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806화

Author: 십일
“본보기?”

“네.”

재석은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듣자하니 뭔가 사연이 있는 것 같은데?”

“사연이 아니라 사고예요.”

“한번 들어볼 수 있을까?”

“비밀은 아니에요. 사실... 예전에 재검사를 생략했다가 숫자 하나를 잘못 입력한 적이 있거든요. 그 데이터를 담당한 사람이 민지였는데, 그 사실을 알게 됐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지 뭐예요.”

재석은 정은의 반짝이는 눈빛에 자연스레 빠져들며 궁금해했다.

“그래서? 후에 어떻게 됐어?”

“서준이 바로 데이터를 찾아서 밤새 수정했어요. 이틀 밤을 꼬박 새우고 완벽하게 고친 후에야 다시 업로드했죠.”

민지는 평소 다이어트를 해도 조금 빠졌다가 금방 요요가 오곤 했는데, 그 이틀 동안 스트레스 때문에 3kg이나 빠지고 머리카락도 한 움큼 빠졌다.

“그런데 서준이가, 그렇게 엄격한 사람이 민지한테 사흘이나 휴가를 줬다니까요. 매일 아침 운동하라고 잔소리하던 서준이가요. 아, 선배님,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로 왔어요?”

재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머니에서 USB를 꺼냈다.

“지난번에 네가 부탁한 자료들 다 찾았어.”

정은의 눈이 반짝였다.

“벌써요? 이렇게 빨리 찾은 거예요?”

“해외에 있는 친구들한테 부탁했어. 국내에선 구하기 어려운 자료들도 외국에선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거든.”

“정말 고마워요. 또 신세를 졌네요.”

“괜찮아. 어차피 갚을 필요도 없는데 뭘.”

“그래도 그냥 받을 순 없죠.”

재석은 웃으며 말했다.

“아까 밥 사줬잖아? 그것도 할머니가 직접 해주신 집밥. 따지고 보면 내가 더 이득 본 거야.”

“참, 이제 실험실에 돌아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재석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다들 휴가를 냈거든.”

‘아, 어쩐지...’

그렇게 재석은 오후 내내 실험실에 남았다.

정은이 실험을 하는 동안, 그는 노트북을 꺼내 논문을 쓰기 시작했다.

조용한 실험실에서 두 사람은 각자의 일에 집중했지만, 같은 공간 속에서 함께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흘러 5시가 다 되어갔다.

“이제 집에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ocked Chapter

Related chapters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807화

    봉수진은 서둘러 문을 열었지만, 정은뿐만 아니라 곁에 잘생기고 기품 있는 젊은 남자가 함께 서 있는 것을 보았다.두 어르신은 순간 멈칫하다가 곧바로 눈을 마주쳤다.봉수진은 재석을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미소를 띠며 정은을 바라보았다.“정은아, 이분은 누구니? 소개 안 해줄 거야?”정은이 입을 열기도 전에 재석이 먼저 말했다.“할아버지, 할머니, 안녕하세요. 저는 조재석이라고, 정은이 친구입니다.”두 노인과 시선을 마주하며 재석은 침착하고 차분하게 말했다.이춘재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물었다.“조 씨라고? 혹시... 조기봉 조 회장의 아들인가?”“네.” 재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께서 귀국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원래 제 아버지도 찾아뵙고 싶어 하셨는데, 제가 먼저 와버렸네요.”“내가 잘못 기억하지 않았다면, 조씨 가문은 아들이 셋이라던데, 자네는 몇 째지?”“셋째입니다. 위로 형이 두 명 있습니다.”“혹시 연구직에 종사한다는 그 아들인가?”“네.” 재석은 눈가에 미소를 머금었다.봉수진은 감탄했다.“어머, 그럼 우리 정은이랑 같은 분야네?”이춘재는 피식 웃으며 말을 받았다.“그렇지 않으면 두 사람 어떻게 만났겠어?”봉수진은 재석이 유명한 물리학자라는 걸 듣고 더욱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공부 잘하는 아이에게 어르신들의 편애가 쏠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재석아, 늦은 시간까지 우리 정은이를 바래다줘서 정말 고맙군. 그냥 가지 말고 밥 먹고 가렴.”재석은 그냥 이렇게 찾아왔으니 인사라도 드리는 게 예의일 것 같아 따라 들어온 것뿐이었다.가볍게 인사만 하고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예상치 못하게 저녁 식사까지 권유받았다.“괜찮을까요? 가족끼리 식사하시는데 제가 방해가 되는 건 아니겠죠?”“아유, 방해는 무슨!” 봉수진은 손을 휘휘 내저으며 말했다.“이렇게 추운 날씨에, 게다가 어두운 밤길을 혼자 다니게 하는게 너무 걱정이었는데, 자네가 데려다줘서 정말 마음이 놓이네. 그리고 말이야, 우리 정은이가 친구를 집에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808화

    이춘재도 따라 들어와서 물었다.“도와줄 거 있어?”봉수진은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도와주긴 뭘 도와줘요? 당신이 언제 주방일을 해봤다고?”“허허... 맞는 말이긴 한데, 그래도 같이 있어줄 순 있잖아?”“당산, 내가 보기에 재석은 정말 괜찮은 젊은이에요. 외모도 반반하고 예의도 바르지. 집안도 번듯하고, 무엇보다 가풍이 좋잖아요. 조씨 가문은 명문 가문이지 않나요? 괜한 소문 하나 안 나온 집안이라고요.”이춘재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갑자기 그 얘긴 왜 해? 그런데 뭐, 재석은 꽤 괜찮긴 하지.”봉수진은 거실 쪽을 힐끗 보았다. 눈이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 젊은이가 예의 바르고 겸손하며, 가정교육을 제대로 받았다는 건 한눈에 알 수 있었다.“우리 정은이랑...”“야,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이미 친구라고 했잖아. 대체 뭘 상상하는 거야?”“내가 뭘 상상했다고 그래요? 친구든 뭐든, 우리 정은이의 곁에 있으려면 우리가 제대로 봐야 하지 않겠어요?”“아직도 정은이가 어린애인 줄 아나 본데, 젊은 사람들이 친구 사귀는 건 그들의 자유야. 우리가 굳이 끼어들 필요 없어.”“나도 알아요. 간섭하려는 건 아니지만, 그냥... 객관적으로 재석이라는 아이를 평가해보자는 거죠.”“그래, 우리끼리 조용히 얘기하는 건 괜찮지만, 괜히 정은이 앞에서 티 내지 마. 원래 아무 일도 아닌 걸 가지고 당신이 자꾸 그러면 애들만 민망해지잖아.”봉수진은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내가 그렇게 눈치 없는 사람처럼 보여요?”이춘재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아니, 아니야. 그건 절대 아니지.”“그나저나, 당신 눈치챘어요? 현빈이 기분 별로 안 좋은 거 같은데요?”“그래?” 이춘재는 눈썹을 찡그렸다.“무슨 일 있나?”“들어오자마자 말도 없이 일부터 하잖아요. 기분이 안 좋은 게 분명해요.”“그건 뭐, 회사에 신경 쓰이는 일이라도 있겠지. 그게 뭐가 어때서? 남자는 원래 이 나이엔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 거야. 작은 문제 하나쯤 있는 건 당연한 거고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809화

    정은은 줄곧 바쁘게 지내다가 섣달 그믐날이 사흘 남았을 때에야 비로소 실험실에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왜냐하면 소진헌과 이미숙이 L시에서 왔기 때문이다.부부는 오래전부터 올해 J시에서 이춘재, 봉수진과 함께 설을 보내기로 정해놓았다.소진헌이 부모님과 두 형에게 어떻게 이야기했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결과적으로 그는 이미숙을 따라 J시에 오게 되었다.원래 계획대로라면 이주 전에 도착했어야 했지만, 출발 직전에 이미숙이 갑자기 영감을 받아 일주일간 자신을 방에 가두어 글을 썼고, 이어서 G시에서 열린 사인회에 참석하느라 일정이 계속 미뤄졌다.다음 날 아침, 정은은 차를 몰고 고속열차역으로 향했다.설이라 역 안은 인파로 북적거렸고, 10여 분을 기다린 끝에야 소진헌과 이미숙이 사람들 사이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아빠, 엄마!”정은은 펄쩍 뛰며 손을 흔들었다.이미숙은 눈에 띄는 빨간 코트를 입고 있었고, 키도 크고 세련된 분위기가 풍겨서 군중 속에서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그 옆에 선 소진헌은 그녀보다 키가 좀 더 컸고, 여행 가방을 밀며 한 손에는 크고 작은 짐가방을 한가득 들고 있었다.반면 이미숙은 작은 핸드백 하나만 들고 있어서, 마치 우아하게 휴가를 떠나는 귀부인 같았다.언뜻 보면 마치 어느 집안의 아가씨와 수행하는 집사처럼 보이기도 했다.하지만 현실은 이랬다.“나도 좀 들게요!” 이미숙은 몇 번째인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그러나 예상대로 소진헌은 몸을 재빨리 틀며 피했다.“됐어! 이 정도 짐쯤이야 나 혼자 들 수 있어. 당신 그냥 편하게 가.”말하면서 그는 일부러 짐이 가벼운 척 들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안 돼, 나도 들 거예요.”“안 돼, 그렇게 하게 할 수는 없어.”“싫어요...”“나도 싫어...”정은이 가까이 다가갈 때, 두 사람은 서로 짐을 들겠다고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저... 그럼 제가 좀 들어드릴까요?”그러자 두 사람 모두 만족스러운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810화

    소진헌은 얼버무리며 대충 넘어갔다.분명히 자세히 말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정은도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이씨 가문 본가에서.이춘재와 봉수진은 딸과 사위가 온다는 소식에 일주일 전부터 대청소를 하며 집 안팎을 말끔히 정리했다.이미숙의 방도 새로 꾸미고, 1인용 침대를 2인용으로 바꿨다. 소진헌이 식물을 다루기 좋아한다는 걸 알고, 온실 옆에 작은 공간을 마련해 크고 작은 화분과 다양한 흙까지 준비해 두었다.그뿐만 아니라, 설날 장식도 빠짐없이 걸어 집 안 곳곳에 설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이른 아침, 이춘재와 봉수진은 일부러 새로 맞춘 한복을 차려입고 활기찬 모습으로 딸과 사위를 맞을 준비를 했다.“몇 시죠?” 봉수진이 물었다.이춘재는 손목시계를 보며 답했다. “금방 11시 넘었어.”“그럼 곧 도착하겠네요. 10시에 떠나는 열차 타면 시간이 딱 맞을 거예요. 슬리퍼는 준비됐지?”가정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다 준비해 두었습니다.”“차는 식지 않았어?” 이춘재는 걱정스레 물었다.“아뇨, 아직 따뜻합니다.”“따뜻한 걸로는 부족하지! 차는 펄펄 끓는 맛으로 마셔야 돼! 그거 버리고 내가 이따가 새로 하나 우려야지.”“네.”“그리고.” 봉수진은 문득 떠올린 듯 말했다. “과일은 미리 썰지 말고, 도착한 다음 깎아. 그래야 싱싱한 맛 볼 수 있어.”“알겠습니다.”“거실은 깨끗하게 정리됐지?”“화장실은 오늘 아침에 다시 한번 청소했어?”“주방은 준비 다 됐고?”이렇게 두 노인은 준비 사항을 하나하나 점검하며 바쁘게 돌아쳤다.그리고 마침내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드디어 왔네!”현관 앞에 선 두 사람은 문을 열었다.딸과 사위가 나란히 들어섰고, 그 뒤로 손녀가 따라 들어왔다.두 노인은 이 순간을 수십 년이나 기다려 왔다.그리고 이제야 그 꿈이 이뤄졌다....점심은 봉수진이 정성껏 차린 음식들로 가득했다.전부 소진헌, 이미숙, 그리고 정은이 좋아하는 음식들로 준비되었다.“미숙아, 이것 좀 먹어봐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811화

    점심을 먹고 난 후, 봉수진은 이미숙과 소진헌을 데리고 새로 꾸민 방으로 향했다.“예전에 미숙이가 여기서 지냈는데, 이제는 너희 두 사람의 방이야. 침대도 새로 바꿨고, 이불 커버도 전부 새거야.”봉수진은 이 방을 수십 년 동안 그대로 보존해 왔다. 가구 배치는 물론, 작은 장식품 하나까지도 남이 손대지 못하게 했다.청소도 직접 도맡아 했고, 심지어 외국에 있을 때도 반년에 한 번씩은 꼭 귀국해서 방을 정리하곤 했다.그렇게 조심스럽게 소중히 가꿔온 덕분에, 방은 예전 모습 그대로 유지될 수 있었다.이미숙이 방에 들어서자, 익숙한 기억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순수했던 어린 시절부터, 소녀의 감성, 그리고 사랑의 감정이 움트던 순간까지...이 방에는 그녀의 지난날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그때, 갑자기 불쑥 떠오른 기억의 조각들이 나타났다.깨진 꽃병, 어두운 구석, 피 묻은 칼날, 그리고... 한 여자의 흐느낌.“당신? 당신 왜 그래? 어디 아파?”제일 먼저 이상함을 감지한 건 소진헌이었다.봉수진도 다급히 다가왔다. “무슨 일이야? 방이 너무 답답한 거 아니야?”그러면서 서둘러 창문을 활짝 열었다.찬바람이 스며들자, 이미숙은 움찔하며 정신을 차렸다.“괜찮아요... 저 괜찮아요...”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손을 흔들며 말했다.“잠깐 머리가 아팠는데, 이제 괜찮아졌어요.”봉수진은 몇 번이나 그녀의 상태를 확인한 뒤에야 안심하고 자리를 떴다.떠나기 전, 따뜻한 목소리로 당부했다.“미숙아, 소 서방, 너희도 아침 일찍 열차 타고 오느라 피곤할 텐데 좀 쉬어.”“네, 어머님도 아침부터 계속 바쁘게 요리를 하셨잖아요. 얼른 가서 쉬세요.”소진헌은 그렇게 말하며 문을 닫았다.이제 방 안에는 두 사람만 남았다.“방금 무슨 일 있었어?”봉수진을 안심시키려 둘러댄 이미숙의 핑계는 정작 소진헌에게는 통하지 않았다.그녀는 남편의 부축을 받아 침대 가장자리에 앉으며 조용히 말했다.“뭔가 생각났어요.”“뭐가?”“그런데 완전히 떠오르는 건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812화

    이미숙이 놀라며 말했다.“등 돌리고 있었는데도 내가 깬 걸 안 거예요?”소진헌은 웃으며 앞쪽 벽을 가리켰다.“자, 당신 그림자.”이미숙은 힐끗 보더니, 어이가 없어졌다.그녀는 민망함을 감추려 가볍게 헛기침하며 화제를 돌렸다.“사진첩에 뭐 볼 게 있다고 그렇게 열심히 보는 거예요?”“볼 게 많지. 옛날 당신 모습 말이야.”소진헌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사진첩을 넘겼다.“처음 당신을 봤을 때, 얼굴이 너무 창백해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어. 그 후에도 한동안 건강이 안 좋았지. 두 걸음만 걸어도 숨이 차서 오래 쉬어야 했고. 그래서 원래 몸이 약한 줄로만 알았는데, 예전에는 이런 개구쟁이였네...”소진헌의 낮은 목소리에는 옛 추억이 묻어났다.사진 속 소녀와 눈앞의 이미숙이 서서히 하나로 겹쳐지며, 온전한 그녀가 되어갔다.이미숙은 웃으며 가슴이 먹먹해졌다.“과거의 나에 대한 기억은 없어요. 마치 바다에 떠 있는 배처럼, 어디서 왔는지도,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다행히 당신을 만나서, 이제는 이 세상에 내가 머물 곳이 생겼어요. 더 이상 떠돌지 않아도 되니까요.”소진헌의 눈빛이 한층 더 깊어졌다.그는 사랑이 가득한 눈으로 이미숙을 바라보았다.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다가, 이미숙은 소진헌이 들고 있는 사진첩을 보고는 호기심에 몸을 기울여 함께 넘겨보았다.“이거 몇 살 때야? 왜 이렇게 남자애처럼 보여?”“음... 다섯이나 여섯 살쯤? 이원에서 지낼 때였는데, 그곳에 엄청 큰 연못이 있었거든요.”“어?”어느 한 페이지를 넘기던 소진헌이 갑자기 놀라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이거, 형님 아니야?”사진 속에서, 열여덟 살의 이미숙이 활짝 웃고 있었고, 그 옆에는 심정훈이 한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감싼 채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었다.두 사람 뒤로는 벚꽃이 흩날리고 있었다.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이미숙은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답했다.“네, 맞아요.”“두 사람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813화

    눈 깜짝할 사이에 섣달 그믐날이 되었다.폭죽 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한 해가 저물고, 봄바람이 불어와 따뜻한 기운을 전했다.“아침부터 일어났네, 잠 좀 더 자지 그랬어?”“할아버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정은이 아래층으로 내려올 때, 이춘재는 거실에서 차를 우려내고 있었다. 손에는 윤기 나는 호두 한 쌍이 놓여 있었다.“아침 뭐 먹고 싶어?”“뭐 있어요? 가리는 거 없으니까 아무거나 괜찮아요.”아침을 먹은 뒤, 시간은 고작 8시 30분밖에 안 됐다.소진헌과 이미숙이 아직 자고 있는 줄 알고, 정은은 두 사람을 깨우러 올라가려 했다.그런데 이미숙은 벌써 노트북을 들고 서재에 들어갔고, 소진헌은 봉수진과 함께 장을 보러 나갔다.날이 채 밝기도 전 기사를 데리고 시장으로 향했던 두 사람은 9시 30분이 되어서야 돌아왔다.“소 서방은 아는 게 참 많구나! 흥정도 잘하고!”“아, 별거 아니에요! 그냥 평소에 장을 좀 보다 보니까, 남들보다 조금 익숙한 것뿐이에요. 헤헤...”장모의 칭찬에 소진헌은 얼굴이 빨개졌다.집안일을 도와주던 가정부들도 이틀 전부터 명절 휴가를 내어 떠났고, 요리사 두 명과 기사 한 명만 남아 있었다.장을 본 봉수진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장바구니를 정리한 후 곧장 주방으로 들어갔다.오늘 저녁의 음식에 엄청난 신경을 쓴 게 분명했다.소진헌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장모의 칭찬까지 들었으니 가만있을 리가 어딨겠는가?그는 곧바로 주방으로 따라 들어가 거들기 시작했다....점심때가 되자, 온 가족이 모여 간단한 식사를 했다.간단하다고 해도 반찬이 예닐곱 가지는 됐다.오늘의 진짜 하이라이트는 저녁 식사였다.점심을 먹고 낮잠을 자고 난 정은은 거실에서 이춘재와 바둑 두 판을 둔 후, 곧바로 세뱃돈을 준비하는 것을 도왔다.탁자 위에는 노란 지폐가 가지런히 쌓여 있었고, 옆에는 각종 덕담이 적힌 봉투들이 놓여 있었다.큰 봉투에는 100만 원, 중간 크기의 봉투에는 50만 원, 작은 건 10만 원이었다.각각 30개씩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814화

    봉수진은 방긋 웃으며 말했다.“이 옷 참 보기 좋구나! 명절 분위기가 나! 마침 오늘 정은이도 빨간 스웨터를 입었더군. 남매라서 그런지 호흡이 참 잘 맞아!”현빈은 정은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붉은 스웨터를 입었을 뿐만 아니라 흰색 목도리를 둘러 그림과 같은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남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모습이었다.봉수진은 흐뭇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어때? 정은이 이렇게 차려입으니 참 예쁘지?”현빈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거두었다.“네, 예뻐요.”말투는 담담했으며, 그저 봉수진의 말에 맞장구치는 듯한 느낌이라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그는 탁자로 다가갔다.“세뱃돈을 준비하시고 있는 거예요?”이춘재는 손짓하며 말했다.“너도 가만히 있지 말고 와서 도와.”“네.” 현빈은 소매를 걷어 올리고 정은 옆에 쪼그려 앉았다.그가 합류하자 일이 한층 수월해졌다. 금세 모든 돈을 봉투에 넣었고, 테이블 위에는 포장지를 풀어낸 흔적만 남았다. 대신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봉투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저녁 여섯 시, 이미 어둠이 내려앉았다.창밖으로는 가느다란 눈송이가 소리 없이 흩날리며 대지를 덮어 가고 있었다.실내는 따뜻했다. 난로가 은은한 불빛을 내뿜고 온기가 가득했다. 설날 장식들이 곳곳에 걸려 있어 설날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마치 바깥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공간인 듯했다.밖에는 매서운 바람이 몰아쳤지만, 실내에는 웃음소리가 가득했다.“마지막 요리 완성! 이제 곧 식사 시작할 거야!”봉수진이 주방에서 나와 밝게 웃으며 진행 상황을 알렸다.이 말을 듣자 모두들 바빠졌다.그릇과 수저를 놓고, 의자를 정리하고, 술잔을 챙기고... 각자 할 일을 하며 분주하게 움직였다.마지막 요리가 식탁에 올려지고, 모두가 둘러앉아 막 식사를 시작하려던 찰나.띠리링-초인종 소리가 울렸다.정은이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제가 나가볼게요.”봉수진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중얼거렸다.“설날엔 다 가족들끼리 모여 밥을 먹

Latest chapter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58화

    “그럼... 고백하기 전까지, 혼자서 그렇게 많이 고민한 거예요?”“응.”“어쩐지...”정은이 아주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뭐라고?” 재석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이젠 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가요...”둘은 손을 꼭 잡고 복도로 향했다. 조용한 밤, 서로의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걷던 중, 재석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정은도 따라 멈춰 서며 돌아봤다.“왜요?”“정은아, 우리 지금... 사귀는 거 맞지?”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두 사람이 꼭 잡은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그렇게 생각 안 해요? 조금 전부터 내가 ‘재석 씨’라고 부른 거 못 느꼈어요?”“혹시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정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 지었다.“흠,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평소에도 꿈에서 날 자주 본 모양이네요?”재석의 몸이 순간 굳더니, 양 볼이 순식간에 빨개졌다.‘진짜 자주 꿨나 보다?’재석은 눈을 못 마주친 채, 그저 두 사람이 맞잡은 손만 바라보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진짜 좋아.”‘정은이도, 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구나.’‘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구나.’같은 계단, 같은 복도, 수없이 함께 걸어온 길. 그동안은 늘 친구라는 이름으로, 앞서거나 뒤따르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왔지만, 오늘은 처음으로, 손을 잡고 나란히 오르는 계단.정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근데, 왜 나랑 은혁 씨한테 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재석은 목소리를 낮추며, 살짝 눈을 피했다.“미안. 계산하러 나갔다가... 우연히 통화하는 거 들었거든.”정은의 눈이 살짝 커졌다.그리고 머릿속으로 자신이 통화 중 했던 말을 하나하나 되짚어봤다.‘공항에서 보자, 기대된다, Z시 출장... 뭐 이상한 말한 것도 없는데...?’그런데도 재석은 그걸 ‘여행 약속’으로 받아들였고, 그걸로 인해 혼자 삭이다가 결국 아래층에서 고백까지 해버린 거였다.“너희, Z시에 여행 간다고 했잖아.”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57화

    정은이 멍해 있는 사이, 재석이 한 걸음 다가섰다. 늘 부드럽고 점잖던 그가, 이 순간만큼은 전에 없던 강한 기운을 뿜어냈다. ‘이 남자... 이런 눈빛도 있었나?’정은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등이 벽에 닿는 순간, 재석은 어느새 바로 눈앞에 와 있었다.정은이도 이제야 제대로 실감이 났다. 재석이 자신보다 훨씬 크다는 걸. 그리고 지금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내려다보면, 자신이 마치 남자의 품 안에 갇힌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도.재석이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이제 좀 알겠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그때 네가 학업이 먼저라고 했을 때, 난 받아들였어.”“그런데 장은혁한텐 기회를 줬지. 정은아...”그가 고개를 더 숙이자,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목선에 닿았다. 순간, 정은의 팔에 소름이 쫙 돋았다. “너, 나한테 너무 불공평해.”그 마지막 한 마디는 묘하게 서글픈 기운이 섞여 있었다.정은은 입술을 달싹이며 뭔가 말하려 했지만, 재석은 그녀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알아, 내가 지금 어떤 입장인지. 묻고 따질 자격도 없고, 네가 누구를 좋아하든, 그건 네 자유라는 것도 알아.”“이 말 꺼냈다가, 우리 사이가 끝날 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근데... 계속 참다 보니까 알겠더라.”‘난... 그렇게까지 쿨한 사람이 아니었어.’“그래서 이제 참지 않기로 했어.”‘어떻게 되든, 그건 네가 정해.’그렇게 말한 재석은 고개를 숙인 채 멈췄다. 마치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처럼.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용한 밤공기 속에서, 정은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울렸다.“이제, 제가 말해도 될까요?”“응...”“재석 씨.”정은은 처음으로 재석을 그렇게 불렀다.“고개 들어요. 나 좀 봐요.”재석의 어깨가 순간 굳어졌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그는 이미, 거절당할 각오까지 끝냈다.그런데 눈이 마주친 순간, 정은의 두 눈 속에서 재석이 본 건... 눈물이 아닌, 웃음이었다.억지로 짓는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56화

    “헤어졌다고요?”정은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몰랐어?!”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진욱은 눈을 반짝이며 의자째로 다가오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본격적인 ‘TMI’를 털어놓기 시작했다.“M시 출장 갔다 오고 며칠 안 돼서, 재석이가 바로 짐 싸서 수아를 내보냈다니까?”정은은 그 말을 듣고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재석과 수아 사이에 어떤 감정선이 있었는지, 그동안 몇 번 스쳐 지나갔던 장면들이 퍼즐처럼 빠르게 떠올랐다.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눈빛 속엔 미묘한 기류가 스쳤다.“아마 진짜 많이 좋아했나 봐. 그러니까 정리할 때도 그만큼 아프고, 오래 걸리는 거겠지. 조금만 시간 지나면, 태민이도 정리될 거야.”진욱은 이어서 말했다.“네.”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대답했다.그 이후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남의 연애는, 들을 수는 있어도 깊게 얘기하지 말아야 해. 괜히 나서 봤자... 괜히 끼어든 꼴만 되니까.’...해가 지고, 붉은 노을이 건물 유리에 비치기 시작할 무렵. 정은은 마침내 작업을 끝냈다.진욱은 기다렸다는 듯 프로그램을 열고 기능 하나하나를 테스트했다.그리고 30초쯤 흐른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어어!! 복구됐어! 됐다! 돌아왔어! 다시 쓸 수 있어!!”미진도 덩달아 벌떡 일어나 양손을 번쩍 들었다.“살았다, 진짜!! 여태 손으로 데이터 입력한 거 생각하면... 이건 거의 기적이야!”진욱은 시계를 힐끗 보더니, 정은을 향해 말했다.“지금 이 시간까지 남아서 도와준 우리 정은이, 완전 수고 많았어! 조 교수...”“응...?”갑작스레 이름이 불리자, 재석은 몇 초간 멈칫하다가 고개를 돌렸다.진욱은 능청스럽게 말했다.“아니, 정은이가 이렇게 큰일 해줬는데, 감사 표시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적어도 밥 한 끼는 사야지.”“맞아요, 맞아요. 조 교수님, 이건 진짜 밥으로도 모자라요.” 미진이 곧장 거들었다.재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55화

    대략 1년 전, 정은은 한동안 재석의 실험실을 빌려 쓴 적이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전진욱, 조미진 등과 인연이 닿았다.처음엔 서로 어색하고 낯설었지만, 몇 달이 지나면서 조금씩 가까워졌고, 지금은 가볍게 농담도 주고받을 만큼 편해졌다.그러던 어느 날, 진욱은 우연히 정은이 실험 데이터를 처리하는 속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 너무 빠른 게 아닌가 싶어서 슬쩍 물어봤더니, 정은은 코딩도 할 줄 아는 공대 만능 캐릭터였다. 그녀는 직접 짠 프로그램으로 데이터를 자동 정리하고, 다차원 분류와 정렬까지 가능하다고 했다.“와, 뭐야... 완전 반칙인데?”진욱은 결국 정은에게 부탁해 실험실 맞춤형 프로그램 하나를 따로 제작해달라고 했고, 그 이후, 데이터 정리는 그야말로 신세계를 맞이했다. 진욱은 쓸 때마다 감탄하며 말했다.“진짜... 정은이 덕분이야. 이게 사람을 살리네.”하지만 어제 그 기특한 프로그램이 갑자기 먹통이 됐다. 손태민이 고쳐보겠다고 덤볐지만, 결과는... 풍비박산이었다. ‘이젠 누가 손댔다간 진짜 박살 나겠어...’ 결국 정은에게 SOS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재석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오늘 시간 돼? 안 되면, 며칠 뒤도 괜찮고...]진욱은 훨씬 급했다. 말 그대로 살려달라는 마음이었다.[야, 오늘 안 데려오면... 나 여기서 바로 싸버린다! 진짜라고, 어?!]그는 어제 약 먹고 좀 괜찮아진 줄 알았건만, 밤새 배가 또 난리였다. 오늘 아침부터 실험실 화장실은 진욱의 전용이 되었다. 오전에만 6회 방문.그 말은, 그냥 협박 아니었다. 진짜 실현 가능성이 있었으니 말이다.정은은 상황을 듣고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시간 돼요. 지금 바로 갈게요.”[그래. 그럼 내가 정문 앞으로 갈게.]‘굳이 마중까진 필요 없는데...’ 뚝-정은이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 ...10분 뒤, 정은은 학교 정문 앞에서 재석과 마주쳤다. 두 사람은 실험실로 걸어가며 프로그램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54화

    “언니, 이건 굳이 우리 의견 물을 필요도 없지 않아요? 언니가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가는 거죠. 저희한텐 뭐든 시키기만 하세요. 무조건 따라갈게요!”민지가 단호하게 말하자, 서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맞아요, 저흰 누나 믿고 가는 거예요. 결정은 누나가 해요.”정은은 그 말에 잠시 멍해졌다가,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너희들... 나 그렇게 믿어도 돼? 나도 가끔 실수하거든?”민지는 마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정은 언니가 실수했다면, 그건 100% 저랑 서준 오빠가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뜻이에요.”“그건 좀 과장이지만...”‘그래도... 이런 믿음을 받는다는 게 참 따뜻하네.’세 사람은 그렇게 식사를 마쳤다.계산은 서준이 맡았고, 정은과 민지는 먼저 주차장으로 향했다. “언니, 먼저 가요. 전 서준이 데리러 갈게요.”“응? 굳이?”“우리 집이랑 방향이 같잖아요. 서준이는 차도 없으니까, 그냥 태워다 주는 거죠, 헤헤.”“그래, 알겠어. 그럼 조심히 가. 운전 천천히 하고.”“네. 언니도 잘 들어가요!”...두 ‘파트너’와 방향을 맞춘 정은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자료 조사부터 시작해 ‘신소재 최적화 계획안’을 정리하고, 모든 내용이 빠짐없이 정리됐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확인했다.벌써 밤 10시. 정은은 핸드폰을 들고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냈다.[장은혁 씨, 시간 돼요? 상의드릴 게 하나 있어요.]그 시각, 은혁은 거실 소파에 앉아 어머니인 황희숙 여사의 ‘진실 공방’에 시달리고 있었다.“너 외할아버지한테 전화 왔어. 오늘 도시락 들고 회사 갔다며? 근데 그냥 말도 없이 두고 사라졌다고 난리야. 게다가 누가 너랑 어떤 여자가 같이 있는 걸 병원 약국에서 봤다던데? 솔직히 말해봐. 너, 여자 친구 생겼지?”은혁은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아니 외할아버지는 왜 또 엄마한테 바로 전화해요? 진짜 너무하신다니까요...”“이 자식 봐라, 말버릇 좀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53화

    진욱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렇게 마음이 있는 거면, 왜 정은이한테 솔직하게 말 안 해?”“겁나는 거지, 재석아? 말 꺼냈다가 거절이라도 당하면... 그땐 친구로도 남을 수 없을까 봐, 무서운 거잖아.”진욱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재석을 똑바로 바라봤다.“그건 너답지 않아. 내가 아는 재석이는, 망설이지 않고 결정하는 사람이었어. 결과가 불확실하다고 물러서는 사람 아니었잖아.”“정은이가 ‘지금은 연애 생각 없다’고 했지? 중요한 건 ‘지금은’이라는 거야. 사람 마음은 바뀌는 거고, 그때 거절했다고 지금도 똑같을 거란 보장은 없어. 알겠냐?”재석은 말없이 진욱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 말이 생각보다 깊게 박혔다. ‘지금도 똑같을까? 아니, 혹시... 지금은 조금 다를 수도 있는 걸까...’진욱은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야, 진심으로 말하는 건데, 너 계속 질질 끌면, 정은이 뺏긴다. 그리고 뺏기고 나서 울어봤자, 소용없을 거야.”“우리 정은이 인기 많은 거 너도 알잖아. 예전에도 정은이 두고 싸운 애들 있었잖아. 그리고 오늘 그 남자 봤지? 얼굴 잘생겼지, 젊지, 에너지 넘치지, 옷차림 보니까 집도 잘 사는 거 같던데?”재석은 이런 말을 아주 듣기 싫었다.“닥쳐.”진욱도 더 이상 말하기 싫었다. “칫. 드디어 위기감이 좀 드나?”‘그래, 긴장 좀 해라. 맨날 냉정한 척만 하지 말고... 이번엔 너도 좀 불안해져 봐야지.’...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집에 바래다준 뒤, 약을 가정부에게 전달하며, 복용 방법까지 하나하나 직접 설명했다. 봉수진은 저녁까지 먹고 가라며 붙잡았지만, 정은은 이미 서준, 민지와의 약속이 있었다.“외할머니, 며칠 안에 다시 올게요. 오늘은 친구들이랑 약속이 있어서요.”“그래그래, 알았어. 젊을 땐 많이 만나고 다녀야지.”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숙였고, 곧 차에 올랐다.약속 장소인 레스토랑에 도착했을 땐, 서준과 민지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테이블 위에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52화

    은혁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그러게요... 나야 뭐, 그랬으면 좋겠지만...”하지만 정은의 태도는 그리 확신을 줄 만큼의 호감은 아니었다.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분명히 좋아한다는 표시도 없는 애매한 선이 보이는 듯했다.‘그래서 더 미치겠어. 기대도 못 하고,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고... 이러니까 계속 마음이 붕 떠 있잖아...’그렇게 속으로 앓고 있었지만, 정은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봉수진의 약에 모든 관심을 쏟고 있었다.VIP 약국답게, 일 처리는 정말 빨랐다. 정성스럽게 달인 약이 곧바로 팩 단위로 나뉘어 밀봉되었고, 음용 방법까지 깔끔하게 안내되었다.냉장 보관 후, 따뜻한 물에 데워 마시면 된다는 안내였는데, 이 정도면 환자도 거부감 없이 약을 먹을 수 있을 것이었다. 약을 다 받은 후, 약 한 시간쯤 지나 두 사람은 병원을 나섰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은의 전화가 울렸다.“여보세요? 외할머니? 네, 약 다 받아놨어요.”“병원에서 달여줬어요. 네, 거기 계세요. 지금 바로 갈게요.”전화를 끊은 정은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은혁을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오늘 고마웠어요. 외할머니 모시러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아, 어... 그래요! 잘 가요!”은혁은 여자의 뒷모습이 멀어질 때까지 멍하니 서 있었다.심지어 여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후에도 한참을 그렇게 바라본 후에야 아쉬움 가득한 시선을 거두었다.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고, 화면엔 ‘황기' 두 글자가 떴다.“여보세요?”[야 이놈아! 도시락 던져놓고 도망가듯 나가버리면 어떡해?! 말도 못 붙였잖아! 뭐가 그렇게 급해? 뭐가 외할아버지보다 중요한 거냐고?!]“죄송해요... 헤헤.”황기는 순간 당황했다. ‘얘 지금 뭐야? 미쳤어? 웃음은 왜 이렇게 정직하게 새어 나오는 건데...?’...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태우고 병원을 나서는 중이었다. 바로 그때, 재석은 약을 수령하고 외래 진료실 앞 벤치에 앉아 있었다.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51화

    정은도 여기서 재석을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선배님, 병원엔 무슨 일로 오셨어요?”재석은 그제야 시선을 거둬들였다. 눈길이 정은에게 닿는 순간, 표정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난...”“날 데려다주러 온 거야.” 그 순간, 전진욱이 배를 감싸 쥐며 천천히 다가왔고, 재석 대신 대답을 건넸다.정은은 진욱을 바라보다가 눈이 살짝 커졌다. “교수님, 어디 아프세요?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요.”“하... 뭘 잘못 먹었는지, 아침부터 배탈이 나서... 약도 안 듣고... 이 사람이 막 끌고 오더라니까... 검사라도 받아보라고.”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하셨어요. 괜히 방치하다가 더 심해질 수도 있잖아요. 미리 체크하면 마음도 편하고요.”“어우, 너희 둘 미리 맞췄냐? 말이 어쩜 그렇게 똑같냐?” 진욱이 짐짓 장난스러운 말투로 투덜댔다.정은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재석을 바라봤다. “그랬어요?”재석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눈빛 속 어딘가 알 수 없는 감정이 일렁였다. ‘저 말투, 저 표정... 나만 아는 게 아닐 텐데...’“정은 씨, 이제 가야죠.” 그때, 은혁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아, 네.” 정은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희 먼저 갈게요.”그렇게 말한 후, 은혁과 나란히 병원 복도를 걸어 나갔다.재석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두 사람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눈빛 속 감정은 복잡하고도 묘했다. ‘뭔데, 저 둘은 저렇게 자연스러워...’“재석아? 야, 재석아!”진욱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재석은 고개를 돌렸지만, 눈빛 속 싸늘함은 여전했다. 진욱은 그 눈빛에 소름이 돋아 어깨를 움찔거렸다.“너... 왜 그래?”“방금 정은이가 ‘저희’라고 했어.”“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재석을 바라봤다. 몇 초간 멍하던 그는 그제야 이해가 된 듯 말했다. “아... 그 ‘저희’? 그게 뭐 어때서? 같이 왔으니까 ‘저희’지. 그럼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50화

    얼마 지나지 않아 황 원장은 처방전을 프린트해서 정은에게 건넸다.“수고 많으셨습니다, 원장님.”정은이 공손히 인사하자 황 원장은 손을 휘저었다.“아이구, 무슨... 이 아가씨는 인사도 참 반듯하게 잘하네요. 말도 예쁘게 하고, 얼굴도 예쁘고. 이런 손녀가 있으면, 어디 내놔도 자랑이겠네요.”봉수진은 바로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럼요. 우리 손녀는 어디 하나 빠지는 데가 없어요.”황 원장은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장난스럽게 물었다.“이렇게 예쁜 아가씨한테 남자 친구가 없을 리 없는데? 그렇죠?”봉수진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없어요! 보통 남자애들은 우리 정은이랑 안 어울려요.”“허허, 그래도 우리 손자 정도면 꽤 괜찮은데...?”황 원장이 살짝 떠보자 봉수진은 손사래를 쳤다.“아이구, 그 얘긴 그만해요. 정은이 아직은 시집 안 보낼 거예요. 지금이 제일 곁에 두기 좋을 때라니까요.”‘아이고, 또 시작이다...’정은은 속으로 헛웃음 치며 처방전을 가방에 쏙 넣고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났다.“저, 약 지으러 먼저 다녀올게요!”...진료실 문을 나서는 순간, 정은은 누군가와 부딪혔다.“아, 죄송해요!”고개를 돌려 상대방을 본 순간 정은의 걸음이 멈췄다.“은혁 씨?”은혁은 보온 도시락 통을 들고 서 있었다.“정은 씨! 또 보네요. 우리 진짜 인연인가 봐요? 하하...”“여긴... 병원인데? 누가 입원하셨어요?”정은이 도시락을 보며 물었다.“아, 아니에요. 저 입원실 온 거 아니고요! 외할아버지가 이 병원 의사세요. 오늘 외래 당번이라 저희 어머니가 직접 도시락을 싸주셨는데, 제가 대신 가져다드리러 온 거예요.”“혹시 외할아버지 성함이 황 씨?”“네! 황기 원장님이세요. 한약재 이름에서 따오셨대요, 혹시... 아는 분이세요?”‘어머나, 진짜 인연인가?’정은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오늘 저희 외할머니 진료도 황 원장님한테 받은 거예요.”“정말요? 세상에... 진짜 대박. 어쩐지 자꾸 마주치네요.”은혁은 정은 손에 들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