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807화

Author: 십일
봉수진은 서둘러 문을 열었지만, 정은뿐만 아니라 곁에 잘생기고 기품 있는 젊은 남자가 함께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두 어르신은 순간 멈칫하다가 곧바로 눈을 마주쳤다.

봉수진은 재석을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미소를 띠며 정은을 바라보았다.

“정은아, 이분은 누구니? 소개 안 해줄 거야?”

정은이 입을 열기도 전에 재석이 먼저 말했다.

“할아버지, 할머니, 안녕하세요. 저는 조재석이라고, 정은이 친구입니다.”

두 노인과 시선을 마주하며 재석은 침착하고 차분하게 말했다.

이춘재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물었다.

“조 씨라고? 혹시... 조기봉 조 회장의 아들인가?”

“네.”

재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께서 귀국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원래 제 아버지도 찾아뵙고 싶어 하셨는데, 제가 먼저 와버렸네요.”

“내가 잘못 기억하지 않았다면, 조씨 가문은 아들이 셋이라던데, 자네는 몇 째지?”

“셋째입니다. 위로 형이 두 명 있습니다.”

“혹시 연구직에 종사한다는 그 아들인가?”

“네.”

재석은 눈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봉수진은 감탄했다.

“어머, 그럼 우리 정은이랑 같은 분야네?”

이춘재는 피식 웃으며 말을 받았다.

“그렇지 않으면 두 사람 어떻게 만났겠어?”

봉수진은 재석이 유명한 물리학자라는 걸 듣고 더욱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공부 잘하는 아이에게 어르신들의 편애가 쏠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재석아, 늦은 시간까지 우리 정은이를 바래다줘서 정말 고맙군. 그냥 가지 말고 밥 먹고 가렴.”

재석은 그냥 이렇게 찾아왔으니 인사라도 드리는 게 예의일 것 같아 따라 들어온 것뿐이었다.

가볍게 인사만 하고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예상치 못하게 저녁 식사까지 권유받았다.

“괜찮을까요? 가족끼리 식사하시는데 제가 방해가 되는 건 아니겠죠?”

“아유, 방해는 무슨!”

봉수진은 손을 휘휘 내저으며 말했다.

“이렇게 추운 날씨에, 게다가 어두운 밤길을 혼자 다니게 하는게 너무 걱정이었는데, 자네가 데려다줘서 정말 마음이 놓이네. 그리고 말이야, 우리 정은이가 친구를 집에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ocked Chapter

Related chapters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808화

    이춘재도 따라 들어와서 물었다.“도와줄 거 있어?”봉수진은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도와주긴 뭘 도와줘요? 당신이 언제 주방일을 해봤다고?”“허허... 맞는 말이긴 한데, 그래도 같이 있어줄 순 있잖아?”“당산, 내가 보기에 재석은 정말 괜찮은 젊은이에요. 외모도 반반하고 예의도 바르지. 집안도 번듯하고, 무엇보다 가풍이 좋잖아요. 조씨 가문은 명문 가문이지 않나요? 괜한 소문 하나 안 나온 집안이라고요.”이춘재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갑자기 그 얘긴 왜 해? 그런데 뭐, 재석은 꽤 괜찮긴 하지.”봉수진은 거실 쪽을 힐끗 보았다. 눈이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 젊은이가 예의 바르고 겸손하며, 가정교육을 제대로 받았다는 건 한눈에 알 수 있었다.“우리 정은이랑...”“야,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이미 친구라고 했잖아. 대체 뭘 상상하는 거야?”“내가 뭘 상상했다고 그래요? 친구든 뭐든, 우리 정은이의 곁에 있으려면 우리가 제대로 봐야 하지 않겠어요?”“아직도 정은이가 어린애인 줄 아나 본데, 젊은 사람들이 친구 사귀는 건 그들의 자유야. 우리가 굳이 끼어들 필요 없어.”“나도 알아요. 간섭하려는 건 아니지만, 그냥... 객관적으로 재석이라는 아이를 평가해보자는 거죠.”“그래, 우리끼리 조용히 얘기하는 건 괜찮지만, 괜히 정은이 앞에서 티 내지 마. 원래 아무 일도 아닌 걸 가지고 당신이 자꾸 그러면 애들만 민망해지잖아.”봉수진은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내가 그렇게 눈치 없는 사람처럼 보여요?”이춘재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아니, 아니야. 그건 절대 아니지.”“그나저나, 당신 눈치챘어요? 현빈이 기분 별로 안 좋은 거 같은데요?”“그래?” 이춘재는 눈썹을 찡그렸다.“무슨 일 있나?”“들어오자마자 말도 없이 일부터 하잖아요. 기분이 안 좋은 게 분명해요.”“그건 뭐, 회사에 신경 쓰이는 일이라도 있겠지. 그게 뭐가 어때서? 남자는 원래 이 나이엔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 거야. 작은 문제 하나쯤 있는 건 당연한 거고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809화

    정은은 줄곧 바쁘게 지내다가 섣달 그믐날이 사흘 남았을 때에야 비로소 실험실에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왜냐하면 소진헌과 이미숙이 L시에서 왔기 때문이다.부부는 오래전부터 올해 J시에서 이춘재, 봉수진과 함께 설을 보내기로 정해놓았다.소진헌이 부모님과 두 형에게 어떻게 이야기했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결과적으로 그는 이미숙을 따라 J시에 오게 되었다.원래 계획대로라면 이주 전에 도착했어야 했지만, 출발 직전에 이미숙이 갑자기 영감을 받아 일주일간 자신을 방에 가두어 글을 썼고, 이어서 G시에서 열린 사인회에 참석하느라 일정이 계속 미뤄졌다.다음 날 아침, 정은은 차를 몰고 고속열차역으로 향했다.설이라 역 안은 인파로 북적거렸고, 10여 분을 기다린 끝에야 소진헌과 이미숙이 사람들 사이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아빠, 엄마!”정은은 펄쩍 뛰며 손을 흔들었다.이미숙은 눈에 띄는 빨간 코트를 입고 있었고, 키도 크고 세련된 분위기가 풍겨서 군중 속에서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그 옆에 선 소진헌은 그녀보다 키가 좀 더 컸고, 여행 가방을 밀며 한 손에는 크고 작은 짐가방을 한가득 들고 있었다.반면 이미숙은 작은 핸드백 하나만 들고 있어서, 마치 우아하게 휴가를 떠나는 귀부인 같았다.언뜻 보면 마치 어느 집안의 아가씨와 수행하는 집사처럼 보이기도 했다.하지만 현실은 이랬다.“나도 좀 들게요!” 이미숙은 몇 번째인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그러나 예상대로 소진헌은 몸을 재빨리 틀며 피했다.“됐어! 이 정도 짐쯤이야 나 혼자 들 수 있어. 당신 그냥 편하게 가.”말하면서 그는 일부러 짐이 가벼운 척 들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안 돼, 나도 들 거예요.”“안 돼, 그렇게 하게 할 수는 없어.”“싫어요...”“나도 싫어...”정은이 가까이 다가갈 때, 두 사람은 서로 짐을 들겠다고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저... 그럼 제가 좀 들어드릴까요?”그러자 두 사람 모두 만족스러운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810화

    소진헌은 얼버무리며 대충 넘어갔다.분명히 자세히 말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정은도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이씨 가문 본가에서.이춘재와 봉수진은 딸과 사위가 온다는 소식에 일주일 전부터 대청소를 하며 집 안팎을 말끔히 정리했다.이미숙의 방도 새로 꾸미고, 1인용 침대를 2인용으로 바꿨다. 소진헌이 식물을 다루기 좋아한다는 걸 알고, 온실 옆에 작은 공간을 마련해 크고 작은 화분과 다양한 흙까지 준비해 두었다.그뿐만 아니라, 설날 장식도 빠짐없이 걸어 집 안 곳곳에 설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이른 아침, 이춘재와 봉수진은 일부러 새로 맞춘 한복을 차려입고 활기찬 모습으로 딸과 사위를 맞을 준비를 했다.“몇 시죠?” 봉수진이 물었다.이춘재는 손목시계를 보며 답했다. “금방 11시 넘었어.”“그럼 곧 도착하겠네요. 10시에 떠나는 열차 타면 시간이 딱 맞을 거예요. 슬리퍼는 준비됐지?”가정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다 준비해 두었습니다.”“차는 식지 않았어?” 이춘재는 걱정스레 물었다.“아뇨, 아직 따뜻합니다.”“따뜻한 걸로는 부족하지! 차는 펄펄 끓는 맛으로 마셔야 돼! 그거 버리고 내가 이따가 새로 하나 우려야지.”“네.”“그리고.” 봉수진은 문득 떠올린 듯 말했다. “과일은 미리 썰지 말고, 도착한 다음 깎아. 그래야 싱싱한 맛 볼 수 있어.”“알겠습니다.”“거실은 깨끗하게 정리됐지?”“화장실은 오늘 아침에 다시 한번 청소했어?”“주방은 준비 다 됐고?”이렇게 두 노인은 준비 사항을 하나하나 점검하며 바쁘게 돌아쳤다.그리고 마침내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드디어 왔네!”현관 앞에 선 두 사람은 문을 열었다.딸과 사위가 나란히 들어섰고, 그 뒤로 손녀가 따라 들어왔다.두 노인은 이 순간을 수십 년이나 기다려 왔다.그리고 이제야 그 꿈이 이뤄졌다....점심은 봉수진이 정성껏 차린 음식들로 가득했다.전부 소진헌, 이미숙, 그리고 정은이 좋아하는 음식들로 준비되었다.“미숙아, 이것 좀 먹어봐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811화

    점심을 먹고 난 후, 봉수진은 이미숙과 소진헌을 데리고 새로 꾸민 방으로 향했다.“예전에 미숙이가 여기서 지냈는데, 이제는 너희 두 사람의 방이야. 침대도 새로 바꿨고, 이불 커버도 전부 새거야.”봉수진은 이 방을 수십 년 동안 그대로 보존해 왔다. 가구 배치는 물론, 작은 장식품 하나까지도 남이 손대지 못하게 했다.청소도 직접 도맡아 했고, 심지어 외국에 있을 때도 반년에 한 번씩은 꼭 귀국해서 방을 정리하곤 했다.그렇게 조심스럽게 소중히 가꿔온 덕분에, 방은 예전 모습 그대로 유지될 수 있었다.이미숙이 방에 들어서자, 익숙한 기억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순수했던 어린 시절부터, 소녀의 감성, 그리고 사랑의 감정이 움트던 순간까지...이 방에는 그녀의 지난날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그때, 갑자기 불쑥 떠오른 기억의 조각들이 나타났다.깨진 꽃병, 어두운 구석, 피 묻은 칼날, 그리고... 한 여자의 흐느낌.“당신? 당신 왜 그래? 어디 아파?”제일 먼저 이상함을 감지한 건 소진헌이었다.봉수진도 다급히 다가왔다. “무슨 일이야? 방이 너무 답답한 거 아니야?”그러면서 서둘러 창문을 활짝 열었다.찬바람이 스며들자, 이미숙은 움찔하며 정신을 차렸다.“괜찮아요... 저 괜찮아요...”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손을 흔들며 말했다.“잠깐 머리가 아팠는데, 이제 괜찮아졌어요.”봉수진은 몇 번이나 그녀의 상태를 확인한 뒤에야 안심하고 자리를 떴다.떠나기 전, 따뜻한 목소리로 당부했다.“미숙아, 소 서방, 너희도 아침 일찍 열차 타고 오느라 피곤할 텐데 좀 쉬어.”“네, 어머님도 아침부터 계속 바쁘게 요리를 하셨잖아요. 얼른 가서 쉬세요.”소진헌은 그렇게 말하며 문을 닫았다.이제 방 안에는 두 사람만 남았다.“방금 무슨 일 있었어?”봉수진을 안심시키려 둘러댄 이미숙의 핑계는 정작 소진헌에게는 통하지 않았다.그녀는 남편의 부축을 받아 침대 가장자리에 앉으며 조용히 말했다.“뭔가 생각났어요.”“뭐가?”“그런데 완전히 떠오르는 건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812화

    이미숙이 놀라며 말했다.“등 돌리고 있었는데도 내가 깬 걸 안 거예요?”소진헌은 웃으며 앞쪽 벽을 가리켰다.“자, 당신 그림자.”이미숙은 힐끗 보더니, 어이가 없어졌다.그녀는 민망함을 감추려 가볍게 헛기침하며 화제를 돌렸다.“사진첩에 뭐 볼 게 있다고 그렇게 열심히 보는 거예요?”“볼 게 많지. 옛날 당신 모습 말이야.”소진헌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사진첩을 넘겼다.“처음 당신을 봤을 때, 얼굴이 너무 창백해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어. 그 후에도 한동안 건강이 안 좋았지. 두 걸음만 걸어도 숨이 차서 오래 쉬어야 했고. 그래서 원래 몸이 약한 줄로만 알았는데, 예전에는 이런 개구쟁이였네...”소진헌의 낮은 목소리에는 옛 추억이 묻어났다.사진 속 소녀와 눈앞의 이미숙이 서서히 하나로 겹쳐지며, 온전한 그녀가 되어갔다.이미숙은 웃으며 가슴이 먹먹해졌다.“과거의 나에 대한 기억은 없어요. 마치 바다에 떠 있는 배처럼, 어디서 왔는지도,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다행히 당신을 만나서, 이제는 이 세상에 내가 머물 곳이 생겼어요. 더 이상 떠돌지 않아도 되니까요.”소진헌의 눈빛이 한층 더 깊어졌다.그는 사랑이 가득한 눈으로 이미숙을 바라보았다.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다가, 이미숙은 소진헌이 들고 있는 사진첩을 보고는 호기심에 몸을 기울여 함께 넘겨보았다.“이거 몇 살 때야? 왜 이렇게 남자애처럼 보여?”“음... 다섯이나 여섯 살쯤? 이원에서 지낼 때였는데, 그곳에 엄청 큰 연못이 있었거든요.”“어?”어느 한 페이지를 넘기던 소진헌이 갑자기 놀라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이거, 형님 아니야?”사진 속에서, 열여덟 살의 이미숙이 활짝 웃고 있었고, 그 옆에는 심정훈이 한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감싼 채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었다.두 사람 뒤로는 벚꽃이 흩날리고 있었다.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이미숙은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답했다.“네, 맞아요.”“두 사람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813화

    눈 깜짝할 사이에 섣달 그믐날이 되었다.폭죽 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한 해가 저물고, 봄바람이 불어와 따뜻한 기운을 전했다.“아침부터 일어났네, 잠 좀 더 자지 그랬어?”“할아버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정은이 아래층으로 내려올 때, 이춘재는 거실에서 차를 우려내고 있었다. 손에는 윤기 나는 호두 한 쌍이 놓여 있었다.“아침 뭐 먹고 싶어?”“뭐 있어요? 가리는 거 없으니까 아무거나 괜찮아요.”아침을 먹은 뒤, 시간은 고작 8시 30분밖에 안 됐다.소진헌과 이미숙이 아직 자고 있는 줄 알고, 정은은 두 사람을 깨우러 올라가려 했다.그런데 이미숙은 벌써 노트북을 들고 서재에 들어갔고, 소진헌은 봉수진과 함께 장을 보러 나갔다.날이 채 밝기도 전 기사를 데리고 시장으로 향했던 두 사람은 9시 30분이 되어서야 돌아왔다.“소 서방은 아는 게 참 많구나! 흥정도 잘하고!”“아, 별거 아니에요! 그냥 평소에 장을 좀 보다 보니까, 남들보다 조금 익숙한 것뿐이에요. 헤헤...”장모의 칭찬에 소진헌은 얼굴이 빨개졌다.집안일을 도와주던 가정부들도 이틀 전부터 명절 휴가를 내어 떠났고, 요리사 두 명과 기사 한 명만 남아 있었다.장을 본 봉수진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장바구니를 정리한 후 곧장 주방으로 들어갔다.오늘 저녁의 음식에 엄청난 신경을 쓴 게 분명했다.소진헌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장모의 칭찬까지 들었으니 가만있을 리가 어딨겠는가?그는 곧바로 주방으로 따라 들어가 거들기 시작했다....점심때가 되자, 온 가족이 모여 간단한 식사를 했다.간단하다고 해도 반찬이 예닐곱 가지는 됐다.오늘의 진짜 하이라이트는 저녁 식사였다.점심을 먹고 낮잠을 자고 난 정은은 거실에서 이춘재와 바둑 두 판을 둔 후, 곧바로 세뱃돈을 준비하는 것을 도왔다.탁자 위에는 노란 지폐가 가지런히 쌓여 있었고, 옆에는 각종 덕담이 적힌 봉투들이 놓여 있었다.큰 봉투에는 100만 원, 중간 크기의 봉투에는 50만 원, 작은 건 10만 원이었다.각각 30개씩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814화

    봉수진은 방긋 웃으며 말했다.“이 옷 참 보기 좋구나! 명절 분위기가 나! 마침 오늘 정은이도 빨간 스웨터를 입었더군. 남매라서 그런지 호흡이 참 잘 맞아!”현빈은 정은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붉은 스웨터를 입었을 뿐만 아니라 흰색 목도리를 둘러 그림과 같은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남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모습이었다.봉수진은 흐뭇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어때? 정은이 이렇게 차려입으니 참 예쁘지?”현빈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거두었다.“네, 예뻐요.”말투는 담담했으며, 그저 봉수진의 말에 맞장구치는 듯한 느낌이라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그는 탁자로 다가갔다.“세뱃돈을 준비하시고 있는 거예요?”이춘재는 손짓하며 말했다.“너도 가만히 있지 말고 와서 도와.”“네.” 현빈은 소매를 걷어 올리고 정은 옆에 쪼그려 앉았다.그가 합류하자 일이 한층 수월해졌다. 금세 모든 돈을 봉투에 넣었고, 테이블 위에는 포장지를 풀어낸 흔적만 남았다. 대신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봉투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저녁 여섯 시, 이미 어둠이 내려앉았다.창밖으로는 가느다란 눈송이가 소리 없이 흩날리며 대지를 덮어 가고 있었다.실내는 따뜻했다. 난로가 은은한 불빛을 내뿜고 온기가 가득했다. 설날 장식들이 곳곳에 걸려 있어 설날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마치 바깥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공간인 듯했다.밖에는 매서운 바람이 몰아쳤지만, 실내에는 웃음소리가 가득했다.“마지막 요리 완성! 이제 곧 식사 시작할 거야!”봉수진이 주방에서 나와 밝게 웃으며 진행 상황을 알렸다.이 말을 듣자 모두들 바빠졌다.그릇과 수저를 놓고, 의자를 정리하고, 술잔을 챙기고... 각자 할 일을 하며 분주하게 움직였다.마지막 요리가 식탁에 올려지고, 모두가 둘러앉아 막 식사를 시작하려던 찰나.띠리링-초인종 소리가 울렸다.정은이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제가 나가볼게요.”봉수진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중얼거렸다.“설날엔 다 가족들끼리 모여 밥을 먹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815화

    이미윤은 심정훈의 팔짱을 끼고 웃으며 이미숙에게 인사했다.“미숙이 그리고 제부도 있었구나! 부모님께 듣지 못해서 여기서 설을 쇨 줄 몰랐는데. 이번에야말로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였네.”그녀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참 예쁘게도 했다.이춘재와 봉수진은 눈을 마주쳤다.이미윤은 심씨 가문으로 시집간 후, 추석이나 설 같은 명절에도 친정에 온 적이 없었다.물론 봉수진은 이해했다. 애초에 이미윤을 보고 싶어 하지도 않았으니 그녀가 오지 않는 게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게다가 시집에서는 시부모님을 모셔야 하고, 아이도 있으니 친정에 와서 설을 쇤다는 건 말이 안 됐다.하지만 원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뭐든 못마땅하게 보이는 법이다.이미숙이 친정에 돌아올 때는 환한 미소를 지었지만, 이미윤이 오자마자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그래도 명절날 대놓고 내쫓을 수도 없는 데다, 현빈까지 함께 왔으니 내색할 수도 없었다.그리하여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을 앉혀 함께 식사를 하도록 했다.가정부가 깨끗한 그릇과 젓가락을 내왔다.이미윤은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오늘 이런 대접을 받다니, 미숙이 덕을 톡톡히 보네.”그러나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여전히 밝은 표정으로 젓가락을 들어 심정훈에게 반찬을 집어주었다.“이거 맛있어요. 먹어봐요.”심정훈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내가 알아서 먹을게.”이미윤은 갈비를 한 조각 입에 넣었다가 순간 멈칫했다.“이거... 엄마가 직접 만드신 거죠?”소진헌이 고개를 끄덕였다.“어머님이 아침부터 지금까지 계속 준비하셨어요. 대부분 직접 만드셨죠.”이미윤의 가슴 한편이 싸늘하게 식어갔다.부모님의 편애도, 차별도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직접 마주하니 또다시 속이 쓰라렸다.“역시, 미숙이는 엄마한테 있어 참 특별한 존재네. 엄마가 요리를 하신 게 몇 년 만인지도 모르겠네. 이제는 다시는 못 먹을 줄 알았는데.”심정훈은 눈살을 찌푸렸다.“밥이나 먹어.

Latest chapter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62화

    정은은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 안전벨트를 매고 창밖을 슬쩍 바라봤다. 공장은 호텔에서 10km 떨어진 개발지구에 자리 잡고 있었다.은혁이 운전대를 잡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 구역은 첨단 기술 산업 클러스터로 지정돼 있어서, 기술 협력 프로젝트도 대부분 그쪽으로 집중되고 있어요.” “정은 씨가 찾는 그 새로운 감온 정확도 소재는 우리랑 CG그룹이 공동 개발한 건데, 지금까지 1세대부터 3세대까지 세 가지 버전이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집중했고, 중간중간 전문적인 질문도 빠짐없이 던졌다. 은혁이 답할 수 있는 부분은 성의껏 설명했지만, 구체적인 수치나 실험 조건처럼 세세한한 부분은 바로 대답하기 어려운 것도 있었다.약 20분 후, 두 사람은 공장에 도착했다. 은혁이 미리 연락해 둔 덕분에, 정문 앞에는 담당자가 나와 있었다.정은은 안내받아 간단히 실험실과 공장을 둘러봤다. 연구 구역과 생산라인은 전혀 겹치지 않게 구획이 나뉘어 있었고, 현장도 전반적으로 정돈된 느낌이었다.정은이 요청한 소재의 1세대와 2세대는 이미 완제품으로 확보되어 있었지만, 3세대는 아직 실험 단계였기에 정식 생산은 되지 않았다. 따라서 실험실에서 직접 합성해야 했다.“시간은 얼마나 걸리죠?” 정은이 은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은혁은 옆에 있는 연구원을 바라봤다.“8시간 정도 걸릴 것 같아요. 내일 오전엔 제품 받아보실 수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관련 비용은 정산대로 처리해 주세요. 최종 결정되면 한 번에 입금할게요.”은혁은 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비용은 무슨 비용... 정은 씨, 우리 사이에 뭘 그렇게 딱딱하게 굴어요.”정은은 침착하게 말했다. “그럴수록 더 딱딱하게 해야죠. ‘친할수록 돈 문제는 분명하게.’ 이건 기본이에요. 더군다나, 우리 둘은 그냥 ‘친구’일 뿐인데, 은혁 씨가 도와주는 것만 해도 충분히 고마워요.”“게다가 실험실도 예산이 따로 있는 조직이고, 모든 비용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61화

    실험실에서 진욱은 오늘만 몇 번째인지 모르게 재석을 힐끔거렸다. 결국 참지 못하고 다가갔다. “재석아, 너 오늘 길 가다 돈 주웠냐?”실험대 앞에서 입꼬리를 내릴 줄 모르던 재석의 손이 잠깐 멈췄다. “데이터 정리는 다 됐어? 3차 실험 가능성 평가 보고서는 언제 낼 건데?”“하, 이 사람 분위기 다 깨네.” 진욱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근데 말이야, 오늘 아침에 네가 샌드위치 먹는 거 봤거든.”“그래서?”“정은이가 해준 거지? 다 알아. 너희 둘, 다시 잘 되는 거야? 그것도 아니면, 이제 미련 접은 거야?” 재석은 살짝 고민하다가, 이제는 말해도 되겠다 싶어 입을 열려고 했다.바로 그때, 핸드폰에서 톡 알림이 떴다. 정은이었다.[도착했어요. 샌드위치는 맛있었어요?]재석은 바로 답장했다.[맛있었어.]정은은 곧장 자신의 일정을 재석에게 알려줬다.[지금 호텔 체크인하고, 오후엔 공장 갈 거예요.][응, 알겠어.]1분 정도 지났지만, 그다음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 재석은 괜히 허전해졌다.‘예전에도 이렇게 대화했었는데... 왜 지금은 이걸로는 부족하지?’정은과 더 오래 이야기하고 싶었다. 더 많은 말, 더 사적인 얘기, 더 가까운 거리. 그 마음은 마치, 가려운 곳을 손톱 끝으로 슬쩍 긁은 느낌. 절대 시원하지 않았다. 그냥 더 간지러워질 뿐.‘그냥, 정은이한테 세게 할퀴어지고 싶은데...’“누구랑 톡하냐?” 진욱이 슬쩍 핸드폰을 들여다보려 다가왔다.재석은 피할 틈도 없이 화면을 들킨 셈이 됐다. “뭘 감춰. 정은이랑 메시지 주고받는 거잖아. 왜? 뭐가 부끄럽다고.”“됐고.” 재석은 핸드폰을 집어넣고, 실험대에서 내려왔다. “오늘 점심은 내가 쏜다. 뭐 먹고 싶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몇 초 멈췄다. 옆에 있던 미진이랑 태민이 눈을 마주쳤다. “교수님,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갑자기 점심을요?”재석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먹고 싶은 거 생각나면 전 교수한테 말해.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60화

    비행기 이륙 직전, 은혁이 정은에게 제한했다. “정은 씨, 내 마일리지로 좌석 업그레이드해 줄게요.”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은혁의 얼굴에 아쉬움이 스쳤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로 돌아갔다. 잠시 후, 다시 다가와 말했다. “내가 정은 씨 옆자리로 바꿨어요.”비즈니스석에서 이코노미석으로 자리를 바꾸다니, 웬만한 사람이면 거절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은혁 씨,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돼요.” 정은은 단호한 어조였다.‘처음으로 이렇게까지 분명하게 말한 것 같아.’정은은 연애 한 번 안 해본 소녀가 아니었다. 은혁의 눈빛에 담긴 감정이 어떤 건지, 모를 리 없었다.하지만 그동안 굳이 선을 긋지 않은 건, 은혁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며, 오히려 몇 번이고 도와줬기 때문이었다. 이번 Z시 출장도 은혁의 도움 덕에 가능했던 일이었다.게다가 은혁이 고백도 안 했고, 정은이 불편할 정도로 다가온 것도 아니었으니까... 정은도 자신이 먼저 딱 잘라 말하는 게 오히려 예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그리고 그때의 정은은 솔로였고, 재석이 입을 열게 하기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의 자극은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정은은 이미 재석과의 관계를 정리했고, 은혁은 더 적극적으로 다가오고 있으니, 그녀도 이제 더 늦기 전에 확실히 은혁에게 말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래야 서로 상처받지 않을 테니 말이다.은혁은 정은의 말에 잠시 당황한 듯하다가, 이내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난 정은 씨 옆자리에 있는 게 좋아서 그래요.”정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즈니스석 티켓을 사 놓고 누구랑 자리를 바꾸든, 그건 상대방의 자유니까. 굳이 뭐라고 할 필요는 없지.’그 후, 정은은 노트북을 열고 일에 집중했다. 은혁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틈틈이 정은을 흘끗거렸다.그러다 손을 들어 승무원을 불렀다. “저기요. 잠깐만요.”“네, 손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59화

    결국 재석은 아쉬움 가득한 눈빛으로 정은의 손을 놓았다. 그러고는 조용히 열쇠를 건네받아 현관문을 열어주었다.“정은아, 잘 자.”그 한마디.‘정은아’라는 이름이 너무나 자연스럽고도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마치 수천 번은 불러본 것처럼.그 말에 정은은 순간 멍해졌다.‘왜 내 이름을 듣고도 가슴이 이렇게 설레지?’“네, 당신도 잘 쉬어요.”둘은 그렇게 짧은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문 안으로 들어갔다.그날 밤. 정은은 평소와 달랐다. 샤워를 마친 뒤 늘 하던 루틴, 논문 체크나 프로젝트 정리는 손도 대지 않았다.대신, 자기도 모르게 핸드폰을 들고 재석의 SNS를 열었다.‘뭐 하는 거야? 나...’그런데 이상하게, 자꾸만 궁금해졌다. ‘이 사람, 평소에 어떤 거 올리지?’재석은 SNS 설정 따위는 하지 않은 사람이었다.맨 아래까지 내리는 데 몇 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포스트 총수, 대략 서른 몇 개. 그중 90%는 논문, 연구, 산업 동향 공유.‘진짜 성실한 연구자 모드네...’그나마 정은과 관련 있는 건 얼마 전 실험실이 SCI 논문 게재됐을 때 서비대학교 공식 계정에서 축하 포스팅한 걸 공유한 것뿐이었다.[축하합니다.]짧고 건조한 멘트.그 밑엔 전진욱과 조미진이 ‘좋아요’를 눌러뒀다.‘이게 전부야?’그렇게 핸드폰을 내려놓으려던 순간, 알림이 하나 떴다. 재석이 새로운 글을 올렸다.정은은 무심코 눌러봤다. [r = a(1 - sinθ)]‘...어?’정은의 손가락이 멈췄다. 이 수식, 익숙했다. 너무 익숙해서 순간 심장이 멈칫했다.댓글 첫 줄엔 진욱이 있었다.[극좌표 함수? 밤에 안 자고 뭐 하세요? 조 교수님?]조미진과 손태민은 말없이 ‘좋아요’만 눌렀다. 하지만 두 사람은 속으로 ‘다음 연구 주제가 광학 쪽인가?’ 생각하며 혼란스러워했다.아무도 몰랐다. 이 수식의 진짜 의미를.‘r = a(1 - sinθ)’, 하트곡선.‘설마 이게, 그거? 진짜 그거... 맞아?’정은은 손끝을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58화

    “그럼... 고백하기 전까지, 혼자서 그렇게 많이 고민한 거예요?”“응.”“어쩐지...”정은이 아주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뭐라고?” 재석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이젠 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가요...”둘은 손을 꼭 잡고 복도로 향했다. 조용한 밤, 서로의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걷던 중, 재석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정은도 따라 멈춰 서며 돌아봤다.“왜요?”“정은아, 우리 지금... 사귀는 거 맞지?”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두 사람이 꼭 잡은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그렇게 생각 안 해요? 조금 전부터 내가 ‘재석 씨’라고 부른 거 못 느꼈어요?”“혹시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정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 지었다.“흠,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평소에도 꿈에서 날 자주 본 모양이네요?”재석의 몸이 순간 굳더니, 양 볼이 순식간에 빨개졌다.‘진짜 자주 꿨나 보다?’재석은 눈을 못 마주친 채, 그저 두 사람이 맞잡은 손만 바라보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진짜 좋아.”‘정은이도, 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구나.’‘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구나.’같은 계단, 같은 복도, 수없이 함께 걸어온 길. 그동안은 늘 친구라는 이름으로, 앞서거나 뒤따르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왔지만, 오늘은 처음으로, 손을 잡고 나란히 오르는 계단.정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근데, 왜 나랑 은혁 씨한테 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재석은 목소리를 낮추며, 살짝 눈을 피했다.“미안. 계산하러 나갔다가... 우연히 통화하는 거 들었거든.”정은의 눈이 살짝 커졌다.그리고 머릿속으로 자신이 통화 중 했던 말을 하나하나 되짚어봤다.‘공항에서 보자, 기대된다, Z시 출장... 뭐 이상한 말한 것도 없는데...?’그런데도 재석은 그걸 ‘여행 약속’으로 받아들였고, 그걸로 인해 혼자 삭이다가 결국 아래층에서 고백까지 해버린 거였다.“너희, Z시에 여행 간다고 했잖아.”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57화

    정은이 멍해 있는 사이, 재석이 한 걸음 다가섰다. 늘 부드럽고 점잖던 그가, 이 순간만큼은 전에 없던 강한 기운을 뿜어냈다. ‘이 남자... 이런 눈빛도 있었나?’정은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등이 벽에 닿는 순간, 재석은 어느새 바로 눈앞에 와 있었다.정은이도 이제야 제대로 실감이 났다. 재석이 자신보다 훨씬 크다는 걸. 그리고 지금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내려다보면, 자신이 마치 남자의 품 안에 갇힌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도.재석이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이제 좀 알겠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그때 네가 학업이 먼저라고 했을 때, 난 받아들였어.”“그런데 장은혁한텐 기회를 줬지. 정은아...”그가 고개를 더 숙이자,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목선에 닿았다. 순간, 정은의 팔에 소름이 쫙 돋았다. “너, 나한테 너무 불공평해.”그 마지막 한 마디는 묘하게 서글픈 기운이 섞여 있었다.정은은 입술을 달싹이며 뭔가 말하려 했지만, 재석은 그녀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알아, 내가 지금 어떤 입장인지. 묻고 따질 자격도 없고, 네가 누구를 좋아하든, 그건 네 자유라는 것도 알아.”“이 말 꺼냈다가, 우리 사이가 끝날 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근데... 계속 참다 보니까 알겠더라.”‘난... 그렇게까지 쿨한 사람이 아니었어.’“그래서 이제 참지 않기로 했어.”‘어떻게 되든, 그건 네가 정해.’그렇게 말한 재석은 고개를 숙인 채 멈췄다. 마치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처럼.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용한 밤공기 속에서, 정은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울렸다.“이제, 제가 말해도 될까요?”“응...”“재석 씨.”정은은 처음으로 재석을 그렇게 불렀다.“고개 들어요. 나 좀 봐요.”재석의 어깨가 순간 굳어졌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그는 이미, 거절당할 각오까지 끝냈다.그런데 눈이 마주친 순간, 정은의 두 눈 속에서 재석이 본 건... 눈물이 아닌, 웃음이었다.억지로 짓는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56화

    “헤어졌다고요?”정은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몰랐어?!”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진욱은 눈을 반짝이며 의자째로 다가오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본격적인 ‘TMI’를 털어놓기 시작했다.“M시 출장 갔다 오고 며칠 안 돼서, 재석이가 바로 짐 싸서 수아를 내보냈다니까?”정은은 그 말을 듣고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재석과 수아 사이에 어떤 감정선이 있었는지, 그동안 몇 번 스쳐 지나갔던 장면들이 퍼즐처럼 빠르게 떠올랐다.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눈빛 속엔 미묘한 기류가 스쳤다.“아마 진짜 많이 좋아했나 봐. 그러니까 정리할 때도 그만큼 아프고, 오래 걸리는 거겠지. 조금만 시간 지나면, 태민이도 정리될 거야.”진욱은 이어서 말했다.“네.”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대답했다.그 이후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남의 연애는, 들을 수는 있어도 깊게 얘기하지 말아야 해. 괜히 나서 봤자... 괜히 끼어든 꼴만 되니까.’...해가 지고, 붉은 노을이 건물 유리에 비치기 시작할 무렵. 정은은 마침내 작업을 끝냈다.진욱은 기다렸다는 듯 프로그램을 열고 기능 하나하나를 테스트했다.그리고 30초쯤 흐른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어어!! 복구됐어! 됐다! 돌아왔어! 다시 쓸 수 있어!!”미진도 덩달아 벌떡 일어나 양손을 번쩍 들었다.“살았다, 진짜!! 여태 손으로 데이터 입력한 거 생각하면... 이건 거의 기적이야!”진욱은 시계를 힐끗 보더니, 정은을 향해 말했다.“지금 이 시간까지 남아서 도와준 우리 정은이, 완전 수고 많았어! 조 교수...”“응...?”갑작스레 이름이 불리자, 재석은 몇 초간 멈칫하다가 고개를 돌렸다.진욱은 능청스럽게 말했다.“아니, 정은이가 이렇게 큰일 해줬는데, 감사 표시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적어도 밥 한 끼는 사야지.”“맞아요, 맞아요. 조 교수님, 이건 진짜 밥으로도 모자라요.” 미진이 곧장 거들었다.재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55화

    대략 1년 전, 정은은 한동안 재석의 실험실을 빌려 쓴 적이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전진욱, 조미진 등과 인연이 닿았다.처음엔 서로 어색하고 낯설었지만, 몇 달이 지나면서 조금씩 가까워졌고, 지금은 가볍게 농담도 주고받을 만큼 편해졌다.그러던 어느 날, 진욱은 우연히 정은이 실험 데이터를 처리하는 속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 너무 빠른 게 아닌가 싶어서 슬쩍 물어봤더니, 정은은 코딩도 할 줄 아는 공대 만능 캐릭터였다. 그녀는 직접 짠 프로그램으로 데이터를 자동 정리하고, 다차원 분류와 정렬까지 가능하다고 했다.“와, 뭐야... 완전 반칙인데?”진욱은 결국 정은에게 부탁해 실험실 맞춤형 프로그램 하나를 따로 제작해달라고 했고, 그 이후, 데이터 정리는 그야말로 신세계를 맞이했다. 진욱은 쓸 때마다 감탄하며 말했다.“진짜... 정은이 덕분이야. 이게 사람을 살리네.”하지만 어제 그 기특한 프로그램이 갑자기 먹통이 됐다. 손태민이 고쳐보겠다고 덤볐지만, 결과는... 풍비박산이었다. ‘이젠 누가 손댔다간 진짜 박살 나겠어...’ 결국 정은에게 SOS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재석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오늘 시간 돼? 안 되면, 며칠 뒤도 괜찮고...]진욱은 훨씬 급했다. 말 그대로 살려달라는 마음이었다.[야, 오늘 안 데려오면... 나 여기서 바로 싸버린다! 진짜라고, 어?!]그는 어제 약 먹고 좀 괜찮아진 줄 알았건만, 밤새 배가 또 난리였다. 오늘 아침부터 실험실 화장실은 진욱의 전용이 되었다. 오전에만 6회 방문.그 말은, 그냥 협박 아니었다. 진짜 실현 가능성이 있었으니 말이다.정은은 상황을 듣고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시간 돼요. 지금 바로 갈게요.”[그래. 그럼 내가 정문 앞으로 갈게.]‘굳이 마중까진 필요 없는데...’ 뚝-정은이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 ...10분 뒤, 정은은 학교 정문 앞에서 재석과 마주쳤다. 두 사람은 실험실로 걸어가며 프로그램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54화

    “언니, 이건 굳이 우리 의견 물을 필요도 없지 않아요? 언니가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가는 거죠. 저희한텐 뭐든 시키기만 하세요. 무조건 따라갈게요!”민지가 단호하게 말하자, 서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맞아요, 저흰 누나 믿고 가는 거예요. 결정은 누나가 해요.”정은은 그 말에 잠시 멍해졌다가,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너희들... 나 그렇게 믿어도 돼? 나도 가끔 실수하거든?”민지는 마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정은 언니가 실수했다면, 그건 100% 저랑 서준 오빠가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뜻이에요.”“그건 좀 과장이지만...”‘그래도... 이런 믿음을 받는다는 게 참 따뜻하네.’세 사람은 그렇게 식사를 마쳤다.계산은 서준이 맡았고, 정은과 민지는 먼저 주차장으로 향했다. “언니, 먼저 가요. 전 서준이 데리러 갈게요.”“응? 굳이?”“우리 집이랑 방향이 같잖아요. 서준이는 차도 없으니까, 그냥 태워다 주는 거죠, 헤헤.”“그래, 알겠어. 그럼 조심히 가. 운전 천천히 하고.”“네. 언니도 잘 들어가요!”...두 ‘파트너’와 방향을 맞춘 정은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자료 조사부터 시작해 ‘신소재 최적화 계획안’을 정리하고, 모든 내용이 빠짐없이 정리됐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확인했다.벌써 밤 10시. 정은은 핸드폰을 들고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냈다.[장은혁 씨, 시간 돼요? 상의드릴 게 하나 있어요.]그 시각, 은혁은 거실 소파에 앉아 어머니인 황희숙 여사의 ‘진실 공방’에 시달리고 있었다.“너 외할아버지한테 전화 왔어. 오늘 도시락 들고 회사 갔다며? 근데 그냥 말도 없이 두고 사라졌다고 난리야. 게다가 누가 너랑 어떤 여자가 같이 있는 걸 병원 약국에서 봤다던데? 솔직히 말해봐. 너, 여자 친구 생겼지?”은혁은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아니 외할아버지는 왜 또 엄마한테 바로 전화해요? 진짜 너무하신다니까요...”“이 자식 봐라, 말버릇 좀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