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송가의 외동딸이 수십 명의 계집종들과 장정을 들인 것도 모자라 외행랑채에 별도의 호위처를 두고 백 명이 넘는 사내 호위를 기른다는 소문이 삽시에 의주 도성에 퍼졌고 사람들은 송씨댁 앞을 지날 때마다 기웃거리며 궁금해했다.
저녁이 되자 화려한 비단 치마로 갈아입은 송진초가 장식함 속에 갖가지 머리꽂이들을 넣어두는 것을 본 취주는 혀를 내둘렀다.
송진초의 신발 끝에는 커다란 동주까지 박혀 있었다.
보다 못한 취주가 궁금한 듯 물었다.
“아씨, 대감 어르신께서 이리 많은 재산을 남기셨사온데, 어찌 이제껏 언질 한 번 주지 않으셨던 겁니까?”
송진초가 취주를 힐끗 쳐다보았다.
“난 이 집안의 외동딸이다. 우리 가문은 대대로 장사를 하였기에 쌓아둔 재산 역시 셀 수 없을 만큼 많긴 하지만 숨겨야 할 재물도 있는 법이다. 너 따위가 알 사정은 아니지!”
취주는 장식함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거울 너머로 취주의 탐욕스러운 눈빛을 본 송진초가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다물었다.
벌써 이튿날 새벽이 되었지만, 송진초는 눈을 붙일 수 없었다.
눈만 감으면 조씨 부인과 송연이의 다정한 모습이 떠올랐던 탓에 그녀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인기척을 느낀 유모가 바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씨, 잠자리에 들지 않으시고 뭐 하세요?”
“잠이 안 오네.”
그녀는 옷을 걸치고 책상에 앉아 불경을 펼쳤다.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방 안에 심신을 편안하게 해주는 향까지 피웠다.
어느덧 두 시진이 지나 있었다.
그녀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땐 날이 밝은 뒤였다.
“취주는?”
“어젯밤 붙잡아서 장고에 가두었습니다.”
유모가 잔뜩 화난 얼굴로 말했다.
“아씨께서 그렇게 잘해주셨건만 그것이 감히 한성에 서신을 보내다니요!”
송진초가 미간을 찌푸렸다.
하산 전에도 취주를 놔둔 것도 취주가 보낸 서신이 한성에 닿게 하기 위함이었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기 때문이다.
그녀의 손에 선친이 남긴 재산이 들어간 것을 조씨 부인이 알게 되면 분명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았다.
한성에서는 든든한 뒷배 하나 없는 사람이었지만, 의주에선 그녀는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송가의 외동딸이다.
그녀는 창밖으로 동이 트는 것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고문은 하지 말고 다치게도 하지 말고 입을 열게 할 필요도 없네. 그 아이는 따로 써먹을 데가 있어.”
유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 식사를 마친 뒤 제소가 다급한 얼굴로 찾아왔다.
“아씨, 왕세자께서 전쟁에서 승리하시고 도성으로 향하는 중에 때마침 의주를 지나신답니다.”
전생에 그녀는 한성으로 향하던 중 왕세자의 승전 소식을 들은 적이 있었다. 당시 왕세자가 이끄는 대군이 의주에서 반나절을 머물렀었다. 4년 전에 변방 전쟁을 앞두고 군량이 떨어지면서 왕세자는 그녀의 아버지를 찾아와 도움을 청했다. 송 대감은 늦은 시각에도 선뜻 변방으로 군량을 지원했고, 이후로도 두 차례나 더 군량을 변방으로 보냈었다.
송씨 가문은 왕세자에게, 조정에서 공신과 다름없었다.
“그땐 나와 동이도 아버님과 함께 군량을 옮겼었지. 비록 동이가 지금 세상에 없지만 저하께서 날 두 번이나 마주쳤으니 분명 기억하실 거야.”
“선친께서 생전에 힘겹게 겨울을 날 백성들을 걱정해 매년 네 개의 성문 앞에 구휼미와 옷가지들을 내놓으셨지요. 아재, 올해부턴 제가 하겠어요.”
제소가 알겠다는 듯 답했다.
“알겠습니다. 내일 아침에 동문 근처에 적당한 장소를 마련하겠습니다. 소란을 피우는 자들이 있을 수도 있으니, 수하들을 붙여 아씨의 안전을 지키도록 하지요.”
다음 날 아침, 그녀는 날이 밝자마자 동문으로 향했다.
많은 백성이 동문에 마련된 세 곳의 천막에 줄지어 서 있었다.
싸늘한 북풍이 그녀의 볼을 스쳐 지나갔다.
백성들에게 직접 죽을 나눠주고 집으로 돌아왔을 땐 이미 어두워진 뒤였다.
유모는 서둘러 그녀에게 생강차를 건네더니, 족욕을 할 수 있게 온수를 준비했다.
창백했던 그녀의 혈색이 다시 돌아오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유모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씨께서 친히 백성들에게 죽을 퍼줬으니, 의주에서 아씨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없겠습니다.”
유모의 말에 그녀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유모의 말대로 의주에서 그녀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취주의 서신은 닷새 뒤에야 한성에 닿을 것이다.
한편, 의주의 혹한과 달리 한성은 나뭇가지에 푸릇푸릇한 싹들이 피어날 정도로 따뜻했다.
뒷문으로 들어온 계집종이 서신이 왔다고 기별을 넣자, 중년 여성이 계집종을 안채로 들였다.
미소를 지으며 거문고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조씨 부인은 봉선화즙을 머금은 손끝으로 서신을 건네받았다.
의주에서 온 서신이라는 것을 발견한 조씨 부인은 눈살을 찌푸리며 서신을 뜯어 확인했다.
“여봐라, 어서 말을 준비하거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함을 지르는 조씨 부인에 거문고를 튕기던 소녀의 손이 멈추었다.
“어머니, 무슨 일이에요?”
조씨 부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의주에서 온 서신인데 송진초 그것이 멋대로 하산하여 종택으로 들어갔다는구나. 숨겨놓은 광산 몇 개 더 있었다는구나!”
의주라는 두 글자에 송연이가 당황한 듯 눈알을 굴리더니 조씨 부인을 안심시켰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부 어머니 것입니다. 다른 이에게 빼앗기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같이 가겠습니다.”
한성에서 의주까지 말을 타고 가면 열흘이 걸리고 마차를 타면 이틀이 더 소요된다. 취주가 의주에서 서신을 보낸 지도 스무날이 지났다.
“아씨, 방금 제 관사가 두 시진만 더 지나면 한성의 마차가 의주에 당도하기에 준비하시랍니다.”
송진초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이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오후가 되자 동문으로 한성의 으리으리한 마차 한 대가 들어섰다.
백성들에게 음식을 나눠주던 송진초는 마차를 힐끗 쳐다보더니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그려졌다.
곧이어 멀지 않은 곳에 마차가 멈췄다. 조씨 부인이 3년여 만에 다시 만난 송진초는 아름다운 붉은 긴 치마를 입고 천막에서 백성들에게 죽을 나눠주고 있었다.
송진초의 얼굴을 마주한 조씨 부인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녀의 얼굴에서 세상을 뜬 송 대감의 얼굴이 얼핏 보였기 때문이다. 송 대감의 얼굴을 본 사람은 그녀의 신분을 의심하지 않았다.
“어머니.”
송연이가 입술을 꼭 깨물고 전보다 훨씬 생기 돋는 얼굴을 한 채 우아하고 기품 있게 행동하는 송진초를 바라보았다.
송연이는 한성에서 자신의 미모가 어디 내놓아도 지지 않을 정도로 뛰어나다고 여겼다. 그것도 그럴 것이 연회에 참석할 때마다 주위에서 입이 마르게 그녀의 미모를 찬양했기에 그녀는 늘 자신에게 자신감이 있었다.
하지만 송진초를 마주한 그녀는 자신의 미모가 송진초에 뒤처지는 것 같았다.
송연이가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서신을 받고 오는 동안 저 계집 혼자 구휼미를 스무날간 베풀었던 탓에 의주 백성들의 칭송을 받고 있을 겁니다. 이제 저는 어떡하지요?”
조씨 부인은 차가운 얼굴로 미간을 찌푸리며 송진초를 쳐다보았다.
삼 년 사이, 송진초에게 많은 변화가 생긴 것 같았다.
“진정하거라.”
조씨 부인은 송연이를 안심시켰다.
“어찌 조급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내년이면 기 국공부에서 혼사를 정한다고요.”
손수건을 움켜쥔 송연이는 원망하듯 불평을 늘어놓았다.
“송씨 가문이 풍비박산 날 때 저 계집도 같이 죽어야 했어요!”
“연이야!”
조씨 부인이 싸늘한 얼굴로 송연이의 말을 끊었다.
“어찌 됐든 저 아이도 네 친동생이다. 언행을 조심하거라.”
으름장을 놓는 조씨 부인의 태도에 송연이는 재빨리 꼬리를 내렸다.
“제가 아둔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조씨 부인은 그제야 미간을 풀고 숨을 고르며 옆에 있던 계집종에게 분부했다.
“가서 저 아이를 데려오너라.”
계집종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장 마차에서 내려 송진초에게 향했다.
“아씨, 마님께서 마차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마님이라니?”
송진초가 눈썹을 찌푸렸다.
“어느 댁 마님을 말하는 것이냐?”
계집종은 당황한 듯 말했다.
“아씨, 쇤네 향이입니다. 마님께서 오셨습니다.”
송진초는 향이의 시선을 따라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마차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의금부에서 자신에게 날카로운 말로 비수를 꽂던 조씨의 모습이 떠올라 온몸을 떨었다.
경거망동할 수 없었던 탓에 손에 든 주걱을 힘주어 쥐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천천히 다시 주걱을 들어 죽을 그릇에 담았다.
“다음 분, 오시게!”
“아씨,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미소를 짓던 송진초가 고개를 돌려 향이를 바라보았다.
“네가 말한 마님이 누군지 모르고 향이라는 자도 모른다. 사람을 오해한 것 같구나. 죽을 먹으려거든 줄을 서거라. 괜히 길을 막지 말고.”
향이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말했다.
“아씨, 어찌 친어머니조차 모르는 척하시는 겁니까?”
탁!
주걱이 바닥에 내리꽂히면서 둔탁한 소리를 냈다.
송진초가 격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헛소리냐! 우리 어머니는 3년 전에 아버지와 함께 돌아가셨다.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우리 어머니를 헐뜯는 것이냐!”
송진초의 고함에 천막 안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향이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잔뜩 겁을 먹은 향이는 뒷걸음질을 치며 물러섰다.
“저 계집이 삼 년 새에 날 죽은 사람 취급해?”
화가 난 조씨 부인은 마차 가림막을 걷어 올리더니 채찍을 들고 송진초에게 다가왔다.
“감히 날 저주하다니! 이런 불효녀를 봤나!”
조씨 부인은 채찍을 특히나 잘 휘둘렀다.
전에 송진초가 조씨 부인에게 채찍을 휘두르는 것을 가르쳐 달라고 간청했을 땐 단칼에 거절하던 조씨 부인이 송연이에겐 직접 만든 정교한 채찍을 선물했었다.
기다란 채찍이 허공을 한 바퀴 돌더니 무서운 기세로 송진초의 얼굴을 향해 내리꽂혔다.
그때 누군가 한 손으로 기다란 채찍 끝을 움켜쥐고 막았고 상대의 손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아재!”
송진초가 비명을 질렀다.
채찍을 잡았던 손을 놓자, 손바닥의 상처가 여실히 드러났고 피가 멈추지 않았지만, 제소는 괜찮다는 듯 송진초를 향해 고개를 흔들었다.
제소는 조씨 부인이 흔드는 채찍이 송진초의 얼굴을 공격하는 것을 보고 있을 수 없었다.
제소가 싸늘한 얼굴로 말했다.
“벌건 대낮에 감히 이곳에서 소란을 피우다니요!”
제소의 호통에 조씨 부인은 순간 움찔했다. 미처 이곳에서 그를 마주칠 줄은 몰랐지만 여기까지 온 목적이 가장 중요했기에 가슴을 펴며 대꾸했다.
“내가 누군지 잊은 것이냐? 감히 누구한테 큰소리더냐!”
제소가 인상을 찌푸렸다,
조씨 부인은 송진초에게 삿대질을 했다.
“송진초, 감히 송가 적녀 신분을 이용해 이런 천막을 차려도 된다고 누가 허락했느냐? 여봐라, 저것들을 당장 치우거라.”
“안 된다!”
송진초가 차가운 얼굴로 외쳤다.
조씨 부인이 그녀를 인정하지 않는 거로 보아 송연이로 자신의 자리를 대체하려는 게 분명해 보였다.
송진초도 더는 조씨 부인에게 미련 없었다.
“감히 내 말을 거역해?”
조씨 부인이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