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든 그녀는 심미연을 믿었다. 믿지 못한 건 자신이었다. “자, 이제 앉아서 다시 얘기해 봅시다.” 심미연은 커피잔을 들고 숟가락으로 천천히 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네.”임현은 의자 하나를 끌어당겨 심미연의 맞은편에 앉았다. 두 사람은 다시 본격적으로 논의에 들어갔다. 한참이 지난 후 논의를 마친 두 사람은 임현이 자료를 정리한 뒤 사무실을 나섰다. 심미연이 경성을 떠난 지 거의 4년이 되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그녀를 기억하고 있었다. 법정에서 익숙한 사람들을 만나면 모두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임현은 심미연의 두터운 인맥을 보며 자신이 처음 법정에 섰을 때의 긴장된 순간들을 떠올렸다. 그때는 손끝까지 떨릴 정도로 너무 긴장했었다.심미연은 임현을 자리에 앉혔다. 곧 재판이 시작되었다. 법정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양측 변호사들이 날카로운 언어로 치열하게 맞섰다. 두 차례의 격렬한 변론 끝에 결국 판결이 내려졌다. 두 명의 피고는 고의로 타인의 생명을 빼앗은 행위로 고의 살인죄가 성립된다고 판시되었다. 임현은 그 판결을 듣고 나서 긴장 속에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며 안도의 한숨을 돌렸다.심미연은 자료를 정리한 후 일어나 가방을 챙기며 밖으로 향했다. “변호사님, 잠깐만요.” 임현이 급히 뒤따랐다. 두 사람이 법정을 나서자 갑자기 한 남자가 옆에서 달려들며 돌진해왔다. “네가 내 아들을 평생 감옥에 처넣었어. 이 악랄한 년, 죽여버릴 거야.” 심미연은 순간적으로 임현을 밀쳐내며 몸을 빠르게 뒤로 물러섰다.남자가 쥐고 있던 칼이 그녀의 팔을 스치며 옷을 찢고 그 아래 피부를 깊게 긁으며 길고 선명한 상처를 남겼다. 순식간에 피가 쏟아져 팔을 적셨다. 심미연은 본능적으로 발을 들어 남자를 향해 힘껏 차며 그를 밀어냈다. 남자는 균형을 잃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고 손에서 칼이 떨어지며 큰 소리로 굴러갔다. “변호사님, 다치셨어요.” 임현은 급히 다가와 그녀를 부축하며 걱정스러
임현은 심미연의 팔에 난 상처가 있는 옷을 보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다치셨어요. 오늘 밤은 그냥 안 가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녀는 진심으로 걱정스러웠다. 만약 몸에 무슨 일이 생기면 큰일이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괜찮아요. 가서 처리만 해주세요.” 심미연은 의사이기에 이런 작은 상처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알겠어요. 그럼 바로 가서 처리할게요.” 임현은 마음속으로 걱정이 되었지만 심미연이 그렇게 말하자 더 이상 반박할 수 없었다. 임현이 나간 후 심미연은 의자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몸이 무겁고 지친 기운이 온몸을 휘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잠에 빠져들었다. 꿈 속에서 그녀는 여전히 살아있는 딸을 보았다. ‘태영아.’그녀는 애타게 딸을 부르며 달려갔다. 심미연은 필사적으로 딸을 쫓았지만 아이는 점점 더 멀어져만 갔다. 결국 그 순간에 눈이 번쩍 뜨이며 꿈에서 깨어났다.눈을 뜬 심미연은 익숙한 환경이 눈에 들어왔고 그와 함께 머리가 살짝 지끈거렸다. 그녀는 잠시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이킨 뒤 일어나서 따뜻한 물을 한 잔 따라 마셨다. 물이 목을 타고 내려가자 몸 속에서부터 편안함이 밀려왔다.사건 자료를 잠시 살펴보다가 박유진의 전화가 걸려왔다. [미연아, 가정부가 지금 오고 있어. 시간 되면 집에 잠깐 들러줘. 난 5분 후에 긴급 회의가 있어서 갈 수 없어.]박유진의 목소리에는 미안한 기색이 묻어 있었다. 최근 이노하이브가 바렐 그룹과의 모든 협력을 취소하면서 그가 처리해야 할 일이 급격히 늘어났다. [오빠 먼저 일 봐. 나 마침 집에 가려고 했어. 가는 길에 태하도 데려올게.] 심미연은 시간을 확인했다. 이제 곧 네 시가 다 되어 가니 잠깐 정리하고 유치원에 가서 아이를 데려오면 될 것 같았다. [미연아, 미안해. 오늘 저녁 같이 먹으려고 했는데 아마 그건 어려울 것 같아. 어머니께 음식 준비해달라고 할게.] 심미연은 그의
심미연은 두 사람과 계약서를 작성한 뒤 각각 지문을 받았다. 임현이 떠난 후 도진혁은 사람들과 함께 준비한 물건들을 들고 도착했다. 세면도구, 침구류, 두 사람의 일상 용품, 속옷부터 외출복, 신발까지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다. 몇 개의 큰 상자에 가득 담긴 물건들이 그들 앞에 놓였다. 두 사람은 그 많은 물건을 보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심 미연 씨, 우리에게 이렇게까지 신경 써 주시다니...”“두 분, 방은 정하셨나요? 이제 방을 정리해 주세요. 저는 여섯 시에 외출해야 합니다.” 심미연이 두 사람에게 말했다. 두 사람은 고마움을 표하며 방으로 향했다.물건을 배달한 사람이 떠나자 도진혁은 문 앞에 서서 심미연을 바라보며 하고 싶은 말을 삼켰다. 심미연은 심태하를 내려다보며 온화하게 말했다. “태하야, 이제 매트에서 놀아도 될까?” 심태하는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하고 매트로 뛰어갔다. 심미연은 그 모습을 잠깐 바라본 후 도진혁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어요?” 그녀는 아마 신하린에 관한 질문일 거라고 짐작했다.“신 대표님의 다리... 언제 의족을 장착할 수 있을까요?” 도진혁이 말을 꺼낼 때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는 신하린이 병상에 누워 무기력하게 있는 모습을 떠올리며 마음 속에서 억누를 수 없는 아픔이 밀려왔다. “최소 6개월 후예요. 그때까지 하린이의 몸 상태가 충분히 회복되어야 해요. 만약 그렇지 않으면 시간이 더 걸릴 수도 있어요.” 심미연은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며 말했다. 그의 괴로움, 그의 고통... 그의 모든 감정을 심미연은 하나하나 정확하게 읽어낼 수 있었다.“그럼 신 대표님은 언제 퇴원할 수 있나요?” 도진혁이 다시 물었다. “대략 보름 정도요.” 하지만 그건 신하린의 상처 회복 상황에 달려 있었다. “저한테 후배가 있는데 예전에 다국적 기업에서 회장님 비서로 일했었습니다. 그를 우리 회사로 초빙하려고 하는데 심 대표님께서 괜찮다고
잠시 후 신하린은 정신을 차리며 급히 소리쳤다. “도진혁,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당장 놔! 안 놔?” 하지만 도진혁은 놓을 생각조차 없었다. 오히려 그녀를 더 꽉 끌어안았다. “하린아, 나 너 좋아해. 네가 어떤 모습이든 상관없어. 네가 날 밀어내도 난 끝까지 널 지킬 거야. 평생 곁에서 돌볼 거야.”그의 목소리에는 단 한 점의 망설임도 없었다. 신하린은 그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완전히 얼어붙었다.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워지며 순간적으로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너... 지금 무슨 말 하는 거야? 사람 잘못 본 거 아니야?” 평소답지 않게 목소리가 떨리고 더듬거렸다. 그녀는 이제 한쪽 다리조차 잃은 몸이었다. 사람이라기엔 비참하고 귀신이라기엔 너무 처연해 누구든 피하기만 해도 이상할 게 없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누군가 다가와서 좋아한다고 평생 곁에 있겠다고 말하다니.이건 너무 비현실적이었다. “헛소리 아니야. 난 널 좋아한 지 오래됐어. 처음 널 봤을 때부터... 그때부터 이미 널 좋아했어.”도진혁의 목소리는 낮고 진지했다. 그의 말 하나하나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하린아, 나한테 널 돌볼 기회를 줘. 네 옆에 있게 해줘. 응?” 그와 신하린의 첫 만남은 학교에서였다. 그날 그녀를 처음 본 순간, 첫눈에 반했다. 그래서 그녀가 은성을 창립할 때 평범한 비서 자리가 자신의 능력에 비해 너무나 부족하다는 걸 알면서도 망설임 없이 그녀 곁으로 다가갔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의 능력과 인맥으로는 절대로 이제 막 시작한 작은 회사의 대표 비서를 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함께한 3년 넘는 시간 동안 도진혁은 아무도 모르게 신하린을 도와왔고 그녀가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모습까지 묵묵히 지켜봤다. 그저 그렇게 평생 곁에서 바라만 보다가 끝날 줄 알았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사고가 모든 걸 바꿔버렸다. 신하린이 다리를 잃었다고 해서 그에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어릴 때 그녀는 부모에게 일억 원에 팔렸었다. 그 상대는 끝없이 변태적인 늙은 남자였다. 그날 밤 그녀는 정신을 잃고 그 남자의 집으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몇 주 동안 그는 그녀에게 끝없는 고통을 주었고 그녀는 필사적으로 도망칠 기회를 찾아 간신히 빠져나왔다. 하지만 그녀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돈도 가족도 심지어 값진 물건 하나조차 없었다. 그녀는 더 이상 살아갈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투신 자살을 결심하고 모든 것을 끝내기로 했다.이 세상에서 그녀가 미련을 둘 사람도,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는 심미연에게 구해졌다. 심미연은 그녀에게 먹고 자는 것부터 학교까지 모두 지원해 주었다. 그리고 그림도 가르쳐 주었다. 그 후 그녀는 사람들에게 일러스트를 그려주며 돈을 벌기 시작했다. 그리고 번 돈을 조금씩 모아 졸업 후에는 자신만의 작업실을 열었다. 심미연은 그녀에게 단순한 친구가 아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였다. 이 모든 걸 그녀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오직 심미연에게만 털어놓을 수 있었다.[하지만 난 이제 완전히 쓸모없는 사람이야. 그 사람에게 짐이 될 순 없어. 그리고 난 도진혁을 사랑하지 않아.] [도진혁이 나한테 첫눈에 반했다고 했지만 나는 그동안 겪은 일들로 마음이 이미 상처투성이야. 그런 내가 어떻게 다시 사랑을 믿을 수 있겠어.]심미연은 핸드폰을 손에 쥐고 조용히 그녀의 말을 들었다. 신하린이 깨어난 이후로 너무 차분해져서 심미연은 그녀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할까 봐 걱정했다. 하지만 지금 이 전화를 받고 나서 신미연은 갑자기 마음이 놓였다. 신하린은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미연아, 나 이제 어떡해야 할까?] 신하린이 말을 마친 후 마지막으로 심미연에게 물었다. 심미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그 사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정말로 아무 감정도 없는 거야?] 어쩌면 신하린이 자신도 모르게 그를 좋아하고 있을지도
[미연아, 그 사람 가까이 하지 마!]신하린이 무심결에 크게 외쳤다. 그 남자는 이진영의 친구였고 여자를 너무 쉽게 대하는 걸로 유명한 인간이었다. 그가 속한 무리의 여자들은 하나같이 그와 한 번씩은 잠자리를 가졌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심미연은 예쁜 외모에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저 남자의 눈에 띄지 않을 리 없었다. [알겠어. 걱정하지 마. 그럼 이만 끊을게.]심미연은 담담하게 전화를 끊고 고개를 들었다. “죄송하지만 누구시죠?”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눈빛에는 경계심이 담겨 있었다. 심미연 역시 한때는 상류 사회 명문가의 영애였고 경성의 명문가 인물들도 적지 않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이 남자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억이 없었다. “심미연 씨가 저를 모르셔도 상관없어요. 제가 당신을 알면 되니까.” 남자의 입꼬리가 사악하게 말려 올라갔다. 그 눈빛은 마치 사냥감을 발견한 맹수처럼 흥분으로 번들거렸다.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일이 있어서요”심미연은 단정하게 인사한 뒤 곧바로 자리를 떴다. 그 남자는 한눈에 봐도 좋은 사람일 리 없었다. 그녀는 굳이 그런 사람과 엮일 필요가 없었다. 남자는 반쯤 감은 눈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천천히 훑었다. 입술에 주먹을 대고 가볍게 기침을 하더니 미소를 삼키듯 낮은 웃음소리를 냈다. ‘이 여자는 반드시 내 손에 넣고 말 거야.’ “뭘 그렇게 음흉한 얼굴로 보고 있어?” 남자는 신비로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방금 한 여자를 봤는데 예쁘고 성격도 화끈해. 완전 내 스타일이야.” “넌 만나는 여자마다 똑같은 소리 하잖아. 이제 좀 질리지도 않냐?” “아니. 이번엔 진짜 달라. 완전 다르다고.”남자는 아까 그녀와 나눈 짧은 대화를 곱씹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 여자는 기가 셌고 흔히 볼 수 있는 애교 떠는 여자들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게다가 그녀가 입고 있던 옷과 액세서리도 가만히 보
육현성이 심미연이 천성에서 일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면 일부러 그녀를 곤란하게 만들었을 뿐이지 애초에 로펌과 계약할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네? 설마요.” 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그들도 상황이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조금만 기다리면 알게 될 거예요.” 심미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 밖에서 임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육 대표님,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두 사람은 재빨리 계약서를 가방에 넣었다. 심미연은 그들에게 담담한 눈빛을 보내며 자리에 앉아 기다렸다. “심 변호사님, 이쪽은 육 대표님입니다.” 임현이 다가와 양측을 소개했다. 심미연은 눈을 들어 상대를 바라봤다. 입가에 얕은 미소가 떠올랐다. “육 대표님, 오랜만이네요.” 육현성은 그녀를 보자 눈빛에 싸늘한 냉기가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곧 그것을 감춘 채 자연스러운 미소를 띠웠다. “심 변호사님, 정말 오랜만입니다.” 원래는 내일 찾아갈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먼저 마주칠 줄은 몰랐다. 예상보다 조금 빨리 만나게 됐다. “앉으시죠.” 심미연이 자리에서 일어나 자리를 내주었다. “제가 다른 로펌 변호사들도 불러놨습니다. 같이 하는 게 어떻습니까?” 육현성은 느긋한 미소를 지으며 심미연을 바라봤다.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말에 담긴 의미는 명확했다. 심미연은 가볍게 눈썹을 들어 올리며 옅게 웃었다. “좋죠.” 어차피 천성과 육영 그룹의 협력은 이미 물 건너간 상태였다. 밥 한 끼 같이 먹는다고 손해 볼 건 없었다. 하지만 옆에 있던 두 명의 변호사들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법무 대리인 주제에 진짜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줄 아나?’ ‘젠장!’ 육현성은 뒤를 돌아 문 밖을 향해 말했다. “들어와.” 심미연의 시선이 문 쪽으로 향했다. 문이 열리고 현지원과 주아연이 들어오는 순간 그녀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하지만 이내 감정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아무 일 없다는 듯 자연스러운
현지원의 얼굴에 어색한 기색이 스쳤다. 그는 가볍게 기침을 하며 말했다. “그건 당연한 일이죠.” 예전에 심미연이 리우에 있을 때 그는 그 어떤 재판에서도 심미연을 이길 수 없었다. 심미연이 없다고 해도 온전히 그의 힘으로 온지유의 무죄 판결을 받아내는 건 불가능할 것 같았다. “그럼 다음 주 어머니가 아들을 살해한 그 사건으로 법정에서 봅시다.” 심미연은 살짝 웃으며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현지원은 잠시 멈칫했다. 그 사건에 대한 준비는 완벽하게 해두었고 당연히 승리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심미연이 그렇게 말하자 갑자기 확신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주아연은 자신감이 넘치는 심미연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크게 부러웠다. 자신도 만약 재벌 가문에서 자랐다면 아마 심미연처럼 당당하게 살았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그런 집안에서 태어나지 않았다.“심 변호사님, 술과 음식은 다 준비됐어요, 곧 올겁니다.” 임현은 심미연의 옆에 다가와 부드럽게 말했다. 주아연은 임현을 보고 본능적으로 눈을 크게 떴다. “임현! 너 어떻게 여기 있어?” 가장 중요한 건 임현이 심미연에게 보인 태도가 너무나도 공손하다는 점이었다. 임현은 경성에서 누구나 알만한 실력 있는 변호사로 언제나 큰 사건만 맡았다. 그녀가 맡은 사건은 항상 승리로 끝났고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대단한 임현이 지금 심미연 앞에서 이렇게까지 공경하는 모습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심미연은 대체 어떤 사람인 걸까?’ 현지원은 눈을 가늘게 뜨며 생각했다. 임현은 이제 경성에서 누구나 아는 사람이었고 그녀가 심미연 앞에서 이렇게 겸손하게 행동하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임현 씨도 앉으세요.”심미연이 조용히 말했다. 임현은 심미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심미연의 옆자리에 앉았다.다음은 요청하신 한국 웹소설 스타일로 번역한 내용입니다:다른 두 변호사가 임현 옆에 자리를 잡았다. 곧 술과 음식이 나왔다.
심미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한 기색을 담아 물었다.“무슨 일이길래 그래요?”이지연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일부러 속도를 늦추며 차분하게 말했다.“온지유 씨가 도망쳤어요.”“언제요?”심미연의 눈빛이 반짝이며 날카로워졌다. 누가 이 일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스쳤다.“어젯밤에요.”이지연의 목소리는 한껏 가라앉아 있었고 자책감이 가득 배어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방심했어요.”심미연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미안해하지 마요. 이건 지연 씨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이지연은 입술을 꼭 깨문 채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제가 당장 찾아올까요?”심미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휴대폰을 천천히 만지며 생각했다.“잠깐만 생각 좀 해볼게요.”어젯밤 강지한이 교통사고를 당한 장면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혹시 온지유의 실종과 강지한이 관련 있는 걸까? 만약 강지한이 온지유를 구한 거라면 도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은 거지? 끝도 없이 밀려드는 의문들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참, 보스. 어젯밤에 스승님 못 보셨어요?”이지연이 물었다.심미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사실은 봤었다. 그녀는 진운혁이 차를 몰고 떠나는 걸 보고 따라붙었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그럴 리가요? 제가 분명히 확인했는데... 스승님께서 이진영 씨랑 같이 식사하고 계셨어요!”이지연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심미연은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렸다.문득 이전에 마주쳤던 진운혁의 모습들이 떠올랐고 그 순간 한 가지 의심이 그녀의 마음속을 훑고 지나갔다.‘그때 내가 본 스승님은... 정말 스승님이 맞았을까? 만약 누군가가 스승님을 사칭하고 있었다면 그 목적은 대체 뭘까?’그때 이지연의 흥분한 목소리가 심미연의 생각을 끊어냈다.“보스! 새로운 정보를 발견했어요!”“무슨 정보예요?”심미연은 본능적으로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귀를 기울이자 이지연의 들뜬 목소
백선영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진은숙의 팔을 살짝 끌어당기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이제 가요.”진은숙은 손바닥 위에 놓인 봉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망설이면서 입을 열었다.“이건... 어쩌죠?”백선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 난처한 상황을 심미연에게 넘기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봉투를 조심스럽게 심미연 앞에 내려놓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모님, 마음은 충분히 받았지만... 이 돈은 받을 수가 없어요.”심미연은 미소를 지으며 눈길을 봉투 위로 흘렸다.“오빠가 직접 드린 건데 마음 편히 받으세요. 저한테 돌려주실 필요는 없어요. 자, 얼른 가서 일 보세요. 저 벌써 배가 고파졌는걸요.”그러나 말하다가 알 수 없는 서운함이 스르르 마음 한쪽에 올라와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박유진은 예전에 밤하늘을 보며 수없이 약속했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그녀와 아이를 평생 지키겠다고. 그런데 지금 그 약속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금세 꺼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오빠, 나랑 약속한 거 잊은 거야?’“정말 감사합니다, 사모님! 사모님과 사장님 두 분 다 참 요즘 보기 드물게 좋은 분들이세요. 두 분, 좋은 일만 가득하시고 영원히 행복하시길 빌게요!”진은숙은 기쁜 얼굴로 연신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 백선영의 팔을 붙잡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오늘 정말 행운이 따랐다 싶었다. 이렇게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다니.심미연도 가볍게 한숨을 쉬고 나서 주방으로 들어가 컵에 따뜻한 물을 따라 목을 축였다. 어쩐지 목이 바싹 마른 게, 감정이 몰려서 그런 걸까.막 물을 다 마셨을 무렵 문밖에서 귀엽고 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 어디 있어요?”그 소리는 마치 봄날에 막 피어난 꽃처럼 듣는 사람 마음을 몽글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심미연은 표정이 풀렸고 얼른 얼굴을 내밀며 따뜻하게 웃었다.“우리 태하, 엄마 여기 있어!”심태하는 쏜살같이 달려와 그녀 품에 안겼다.“엄마, 아빠가 나 버렸어요!”심미연은 깜짝
백선영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모깃소리만큼이나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사장님께서 떠나시기 전에... 집에 안 계시는 동안 꼭 사모님과 도련님을 잘 챙기라고 당부하셨습니다.”진은숙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맞아요, 맞아요! 사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바로 캐리어 들고 곧장 나가셨거든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마음속으로 박유진의 말뜻을 곱씹어 보았지만 마치 안개 속을 걷는 듯 선명하게 와닿지 않았다.“그런데요, 사모님...”진은숙이 심미연을 흘끗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눈빛에는 망설임과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왜 그러세요?”심미연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지만 말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언제나 그래왔듯 도우미 아주머니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었고 태도가 마치 봄바람처럼 따뜻하고 너그러웠다.진은숙은 잠시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더니 마음을 굳힌 듯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어젯밤에 제가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러 나왔는데 계단 모퉁이에서 사장님을 마주쳤었어요. 사장님도 물 마시러 나오신 것 같았어요.”곁에 서 있던 백선영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저도요!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길래 문 열고 나왔더니 사장님이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계셨습니다.”심미연은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어젯밤에 오빠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진은숙은 마음을 가다듬고 이어서 말했다.“불빛이 비쳐서 얼핏 봤는데 사장님 눈가가 벌겋게 부어 있더라고요. 꼭 방금 울기라도 한 사람처럼요. 아마 제가 눈치챌까 봐 인사만 툭 하고는 곧장 자리를 피하셨어요. 전 그냥 물만 마시고 방으로 돌아갔는데 보니까 사장님은 그 자리에 그대로 멍하니 서 계셨어요. 제가 방에 들어간 뒤에도 안 들어오시더라고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덧붙였다.“오늘 아침에 사장님께서 나가신 뒤에 서재를 청소하러 들어갔는데 휴지통에 담배꽁초가 가득 쌓여 있었어요. 어젯밤 내내 잠도 못 주무시고 담배만 피우셨던 것 같아요..
휴대폰 화면이 켜지고 그 익숙하면서도 가슴을 죄는 번호가 뜨는 순간, 박유진의 심장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움켜잡힌 듯 조여들었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속에서 일렁이며 축축한 솜처럼 뭉쳐져 목덜미를 틀어막았고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말은 더더욱 나올 리 없었다.그 번호는 마치 꿈결 속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유령처럼 소리 없이 다가와 그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의 고통과 갈등을 다시 불러냈다.박유진은 손을 떨며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다가 한참을 망설인 끝에 결국 전화를 받지 않기로 했다.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공기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긴장감과 묘한 압박이 가득했다. 박유진은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고 손끝으로 천천히 휴대폰 키보드를 두드려 문장을 써 내려갔다.[진성에 가서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돌아가면 다시 이야기하자. 그래도 되지?]그 메시지엔 그의 복잡한 심경이 담겨 있었다. 현실을 피하고 싶은 마음도, 언젠가 다시 마주하길 바라는 희미한 기대도 모두 그 짧은 문장 안에 섞여 있었다.메시지 전송을 마친 박유진은 망설임 없이 전원을 꺼버렸고 휴대폰을 한쪽으로 툭 던졌다. 마치 그렇게 하면 마음속 어지러운 생각들까지 함께 던져버릴 수 있을 것처럼.주변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텅 빈 공간엔 그의 심장 뛰는 소리만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규칙적이고도 묵직한 박동이 마치 그 존재를 스스로 확인하려는 듯했다.박유진은 눈을 감았다. 피로한 몸은 본능적으로 가장 편한 자세를 찾아갔고 그 짧은 정적 속에서 조금이나마 위로를 찾고자 했다.비록 밤새 한숨도 못 잤고 눈은 충혈되어 있었지만 정신만큼은 유난히 또렷했다.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지탱해 주듯 그는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하지만 피하고 싶을수록 심미연의 모습은 그의 머릿속에서 더욱 선명해졌다. 그녀의 미소는 때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순수하고 따스했으며 때로는 눈빛 하나로도 사람 마음을 뒤흔드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또 부끄러워하던 그 순간순간들
박유진은 자신의 앞날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심미연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는 언제나 그녀의 편이 될 것이란 사실.만약 그녀가 아이를 데려오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그는 가진 것을 다 내어주어서라도 그녀를 돕고 그 아이를 보살필 것이다. 마치 자신의 친딸인 양 지극정성으로.박유진은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은 심미연을 사랑하고 그녀의 아이와 그녀가 지닌 모든 것을 함께 안아줄 준비가 되어 있음을.심미연의 눈가는 어느새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녀의 두 손은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살고 싶어서 지푸라기를 붙잡고 있는 것처럼 박유진의 옷깃을 꼭 움켜쥐었다. 수많은 감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그녀가 박유진에게 진 빚은 너무나도 많고 무거웠다. 그 빚을 다 갚기 위해서는 평생이라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몰랐다.“시간이 늦었으니까 이젠 좀 쉬어. 나도 방으로 돌아갈래.”박유진의 목소리엔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미세한 떨림이 묻어났다. 그는 본능적으로 심미연을 더욱 꼭 안았다. 마치 그녀를 자신 뼛속 깊이까지 끌어안고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어쩌면 이 다정함이 그들 사이 마지막 남은 따뜻함이 될지도 모른다...박유진의 마음속은 쓸쓸함으로 가득했다. 머릿속 이성은 매서운 바람처럼 그를 휘감으며 이제는 놓아줄 때라며 끊임없이 속삭였다.하지만 감정은 뿌리 깊은 덩굴처럼 박유진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얼마나 바랐던가. 단 한 순간이라도 더 심미연의 곁에 머물 수 있기를. 이 찰나의 시간이 남은 생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만 있다면...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박유진의 얼굴을 어루만졌고 그녀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박유진의 마음속 한기를 모두 녹이는 듯했다.심미연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부드럽게 말했다.“이생에 오빠를 만나 알아가고 수많은 인파를 뚫고 함께 걸을 수 있었던 건... 정말 큰 복이었어. 앞으로 어떤 길을 가더라도 우리 손 놓지 말고
박유진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눈빛이 그녀를 감쌌고 낮지만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 말해 봐.” 심미연은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과 마주친 순간, 마음 한켠에서 설명할 수 없는 두려움이 피어올랐다. 마치 오래도록 감춰온 비밀이 이제야 드러날 것만 같은 예감처럼. “왜 그래, 미연아?” 박유진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우면서도 따뜻했다. 그녀의 불안을 감싸 안으려는 듯 아주 섬세하게 묻는 말이었다. 심미연은 입을 열 듯 말 듯 망설였다. 떨리는 입술이 달싹이기만 할 뿐 말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마음 깊은 곳에서 끌어올리고 있는 건 누구에게도 쉽게 털어놓을 수 없던 진실이었다. 그러다 마침내 결심한 듯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강지한의 딸, 강상미. 들어본 적 있지?” 박유진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 아이가 왜?” 툭 튀어나온 말이었지만 그의 마음속에 조용한 파문이 일었다. ‘미연이랑 강지한의 딸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왜 지금에서야 그 아이를 말하는 걸까.’ 심미연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다짐하듯 눈을 감았다가 뜨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사실 예전에 내가 잃어버린 내 딸... 그 애는 세상을 떠난 게 아니었어.” 그 말 한마디를 꺼내기 위해 그녀는 거의 모든 용기를 다 쏟아부었다. “정말이야?” 박유진의 목소리는 놀라움에 젖어 있었다. 그의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그때 너 분명히 말했잖아. 아이 숨 안 쉬고 있었다고. 직접 확인했었잖아... 확신했었어.” 그 순간, 박유진의 머릿속을 스친 단 하나의 가능성. ‘설마... 지금 미연이가 말하려는 게... 그 아이가 강상미라는 말이야?’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껏 맞춰지지 않던 조각들이 하나로 이어지고 복잡하게 얽혔던 퍼즐이 비로소 그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박유진의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손끝이 얼어붙고
박시훈은 눈을 깜빡이며 바로 앞에 있는 얼굴을 바라봤다.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예쁜 여자가 있을 수가 있지?’ 심장이 터질 듯 뛰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심장 박동이 너무 빠른데요? 정상은 아닌 것 같네요.” 심미연은 이마를 찌푸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박시훈은 민망해서 땅속으로 숨어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내가 왜 비정상이야... 완전 정상이거든...’ 심미연은 아무렇지 않게 그의 상처를 확인했다. 상처는 붉게 부어 있었고 피도 조금 배어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약을 꺼내 상처 위에 다시 발라주었다. 상처는 쓰라렸지만 박시훈은 이 순간이 영원히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곁에 있는 지금이 너무도 소중했다. 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상처를 감싸고 도구들을 하나씩 정리했다. 마무리를 한 뒤 장갑을 벗으며 병실을 나갈 준비를 했다. “저... 방금 야식 시켜놨는데... 같이 먹고 가주면 안 돼요?” 박시훈은 괜히 목이 메여 말끝이 흐려졌다. 자신이 이렇게 소심한 사람이었다니, 스스로도 놀라웠다. ‘내가 왜 이 사람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거야...’ “저는 밤에 야식 먹는 습관 없어요.” 심미연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야식 너무 자주 먹지 마요. 건강에 안 좋아요. 전 이만 갈게요. 야식 먹고 푹 쉬세요.” 그녀의 말에 박시훈은 마치 한겨울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얼어붙었다. 심지어 발끝까지 저릿했다. 그녀가 간다. 그를 남겨두고 그냥 떠나버린다. 속이 텅 빈 것처럼 허전했다. 심미연은 이미 등을 돌린 채 병실을 나서고 있었고 박시훈의 낙담한 얼굴은 그녀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병실을 벗어난 심미연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깊게 숨을 들이켰다. 몇 시간째 이어진 수술에, 온몸이 녹초가 된 상태였다. 하지만 강지한을 살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로비로 걸어 나왔을 때 문 앞에 서 있는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심미연의 시선이 하얗게 눈처럼 샌 강준형의 머리카락에 머물렀다. 가슴 어딘가가 저릿하게 아려왔다. 만약 시간이 되돌릴 수 있다면. 그저 아무 걱정 없이 웃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땐 주저 없이 말했을 것이다. ‘네. 할게요.’그때 그녀는 강지한을 사랑했고 그의 가족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더 이상 강지한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리고 강준형이 걱정된다고 해서 그 바람을 무조건 들어줘야 할 이유도 없었다. 곁에서 조용히 그녀를 훔쳐보던 가정부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사모님은 역시 마음이 떠나신 거구나...’ ‘이러다 어르신 또 며칠을 우울하게 보내시겠네...’강준형도 그녀의 침묵에서 모든 걸 느낄 수 있었다. 인연이란 게 억지로 붙잡는다고 이어질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비록 아쉬움은 남지만 그 역시 그녀의 선택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할아버지, 사실 저랑...”“딩.” 심미연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려는 순간,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고개를 든 그녀는 곧장 부드러운 눈빛을 머금은 박유진과 눈이 마주쳤고 그 말은 다시 목구멍 깊숙이 삼켜졌다. “오빠, 여긴 어떻게 왔어?”박유진은 따뜻한 미소로 대답했다. “너 데리러 왔어.” 그리고 곧 예의를 갖춰 강준형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강준형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유진아, 너랑 미연이...?” 어딘가 모르게 다정해 보이는 둘의 분위기. 설마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의심이 스쳤다.“할아버지, 제가 차까지 모셔다드릴게요.” 심미연은 사실 내일 박유진과 혼인신고를 하러 갈 거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조금 전, 강준형이 ‘강지한과 다시 잘해봤으면 좋겠다’고 했던 말이 떠오르자 그 말을 도저히 꺼낼 수 없었다.‘말하지 말자. 괜히 말했다가 할아버지 마음만 상할 수도 있어.”그 순간, 박유진의 손이 저절로 움켜쥐어졌다. ‘할아버지한테
하지만 정작 온지유의 칼끝을 막나낸 사람은 그다지 친하다고 할 수 없었던 박시훈이었다. 심미연의 진지한 얼굴을 본 강준형은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걸 단박에 알아챘다. 더는 묻지 않았다. 그녀는 조심스레 그를 의자에 앉히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만 앉아 계세요. 옷만 갈아입고 금방 나올게요.” “그래. 다녀오너라.” 강준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가볍게 흔들어 보냈다. 심미연이 등을 돌려 복도로 사라지자 그는 그녀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그리고 이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곁에 서 있던 가정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요즘 사모님이 예전보다 훨씬 더 예뻐지신 것 같아요. 성격도 훨씬 부드러워지셨고요. 만약 사모님이 도련님과 다시 재결합하신다면 어르신께서도 도련님 혼자 남을까 봐 걱정 안 하셔도 될 텐데요.” 강준형은 그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다. 미연이가 돌아온다면 지한이도 지금처럼 외롭진 않겠지. 상미도 엄마 손길이 필요하고... 지한이가 아무리 잘 챙긴다 해도 아빠는 아빠일 뿐이지. 엄마처럼 섬세하긴 어렵잖니. 게다가 지한이는 이노하이브를 이끄는 입장이라 상미를 온전히 돌보기엔 시간도 턱없이 부족하고 말이다.” “나중에 사모님께 슬쩍 한번 말씀드려보시는 건 어떠세요?” 가정부는 늘 심미연을 좋게 봐왔다. 도련님과 이혼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도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요즘 세상에 외모, 인품, 성격, 효심까지 갖춘 여자를 다시 만나긴 정말 쉽지 않으니까. 강준형은 또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분위기 봐서 말해보지. 미연이가 듣기 싫어하면 더는 꺼내지 않을 거다.” “네. 그게 좋을 것 같아요.” 가정부도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옷을 갈아입은 심미연이 다시 나타났다. 그녀는 다가와 손을 내밀며 말했다. “가시죠. 할아버지. 제가 집까지 모셔다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