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도현의 구두 벗는 소리가 거실 마룻바닥 위로 묵직하게 떨어졌다. 그는 들고 있던 가죽 가방과 재킷을 소파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두고, 셔츠 소매 단추를 풀며 가볍게 팔뚝 위까지 접어 올렸다. 단단하고 거친 뼈마디가 도드라진 그의 드러난 팔목에는, 채원을 곁에 두기 위해 지난 6개월 동안 치밀하게 법과 제도를 다루었던 남자의 지적이고도 야성적인 매력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그는 채원의 앞에 걸음을 멈추고 앉아 한쪽 무릎을 꿇었다. 채원이 뜯다 만 상자 테이프를 제 손으로 가볍게 잡아당기며 물건들을 하나씩 분류하기 시작했다.
"그럼 도우러 온 일꾼 하나쯤은 곁에 둬도 되잖아. 계산은 돈이 아니라 다른 거로 받아도 좋고."
도현이 아주 낮게 속삭이며 올려다보자, 채원의 귓가에 희미한 열기가 번졌다. 채원은 그의 시선을 피하려 괜히 다른 상자로 손을 뻗었다.
"이해관계 조율치고는 단가가 지나치게 높은 일꾼이네요, 차 대표님."
채원의 호흡이 완전히 가로막혔다. 목구멍 안쪽이 바늘에 찔린 듯 아릿해지며 소리 내어 부르려던 그의 이름이 거친 호흡 속에 파묻혀 흩어졌다."이게... 이게 어떻게 여기에 있어?""수소문했어."도현의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그 나직한 어조 밑바닥에는 뼈가 아릴 정도의 지독한 집착이 들끓고 있었다."네가 나 때문에 가장 소중한 부모님의 유품을 위탁 매장에 팔고, 그 추운 비를 맞으며 돌아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내 심장이 얼마나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는지 넌 상상조차 못 할 거야. 그 어두운 위탁 매장 장부의 폐업 기록을 뒤쫓고, 8년 동안 이 팔찌를 거쳐 간 수집가와 전당포 업자 다섯 명의 동선을 역추적하는 데 정확히 반년이 걸렸어."그가 채원의 앞에 바짝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그의 크고 뜨거운 손바닥이 채원의 손가락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마지막으로 이 팔찌를 소장하고 있던 유럽의 개인 수집가는 완강했어. 절대로 돈으로는 팔지 않겠다고 하더군. 그래서 내가 아르덴의 이름을 걸고, 그가 평생을 갈망하던 프랑스 사설 경매장의 미술품을 통째로 구해서 맞교환 조항을 짰어. 계약 구조를 짜고 승인을 받아내는 데 내 모든 사적 자산과 인맥의 80퍼센트를 동원했지."도현이 가늘게 떨리는 채원의 하얀 손목을 아주 소중한 자산을 다루듯 경건하게 잡아 올렸다. 8년 전 늘 채워져 있었으나, 어느 날 허망하게 지워져 비어 있던 그 가녀린 손목 부근.도현은 채원의 맥박이 가장 빠르고 애틋하게 요동치는 바로 그 자리에 고개를 숙여 제 뜨거운 입술을 가만히 내리눌렀다.입술이 살결에 닿는 순간, 도현이 참아왔던 더운 숨결이 채원의 손목 안쪽 맥박을 타고 온몸의 세포 끝까지 뜨겁게 번져 나갔다. 채원은 어깨를 미세하게 떨며 입술을 깨물었다."채원아. 이제야 다 돌려놓았어. 네가 제 힘으로 산 이 집도
도현의 구두 벗는 소리가 거실 마룻바닥 위로 묵직하게 떨어졌다. 그는 들고 있던 가죽 가방과 재킷을 소파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두고, 셔츠 소매 단추를 풀며 가볍게 팔뚝 위까지 접어 올렸다. 단단하고 거친 뼈마디가 도드라진 그의 드러난 팔목에는, 채원을 곁에 두기 위해 지난 6개월 동안 치밀하게 법과 제도를 다루었던 남자의 지적이고도 야성적인 매력이 고스란히 묻어났다.그는 채원의 앞에 걸음을 멈추고 앉아 한쪽 무릎을 꿇었다. 채원이 뜯다 만 상자 테이프를 제 손으로 가볍게 잡아당기며 물건들을 하나씩 분류하기 시작했다."그럼 도우러 온 일꾼 하나쯤은 곁에 둬도 되잖아. 계산은 돈이 아니라 다른 거로 받아도 좋고."도현이 아주 낮게 속삭이며 올려다보자, 채원의 귓가에 희미한 열기가 번졌다. 채원은 그의 시선을 피하려 괜히 다른 상자로 손을 뻗었다."이해관계 조율치고는 단가가 지나치게 높은 일꾼이네요, 차 대표님.""윤 대표가 주는 일이라면 단가는 상관없어. 부도 직전의 매출 채권이라도 기꺼이 살 용의가 있으니까."그가 싱긋 웃으며 채원의 굳어 있던 손목을 가볍게 짚었다. 그의 손바닥에서 흘러나오는 뜨거운 온기가 차가운 손등을 타고 팔목 안쪽까지 순식간에 차올랐다.채원은 그의 손을 떨쳐내지 않았다. 펜트하우스에서 30일간의 기묘한 동거를 시작했던 첫날 밤에는 그 체온 하나에 매번 날을 세우고 경계를 쳤지만, 이제는 그의 존재 자체가 온전히 자신의 우주 안으로 깊숙이 영입되었음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도현은 말없이 이삿짐 정리를 도왔다. 낡은 서류철을 제자리에 꽂아 넣고, 채원이 디자인 연구를 위해 모아두었던 원단 스와치 북들을 서재 책장에 반듯하게 정렬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거창한 유도신문이나 해명은 흘러 다니지 않았다.8년 동안 지독하게 비틀렸던 시간의 사슬을 팩트로 입증해 낸 영리한 두 사람이었기에, 이제는
자존심도, 몰락해 가는 가문의 그늘도, 스물한 살의 여린 손가락을 스치던 슬픔도 모두 누른 채 위탁 매장의 영수증을 받아 쥐었던 그날의 기억. 그것은 적선이나 동정이 아니었다.그것은 아직 가치를 인정받지 못해 모두가 비웃던 차도현이라는 존재를 향한, 채원만의 가장 투명하고도 유일했던 사랑의 선언이었다.하지만 도현은 그 지독한 진실을 8년 동안 전혀 알지 못했었다. 채원이 자신을 다른 동기들과 함께 비웃고 버린 뒤 비겁하게 돈을 선택해 떠난 줄로만 믿고, 미워하려 애쓰면서도 단 한 순간도 그 손끝을 마음에서 놓지 못했던 그 고독한 순정의 시간들.서로가 상대방에게 버림받았다고 철저히 믿었기에 확인하는 것조차 두려워 외면했던 8년의 공백은, 그만큼 가슴 아프고 시린 겨울이었다.조용한 초인종 소리가 적막한 거실의 감상적인 공기를 가볍게 흔들었다.채원은 들고 있던 기획서를 가만히 소파 위에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터폰 화면을 확인하기도 전에, 이 시간에 자신을 찾아올 단 한 사람의 실루엣이 본능적으로 떠올랐다.문을 열자, 밤사이 더욱 굵어진 늦여름 밤바람의 차가운 냄새와 함께 차도현이 서 있었다. 늘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각이 잡혀 있던 아르덴의 차가운 투자사 대표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회색 슈트 재킷은 한쪽 팔에 대충 걸쳐져 있었고, 단단한 턱밑을 죄고 있던 넥타이는 진작에 풀어 가방에 밀어 넣었는지 단정하던 흰 셔츠 깃이 비틀려 가슴팍까지 흐트러져 있었다. 이마 위로 가볍게 흘러내린 머리카락에는 차가운 밤이슬과 미세한 빗방울이 하얗게 서려 있었다.도현의 집요한 시선이 문이 열리는 짧은 틈을 타 채원에게로 곧장 와 닿았다. 조금 젖어 목덜미에 착 달라붙은 그녀의 갈색 머리끝, 얇은 셔츠 아래로 비치는 가냘픈 실루엣, 그리고 먼지가 묻어 조금 희끗해진 바지 무릎을 향해 그의 눈빛이 천천히 쓸려 내려갔다.
서래마을의 고요한 밤은 깊었다.윤채원이 마침내 제 손으로 다시 사들인 옛집은 한남동의 모델하우스처럼 매끄러운 펜트하우스와 달리, 벽지 틈새마다 어릴 적 살던 체온과 옛 가구의 눅눅한 나무 냄새가 희미하게 배어 있는 공간이었다.아버지의 사업이 완전히 무너지고 사채업자들에게 쫓겨 도망치듯 이 문을 나섰던 그 새벽으로부터 정확히 8년이 흐른 날이었다.감정평가사와 대출 심사 서류에 스스로 서명하고 매매 대금을 모두 송금한 날, 채원은 퇴근하자마자 텅 빈 거실 마룻바닥에 가만히 주저앉아 제 이름 석 자와 도장이 선명하게 찍힌 등기부등본 원본을 한참 동안 손가락으로 쓸어내렸었다.돌려받은 구원이 아니었다. 온전히 제 실력과 땀으로 버티며 직접 사들인 온전한 제 집이었다.거실 한가운데에는 빛바랜 노란 상자들이 성벽처럼 겹겹이 쌓여 있었다. 채원은 얇은 실크 셔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붙인 채, 아직 먼지가 풀풀 날리는 상자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테이프를 뜯어내고 있었다.피로가 어깨를 묵직하게 짓눌렀지만 이상할 만큼 잠은 오지 않았다. 손끝에 가볍게 닿는 물건마다 해묵은 기억들이 쏟아져 나와 마음의 빈틈을 파고들었기 때문이다.상자 깊숙한 곳에서 투명한 수납함 하나가 나왔다. 먼지를 털어내고 뚜껑을 열자, 대학 시절의 전공 책 몇 권과 모서리가 헤진 낡은 크로키북, 그리고 한눈에 보아도 손때가 아주 깊게 묻은 파란색 클리어 파일이 모습을 드러냈다.채원의 숨결이 짧게 멎었다. 그것은 루네(LUNE)의 최초 구상안이 담겨 있던 원본 파일이었다. 파일 첫 페이지에는 8년 전, 대학 도서관 뒤뜰의 어둑한 벤치에 앉아 그녀가 정갈한 검은색 펜으로 꾹꾹 눌러 썼던 문장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기술은 단순히 미래의 숫자를 맞히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누군가가 지금 이 순간 가장 필요로 하는 것
“그건 반년 전에 고쳤어.”“완전히는 아니고.”“남은 건 오래 고칠게.”채원은 물병을 받아 들고 창밖을 봤다. 웃는 얼굴을 들키지 않으려 했지만 유리에 비친 입술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저녁 약속 장소로 향하는 줄 알았던 차는 대학 정문 앞에 멈췄다.방학 중인 교정은 한산했다. 오래된 창업 동아리 건물은 리모델링돼 있었지만 도서관 뒤뜰로 이어지는 돌계단은 그대로였다.채원은 차에서 내리며 도현을 돌아봤다.“여기 올 거라는 말은 없었잖아.”“싫으면 저녁 먹으러 가도 돼.”“무슨 일인데?”“8년 전에 끝내지 못한 일.”도현은 앞서 가지 않았다. 채원이 계단을 오르자 나란히 걸었다.뒤뜰의 은행나무는 잎이 무성했다. 낡은 벤치 하나가 새것으로 바뀌어 있었고, 그 옆에는 당시에도 있던 돌담이 이어졌다.돌담 아래에는 창업 동아리 후배들이 붙인 작은 전시 안내판이 있었다. 차도현의 초기 예측 모델과 윤채원의 시장 기획이 공동 프로젝트로 소개돼 있었다. 8년 늦게 나란히 적힌 두 이름을 채원은 한동안 바라봤다.“나는 여기서 네가 안 온다고 생각했어.”도현이 벤치 앞에 섰다.“나는 네가 먼저 떠났다고 생각했고.”“그 시간까지 없앨 수는 없겠지.”채원은 안내판에 나란히 적힌 두 이름을 손끝으로 짚었다.“없애지 마. 당신은 아르덴을 만들었고, 나는 루네를 만들었으니까. 이번에는 이름 순서도 마음에 드네.”“다음 판에는 네 이름부터 넣어 달라고 할게.”“그건 후배들이 정할 일이야.”도현이 안주머니에서 흰색 서류 봉투를 꺼냈다.채원은 그것을 보자마자 눈썹을 들었다.“설마 또 계약서야?”“이번에는 네가 먼저 고칠 수 있게 빈칸을 많
반박은 이어지지 않았다. 채원은 도현이 대신 막아 줄지 확인하지 않았다. 도현도 그녀의 답에 평가를 덧붙이지 않았다.행사가 끝나고 대기실 문이 닫히자 도현은 채원의 구두 굽이 까진 것을 발견했다. 한쪽 무릎을 굽혀 준비해 온 밴드를 내밀었다.“아까부터 아팠지.”“투자자가 대표의 발까지 살피면 이해충돌 아닌가?”“회의 끝났어.”“그래서 이제 애인 차례다?”“응.”도현이 밴드 포장을 뜯자 채원은 그의 굽힌 무릎 위에 발을 올렸다.“회의 끝났으니까 제대로 붙여요. 아까부터 아팠어.”“알아.”그가 구두 뒤축에 쓸린 자리를 밴드로 덮었다.“아까 내 답, 투자위원회에서 반대할 거야?”“필요하면 반대하지. 연인이라서 찬성하진 않을 거야.”“좋아. 그럼 나는 내 계획으로 다시 설득할게.”도현은 웃으며 밴드 끝을 눌렀다.“그게 내가 투자한 대표니까.”대기실 문이 열리고 민지가 다음 바이어가 기다린다고 알렸다. 채원은 밴드가 붙은 발로 다시 구두를 신었다. 도현이 손을 내밀었지만 채원은 그의 손목만 가볍게 짚고 일어났다.“저녁은 늦어.”“기다릴게.”“식당부터 예약하지는 마. 회의가 얼마나 걸릴지 몰라.”“끝나면 네가 정해.”복도 중앙에서 두 사람의 손이 떨어졌다. 채원은 바이어가 기다리는 왼쪽으로, 도현은 투자자 대기실이 있는 오른쪽으로 걸었다.채원이 한 번 돌아봤을 때 도현은 이미 걸음을 멈추고 자료 첫 장을 펼치고 있었다. 그녀도 수선 샘플을 고쳐 들고 제 갈 길로 향했다.***일주일 뒤, 채원은 자신의 집을 되사는 계약서에 서명했다.가격은 외부 감정평가사가 매긴 금액 그대로였다. 채원은 자기 통장에서 계약금을 보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