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지한의 질문에 심미연이 부끄러운 듯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아니야...”일부러 유혹하지 않아도 강지한과 밤을 보낸 다음 날이면 온몸이 다 쑤시는데 유혹까지 한다면 며칠은 침대에 누워있어야 할 것만 같았다.한쪽에 서 있던 주치의는 이노 하이브의 대표가 심미연한테 와이프라는 호칭을 쓰자 둘의 관계가 부부라고 생각하고 그럼 약 걱정은 없을 것 같아 심미연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하고는 자리를 떴다.“그럼 전 먼저 가볼게요. 미연 씨, 노력 좀 해서 빨리 신약 얻어와요. 그래야 할머니 더 오래 뵙죠.”나이도 드신 분인데 자꾸만 수술하는 것도 방법은 아니었기에 주치의도 심미연만큼이나 신약이 생기길 바라고 있었다.“네, 그럴게요. 고생하셨어요 선생님. 매번 감사드려요.”심미연은 빨개진 얼굴을 한 채 강지한의 손을 뿌리치더니 할머니 곁으로 다가가 금세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누워계신 할머니를 바라보았다.“미연 씨, 할머니 일단 병실로 모셔다 드려야 해요.”“아, 네.”그때 간호사가 넌지시 말하자 심미연은 곧바로 침대에서 떨어져서 다시 강지한을 돌아보았다.강지한은 마치 심미연이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리는 사람마냥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사실 성무진에게서 심미연 할머니의 병세를 전해 들었을 때 바로 신약을 보내주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뼛속 깊이 자본가인 그는 심미연이 부탁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러면 그 틈을 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지한 씨.”그때 강지한 앞에 서 있던 심미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3년 동안 그리 좋은 부부관계는 아니었어서 심미연이 이렇게 다정하게 강지한의 이름을 부른 것도 정말 오랜만이었다.갑자기 제 이름을 불러오는 심미연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달콤해서 강지한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침대에서도 저 목소리로 부르는 이름만 들으면 당장이라도 그녀를 품에 가둬버리고 싶었는데 지금도 여전히 반응하는 몸에 강지한은 깊은 눈동자로 심미연을 주시하며 입술을 움직였다.“여기서 유혹할 생각이야?”제 앞
심미연은 저녁이 빨리 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그래.”강지한은 손으로 심미연의 코를 건드리며 말했다.“가서 할머니 옆에 있어 드려.”그 말에 정신이 돌아올 때마다 결혼한 지 3년이나 됐는데도 얼굴 한번 못 본 손주사위가 보고 싶으시다던 할머니가 떠올라 심미연은 한참을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지한 씨, 나랑 같이...”그때 갑자기 울리는 강지한의 핸드폰에 심미연은 말을 채 끝내지 못하고 입을 다물어야 했다.강지한의 핸드폰에 적힌 온지유라는 이름에 심미연은 품고 있던 모든 기대가 부서지는 것만 같았다.세 사람이 나누는 사랑은 항상 참는 이가 생기기 마련이었다.“가서 할머니 옆에 있어 드려. 나는 로펌 좀 가봐야겠어, 지유가 배 아프다고 해서.”강지한은 혹시나 심미연이 기분 나빠할까 봐 부러 한마디 더 보탰다.“임신 중이라 감정 기복이 심한 거야, 3개월 뒤면 괜찮아질 거야.”온지유에 대한 걱정이 가득한 그의 얼굴에 숨이 막혀오는 것 같았던 심미연은 애써 괜찮은 척 고개를 끄덕였다.“얼른 가봐, 운전 조심하고.”심미연은 자신도 임산부라고 나랑은 같이 있어 줄 수 없는 거냐고 다 말해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렇게 말한다 해도 강지한이라면 그녀가 온지유를 질투해서 꾸며낸다고 생각할 테니 말 안 하느니만 못했다.그런 심미연을 가만히 바라보던 강지한이 그녀의 얼굴을 잡아 올렸는데 심미연이 습관적으로 고개를 돌린 탓에 입술이 그녀의 볼에 가 닿았다.그에 강지한은 조금 언짢은 듯 물었다.“기분 나빠?”아까 온지유의 상태에 대해 다 설명했는데 왜 기분 나빠하냐는 듯한 질문에 심미연은 애써 주먹을 그러쥐며 웃음을 띠고 말했다.“아니야 그런 거, 얼른 가봐. 저녁에 밥 같이 먹자.”지금은 자신의 기분 따위가 아니라 할머니의 신약이 더 중요했기에 심미연은 이런 억지웃음은 얼마든지 지을 수 있었다.하지만 자신의 그런 속내를 보아내려는 듯 집요하게 눈을 맞추는 강지한에 심미연은 그를 살짝 밀어내며 웃어 보였다
심미연이 주치의와 알고 지낸 지는 3년 정도 되었지만 둘의 대화는 늘 할머니의 병세를 에워싸고 진행되었기에 이렇게 사적인 대화를 계속 이어가는 건 불편해서 그녀는 자연스레 화제를 돌렸다.“아까 대표님이랑 신약에 대해서 얘기했어요, 내일이면 약 받을 수 있을 거예요. 그 약만 있으면 할머니 상황도 괜찮아지는 거죠?”심미연은 빨리 다 나은 할머니를 모시고 바깥세상을 구경시켜주고 싶었다.심미연을 대신해 안타까워하던 주치의도 그녀가 강지한 얘기는 별로 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아 그저 모른 척 그녀의 질문에 답을 했다.“약을 한동안 써야 알아요 그건, 어느 정도로 좋아질지는 저희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환자의 상태라는 건 언제건 다시 악화될 수 있었기에 의사들은 함부로 장담하지 못했다.그 대답에 실망한 듯 고개를 숙이던 심미연이 말했다.“그럼 저는 먼저 할머니 보러 가볼게요.”“네.”심미연이 나가자 의사는 한숨을 쉬며 언젠가는 심미연이 결혼을 숨긴 걸 후회할 날이 있을 거라고 중얼거렸다.유부남인 게 알려져도 자중하지 못하는 게 남자들인데 총각이라고 알려져 있으면 더 하면 더 하지 절대 덜하진 않을 것 같아서였다.한편 심미연이 무거운 마음으로 병실에 들어서자 김지영은 바로 그녀에게 의자를 내어주며 말했다.“미연 씨, 여기 앉아요.”“고마워요, 요즘 고생이 많으세요.”“아이고, 아니에요, 고생은요!”웃으며 자신을 걱정해주는 심미연에 김지영은 연신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전에 간호하던 사람들에 비해 착하고 서글서글한 양경자는 아주 돌보기 쉬운 편이었다.게다가 심미연이 월급도 넉넉하게 주니 김지영은 고생을 해도 전혀 불만이 없었다.“좀 쉬고 계세요, 제가 할머니 곁에 있을게요.”“그럼 저 잠깐 나갔다 올게요, 무슨 일 있으시면 바로 부르세요.”심미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김지영은 양경자의 옷을 잘 여며주고 밖으로 나갔다.방에 홀로 남은 심미연은 주름이 가득한 할머니의 얼굴을 바라보며 가슴이 아파와 목에 멘 채로 중얼거렸다.“강지한이 신약
“심미연 때문이 아니라 너 좀 쉬라고 그러는 거야. 이렇게 무리하다가 배 속의 애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미간을 찌푸리는 강지한이 기분이 좋아진 온지유가 웃으며 대답했다.“나 걱정해줘서 고마워, 그런데 출근도 안 하면 나 혼자 심심한데, 그러다 우울증 걸리면 어떡해?”“친구랑 카페도 가고 피부과 다니면서 쇼핑하면 괜찮잖아.”온지유 배 속의 아이가 무엇보다도 중요했던 강지한은 그녀를 위해 이것저것 방법을 생각해주고 있었다.“너도 알잖아, 지성 씨 그렇게 되고 나서 어머님이 나한테 준 건 집 한 채, 차 한 대랑 2억뿐이야. 전에는 무용단에서 일했었으니까 돈 걱정은 없었는데 지금은 임신해서 거기도 못 다니니까 일 안 하면 친구랑 놀러 다닐 돈도 없어. 멀쩡한 옷도 당연히 못 사 입고...”눈시울 붉히며 말하는 온지유가 가여워 보였던 강지한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대답했다.“그건 내가 어머니랑 얘기해볼게.”강지성이 그렇게 되고 나서 재산분할에는 관여를 안 했었는데 온지유에게 고작 그만큼만 줬다는 소리에 강지한은 제 어머니도 참 너무한 분이라고 생각했다.그 말에 온지유는 다급히 손사래를 치기 시작했다.“어머님이 체면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시는데 내가 너한테 이런 소리 한 거 알면 당장 나 내쫓으실 거야, 그럼 고용인도 내가 직접 구해야 하고 모든 걸 다 내가 떠안게 되는 거잖아. 나 그럼 더 힘들어져.”강지성이 죽은 뒤 온지유는 강씨 집안에 머무르면서 큰 사모님 대우를 계속 받는 대가로 재산을 그것만 챙긴 것이다.지금 강지한한테 돈이 없다고 불쌍한 척하는 것도 사실은 돈이 아니라 이노 하이브의 지분을 받기 위해서였다.이노 하이브 지분은 1%만 받아도 매년 몇백억씩은 받을 수 있기에 그것만 있으면 평생 돈 걱정은 안 해도 되었다.그런데 강지한이 이 얘기를 문소영한테 하게 되면 문소영이 제 속내를 알게 되고 그렇게 되면 강지한조차 저를 믿지 않을 것이니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일단 밥부터 먹어.”온지유는 다시 수저를 들며 말하는 강
“지한 씨, 미연이 화난 거 아니야? 나 무시하는데?”“지한 씨가 가서 좀 달래줘 봐.”말은 저렇게 불쌍한 척해도 온지유는 이미 심미연의 조상들까지 다 한 번씩 욕한 상태였다.오랄 때는 안 오다가 분위기가 무르익자마자 등장한 그녀에 혹시 문밖에서 엿듣다가 들어온 게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들었다.강지한 역시 심미연이 자신이 달래주길 바라서 온 줄로 알고 유치하다고 생각하며 수저를 내려놓고 목소리를 낮게 깐 채 그녀를 불렀다.“심미연, 이리와.”심미연은 보고 싶지 않은 두 얼굴에 고개도 돌리지 않고 주먹만 꽉 쥔 채 제 갈 길을 갔다.“지한 씨, 내가 가서 사과라도 할게.”둘이 아직은 이혼하지 않았지만 안 좋은 일들을 자꾸 만들어내면 강지한도 심미연의 인성에 대해 오해할 수 있을 것 같아 온지유는 이번에도 심미연에게 누명을 덮어씌우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가지 마.”강지한은 사실 아직도 온지유를 어린 시절 그 착한 여자애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에 반해 경성에서 유명한 이혼변호사인 심미연은 똑 부러지다 못해 매정하기까지 한 여자였으니 온지유가 그녀와 붙으면 당연히 피해를 볼 것 같아 무의식적으로 온지유를 보호하기 위해 그녀를 불러세웠다.“내가 가서 사과 안 하면 미연이도 안 올 거야. 시간도 늦었는데 배고플 것 같아서 그래. 나 괜찮으니까 내가 가서 사과하고 데려올게.”심미연은 그런 온지유의 말을 들으며 헛웃음을 흘렸다.온지유가 사과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기에 심미연은 그녀가 움직이자마자 핸드폰을 꺼내 영상녹화를 시작했다.누가 봐도 모함을 하기 위해 다가가는 것인데 강지한은 그것도 모르고 미간을 찌푸린 채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심미연을 빤히 쳐다보았다.그 시각 어떻게 일을 꾸며낼지 생각해낸 온지유는 서서히 심미연에게로 다가갔다.몇 걸음 걸은 뒤 심미연이 밀친 것처럼 넘어질 생각이었는데 그 순간 신하린이 불쑥 나타나며 심미연의 팔을 잡고 말했다.“왜 이제야 와, 우리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음식 다 식겠어, 얼른 가자.”일부러 간
심미연은 바로 신하린의 팔을 잡으며 강지한을 향해 말했다.“강지한, 당신도 생각이라는 게 있으면 누구 탓을 하기 전에 증거부터 가져와. 여기 CCTV 있으니까 가서 확인하고 하린이가 한 짓 맞으면 그때 다시 찾아와.”원래 같았으면 실컷 욕하고 뛰쳐나갔겠지만 지금은 강지한에게 바라는 게 있으니 심미연은 일부러 속도를 늦추며 말했다.그에 일부러 넘어졌던 온지유는 다급하게 강지한의 옷소매를 잡아끌며 말했다.“지한 씨, 진짜 내가 실수로 넘어진 거라니까, 저 사람들 탓 아니야.”“걱정 마,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넌 그냥 사실대로 얘기하면 돼.”제 눈앞에서 다른 여자만 싸고도는 강지한을 보던 심미연의 표정이 점점 굳어져 갔다.매일 침대에서 가장 진한 스킨십을 하는 상대는 자신인데 이럴 때는 저를 남처럼 대하는 강지한에 마음이 아파왔고 얼굴은 창백해져 갔다.그런 심미연의 마음을 눈치챈 신하린은 서둘러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미연아, 됐어. 그만 말해.”그녀가 잡은 심미연의 손은 얼음장같이 차가웠는데 그게 또 가슴이 아파 신하린은 한숨을 내쉬며 강지한을 향해 말했다.“강 대표님이 저한테 편견 있으신 건 알겠는데요, 아까는 맹세코 온지유 씨한테 손댄 적 없어요. 못 믿겠으면 CCTV 돌려보세요.”시도 때도 없이 사람을 모함하려 드는 온지유를 참아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러면 심미연이 곤란해질 것 같아 신하린이 온 힘을 다해 참고 있는데 강지한은 오히려 제가 아니라 심미연을 보며 묻고 있었다.“심 변호사도 그렇게 생각해?”전에는 심미연이라고 하더니 이제는 심 변호사라 부르며 선을 긋는 강지한에 심미연은 가슴이 아파와 말을 잇지 못했다.“왜 대답이 없어? 할 말이 없는 거야?”저번에 신하린의 뺨을 때리고 덮어씌운 일이 들켰을 때 강지한이 아주 정색을 했었는데 정말 CCTV를 확인했다가 이번 일도 가짜라는 게 까발려지면 그때는 강지한이 정말 저를 신경 쓰지도 않을 것 같아 온지유는 그의 옷소매를 잡으며 간곡하게 애원했다.“지한 씨, 이 사람들
“CCTV 굳이 안 봐도 돼, 형님이 한 행동 여기 다 찍혔으니까.”일부러 형님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며 말하는 심미연에 온지유의 표정은 빠르게 굳어져 갔다.심미연이 몰래 영상까지 찍을 줄은 몰랐는데, 상황이 자신에게 안 좋은 쪽으로 흘러가자 온지유는 급히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쓰러지는 것과 배가 아프다고 하는 건 다 이미 쓴 수법이라 또 쓰면 누가 봐도 거짓말인 게 티 나서 딱히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결국 온지유는 아무런 방법도 생각해내지 못하고 배 째라는 식으로 영상을 확인하기로 했다.어차피 자신은 계속 혼자 넘어졌다고 주장해왔으니 딱히 걸릴 것도 없었다.심미연의 영상만 있다면 온지유도 더 이상 누명을 씌우진 못할 것 같아 신하린은 그녀를 향해 엄지를 추켜들며 말했다.“역시 내 친구야, 잘했어!”눈을 가늘게 뜨고 그 영상을 보던 강지한의 주위에 한기가 맴도는 게 느껴지자 온지유는 점점 불안해졌다.당장이라도 강지한이 저를 외면한다면 저는 기댈 곳도 없어지기에 초조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넌 일단 가서 앉아 있어. 혼자 갈 수 있지?”“지한 씨, 나 혼자 가기 싫은데...”온지유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애써 평온하게 말하는 강지한에도 불안함이 가시지 않는지 온지유는 그를 붙잡으며 말했다.“나 혼자 가기 싫은데...”그때 심미연이 핸드폰을 그녀의 얼굴을 향해 들이밀며 말했다.“형님, 설마 도련님이랑 붙어먹으려고 했다는 거 온 세상에 다 까발려지고 싶은 거예요? 내연녀가 본처의 자리를 노린다는 것도 같이?”“지한 씨, 나 좀 도와줘!”그에 온지유는 일부러 더 놀란 척을 하며 소리 질렀지만 속으로는 온지유가 더 막 나가길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래야 그녀가 쫓겨날 확률이 높아질 테니까.역시나 강지한은 바로 온지유를 품에 가두고 심미연을 노려보며 말했다.“밥 먹으러 오라고 할 때는 안 오더니, 몰래 와서 나랑 지유가 밥 먹는 영상이나 찍고 있었어? 왜? 이혼할 때 재산이라도 더 가져가려고?”강지한은 3년 전에도 일을 꾸며 결혼
“사과해!” 강지한은 맞은 얼굴을 만지며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사실 그는 조금 전 그녀를 엄하게 벌하고 싶었다.하지만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심미연을 보자 가혹하게 벌을 주고 싶다는 생각이 사라졌다.무의식 속에서 그는 심미연을 슬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심미연은 입술을 깨물었다.그녀의 잘못이 아니었기에 전혀 사과하고 싶지 않았다.“사과해, 두 번 말하게 만들지 마!” 강지한이 언성을 높였다.그가 원하는 것은 미안하다는 말 따위가 아니라 여자가 굴복하는 것이었다.신하린은 황급히 심미연을 떼어내고 강지한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미연이 대신 사과할게요, 죄송해요.”그런다고 강지한이 이대로 그냥 넘어갈지는 모르겠지만...심미연은 감동에 눈시울이 붉어졌다.신하린은 강지한이 일부러 자신을 힘들게 할까 봐 걱정되는 마음에 그녀를 대신해 사과한 거다.강지한이 어떤 사람인데, 작정하고 신하린을 난처하게 만든다면 신하린은 무사히 넘기기 힘들다.숨을 고르고 생각을 정리한 그녀는 신하린을 끌어당기고 강지한 앞에 서서 날카롭게 말했다.“하린이 난처하게 하지 마. 얘랑 상관없는 일이잖아! 강지한, 내가 사과할게, 미안해!”온지유는 담담하게 웃었다.“신하린 씨랑 미연 씨는 정말 좋은 친구네요. 사과까지 대신하는 걸 보니 지한 씨가 죽으라고 하면 같이 죽을 거예요?”신하린에게 하는 말이다.요즘 재벌가에선 다들 가식 떨기 바쁜데 신하린과 심미연이 진짜 우정을 나눌 리 없었다.강지한의 검은 눈동자가 심미연의 얼굴로 향하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이게 사과하는 태도야?” 길게 늘이는 말끝에는 약간의 조롱이 담겨 있었다.온지유의 속내를 알고 있는 신하린은 그녀가 일부러 그런 말로 강지한을 자극해 강지한이 심미연을 힘들게 할까 봐 서둘러 말했다.“강지한 씨가 나보고 미연이 대신 죽으라고 하면 기꺼이 죽을 거예요.”심미연이 구해준 목숨이니 기꺼이 그녀를 위해 죽으리라.심미연은 눈물이 맺힌 채 신하린의 손을 꼭 잡고 나지막이 말했다.“바보야.”신하
심미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한 기색을 담아 물었다.“무슨 일이길래 그래요?”이지연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일부러 속도를 늦추며 차분하게 말했다.“온지유 씨가 도망쳤어요.”“언제요?”심미연의 눈빛이 반짝이며 날카로워졌다. 누가 이 일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스쳤다.“어젯밤에요.”이지연의 목소리는 한껏 가라앉아 있었고 자책감이 가득 배어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방심했어요.”심미연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미안해하지 마요. 이건 지연 씨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이지연은 입술을 꼭 깨문 채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제가 당장 찾아올까요?”심미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휴대폰을 천천히 만지며 생각했다.“잠깐만 생각 좀 해볼게요.”어젯밤 강지한이 교통사고를 당한 장면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혹시 온지유의 실종과 강지한이 관련 있는 걸까? 만약 강지한이 온지유를 구한 거라면 도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은 거지? 끝도 없이 밀려드는 의문들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참, 보스. 어젯밤에 스승님 못 보셨어요?”이지연이 물었다.심미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사실은 봤었다. 그녀는 진운혁이 차를 몰고 떠나는 걸 보고 따라붙었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그럴 리가요? 제가 분명히 확인했는데... 스승님께서 이진영 씨랑 같이 식사하고 계셨어요!”이지연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심미연은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렸다.문득 이전에 마주쳤던 진운혁의 모습들이 떠올랐고 그 순간 한 가지 의심이 그녀의 마음속을 훑고 지나갔다.‘그때 내가 본 스승님은... 정말 스승님이 맞았을까? 만약 누군가가 스승님을 사칭하고 있었다면 그 목적은 대체 뭘까?’그때 이지연의 흥분한 목소리가 심미연의 생각을 끊어냈다.“보스! 새로운 정보를 발견했어요!”“무슨 정보예요?”심미연은 본능적으로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귀를 기울이자 이지연의 들뜬 목소
백선영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진은숙의 팔을 살짝 끌어당기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이제 가요.”진은숙은 손바닥 위에 놓인 봉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망설이면서 입을 열었다.“이건... 어쩌죠?”백선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 난처한 상황을 심미연에게 넘기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봉투를 조심스럽게 심미연 앞에 내려놓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모님, 마음은 충분히 받았지만... 이 돈은 받을 수가 없어요.”심미연은 미소를 지으며 눈길을 봉투 위로 흘렸다.“오빠가 직접 드린 건데 마음 편히 받으세요. 저한테 돌려주실 필요는 없어요. 자, 얼른 가서 일 보세요. 저 벌써 배가 고파졌는걸요.”그러나 말하다가 알 수 없는 서운함이 스르르 마음 한쪽에 올라와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박유진은 예전에 밤하늘을 보며 수없이 약속했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그녀와 아이를 평생 지키겠다고. 그런데 지금 그 약속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금세 꺼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오빠, 나랑 약속한 거 잊은 거야?’“정말 감사합니다, 사모님! 사모님과 사장님 두 분 다 참 요즘 보기 드물게 좋은 분들이세요. 두 분, 좋은 일만 가득하시고 영원히 행복하시길 빌게요!”진은숙은 기쁜 얼굴로 연신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 백선영의 팔을 붙잡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오늘 정말 행운이 따랐다 싶었다. 이렇게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다니.심미연도 가볍게 한숨을 쉬고 나서 주방으로 들어가 컵에 따뜻한 물을 따라 목을 축였다. 어쩐지 목이 바싹 마른 게, 감정이 몰려서 그런 걸까.막 물을 다 마셨을 무렵 문밖에서 귀엽고 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 어디 있어요?”그 소리는 마치 봄날에 막 피어난 꽃처럼 듣는 사람 마음을 몽글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심미연은 표정이 풀렸고 얼른 얼굴을 내밀며 따뜻하게 웃었다.“우리 태하, 엄마 여기 있어!”심태하는 쏜살같이 달려와 그녀 품에 안겼다.“엄마, 아빠가 나 버렸어요!”심미연은 깜짝
백선영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모깃소리만큼이나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사장님께서 떠나시기 전에... 집에 안 계시는 동안 꼭 사모님과 도련님을 잘 챙기라고 당부하셨습니다.”진은숙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맞아요, 맞아요! 사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바로 캐리어 들고 곧장 나가셨거든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마음속으로 박유진의 말뜻을 곱씹어 보았지만 마치 안개 속을 걷는 듯 선명하게 와닿지 않았다.“그런데요, 사모님...”진은숙이 심미연을 흘끗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눈빛에는 망설임과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왜 그러세요?”심미연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지만 말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언제나 그래왔듯 도우미 아주머니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었고 태도가 마치 봄바람처럼 따뜻하고 너그러웠다.진은숙은 잠시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더니 마음을 굳힌 듯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어젯밤에 제가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러 나왔는데 계단 모퉁이에서 사장님을 마주쳤었어요. 사장님도 물 마시러 나오신 것 같았어요.”곁에 서 있던 백선영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저도요!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길래 문 열고 나왔더니 사장님이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계셨습니다.”심미연은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어젯밤에 오빠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진은숙은 마음을 가다듬고 이어서 말했다.“불빛이 비쳐서 얼핏 봤는데 사장님 눈가가 벌겋게 부어 있더라고요. 꼭 방금 울기라도 한 사람처럼요. 아마 제가 눈치챌까 봐 인사만 툭 하고는 곧장 자리를 피하셨어요. 전 그냥 물만 마시고 방으로 돌아갔는데 보니까 사장님은 그 자리에 그대로 멍하니 서 계셨어요. 제가 방에 들어간 뒤에도 안 들어오시더라고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덧붙였다.“오늘 아침에 사장님께서 나가신 뒤에 서재를 청소하러 들어갔는데 휴지통에 담배꽁초가 가득 쌓여 있었어요. 어젯밤 내내 잠도 못 주무시고 담배만 피우셨던 것 같아요..
휴대폰 화면이 켜지고 그 익숙하면서도 가슴을 죄는 번호가 뜨는 순간, 박유진의 심장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움켜잡힌 듯 조여들었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속에서 일렁이며 축축한 솜처럼 뭉쳐져 목덜미를 틀어막았고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말은 더더욱 나올 리 없었다.그 번호는 마치 꿈결 속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유령처럼 소리 없이 다가와 그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의 고통과 갈등을 다시 불러냈다.박유진은 손을 떨며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다가 한참을 망설인 끝에 결국 전화를 받지 않기로 했다.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공기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긴장감과 묘한 압박이 가득했다. 박유진은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고 손끝으로 천천히 휴대폰 키보드를 두드려 문장을 써 내려갔다.[진성에 가서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돌아가면 다시 이야기하자. 그래도 되지?]그 메시지엔 그의 복잡한 심경이 담겨 있었다. 현실을 피하고 싶은 마음도, 언젠가 다시 마주하길 바라는 희미한 기대도 모두 그 짧은 문장 안에 섞여 있었다.메시지 전송을 마친 박유진은 망설임 없이 전원을 꺼버렸고 휴대폰을 한쪽으로 툭 던졌다. 마치 그렇게 하면 마음속 어지러운 생각들까지 함께 던져버릴 수 있을 것처럼.주변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텅 빈 공간엔 그의 심장 뛰는 소리만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규칙적이고도 묵직한 박동이 마치 그 존재를 스스로 확인하려는 듯했다.박유진은 눈을 감았다. 피로한 몸은 본능적으로 가장 편한 자세를 찾아갔고 그 짧은 정적 속에서 조금이나마 위로를 찾고자 했다.비록 밤새 한숨도 못 잤고 눈은 충혈되어 있었지만 정신만큼은 유난히 또렷했다.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지탱해 주듯 그는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하지만 피하고 싶을수록 심미연의 모습은 그의 머릿속에서 더욱 선명해졌다. 그녀의 미소는 때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순수하고 따스했으며 때로는 눈빛 하나로도 사람 마음을 뒤흔드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또 부끄러워하던 그 순간순간들
박유진은 자신의 앞날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심미연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는 언제나 그녀의 편이 될 것이란 사실.만약 그녀가 아이를 데려오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그는 가진 것을 다 내어주어서라도 그녀를 돕고 그 아이를 보살필 것이다. 마치 자신의 친딸인 양 지극정성으로.박유진은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은 심미연을 사랑하고 그녀의 아이와 그녀가 지닌 모든 것을 함께 안아줄 준비가 되어 있음을.심미연의 눈가는 어느새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녀의 두 손은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살고 싶어서 지푸라기를 붙잡고 있는 것처럼 박유진의 옷깃을 꼭 움켜쥐었다. 수많은 감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그녀가 박유진에게 진 빚은 너무나도 많고 무거웠다. 그 빚을 다 갚기 위해서는 평생이라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몰랐다.“시간이 늦었으니까 이젠 좀 쉬어. 나도 방으로 돌아갈래.”박유진의 목소리엔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미세한 떨림이 묻어났다. 그는 본능적으로 심미연을 더욱 꼭 안았다. 마치 그녀를 자신 뼛속 깊이까지 끌어안고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어쩌면 이 다정함이 그들 사이 마지막 남은 따뜻함이 될지도 모른다...박유진의 마음속은 쓸쓸함으로 가득했다. 머릿속 이성은 매서운 바람처럼 그를 휘감으며 이제는 놓아줄 때라며 끊임없이 속삭였다.하지만 감정은 뿌리 깊은 덩굴처럼 박유진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얼마나 바랐던가. 단 한 순간이라도 더 심미연의 곁에 머물 수 있기를. 이 찰나의 시간이 남은 생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만 있다면...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박유진의 얼굴을 어루만졌고 그녀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박유진의 마음속 한기를 모두 녹이는 듯했다.심미연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부드럽게 말했다.“이생에 오빠를 만나 알아가고 수많은 인파를 뚫고 함께 걸을 수 있었던 건... 정말 큰 복이었어. 앞으로 어떤 길을 가더라도 우리 손 놓지 말고
박유진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눈빛이 그녀를 감쌌고 낮지만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 말해 봐.” 심미연은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과 마주친 순간, 마음 한켠에서 설명할 수 없는 두려움이 피어올랐다. 마치 오래도록 감춰온 비밀이 이제야 드러날 것만 같은 예감처럼. “왜 그래, 미연아?” 박유진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우면서도 따뜻했다. 그녀의 불안을 감싸 안으려는 듯 아주 섬세하게 묻는 말이었다. 심미연은 입을 열 듯 말 듯 망설였다. 떨리는 입술이 달싹이기만 할 뿐 말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마음 깊은 곳에서 끌어올리고 있는 건 누구에게도 쉽게 털어놓을 수 없던 진실이었다. 그러다 마침내 결심한 듯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강지한의 딸, 강상미. 들어본 적 있지?” 박유진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 아이가 왜?” 툭 튀어나온 말이었지만 그의 마음속에 조용한 파문이 일었다. ‘미연이랑 강지한의 딸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왜 지금에서야 그 아이를 말하는 걸까.’ 심미연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다짐하듯 눈을 감았다가 뜨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사실 예전에 내가 잃어버린 내 딸... 그 애는 세상을 떠난 게 아니었어.” 그 말 한마디를 꺼내기 위해 그녀는 거의 모든 용기를 다 쏟아부었다. “정말이야?” 박유진의 목소리는 놀라움에 젖어 있었다. 그의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그때 너 분명히 말했잖아. 아이 숨 안 쉬고 있었다고. 직접 확인했었잖아... 확신했었어.” 그 순간, 박유진의 머릿속을 스친 단 하나의 가능성. ‘설마... 지금 미연이가 말하려는 게... 그 아이가 강상미라는 말이야?’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껏 맞춰지지 않던 조각들이 하나로 이어지고 복잡하게 얽혔던 퍼즐이 비로소 그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박유진의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손끝이 얼어붙고
박시훈은 눈을 깜빡이며 바로 앞에 있는 얼굴을 바라봤다.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예쁜 여자가 있을 수가 있지?’ 심장이 터질 듯 뛰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심장 박동이 너무 빠른데요? 정상은 아닌 것 같네요.” 심미연은 이마를 찌푸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박시훈은 민망해서 땅속으로 숨어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내가 왜 비정상이야... 완전 정상이거든...’ 심미연은 아무렇지 않게 그의 상처를 확인했다. 상처는 붉게 부어 있었고 피도 조금 배어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약을 꺼내 상처 위에 다시 발라주었다. 상처는 쓰라렸지만 박시훈은 이 순간이 영원히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곁에 있는 지금이 너무도 소중했다. 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상처를 감싸고 도구들을 하나씩 정리했다. 마무리를 한 뒤 장갑을 벗으며 병실을 나갈 준비를 했다. “저... 방금 야식 시켜놨는데... 같이 먹고 가주면 안 돼요?” 박시훈은 괜히 목이 메여 말끝이 흐려졌다. 자신이 이렇게 소심한 사람이었다니, 스스로도 놀라웠다. ‘내가 왜 이 사람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거야...’ “저는 밤에 야식 먹는 습관 없어요.” 심미연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야식 너무 자주 먹지 마요. 건강에 안 좋아요. 전 이만 갈게요. 야식 먹고 푹 쉬세요.” 그녀의 말에 박시훈은 마치 한겨울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얼어붙었다. 심지어 발끝까지 저릿했다. 그녀가 간다. 그를 남겨두고 그냥 떠나버린다. 속이 텅 빈 것처럼 허전했다. 심미연은 이미 등을 돌린 채 병실을 나서고 있었고 박시훈의 낙담한 얼굴은 그녀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병실을 벗어난 심미연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깊게 숨을 들이켰다. 몇 시간째 이어진 수술에, 온몸이 녹초가 된 상태였다. 하지만 강지한을 살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로비로 걸어 나왔을 때 문 앞에 서 있는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심미연의 시선이 하얗게 눈처럼 샌 강준형의 머리카락에 머물렀다. 가슴 어딘가가 저릿하게 아려왔다. 만약 시간이 되돌릴 수 있다면. 그저 아무 걱정 없이 웃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땐 주저 없이 말했을 것이다. ‘네. 할게요.’그때 그녀는 강지한을 사랑했고 그의 가족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더 이상 강지한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리고 강준형이 걱정된다고 해서 그 바람을 무조건 들어줘야 할 이유도 없었다. 곁에서 조용히 그녀를 훔쳐보던 가정부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사모님은 역시 마음이 떠나신 거구나...’ ‘이러다 어르신 또 며칠을 우울하게 보내시겠네...’강준형도 그녀의 침묵에서 모든 걸 느낄 수 있었다. 인연이란 게 억지로 붙잡는다고 이어질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비록 아쉬움은 남지만 그 역시 그녀의 선택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할아버지, 사실 저랑...”“딩.” 심미연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려는 순간,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고개를 든 그녀는 곧장 부드러운 눈빛을 머금은 박유진과 눈이 마주쳤고 그 말은 다시 목구멍 깊숙이 삼켜졌다. “오빠, 여긴 어떻게 왔어?”박유진은 따뜻한 미소로 대답했다. “너 데리러 왔어.” 그리고 곧 예의를 갖춰 강준형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강준형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유진아, 너랑 미연이...?” 어딘가 모르게 다정해 보이는 둘의 분위기. 설마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의심이 스쳤다.“할아버지, 제가 차까지 모셔다드릴게요.” 심미연은 사실 내일 박유진과 혼인신고를 하러 갈 거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조금 전, 강준형이 ‘강지한과 다시 잘해봤으면 좋겠다’고 했던 말이 떠오르자 그 말을 도저히 꺼낼 수 없었다.‘말하지 말자. 괜히 말했다가 할아버지 마음만 상할 수도 있어.”그 순간, 박유진의 손이 저절로 움켜쥐어졌다. ‘할아버지한테
하지만 정작 온지유의 칼끝을 막나낸 사람은 그다지 친하다고 할 수 없었던 박시훈이었다. 심미연의 진지한 얼굴을 본 강준형은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걸 단박에 알아챘다. 더는 묻지 않았다. 그녀는 조심스레 그를 의자에 앉히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만 앉아 계세요. 옷만 갈아입고 금방 나올게요.” “그래. 다녀오너라.” 강준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가볍게 흔들어 보냈다. 심미연이 등을 돌려 복도로 사라지자 그는 그녀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그리고 이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곁에 서 있던 가정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요즘 사모님이 예전보다 훨씬 더 예뻐지신 것 같아요. 성격도 훨씬 부드러워지셨고요. 만약 사모님이 도련님과 다시 재결합하신다면 어르신께서도 도련님 혼자 남을까 봐 걱정 안 하셔도 될 텐데요.” 강준형은 그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다. 미연이가 돌아온다면 지한이도 지금처럼 외롭진 않겠지. 상미도 엄마 손길이 필요하고... 지한이가 아무리 잘 챙긴다 해도 아빠는 아빠일 뿐이지. 엄마처럼 섬세하긴 어렵잖니. 게다가 지한이는 이노하이브를 이끄는 입장이라 상미를 온전히 돌보기엔 시간도 턱없이 부족하고 말이다.” “나중에 사모님께 슬쩍 한번 말씀드려보시는 건 어떠세요?” 가정부는 늘 심미연을 좋게 봐왔다. 도련님과 이혼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도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요즘 세상에 외모, 인품, 성격, 효심까지 갖춘 여자를 다시 만나긴 정말 쉽지 않으니까. 강준형은 또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분위기 봐서 말해보지. 미연이가 듣기 싫어하면 더는 꺼내지 않을 거다.” “네. 그게 좋을 것 같아요.” 가정부도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옷을 갈아입은 심미연이 다시 나타났다. 그녀는 다가와 손을 내밀며 말했다. “가시죠. 할아버지. 제가 집까지 모셔다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