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7화

Author: 우담
서이담은 서하율의 손을 꼭 잡고 병원을 나섰다.

서하율은 끝까지 뒤를 돌아보며 정하준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곁에 있던 동료가 웃으며 다가와 말했다.

“혹시 친척 동생이에요? 그 여자아이 선생님이랑 진짜 닮았던데요. 가족들이 다 미남미녀인가 봐요.”

정하준은 한쪽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래요? 그렇게 닮았어요?”

고개를 들어 다시 쳐다봤을 땐 서이담과 아이는 이미 멀찍이 사라진 뒤였다.

만약 진짜로 저만한 딸이 있었더라면 최명희 여사는 아마 기절할 정도로 기뻐했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래도 그 아이는 참 귀엽게 생겼다. 정하준은 문득 서하율이 떠올랐다. 마음 한구석에 묘한 감정이 스며드는 것 같았다.

...

집으로 돌아가는 길.

“엄마, 감자 그 아저씨 차에 그대로 있어요.”

“감자?”

서이담은 한 박자 늦게야 알아챘다. 딸이 도로 위에서 구한 그 연한 베이지색의 작은 강아지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 위험했던 상황이 다시 떠오르자 그녀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튼튼이 다시는 그렇게 위험한 행동 하면 안 돼.”

“알았어요. 그런데 그 아저씨 차가 그렇게 빠르진 않았고 나도 차에 치인 건 아니에요. 그냥 놀라서 혼자 넘어졌어요.”

“그래도 안 되는 거야.”

서이담은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단호히 말했다.

서하율의 태명은 ‘튼튼이’였다. 오로지 건강하게 자라주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서 지은 이름이었다. 그런 서하율은 서이담에게 전부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엄마, 감자 그 아빠랑 닮은 아저씨 차에 그대로 있다니까요?”

“하율아, 다른 사람한테 그 아저씨가 아빠랑 닮았다고 말하면 안 돼.”

서이담은 조급한 마음에 말이 앞뒤가 맞지 않게 이어졌다.

“그런 말 들으면 그 아저씨도 불쾌할 수 있어. 그러니까 우리 예의 지켜야지.”

설명이 스스로도 말이 안 된다는 걸 느꼈지만 다행히 서하율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이담은 그저 딸을 꼭 안을 수밖에 없었다.

한 번 내뱉은 거짓말은 실타래처럼 엉켜만 갔다. 풀려고 할수록 점점 더 꼬였다.

그녀는 정하준에게 다시 찾아가 강아지를 돌려달라고 할 생각이 없었다.

지금 사는 곳은 박순자 집인데 오래된 다세대 주택이라 개 짖는 소리만으로도 이웃과 마찰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정하준은 그렇게 동물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닐 거라 믿고 싶었다. 물론 딱히 자상한 사람이었던 적도 없지만.

과거에 그녀가 불쌍한 유기견 한 마리를 데려왔을 때도 그는 시큰둥하게 거절했었다.

잠깐만이라도 맡아주면 안 되냐는 말에도 그는 단칼에 잘랐다.

정하준은 그런 사람이었다. 침대 위에서만 다르게 굴 뿐, 평소엔 누구에게나 냉담하고 때론 말투까지 싸늘했다.

“하율아, 네 수술 잘 끝나고 건강해지면 엄마가 열심히 돈 벌어서 우리 집 사자. 그러면 그때는 꼭 강아지 키우자.”

“그런데 그땐 감자가 아니잖아요...”

딸의 작은 목소리가 서이담의 가슴을 콕 찔렀다. 한마디 한마디가 가늘지만 단단한 가시처럼 아팠다.

밤 아홉 시, 서이담은 딸과 함께 손글씨 숙제를 했다. 딸은 종이에 귀여운 작은 강아지를 그렸다. 부드러운 크림색 강아지, 분명 감자였다.

서이담은 결국 참지 못하고 휴대폰을 꺼냈다. 그가 줬던 명함을 찾아내고 적혀 있던 번호를 눌렀다. 강아지를 돌려달라고 말할 참이었다. 아마도 이 번호는 정하준의 업무용일 터였다.

지난 7년 동안, 서이담이 정하준에게 전화를 건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처음은 6년 전 병원 침대에 누운 채 과다 출혈로 온몸이 축 나 있었을 때였다. 그 깊은 밤,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걸었고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누구시죠?’

그 한마디만 듣고 서이담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지금 그녀는 베란다에 서 있었다. 거실에서는 여섯 살 딸이 소파에 앉아 조용히 TV를 보고 있었다.

서이담은 조용히 베란다 문을 닫고 문에 등을 기대어 섰다. 화면 속 숫자를 한참이나 응시하다가 결국 전화를 걸었다.

세 번의 신호음이 울리고 전화를 받은 건 뜻밖에도 여자였다. 수화기 너머에서 상대방의 맑고 청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하준이 찾으시나요?”

서이담은 핏기가 사라진 손으로 휴대폰을 꼭 쥔 채 한순간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듯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목구멍이 굳어져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수화기 너머의 여자가 다시 몇 차례 ‘여보세요?’ 하고 부르자 그제야 겨우 목소리를 되찾았다.

“죄송합니다. 잘못 걸었어요.”

“아니요, 잘못 건 거 아니에요. 정하준 찾으셨죠? 지금 샤워 중인데 이따가 전화 드리게 할게요.”

먼저 전화를 끊은 건 서이담이었다. 문에 등을 기댄 채 그녀는 천천히 주저앉았다. 지금은 밤 아홉 시였다.

전화기 너머의 여자는 혹시 그의 여자 친구일까?

정하준처럼 잘생기고 집안까지 좋은 남자라면 여자 친구가 없는 게 더 이상할지도 몰랐다.

서이담은 조용히 숨을 고르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문 너머로 달빛이 조용히 내려앉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정하준의 세상에 속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제 7년이 흘렀고 그 사이 두 사람은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아마도 ‘강보람’이라는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아니, 혹시 기억한다고 해도 그저 한때 뚱뚱한 여자애와 잠깐 사귄 적 있다는 식의, 지워버리고 싶은 흑역사쯤으로 여길 것이다.

그때 그녀와 연애를 시작한 것도 결국은 서이담이 정소연과 관련된 약점을 이용해 협박했기 때문이었다.

서이담은 저혈당이었다. 출산 이후 갑자기 빠진 체중 때문에 생긴 문제였다. 피곤하거나 긴장할 때면 이런 식으로 어지럼증이 찾아오곤 했다.

문고리를 꽉 잡고 눈을 감았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서이담은 몸의 균형을 유지하려 애썼다.

그때,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이 진동했다. 아까 그 번호였다. 정하준이 전화를 걸어온 것이었다.

손바닥이 얼얼해질 만큼 진동이 전해졌고 그녀는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다가 결국 전화를 받았다.

한편, 배씨 가문 저택 3층.

방금 샤워를 마친 정하준은 검은색 실크 잠옷 차림으로 머리에서 물방울을 또르르 흘리며 방을 거닐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무표정했고 시선은 바닥에 깔린 강아지에게 향했다.

갓 태어난 듯한 작은 강아지가 우유를 허겁지겁 마시고 있었다.

전화를 받으며 그는 강아지가 사료그릇에 몸을 파묻으려 하자 그대로 목덜미를 잡아 들어 올렸다.

“여보세요. 누구시죠? 무슨 일로?”

그 옆에 있던 정예진이 못마땅한 듯 말했다.

“야, 좀 살살해. 너무 거칠잖아.”

그러고는 강아지를 그의 손에서 빼앗아 안았다.

서이담은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다정한 여자의 목소리를 들었다. 방금 입에서 나올 뻔했던 말들이 다시 목에 걸려 멈췄다.

그는 지금 여자를 안고 있었고 심지어 전화를 받으며 장난까지 치고 있었다.

연인과 침대에 있다가 받은 전화였을 수도 있다.

서이담의 얼굴은 순식간에 창백해졌고 그녀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여보세요? 무슨 일이신데요?”

정하준은 전화를 끊지 않고 여전히 담담한 목소리였다. 병원용 번호다 보니 환자가 걸어온 거라 생각했다.

“접니다, 정 선생님. 혹시 제 딸이 구한 강아지가 아직 선생님 차에 있나요?”

조심스럽고 낮은 여성의 목소리에 정하준은 잠시 멍해졌다. 요즘 내내 생각하던 강보람의 환상이 그의 감각을 흐리게 만든 걸까. 그 목소리가 어딘지 낯익었다.

“네, 제 차에 있어요.”

“내일 시간 괜찮으세요? 장소를 정하시면 데리러 갈게요. 딸아이가 그 강아지를 무척 좋아해서요...”

“다음 주쯤 드리죠. 내일은 한성에 다녀와야 해서요. 돌아오면 연락드릴게요.”

“네, 알겠습니다. 신세 졌습니다.”

서이담은 전화를 끊으려 했지만 그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연락처 저장하려고요.”

“서이담이요.”

“소이담?”

정하준이 중얼거리자 옆에서 정예진이 눈을 흘기며 말했다.

“서! 서쪽 서! 귀 좀 파라, 진짜.”

그녀의 밝고 경쾌한 목소리는 서이담의 가슴을 찔렀다.

화면을 보는 게 아니라도 서이담은 눈앞에 정예진의 생생한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다. 누가 봐도 재벌 집 딸 같은 여자.

서이담은 도망치듯이 얼른 전화를 끊었다. 그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 도망치는 것이 유일하게 그녀를 지켜주는 방법이었다.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다시 너의 세계로   제100화

    정하준은 진심이었다. 그의 답변은 진지하게 고민한 뒤에 나온 답변이었다....서이담은 오늘 어쩌다 지각을 했다. 라움은 탄력근무제이긴 하지만 미루다 미루다 결국에는 연말에 한꺼번에 몰아 업무를 마치는 일이 허다했다.서이담은 자리에 앉은 후 컴퓨터부터 켰다. 하지만 아직도 수리를 안 한 것인지 아무리 켜봐도 켜지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가방에서 자신의 태블릿을 꺼냈다.하지만 태블릿으로 뭔가를 확인한 지 2분도 안 돼 금방 회의가 시작되었다.짧은 회의가 끝난 후, 백서연이 그녀를 불러세우며 보름 안에 드레스 하나를 디자인하라고 지시했다. 적절한 가격이었기에 서이담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구체적인 요구사항은 메일로 보내줄게요.”“네, 알겠습니다.”서이담은 자리 자리로 돌아갔다. 그러고는 다시 뭔가를 하려는데 이번에는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봉규남으로 잠깐 사무실로 오라는 내용이었다.사무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거래처의 브랜드 책임자가 앉아 있었다. 책임자는 중년 남성이었다.그는 다음 시즌의 디자인에 대해 논의하다가 서이담을 보고는 갑자기 눈을 반짝이며 그녀와 친구 추가를 하고 싶다고 했다.거래처 책임자가 디자이너의 연락처를 요구하는 건 크게 문제 될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서이담은 그의 눈빛이 왠지 모르게 꺼림칙하게 느껴져 연락처를 주는 게 조금 망설여졌다.그때 봉규남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세 사람이 함께 있는 단톡방을 만들었다. 그러고는 문제 될 거 있으면 톡으로 얘기하라고 했다.서이담은 그런 그에게 고맙다는 눈빛을 보냈다.봉규남은 다른 대표들과 달리 직원을 아낄 줄 알고 회식 자리에서도 강제로 술을 권하거나 하지 않았다.라움이라는 스튜디오는 그다지 큰 곳이 아니었지만 봉규남이라는 이름은 꽤 무게가 있었다.서이담이 봉규남을 존경하는 건 단지 그가 직원을 위할 줄 아는 참된 대표라서가 아니었다. 오래전, 그 어떤 회사도 그녀의 이력서를 받아주지 않았을 때 오직 봉규남만이 그녀의 가치를 알아봐 주고 면접 기회를 주었다.서이담은 그

  • 다시 너의 세계로   제99화

    “너는 누나가 돼서 그런 말을 하고 싶어?”최명희는 바로 정예진의 등을 때리며 그녀를 째려보았다.“나 다 알아. 성찬이 사촌 동생이면 봉규남이잖아. 규남이 할아버지는 깐깐하다고 소문난 교수님이고. 아마 성찬이 얘기를 들으면 교수님은 기절하실지도 몰라.”정예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최명희를 데리고 밖으로 향했다.최명희는 겉보기에는 상냥하고 둥근 사람이지만 한때 정윤범과 비즈니스를 함께 진행했던 사람이라 전혀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정예진은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확인해 보고 싶었다.“그러니까 만약에라고 했잖아요. 만약에 하준이가...”“만약에도 안돼. 나니까 이런 얘기를 들어주지 만약 네 아빠가 들었어 봐. 바로 혈압 오르고 난리 났을 거야.”...현관문이 열리고 정하준이 집 안으로 들어왔다.네모는 소파 아래에 엎드린 채 현관문 쪽을 한번 쳐다보았다가 다시 엎드려 눈을 감았다.노견이라 어릴 때처럼 사람을 반기는 게 열정적이지 않았다.리트리버는 원체 사람을 좋아하는 견종이라 어릴 때는 지칠 줄 모르는 기계처럼 정하준의 곁을 맴돌며 말썽을 부렸다.특히 네모는 사모예드와 리트리버가 섞인 믹스종이라 더더욱 그러했다.이갈이했을 때, 네모는 정하준이 아끼던 고서를 단숨에 찢어버렸고 서재의 벽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았다.정하준이 2년간 해외에 있었을 때 네모는 본가에서 키워졌다. 그러다 정도현이 M 국으로 가게 되면서 네모도 함께 데리고 갔다.정하준은 졸려 보이는 네모의 곁으로 다가가 갈변한 사과를 바닥에 내려놓았다.네모가 코를 킁킁거리며 먹으려고 하자 정하준이 곧바로 제지했다.“안 돼.”하지만 네모는 지시를 듣지 않고 곧바로 사과를 한 번 핥았다. 그러고는 금세 맛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외면해 버렸다.정하준은 욕실로 가 물줄기를 맞으며 가만히 서 있었다. 뜨거운 물들이 그의 얼굴을 지나 몸으로 흘러내렸다.20분 정도 흐른 후, 정하준은 가운을 입고 다시 거실 소파로 향했다. 그때 마침 벨 소리가 울렸고 그는 발신자를 확인한 후 느

  • 다시 너의 세계로   제98화

    정하준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정하준은 아무 말도 없이 아까 서하율이 줬던 사과를 한입 베어 물었다.차창으로 스쳐 지나가는 가로등 불빛들이 그의 얼굴을 슬프게 비추고 있었다.정하준은 손에 든 사과를 바라보며 서하율의 얼굴을 떠올렸다. 분명히 단 사과인데 먹으면 먹을수록 점점 더 입안이 쓰게만 느껴졌다.“엄마한테 전해. 다음 주도 바쁠 예정이고 그다음 주도 바쁠 예정이니까 소개팅 같은 거 주선할 생각하지 마시라고.”정예진은 동생의 말에 머리가 다 지끈해 났다. 지금은 소개팅을 나가고 말고를 논의할 시간이 아니었다.정하준이 한 가정을 깨트리지 못하게 막는 게 급선무였다.“정하준, 너 그러는 거 엄마랑 아빠가 아시게 되면 진짜 죽어.”“아직 모르잖아. 그리고 나 아직 뭐 안 했어.”정하준은 차가운 목소리로 얘기하고는 다시 사과를 바라보았다. 고작 다른 곳에 한눈 좀 팔았다고 금세 갈변해 버렸다.“네가 상간남을 자처하겠다는 걸 알면 부모님 백 퍼센트 쓰러져!”정예진의 외침에 정하준은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그냥 응원해 줄 수는 없는 거야?”정하준은 그렇게 말하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뭐? 여보세요? 여보세요? 야!”“상간남이라니?”정예진은 등 뒤에서 들리는 엄마의 목소리에 하마터면 심장이 다 튀어나올 뻔했다.“어, 엄마... 여기는 언제 올라왔어요. 깜짝 놀랐네.”정예진이 말을 버벅거리며 어딘가 어색한 눈빛으로 최명희를 바라보았다.“상간남 소리 뭐냐고. 누가 상간남이라는 거야?”정예진은 그녀가 잘못 들은 거라고 얘기하려다가 생각을 바꿨다. 최명희의 생각을 알아볼 절호의 기회였으니까.정씨 가문에서 최명희는 그래도 오픈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편이었다.“성찬 씨네 사촌 동생이 유부녀를 좋아한대요.”“세상에,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여자가 얼마나 많은데 왜 하필 유부녀야?”최명희는 구성찬의 사촌 동생을 알고 있다. 봉규남이라고 직접 창업한 회사도 있고 얼굴도 괜찮게 생긴 편이라 그녀는 기억하고 있었다.“그런데 엄마

  • 다시 너의 세계로   제97화

    “네.”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도윤이 아저씨는?”“좋아요.”이도윤의 엄마는 박순자와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그래서 박순자의 집에 배관이 고장 났거나 전구를 갈아야 하는 일이 생기면 이도윤은 늘 빠르게 달려와 도움을 주었다.서하율도 오며 가며 이도윤과 자주 얼굴을 보며 친하게 지냈다.그런데 좋다고 말한 뒤에 아이는 잠시 머뭇거렸다.서이담은 감정에 솔직한 딸이 머뭇거리자 조금 흥미로운 얼굴로 바라보았다.“도윤이 아저씨도 좋지만 하준이 아저씨가 더 좋아요.”서이담은 딸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해주지 않았다.“엄마, 하율이 생일 때 준서랑 하준이 삼촌도 부르면 안 돼요?”서하율의 생일은 정확히 일주일 뒤였다.“그날은 증조할머니 보러 가기로 했잖아.”서이담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아...”아이는 실망한 듯한 얼굴로 시선을 내렸다가 바로 다시 미소를 지으며 서이담의 품에 뛰어들었다.“증조할머니 만나면 비밀 얘기를 엄청 많이 해줄 거예요. 그리고 하율이가 그린 그림도 선물해 줄 거예요.”...서이담의 집에서 나온 후 정하준은 택시를 잡았다.집으로 가는 길, 휴대폰을 들어 카톡을 확인해 보니 어디 갔냐는 정예진의 메시지 내용이 보였다.정하준은 아무런 답장도 해주지 않았다. 아니, 해줄 수 없었다.서이담의 집으로 들어갔다가 남성용 슬리퍼를 보고 기분이 나빴고 온정과 따뜻함이 흘러넘치는 집안 분위기를 보며 그것들을 전부 소유하고 있는 서이담의 남편에게 질투를 하다못해 분노까지 느꼈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정하준은 정예진의 문자에는 답장하지 않았지만 최명희가 그에게 새로운 여자를 소개해 주겠다며 언제 시간이 되냐는 가족 단톡방에는 답장했다.[바빠요. 시간 없어요.]무시당한 정예진이 그에게 메시지 폭탄을 보냈다.[정예진: 네가 이담 씨 아파트로 들어가는 거 봤어.][정예진: 레오한테 다 들었어. 이담 씨랑 따로 얘기를 나눌 정도로 친하다며?][정예진: 너, 이담 씨네 집으로 가서 뭐 했어? 설마 집 바로 앞까지

  • 다시 너의 세계로   제96화

    정하준은 소파에 앉아 집안 곳곳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그가 앉아 있는 소파는 매우 아담했지만 푹신하고 느낌이 좋았다. 거실도 크지 않았지만 곳곳에서 따뜻함이 풍겨 나왔다.탁자 위에는 꽃 한 송이가 든 투명한 꽃병이 놓여 있었고 티비에는 서하율이 붙여둔 갖가지 모양의 스티커가 있었다.서하율은 강아지들을 안방으로 보낸 후 스케치북을 들고 와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그러다 정하준의 시선을 느낀 건지 고개를 들며 물었다.“아저씨, 과일 먹을래요?”정하준은 그다지 먹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잠깐만 기다려요.”아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곧바로 냉장고 앞으로 달려갔다. 그러고는 고개를 살짝 들고 서이담에게 과일을 꺼내 달라고 했다.“자, 여기.”서하율은 사과를 건네받은 후 곧장 거실로 달려와 정하준에게 건네주었다.정하준은 아주 잠깐이지만 서이담의 남편이 그간 어떤 곳에서 어떤 감정을 느끼며 살았는지 눈에 훤히 보이는 것 같았다.그는 시선을 들어 부엌에 있는 서이담을 바라보았다. 서이담은 끓고 있는 물은 바라보며 한 손을 들어 목을 스트레칭 했다.그러다 더운지 외투를 벗고는 옷소매를 걷어 올렸다.그녀가 고개를 살짝 숙일 때마다 매끈한 목선이 그대로 드러났다.정하준은 그 모습을 보며 사과를 한입 베어 물었다. 매우 시원하고 단 사과였다. 하지만 그는 이상하게도 입안이 매우 쓰게 느껴졌다. 단맛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그는 어느 순간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그대로 밖으로 걸어 나갔다.서하율은 정하준의 뒷모습을 보며 깜짝 놀란 듯한 얼굴로 서이담을 불렀다.“엄마, 아저씨 갔어요.”서이담도 알고 있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닫히는 소리가 그대로 들렸으니까.정하준을 위해 끓였던 차는 이제 쓸모가 없게 되었다.서이담은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는 찻물을 가만히 바라보다 천천히 컵에 따랐다. 그러고는 거실로 와 딸의 옆에 앉았다.“엄마, 아저씨는 왜 갑자기 가버린 거예요?”서하율이 조금 서운한 얼굴로 물었다.“아마 급한 일이

  • 다시 너의 세계로   제95화

    아파트 주민들 중 진재현과 서이담의 결혼에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동네방네 떠벌릴 정도의 일이 아니었으니까. 젊은이들은 이해해 줄지 몰라도 나이 든 어르신들은 만날 때마다 혀를 차며 혼을 낼 게 분명했다.그래서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되는대로 흘려보내기로 했다. 그리고 부부 사이를 자꾸 의심하는 사람들의 말은 그저 한 귀로 흘려들었다....드디어 집 앞에 도착했다.서하율은 지금 이 상황이 꼭 게임처럼 재밌는지 서이담을 보며 배시시 웃었다.서이담도 그런 아이를 향해 웃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자, 이제 내려와.”그녀는 아이와 함께 있으면 아무리 힘들어도 늘 이렇게 다시 웃게 되었다.정하준은 조심스럽게 아이를 내려놓았다. 아이를 안은 채 6층을 올라왔는데도 그는 조금도 힘들어하는 기색이 없었다.서이담은 문을 연 후 현관에서 슬리퍼로 갈아신었다.정하준은 평온한 얼굴로 현관에 발을 들였다가 무언가를 보고는 금방 표정을 굳혔다.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가지런히 놓여있는 남자용 슬리퍼였다. 그것도 새것이 아닌 이미 신은 흔적이 있는 슬리퍼였다.서이담네 집의 신발장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하지만 서이담의 신발부터 어린애 신발, 그리고 남자의 신발까지 있을 건 다 있었다.눈 앞에 펼쳐진 모든 것들이 정하준에게 끊임없이 속삭이고 있었다. 서이담은 결혼을 한 유부녀고 남편이 있다는 사실을.정하준은 꼭 누군가가 그의 비도덕적인 마음과 황당한 생각으로 가득 찬 머릿속을 아프게 찔러대는 것 같았다.아기 고양이처럼 안겨 오던 서하율도, 그가 손을 잡고 억지로 끌고 왔던 서이담도 모두 그의 것이 아닌 다른 남자의 것이었다.정하준은 순간, 서이담과 서하율이 모두 자신의 것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미친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만약 정말 그렇게 되면...정하준은 주먹을 꽉 말아쥐더니 이내 슬리퍼를 무시하고 양말만 신은 채 안으로 들어왔다.서이담은 정하준이 설마 안으로 들어올 줄은 몰랐기에 조금 벙찐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