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하얀 눈으로 뒤덮인 산 중턱에 송진초가 서 있었다.
전생에 경치가 빼어나기로 소문난 의주의 대범산에서 그녀는 삼 년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싸늘하게 불어오는 겨울바람에 정신을 차린 그녀가 옷을 여미며 뒤를 지키고 있는 자들에게 말했다.
“한 시진 후에 하산하여 종택으로 돌아갈 것이다.”
방 유모가 근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아씨, 본가는 불에 타 흔적도 찾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살아남으셨는데, 어찌 본가로 돌아가시려 합니까? 혹여 변고라도 당하시면 큰일입니다. 아씨께서 마음대로 하산하셨단 걸 마님께서 아시기라도 하시면 크게 노하실 터입니다. 하오니 마님께서 사람을 보내실 때까지 조금 더 기다리시지요.”
송진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전생에 방 유모와 계집종 취주를 데리고 한성으로 향하던 중, 마차가 고장이 나는 바람에 잠시 멈춰선 틈에 취주는 돌연 자취를 감췄고 송진초는 취주를 이틀 밤낮을 찾아다녔다.
그토록 찾아다녔던 취주를 다시 만났을 땐, 모든 것이 변해 있었다. 취주는 어느새 송연이의 곁에서 그녀를 송씨 가문의 적녀를 사칭한 자라며 몰아세웠다.
취주는 방 유모를 흘겨보며 말했다.
“마님의 서신이 오기 전까진 그 누구도 대범산을 벗어나선 안 됩니다!”
짝!
송진초는 손을 들어 취주의 뺨을 내리쳤다.
놀란 듯 뺨을 움켜쥔 채 아무 말도 잇지 못하는 취주의 목을 송진초가 힘껏 졸랐다.
“아… 아씨…?”
송진초가 싸늘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아직도 네 말을 따라야 하느냐?”
겁에 질린 취주가 고개를 젓자, 송진초는 손을 거두었다.
“떠날 채비를 하거라.”
한 시진 후, 세 사람은 산에서 내려왔고 유모가 마차를 부르려 하자 송진초가 이를 제지했다. 그녀는 직접 선친의 위패를 들고 걸어갈 생각이었다. 사람들에게 송씨 가문의 여식이 자신이라는 것을 알릴 것이다.
취주는 못마땅한 듯 투덜거렸다.
“아씨, 본가까지 족히 두 시진은 걸립니다. 여인의 몸으로 거리를 활보하다 무슨 변고라도 생기면 어찌합니까? 차라리 마차를…”
하지만 송진초의 서늘한 시선에 취주는 흠칫 놀라 입을 다물었다.
송진초는 옷 안에서 아버지의 위패를 꺼내 두 손으로 감싸안은 뒤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눈길 위를 걷다 보니 어느새 신발과 버선이 젖으면서 온몸으로 한기가 전해졌지만, 그녀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뽀얗던 살결은 바람에 불그스레 트였지만,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결연했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 보니 백성들도 자연스레 그녀에게 시선을 뒀다.
“저건… 송 대감 어르신의 위패 아닌가!”
곧장 장내는 소란스러워졌다.
“벌써… 삼 년이 지났구려.”
“좋은 분이셨으니 편히 가셨기를…”
길 양쪽으로 자연스레 비켜 줄 지어선 백성들은 눈시울을 붉히거나 조용히 흐느꼈다.
그녀의 선친께선 의주의 발전을 이끈 상인이며 백성들에게 무수한 선행을 베풀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선친에게 은혜를 입었다.
눈물 한줄기가 그녀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선친의 위패를 안은 그녀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이 불효녀 이제야 아버님을 모시고 귀가합니다. 아버님을 기억해 주시는 분들께 고개를 숙여 감사 올립니다.”
퍽, 퍽!
송진초는 이마를 바닥에 연이어 세 번 내리찍었다.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취주가 황급히 그녀의 팔꿈치를 잡았다.
“아씨, 백성들 앞에서 송가의 적녀인 것을 드러내시다니요?”
만일 조씨 부인의 귀에 이 소식이 들어간다면 취주는 아씨를 제지 못했다는 죄로 큰 벌을 받을 것이다.
“아씨, 어찌 이리도 무모하십니까?”
취주는 이를 악물고 송진초의 품에 있는 위패를 빼앗으려 했으나 송진초의 싸늘한 눈빛에 취주의 두 손이 얼어붙었다.
“아버지의 유일한 혈육인 내가 아버지를 모시고 종택으로 돌아가는 게 문제되느냐?”
살기 어린 기세에 취주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아씨, 오해 마시옵소서… 쇤네는 그저 혼자 남은 아씨께서 본가로 돌아가 봉변이라도 당할까 봐 염려되어 그런 것입니다.”
애써 화를 참은 송진초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선친의 위패를 품고 송씨 가문이 대대로 내려온 종택으로 향했다.
단출하게 수리된 종택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중년 남자가 허리를 굽힌 채 마당을 쓸고 있었다.
부들부들 떨며 다가온 남자는 위패를 발견하자마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이마를 박았다.
“소인 제소, 대감 어르신께 인사 올립니다.”
아버지께서 제소라는 자는 머리가 총명하여 장사치로만 두기엔 아깝다며 입버릇처럼 하셨던 말씀이 떠올랐다. 그녀 역시 제소라는 사람을 이곳에서 마주칠 줄은 몰랐다.
커다란 집안에는 어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가벼운 인사를 나눈 뒤 그녀는 선친의 위패를 사당에 모시고 향을 피우고 속으로 다짐했다.
반드시 송씨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고.
물끄러미 위패를 바라보던 제소가 목이 멘 소리로 말했다.
“대감께서 이리 떠나셨으니, 송가의 가산은…”
“아재!”
단호한 태도로 제소의 말을 자른 그녀는 문밖에서 눈치를 살피던 취주를 곁눈질하며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삼년상을 마쳤으니 이젠 선친께서 남기신 광산들을 맡아야 할 때가 온 것 같아요. 이리 돌아온 것도 송가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함입니다.”
제소는 놀란 눈으로 고개를 돌려 문밖에 있는 취주를 바라보더니 무언가 눈치를 챈 듯 거들었다.
“그리하셔야지요. 대감께서 생전에 이르시길, 유일한 후손인 아씨께 모든 가산이 돌아가야 마땅하다고 하셨습니다.”
행랑 아래에서 그림자가 움찔거렸다.
송진초가 말을 이었다.
“아버지께서 생전에 머무셨던 곳을 둘러보고 싶네요.”
“대감께서 머무셨던 곳은 쇤네가 매일 같이 쓸고 닦았으니…”
길을 안내하며 앞서 걸어간 제소를 송진초가 따라갔다.
그녀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취주를 지나치며 일러주었다.
“유모랑 함께 음식 준비를 하거라.”
송진초에게 목숨을 잃을 뻔했던 취주는 어쩔 수 없이 공손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화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마당은 뒷산의 대나무숲과 대조적이었다.
찬 바람이 불자 바스락거리는 대나무 소리가 적막을 깼다.
“아버님께서 가장 신뢰한 사람이라고 들었어요. 삼 년간 이 집을 지켜줘서 고맙습니다. 이번에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 것 같은데…”
“마님과 관련된 것이옵니까?”
송진초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소가 직설적으로 말했다.
“삼 년 전 그날 이후, 마님께서 의주에 있는 송가의 가산과 수백만 냥이 넘는 밭과 수십 개의 점포 그리고 장원을 시세보다 헐값에 팔아넘겼습니다. 대감 어르신께서 남기신 가산이 사라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어 그걸 쇤네가 몰래 되사들였습니다.”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급히 처분하여 제값을 받지 못한 것인가요?”
제소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반값에 처분했습니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굳게 쥐었다.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고통을 참으며 애써 이성을 되찾았다.
“대감께서 아씨께서 물으시는 것엔 한치의 비밀도 없이 전부 고하시라 하셨습니다. 송가의 사업은 의주는 물론 한성 곳곳에도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물론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자들이 극소수이고요.”
제소는 양지 옥패 하나를 공손하게 그녀에게 건넸다.
옥패에는 그녀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대감께서 남기신 송가의 명패입니다. 이것으로 아씨께서 이 집안의 모든 권한을 넘겨받으셨습니다.”
옥패를 넘겨받은 그녀의 눈가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몸을 살짝 숙이며 제소에게 고마움을 전하려 했다.
“아재, 고맙습니다.”
“아씨, 이러지 마십시오!”
“아재가 없었다면 송가의 가산은 이미 남의 손에 넘어갔을 거예요. 어찌 그 은혜를 잊을 수 있겠어요?”
그녀의 말에 제소는 어쩔 수 없이 인사를 받았다.
“집안의 가산은 아재가 계속해서 관리해 주세요. 관리해 줄 사람이 아재밖에 없어요. 가문이 이렇게 된 연유가 있을 겁니다. 이 집안의 무남독녀로서 그 비밀을 밝혀낼 것입니다.”
제소가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하시지요! 쇤네가 사람을 정확히 보았습니다. 과연 이 집안의 외동딸다우십니다. 대감 어르신께서도 이젠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겁니다. 아씨께서 개의치 않으신다면 이 미천한 한 몸을 바쳐 송가를 지킬 것입니다.”
“아재, 저한테 이리 예를 갖추지 마세요. 편하게 대해주세요.”
제소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조심스레 물었다.
“한성에 계신 마님을 찾으실 생각인지요?”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혼수를 챙겨 의주를 떠난 순간부터 우리와 연을 끊은 겁니다. 그러니 더는 이 집안의 마님도 아니지요.”
깊은 원한이 묻어나는 말에 제소도 말을 아꼈다.
“아재가 해줘야 할 일이 있어요.”
송진초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장 사람을 시켜 한성에 서신을 보낼 터이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고마워요.”
조씨 부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선 그녀의 약점을 잡아 세상에 알려야 한다. 자기 친딸조차 저버리는 조씨 부인의 냉혹함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