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고모, 저 생각해봤는데 민 씨 가문을 떠나서 고모랑 해외에서 함께 살려고요.”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원정숙의 목소리에는 기쁨과 안도감, 그리고 어딘가 간절한 부탁이 담겨 있었다. [그래, 단비야. 내가 비자 준비를 바로 시작할게. 한 달 정도는 걸릴 것 같으니 조금만 기다려줘. 그동안 친구들도 많이 만나. G국으로 이주하면 다시 만나기 어려울 테니 작별 인사는 꼭 제대로 해야 해.] [특히 삼촌 말이야. 삼촌은 너를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키워줬잖니. 그 은혜는 절대 잊으면 안 돼. 진심을 다해 감사의 인사를 전해야 해.] “네.” 원단비는 잠시 말을 멈추고 조용히 대답했다. 전화를 끊고 베란다로 향했던 그녀는 천천히 거실로 돌아왔다. 그러다 무심코 테이블 위에 놓인 사진 한 장에 시선이 멈췄다.
View More진씨 가문은 권위나 재력이 뛰어난 집안은 아니었지만, 대대로 선비 정신을 이어온 학식 깊은 가문이었다. 그러나 진민서 세대에 이르러 가문에는 단 하나의 딸, 진민서만 남았다. 그 때문에 진씨 가문은 그녀를 어릴 때부터 애지중지 키우며 온갖 자원과 정성을 쏟아부었다. 그 모든 이유는 단 하나, 진민서를 밝은 미래를 가진 명문가로 시집보내겠다는 기대 때문이었다.이를 위해 진씨 가문은 특별히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국화의 대가를 청해 어렸을 때부터 진민서를 가르치도록 했다. 염대현 대가가 직접 가르친 제자라는 타이틀 덕분에 진민서는 젊은 나이에 회화계에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진민서는 염대현 대가를 통해 민태건도 알게 되었다. 결혼소식이 전해졌을 때, 진씨 가문은 매우 기뻤고 이대로 나날이 발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불과 한 달도 되지 않아 진민서가 버려졌다는 소식이 온 S시에 퍼졌다. 진씨 가문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고 여론이 잠잠해진 후 다시 진민서를 사람들 앞에 내세우려 했다. 그러나 이번에 표절 스캔들이 터지자 진씨 가문은 당황한 나머지 어쩔 바를 몰랐다. 진씨 가문에서 아직 인맥을 사들일 준비를 하는 동안 민태건 쪽에서는 이미 증거가 끊임없이 유출되어 영원히 뒤바뀔 수 없는 판도로 이끌어갔다. 진민서의 이름은 이로써 회화계의 치욕으로 기둥이 박혔다. 실시간 검색어 첫 번째는 바로 당시 떠들썩했던 신인 화가 원단비의 표절 사건이었다.진민서의 전 약혼자, 민씨 가문 둘째 아들, 민씨 가문이 직접 나서서 진민서의 표절과 원고를 훔쳐간 일을 증명했다 등등으로 화제를 모았다. 일시에 네티즌들은 수군대기 시작했고 마침내 원단비와 진민서 두 사람 사이에 얽힌 수수께끼를 풀어냈다. [그러고 보니 민 사장은 진민서가 표절했다는 걸 발견하고 헤어진 거네! 난 남자 쪽에서 변심한 줄 알았는데 오해했네!] [이 사건에서 가장 불쌍한 건 원단비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욕했는데 설명조차 못 했으니 말이야, 아이고.] [전
개학식이 끝난 뒤 원단비는 고모 가족을 학교에서 보낸 뒤 혼자 다시 학교 안으로 들어섰다.입구에 도착하자마자 고개를 들어보니 원단비는 익숙한 눈을 발견했다. 왠지 모르지만 완전히 내려놓은 후 원단비는 다시 민태건을 만날 때면 늘 잘못을 저질렀다가 부모에게 잡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어렸을 때 몰래 어머니의 목걸이를 훔쳐 친구에게 줬다가 들켰을 때의 기분과 같았다. ‘이게 바로 어른이 위엄인가?’ 정면으로 마주쳐 못 본 척할 수도 없었기에 원단비는 억지로 앞으로 나가 인사를 건넸다. “삼촌이 여기 웬일이에요?” 원단비의 회피하는 듯한 눈빛에 민태건은 또 마음이 아파왔다. 하지만 민태건은 휘몰아치는 마음을 억지로 누르며 침착한 척했다. “개학식 보러 왔지.” 원단비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침묵 속에서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이 침묵의 시간은 민태건을 아주 불편하게 만들었고 얼른 대화의 주제를 찾았다.“왜 조각을 배우기로 한 거야? 그림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왜 계속 공부하지 않고?” 이에 원단비는 얼굴은 굳어버렸고 겨우 웃음을 짜냈다. “업계에서 블랙리스트에 올랐으니 다른 길을 찾아보려고요.” 민태건은 그제야 표절 사건이 생각났다. 양심의 가책이 물 밀듯이 밀려왔고 민태건은 가슴이 답답하여 숨을 쉴 수가 없었다.몇 분 동안 침묵한 뒤 민태건은 용기를 내어 ‘미안해’를 내뱉었다.다만 아쉽게도 이 사과는 너무 늦어버렸고 원단비에게 더 이상 필요하지도 않았다. 10여 년 동안 키워준 은혜가 있으니 원단비는 민태건을 탓할 방법이 없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다 지나간 일인데요. 조각도 좋아요.” ‘정말 다 지나간 일일까?’ 민태건은 지금 사실을 밝히더라도 이 일은 영원히 지나간 일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원단비 몸에 뿌려진 오물을 씻을 수는 있겠지만 그녀에게 입힌 상처는 깨진 거울의 균열처럼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원단비를 만났던
원단비가 가출한 게 아니라 이민한 것을 알게 된 후로 박진호의 미간은 늘 찌푸려져 있었다. 전에는 원단비가 있어 그들이 무슨 잘못을 하더라도 편들어줄 사람이 있었다. 원단비가 입을 열기만 하면 아무리 큰 잘못이더라도 민태건은 가볍게 넘어가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원단비가 없으니 고생하는 것은 바로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무슨 이유인지 민태건은 요 며칠 무기력할 뿐만 아니라 늘 꼬투리를 잡곤 했다. 셰프가 아침에 죽을 끓이지 않으면 민태건은 한바탕 화를 내곤 했다. 이에 셰프는 허둥지둥 일하러 가면서 원단비도 없고 민태건은 죽을 좋아하지도 않으니 죽을 끓이지 않는 게 뭐가 잘못된 거냐며 중얼거렸다.정원사가 정원의 나무 두 그루를 다듬을 때면 민태건은 바로 정원사의 2개월치 월급을 감봉했다. 정원사는 그 나무가 원단비 것이고 그녀가 떠나기 전 부지런히 다듬어야 키가 큰다며 신신당부했는데 자신이 뭘 잘못한 건지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알 수 없었다. 이윤미는 망가진 만년필을 버렸다가 민태건의 죽일 듯한 눈빛을 발견했다. 급한 나머지 이윤미는 밤새 쓰레기장을 뒤지다 악취에 취해 눈물을 흘리면서도 사용한 지 8년이나 된 만년필이 뭐가 그리 소중한지 알 수 없었다. 아랫사람들은 전전긍긍하며 지냈고 민태건은 정신을 차리지 못해 보름간 휴가를 냈지만 줄곧 침대에 누워 문밖을 나가지 않았다. 진민서와의 결혼이 무산된 후 민현기 회장은 화가 나 고혈압이 도졌고 서지수에게 민태건을 본가로 데려오라고 분부했다. 하지만 보스의 미움을 살지언정 절대 직속 상사의 미움은 사지 않는다는 신념 하에 서지수는 머리를 쥐어짜 무수한 변명을 찾아 얼버무렸다. 결국 민현기를 분노케 하는 데 성공했고 서지수에게 하루 안에 민태건을 본가로 데려오지 않으면 해고시킬 것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서지수는 용기를 내어 민태건의 방 문을 두드릴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오랫동안 쉬어서인지 민태건의 기분은 많이 나아진 듯했다. 모든 자초지종을 들은 뒤 더 이상 민태건은 서지수를
S시에 돌아온 뒤, 사직서를 돌려받은 서지수는 직접 차를 몰로 민태건을 데리러 갔다. 이 일을 겪으면서 서지수는 많은 것은 똑똑히 보게 되었고 성실하게 일하면서 마음속에는 오직 직속 상사와 그녀를 구해준 원단비밖에 없었다. 이틀 동안 파혼된 일로 서지수의 핸드폰은 터질 지경이었지만 그녀는 입을 꼭 다물고 한 글자도 누설하지 않았다. 이제 민태건이 돌아왔으니 서지수는 그녀가 짊어지고 있던 스트레스와 짐을 모두 벗어 던질 수 있어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하지만 유일한 문제는 민태건의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인다는 것이었고 보고를 하는 서지수의 목소리는 매우 낮았다. “민 사장님, 결혼식은 비록 취소됐지만 진민서 씨가 소란을 피웠습니다. 어제는 짐을 싸가지고 별장으로 이사하여 아가씨가 예전에 살던 방에 들어갔습니다.” 이 말을 들은 민태건은 바로 운전기사를 불렀고 별장으로 가라고 분부했다. 서지수는 참지 못하고 가슴을 두드리며 한바탕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서지수는 이 일이 가장 중요하니 제일 먼저 보고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차가 별장에 들어서자 박진호는 몸을 굽히며 앞으로 나아가 무언가 말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민태건은 큰 손을 내두르고는 성큼성큼 문을 열고 들어가며 2층을 가리켰다. 아침 9시, 방문은 굳게 닫혀 있었지만 민태건이 직접 문을 열어버렸다. 침대 위에 진민서는 아직 깊게 잠들어 있었다. 방에 갑자기 많아진 물건들을 보더니 민태건은 낯빛이 어두워졌다. “사람과 물건 전부 내다가 버리세요.” 눈치가 빠른 박진호는 직접 7,8명의 일꾼을 데리고 뛰어들어 일을 시작했고 이불에 진민서를 말아 들어내기 시작했다. 갑자기 공중에 떠있는 듯한 무중력감이 단잠을 자고 있던 진민서를 깨웠고 그녀는 놀라서 눈을 뜬 채 힘차게 발버둥쳤다.“왜 이래? 누가 허락도 없이 내 방에 들어오라고 했어? 꺼져!” “네 방? 여긴 단비의 방이야!” 비록 피곤함에 찌든 민태건의 목소리를 들었지만 진민서는 아직 상황파악을 하지 못하고 입을 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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