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미연은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남자의 얼굴에 거칠게 한 대 날렸다. “강지한, 나는 네가 함부로 가지고 놀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꺼져.” 그녀의 목소리는 차갑고 낮았으며 분노로 가득 찬 얼굴에는 그 어떤 온기도 없었다. 그 날카로운 도화 같은 눈빛은 마치 얼음처럼 차갑고 빛났다. 강지한은 그녀의 차가운 시선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얼굴을 감싸며 깊게 숨을 들이켰다. 그렇게 겨우 마음을 가라앉힌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난 정말 네가 아들과 함께 내 곁으로 돌아오길 바란다고. 왜 이렇게까지 격하게 반응하는 거야?” ‘심미연이 내 아들을 낳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아직 나에게 감정이 남아있는 거 아닐까?’ 그가 그녀를 찾아 온 이유는 단 하나, 그녀가 돌아오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차갑게 밀어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생각이 점점 더 그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심미연은 그를 멍청한 사람이라도 보는 듯한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네가 원한다고 우리가 돌아가야 해? 왜 우리가 네 말대로 해야 하지?” 그녀가 아이를 키울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었고 굳이 불편함을 찾으러 돌아갈 이유가 전혀 없었다. “아이들은 부모와 함께 있어야 제대로 자란다고. 그 정도도 모르겠어?” 강지한은 여전히 마음을 진정시키며 최대한 부드럽게 말하려 했지만 그의 말투 속에 숨겨진 분노는 감추기 어려웠다. 심미연은 그런 말에 전혀 관심 없이 그를 밀어내고 일어나서 문 쪽으로 걸어갔다. “강지한, 내가 이미 결혼했다고 말했잖아. 아이 데리고 돌아갈 일 없다고. 이제 그만 가. 할 말 다 했어. 오후에 해야 할 일이 많아서 이제는 좀 쉬어야 해.”“다음에 또 내 시간을 이렇게 낭비하면 그때는 너한테 상담비 청구할 거야.” 신하린이 병원에 누워 있기 때문에 그녀는 회사와 로펌을 오가며 바삐 돌아쳤다. 하루에 48시간이 필요할 정도로 시간이 부족했기에 이런 의미 없는 사람과 일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강지한은 주머니에서 블
1층으로 내려온 임현은 강지한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그러다 강지한이 갑자기 멈춰서서 뒤를 돌아보자 임현은 깜짝 놀라며 더듬거렸다. “강, 강 대표님...” 강지한은 냉정하게 말했다. “심미연에게 전하세요. 일주일이 다 돼간다고. 빨리 결정하라고 하세요.”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차에 올라탔다. 강지한은 심미연에게 충분한 시간을 줬다고 생각했다. 기한이 끝나면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그녀와 아들을 데려올 생각이었다. 심미연이 자신을 미워하든 말든 상관없었다. 어차피 아내와 아들은 그의 곁에 있어야 하니까. 임현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강지한의 말을 곱씹었다. ‘방금... 뭐라고 하신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아 결국 심미연을 찾아갔다. 그러나 문을 열자 심미연은 낮잠을 자고 있었다. 임현은 그녀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문을 닫았다. ‘변호사님이 깨면 다시 얘기해야겠다.’심미연 로펌 사무실.심미연은 상쾌한 기분으로 잠에서 깨어나 노트북을 열고 업무를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임현이 조심스레 방에 들어왔다. 심미연은 그녀의 머뭇거리는 모습에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 임현은 강지한이 전하라고 했던 말을 그대로 전달하고 어색하게 핑계를 대며 서둘러 방을 나갔다. 심미연은 닫히는 문을 바라보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처음엔 강지한이 장난으로 하는 소리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진심이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 ‘뭔가 방법을 찾아야 해.’병원.강지한이 병원에 도착해 자리에 앉자마자 성무진이 들어왔다. “대표님, 아가씨의 친부모님과 연락이 닿았습니다. 바로 데려올까요?” 그제야 강지한은 성무진에게 강상미의 친부모를 찾으라고 지시했던 일을 떠올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는 강상미가 자신의 아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하지만 심미연이 떠난 이후로 그는 단 한 번도 다른 여자를 건드린 적이 없었다. 그러니
강지한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언제?] ‘이진영과 심미연이 합작을 논의한다고?’ ‘최근에 이진영이 프로젝트가 있다고 말한 적이 없었는데.’ ‘두 사람이 만난 이유가 다른 게 있나?’ [오늘 오전이야.] 육현성은 일부러 한숨을 쉬며 말했다. [사실 심미연 씨랑 법률 대리인 문제로 얘기하려고 했는데 바쁘다고 못 온다고 하더라고. 그런데 그 후 바로 이진영과 함께 있는 걸 봤어. 두 사람은 웃으면서 얘기하고 아주 친밀해 보였어. 아마 합작 얘기를 하는 거겠지. 내가 너무 생각이 많았던 걸 수도 있어.] 강지한의 얼굴이 즉시 어두워졌다. [알았어.] ‘심미연, 점점 대단해지네. 모든 남자랑 다 엮으려는 거야?’[지한아, 너 그만큼은 심미연 씨한테 꼭 말해. 이진영이랑 너무 가까워지지 말라고. 내 처남이지만 결코 좋은 사람 아니야.]육현성은 이진영의 냉혹함과 잔인함을 잘 알고 있었다. 이다은과 결혼한 3년 동안 이진영은 자주 육영 그룹을 도와줬고 그 사람의 수단이 얼마나 잔인한지 육현성은 뼛속까지 알고 있었다. 강지한의 얼굴이 검게 변하며 목소리가 거칠게 나왔다. [용건 끝났어?] [응. 다 끝났어. 방해 안 할게.] 강지한의 목소리에서 불쾌함이 묻어나자 육현성은 그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직감했고 이미 목적을 달성했으니 전화를 끊었다.강지한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담배를 하나 꺼내 불을 붙였다. 연기 속에서 심미연의 섬세한 얼굴이 어렴풋이 비쳤다. 지금의 심미연은 예전 그와 함께했던 심미연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는 종종 ‘이 여자가 진짜 예전의 심미연이 맞나?’하는 생각이 떠오르곤 했다. 담배를 다 피운 후 시간이 꽤 지난 걸 느낀 그는 간단히 정리하고 퇴근했다. 문을 나서자 급히 달려오는 성무진과 마주쳤다. 그는 발걸음을 멈추고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사모님이 오셨습니다.” 강지한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왜 온 거지?” “모
“태하야, 엄마 여기 있어.” 그녀의 목소리는 사람들로 가득한 하원 인파 속에서 사라졌다. 심태하는 엄마를 발견하자 눈이 반짝이며 작은 발걸음으로 달려와 심미연의 품에 안겼다. 마치 세상 모든 것이 이 포옹 속에서 녹아내리는 듯했다. “엄마, 너무 보고 싶었어요.” 심미연은 허리를 굽혀 그를 안으며 따뜻하게 웃었다. “엄마도 우리 태하 너무 보고 싶었어.” “태하 어머니, 오늘 태하가 유치원에서 정말 잘했어요. 친구들도 도와주고 생활 선생님께 작은 책상도 정리해드렸답니다.” 선생님은 심미연 품에 안겨 있는 아이를 보며 칭찬의 눈빛을 보냈다. 이렇게 어린 아이가 지능도 뛰어나고 감정 조절도 잘하다니. 정말 3살 어린이답지 않다고 생각했다. 선생님이 이렇게 생각한 이유는 반의 다른 아이들이 아직 분유를 먹고 작은 울음에도 쉽게 따라 우는 경우가 많아 자주 힘겨운 상황을 겪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태하는 달랐다. 울지 않고 떼쓰지도 않았으며 작은 일도 차분하게 처리했다.평범한 장난감으로도 상상력을 발휘해 다양한 놀이를 해내는 모습을 보며 선생님들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10년 넘게 유치원에서 일한 선생님은 이런 기특한 3살 아이는 처음 봤다. 그동안 수많은 아이들을 봤지만 심태하처럼 차분하고 똑똑한 아이는 없었다. 심미연은 선생님의 칭찬을 듣고 잠시 놀랐다가 이내 아들의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며 미소 지었다. “우리 태하는 정말 최고야.” 그녀는 심태하가 지능이 뛰어나 친구들 사이에서 잘 적응하지 못할까 봐 걱정했지만 오히려 예상보다 더 착하고 말 잘 듣는 아이라는 사실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당연하죠. 내가 누구 아들인데.” 심태하는 심미연의 목을 끌어안으며 귀엽게 애교를 부렸다. 옆에서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선생님은 은근히 부러워하며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보기 좋은 따뜻한 장면이었다. 어쩐지 아이가 이렇게 잘 자란 이유가 모두 엄마 덕분인 것 같았다. 심미연은 웃으며 자신의 코로 아들
“먼저 약속해 주세요. 화내지 않겠다고요.” 심태하는 심미연에게 미리 주의를 주었다. 심미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았어. 화 안 낼게.” 그렇지만 마음속에서 ‘이 녀석이 무슨 엉뚱한 짓이라도 했다면 내가 이 말로 태하에게 면죄부를 준 거 아닐까?’라는 생각이 스쳤다. 심태하는 그녀의 대답을 듣고 마치 자신이 괜찮다는 것을 확인하려는 듯 잠시 눈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마법처럼 책가방 깊은 곳에서 반짝이는 공주 드레스를 꺼냈다. 드레스의 치맛자락은 가볍게 휘날리며 햇빛을 받아 다양한 색깔로 반짝였다. 심미연은 그 드레스를 보고 깜짝 놀라며 물었다. “이거 엄마한테 주는 거야?” ‘이건 분명 여자아이에게 줄 선물 아닌가?’ 심태하는 급히 해명했다. “엄마, 이건 상미한테 줄 선물이야.” 그의 목소리에는 확고한 의지와 기대가 담겨 있었고 눈빛은 순수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심미연은 그제야 예전에 심태하가 자신에게 말했던 일을 떠올리며 살며시 그의 머리를 쓰다듬고 부드럽게 대답했다. “알았어. 바로 병원에 가자.”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고 심미연은 핸들을 꽉 쥐고 앞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마음속에서는 수많은 생각들이 휘몰아쳤다. 심태하는 누구에게나 이렇게 신경 쓰는 아이가 아니었다. 그는 다소 차갑고 냉담한 성격을 가진 아이였다. 그런데 유독 강상미한테만 특별한 감정을 보였다. 그 이유도 없이 단순히 좋아한다는 감정이었다. 심태하는 엄마가 거절하지 않자 안도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이제 곧 강상미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떠 있었다. 병원에 도착한 심미연은 서둘러 심태하를 품에 안고 병원으로 들어갔다. 길게 뻗은 복도는 심하게 울리는 발걸음 소리와 때때로 들려오는 응급실 벨 소리로 더 짙어지며 숨이 막히는 듯했다. 의사로서 이곳에서 일한 지 2년, 심미연은 너무 많은 생과 사를 목격했다. 그래서 병원은 항상 불편했다.그때 문소영과 강지한의 모습이 정확히 그 지점에서 빛에
‘아니야. 그럴 리 없어.’ ‘혼자서 겁먹으면 안 돼.’ 문소영은 마음속의 혼란을 가라앉히고 심태하의 얼굴을 노려보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강지한에게 말을 꺼냈다. “지한아, 상미가 몸 상태도 좋지 않은데 아무한테나 방해받을 순 없잖아.” 심미연은 그녀의 말 속에 숨겨진 의도를 금세 파악하고 강지한을 바라보며 물었다. “너도 이렇게 생각하는 거야?” 심미연은 자신이 선의로 행동한 것이 잘못된 것처럼 비난받는 기분이었다. “당연히 그렇지.” 문소영은 자랑스러운 듯이 말을 내뱉었다. 심미연은 더 이상 그녀와 싸울 생각이 없었고 그저 비웃듯 문소영의 창백한 얼굴을 한참 응시했다. “당신, 도대체 뭘 그렇게 걱정하는 거예요? 내가 아들과 함께 그 가짜의 모든 걸 빼앗을까 봐 두려운 거예요?” ‘상미가 억울하다고 해도 어쩔 수 없지.’ ‘어쨌든 그 아이는 강지한의 딸이니까.’ “너 진짜 뻔뻔하다.” 문소영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치쳤다. ‘예전의 심미연은 그냥 당하기만 했던 사람 아닌가?’‘어떻게 이렇게 강해졌지?’강지한은 차가운 표정으로 얼굴을 굳히며 날카롭게 경고했다. “다시 한 마디 더 하시면 가만두지 않겠습니다.” ‘내가 그렇게 간절히 원해도 가질 수 없는 심미연을 이렇게 욕하다니.’‘어머니라고 해서 함부로 심미연을 욕할 수는 없어.’ 문소영은 강지한의 무자비한 경고에 순간 얼어붙어 입을 꾹 다물었다. 하나는 강지한의 성격을 너무 잘 알았기에 그를 진심으로 화나게 했다간 결코 가벼운 대가를 치르지 않을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지금의 심미연에게서 느껴지는 그 강력한 기세에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이다.문소영이 물러서자 강지한은 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끝이 심태하의 작은 얼굴에 닿을 듯했지만 그 순간 심미연은 민첩하고 단호하게 몸을 틀며 손을 피했다. 심미연의 눈빛 속에는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었다. 오직 차가운 결단력만이 가득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엄마, 예전에도 사람들이 오늘처럼 엄마한테 그랬어요?” 심태하는 심미연의 목을 꼭 끌어안으며 애틋하게 물었다. 그는 엄마가 너무나 안쓰러웠다. 과거에 그 나쁜 아빠와 함께했을 때 엄마가 얼마나 많은 서러움을 겪었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심미연은 순간 놀라 살짝 붉어진 눈으로 심태하의 얼굴을 바라보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 “아니야.” 사실 문소영이 그녀에게 차가운 태도를 보인 건 주로 가족 모임에서였고 평소엔 마주칠 기회조차 없었다. 문소영이 그녀를 괴롭히고 싶어도 기회가 없었던 셈이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강지한이었다. 강지한은 언제나 냉당했고 심미연은 그의 차가운 태도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 돌아보면 그 시절의 자신은 정말 강했던 것 같다. 그렇게 힘든 나날들도 다 버텨냈으니까.“나중에 그 사람이 또 엄마한테 그러면 바로 경찰에 신고해요. 가만두지 말고 본때를 보여줘야죠. 엄마가 만만한 줄 알면 안 돼요.” 심태하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차가운 눈빛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그 모습은 강지한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그 순간 심미연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 ‘태하가 이렇게 어린 나이에 강지한을 미워하고 있다니...’ ‘나랑 강지한 사이의 문제가 태하에게 너무 큰 상처를 준 걸까?’‘아직 어린 아이인데 이렇게 마음에 증오를 품고서 제대로 성장할 수 있을까?’ 심미연은 처음으로 자신이 잘못한 건 아닌지 깊이 반성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 강지한과 진지하게 얘기할 기회를 만들어야 해.’ 비록 두 사람의 관계는 끝났지만 적어도 아이만큼은 사랑이 가득한 환경에서 자라도록 해야 한다. 그게 심태하를 위한 길이니까.“엄마, 걱정 마세요. 제가 빨리 자라서 엄마를 지켜줄게요. 누가 엄마를 괴롭히면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심태하는 살짝 붉어진 심미연의 눈을 바라보며 속으로는 밥도 많이 먹고 고기고 많이 먹어 빨리 자라겠다고 다짐했다. 심미연은 그런 아들의 말에 가슴이 아려
심미연은 심태하의 작은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조용히 물었다. “태하야, 너는 상미 아빠를 싫어하면서 왜 상미는 좋아하는 거야?” 심태하는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처음 봤을 때부터 지켜주고 싶었어요. 내가 좋아하는 장난감도 간식도 다 주고 싶고... 그냥 좋아요.”아직 세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는 마음속의 감정을 더 이상 말로 표현하지 못했지만 그 순수한 진심은 고스란히 전해졌다. 심미연은 아들의 천진난만한 모습에 가슴이 뭉클해져 그저 대견하다는 듯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어쩜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운 말을 할 수 있지?’그때 핸드폰 벨소리가 울리면서 심미연은 하려던 말을 꾹 삼켰다. 전화를 받자 부드럽고 상냥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미연 씨, 남편이 빠르게 회복해서 오늘 오후에 퇴원했어요. 저녁에 식사 대접하고 싶은데 시간 괜찮으세요?] 목소리의 주인은 며칠 전 심미연이 구해준 남자의 아내였다. 원래는 주말에 식사를 대접하려 했지만 일이 예상보다 빨리 진행된 모양이었다. [오늘 바쁘시면 다른 날로 조정해도 괜찮아요.] 여성이 덧붙였다. 심미연은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미소 지었다. [아니요. 오늘 괜찮아요. 장소만 알려주시면 돼요.] [네. 그럼 이만 끊을게요. 이따 뵐게요.] 전화를 끊고 심미연은 전에 조사했던 그 남자의 신분이 떠올랐다. 군부대 고위 간부로 젊은 나이에 이미 수많은 전공을 세운 인물. 이런 인연이라면 당연히 잘 관계를 맺어야 했다.“엄마, 오늘 약속 있어요? 아니면 제가 택시 타고 아빠 회사에 가서 기다릴까요?” 심태하는 배려 깊게 물었다. “엄마가 널 집에 데려다줄게. 요즘 아빠가 바빠서 시간 맞추기가 힘들어. 너도 아빠 사무실에 가면 심심할 거야.” “알겠어요.” 심미연은 아이에게 안전벨트를 채워주고 운전석에 올라 차를 몰고 집으로 향했다. 같은 시각 VIP 병실.강상미는 창백한 얼굴로 병상에 누워 있었다. 기운이 없어보이
심미연은 흩날리던 생각을 차분히 거두고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궁금한 듯 물었다.“우리 태하 진짜 똑똑하네. 어떻게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는 거야?”아직 겨우 세 살이지만 심태하의 마음은 놀랄 만큼 세심하고 예민했다. 또렷한 눈망울은 마치 세상의 감정 흐름을 꿰뚫어 보는 듯했고 그렇게 꼼꼼히 살피는 모습에 심미연은 종종 놀라곤 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박유진이 심태하를 정성스럽게 길러온 시간이 아이를 이토록 똑똑하고 배려 깊게 자라게 만든 것이다.“아까 아빠랑 통화할 때 엄마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어요. 뭔가 걱정하는 게 있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저한테 말 걸었을 때도 평소처럼 웃고 있지 않았어요. 그래서 엄마가 혹시 슬픈 건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어요.”심태하의 말은 또렷하면서도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 단어 하나하나에 엄마를 향한 깊은 애정과 이해가 담겨 있었다.심태하가 보기에 박유진이 집에 있을 땐 심미연은 늘 기분이 좋아 보였고 환하게 웃는 얼굴이 참 예뻤다.“엄마가 안 웃었어?”심미연은 웃음을 터뜨렸다.‘녀석, 정말 못 말려.’겨우 세 살에 이 정도인데 나중에 더 크면 얼마나 영리해질지.“네, 안 웃었어요.”심태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엄마, 아빠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심태하의 목소리는 여전히 앳됐지만 말투는 왠지 어른스러웠다. 꼭 사람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있기라도 한 듯했다.심미연의 마음은 그 말 한마디에 확 풀렸다. 그녀는 아들의 코끝을 살짝 잡아당기며 말했다.“자, 얼른 아침 먹자.”그녀의 말투엔 아낌없는 사랑이 담겨 있었다.이 아이는 정말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다.“아빠가 보고 싶으면 아빠한테 전화하면 되죠!”심태하가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윙크했다.‘나도 아빠가 보고 싶은데 엄마가 안 보고 싶을 리가 없지. 맞아, 분명 그럴 거야!’심미연은 그 말에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네 말대로 할게.”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물론 박유진이 보고 싶지만 그에게 전화하진
하지만 그 깊은 애정과 놓기 싫은 마음은 오히려 박유진을 현실이라는 갈림길 앞에서 망설이게 만들었다.그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지금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심미연만 괴로운 상황에 빠질 것이라는 걸. 그 맑고 투명한 눈동자가 자신의 망설임으로 인해 흐려지는 건, 그녀의 세상이 자신 때문에 흔들리는 건 차마 보고 있을 수 없었다.그렇다고 그녀를 놓아버리면 영원히 잃게 될 텐데... 그 아픔을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지 박유진 본인조차 알 수 없었다.“아빠, 왜 말이 없으세요? 허락한 거죠?”심태하의 목소리는 천진난만하게 들떴다. 마치 머릿속에 따뜻한 한 가족의 그림이 그려지기라도 한 듯.‘아빠가 돌아오면 엄마랑 나랑 셋이 모여 저녁 먹고 같이 웃고 얘기하고...’심태하의 마음속에서 그려낸 가장 순수한 행복의 모습이었다.그러나 그 순수한 소망 앞에서 박유진의 마음은 송곳에 찔린 것처럼 아팠다.그는 알고 있다. 이번 결정을 가볍게 내려서는 안 된다. 누구도 상처받지 않게 하려면 정말 신중해야 했다.하지만 사랑과 책임 사이에서 그가 걸어갈 수 있는 길은 대체 어디란 말인가? 그는 지금 사랑을 저버리지 않으면서 심미연과 아이를 지킬 방법을 찾고 있다.하지만 그런 길이 과연 있을까? 이 선택은 너무나도 어려웠다.“아빠, 나 이렇게 열심히 얘기하고 있는데 왜 아무 말도 안 해요?”심태하는 고개를 갸웃하며 미간을 찌푸렸다.평소 같았으면 박유진은 재밌는 얘기도 해주고 자기 말에 웃어주었을 텐데, 오늘따라 너무 이상했다.‘혹시... 내가 말실수했나?’그때 박유진의 다급하지만 부드러운 목소리가 심태하의 귀에 들려왔다.“태하야, 곧 비행기가 이륙해서 아빠가 휴대폰을 꺼야 돼. 오늘 밤에 다시 이야기하자. 꼭이야.”박유진은 심미연을 당장이라도 보러 가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눌렀고 말하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네! 알겠어요, 아빠! 그럼 오늘 밤에 꼭 통화해요. 약속했으니까 안 하면 안 돼요!”심태하의 목소리에 눈치채기 힘든 외로움이 살짝 섞여 있었다.
심미연은 멍해졌고 아까 자신이 박유진에게 연락을 시도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대신 날아온 건 단 한 줄의 차갑고 무미건조한 메시지. 기대했던 목소리는 끝내 들을 수 없었다.그런데 지금 아들 심태하가 전화를 걸자 박유진은 놀랍게도 전화를 받았다.“아빠, 지금 어디예요? 이틀 뒤면 제 생일이에요! 아빠가 놀이공원 같이 가자고 했던 거 잊으시면 안 돼요!”심태하의 말투엔 아이 특유의 해맑은 기쁨이 가득 담겨 있었고 단어 하나하나가 살아서 튀어나오는 듯했다.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박유진의 목소리는 한겨울 얼음도 녹일 만큼 다정했다.“아빠 지금 진성으로 가는 비행기 타러 가는 중이야. 곧 이륙이라 휴대폰 꺼야 해. 진성에 도착하면 바로 전화할게. 약속!”그 말에는 미안함과 애틋함이 가득 실려 있었다.사실 박유진은 심태하가 생일 이야기를 할 줄은 전혀 예상 못 했다. 어젯밤에 워낙 정신이 없어 그런 중요한 약속마저 깡그리 잊고 있었던 것이다.“아빠가 보내준 선물 잘 받았어요! 너무너무 마음에 들어요, 고마워요!”심태하는 아직 다 하지 못한 말이 많은 듯 아빠에게 털어놓고 싶은 게 가득한 눈치였다.박유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는데 햇살이 쏟아져 내려 유난히 눈부셨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가늘게 떴고 그 강렬한 빛이 속눈썹 아래에 그림자를 드리웠다.그 순간 그의 마음속엔 오로지 한 사람, 심미연의 얼굴만이 떠올랐다. 그녀와 떨어져 있는 모든 시간이 하나같이 그리움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 그리움이 너무 커서 박유진은 당장이라도 비행기에서 뛰어내려 달려가고 싶을 만큼 벅찼다.“아빠... 지금 너무 힘들죠? 그럼 회사 팔고 그냥 집으로 돌아와요. 제가 돈 많이 벌어서 아빠랑 엄마 다 먹여 살릴게요!”심태하의 순수한 눈빛에 진심 어린 다짐이 담겨 있었다. 그에겐 돈을 많이 벌어서 가족을 지킬 거라는 꿈이 있었다.심미연은 그런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통통한 볼살에 아직 아기 티가 남았지만 심태하의 마음속
심미연 역시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이지연이 잘못 알아본 것일 수도 있기 때문에 확신이 서지 않았다.“지연 씨, 다시 한번 제대로 확인해 봐요. 결과가 똑같은지 꼭 잘 봐요.”혹시라도 착오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그럼 제가 다시 확인해 볼게요! 뭐든 나오면 바로 보고드리겠습니다. 보스, 그럼 끊을게요!”이지연은 말 끝나기가 무섭게 전화를 뚝 끊었다.심미연은 휴대폰을 쥔 채 한참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까 이지연이 했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이건명과 문소영이 예전에 그런 사이였다고?’그런데 왜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걸까? 아무도 깊게 파고들지 않았기에 묻혀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결혼 전에 누굴 만나든 그건 사생활인데 그걸 굳이 숨긴 이유가 뭘까?심미연이 이 모든 게 어딘가 석연치 않다고 느끼고 있을 즈음, 밖에서 누군가 소리쳤다.“엄마! 나 배고파요! 우리 빨리 아침 먹으러 가요!”심미연은 생각을 접고 고개를 들어 활짝 웃는 아들을 바라봤다.“그래, 가자.”심태하가 달려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엄마, 며칠 뒤면 제 생일이잖아요. 생일 파티에 상미도 초대하고 싶은데, 그래도 돼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젯밤의 친자 확인 결과가 떠올랐다. 강상미는 그녀의 딸, 즉 심태하와 쌍둥이였다. 그래서 둘의 생일도 당연히 같았다.심태하의 생일 파티에 강상미가 온다면 그건 곧 둘이 같이 생일을 보내게 되는 셈이다.“엄마, 안 돼요?”심미연이 대답하지 않자 심태하가 다급히 물었다.그녀는 웃으며 아이를 안심시켰다.“그럼, 당연히 초대해야지. 너희 둘이 같이 생일 파티하면 되겠네.”“정말요? 엄마 최고! 사랑해요!”심미연은 아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태하야, 너 엄마가 어제 말한 거 잊은 거 아니지? 상미가 바로 태영이야. 너랑 똑같이 엄마 배에서 나왔고 너희 둘은 쌍둥이야. 그래서 생일도 똑같아.”강상미에 관한 일은 이미 방원호에게 조사를 맡긴 상태였다. 꼭 알아내야 한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심미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한 기색을 담아 물었다.“무슨 일이길래 그래요?”이지연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일부러 속도를 늦추며 차분하게 말했다.“온지유 씨가 도망쳤어요.”“언제요?”심미연의 눈빛이 반짝이며 날카로워졌다. 누가 이 일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스쳤다.“어젯밤에요.”이지연의 목소리는 한껏 가라앉아 있었고 자책감이 가득 배어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방심했어요.”심미연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미안해하지 마요. 이건 지연 씨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이지연은 입술을 꼭 깨문 채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제가 당장 찾아올까요?”심미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휴대폰을 천천히 만지며 생각했다.“잠깐만 생각 좀 해볼게요.”어젯밤 강지한이 교통사고를 당한 장면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혹시 온지유의 실종과 강지한이 관련 있는 걸까? 만약 강지한이 온지유를 구한 거라면 도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은 거지? 끝도 없이 밀려드는 의문들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참, 보스. 어젯밤에 스승님 못 보셨어요?”이지연이 물었다.심미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사실은 봤었다. 그녀는 진운혁이 차를 몰고 떠나는 걸 보고 따라붙었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그럴 리가요? 제가 분명히 확인했는데... 스승님께서 이진영 씨랑 같이 식사하고 계셨어요!”이지연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심미연은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렸다.문득 이전에 마주쳤던 진운혁의 모습들이 떠올랐고 그 순간 한 가지 의심이 그녀의 마음속을 훑고 지나갔다.‘그때 내가 본 스승님은... 정말 스승님이 맞았을까? 만약 누군가가 스승님을 사칭하고 있었다면 그 목적은 대체 뭘까?’그때 이지연의 흥분한 목소리가 심미연의 생각을 끊어냈다.“보스! 새로운 정보를 발견했어요!”“무슨 정보예요?”심미연은 본능적으로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귀를 기울이자 이지연의 들뜬 목소
백선영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진은숙의 팔을 살짝 끌어당기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이제 가요.”진은숙은 손바닥 위에 놓인 봉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망설이면서 입을 열었다.“이건... 어쩌죠?”백선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 난처한 상황을 심미연에게 넘기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봉투를 조심스럽게 심미연 앞에 내려놓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모님, 마음은 충분히 받았지만... 이 돈은 받을 수가 없어요.”심미연은 미소를 지으며 눈길을 봉투 위로 흘렸다.“오빠가 직접 드린 건데 마음 편히 받으세요. 저한테 돌려주실 필요는 없어요. 자, 얼른 가서 일 보세요. 저 벌써 배가 고파졌는걸요.”그러나 말하다가 알 수 없는 서운함이 스르르 마음 한쪽에 올라와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박유진은 예전에 밤하늘을 보며 수없이 약속했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그녀와 아이를 평생 지키겠다고. 그런데 지금 그 약속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금세 꺼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오빠, 나랑 약속한 거 잊은 거야?’“정말 감사합니다, 사모님! 사모님과 사장님 두 분 다 참 요즘 보기 드물게 좋은 분들이세요. 두 분, 좋은 일만 가득하시고 영원히 행복하시길 빌게요!”진은숙은 기쁜 얼굴로 연신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 백선영의 팔을 붙잡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오늘 정말 행운이 따랐다 싶었다. 이렇게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다니.심미연도 가볍게 한숨을 쉬고 나서 주방으로 들어가 컵에 따뜻한 물을 따라 목을 축였다. 어쩐지 목이 바싹 마른 게, 감정이 몰려서 그런 걸까.막 물을 다 마셨을 무렵 문밖에서 귀엽고 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 어디 있어요?”그 소리는 마치 봄날에 막 피어난 꽃처럼 듣는 사람 마음을 몽글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심미연은 표정이 풀렸고 얼른 얼굴을 내밀며 따뜻하게 웃었다.“우리 태하, 엄마 여기 있어!”심태하는 쏜살같이 달려와 그녀 품에 안겼다.“엄마, 아빠가 나 버렸어요!”심미연은 깜짝
백선영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모깃소리만큼이나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사장님께서 떠나시기 전에... 집에 안 계시는 동안 꼭 사모님과 도련님을 잘 챙기라고 당부하셨습니다.”진은숙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맞아요, 맞아요! 사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바로 캐리어 들고 곧장 나가셨거든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마음속으로 박유진의 말뜻을 곱씹어 보았지만 마치 안개 속을 걷는 듯 선명하게 와닿지 않았다.“그런데요, 사모님...”진은숙이 심미연을 흘끗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눈빛에는 망설임과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왜 그러세요?”심미연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지만 말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언제나 그래왔듯 도우미 아주머니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었고 태도가 마치 봄바람처럼 따뜻하고 너그러웠다.진은숙은 잠시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더니 마음을 굳힌 듯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어젯밤에 제가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러 나왔는데 계단 모퉁이에서 사장님을 마주쳤었어요. 사장님도 물 마시러 나오신 것 같았어요.”곁에 서 있던 백선영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저도요!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길래 문 열고 나왔더니 사장님이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계셨습니다.”심미연은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어젯밤에 오빠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진은숙은 마음을 가다듬고 이어서 말했다.“불빛이 비쳐서 얼핏 봤는데 사장님 눈가가 벌겋게 부어 있더라고요. 꼭 방금 울기라도 한 사람처럼요. 아마 제가 눈치챌까 봐 인사만 툭 하고는 곧장 자리를 피하셨어요. 전 그냥 물만 마시고 방으로 돌아갔는데 보니까 사장님은 그 자리에 그대로 멍하니 서 계셨어요. 제가 방에 들어간 뒤에도 안 들어오시더라고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덧붙였다.“오늘 아침에 사장님께서 나가신 뒤에 서재를 청소하러 들어갔는데 휴지통에 담배꽁초가 가득 쌓여 있었어요. 어젯밤 내내 잠도 못 주무시고 담배만 피우셨던 것 같아요..
휴대폰 화면이 켜지고 그 익숙하면서도 가슴을 죄는 번호가 뜨는 순간, 박유진의 심장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움켜잡힌 듯 조여들었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속에서 일렁이며 축축한 솜처럼 뭉쳐져 목덜미를 틀어막았고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말은 더더욱 나올 리 없었다.그 번호는 마치 꿈결 속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유령처럼 소리 없이 다가와 그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의 고통과 갈등을 다시 불러냈다.박유진은 손을 떨며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다가 한참을 망설인 끝에 결국 전화를 받지 않기로 했다.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공기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긴장감과 묘한 압박이 가득했다. 박유진은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고 손끝으로 천천히 휴대폰 키보드를 두드려 문장을 써 내려갔다.[진성에 가서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돌아가면 다시 이야기하자. 그래도 되지?]그 메시지엔 그의 복잡한 심경이 담겨 있었다. 현실을 피하고 싶은 마음도, 언젠가 다시 마주하길 바라는 희미한 기대도 모두 그 짧은 문장 안에 섞여 있었다.메시지 전송을 마친 박유진은 망설임 없이 전원을 꺼버렸고 휴대폰을 한쪽으로 툭 던졌다. 마치 그렇게 하면 마음속 어지러운 생각들까지 함께 던져버릴 수 있을 것처럼.주변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텅 빈 공간엔 그의 심장 뛰는 소리만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규칙적이고도 묵직한 박동이 마치 그 존재를 스스로 확인하려는 듯했다.박유진은 눈을 감았다. 피로한 몸은 본능적으로 가장 편한 자세를 찾아갔고 그 짧은 정적 속에서 조금이나마 위로를 찾고자 했다.비록 밤새 한숨도 못 잤고 눈은 충혈되어 있었지만 정신만큼은 유난히 또렷했다.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지탱해 주듯 그는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하지만 피하고 싶을수록 심미연의 모습은 그의 머릿속에서 더욱 선명해졌다. 그녀의 미소는 때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순수하고 따스했으며 때로는 눈빛 하나로도 사람 마음을 뒤흔드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또 부끄러워하던 그 순간순간들
박유진은 자신의 앞날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심미연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는 언제나 그녀의 편이 될 것이란 사실.만약 그녀가 아이를 데려오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그는 가진 것을 다 내어주어서라도 그녀를 돕고 그 아이를 보살필 것이다. 마치 자신의 친딸인 양 지극정성으로.박유진은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은 심미연을 사랑하고 그녀의 아이와 그녀가 지닌 모든 것을 함께 안아줄 준비가 되어 있음을.심미연의 눈가는 어느새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녀의 두 손은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살고 싶어서 지푸라기를 붙잡고 있는 것처럼 박유진의 옷깃을 꼭 움켜쥐었다. 수많은 감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그녀가 박유진에게 진 빚은 너무나도 많고 무거웠다. 그 빚을 다 갚기 위해서는 평생이라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몰랐다.“시간이 늦었으니까 이젠 좀 쉬어. 나도 방으로 돌아갈래.”박유진의 목소리엔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미세한 떨림이 묻어났다. 그는 본능적으로 심미연을 더욱 꼭 안았다. 마치 그녀를 자신 뼛속 깊이까지 끌어안고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어쩌면 이 다정함이 그들 사이 마지막 남은 따뜻함이 될지도 모른다...박유진의 마음속은 쓸쓸함으로 가득했다. 머릿속 이성은 매서운 바람처럼 그를 휘감으며 이제는 놓아줄 때라며 끊임없이 속삭였다.하지만 감정은 뿌리 깊은 덩굴처럼 박유진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얼마나 바랐던가. 단 한 순간이라도 더 심미연의 곁에 머물 수 있기를. 이 찰나의 시간이 남은 생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만 있다면...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박유진의 얼굴을 어루만졌고 그녀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박유진의 마음속 한기를 모두 녹이는 듯했다.심미연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부드럽게 말했다.“이생에 오빠를 만나 알아가고 수많은 인파를 뚫고 함께 걸을 수 있었던 건... 정말 큰 복이었어. 앞으로 어떤 길을 가더라도 우리 손 놓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