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가 고의로 번호판을 떼어냈는지 번호판이 없었다.‘진짜 번호판 없으면 차주를 못 찾아낼 줄 알았나? 헐...’이 아파트는 입주민의 차가 아니면 입구에 정보를 등록해야 들어갈 수 있다.만약 이 차가 이 동네의 것이라면, 정보를 빨리 찾아야 하고, 이 차가 밖에 있는 차라면 등록 정보도 볼 수 있다.그러나 이 사람이 신하린을 치어 죽이려 한 이상 틀림없이 가짜정보를 사용했을 것이다.또 다른 가능성은 동네 업주가 나서서 직접 차를 들여보냈다는 것이다.어떤 상황이든 그녀는 최단 시간 내에 차주 정보를 찾을 것이다.계속 조사하려던 중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와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컴퓨터를 껐다.“네.”일어나 문을 열자 남자의 다정한 눈매가 한눈에 들어왔다.심미연은 순식간에 마음이 편안해졌다.“벌써 다 했어? 가자,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뭐 좀 먹자.”심미연은 손을 뻗어 그의 팔을 잡고 아래층으로 걸어갔다.식탁 위에 만두 한 접시가 놓여 있었는데 냄새가 유난히 향기로웠다.“언제 만두를 빚었어?”심미연은 만두를 좋아하지만 냉동만두를 먹지 않는다. 그래서 매번 박유진이 직접 빚는다.“네가 외출한 후에 밀가루를 반죽해서 소를 다졌고 방금 다 빚었어.”전에 그는 밀가루를 반죽할 줄 몰랐는데, 후에 심미연이 만두를 좋아하는 것을 알고 배우기 시작했다.앞의 몇 번은 실패했지만 갈수록 솜씨가 점점 좋아져 지금은 만두를 빠르고 예쁘게 빚을 수 있었다.“오빠, 나한테 이렇게 잘해주지 마.”심미연은 마음속으로 감동했고, 눈에는 안개가 자욱했다.박유진은 그녀에게 이렇게 잘해 주었지만 그녀는 보답할 방법이 없었기에 이런 다정함이 불안했다.“내가 너에게 잘해주는 건 네 보답을 원하는 게 아니야. 그러니 부담을 가질 필요 없어.”박유진은 손을 내밀어 그녀를 대신해서 눈물을 닦았다.“빨리 앉아서 만두를 먹어. 식으면 정말 맛이 없거든.”그는 심미연을 좋아하고, 심미연에 잘해주는 것에 대해 여태껏 그녀에게 보답받을 생각을 한 적이 없다.심미연은 앉
그는 걸어가서 그녀의 곁에 앉았다.마음이 평온하기만 하고 편안해지며 그녀가 곁에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정말 좋았다.이튿날 아침 일찍 눈을 뜬 심미연은 습관적으로 손을 뻗어 기지개를 켜다가 주먹으로 한 사람을 때렸다.순간 심미연은 멍해졌다.“깼어?”곧 그녀는 다정한 눈동자를 마주했다.“오빠, 왜 내 침대에 있어?”그녀는 어젯밤에 소파에 누워서 잠들었는데 그 후의 일은 기억하지 못했다.“네가 잠들어서 내가 안고 올라갔어. 그런데 침대에 내려놓으니 네가 내 허리를 안고 가지 못하게 해서 나도 어쩔 수 없이 남아 있은 거야.”박유진이 온화한 어투로 말했다.“어젯밤에 늦게 잤는데 좀 더 자. 나는 먼저 일어나서 아침을 만들게. 음식이 되면 올라와서 깨울게.”심미연이 말을 하려고 할 때 휴대폰이 울렸다.그녀는 서둘러 휴대폰을 들고 통화버튼을 눌렀다.“심미연 씨, 빨리 와요. 신하린이 깨어났어요. 지금 화를 내고 있는데 나 혼자서는 도저히 통제할 수 없어요.”전화기 너머로 이진영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심미연은 놀라 일어나 앉았다.“알았어요, 금방 갈게요.”그녀는 마취제의 효과가 이렇게 빨리 지나갈 줄 몰랐다. 그녀가 소홀히 한 것 같다.전화를 끊은 심미연은 급하게 침대에서 내려왔다.“일어나지 말고 좀 더 자. 난 지금 서둘러 병원에 가야 해. 신하린의 상황이 안 좋아.”그녀는 말하면서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침대 위에 있던 박유진은 얼른 일어나 아래층으로 내려가 주방으로 갔다.심미연이 가방을 메고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박유진은 보온통 하나를 들고 문 앞에 서 있었는데 매트에는 흰 신발 한 켤레가 놓여 있었다.심미연은 마음속으로 어떤 느낌인지 말할 수 없었다. 그녀는 숨을 들이마시고 성큼성큼 걸어가 슬리퍼를 벗고 흰 신발로 갈아신은 뒤 손을 뻗어 보온통을 받았다.“가자, 내가 차로 데려다줄게. 마침 차에서 음식을 먹을 수 있어.”심미연은 그제야 박유진이 옷을 갈아입은 것을 보았다.‘참 빠르네.’차에 오른 심미연이 보온통을 열
심미연은 놀라 물었다.“뭐라고 했어요?”임현은 심호흡을 하고서 더 강한 말투로 말했다.“강지한 대표님께서 저에게 심태하를 빼앗을 소송을 부탁했어요.”그제야 똑똑히 들은 심미연은 마침내 반응을 보이며 안색이 냉랭해졌다.“다른 사람을 섭외해 내 아들을 빼앗으라고 하세요. 그때가 되면 난 재판 현장을 생방송으로 진행해 달라고 신청할 거예요. 내가 어떻게 강지한 대표가 경성시에서 쪽팔리게 하는지 두고 보라고 하세요.”강지한이 무슨 염치로 그와 아들을 빼앗겠다고 하는가!“저는 이미 대면으로 거절했어요. 그랬더니 제가 경성시 변호사계에서 발을 붙이지 못하게 만들겠다고 큰소리쳤어요.”이젠 변호사계에서 명성을 떨친 고급 변호사이고 연봉도 낮지 않았던 임현은 강지한이 수작을 부릴까 봐 두려워하지 않았다.더군다나 그녀의 배후에는 심미연이 있으니 겁먹을 필요가 없었다.“마음대로 하라고 하세요! 어떻게 망신시키는지 똑똑히 보여줄 거예요.”심미연은 쌀쌀하게 웃었다.“또 임현 씨를 찾아오면 직접 나를 찾으라고 하세요.”심미연은 강지한이 얼마나 파렴치한지 보려고 했다.온지유를 위해 그녀를 여러 번 모함했고 결국 가짜 죽음을 통해서야 탈출할 수 있었다.너무 역겨웠다.“변호사님,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무조건 변호사님 편이에요.”임현이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은 변호사님이 주었는데 은혜를 원수로 갚을 수 없었다.“네. 알고 있어요. 저는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이만 끊을게요.”심미연은 말을 마친 후 전화를 끊고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이때 차 안에 앉아 있던 박유진은 휴대폰이 울리자 통화 버튼을 눌렀다.비서의 목소리가 전해졌다.“박 대표님, 방금 강 대표님 쪽에서 태하 도련님의 양육권을 빼앗기 위해 소송을 준비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박유진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비아냥거리는 웃음을 지었다.“그래, 알았어.”‘강지한이 심태하를 빼앗으려 한다고? 네 딴 데 뭔데?’“회사에 급히 사인해야 할 문서가 있는
이진영이 대답했다.“담배 피우러요.”마음속의 괴로운 감정은 도저히 억누를 수 없었다.심미연은 알았다고 하며 이진영이 떠나가게 놔두고는 성큼성큼 병상으로 걸어가 신하린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모습을 보고 마음이 미어지게 아팠다.“하린아.”심미연은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신하린도 울었다.“미연아, 난 이젠 폐인이 됐어.”“아니야, 넌 폐인이 아니야. 넌 다시 일어설 수 있고 정상인처럼 걸어 다니며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어.”심미연이 위로했다.“난 다리가 없어.”앞으로 의족을 한다고 해도 그녀는 보통 사람처럼 짧은 치마와 반바지를 입을 수 없었고 생활도 불편해질 것이다.“하린아...”심미연은 그녀를 꼭 껴안고 마음속으로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심태하가 깨어나 보니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침착하게 세수하고는 냉장고에서 빵과 우유를 꺼내 먹은 후 위층에 올라가서 짐을 챙겼다.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왔을 때 그는 거실에 박유진이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멍해졌다.“아빠, 일하러 가지 않았어요? 어떻게 돌아왔어요?”예전에 엄마 아빠는 일이 바쁠 때 항상 그를 집에 두고 혼자 놀게 했다.그래서 깨어나 보니 집에 그들이 없는 것을 보고 심태하는 바쁜 일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오늘은 처음 유치원에 가는 날이니 당연히 데려다줘야지!”박유진은 그가 책가방을 메고 있는 것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책가방도 다 준비했어? 참 잘하네.”심태하는 2살 때부터 혼자서 샤워하고 세수하며 양치했을 뿐만 아니라 옷도 정리했다.3살이 된 그는 자립 능력이 아주 훌륭했다.노인들은 늘 한 아이가 너무 총명하고 유능하면 빨리 하늘나라로 간다고 말하곤 한다.그래서 심미연은 이렇게 대단한 능력을 갖춘 아들을 보고 늘 불안해했다.오늘 유치원에 가야 하는 줄 몰랐던 심태하는 원래 강지한을 찾으러 갈 계획이었다. 그의 가방에는 노트북과 휴대폰이 담겨 있었다.그러나 심태하는 곧 침착하게 웃으며 박유진을 보며 부드럽
유치원에서 심태하는 착했고 말도 잘 들었으며 점심을 먹은 후 낮잠을 자기 시작했다.어떤 아이들은 자지 않으려고 훌쩍거렸고 어떤 애들은 분유를 마셔야 잠을 잘 수 있었다.세 명의 선생님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심태하는 선생님이 방심한 틈을 타서 가방을 메고 조용히 교실을 나섰다.오후의 햇살이 듬성듬성한 구름에 가려져 얼룩덜룩한 그림자를 드리워 더욱 조용하고 신비로워 보였다.심태하는 혼자 학교를 걷고 있었다.마침내 그는 교실에서 멀리 떨어진 모두에게 잊힌 것만 같은 구석을 찾았다. 그곳에는 잡초가 무성했고 갈라진 바닥 사이로 들꽃이 고개를 내밀며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그가 왜 왔는지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심태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어깨에 메고 있던 약간 무거워 보이는 책가방을 내려놓았다. 그 안에는 장난감이 든 게 아니라 가볍지만 강력한 공능을 가진 휴대용 컴퓨터가 들어 있었다.그의 동작은 전쟁터를 오랫동안 겪은 병사처럼 신속하고 숙력되었다. 손가락으로 전원 버튼을 살며시 누르니 화면이 밝아지면 어두운 구석에서 청자색 빛이 유난히 빛났다.심태하의 눈빛은 순식간에 날카로워졌는데 마치 전 세계의 소란은 이미 차단되고 그와 눈앞에는 코드 세계만 남은 것 같았다.키보드는 그의 손끝에서 점프하며 매번 두드릴 때마다 가벼운 ‘다다다’ 소리가 함께 울려 퍼졌고 이 조용한 공간에서 더욱 잘 들렸다. 이 소리는 마치 전쟁터에서 울리는 북소리처럼 알 수 없는 긴장감과 자극을 불러일으켰다.화면에는 줄줄이 코드가 물 흐르듯 나타났다가 곧 새로운 지시에 덮어졌다. 이것은 그의 지혜와 노력의 결과로서 소리 없이 수많은 미지의 기적을 쌓고 있었다.심태하는 미간을 찌푸렸다가 펴기도 하며 자신의 세계에 완전히 빠졌다. 가끔 미풍이 불어와 주변의 나뭇잎들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는데 마치 그의 이 특별한 ‘일’을 응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여기서 시간은 마치 의미를 잃은 것 같았는데 그저 화면에 있는 커서만 계속 반짝이
그 사람은 강 대표의 라이벌일까?이런 말을 성무진은 감히 강 대표님에게 할 수 없었다. 말만 하면 노발대발할 것이 분명했으니 말이다.지금 회사 내부에서는 새로운 상황이 계속 전해지고 있으며 손실도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강지한은 주먹을 불끈 쥐고 눈빛이 횃불처럼 밝아졌다. 사무실 안을 이리저리 거닐다가 그는 창가에 서서 시끌벅적한 도시를 굽어보며 지난번 사이버 공격을 받았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는 공격이 자동으로 풀리면서 회사는 거의 손실을 보지 않았다.그러나 이번 공격은 기세가 등등했고 회사의 손실은 적어도 백억을 넘었을 것이다.시간이 생명이다. 그는 1초의 망설임이라도 회사를 더는 회복할 수 없는 심연 속으로 밀어 넣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해커를 찾아봐. 반드시 반 시간 내에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 해. 값은 그가 부르는 대로 준다고 해.”강지한의 말소리는 마치 이빨 사이로 밀려 나오는 것처럼 낮고 단호해서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결단력을 보여주고 있다.성무진은 알았다고 대답하며 사무실에서 나와 사람을 찾으러 갔다.50분이 흘렀을 때 심태하는 메일을 한 통 받았다. 메일을 다 읽어본 그는 400억을 십분 안에 준비하라는 회신을 보냈다. 먼저 200억 예약금을 내고 일을 완성한 다음 나머지 200억을 내라는 내용이다.‘흥, 엄마에게 미안한 짓을 하고 괴롭힌 대가야. 400억은 작은 벌에 속할 뿐이야.’성무진이 메일 내용을 강지한에게 알려주자 그는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이제야 그는 이름을 S라고 지은 이 해커가 일부러 그를 함정에 빠뜨렸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이제 증거를 찾으면 꼭 돈을 되돌려받을 뿐만 아니라 감옥에 보낼 것이라고 다짐했다.성무진은 가장 빠른 속도로 돈을 해커의 계좌로 보냈다. 그 해커는 돈을 받자마자 처리하기 시작했다.시간이 1분 1초씩 지나갔고 1초가 무한히 길게 느껴졌다. 마침내 9분 59초가 되었을 때 원래 혼란스럽게 흘러 다니던 데이터가 기적처럼 안정되었고 하나씩 제자리로 돌아갔다.마지막 방화벽도
신하린은 고개를 끄덕였다.“빨리 우리 양아들 찾으러 가봐! 난 바보짓을 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다녀와.”아까 오른쪽 다리가 텅 빈 것을 발견했을 때 신하린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다른 사람의 이상한 눈빛이 두려웠고 그녀를 장애인이라고 부를까 봐 두려웠다.그녀는 살아갈 용기마저 잃었다.그러나 이때 심미연은 다른 사람의 눈빛 따위에 신경 쓰지 말고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어쩐지 맞는 말인 것도 같았다.신하린은 그녀가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알았어. 나 먼저 갈게.”심미연은 아들이 걱정되어 더 말하지 않고 곧장 떠났다.계단을 내려갈 때,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박유진에게 전화했다. 심태하가 실종됐다고 말하자 휴대폰 너머로 그의 목이 멘 목소리가 들려왔다.“걱정하지 마. 태하는 괜찮을 거야! 똑똑한 아이니까 속임수에 걸려들지 않을 거야. 지금 어디지? 내가 데리러 갈게, 함께 유치원으로 가보자.”오늘따라 심태하가 너무 얌전해서 꼭 사고를 칠 거로 생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사고가 발생했다.“아니야, 난 직접 갈 테니 오빠도 빨리 학교로 곧장 와!”심미연은 전화를 끊은 후 미간을 찌푸리며 피곤한 생각이 들었다. 심태하가 그를 찾게 하지 않으려 한다면 아마 학교의 감시 시스템에도 손을 썼을 것이다.아이가 너무 똑똑해도 골치가 아팠다.그녀는 제일 빠른 속도로 운전해서 학교에 갔다.선생님은 그녀를 보자 연신 사과했다.“태하 어머니, 미안해요. 우리가 소홀했어요. 아이를 잘 돌보지 못했어요.”만약 아이가 정말 사고라고 생긴다면 그녀들의 책임은 정말 컸다.가장과 소통이 잘 되면 그나마 괜찮지만 소통이 잘 안 되면 그때는 분명히 큰 소동이 벌어질 것이다.유치원도 블랙리스트에 오를 것인데 그러면 모두 일자리가 없게 된다.“감시실로 데려가 주세요.”심미연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차갑게 말했는데 그 기세가 대단했다.그중 한 선생님이 손을 내밀어 방향을 알려주면서 말했다.“저희도 감시 모니터를 통해
심미연의 긴장됐던 마음이 그제야 풀리며 마음속에서는 쓰고 떫은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웅크리고 앉아 아들의 나른한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박유진도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부드럽고 시름을 놓은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이 순간, 혼란스럽고 걱정했던 마음이 눈앞의 따뜻하고 평화로운 모습을 보자 사르르 녹았다.눈앞의 그림자를 느낀 심태하는 부드러운 소용돌이에서 눈을 떴는데 마침 낯익고 엄숙한 얼굴이 보였다. 그제야 자신이 한 일이 생각난 심태하는 놀라서 가슴이 세차게 두근거려 얼른 낮은 소리로 불렀다.“엄마...”그의 목소리는 아직 덜 깨어있어 멍했고 그녀에 대한 의지가 섞여 있었다.심미연은 그의 외침에 눈가가 붉어졌다. 오랫동안 쌓아둔 감정이 돌파구를 찾은 것 같았으나 이내 억누르고는 엄숙하게 꾸짖었다.“심태하! 누가 너더러 함부로 뛰어다니라고 했어? 너 때문에 전체 유치원의 직원들이 손에 하던 일을 내려놓고 널 찾으러 다녔어! 나와 네 아빠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그녀의 단호한 목소리에는 분노와 걱정이 섞여 있었고 말마디마다 무거운 방망이처럼 심태하의 마음을 두드렸다,주변의 공기가 굳어진 것 같았다. 심태하는 그제야 자신이 따듯한 꿈나라에 있는 게 아니라 다양한 표정을 한 사람들에게 단단히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알았다.심태하는 저도 모르게 몸을 파르르 떨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이 낯설지만 익숙한 얼굴들이 밀물처럼 밀려와 그를 파묻었다.그제야 그는 자신의 순간적인 충동이 얼마나 큰 문제를 일으켰는지 깨닫고는 마음속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죄책감이 들며 자책했다.“미... 미안합니다...”심태하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았지만 그는 마음속으로 뉘우치며 사과했다. 이 다섯 글자는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듯했고, 성의와 후회로 가득 차 있었다.그는 심미연을 바라보았는데 비난과 걱정이 가득한 눈빛을 보며 그는 더더욱 어찌할 바를 몰랐다.심미연은 표정이 약간 사그라들었지만 눈빛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그녀는
심미연은 흩날리던 생각을 차분히 거두고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궁금한 듯 물었다.“우리 태하 진짜 똑똑하네. 어떻게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는 거야?”아직 겨우 세 살이지만 심태하의 마음은 놀랄 만큼 세심하고 예민했다. 또렷한 눈망울은 마치 세상의 감정 흐름을 꿰뚫어 보는 듯했고 그렇게 꼼꼼히 살피는 모습에 심미연은 종종 놀라곤 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박유진이 심태하를 정성스럽게 길러온 시간이 아이를 이토록 똑똑하고 배려 깊게 자라게 만든 것이다.“아까 아빠랑 통화할 때 엄마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어요. 뭔가 걱정하는 게 있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저한테 말 걸었을 때도 평소처럼 웃고 있지 않았어요. 그래서 엄마가 혹시 슬픈 건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어요.”심태하의 말은 또렷하면서도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 단어 하나하나에 엄마를 향한 깊은 애정과 이해가 담겨 있었다.심태하가 보기에 박유진이 집에 있을 땐 심미연은 늘 기분이 좋아 보였고 환하게 웃는 얼굴이 참 예뻤다.“엄마가 안 웃었어?”심미연은 웃음을 터뜨렸다.‘녀석, 정말 못 말려.’겨우 세 살에 이 정도인데 나중에 더 크면 얼마나 영리해질지.“네, 안 웃었어요.”심태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엄마, 아빠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심태하의 목소리는 여전히 앳됐지만 말투는 왠지 어른스러웠다. 꼭 사람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있기라도 한 듯했다.심미연의 마음은 그 말 한마디에 확 풀렸다. 그녀는 아들의 코끝을 살짝 잡아당기며 말했다.“자, 얼른 아침 먹자.”그녀의 말투엔 아낌없는 사랑이 담겨 있었다.이 아이는 정말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다.“아빠가 보고 싶으면 아빠한테 전화하면 되죠!”심태하가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윙크했다.‘나도 아빠가 보고 싶은데 엄마가 안 보고 싶을 리가 없지. 맞아, 분명 그럴 거야!’심미연은 그 말에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네 말대로 할게.”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물론 박유진이 보고 싶지만 그에게 전화하진
하지만 그 깊은 애정과 놓기 싫은 마음은 오히려 박유진을 현실이라는 갈림길 앞에서 망설이게 만들었다.그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지금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심미연만 괴로운 상황에 빠질 것이라는 걸. 그 맑고 투명한 눈동자가 자신의 망설임으로 인해 흐려지는 건, 그녀의 세상이 자신 때문에 흔들리는 건 차마 보고 있을 수 없었다.그렇다고 그녀를 놓아버리면 영원히 잃게 될 텐데... 그 아픔을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지 박유진 본인조차 알 수 없었다.“아빠, 왜 말이 없으세요? 허락한 거죠?”심태하의 목소리는 천진난만하게 들떴다. 마치 머릿속에 따뜻한 한 가족의 그림이 그려지기라도 한 듯.‘아빠가 돌아오면 엄마랑 나랑 셋이 모여 저녁 먹고 같이 웃고 얘기하고...’심태하의 마음속에서 그려낸 가장 순수한 행복의 모습이었다.그러나 그 순수한 소망 앞에서 박유진의 마음은 송곳에 찔린 것처럼 아팠다.그는 알고 있다. 이번 결정을 가볍게 내려서는 안 된다. 누구도 상처받지 않게 하려면 정말 신중해야 했다.하지만 사랑과 책임 사이에서 그가 걸어갈 수 있는 길은 대체 어디란 말인가? 그는 지금 사랑을 저버리지 않으면서 심미연과 아이를 지킬 방법을 찾고 있다.하지만 그런 길이 과연 있을까? 이 선택은 너무나도 어려웠다.“아빠, 나 이렇게 열심히 얘기하고 있는데 왜 아무 말도 안 해요?”심태하는 고개를 갸웃하며 미간을 찌푸렸다.평소 같았으면 박유진은 재밌는 얘기도 해주고 자기 말에 웃어주었을 텐데, 오늘따라 너무 이상했다.‘혹시... 내가 말실수했나?’그때 박유진의 다급하지만 부드러운 목소리가 심태하의 귀에 들려왔다.“태하야, 곧 비행기가 이륙해서 아빠가 휴대폰을 꺼야 돼. 오늘 밤에 다시 이야기하자. 꼭이야.”박유진은 심미연을 당장이라도 보러 가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눌렀고 말하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네! 알겠어요, 아빠! 그럼 오늘 밤에 꼭 통화해요. 약속했으니까 안 하면 안 돼요!”심태하의 목소리에 눈치채기 힘든 외로움이 살짝 섞여 있었다.
심미연은 멍해졌고 아까 자신이 박유진에게 연락을 시도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대신 날아온 건 단 한 줄의 차갑고 무미건조한 메시지. 기대했던 목소리는 끝내 들을 수 없었다.그런데 지금 아들 심태하가 전화를 걸자 박유진은 놀랍게도 전화를 받았다.“아빠, 지금 어디예요? 이틀 뒤면 제 생일이에요! 아빠가 놀이공원 같이 가자고 했던 거 잊으시면 안 돼요!”심태하의 말투엔 아이 특유의 해맑은 기쁨이 가득 담겨 있었고 단어 하나하나가 살아서 튀어나오는 듯했다.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박유진의 목소리는 한겨울 얼음도 녹일 만큼 다정했다.“아빠 지금 진성으로 가는 비행기 타러 가는 중이야. 곧 이륙이라 휴대폰 꺼야 해. 진성에 도착하면 바로 전화할게. 약속!”그 말에는 미안함과 애틋함이 가득 실려 있었다.사실 박유진은 심태하가 생일 이야기를 할 줄은 전혀 예상 못 했다. 어젯밤에 워낙 정신이 없어 그런 중요한 약속마저 깡그리 잊고 있었던 것이다.“아빠가 보내준 선물 잘 받았어요! 너무너무 마음에 들어요, 고마워요!”심태하는 아직 다 하지 못한 말이 많은 듯 아빠에게 털어놓고 싶은 게 가득한 눈치였다.박유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는데 햇살이 쏟아져 내려 유난히 눈부셨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가늘게 떴고 그 강렬한 빛이 속눈썹 아래에 그림자를 드리웠다.그 순간 그의 마음속엔 오로지 한 사람, 심미연의 얼굴만이 떠올랐다. 그녀와 떨어져 있는 모든 시간이 하나같이 그리움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 그리움이 너무 커서 박유진은 당장이라도 비행기에서 뛰어내려 달려가고 싶을 만큼 벅찼다.“아빠... 지금 너무 힘들죠? 그럼 회사 팔고 그냥 집으로 돌아와요. 제가 돈 많이 벌어서 아빠랑 엄마 다 먹여 살릴게요!”심태하의 순수한 눈빛에 진심 어린 다짐이 담겨 있었다. 그에겐 돈을 많이 벌어서 가족을 지킬 거라는 꿈이 있었다.심미연은 그런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통통한 볼살에 아직 아기 티가 남았지만 심태하의 마음속
심미연 역시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이지연이 잘못 알아본 것일 수도 있기 때문에 확신이 서지 않았다.“지연 씨, 다시 한번 제대로 확인해 봐요. 결과가 똑같은지 꼭 잘 봐요.”혹시라도 착오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그럼 제가 다시 확인해 볼게요! 뭐든 나오면 바로 보고드리겠습니다. 보스, 그럼 끊을게요!”이지연은 말 끝나기가 무섭게 전화를 뚝 끊었다.심미연은 휴대폰을 쥔 채 한참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까 이지연이 했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이건명과 문소영이 예전에 그런 사이였다고?’그런데 왜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걸까? 아무도 깊게 파고들지 않았기에 묻혀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결혼 전에 누굴 만나든 그건 사생활인데 그걸 굳이 숨긴 이유가 뭘까?심미연이 이 모든 게 어딘가 석연치 않다고 느끼고 있을 즈음, 밖에서 누군가 소리쳤다.“엄마! 나 배고파요! 우리 빨리 아침 먹으러 가요!”심미연은 생각을 접고 고개를 들어 활짝 웃는 아들을 바라봤다.“그래, 가자.”심태하가 달려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엄마, 며칠 뒤면 제 생일이잖아요. 생일 파티에 상미도 초대하고 싶은데, 그래도 돼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젯밤의 친자 확인 결과가 떠올랐다. 강상미는 그녀의 딸, 즉 심태하와 쌍둥이였다. 그래서 둘의 생일도 당연히 같았다.심태하의 생일 파티에 강상미가 온다면 그건 곧 둘이 같이 생일을 보내게 되는 셈이다.“엄마, 안 돼요?”심미연이 대답하지 않자 심태하가 다급히 물었다.그녀는 웃으며 아이를 안심시켰다.“그럼, 당연히 초대해야지. 너희 둘이 같이 생일 파티하면 되겠네.”“정말요? 엄마 최고! 사랑해요!”심미연은 아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태하야, 너 엄마가 어제 말한 거 잊은 거 아니지? 상미가 바로 태영이야. 너랑 똑같이 엄마 배에서 나왔고 너희 둘은 쌍둥이야. 그래서 생일도 똑같아.”강상미에 관한 일은 이미 방원호에게 조사를 맡긴 상태였다. 꼭 알아내야 한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심미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한 기색을 담아 물었다.“무슨 일이길래 그래요?”이지연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일부러 속도를 늦추며 차분하게 말했다.“온지유 씨가 도망쳤어요.”“언제요?”심미연의 눈빛이 반짝이며 날카로워졌다. 누가 이 일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스쳤다.“어젯밤에요.”이지연의 목소리는 한껏 가라앉아 있었고 자책감이 가득 배어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방심했어요.”심미연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미안해하지 마요. 이건 지연 씨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이지연은 입술을 꼭 깨문 채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제가 당장 찾아올까요?”심미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휴대폰을 천천히 만지며 생각했다.“잠깐만 생각 좀 해볼게요.”어젯밤 강지한이 교통사고를 당한 장면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혹시 온지유의 실종과 강지한이 관련 있는 걸까? 만약 강지한이 온지유를 구한 거라면 도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은 거지? 끝도 없이 밀려드는 의문들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참, 보스. 어젯밤에 스승님 못 보셨어요?”이지연이 물었다.심미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사실은 봤었다. 그녀는 진운혁이 차를 몰고 떠나는 걸 보고 따라붙었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그럴 리가요? 제가 분명히 확인했는데... 스승님께서 이진영 씨랑 같이 식사하고 계셨어요!”이지연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심미연은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렸다.문득 이전에 마주쳤던 진운혁의 모습들이 떠올랐고 그 순간 한 가지 의심이 그녀의 마음속을 훑고 지나갔다.‘그때 내가 본 스승님은... 정말 스승님이 맞았을까? 만약 누군가가 스승님을 사칭하고 있었다면 그 목적은 대체 뭘까?’그때 이지연의 흥분한 목소리가 심미연의 생각을 끊어냈다.“보스! 새로운 정보를 발견했어요!”“무슨 정보예요?”심미연은 본능적으로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귀를 기울이자 이지연의 들뜬 목소
백선영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진은숙의 팔을 살짝 끌어당기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이제 가요.”진은숙은 손바닥 위에 놓인 봉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망설이면서 입을 열었다.“이건... 어쩌죠?”백선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 난처한 상황을 심미연에게 넘기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봉투를 조심스럽게 심미연 앞에 내려놓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모님, 마음은 충분히 받았지만... 이 돈은 받을 수가 없어요.”심미연은 미소를 지으며 눈길을 봉투 위로 흘렸다.“오빠가 직접 드린 건데 마음 편히 받으세요. 저한테 돌려주실 필요는 없어요. 자, 얼른 가서 일 보세요. 저 벌써 배가 고파졌는걸요.”그러나 말하다가 알 수 없는 서운함이 스르르 마음 한쪽에 올라와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박유진은 예전에 밤하늘을 보며 수없이 약속했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그녀와 아이를 평생 지키겠다고. 그런데 지금 그 약속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금세 꺼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오빠, 나랑 약속한 거 잊은 거야?’“정말 감사합니다, 사모님! 사모님과 사장님 두 분 다 참 요즘 보기 드물게 좋은 분들이세요. 두 분, 좋은 일만 가득하시고 영원히 행복하시길 빌게요!”진은숙은 기쁜 얼굴로 연신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 백선영의 팔을 붙잡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오늘 정말 행운이 따랐다 싶었다. 이렇게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다니.심미연도 가볍게 한숨을 쉬고 나서 주방으로 들어가 컵에 따뜻한 물을 따라 목을 축였다. 어쩐지 목이 바싹 마른 게, 감정이 몰려서 그런 걸까.막 물을 다 마셨을 무렵 문밖에서 귀엽고 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 어디 있어요?”그 소리는 마치 봄날에 막 피어난 꽃처럼 듣는 사람 마음을 몽글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심미연은 표정이 풀렸고 얼른 얼굴을 내밀며 따뜻하게 웃었다.“우리 태하, 엄마 여기 있어!”심태하는 쏜살같이 달려와 그녀 품에 안겼다.“엄마, 아빠가 나 버렸어요!”심미연은 깜짝
백선영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모깃소리만큼이나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사장님께서 떠나시기 전에... 집에 안 계시는 동안 꼭 사모님과 도련님을 잘 챙기라고 당부하셨습니다.”진은숙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맞아요, 맞아요! 사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바로 캐리어 들고 곧장 나가셨거든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마음속으로 박유진의 말뜻을 곱씹어 보았지만 마치 안개 속을 걷는 듯 선명하게 와닿지 않았다.“그런데요, 사모님...”진은숙이 심미연을 흘끗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눈빛에는 망설임과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왜 그러세요?”심미연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지만 말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언제나 그래왔듯 도우미 아주머니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었고 태도가 마치 봄바람처럼 따뜻하고 너그러웠다.진은숙은 잠시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더니 마음을 굳힌 듯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어젯밤에 제가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러 나왔는데 계단 모퉁이에서 사장님을 마주쳤었어요. 사장님도 물 마시러 나오신 것 같았어요.”곁에 서 있던 백선영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저도요!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길래 문 열고 나왔더니 사장님이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계셨습니다.”심미연은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어젯밤에 오빠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진은숙은 마음을 가다듬고 이어서 말했다.“불빛이 비쳐서 얼핏 봤는데 사장님 눈가가 벌겋게 부어 있더라고요. 꼭 방금 울기라도 한 사람처럼요. 아마 제가 눈치챌까 봐 인사만 툭 하고는 곧장 자리를 피하셨어요. 전 그냥 물만 마시고 방으로 돌아갔는데 보니까 사장님은 그 자리에 그대로 멍하니 서 계셨어요. 제가 방에 들어간 뒤에도 안 들어오시더라고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덧붙였다.“오늘 아침에 사장님께서 나가신 뒤에 서재를 청소하러 들어갔는데 휴지통에 담배꽁초가 가득 쌓여 있었어요. 어젯밤 내내 잠도 못 주무시고 담배만 피우셨던 것 같아요..
휴대폰 화면이 켜지고 그 익숙하면서도 가슴을 죄는 번호가 뜨는 순간, 박유진의 심장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움켜잡힌 듯 조여들었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속에서 일렁이며 축축한 솜처럼 뭉쳐져 목덜미를 틀어막았고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말은 더더욱 나올 리 없었다.그 번호는 마치 꿈결 속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유령처럼 소리 없이 다가와 그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의 고통과 갈등을 다시 불러냈다.박유진은 손을 떨며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다가 한참을 망설인 끝에 결국 전화를 받지 않기로 했다.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공기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긴장감과 묘한 압박이 가득했다. 박유진은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고 손끝으로 천천히 휴대폰 키보드를 두드려 문장을 써 내려갔다.[진성에 가서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돌아가면 다시 이야기하자. 그래도 되지?]그 메시지엔 그의 복잡한 심경이 담겨 있었다. 현실을 피하고 싶은 마음도, 언젠가 다시 마주하길 바라는 희미한 기대도 모두 그 짧은 문장 안에 섞여 있었다.메시지 전송을 마친 박유진은 망설임 없이 전원을 꺼버렸고 휴대폰을 한쪽으로 툭 던졌다. 마치 그렇게 하면 마음속 어지러운 생각들까지 함께 던져버릴 수 있을 것처럼.주변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텅 빈 공간엔 그의 심장 뛰는 소리만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규칙적이고도 묵직한 박동이 마치 그 존재를 스스로 확인하려는 듯했다.박유진은 눈을 감았다. 피로한 몸은 본능적으로 가장 편한 자세를 찾아갔고 그 짧은 정적 속에서 조금이나마 위로를 찾고자 했다.비록 밤새 한숨도 못 잤고 눈은 충혈되어 있었지만 정신만큼은 유난히 또렷했다.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지탱해 주듯 그는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하지만 피하고 싶을수록 심미연의 모습은 그의 머릿속에서 더욱 선명해졌다. 그녀의 미소는 때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순수하고 따스했으며 때로는 눈빛 하나로도 사람 마음을 뒤흔드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또 부끄러워하던 그 순간순간들
박유진은 자신의 앞날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심미연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는 언제나 그녀의 편이 될 것이란 사실.만약 그녀가 아이를 데려오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그는 가진 것을 다 내어주어서라도 그녀를 돕고 그 아이를 보살필 것이다. 마치 자신의 친딸인 양 지극정성으로.박유진은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은 심미연을 사랑하고 그녀의 아이와 그녀가 지닌 모든 것을 함께 안아줄 준비가 되어 있음을.심미연의 눈가는 어느새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녀의 두 손은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살고 싶어서 지푸라기를 붙잡고 있는 것처럼 박유진의 옷깃을 꼭 움켜쥐었다. 수많은 감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그녀가 박유진에게 진 빚은 너무나도 많고 무거웠다. 그 빚을 다 갚기 위해서는 평생이라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몰랐다.“시간이 늦었으니까 이젠 좀 쉬어. 나도 방으로 돌아갈래.”박유진의 목소리엔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미세한 떨림이 묻어났다. 그는 본능적으로 심미연을 더욱 꼭 안았다. 마치 그녀를 자신 뼛속 깊이까지 끌어안고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어쩌면 이 다정함이 그들 사이 마지막 남은 따뜻함이 될지도 모른다...박유진의 마음속은 쓸쓸함으로 가득했다. 머릿속 이성은 매서운 바람처럼 그를 휘감으며 이제는 놓아줄 때라며 끊임없이 속삭였다.하지만 감정은 뿌리 깊은 덩굴처럼 박유진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얼마나 바랐던가. 단 한 순간이라도 더 심미연의 곁에 머물 수 있기를. 이 찰나의 시간이 남은 생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만 있다면...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박유진의 얼굴을 어루만졌고 그녀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박유진의 마음속 한기를 모두 녹이는 듯했다.심미연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부드럽게 말했다.“이생에 오빠를 만나 알아가고 수많은 인파를 뚫고 함께 걸을 수 있었던 건... 정말 큰 복이었어. 앞으로 어떤 길을 가더라도 우리 손 놓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