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너의 세계로

다시 너의 세계로

By:  우담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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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과 함께 병원에 들른 날, 주치의로 나타난 사람은 7년 전 헤어진 첫사랑이었다. 그사이 서이담은 이름도 외모도 체형도 모든 게 바뀌었다. 과거의 뚱뚱한 소녀는 사라지고 날씬한 여자가 되어 있었다. 그는 당연히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고 그녀가 몰래 자신의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은 더더욱 알 리가 없었다. “엄마, 왜 울어요?” 딸의 순진한 물음에 서이담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저 도망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 학생 시절, 서이담은 누구보다 그를 사랑했다. 끝내 모두가 동경하던 정하준과 비밀 연애를 시작했지만 그 소문은 곧 S대 전체로 퍼졌고 서이담은 뚱뚱하다는 이유로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모두의 비웃음 속에서 고개조차 들 수 없던 그 순간 그녀의 귓가에 들려온 익숙하면서도 냉정한 목소리. “그냥 잠깐 즐긴 거야. 나 곧 유학 가거든.” 서이담은 그렇게 아프고 쓰린 첫사랑을 끝냈다. 하지만 7년이 지난 지금, 다시 나타난 정하준은 그녀의 조용한 삶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선 긋고, 거리 두고, 외면하려 했지만 결국 그녀는 정하준의 침대 위에 있었다. 협박하고, 유혹하고, 병든 척하고, 애교를 부리고 심지어 뻔뻔하기까지... 정하준은 그녀 곁의 모든 남자를 하나씩 쫓아냈다. “정하준, 나 남자 친구 있어.” “그럼 내가 애인하면 되잖아. 그 사람보다 돈도 많고 어리고 훨씬 잘해줄 수 있는데?” 7년 전엔 비밀 연애를 하자던 남자. 7년 후엔 대놓고 애인이 되겠다는 남자. “미쳤어?” “그래. 나 미쳤어. 너한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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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제1화

서이담은 정하준을 다시 마주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오늘 그녀는 여섯 살 난 딸을 데리고 병원에 진료받으러 갔다.

딸은 선천성 심장 질환이 있어 꾸준히 정기 검진을 받아야 했는데 진료실 문을 여는 순간, 서이담은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그는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를 보고 있었다. 높고 곧은 콧대 위에는 무테안경이 얹혀 있었고 하얀 가운은 눈처럼 새하얘서 전체적으로 차갑고 냉정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의 존재 자체가 고고하고 냉철해 보였다.

서이담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원래는 심장외과의 권위자인 황준기 교수에게 진료받으려 했는데, 회진 일정으로 자리를 비운 탓에 간호사의 권유로 담당의를 바꿨던 것이다.

간호사는 해외에서 박사 과정을 마치고 돌아온 정 선생님은 황 교수님의 제자라며 심장외과 8번 진료실에 가라고 했다.

지금 이 순간, 서이담은 그대로 굳은 채 문고리를 쥔 손에 힘을 주고 있었고 급히 고개를 숙여 마스크를 꺼내 썼다. 머릿속엔 당장 딸을 데리고 이곳을 나가야 한다는 생각만 맴돌았다.

벌써 7년이 지났다. 정하준은 언제 돌아온 걸까?

그동안 서이담의 삶은 조용하고 평범했다. 이제 와서 그를 다시 마주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몸이 고장 난 것처럼,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조차 알 수 없었다.

서이담은 본능적으로 딸의 손을 꼭 잡았다. 손바닥은 땀으로 축축했고 긴장한 탓에 등줄기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때, 낮고 또렷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정하준이 고개를 들어 문 쪽을 바라봤다. 안경 너머로 마주한 눈빛에는 차가운 냉기가 깃들어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서이담의 숨이 흐트러졌다.

28살이 된 지금의 정하준은 21살 때의 하얀 셔츠를 입고 있던 소년의 모습과 겹쳤다가도 이내 멀어졌다.

당시 S대의 남신이라 불리던 그가 무려 90킬로가 넘는 뚱뚱한 여학생과 비밀 연애를 했다는 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서이담은 아무 말 없이 정하준과 눈을 맞췄다. 어금니를 꽉 깨물고 딸의 손을 잡은 채 도망치려던 발길도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정하준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가볍게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서하율이죠? 진료기록 좀 볼게요.”

서이담은 간신히 평정을 되찾았지만 안색은 여전히 창백했다. 얼굴을 만지려다 마스크를 쓴 게 느껴지자 그제야 조금 이성을 되찾은 듯했다. 그녀는 잠깐의 ‘가짜 평정’을 유지했다.

정하준은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지금 그녀는 ‘서이담’이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고 더 이상 7년 전의 ‘강보람’도, 그 시절의 뚱뚱한 여자도 아니었다.

지금은 키 170에 겨우 50kg를 조금 넘는 몸무게로 외모도, 이름도 완전히 달라졌다.

딸은 의자에 앉아 진찰을 받았고 가까이에서 바라본 정하준은 여전히 낯익고도 낯설었다.

차가운 공기가 가슴을 타고 퍼져가는 듯한 느낌에 서이담은 무의식적으로 딸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서이담은 곁눈질로 다시 그의 얼굴을 보았다. 무테안경을 쓴 얼굴은 여전히 냉담했고 하얀 가운 아래 흰 셔츠조차 고급스러운 질감이 느껴졌다.

정하준은 청진기로 진지하게 심장 소리를 듣다가 중간에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일상적인 관리에 더 신경 써주세요. 2, 3년 안에는 수술 준비를 하시는 게 좋겠어요. 비용은 이미 알아보셨을 테고요.”

정하준은 서이담을 힐끗 바라보았다. 손에 든 검정 가죽 가방은 손잡이 부분이 닳아 해졌고 흰색 캔버스화는 살짝 누렇게 바랬으며 청바지도 색이 많이 빠져 있었다. 전체적으로 평범한 차림새였다. 이런 고가의 수술비를 감당하긴 쉽지 않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병원에서야 흔히 볼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이 여자를 한 번 더 바라보게 되었다. 마른 체형에 키가 크고 피부가 하얀 여자는 마스크를 쓰고 머리를 하나로 묶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어려 보였지만 여섯 살 된 딸을 생각하면 결코 어린 나이는 아니었다.

긴 목선을 따라 몇 가닥의 검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있었고 전반적인 인상은 차분하고 부드러워 보였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있었고 한 번도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딸 뒤에 조용히 서 있는 모습은 마치 조각상 같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묵묵한 수호자 같기도 했다. 커다란 마스크가 얼굴의 반 이상을 가리고 있었고 보이는 건 아래로 살짝 떨어트린 눈동자뿐이었다.

서이담은 들어온 이후 거의 말을 하지 않았고 정하준은 그런 그녀를 보며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제 진단이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소아청소년과 쪽으로 돌려드릴 수 있습니다. 지금 소아과에 허 교수님이 계실 테니, 그쪽 의견을 들어보셔도 됩니다.”

앞머리에 가려져 눈빛은 보이지 않았고,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실례했습니다.”

그러고는 책상 위에 펼쳐져 있던 진료기록을 정리해 조용히 딸의 손을 잡고 진료실을 나섰다.

정하준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가 나간 후, 그는 안경을 다시 고쳐 쓰고 진료를 이어갔다.

그 뒤로 환자 두 명을 더 본 후, 잠시 짬을 내어 물을 끓이고 고등학교 시절 반장이던 노지성에게서 온 전화를 받았다.

“이번 달 20일, 3반 동창회 있거든. 지금 우리 반 단톡방에 있는 성운 사는 애들은 다 참석 확정이야. 너 몇 년 동안 해외에 있었잖아. 이번에 겨우 돌아왔는데, 네가 안 오면 섭섭하지.”

“응.”

정하준은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날 일정 봐야 돼. 아직 당직표가 안 나와서.”

“야, 진짜 바쁘다 바빠. 동창회 몇 번이나 했는데, 너랑 강보람만 매번 안 나왔잖아.”

강보람이라는 이름이 나오기 무섭게 노지성의 입에서 말이 끊이질 않았다.

“너 강보람 기억 나지? 우리 반에서 제일 뚱뚱했던 애. 걔 대학 졸업하고선 완전 증발했잖아. 기억 안 나? 야, 야, 정하준 듣고 있어? 어라, 왜 아무 말도 없어? 신호가 안 좋나? 네 말이 하나도 안 들리는데?”

그때 책상 위 전기포트가 펄펄 끓기 시작했고 뜨거운 물이 튀어나와 종이 몇 장을 흠뻑 적셨다.

그러나 자리에 앉은 정하준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휴대폰을 든 자세 그대로 잘생긴 얼굴은 침착한 표정이었지만 안경 너머 눈빛은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진료실 문은 열려 있었고 지나가던 간호사가 황급히 들어왔다.

“어머, 물 다 쏟아졌네요. 괜찮으세요, 정 선생님?”

정하준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일어나긴 했지만 간호사의 질문에는 대꾸도 하지 않고 그저 몇 걸음 걸어 창가로 다가갔다.

휴대폰을 쥔 손은 마디가 하얗게 될 정도로 힘이 들어가 있었다.

“진짜 한 번도 동창회 안 나왔어?”

정하준의 말투는 담담했지만 눈빛은 한층 더 깊어졌다.

“누구? 아, 그쪽 신호 안 좋은가 보다.”

노지성이 다시 한번 이름을 불렀다.

“강보람 말이야? 응, 계속 연락 안 돼. 단톡에도 없어.”

노지성이 무슨 말을 더 했지만 정하준은 더 이상 들을 마음이 없었다.

젊은 간호사는 얼굴을 붉히며 책상을 정리해 주고 있었지만 그가 계속 멍하니 먼 곳을 바라보는 걸 보고는 말을 붙이지 못하고 조용히 자리를 떴다.

정하준은 마치 혼자만의 세상에 갇힌 듯 오롯이 자기 생각 속으로 빠져들어 있었다.

오전 진료가 세 명이나 더 남았지만 정신이 흐트러진 정하준은 겨우 마음을 다잡고 마침내 오전 진료를 마무리했다.

그는 책상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길쭉한 파란색 케이스가 있었고 케이스 안에는 검은색 만년필 한 자루가 들어 있었다.

며칠 전 떨어뜨리는 바람에 잉크가 새고 말았던 6, 7년째 써온 펜이었다.

사용감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고 검은 펜 몸체엔 군데군데 페인트가 벗겨져 있었다.

최근에 수리를 마쳤지만 지금은 더 이상 쓰지 않고 소중하게 서랍 안에 넣어두고 있었다.

정하준은 이마를 문지르며 문득 온몸이 지쳐 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

한편, 서이담은 딸을 데리고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고 있었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자꾸만 7년 전의 기억으로 돌아갔다.

그날은 정하준의 생일이었다. 서이담은 잔뜩 기대에 부풀어 그가 있는 룸 앞까지 갔었다. 그런데 안에서 들리는 웃음소리는 너무도 시끄럽고 자극적이었다.

“야, 저거 봐! 쟤 목에 저건 뭐냐? 키스 자국 아냐?”

“진짜야? 설마 진짜 그 뚱뚱한 애랑 잤어?”

“불 끄면 다 똑같다던데? 하하하!”

“진심이야? 나 방금 SNS 봤는데, 너 진짜 그 뚱뚱한 애랑 사귄다고?”

“그 뚱뚱한 애가 소연이 일로 하준이 협박해서 사귀게 됐다잖아. 아니었음 하준이가 그런 돼지랑 연애를 하겠냐고.”

그때의 말들은 강보람의 기억 속에 평생 지워지지 않을 상처가 되었다.

그리고 들려온 건 정하준의 목소리였다.

남자의 목소리가 어찌나 부드럽고 독특했는지, 음악 소리도, 조롱도, 그 앞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응. 그냥 잠깐 즐긴 거야. 나 다음 달에 유학 가거든.”

룸 밖에 있던 서이담은 눈시울이 벌게졌고 숨이 턱 막힐 듯한 가슴 통증에 겨우겨우 버티고 있었다.

정하준은 최상위 재벌가에서 태어난 금수저였다. 그와의 미래를 바랄 수 없다는 걸 서이담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곧 유학 간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의 생일을 마지막으로 이 관계를 정리하려고 마음먹었었다.

하지만 그 사랑은 냉소와 비웃음 속에서 산산이 무너져 버렸다.

정하준에게 선물로 줬던 검은색 만년필은 서이담이 두 달간 아르바이트해서 모은 돈으론 산 40만 원짜리 펜이었다.

서이담에겐 마음을 담은 선물이었지만 정하준의 친구들에겐 그저 조롱거리였다.

“야, 이건 어디서 주워 온 거냐? 설마 그 뚱뚱한 애가 준 거야? 그런 펜을 왜 써?”

“너 같은 사람이 이런 싸구려 브랜드를 왜 써? 너 이미지만 떨어진다.”

...

“엄마.”

딸이 갑자기 그녀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서이담은 숨이 멎을 듯한 회상에서 깨어나 딸을 꼭 안아주었다.

점점 자라나는 아이의 얼굴은 정하준을 똑 닮아가고 있었다.

아이의 눈매, 입매가 점점 그를 닮아가는 것을 보며 서이담은 말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엄마, 오늘 나 진료해 준 그 의사 아저씨, 혹시 아빠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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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서이담은 정하준을 다시 마주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오늘 그녀는 여섯 살 난 딸을 데리고 병원에 진료받으러 갔다.딸은 선천성 심장 질환이 있어 꾸준히 정기 검진을 받아야 했는데 진료실 문을 여는 순간, 서이담은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그는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를 보고 있었다. 높고 곧은 콧대 위에는 무테안경이 얹혀 있었고 하얀 가운은 눈처럼 새하얘서 전체적으로 차갑고 냉정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의 존재 자체가 고고하고 냉철해 보였다.서이담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원래는 심장외과의 권위자인 황준기 교수에게 진료받으려 했는데, 회진 일정으로 자리를 비운 탓에 간호사의 권유로 담당의를 바꿨던 것이다.간호사는 해외에서 박사 과정을 마치고 돌아온 정 선생님은 황 교수님의 제자라며 심장외과 8번 진료실에 가라고 했다.지금 이 순간, 서이담은 그대로 굳은 채 문고리를 쥔 손에 힘을 주고 있었고 급히 고개를 숙여 마스크를 꺼내 썼다. 머릿속엔 당장 딸을 데리고 이곳을 나가야 한다는 생각만 맴돌았다.벌써 7년이 지났다. 정하준은 언제 돌아온 걸까?그동안 서이담의 삶은 조용하고 평범했다. 이제 와서 그를 다시 마주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몸이 고장 난 것처럼,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조차 알 수 없었다.서이담은 본능적으로 딸의 손을 꼭 잡았다. 손바닥은 땀으로 축축했고 긴장한 탓에 등줄기가 미세하게 떨렸다.그때, 낮고 또렷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들어오세요.”정하준이 고개를 들어 문 쪽을 바라봤다. 안경 너머로 마주한 눈빛에는 차가운 냉기가 깃들어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서이담의 숨이 흐트러졌다.28살이 된 지금의 정하준은 21살 때의 하얀 셔츠를 입고 있던 소년의 모습과 겹쳤다가도 이내 멀어졌다.당시 S대의 남신이라 불리던 그가 무려 90킬로가 넘는 뚱뚱한 여학생과 비밀 연애를 했다는 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서이담은 아무 말 없이 정하준과 눈을 맞췄다. 어금니를 꽉 깨물고 딸의 손을 잡은 채 도망치려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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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서이담은 딸이 갑자기 그런 말을 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맑고 또렷한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이를 보는 순간 그대로 굳어버렸다.그제야 서이담은 깨달았다. 심장병을 안고 살아온 딸은 또래보다 훨씬 작고 말랐지만 어느덧 여섯 살이 되었다는 사실을.오랫동안 비어 있던 아버지의 존재는 아이 마음속에서 민감한 결핍으로 자라났고 ‘아빠는 멀리 떠났어’라는 서이담의 말은 나이를 먹을수록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선의의 거짓말이 되어가고 있었다.서이담의 서랍에는 정하준과 함께 찍은 사진이 한 장 있었고 딸은 그 사진을 본 적이 있었다. 서이담은 그 어린아이가 그 사진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그 사진은 고등학생 시절, 정하준과 나란히 찍은 사진이었다. 반에서 상위권이었던 세 사람이 함께 찍은 걸 그녀는 다른 한 사람을 잘라낸 뒤 간직해왔다.그리고 지금 이 도시에 딸을 데리고 살게 될 줄도, 그렇게 살던 어느 날 우연히 정하준을 다시 마주하게 될 줄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그때 갑자기 버스가 급정거했다.서이담은 몸이 앞으로 쏠리며 본능적으로 품에 안은 아이를 감싸안았고 잠시 멍하니 있다가 아이에게 말했다.“아니야.”“그런데 그 아저씨 아빠랑 진짜 닮았어요.”서이담은 말문이 막혀 몇 초간 아무 말도 못 하다가 조용히 말했다.“그냥 좀 닮은 거야.”집에 돌아온 후, 서이담은 박순자의 방 문을 두드렸다.박순자는 동네에서 괴팍하기로 유명한 사람이었고 이 오래된 집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2년 전, 서이담이 딸아이의 유치원 입학 문제로 서류에 문제가 생겼을 때 우연히 진재현이라는 남자를 알게 되었다.진재현의 아버지는 병세가 위중해 곧 돌아가실 상황이었고 그는 아버지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형식적인 결혼을 하고 곧바로 이혼할 여자를 찾고 있었다.그는 회사에서 해외 발령이 난 상태였고 서이담은 딸의 입학 문제와 호적 등록을 해결하기 위해 그와 초고속 결혼을 하고 짧은 기간 후 이혼했다.서이담은 진재현의 아버지를 직접 찾아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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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밤 10시, 서이담은 침대에 누워 예전에 쓰던 SNS 계정을 열었다.먼지가 내려앉은 듯한 그곳에는 반장 노지성이 보낸 문자 몇 개가 도착해 있었다.[강보람, 다음 주에 별빛마루에서 동창회 하기로 했어. 일정은 전부 동기 단톡방에 공유해놨어. 지금 너만 빠졌어. 올 거지?][너한테 몇 번이나 문자 보냈는데도 답이 없네. 혹시 사는 게 힘들면 우리한테 말이라도 해. 다들 오래된 친구잖아. 도울 수 있는 건 도와줄게.]서이담은 조용히 반 단체 채팅방을 들여다봤다. 문자가 계속해서 올라오고 있었다.사실 서이담은 예전부터 이 방을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이 방에는 정확히 48명으로 한 반 전원이 다 들어와 있었다. 괜히 혼자 나가버리면 더 눈에 띌 게 뻔했다. 게다가 이 계정 자체를 거의 켜지 않았다.서이담은 오랜만에 들어가 채팅 기록을 위로 조금 넘겨보았다. 예상대로 누구 하나 그녀를 언급하지 않았다. 예전 학교에 있을 때도 그녀는 늘 공기 같은 존재였으니까.하지만 완전히 무시할 수 있는 공기는 아니었다. 그녀는 아주 뚱뚱했다. 그 시절의 서이담은 최대한 눈에 띄지 않으려 애썼지만 항상 그녀 주변엔 조용한 속삭임이 떠돌았다.돼지, 코끼리, 뚱녀...심지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지나가기만 해도 누군가 그녀를 흘끗 보며 비웃었다.사실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그렇게까지 살이 찌진 않았는데 몸이 안 좋아져 약을 먹게 되었고 그 부작용으로 급격히 체중이 불어버린 것이었다.반면 정하준의 이름은 그 단체방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그랬다. 어디에 있어도 사람들의 중심이었고 그를 둘러싼 단어는 늘 화려했다.천재, 남신, 잘생김, 돈, 권력...서이담과는 철저히 반대편에 있는 사람이었다.서이담은 정하준의 프로필 사진을 눌렀다. 여전히 몇 년 전 올린 사진 그대로였다. 그 역시 이 계정을 자주 들어오지는 않는 듯했다....어느새 시간이 흘러 다음 주 토요일.일주일 동안 서이담은 정신없이 바빴고 결국 세라 측 담당자는 백서연이 밀어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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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룸 안은 밝은 조명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정하준의 얼굴 위로 빛이 그대로 쏟아졌다. 그의 얼굴은 조각상처럼 아무런 감정도 읽히지 않았다. 손끝에 들려 있던 담배는 어느새 불씨가 지문에 닿을 만큼 짧아졌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저 멍하니 앉아 있었다.무언가 타는 냄새가 은은하게 코끝에 스쳤다. 그것이 자신의 살이 타는 냄새라는 걸 정하준은 알고 있었다.하지만 신경이 마비된 사람처럼 이상하게도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순간 정하준은 벌떡 일어나 바닥에 떨어진 재킷을 주워 들었다.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눈동자 깊은 곳에서는 어두운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병원에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갈게.”정하준은 빠르게 룸을 빠져나갔다. 마치 한시라도 더 이 자리에 있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발걸음은 바람처럼 빨랐다.노지성이 쫓아가려 했지만 이미 정하준의 모습은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었고 그는 어쩔 수 없이 다시 룸으로 돌아왔다.그때까지 조용히 앉아 있던 한 여자 동창이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목소리는 작았지만 그 말 한마디로 룸 안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혹시 너희 그 소문 들어본 적 없어?”“무슨 소문?”“강보람이랑 정하준 둘 다 S대 다녔잖아. 그런데 대학 시절에 3년 동안 몰래 사귀었대.”그 말을 들은 사람들의 턱이 동시에 떨어졌다.이윤아가 날카롭게 소리쳤다.“민주야, 너 지금 무슨 헛소리야? 강보람? 그 뚱뚱하고 못생긴 애? 정하준이 설마 아무나 만나겠냐고.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네.”다른 여자 동창도 헛웃음을 지으며 거들었다.“맞아. 너 착각한 거 아냐? 강보람이 정하준을? 그게 가능했으면 나 지금쯤 재벌가 며느리다.”그때 옆에 있던 한 남자 동창이 조심스럽게 말했다.“그런데 꼭 그렇게 말할 건 아니지 않아? 강보람 걔 좀 통통하긴 했지만 그렇게까지 못생기진 않았잖아. 피부도 하얗고 목소리도 은근히 부드러웠어.”박민주도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처음엔 안 믿었는데, 우리 언니가 S대 다녔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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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먼저 올라갈게요.”정하준이 일어서며 말했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최명희는 가슴팍을 눌렀다.정윤범이 깊게 한숨을 쉬었다.“성격은 꼭 당신 닮아서 이제 곧 서른인데, 또래 친구들은 벌써 결혼해서 애도 다 낳고 살잖아. 쟨 병원 밖으로만 나가면 뭐가 그렇게 불안한지, 온통 병원 생각뿐이야.”“흥, 나 닮은 게 어때서?”최명희가 눈을 흘기며 남편을 째려봤다.“오늘 밤은 서재에서 자요. 나도 올라갈 거니까.”최명희가 막 계단을 올라가려던 그때 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온 정하준이 맞은편에서 내려왔다.“엄마, 병원에서 급하게 수술 들어간대요. 나 먼저 갈게요.”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현관문이 열리고 정하준의 뒷모습이 사라졌다.식탁에 남은 정윤범이 손바닥으로 식탁을 세게 내리쳤다.“봐! 이게 당신 아들이야. 집에 온 지 한 시간도 안 됐는데, 인사도 없이 그냥 나가버리잖아. 누가 저런 애랑 결혼하고 싶겠어?”“소리 좀 지르지 마요.”최명희는 귀를 후벼 파며 시큰둥하게 말했다.“나 혼자만의 아들이에요? 당신 아들은 아니고? 하준이도 환자한테는 책임감 있잖아요.”...밤 11시 반, 정하준은 병원 일정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복도에서 유유히 걸어오던 골든 리트리버 한 마리가 반갑게 그에게 달려와 얼굴을 비볐다. 정하준은 익숙한 손길로 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그는 주방에서 물 한 컵을 들이켜고는 바로 서재로 향했다.아침에 급히 나가느라 창문을 제대로 닫지 않아 바람이 들어와 책상 위에 쌓인 서류들과 자료들이 흐트러져 있었다. 그는 묵묵히 허리를 숙여 하나씩 정리했다.요즘 집중해 보는 건, 배에 거대 종양처럼 나타나는 이상 부종 사례였다.병력들을 한참 들여다보느라 눈이 아파오고 피로가 쌓였다. 그는 안경을 벗고 콧대를 눌러봤지만 피로는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휴대폰을 들여다보니, 오전에 노지성이 보낸 메시지가 아직도 읽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었다.[장나연이라고 예전 2반 애 있잖아. 걔한테 물어봤거든. 강보람이랑 제일 친했는데, 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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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정하준은 발을 들었다가 분홍색 토끼 인형 하나를 밟고 멈췄다. 토실토실한 연분홍색 인형에 길쭉한 귀 두 개, 등에 벌처럼 생긴 날개까지 달려 있었다. 강보람이 유난히 아꼈던 인형이었다.그는 예전에 이걸 보고 ‘변이 토끼냐, 정체불명이네’라며 비웃은 적이 있었다. 못생겼다느니, 등에 날개가 달렸다는 둥. 그런 얘기를 들은 강보람은 말없이 그를 노려보기만 했었다.그녀가 그 인형을 정말 아끼는 걸 알면서도 정하준은 괜히 놀리려는 심정으로 못생겼다고 말했다.그 인형은 둘이 영화관 데이트를 갔을 때, 정하준이 뽑기 기계에서 뽑아준 것이었다. 강보람이 그걸 너무 갖고 싶다며 그의 팔을 붙잡고 애교를 부리던 기억도 선명했다. 그런 인형마저 그녀는 돌려보냈다.그날 밤 정하준은 화가 나서 전화를 걸었지만 없는 번호라는 자동 안내음만 흘러나왔다.강보람은 정말 완벽하게 끊어냈다. 돈 한 푼 받지 않았고 연락도 완전히 끊었다.그 이후로 7년 동안, 정하준은 그녀에 대한 소식을 단 한 번도 듣지 못했다.나중에 들은 건 그녀가 갑자기 휴학했다는 말뿐이었다. 마치 세상에서 증발하듯 자취를 감췄다.정하준은 당시 학업에 치여 있었다. 의대는 인간이 다닐 곳이 아니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었다. 게다가 그 무렵 형이 태한 그룹을 이어받으면서 그는 스스로 후계 구도에서 물러났다. 형제간의 우애를 위해서였고 당분간 국내에 돌아올 생각도 없었다.강보람은 그의 가슴 한구석에 박힌 가시 같은 존재가 됐다.정하준조차 그 가시가 언제 박힌 건지 모른다. 불쾌하면서도 그 존재를 묵인했다.평소에는 아무렇지 않다. 그런데 한번 발작하면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마치 장마철의 갑작스러운 비처럼 가슴이 먹먹하고 숨이 턱 막혔다....오후, 정하준은 운전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도로로 튀어나왔다.그는 재빨리 브레이크를 밟았다. 차가 멈추자마자 그는 문을 열고 황급히 내렸다.한 여자아이가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고 커다란 눈동자에 놀란 기색이 가시지 않은 채 품에는 조그만 강아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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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서이담은 서하율의 손을 꼭 잡고 병원을 나섰다.서하율은 끝까지 뒤를 돌아보며 정하준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곁에 있던 동료가 웃으며 다가와 말했다.“혹시 친척 동생이에요? 그 여자아이 선생님이랑 진짜 닮았던데요. 가족들이 다 미남미녀인가 봐요.”정하준은 한쪽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그래요? 그렇게 닮았어요?”고개를 들어 다시 쳐다봤을 땐 서이담과 아이는 이미 멀찍이 사라진 뒤였다.만약 진짜로 저만한 딸이 있었더라면 최명희 여사는 아마 기절할 정도로 기뻐했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그래도 그 아이는 참 귀엽게 생겼다. 정하준은 문득 서하율이 떠올랐다. 마음 한구석에 묘한 감정이 스며드는 것 같았다....집으로 돌아가는 길.“엄마, 감자 그 아저씨 차에 그대로 있어요.”“감자?”서이담은 한 박자 늦게야 알아챘다. 딸이 도로 위에서 구한 그 연한 베이지색의 작은 강아지를 말하는 것이었다.그 위험했던 상황이 다시 떠오르자 그녀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튼튼이 다시는 그렇게 위험한 행동 하면 안 돼.”“알았어요. 그런데 그 아저씨 차가 그렇게 빠르진 않았고 나도 차에 치인 건 아니에요. 그냥 놀라서 혼자 넘어졌어요.”“그래도 안 되는 거야.”서이담은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단호히 말했다.서하율의 태명은 ‘튼튼이’였다. 오로지 건강하게 자라주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서 지은 이름이었다. 그런 서하율은 서이담에게 전부나 다름없었다.“그런데 엄마, 감자 그 아빠랑 닮은 아저씨 차에 그대로 있다니까요?”“하율아, 다른 사람한테 그 아저씨가 아빠랑 닮았다고 말하면 안 돼.”서이담은 조급한 마음에 말이 앞뒤가 맞지 않게 이어졌다.“그런 말 들으면 그 아저씨도 불쾌할 수 있어. 그러니까 우리 예의 지켜야지.”설명이 스스로도 말이 안 된다는 걸 느꼈지만 다행히 서하율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이담은 그저 딸을 꼭 안을 수밖에 없었다.한 번 내뱉은 거짓말은 실타래처럼 엉켜만 갔다. 풀려고 할수록 점점 더 꼬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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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서이담은 거실로 나왔다. 서하율은 졸려서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다. 그녀는 서하율을 안아 방으로 데려가 이불 위에 눕히고 등을 토닥여 재웠다. 그리고 서하율 품에 분홍색 토끼 인형을 안겨주었다.책가방을 정리하다가 서하율이 만든 손 글씨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크레용으로 그린 크림색 강아지 그림이 정성스레 그려져 있었다.서이담은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내일 펫숍에 가봐야겠다.’...정하준은 휴대폰을 침대 머리맡에 툭 던졌다. 회색 수건을 목에 건 채 머리를 대충 문지르며 물기를 닦고 있었다.옆에 서 있던 정예진은 그에게 질문을 퍼부었다.“여자 환자야? 목소리 들으니까 젊더라. 예쁠 것 같던데? 미혼인가? 말투는 또 왜 그렇게 다정하냐. 그 강아지, 그 여자 거야?”“정예진, 원래 이렇게 오지랖 넓었어?”정하준은 목소리를 낮추며 누나 이름을 불렀고 눈꺼풀을 반쯤 내린 채 나른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그냥 네가 걱정되니까 그러지.”정예진은 능청스럽게 웃었다.정하준은 옅은 웃음을 흘리며 수건을 소파에 툭 던졌다. 짧은 검은 머리카락이 물기 때문에 헝클어진 채 이마에 흘러내렸다.“눈이 엑스레이냐? 휴대폰 너머로 목소리 듣고 외모까지 추측하게? 누나 태한그룹에서 일할 때가 아니라 초능력 연구소에 가야겠는데.”“진짜 예쁘긴 예쁜가 보지?”정예진은 더 들떠서는 눈을 반짝였다.“못생겼어.”정하준은 툭 내뱉고는 소파에 앉아 노트북을 열어 진료기록을 확인하기 시작했다.눈 한 번 들지 않고 덧붙였다.“문 닫아.”“그럼 진짜 예쁘단 소리네.”정예진은 이 남동생의 성격을 너무도 잘 알았다. 이런 식으로 말할 때는 보통 진심과 정반대였다.그녀는 정하준 옆에 성큼 다가가 앉으며 캐물었다.“서이담이라며? 이름도 괜찮네. 사진 없어? 누나 좀 보여줘.”“언제부터 엄마처럼 그렇게 말이 많아졌냐.”정하준은 한숨 섞인 듯 손가락으로 허공을 찔렀다.“딸도 있더라. 벌써 요만큼 컸어. 선천성 심장병이고 나한테 진료받은 적 있어.”“결혼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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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서이담은 그제야 일주일이 흘렀다는 걸 깨달았다. 정하준은 바쁘다며 강아지 이야기는 다음 주에 하자고 했었다.며칠 전, 서이담은 박순자와 강아지를 키워보자고 상의했고 박순자는 흔쾌히 승낙했다. 다락방 바깥에 작은 테라스가 있었기에, 강아지가 활동하기에도 적당했고 서이담이 책임지고 잘 훈련시키겠다고 하니 큰 걱정도 없었다.평소에 짖는 소리가 심하지 않아 이웃에게 방해되지 않는다면 서하율이 혼자일 때 곁을 지켜줄 수 있는 친구가 될 수도 있었다.그녀는 지난 일주일 동안, 정말 많은 생각을 했다.정하준에게 여자 친구가 있다는 것을 떠나, 그와 다시 무언가 시작된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다.앞으로 병원에 가서 재검을 받을 일이 있더라도 그의 진료 시간만 피하면 된다.성운시는 넓고 같은 사람을 다시 마주칠 일은 흔치 않을 테니까.서이담이 생각에 잠긴 얼굴로 이마를 찌푸리자 김유린이 옆에서 물었다.“왜 그래? 무슨 일 있어?”“내일 시간 돼? 하율이한테 강아지 한 마리 사주고 싶어서. 펫숍 좀 같이 가줄래?”“콜, 내일 아침에 보자.”...다음 날 오전.김유린이 운전을 맡았고 두 사람은 함께 반려동물 시장으로 향했다.털이 복슬복슬하고 동그란 베이지색 강아지 한 마리가 서이담의 손가락을 핥았다.작은 눈망울은 영리하고 또렷했다. 서이담은 그 강아지를 바로 입양했다.집에 도착하자 서하율은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뜨더니, 금세 함박웃음을 터뜨렸다.강아지를 품에 조심스럽게 안고는 한참을 눈을 떼지 못했다.하지만 서이담은 그 눈빛 속에서 미묘한 감정을 읽었다.기쁨 너머 아주 조금의 아쉬움.이 강아지는, 딸이 구했던 그 길가의 작은 개가 아니었으니까.어떤 감정은, 어떤 존재는 대체가 되지 않는 법이다.“하율아, 우리 이 아이 이름 지어줄까?”서이담은 딸아이의 앞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히 말했다.“응...”서하율은 한참을 고민했다. 여러 이름을 떠올린 끝에, 둘은 마침내 ‘몽실이’라는 이름으로 정했다.몽실이는 순했다. 집에 오자마자 금방 새로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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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서이담은 벌떡 일어나 도망치듯 자리를 뜨려 했다. 마치 놀란 토끼처럼 잔뜩 긴장한 모습이었다.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관절 마디가 도드라진 강한 힘을 가진 정하준의 손이 허리를 단단히 감싸고 있었다.서이담은 이를 악물며 중얼거렸다.“정 선생님.”그 말에 정하준은 조용히 손을 풀었다. 서이담은 바로 몸을 일으켜 뒷걸음질 쳤다.그와 일정 거리를 둔 채 서이담은 숨을 깊이 들이켰다.“정 선생님, 부디 예의를 지켜 주세요.”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돌아서서 곧장 나가버렸다.“예의를 지켜 달라고?”정하준은 그 말에 입꼬리를 살짝 들어 올렸다. 나지막이 되뇌는 어투에서 묘한 흥미가 묻어났다.그는 그녀가 사라지는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옅은 파란빛의 롱스커트 자락이 허공에 가볍게 물결을 그렸다. 산뜻하고 은은한 향이 그 자리에 머물렀다.병원을 나선 정하준은 차를 몰고 나가던 중, 멀리 길가에서 그 옅은 파란 실루엣을 다시 발견했다.햇살이 쏟아지는 한낮, 그녀의 향이 또다시 그의 주변을 맴도는 것 같았다.정하준은 그것이 여름 햇살이 너무 강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그녀의 피부가 도무지 눈에 띌 만큼 하얘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눈앞에서 아른거리는 그녀의 모습이 이상할 만큼 익숙하게 느껴졌다.무심코 떠오른 기억. 그녀의 입술 끝에 닿았던 자신의 손가락. 부드럽고 섬세한 감촉.허리는 또 어찌나 가는지, 한 손으로 감싸 쥐는 느낌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그녀는 마치 놀란 토끼처럼 허겁지겁 도망쳐 나갔지만, 끝까지 체면을 지키려 애쓰는 모습이었다.잠시 후, 검정 카이엔이 그녀와 나란히 속도를 맞췄고 경적이 두어 번 울렸다.서이담은 놀란 듯 고개를 돌렸다. 차창이 내려가자 정하준의 얼굴이 드러났다.“타요.”그녀는 단호히 거절했다.“굳이 번거롭게 해드리고 싶지 않아요.”“두 번 말하기 싫은데.”정하준은 뙤약볕에 선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햇볕에 살짝 달아오른 볼,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 볼에 들러붙은 검은 머리카락.창문을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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