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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모르는 일

네가 모르는 일

By:  문계Completed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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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친구가 교통사고로 실명한 그해, 나는 소리 없이 사라져버렸다. 나중에 시력을 회복한 그는 갖은 수단으로 나를 찾아내더니 제 옆에 강제로 남겨두었다. 다들 그가 나를 너무 사랑한다고 한다. 내게 버림받았음에도 끝까지 손을 놓지 않았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이 남자가 약혼녀를 데리고 내 앞에 나타났다. “박지유, 배신당한 느낌이 어때? 아주 좋아?” 나는 머리를 흔들며 가볍게 웃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며칠밖에 안 남았으니까. 이제 곧 그를 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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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제1화

악성 뇌종양 판정을 받은 뒤 나는 두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하나는 나와 송여준이 사실은 법적 부부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6년을 키운 내 친아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내 아들은 내가 아닌 다른 여자를 엄마로 삼고 싶어 했다.

나는 그제야 비로소 가족들을 버리고 정체를 숨기며 7년 동안 두 사람을 위해 헌신했던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었는지를 깨달았다.

나는 매정한 두 사람의 인생에서 완전히 사라지기 위해 세 가지 일을 했다.

첫 번째는 결혼 7주년을 기념해 한 달 전 예약해 두었던 레스토랑 예약을 취소하고, 아들이 다니는 유치원 학부모 단톡방에서 나가고, 남편과 아이의 건강을 생각해 가입했던 수십 개의 건강 관리 단톡방에서도 나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몸이 오랜 비행을 견딜 수 있도록 의사 선생님에게 연락해 검사를 진행한 뒤 특효약을 처방받는 것이었다.

마지막 세 번째는 7년간 연락을 끊고 살다시피 했던 오빠에게 연락해 가족을 떠나 먼 곳에서 결혼생활을 한 것이 너무도 괴로웠다고, 이제 잘못을 깨달았으니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전하는 것이었다.

...

“환자분의 뇌종양은 현재 주변 뇌신경을 압박하고 있는 상태라 최대한 빨리 결정을 내리셔야 해요.”

소독수 냄새로 가득 찬 병원 복도, 의사 선생님이 한 말이 유하늘의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유하늘은 온몸을 덜덜 떨면서 이미 구겨질 대로 구겨진 검사지를 힘주어 꽉 쥐었다.

최근 들어 유하늘은 자주 머리가 아프고 속이 울렁거렸으며 이따금 코피를 흘리기도 했다.

처음엔 자주 밤을 새워 몸이 허약해져서 생긴 문제인 줄 알았는데 병원을 찾아 정밀 검진을 받아보니 악성 뇌종양이라는 악몽과도 같은 진단을 받았다.

의사는 두 가지 치료 방법을 제시했다.

한 가지는 수술을 받는 것인데 50%의 확률로 수술에 성공하여 살아남을 수 있다고 했다.

다른 한 가지는 약을 먹으면서 항암 치료를 진행하는 것이었다. 후자를 선택할 경우 머리카락이 전부 빠지게 되지만 수명을 몇 년 연장할 수 있다고 했다.

유하늘은 성공 확률이 50%밖에 되지 않는 수술을 선택하기 두려웠다.

어렸을 때부터 주사 맞는 것조차 무서워했었던 유하늘이었기에 차가운 수술대 위에 누워 생사의 기로에 놓이는 건 더욱더 두려웠다.

그러나 수술을 받지 않는다면 끊임없이 커지는 뇌종양 때문에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다가 죽게 되는 잔혹한 현실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유하늘은 눈을 감고 자신의 남편을 떠올렸다.

송여준과 결혼한 지는 어언 7년이다. 유하늘은 송여준을 사랑했고 그와 오랜 시간 함께했다.

게다가 둘 사이에서 사랑의 결실인 아들 송우주가 태어났고 송우주는 떡잎부터 남달라 어렸을 때부터 잘생기고 똑똑했다.

자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두 사람을 떠올린 유하늘은 아주 큰 용기를 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의사가 있는 진료실 문을 열었다.

“선생님, 저 결정했어요. 수술받을게요.”

의사는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성공 확률은 50%입니다. 두렵지 않으세요?”

유하늘은 웃었다.

“두렵지 않아요. 저는 제 남편과 아이가 제 곁을 지켜줄 거라고 믿거든요. 두 사람만 있다면 전 세상 그 무엇도 두렵지 않아요.”

의사는 정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그러면 한 달 뒤 수술 받으실 수 있게 예약해 두겠습니다.”

병원에서 나온 유하늘은 당장 집으로 돌아가 남편과 아들에게서 응원을 받고 싶었다.

집에 도착해 보니 가정부는 송여준이 집에 없다고, 회사에 갔다고 했다.

그래서 유하늘은 서둘러 리헬 그룹으로 달려갔고 회사에 도착한 뒤에는 곧장 대표 사무실로 향했다.

그런데 유하늘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기 전 한 남자의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

“여준아, 형수님 말이야. 아람 씨가 네 비서로 일한다는 걸 알면 화를 내지 않을까?”

유하늘은 당황했다. 문틈 사이로 송여준의 친구 홍이수의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아람 씨?’

권아람.

유하늘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이름이었다. 송여준이 10년 동안 마음에 품고 있던 여자의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책상 앞에 앉은 남자는 시선을 내려뜨리고 있었다. 검은색 셔츠 옷깃은 살짝 벌어졌고, 소매는 위로 걷어 올려 금욕적이면서도 냉담한 유부남의 분위기가 느껴졌다.

송여준은 짜증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회사 일에 관심 두지 마.”

홍이수는 목을 살짝 움츠리면서 입을 비죽였다.

“그래도 나는 네 체면을 봐서 하늘 씨를 형수님이라고 부르잖아. 너랑 하늘 씨 사실 혼인신고 안 돼 있다는 거 네 지인들 중에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냐? 게다가 그때 서류 위조해서 보내준 사람이 바로 나잖아. 하하!”

그 말에 유하늘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유하늘은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내가... 뭘 들은 거지? 나랑 여준 씨 혼인신고가 안 돼 있다고?’

송여준은 사무실 문 맞은편에 옆으로 몸을 틀고 앉아 있었기에 밖에 누군가 서 있다는 걸 꿈에도 몰랐다.

홍이수는 궁금해했다.

“여준아, 왜 말이 없어? 이제 아람 씨 돌아왔으니까 하늘 씨랑 헤어져야 하는 거 아니야? 솔직히 말해서 그때 하늘 씨가 너한테 매달리지만 않았어도, 네가 술에 취한 틈을 타 널 꼬셔서 잠자리를 가진 뒤 임신하지만 않았어도, 아이 출생신고를 위해서 네가 하늘 씨랑 혼인신고 하는 척했을 리는 없었을 거잖아. 그리고 그 일 때문에 아람 씨는 상처를 받아서 이제야 돌아왔지.”

유하늘은 잠시 숨을 쉬지 못했다.

두개 내압이 상승하자 유하늘은 토하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날 밤, 두 사람은 바에서 술을 마시다가 취했고 홍이수도 그 자리에 있었다.

홍이수는 유하늘이 송여준에게 술을 건넨 적이 없다는 걸 분명 알고 있었다. 당시 리헬 그룹의 라이벌 회사 직원이 술에 약을 탔고 유하늘은 송여준을 도와주려고 송여준과 함께 호텔에 간 것이다.

그런데 왜 모든 책임을 그녀에게 전가하는 것일까?

홍이수는 피식 웃었다.

“그래서 언제 아람 씨랑 결혼할 건데? 아람 씨가 심장질환 때문에 네게 짐이 되고 싶지 않다면서 떠나지만 않았어도 하늘 씨가 빈틈을 노려 네 옆자리를 꿰찼을 리는 없지. 네 옆자리는 원래 아람 씨 거여야 했어.”

송여준은 언짢은 표정으로 시선을 들었다.

그의 서늘한 눈빛에 경고의 의미가 다분했다.

“나랑 유하늘 사이에는 우주가 있어...”

유하늘은 온몸을 떨면서 비틀거렸다.

그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몸을 돌려 화장실로 향했다. 그래서 그 뒤의 얘기는 미처 듣지 못했다.

유하늘은 화장실에 도착한 뒤 미친 듯이 속을 게워 냈다.

역겨운 진실을 알게 됐기 때문일까? 아니면 뇌종양으로 인한 생리적인 반응일까?

안으로 들어온 직원은 유하늘의 모습을 보고 화들짝 놀라더니 이내 그녀에게 티슈를 건넸다.

유하늘은 눈시울이 빨개진 채 직원이 건넨 티슈를 건네받으며 서글픈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고마워요. 여준 씨한테 저 왔단 말은 하지 말아주세요.”

유하늘은 휘청거리며 건물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거리를 거닐며 송여준과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7년 전, 해외의 유명 디자이너였던 유하늘은 오빠가 운영하는 주얼리 회사의 기둥 같은 존재였고 송여준과는 아무런 접점이 없었다.

그러다 한 번은 출장을 가게 되었는데 호텔에서 나오자마자 치마가 찢어졌다.

난감한 상황이었는데 송여준이 마이바흐에서 내리며 구김 하나 없는 정장 재킷을 그녀에게 건넸다.

“허리에 두르세요.”

송여준은 낯선 환경에서 당황함과 난처함을 느끼고 있던 유하늘을 구했다.

고개를 들어 하느님이 정성 들여 빚은 듯한 송여준의 완벽한 얼굴을 보는 순간 유하늘은 사랑에 빠졌다.

그 뒤로 유하늘은 송여준을 잊지 못했고 오빠에게 부탁해 여러 인맥을 이용하여 송여준과 일로 엮이며 구애하기 시작했다.

유하늘은 송여준에게 오래전 인사조차 하지 않고 떠난, 그가 오랫동안 잊지 못한 사랑하는 여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다 술에 취해 그와 관계를 가지고 임신까지 한 뒤엔 순조롭게 그와 결혼하게 되었다.

유하늘은 결혼 후 첫날밤에 송여준에게 물었다. 책임지라고 하지 않았는데 왜 자신과 결혼했냐고 말이다.

늘 그녀에게 냉담하던 송여준은 처음으로 유하늘을 바라보며 천천히 정중하게 말했다.

“너와 아이에게 집이 되어주고 싶었어.”

그 말 한마디 때문에 유하늘은 결혼 생활에 모든 걸 쏟아부었다. 그녀는 오빠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커리어를 포기하고 국내에 남아서 남편과 아이의 뒷바라지를 했다.

그런데 그들의 결혼이 가짜였다니.

송여준은 단 한 번도 그녀를 자신의 아내로 여긴 적이 없었고 7년 동안 다른 여자만 그리워하며 그 여자와 부부가 되기를 바랐다.

유하늘은 피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의 지난 삶이 얼마나 허무했는지를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래서 유하늘은 결정을 내렸다.

한 달 뒤 수술에 성공하면 송우주를 데리고 떠나겠다고 말이다.

송여준은 앞으로 유하늘과 송우주를 고려할 필요 없이 자기가 원하는 사람과 결혼하면 되었다.

아이를 떠올린 유하늘은 다시금 기운을 차렸다.

집으로 달려간 그녀는 위층으로 올라가자마자 송우주와 집사의 대화를 듣게 되었다.

“엄마가 사실은 아빠랑 가짜 결혼을 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슬퍼할까요?”

집사는 자애롭게 웃으며 말했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도련님도 아시다시피 대표님께서는 사모님을 사랑하지 않으니까요.”

송우주가 앳된 목소리로 코웃음을 치면서 말했다.

“사실 저도 엄마가 싫어요. 저는 아람 이모가 더 좋아요. 아람 이모는 진짜 다정해요. 엄마가 저를 회사에 데려다줄 때마다 아람 이모가 맛있는 것도 많이 사주고 같이 놀아주기도 하거든요. 엄마는 간식 많이 먹으면 몸에 안 좋다고 못 먹게 하고, 공부 열심히 해야 한다고 놀지도 못하게 하는데 말이에요. 진짜 짜증 나요! 저는 아람 이모가 아빠랑 결혼하면 좋겠어요.”

유하늘은 주먹을 힘껏 움켜쥐었다. 마음이 너무 아려서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그녀가 배 아파 낳고 최선을 다해 키운 송우주는 송여준처럼 매정했다.

한때 화목한 사이였던 그들의 예쁜 추억들이 이제는 머나먼 꿈만 같았다.

겉으로는 행복해 보이지만 사실은 악몽인 그런 꿈 말이다.

과거 유하늘의 오빠는 유하늘이 고향을 떠나 먼 곳으로 시집가면 힘든 일이 생겼을 때 친정에서 바로 도와주기가 힘들다면서 그녀가 먼 타향에서 결혼해서 사는 걸 강력히 반대했었다. 그때 그 말을 들어야 했다.

만약 오빠가 송여준이 한 짓을, 그리고 송우주의 속마음을 알게 된다면 아마 칼을 들고 찾아와 두 사람을 죽이려고 할지도 몰랐다.

유하늘은 시큰거리는 눈을 깜빡이면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남편과 아들을 위해 용기 내어 수술을 받으려고 했으나 그녀의 희망은 이미 산산이 부서졌다.

거실에 선 유하늘은 휴대전화를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오빠, 나 이혼하려고. 나 이제 집에 돌아가고 싶은데 마중 나와주면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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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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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냥이
아니 이렇게 끝난건가요.,? .,? 완결이라고 나오는데. 결말이 이게 맞나요..,전개도 안되고 진짜 끝인가오ㅡ.,? ㅜ아
2024-12-24 22:38:3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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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희
기억상실의 병을 갖게되어 남자를 버렸는데 남자가 한 짓은 상상이상이네 결말은 허전하고 전개는 애매하고 비추입니다
2025-10-19 13:22:51
0
12 Chapters
제1화
김서준에게 감금당한 지 4년째 되는 해, 그에게 약혼녀가 생겼다.그녀는 바로 전설 속의 해상 그룹 따님 허다은이었다. 지적이고 온화한 성격에 김서준과 나란히 서 있으면 선남선녀가 따로 없었다.두 사람은 서로 알아간 지 반년이 넘었고 어느덧 결혼 얘기가 오갔다.이 몇 년간 김서준이 만났던 여자는 수없이 많았지만 다들 스쳐 가는 인연일 뿐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준 적이 없었다.친구가 전화로 나를 일깨워주었다.“김서준 이번엔 진지한 것 같아. 상대가 예쁠뿐더러 김서준의 사업에도 보탬이 되잖아.”나는 허다은에 대해 줄곧 말로만 전해 들었을 뿐 그녀와의 첫 만남이 김서준 회사일 줄은 몰랐다.그날 아침 나는 재진 받으러 병원에 갔다. 나의 선배였던 주치의가 말하길 병세가 매우 빠르게 진행되어 3개월 뒤엔 내가 모든 기억을 잃을 거라고 했다.“너 진짜 김서준한테 얘기 안 할 거야? 지금 말해주면 마음 되돌릴 수도 있을 텐데.”나는 한참 고민하다가 관두기로 했다.이미 변심한 사람에게 굳이 아픈 상처를 드러내서 뭐할까? 다만 나는 그를 찾아가서 계약서에 서명을 받아야 했다.내 병은 죽는 병이 아니다. 외국에 특별히 내 상황에 특화된 요양원이 있는데 비용이 어마어마할 따름이다.나는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고 별다른 친인척이 없어서 하는 수 없이 그에게 내 일을 맡기고 대신 잘 처리해달라고 부탁해야 한다.김서준 비서와 예약하지 않은 채 회사에 찾아갔더니 허다은도 자리에 있었다.나와 그녀는 응접실 양쪽에 각자 떨어져 않았고 그녀의 주변에는 몇몇 직원들이 둘러싸였다. 다들 그녀를 ‘사모님’이라고 부르며 아양을 떨었고 그녀의 얼굴에 웃음꽃이 사라지지 않았다.“저분은 누구시죠?”그녀가 물었다.이에 다른 동료들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입을 삐죽거렸다.“박지유예요.”김서준 신변의 사람들은 내가 누군지 너무 잘 안다.이때 허다은이 떠보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쭉 훑어보더니 아주 자연스럽게 먼저 말을 건넸다.“박지유 씨?”나는 그녀를 쳐다볼 뿐 아무런 대답도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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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난 15살에 서준 씨를 만났고 그 사람 옆에 가장 오래 머무른 여자예요. 다은 씨보다 이력이 훨씬 높다고요.”“그리고... 그쪽은 단지 소문만 서준 씨 약혼녀이지 공개석상에서 단 한 번도 인정받은 적 없잖아요.”내 말에 큰 충격을 받은 허다은은 고상한 척을 다 거둬들이고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며 포효했다.“서준 씨는 조만간 나랑 결혼할 거야. 넌 그저 서준 씨한테 놀아난 여자일 뿐 가여워서 내쫓지 않은 거라고. 그러니까 부디 선 넘지 마.”“사라진 2년 동안 뭔 짓거리를 했는지 누가 알아. 딴 남자들한테 놀아나서 닳고 닳았을 텐데 아직도 나랑 경쟁하려고 들어?!”그녀는 말하면서 문밖을 힐긋 쳐다보더니 곧장 책상 위에 놓인 물컵을 들어 제 얼굴에 퍼부었다.“아 차가워.”허다은의 정교한 얼굴이 물에 흠뻑 젖고 머리카락이 자연스럽게 젖어 드니 연약한 여주인공을 방불케 했다.이때 마침 김서준이 회의실 창문으로 그녀의 초라한 몰골을 보게 됐다.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김서준이 회의실 문을 박차고 나와 허다은의 손을 덥석 잡았다.“누가 그랬어?”그는 몹시 초조한 표정으로 손에 쥔 서류까지 내 얼굴에 내던졌다.서류가 얼굴에 긁혀서 작은 상처가 났고 피를 흘릴 정도까진 아니지만 뼈저리게 아픈 건 사실이었다.화들짝 놀란 프런트 데스크 여직원은 감히 아무런 말도 내뱉지 못했고 내가 선뜻 그에게 답했다.“허다은 씨 혼자 그랬어요.”허다은은 충혈된 두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그래요. 내가 그런 거예요. 다 내가 자초한 거죠 뭐. 이제 속이 시원해요?”“서준 씨가 장님이라고 비아냥거리길래 내가 참지 못하고 그 입을 막아버렸더니 감히 내 얼굴에 물까지 뿌리네요? 그래요, 모든 게 다 내가 자초한 일이에요!”그녀는 분명 일러바치는 듯한 말투로 말했지만 드러낸 표정은 한없이 연약하고 가여울 따름이었다.앞이 안 보이던 그 시기는 줄곧 김서준의 마음속에 가시 돋친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는 누군가에게 이 과거를 언급당하길 꺼렸고 그중에서도 내가 들춰내는 걸 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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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그는 나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씩 올렸다.“무슨 계약서인데?”“집이야 돈이야? 그토록 오랫동안 고상한 척을 떨더니 끝내 본심이 드러난 거야?”나는 그의 야유에 이미 적응했다. 게다가 틀린 말도 아니니까. 계약서의 본질은 궁극적으로 돈이었다.“알았어. 네 요구 들어줄 테니까 그전에 다은이한테 사과해.”김서준은 애초에 내가 그를 버리고 떠난 걸 마음에 담아두고 있다가 드디어 굴욕을 줄 기회가 생겼는데 그냥 넘어갈 리가 있을까?나는 서서히 주먹을 다잡았다.“정말 내가 이 여자를 괴롭혔다고 생각해요?”“그런 것 따위 중요치 않아. 내가 원하는 건 사과야. 지금 당장 다은이한테 사과해! 왜? 못하겠어?”그는 지금 이 일을 빌미로 나를 능멸하며 딴 여자의 마음을 달래려고 한다.나는 씁쓸해진 마음으로 문득 머릿속에 고등학교 시절이 스쳐 지나갔다. 그때 김서준은 괴롭힘을 당하던 날 위해 용감하게 나서서 그 아이들을 훈계했다.그땐 김서준 대표도 아니었고 그저 앳된 소년이 네댓 명의 동년배들에게 호되게 맞아서 얼굴이 팅팅 부었지만 끝까지 용감하게 나를 지켜주었다.“지유한테 사과해!”서로 다른 시기의 김서준의 잔상이 내 눈앞에서 서서히 겹쳐지다가 또 신속하게 분리되어가고 있었다.나는 정신을 다잡고 쓴웃음을 지으며 허다은에게 다가갔다.“죄송해요, 허다은 씨. 대표님 없는 틈에 물 뿌려서 정말 죄송하네요.”허다은은 또 일부러 고상한 척을 떨며 머리를 뒤로 넘겼다.“말로만 미안하면 뭐해요? 성의 없게.”“그럼 어떻게 하면 성의 있을까요? 이참에...”이때 김서준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더니 물을 한 컵 건넸다.“받은 대로 돌려줘야지.”그의 뜻은 너무 뻔했고 허다은도 물컵을 건네받더니 사악한 미소를 날리며 내 얼굴에 물을 뿌렸다.다 식은 물을 얼굴에 맞으니 아무리 히터를 틀어놓은 실내라 하더라도 나는 여전히 뼈가 시리도록 추운 한기를 감내해야만 했다.나의 안색이 어두워졌지만 여전히 차분한 표정인지라 초라한 몰골의 그녀와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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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나는 목적 없이 거리를 누비며 몸의 통증이 점점 더 심하게 파고들었다. 정신이 희미해지면서 16살 때의 김서준이 내 앞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그해 나는 이제 막 고등학교에 입학했고 부모님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나는 매우 혼란스럽고 성격도 갈수록 괴팍해졌다.김서준은 새로 이사 온 이웃이었고 바로 옆집에 살았다.이 남자도 가정환경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아빠는 딴 여자랑 바람이 나서 멀리 떠나가 버렸고 엄마는 청소 일을 도맡으며 겨우 생계를 유지해나갔다.한편 김서준은 태생이 밝은 성격인지라 나만 보면 활짝 웃었지만 나는 도저히 그를 신경 쓸 기분이 아니었다.내가 유일하게 기쁠 땐 학교 뒷산에 가서 살구를 뜯을 때였다. 쨍쨍 내리쬐는 햇살 아래 살구도 탐스럽게 무럭무럭 잘 자라났다.그날 일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했다. 저녁 무렵 힘겹게 나무에 올라가서 이제 곧 살구에 손이 닿으려 할 때 그만 굴러떨어지고 말았다.아플 법도 한데 고통이 전혀 전해지지 않아 고개를 숙이고 봤더니 김서준이 글쎄 창백한 얼굴로 내 몸 아래에 단단히 깔려있었다.“미안해요...”그때 그는 삐쩍 마른 체구라 내게 짓눌렸더니 그대로 뼈가 부러졌다.병원 병실에서 나는 대성통곡하며 미안하단 말만 반복했고 김서준은 오히려 매우 담담했다.“너 요즘 웃지도 않고 울지도 않아서 바보 됐나 의심했는데 이제 드디어 우네? 그래, 울면 됐어. 울고 싶을 때 마음껏 울어야지.”“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언제든지 얘기해. 내가 다 사줄게.”“박지유, 넌 혼자가 아니야. 내가 옆에 있잖아. 자꾸 혼자 다니지 마.”그땐 모든 게 소소한 일상이었지만 어언간 십여 년이란 세월이 흘렀다.나는 길옆에 주저앉아 숨을 헐떡였다. 멍하니 앞을 바라보니 행인들이 분주하게 지나가고 차들이 도로를 질주했다. 내 머리가 또다시 고장이 나버렸다.“나 방금 뭐 하려고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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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나는 한참 거리를 누빈 후에야 겨우 휴대폰으로 현주소를 찾아내고 집까지 돌아왔다.집에 돌아오자 김서준이 뜻밖에도 주방에 있었다. 허다은이 나타난 이후로 이 남자는 오랫동안 집에 돌아오질 않았다.그는 기분이 별로인지 술잔을 들고 내 뒤에 있는 탁자를 넌지시 바라봤다.탁자 위에는 탐스럽고 빛깔 좋은 살구가 놓여 있었는데 학교 뒷산에서 땄을 때랑 거의 비슷한 살구였다.“먹어.”김서준이 거만한 자세로 말을 내뱉으니 감히 선뜻 거절할 수가 없었다.다만 나는 신경 쓰지 않고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갔고 이때 김서준이 힘껏 나를 잡아당겼다.그의 두 눈동자에 불씨가 활활 타올랐다.“날 무시해? 아직도 내가 장님이라고 놀리고 싶은 거야?”그는 질책하는 투로 내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것 같았다.한때 실명했던 일은 줄곧 그의 치부가 되었다. 누군가가 일부러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한 그가 먼저 언급하는 일은 단 한 번도 없다.나는 멍하니 넋 놓고 있다가 낮에 발생한 일을 되새기려고 애를 썼지만 어렴풋한 머릿속엔 조각난 잔상들만 몇 개 떠다닐 뿐이었다.“왜 이래요? 미쳤어요? 내가 뭘 건드렸냐고요?”나는 그에게 꽉 잡힌 손을 빼내려고 몸부림치면서 안색도 점점 굳어갔다.“머리가 어지러워서 좀 잘 테니 일단 나가주시죠.”“가긴 어딜 가? 지금 날 내쫓는 거야?”“오늘이 무슨 날인지는 기억하는 거야? 하긴, 너처럼 매정한 여자가 기억할 리가 없지.”그가 불쑥 저 자신을 비웃듯 쓴웃음을 지었다.“그래도 이것 하나만은 새겨둬. 지금 네가 사는 집, 먹는 음식들 모두 내가 공급하고 있어. 넌 날 내쫓을 자격 없다고!”‘오늘이 무슨 날이라니?’나는 눈을 질끈 감고 곰곰이 생각해보려 했지만 머릿속이 백지장이 돼버렸다.‘괜찮아. 나중엔 서준 씨도 기억하지 못할 텐데 소소한 기념일쯤이야 잊으면 잊으라고 하지 뭐.’내가 아무 말도 없자 인내심이 바닥난 김서준은 살구를 집어 들더니 다짜고짜 내 입가에 갖다 대고 고집스럽게 말했다.“먹어. 같은 말 반복하게 하지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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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김서준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전화를 받았다.“김 대표, 지금 시간 돼? 다은이랑 혼사로 얘기 좀 나누지?”상대는 바로 허다은의 아빠이자 전설로 불리는 해상 그룹 회장이었다.“저 지금...”“이리로 와. 밥 먹는 건 둘째치고 사업 건으로 세부 사항을 논의하려고 그래.”김서준은 대답하지 않고 나를 바라보더니 휴대폰을 옆으로 치웠다.“빌어 나한테! 네가 말만 하면 바로 거절할게.”“허다은이랑 결혼할 일도 없고 더는 그 누구도 안 만나.”나도 한때 똑같이 그에게 애원했었는데...다른 여자를 껴안고 내 앞에 나타났을 때 용기 내 알려주고 싶었는데, 애초에 그를 떠난 이유를 낱낱이 고백하고 싶었는데 그때 김서준은 뭐라고 했었지?“박지유, 변명거리 둘러대지 마.”“사기꾼 주제에 내가 네 말을 믿을 것 같아?”“지금 나더러 그 해명을 들어달라고? 좋아, 무릎 꿇고 빌어! 그럼 들어줄게.”내 자존심을 무참히 짓밟더니 이제 와서 서로 등 돌리고 상처만 너덜너덜해지자 나보고 무릎 꿇고 빌라고?!나는 그의 두 눈을 빤히 쳐다보며 한 글자씩 또박또박 말했다.“서준 씨는 나한테 이미 놀다 질린 장난감에 불과해요. 애원할 가치조차 없다고요.”“이만 가요. 얼굴 보고 싶지 않으니.”김서준은 제자리에 멍하니 서서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그는 휴대폰을 들고 공손하게 대답했다.“네, 지금 바로 갈게요.”말을 마친 그 남자는 나를 뒤돌아보지도 않은 채 문을 박차고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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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며칠 후, 김서준과 해상 그룹 회장이 나란히 마주한 사진이 각 언론 매체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이어서 김서준은 허다은과 함께 기자들의 인터뷰를 받았고 그녀가 다정하게 이 남자의 팔짱을 꼈다. 둘의 모습은 선남선녀를 방불케 했다.“허다은 씨, 혹시 박지유 씨에 관해서 들으신 적 있나요? 여기에 대해 하실 말씀 있으신가요?”이에 허다은이 아주 털털하게 대답했다.“요즘 세월에 누구나 속 썩이는 엑스 한 명쯤은 있잖아요. 중요한 건 현재의 저랑 서준 씨에요. 과거는 과거일 뿐 우리가 만남을 잘 이어가면 돼요. 불필요한 사람은 언급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나는 TV 앞에 마주 앉아 무표정한 얼굴로 인터뷰를 쭉 지켜보았다. 이때 뒤에 서 있던 한 여자가 기고만장한 얼굴로 내 앞에 다가오며 비아냥댔다.“다은 언니랑 대표님은 이제 곧 정식 부부가 될 거고 이 집도 두 사람 공동 재산이에요. 그쪽은 지금이라도 안 늦었으니 얼른 나가주시죠?”나는 그 여자를 거들떠보지 않은 채 노트를 꺼내 글을 적기 시작했다.[11월 15일, 김서준 딴 여자랑 약혼 발표.]요 이틀 기억력이 유독 달려서 중요한 건 반드시 노트해야만 했다.내게 무시당한 그 여자는 더 약올랐는지 노트를 덥석 채갔다.“지금 내 말 안 들려요? 끝까지 버티고 있을 거냐고요? 이참에 내가 대신 짐 정리해줄까요?”그녀는 다른 사람을 지시하며 내 방에 쳐들어와 옷장 안의 옷을 싹 다 내던지고 화장대 위에 놓인 몇 안 되는 기초제품들까지 모조리 쓰레기통에 버렸다.나는 마치 아웃사이더처럼 눈앞에서 벌어지는 모든 상황을 지켜보다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지금 다들 뭐 하는 거지? 왜 내 물건을 싹 다 치우는 거야?’방 안에 소음이 울려 퍼졌고 나는 심신이 피로해서 손으로 귀를 막으려 했다.“언제까지 서 있기만 할 거예요? 당장 꺼지라고!”이때 그 여자가 내 손목을 덥석 잡았다. 힘이 워낙 세다 보니 내 손목에 둘렀던 팔찌가 부러지고 에메랄드 비즈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나는 끝내 감정을 주체하지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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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오늘은 아마도 11월 15일일 것이다. 나는 비스듬히 눈을 뜨고 휴대폰으로 날짜를 확인했다.눈앞엔 의사 가운을 입은 사람이 떡하니 서 있었는데 그는 바로 나의 선배이자 주치의 유강빈이었다.또 한 명의 남자도... 어두운 표정으로 내 앞에 서 있었다.“픽픽 쓰러지기나 하고. 박지유, 너 대체 언제부터 연기가 늘었어?”나는 1초 동안 머리가 아찔거리다가 드디어 그가 누군지 생각났다.“약혼까지 다 해놓고 왜 또 날 찾아오는 건데요?”김서준이 웃으며 동문서답으로 말을 이어갔다.“너 병원에 실어다 주면서 들었는데 요즘 이 자식 자주 찾아온다며?”“실종된 2년 동안 대체 어떻게 지냈는지 줄곧 궁금했는데 답 나왔네.”그는 유강빈 앞으로 다가가 음침한 표정으로 노려보았다.“아쉽게도 그쪽이 2년 동안 이루지 못한 일을 내가 해냈지 뭐야?”이보다 더 적나라한 암시는 없었다. 나는 순간 심장이 움찔거려 그에게 베개를 내던졌다.“꺼져. 당장 꺼지라고.”김서준은 피하지 않고 베개에 그대로 맞았다.이때 유강빈이 훤칠한 체구로 우리 앞에 나섰다.“대표님, 이제 그만 나가주시겠어요? 계속 더 환자를 자극하면 경비원 부를 수밖에 없어요.”김서준은 싸늘한 눈빛으로 우릴 쳐다보다가 몇 초 뒤 병실을 나섰다. 문 닫히는 소리가 쾅 하고 울려 퍼져 두 귀가 쩌렁쩌렁해질 지경이었다.나는 머리를 움켜쥐고 한참 넋 놓고 있었다.이에 유강빈이 안쓰러운 눈길로 나를 쳐다봤다.“걱정 마. 김서준은 아무것도 몰라. 네가 과로로 쓰러진 줄 알 거야.”“근데 지유야, 너 정말 2년 전의 진상과 지금 이 병을 김서준한테 얘기 안 할 거야?”“네, 그럴 필요 없어요. 며칠 뒤엔 모든 기억을 다 잃을지도 모르겠는데요 뭘.”사실 별것도 아니었다. 2년 전, 김서준이 실명한 첫 달에 나도 마침 희소병 진단을 받았었다.전 세계에 발병률이 5퍼센트도 안 되는데 일단 이 병에 걸리기만 하면 8년 안에 모든 기억을 점차 잃게 되고 식물인간처럼 혼미상태에 빠지게 된다.나는 부모님이 일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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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유강빈은 내게 다음 주 D국으로 가는 항공권을 끊어줬다. 떠나기 전에 나는 김서준의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열대과일 리치를 사서 마지막으로 묘지에 한 번 찾아가기로 했다.김서준과 상관없이 그녀는 내게 은인이었다.김서준의 엄마는 교외의 가장 호화로운 묘지에 안장되었다. 영정 사진 속 그녀는 내 기억 속의 모습과 똑같이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이제 막 허리를 숙이고 묘지를 깨끗이 청소하려는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지유 씨가 여긴 어쩐 일이에요?”상대는 바로 허다은이었다.그녀가 다정한 말투로 내게 말했다.“우리 시어머님 뵈러 오셨어요? 마음은 고마운데 앞으론 굳이 이럴 필요까지 없어요. 내가 사람을 시켜서 청소할 테니까.”내가 보는 앞에서 대놓고 내가 챙겨온 꽃다발을 내던지는 그녀였다. 이때 문득 그녀의 손목에 시선이 닿았는데 익숙한 팔찌가 한눈에 들어왔다.나는 순간 주먹을 불끈 쥐었다.“이 팔찌가 왜 다은 씨한테 있어요?”허다은은 거들먹거리며 내게 답했다.“서준 씨한테 받은 거예요. 어머님이 예비 며느리한테 물려주는 거라고 하던데요?”“아니야, 이런 거 아니잖아...”이 팔찌는 그의 엄마가 내게 준 선물이니 김서준이 제멋대로 남들에게 넘겨줄 자격이 없다.“김서준 어디 있어? 지금 어디 있냐고?!”사람이 이성을 놓아버리면 힘이 저절로 샘솟는 듯싶다. 내게 마구 휘둘리던 허다은은 얼굴까지 잔뜩 일그러졌으니까. 그녀는 겨우 손을 들어 밖을 가리키며 말했다.“지유 씨 안 보고 싶대요. 지유 씨 떠나거든 이리로 온다고 했어요.”나는 냉큼 김서준 앞으로 다가가 막무가내로 그의 가슴팍에 주먹을 휘둘렀다.“왜?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나한테? 저 팔찌가 내게 어떤 의미인지 누구보다 잘 알면서 왜 이렇게 궁지로 밀어붙이는 건데? 이 나쁜 자식! 개자식!”한편 김서준은 아무 말 없이 있다가 한참 후에야 입꼬리를 씩 올렸다.“너 이런 년인 거 우리 엄마가 알았으면 그 팔찌 차라리 개나 줘버렸을걸?”“박지유, 적당히 해. 말끝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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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시끄러운 다툼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기절했던 내가 힘겹게 눈을 떴을 때 잘생긴 남자 두 명이 바로 앞에서 다투고 있었다.두 사람 모두 얼굴에 멍이 들었고 경비원이 겨우 뜯어말리며 조심스럽게 말했다.“다들 진정하시고 말로 하세요 말로.”나는 일어나 앉아서 의사 가운을 입은 남자를 보며 이리 오라고 손을 흔들었다.하필 이때 정장 차림의 남자가 더 흥분하며 내 앞에 털썩 무릎을 꿇더니 눈물범벅이 된 채로 물었다.“지유야, 나 기억나? 기억할 수 있겠어?”지유라니?대체 왜 날 이렇게 부르는 거지?나는 미간을 찌푸리고 그에게 잡힌 손을 힘껏 빼냈다.“누구세요?”“내가 그쪽 알아요?”“강빈 선배, 이분 선배 친구예요?”나는 머릿속이 하얘졌다.이때 유강빈이 성큼성큼 다가오며 창백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박지유, 너 지금 뭐라는 거야? 정말 이 사람 누군지 모르겠어?”나는 두 눈을 깜빡거리며 곰곰이 생각해보았지만 정말 모르는 사람이었다.별안간 김서준이 언성을 높였다.“유강빈, 다 너 때문이야. 네가 우리 지유 이렇게 만들었지? 이 모든 게 네가 벌인 짓이잖아. 지유가 왜 날 기억 못 하냐고?!”“젠장, 이게 다 네가 지유 자극해서 그런 거잖아. 얘 말은 들어도 안 주고 제멋대로 능멸하고 딴 여자랑 약혼한 것도 모자라 팔찌까지 남한테 줘? 지유는 너 일부러라도 잊어야 해. 안 그러면 애가 너무 힘들어. 널 잊어야 그 고통을 조금은 덜 수 있다고!”“X발 개소리 집어치워.”두 사람은 또다시 처절하게 싸웠다. 마치 야수처럼 서로가 죽일 듯이 공격했다.그날 김서준과 유강빈은 나란히 경찰서에 끌려갔다.유강빈이 단독으로 그를 찾아 얘기를 나눴는데 무슨 내용인지는 나도 잘 모른다. 단지 그날부로 김서준이 매일 내 병실에 찾아와 지나간 추억을 말해주곤 했었다.“이 머플러는 네가 떠준 거야. 솜씨가 서툴러서 한 달 만에 완성했지 뭐야.”“이건 우리 졸업 사진이야. 너 이때 내 옆에 서 있었어. 우린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야. 그땐 학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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