도착할 무렵, 현빈은 보온 가방을 열어 도시락통을 하나씩 꺼냈다.심지어 아직도 따뜻했다.그는 차곡차곡 반찬을 식탁 위에 놓으며, 깨끗한 젓가락과 숟가락도 준비했다.“네가 다 먹을 때까지 옆에서 지켜보는 거.”정은은 식탁을 바라보며 속으로 묵묵히 세어 보았다.반찬만 여섯 가지, 게다가 국까지 있었다. 전부 정은이 좋아하는 음식들이었다.“와, 냄새 정말 좋다...”“할머니께서 요즘 요리책을 보며 연습하셨거든. 몇 년 만에 다시 요리를 하시려니 너무 서투를까 봐 걱정된다나. 연습하실 때 만드신 요리들은 나랑 할아버지가 대신 먹었고.”현빈은 웃으며 말했다.“할아버지도 그러시더라. 우리가 네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고.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매일 할머니께서 만드신 요리를 맛보겠어.”정은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그럴 것까진... 그런데 이건 좀 너무 많은데요.”그녀는 난감한 듯 식탁을 바라보다가 문득 떠올랐다.“오빠, 점심 먹었어요?”현빈은 살짝 멈칫했다.“아직. 너무 늦을까 봐
재석은 전혀 사양하지 않고 바로 승낙했다.현빈의 눈빛이 갑자기 어두워졌다.“미안해요, 갑자기 생각났네요. 여기에 남은 그릇과 젓가락이 없는데.”“찬장에 일회용 젓가락 있어요.”정은이 일어나며 말했다.“내가 가져올게요.”그렇게 말하고선 곧장 자리를 떴다.재석은 자연스럽게 현빈 맞은편에 앉아, 식탁을 한번 훑어보며 웃었다.“진수성찬이네요. 딱 봐도 아주 맛있는 거 같아요.”현빈도 가볍게 웃었다.“조 교수님, 실험실은 안 바빠요? 이렇게 남의 실험실에 와서 밥 얻어먹을 시간이 다 있다니?”“연말이라 일정이 좀 느슨해서 그리 바쁘지 않아요. 나도 원해서 밥 얻어먹는 게 아니니 뭐 어쩌겠어요? 심 대표님이 워낙 열정적이어서 직접 초대까지 했으니 내가 거절하면 너무 실례잖아요.”현빈은 말문이 막혔다.“그보다 심 대표님은 요즘 연말 연회 준비로 많이 바쁠 텐데? 그런데도 이렇게 여유가 있는 거예요?”“정은이 밥 챙겨주는 거라면 바빠도 시간은 내야죠.”재석은 피식 웃었다. 현빈이 자연스럽게 내뱉은 ‘정은이’라는 호칭에 조금 웃긴 듯했다.현빈은 미간을 좁히며 돌려 말하지 않았다.“조 교수님, 혹시 정은이를 좋아하는 거예요?”비록 질문이었지만, 확신에 찬 어투였다. 이미 모든 걸 꿰뚫어 보고 있다는 듯.재석은 답하지 않고 되물었다.“어떤 입장으로 묻는 거죠? 그냥 남자로서? 아니면 정은이의 오빠로서?”현빈은 뜻밖이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설마, 우리의 관계를 조 교수님한테 말한 거예요?”“덕분에 더 확신이 서네요. 전에 정은이를 데리러 왔을 때, 일부러 나 헷갈리게 하려던 거였죠?”현빈은 부정하지도, 그렇다고 인정하지도 않았다.“확인도 안 하고 착각했으니 누굴 탓하겠어요?”재석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심 대표님, 솔직히 궁금하네요. 정은이와의 관계를 대체 어떻게 생각하는 거죠? 감정을 말하기 힘든 사이? 그래서 애매하게 행동하며 남들로 하여금 오해를 하게 한 거예요?”현빈은 피식 웃으며 입꼬리를 구부렸다.“그래서, 조
재석이 말했다. “내 사랑은 정정당당해서 숨길 이유가 전혀 없으니 왜 인정하지 못하겠어요?”현빈은 재석의 순수하고 직설적인 눈빛을 바라보며 주먹을 꼭 쥐었다. 처음으로 패배감을 느꼈던 것이다.“정은이는 알고 있어요?”재석은 담담하게 대답했다.“고백을 시도하긴 했지만, 그냥 떠보는 정도였어요. 정은이는 감정을 잠시 뒤로 하고 학업을 우선하겠다고 했거든요.”현빈은 피식 웃었다.“그럼, 차인 거네요?”“아니요.”재석은 현빈의 비웃음을 보고도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덤덤하게 말했다.“정식으로 고백한 게 아니니까요.”현빈의 웃음이 짙어졌다.재석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뭐가 그렇게 웃긴 거죠?”“조 교수님이요.”“그래요?”재석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지금은 기회가 없을지 몰라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 누가 알겠어요. 하지만 심 대표님은... 지금도, 앞으로도 기회가 없을 거예요.”그렇다면 누가 더 우스운 것일까?현빈은 표정이 굳어졌다.“그릇이랑 젓가락 가져왔어요!”정은이 돌아왔다.두 사람은 즉시 입을 다물었다.이 순간만큼은 말하지 않아도 그들은 뭔가 완벽하게 통했다.봉수진이 만든 음식은 넉넉했고, 재석까지 먹어도 충분했다.식사 중 정은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선배님, 부담 갖지 마요. 이건 우리 할머니가 직접 만드신 거예요. 이 소고기 조림도 먹어 봐요, 아, 탕수육도 맛있어요! 이 완자도요! 안에 표고버섯이랑 고기가 들어가 있어요!”재석은 정은이 추천하는 대로 하나하나 맛보았다. 정말 말을 잘 듣는 사람이었다.“소스 맛이 진하면서도 느끼하지 않네. 굉장히 맛있어. 그리고 이 완자는 표고버섯 향이 살아 있고, 전체적으로 살짝 신맛이 도는 것 같은데?”정은은 놀라워했다.“선배님, 미각이 엄청 뛰어나잖아요! 우리 할머니께서 완자를 빚을 때 식초를 조금 넣으시거든요. 그러면 맛이 더 풍부해진대요.”재석이 웃으며 말했다.“다 맛있어. 내가 오늘은 제대로 찾아왔네, 이렇게 맛있는 것을 놓치지 않았으니까.”현빈은 두 사
정은은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 안전벨트를 매고 창밖을 슬쩍 바라봤다. 공장은 호텔에서 10km 떨어진 개발지구에 자리 잡고 있었다.은혁이 운전대를 잡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 구역은 첨단 기술 산업 클러스터로 지정돼 있어서, 기술 협력 프로젝트도 대부분 그쪽으로 집중되고 있어요.” “정은 씨가 찾는 그 새로운 감온 정확도 소재는 우리랑 CG그룹이 공동 개발한 건데, 지금까지 1세대부터 3세대까지 세 가지 버전이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집중했고, 중간중간 전문적인 질문도 빠짐없이 던졌다. 은혁이 답할 수 있는 부분은 성의껏 설명했지만, 구체적인 수치나 실험 조건처럼 세세한한 부분은 바로 대답하기 어려운 것도 있었다.약 20분 후, 두 사람은 공장에 도착했다. 은혁이 미리 연락해 둔 덕분에, 정문 앞에는 담당자가 나와 있었다.정은은 안내받아 간단히 실험실과 공장을 둘러봤다. 연구 구역과 생산라인은 전혀 겹치지 않게 구획이 나뉘어 있었고, 현장도 전반적으로 정돈된 느낌이었다.정은이 요청한 소재의 1세대와 2세대는 이미 완제품으로 확보되어 있었지만, 3세대는 아직 실험 단계였기에 정식 생산은 되지 않았다. 따라서 실험실에서 직접 합성해야 했다.“시간은 얼마나 걸리죠?” 정은이 은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은혁은 옆에 있는 연구원을 바라봤다.“8시간 정도 걸릴 것 같아요. 내일 오전엔 제품 받아보실 수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관련 비용은 정산대로 처리해 주세요. 최종 결정되면 한 번에 입금할게요.”은혁은 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비용은 무슨 비용... 정은 씨, 우리 사이에 뭘 그렇게 딱딱하게 굴어요.”정은은 침착하게 말했다. “그럴수록 더 딱딱하게 해야죠. ‘친할수록 돈 문제는 분명하게.’ 이건 기본이에요. 더군다나, 우리 둘은 그냥 ‘친구’일 뿐인데, 은혁 씨가 도와주는 것만 해도 충분히 고마워요.”“게다가 실험실도 예산이 따로 있는 조직이고, 모든 비용
실험실에서 진욱은 오늘만 몇 번째인지 모르게 재석을 힐끔거렸다. 결국 참지 못하고 다가갔다. “재석아, 너 오늘 길 가다 돈 주웠냐?”실험대 앞에서 입꼬리를 내릴 줄 모르던 재석의 손이 잠깐 멈췄다. “데이터 정리는 다 됐어? 3차 실험 가능성 평가 보고서는 언제 낼 건데?”“하, 이 사람 분위기 다 깨네.” 진욱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근데 말이야, 오늘 아침에 네가 샌드위치 먹는 거 봤거든.”“그래서?”“정은이가 해준 거지? 다 알아. 너희 둘, 다시 잘 되는 거야? 그것도 아니면, 이제 미련 접은 거야?” 재석은 살짝 고민하다가, 이제는 말해도 되겠다 싶어 입을 열려고 했다.바로 그때, 핸드폰에서 톡 알림이 떴다. 정은이었다.[도착했어요. 샌드위치는 맛있었어요?]재석은 바로 답장했다.[맛있었어.]정은은 곧장 자신의 일정을 재석에게 알려줬다.[지금 호텔 체크인하고, 오후엔 공장 갈 거예요.][응, 알겠어.]1분 정도 지났지만, 그다음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 재석은 괜히 허전해졌다.‘예전에도 이렇게 대화했었는데... 왜 지금은 이걸로는 부족하지?’정은과 더 오래 이야기하고 싶었다. 더 많은 말, 더 사적인 얘기, 더 가까운 거리. 그 마음은 마치, 가려운 곳을 손톱 끝으로 슬쩍 긁은 느낌. 절대 시원하지 않았다. 그냥 더 간지러워질 뿐.‘그냥, 정은이한테 세게 할퀴어지고 싶은데...’“누구랑 톡하냐?” 진욱이 슬쩍 핸드폰을 들여다보려 다가왔다.재석은 피할 틈도 없이 화면을 들킨 셈이 됐다. “뭘 감춰. 정은이랑 메시지 주고받는 거잖아. 왜? 뭐가 부끄럽다고.”“됐고.” 재석은 핸드폰을 집어넣고, 실험대에서 내려왔다. “오늘 점심은 내가 쏜다. 뭐 먹고 싶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몇 초 멈췄다. 옆에 있던 미진이랑 태민이 눈을 마주쳤다. “교수님,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갑자기 점심을요?”재석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먹고 싶은 거 생각나면 전 교수한테 말해.
비행기 이륙 직전, 은혁이 정은에게 제한했다. “정은 씨, 내 마일리지로 좌석 업그레이드해 줄게요.”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은혁의 얼굴에 아쉬움이 스쳤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로 돌아갔다. 잠시 후, 다시 다가와 말했다. “내가 정은 씨 옆자리로 바꿨어요.”비즈니스석에서 이코노미석으로 자리를 바꾸다니, 웬만한 사람이면 거절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은혁 씨,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돼요.” 정은은 단호한 어조였다.‘처음으로 이렇게까지 분명하게 말한 것 같아.’정은은 연애 한 번 안 해본 소녀가 아니었다. 은혁의 눈빛에 담긴 감정이 어떤 건지, 모를 리 없었다.하지만 그동안 굳이 선을 긋지 않은 건, 은혁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며, 오히려 몇 번이고 도와줬기 때문이었다. 이번 Z시 출장도 은혁의 도움 덕에 가능했던 일이었다.게다가 은혁이 고백도 안 했고, 정은이 불편할 정도로 다가온 것도 아니었으니까... 정은도 자신이 먼저 딱 잘라 말하는 게 오히려 예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그리고 그때의 정은은 솔로였고, 재석이 입을 열게 하기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의 자극은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정은은 이미 재석과의 관계를 정리했고, 은혁은 더 적극적으로 다가오고 있으니, 그녀도 이제 더 늦기 전에 확실히 은혁에게 말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래야 서로 상처받지 않을 테니 말이다.은혁은 정은의 말에 잠시 당황한 듯하다가, 이내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난 정은 씨 옆자리에 있는 게 좋아서 그래요.”정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즈니스석 티켓을 사 놓고 누구랑 자리를 바꾸든, 그건 상대방의 자유니까. 굳이 뭐라고 할 필요는 없지.’그 후, 정은은 노트북을 열고 일에 집중했다. 은혁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틈틈이 정은을 흘끗거렸다.그러다 손을 들어 승무원을 불렀다. “저기요. 잠깐만요.”“네, 손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결국 재석은 아쉬움 가득한 눈빛으로 정은의 손을 놓았다. 그러고는 조용히 열쇠를 건네받아 현관문을 열어주었다.“정은아, 잘 자.”그 한마디.‘정은아’라는 이름이 너무나 자연스럽고도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마치 수천 번은 불러본 것처럼.그 말에 정은은 순간 멍해졌다.‘왜 내 이름을 듣고도 가슴이 이렇게 설레지?’“네, 당신도 잘 쉬어요.”둘은 그렇게 짧은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문 안으로 들어갔다.그날 밤. 정은은 평소와 달랐다. 샤워를 마친 뒤 늘 하던 루틴, 논문 체크나 프로젝트 정리는 손도 대지 않았다.대신, 자기도 모르게 핸드폰을 들고 재석의 SNS를 열었다.‘뭐 하는 거야? 나...’그런데 이상하게, 자꾸만 궁금해졌다. ‘이 사람, 평소에 어떤 거 올리지?’재석은 SNS 설정 따위는 하지 않은 사람이었다.맨 아래까지 내리는 데 몇 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포스트 총수, 대략 서른 몇 개. 그중 90%는 논문, 연구, 산업 동향 공유.‘진짜 성실한 연구자 모드네...’그나마 정은과 관련 있는 건 얼마 전 실험실이 SCI 논문 게재됐을 때 서비대학교 공식 계정에서 축하 포스팅한 걸 공유한 것뿐이었다.[축하합니다.]짧고 건조한 멘트.그 밑엔 전진욱과 조미진이 ‘좋아요’를 눌러뒀다.‘이게 전부야?’그렇게 핸드폰을 내려놓으려던 순간, 알림이 하나 떴다. 재석이 새로운 글을 올렸다.정은은 무심코 눌러봤다. [r = a(1 - sinθ)]‘...어?’정은의 손가락이 멈췄다. 이 수식, 익숙했다. 너무 익숙해서 순간 심장이 멈칫했다.댓글 첫 줄엔 진욱이 있었다.[극좌표 함수? 밤에 안 자고 뭐 하세요? 조 교수님?]조미진과 손태민은 말없이 ‘좋아요’만 눌렀다. 하지만 두 사람은 속으로 ‘다음 연구 주제가 광학 쪽인가?’ 생각하며 혼란스러워했다.아무도 몰랐다. 이 수식의 진짜 의미를.‘r = a(1 - sinθ)’, 하트곡선.‘설마 이게, 그거? 진짜 그거... 맞아?’정은은 손끝을
“그럼... 고백하기 전까지, 혼자서 그렇게 많이 고민한 거예요?”“응.”“어쩐지...”정은이 아주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뭐라고?” 재석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이젠 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가요...”둘은 손을 꼭 잡고 복도로 향했다. 조용한 밤, 서로의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걷던 중, 재석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정은도 따라 멈춰 서며 돌아봤다.“왜요?”“정은아, 우리 지금... 사귀는 거 맞지?”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두 사람이 꼭 잡은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그렇게 생각 안 해요? 조금 전부터 내가 ‘재석 씨’라고 부른 거 못 느꼈어요?”“혹시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정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 지었다.“흠,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평소에도 꿈에서 날 자주 본 모양이네요?”재석의 몸이 순간 굳더니, 양 볼이 순식간에 빨개졌다.‘진짜 자주 꿨나 보다?’재석은 눈을 못 마주친 채, 그저 두 사람이 맞잡은 손만 바라보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진짜 좋아.”‘정은이도, 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구나.’‘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구나.’같은 계단, 같은 복도, 수없이 함께 걸어온 길. 그동안은 늘 친구라는 이름으로, 앞서거나 뒤따르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왔지만, 오늘은 처음으로, 손을 잡고 나란히 오르는 계단.정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근데, 왜 나랑 은혁 씨한테 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재석은 목소리를 낮추며, 살짝 눈을 피했다.“미안. 계산하러 나갔다가... 우연히 통화하는 거 들었거든.”정은의 눈이 살짝 커졌다.그리고 머릿속으로 자신이 통화 중 했던 말을 하나하나 되짚어봤다.‘공항에서 보자, 기대된다, Z시 출장... 뭐 이상한 말한 것도 없는데...?’그런데도 재석은 그걸 ‘여행 약속’으로 받아들였고, 그걸로 인해 혼자 삭이다가 결국 아래층에서 고백까지 해버린 거였다.“너희, Z시에 여행 간다고 했잖아.”
정은이 멍해 있는 사이, 재석이 한 걸음 다가섰다. 늘 부드럽고 점잖던 그가, 이 순간만큼은 전에 없던 강한 기운을 뿜어냈다. ‘이 남자... 이런 눈빛도 있었나?’정은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등이 벽에 닿는 순간, 재석은 어느새 바로 눈앞에 와 있었다.정은이도 이제야 제대로 실감이 났다. 재석이 자신보다 훨씬 크다는 걸. 그리고 지금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내려다보면, 자신이 마치 남자의 품 안에 갇힌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도.재석이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이제 좀 알겠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그때 네가 학업이 먼저라고 했을 때, 난 받아들였어.”“그런데 장은혁한텐 기회를 줬지. 정은아...”그가 고개를 더 숙이자,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목선에 닿았다. 순간, 정은의 팔에 소름이 쫙 돋았다. “너, 나한테 너무 불공평해.”그 마지막 한 마디는 묘하게 서글픈 기운이 섞여 있었다.정은은 입술을 달싹이며 뭔가 말하려 했지만, 재석은 그녀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알아, 내가 지금 어떤 입장인지. 묻고 따질 자격도 없고, 네가 누구를 좋아하든, 그건 네 자유라는 것도 알아.”“이 말 꺼냈다가, 우리 사이가 끝날 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근데... 계속 참다 보니까 알겠더라.”‘난... 그렇게까지 쿨한 사람이 아니었어.’“그래서 이제 참지 않기로 했어.”‘어떻게 되든, 그건 네가 정해.’그렇게 말한 재석은 고개를 숙인 채 멈췄다. 마치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처럼.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용한 밤공기 속에서, 정은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울렸다.“이제, 제가 말해도 될까요?”“응...”“재석 씨.”정은은 처음으로 재석을 그렇게 불렀다.“고개 들어요. 나 좀 봐요.”재석의 어깨가 순간 굳어졌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그는 이미, 거절당할 각오까지 끝냈다.그런데 눈이 마주친 순간, 정은의 두 눈 속에서 재석이 본 건... 눈물이 아닌, 웃음이었다.억지로 짓는
“헤어졌다고요?”정은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몰랐어?!”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진욱은 눈을 반짝이며 의자째로 다가오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본격적인 ‘TMI’를 털어놓기 시작했다.“M시 출장 갔다 오고 며칠 안 돼서, 재석이가 바로 짐 싸서 수아를 내보냈다니까?”정은은 그 말을 듣고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재석과 수아 사이에 어떤 감정선이 있었는지, 그동안 몇 번 스쳐 지나갔던 장면들이 퍼즐처럼 빠르게 떠올랐다.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눈빛 속엔 미묘한 기류가 스쳤다.“아마 진짜 많이 좋아했나 봐. 그러니까 정리할 때도 그만큼 아프고, 오래 걸리는 거겠지. 조금만 시간 지나면, 태민이도 정리될 거야.”진욱은 이어서 말했다.“네.”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대답했다.그 이후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남의 연애는, 들을 수는 있어도 깊게 얘기하지 말아야 해. 괜히 나서 봤자... 괜히 끼어든 꼴만 되니까.’...해가 지고, 붉은 노을이 건물 유리에 비치기 시작할 무렵. 정은은 마침내 작업을 끝냈다.진욱은 기다렸다는 듯 프로그램을 열고 기능 하나하나를 테스트했다.그리고 30초쯤 흐른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어어!! 복구됐어! 됐다! 돌아왔어! 다시 쓸 수 있어!!”미진도 덩달아 벌떡 일어나 양손을 번쩍 들었다.“살았다, 진짜!! 여태 손으로 데이터 입력한 거 생각하면... 이건 거의 기적이야!”진욱은 시계를 힐끗 보더니, 정은을 향해 말했다.“지금 이 시간까지 남아서 도와준 우리 정은이, 완전 수고 많았어! 조 교수...”“응...?”갑작스레 이름이 불리자, 재석은 몇 초간 멈칫하다가 고개를 돌렸다.진욱은 능청스럽게 말했다.“아니, 정은이가 이렇게 큰일 해줬는데, 감사 표시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적어도 밥 한 끼는 사야지.”“맞아요, 맞아요. 조 교수님, 이건 진짜 밥으로도 모자라요.” 미진이 곧장 거들었다.재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략 1년 전, 정은은 한동안 재석의 실험실을 빌려 쓴 적이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전진욱, 조미진 등과 인연이 닿았다.처음엔 서로 어색하고 낯설었지만, 몇 달이 지나면서 조금씩 가까워졌고, 지금은 가볍게 농담도 주고받을 만큼 편해졌다.그러던 어느 날, 진욱은 우연히 정은이 실험 데이터를 처리하는 속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 너무 빠른 게 아닌가 싶어서 슬쩍 물어봤더니, 정은은 코딩도 할 줄 아는 공대 만능 캐릭터였다. 그녀는 직접 짠 프로그램으로 데이터를 자동 정리하고, 다차원 분류와 정렬까지 가능하다고 했다.“와, 뭐야... 완전 반칙인데?”진욱은 결국 정은에게 부탁해 실험실 맞춤형 프로그램 하나를 따로 제작해달라고 했고, 그 이후, 데이터 정리는 그야말로 신세계를 맞이했다. 진욱은 쓸 때마다 감탄하며 말했다.“진짜... 정은이 덕분이야. 이게 사람을 살리네.”하지만 어제 그 기특한 프로그램이 갑자기 먹통이 됐다. 손태민이 고쳐보겠다고 덤볐지만, 결과는... 풍비박산이었다. ‘이젠 누가 손댔다간 진짜 박살 나겠어...’ 결국 정은에게 SOS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재석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오늘 시간 돼? 안 되면, 며칠 뒤도 괜찮고...]진욱은 훨씬 급했다. 말 그대로 살려달라는 마음이었다.[야, 오늘 안 데려오면... 나 여기서 바로 싸버린다! 진짜라고, 어?!]그는 어제 약 먹고 좀 괜찮아진 줄 알았건만, 밤새 배가 또 난리였다. 오늘 아침부터 실험실 화장실은 진욱의 전용이 되었다. 오전에만 6회 방문.그 말은, 그냥 협박 아니었다. 진짜 실현 가능성이 있었으니 말이다.정은은 상황을 듣고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시간 돼요. 지금 바로 갈게요.”[그래. 그럼 내가 정문 앞으로 갈게.]‘굳이 마중까진 필요 없는데...’ 뚝-정은이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 ...10분 뒤, 정은은 학교 정문 앞에서 재석과 마주쳤다. 두 사람은 실험실로 걸어가며 프로그램
“언니, 이건 굳이 우리 의견 물을 필요도 없지 않아요? 언니가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가는 거죠. 저희한텐 뭐든 시키기만 하세요. 무조건 따라갈게요!”민지가 단호하게 말하자, 서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맞아요, 저흰 누나 믿고 가는 거예요. 결정은 누나가 해요.”정은은 그 말에 잠시 멍해졌다가,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너희들... 나 그렇게 믿어도 돼? 나도 가끔 실수하거든?”민지는 마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정은 언니가 실수했다면, 그건 100% 저랑 서준 오빠가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뜻이에요.”“그건 좀 과장이지만...”‘그래도... 이런 믿음을 받는다는 게 참 따뜻하네.’세 사람은 그렇게 식사를 마쳤다.계산은 서준이 맡았고, 정은과 민지는 먼저 주차장으로 향했다. “언니, 먼저 가요. 전 서준이 데리러 갈게요.”“응? 굳이?”“우리 집이랑 방향이 같잖아요. 서준이는 차도 없으니까, 그냥 태워다 주는 거죠, 헤헤.”“그래, 알겠어. 그럼 조심히 가. 운전 천천히 하고.”“네. 언니도 잘 들어가요!”...두 ‘파트너’와 방향을 맞춘 정은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자료 조사부터 시작해 ‘신소재 최적화 계획안’을 정리하고, 모든 내용이 빠짐없이 정리됐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확인했다.벌써 밤 10시. 정은은 핸드폰을 들고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냈다.[장은혁 씨, 시간 돼요? 상의드릴 게 하나 있어요.]그 시각, 은혁은 거실 소파에 앉아 어머니인 황희숙 여사의 ‘진실 공방’에 시달리고 있었다.“너 외할아버지한테 전화 왔어. 오늘 도시락 들고 회사 갔다며? 근데 그냥 말도 없이 두고 사라졌다고 난리야. 게다가 누가 너랑 어떤 여자가 같이 있는 걸 병원 약국에서 봤다던데? 솔직히 말해봐. 너, 여자 친구 생겼지?”은혁은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아니 외할아버지는 왜 또 엄마한테 바로 전화해요? 진짜 너무하신다니까요...”“이 자식 봐라, 말버릇 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