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7화

Author: 서리
정월 열아흐레는 김동건의 생일이었다.

장군부에서는 예년처럼 몇 상의 잔칫상을 차렸고, 점심 무렵부터 동료들이 하나둘 찾아와 축하를 건넸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이런 일은 모두 박지영이 직접 챙겼다.

하지만 올해는 몸이 좋지 않다는 말만 남긴 채 손을 떼었다.

그러자 장군부는 삽시간에 엉망이 되었다.

찾아온 손님을 잘못 맞이하는가 하면 술과 음식을 빼먹고, 그릇을 깨뜨리는 일까지 끊이지 않았다.

김동건 역시 밀려드는 손님을 혼자 감당하지 못했다.

그제야 그는 해마다 박지영이 얼마나 많은 일을 도맡아 해 왔는지 조금이나마 깨달았다.

밤이 깊어 손님들이 모두 돌아간 뒤, 김동건은 박지영이 머무는 처소를 찾았다.

둘이서라도 조촐하게 저녁을 먹을 생각이었다.

막 술과 음식이 차려졌을 때, 문지기가 급히 찾아와 알렸다.

“태자 저하와 태자비마마께서 오셨습니다.”

박지영은 두 사람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대고 김동건만 나가도록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조예진이 사람들을 잔뜩 거느리고 처소까지 들이닥쳤다.

“부인께서 아프다고 들었는데, 막상 보니 그리 위중해 보이지는 않네요.”

조예진이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설마 본궁을 피하려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겠지요?”

박지영이 대답하기도 전에 곁을 지키던 시녀 소월이 먼저 나섰다.

“태자비마마, 저희 마님께서는 며칠째 몸져누워 계셨사옵니다. 몸이 쇠약하여 혹여 마마와 태자 저하께 누가 될까 염려한 것이니, 너그러이 헤아려 주시옵소서.”

그러자 조예진의 시선이 곧바로 소월에게 향했다.

“어디서 온 천한 계집이 감히 본궁의 말에 끼어드는 것이냐? 여봐라, 뺨을 서른 대 쳐라!”

명을 받은 상궁 몇이 곧장 달려들어 소월을 붙잡았다.

이어 손을 치켜들어 사정없이 뺨을 후려쳤다.

소월의 얼굴은 순식간에 벌겋게 부어올랐고, 처절한 울음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박지영 역시 조예진이 아무런 이유 없이 시녀에게 화풀이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더구나 소월이가 자신 때문에 화를 입었다는 걸 알기에, 즉시 모든 책임을 자신이 지겠다고 나섰다.

“마마.”

박지영이 이를 악물고 입을 열었다.

“소첩에게 잘못이 있다 여기신다면 저 하나만 벌하여 주십시오. 아무 죄 없는 아이까지 끌어들이실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조예진은 기다렸다는 듯 웃었다.

“물론 네 잘못이지! 본궁을 업신여긴 것이 첫째고, 종을 시켜 본궁에게 대들게 한 것이 둘째다. 허니 벌도 두 배로 받아야 하지 않겠느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조예진은 궁에서 따라온 금군들을 불렀다.

체격 좋은 사내들이 한꺼번에 방 안으로 들어서자, 소월의 낯빛이 새하얗게 질렸다.

병든 박지영에게까지 손을 댈까 두려웠던 소월은 몸부림치며 그녀 앞을 막아섰다.

“마님께는 손대지 마세요!”

몸싸움이 벌어지는 사이 탁자가 엎어졌고, 술과 음식이 바닥에 쏟아졌다.

결국 두 사람 모두 바닥에 제압당했다.

곧이어 거친 매질이 이어졌다.

박지영은 이를 악물고 견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입가에 피가 배어 나왔고, 눈앞마저 어지럽게 흔들렸다.

한참 뒤에야 매질이 끝났다.

박지영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한동안 몸조차 일으키지 못했다.

그 처참한 모습을 내려다보던 조예진이 사람들을 물렸다.

그리고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박지영, 네가 본궁에게 태자비 자리를 빼앗겼다고 여겨 원망하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해서 번번이 본궁에게 덤비는 것이겠지.”

박지영은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조예진은 차갑게 웃었다.

“허나 똑똑히 알아 두거라. 네가 무슨 수를 쓰든 본궁은 영원히 태자비다. 태자 저하도, 김 장군도 결국 본궁의 편에 설 것이고.”

목소리에 노골적인 우월감이 묻어났다.

“넌 평생 본궁을 이길 수 없어.”

박지영은 퉁퉁 부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잠긴 목소리가 힘겹게 흘러나왔다.

“저는 단 한 번도 마마와 무엇을 다투려 한 적이 없습니다.”

잠시 숨을 고른 뒤 덧붙였다.

“예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그 말을 잊지 않는 것이 좋을 게다!”

조예진은 코웃음을 치며 돌아섰다.

그 순간 넓게 퍼진 옷자락이 곁에 놓인 촛대를 건드렸다.

촛대가 쓰러졌다.

다음 순간 불씨가 바닥에 쏟아진 술을 타고 순식간에 번져 나갔다.

불길은 눈 깜짝할 사이에 조예진의 치맛자락까지 옮겨붙었다.

“아악!”

조예진은 비명을 내지르며 새파랗게 질렸다.

박지영도 남은 힘을 끌어모아 겨우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문을 향해 걸었다.

이제 몇 걸음만 더 가면 밖이었다.

바로 그때 문이 거칠게 열리며 이진호와 김동건이 뛰어들었다.

“예진아!”

“예진아!”

연기가 자욱한 가운데 김동건은 문 앞에 선 박지영을 미처 살피지도 않은 채 옆으로 밀쳐 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조예진에게 닿는 길뿐이었다.

이진호 역시 조예진의 비명을 따라 곧장 달려갔다.

그는 불길 속에 있던 조예진을 품에 안아 들고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렸다.

박지영은 바닥에 쓰러진 채 두 남자가 조예진을 감싸 안고 빠져나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번졌다.

역시 그랬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누구 하나 자신을 돌아보지 않았다.

불길이 가까이 번져 오고, 매캐한 연기가 숨통을 조였다.

기침이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왔다.

숨을 들이쉴수록 가슴이 답답해졌고, 머릿속도 점점 흐려졌다.

뜨거운 열기와 고통 속에서 의식마저 천천히 멀어져 갔다.

이대로 끝나는가 싶던 순간이었다.

그때 소월이 죽을힘을 다해 다시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가까스로 박지영을 끌어안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두 사람이 막 바깥으로 나왔을 때, 조예진의 흐느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하... 장군 부인 박씨가 일부러 촛대를 넘어뜨렸사옵니다.”

그녀는 울먹이며 말을 이었다.

“신첩이 본인의 자리를 빼앗았다며 원망하더니, 저와 함께 죽으려 했사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진호와 김동건의 얼굴이 동시에 굳었다.

차갑게 가라앉은 두 사람의 시선이 박지영에게 향했다.

박지영은 이미 변명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때 소월이 털썩 무릎을 꿇었다.

“태자 저하, 아니옵니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먼저 사람을 시켜 저희 마님을 벌하신 분은 태자비마마이옵니다. 불이 난 것도 마마께서 돌아서시다 촛대를 건드렸기 때문이옵니다. 저희 마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사옵니다!”

소월은 곧 김동건을 향해 몸을 돌렸다.

“나으리.”

울음에 젖은 목소리가 떨렸다.

“마님은 나으리의 부인이시지 않습니까. 부디 마님의 억울함을 풀어 주시옵소서!”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다하지 못한 인연   제19화

    그날 일은 박지영에게도 적지 않은 불안을 남겼다. 김동건이 집 주소까지 알아낸 이상, 한 번 피했다고 계속 피할 수는 없었기에 박지영은 새집을 알아보기 시작했다.그 고민을 알아챈 임제윤은 수줍게 동거를 제안했고, 두 사람의 관계도 차츰 안정되어 가고 있었기에 박지영은 오래 망설이지 않고 기쁘게 받아들였다.하지만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전에, 박지영에게는 반드시 정리해야 할 일이 하나 남아 있었다.그녀는 우연히 김동건이 가게 맞은편 집을 임대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그가 매일 그곳 창가에 서서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하나하나 지켜봤을 생각만 해도, 속이 뒤집힐 만큼 역겨웠다.박지영은 더는 참지 않고, 김동건이 완전히 단념하게 만들기로 했다.그날 밤 박지영은 임제윤을 가게로 불렀다.임제윤은 소매를 걷어 올리고 남은 꽃들을 정리했고, 박지영은 곁에 붙어 자연스럽게 팔짱을 꼈다.맞은편 창가에서 김동건이 보고 있을 것이 분명했기에, 박지영은 일부러 임제윤과 더 다정하게 굴었다.김동건은 맞은편 집 창가에서 커튼 뒤에 몸을 숨긴 채 꽃집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만 창백한 얼굴로 주먹만 꽉 움켜쥘 뿐, 한 걸음도 다가서지 못했다.박지영은 임제윤에게 한층 더 살갑게 기댔다. 그러다 발돋움해 임제윤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자, 김동건은 더는 참지 못했다.휙!김동건은 커튼을 확 잡아당겨 닫고 바닥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온몸이 가늘게 떨렸다.눈을 돌려도 한때 박지영이 자신에게 잘해 주던 모습과 눈을 휘며 환하게 웃던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더는 견디지 못한 김동건은 문을 열어 비틀거리며 계단을 내려가 빗속에 서서 차가운 비를 온몸으로 맞았다.맞은편 꽃집 유리창 너머로 박지영과 임제윤이 함께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박지영의 얼굴에는 김동건이 한 번도 보지 못한 밝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딩!그때 머릿속에서 시스템의 알림음이 울렸다.“경고: 숙주의 남은 시간은 24시간입니다. 정해진 시간 안에 임무를 완수하지 못할 경우, 숙주는 완전히 소멸

  • 다하지 못한 인연   제18화

    다음 날 아침, 임제윤은 차를 몰고 박지영을 데리러 왔다.연한 하늘색 셔츠 차림의 임제윤은 소매를 팔꿈치까지 자연스럽게 걷어 올려, 탄탄한 팔을 드러내고 있었다.“우리 어디 가요?”박지영이 궁금한 듯 묻자 임제윤은 웃었다.“가 보면 알아.”차가 한 갤러리 앞에 멈춰서자 박지영은 놀란 얼굴로 임제윤을 바라보았다.“여기예요?”“응.”임제윤이 웃으며 말했다.“오늘 인상파 특별전이 열리거든. 지영이가 좋아할 것 같아서.”갤러리에 들어선 박지영은 눈앞에 펼쳐진 그림들에 단번에 마음을 빼앗겼다. 미술을 잘 알지는 못했지만, 그림마다 담긴 아름다움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임제윤은 박지영의 손을 잡고 그림을 한 점씩 설명해 주었다.“이건 모네의 ‘수련’이야.”임제윤은 빛깔이 화려한 그림을 가리켰다.“색이 이렇게 달라지는 거 봐. 예쁘지?”박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그림은 처음이었다. 그림 속 빛과 그림자가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모네는 말년에 거의 앞을 보지 못했대.”임제윤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런데도 계속 그림을 그렸지. 이 수련들은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본 세상이었을 거야.”박지영은 임제윤의 말에 깊이 빠져들었다. 임제윤이 미술을 이토록 잘 안다는 사실이 새로웠다.“어떻게 이렇게 잘 알아요?”임제윤은 가볍게 웃었다.“대학 다닐 때 미술사를 부전공했어. 의사가 되긴 했지만, 미술을 좋아하는 마음은 그대로야.”임제윤은 박지영의 손을 잡고 갤러리를 돌며 그림마다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박지영이 이야기에 빠져 있다 보니 어느새 관람 시간이 끝나 있었다.갤러리 밖으로 나오자, 마침 해가 지고 있었다.임제윤은 박지영의 손을 잡은 채 말했다.“예술이랑 의학은 사실 비슷한 것 같아. 방식만 다를 뿐, 둘 다 삶 속의 아름다움을 찾는 일이잖아.”박지영은 임제윤을 올려다보았다.저녁 노을이 임제윤의 옆얼굴을 비추자, 온몸이 옅은 금빛으로 물들었다. 박지영은 눈앞의 임제윤이 아름다운 그림처럼 느껴져 한참 시선을 떼지 못했

  • 다하지 못한 인연   제17화

    김동건이 깊은 절망에 빠져 있는 동안, 박지영과 임제윤의 사이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어느 날 박지영은 이른 아침부터 임제윤을 위해 닭고기탕을 끓여 보온 도시락통에 담아 병원으로 갔다. 임제윤이 끓인 것만큼 맛있지는 않겠지만, 나름대로 정성을 담은 것이었다.병원에 들어서자 소독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삶과 죽음이 맞닿아 있는 곳처럼 느껴져, 박지영은 병원 특유의 냄새를 좋아하지 않았다.임제윤이 알려 준 곳으로 찾아가자 사무실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박지영이 노크하려던 순간, 안에서 임제윤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머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수술 성공률이 높은 편이에요. 제가 직접 수술할 테니 안심하셔도 됩니다.”박지영은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임제윤은 한 할머니 앞에 쪼그려 앉아 수술 방법을 차근차근 설명하고 있었다. 티 하나 없이 깨끗한 흰 가운과 금테 안경 너머의 눈빛은 다정하면서도 진지했다.할머니는 몹시 불안한 듯 손을 연신 비볐다.“임 선생님, 저는... 무서워요.”임제윤은 할머니의 손을 가볍게 잡아 주었다.“저를 아들이라고 생각하세요. 제가 있잖아요.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문밖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박지영의 마음이 따뜻해졌다. 환자를 제 가족처럼 대하는 의사는 임제윤이 처음이었다.나에게 잘해 주는 사람이 아니라, 본래 좋은 사람과 함께해야 한다는 말이 맞았다.박지영이 김동건에게 마음을 준 것도, 처음에는 그가 다정하게 자신을 아껴 주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김동건이 자신을 구해 곁에 둔 것은 좋아하는 여자를 위해서였고, 다정함 역시 그녀를 붙들어 두기 위한 거짓이었다.박지영이 마음을 온전히 내준 뒤에야, 김동건은 숨겨 왔던 본모습을 드러냈다.하지만 임제윤은 달랐다.처음 우연히 마주쳤을 때부터 이상하게 마음이 끌렸고,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알게 되었다. 임제윤의 다정함은 자신에게만 향한 특별한 모습이 아니라, 원래부터 따뜻하고 선한 성품에서 나오는 것이었다.박지영은 임무의 세계에서 겪었던

  • 다하지 못한 인연   제16화

    김동건은 식은 커피를 손에 든 채 아파트 창가에 서 있었다.창밖으로는 맞은편에 자리한 ‘아침이슬’ 꽃집이 한눈에 들어왔다. 꽃을 포장해 손님에게 건네는 박지영의 모습도, 임제윤과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도 보였다.김동건은 보름째 이곳에 머물며 매일같이 멀리서 박지영을 바라보았다. 저녁이면 지친 기색 속에서도 만족스러운 얼굴로 꽃집 문을 닫는 모습까지.이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박지영에게 다가가고 싶을 때마다, 꽃집에서 자신을 향해 보냈던 차가운 눈빛과 단호한 말이 떠올랐다.창밖이 서서히 어두워졌다.가게를 정리하기 시작한 박지영의 곁에는 오늘 임제윤이 없었다. 혼자 가게 문을 닫는 뒷모습이 유난히 쓸쓸해 보이자, 김동건은 커피잔을 내려놓고 외투를 챙겨 밖으로 나갔다.이 시간쯤이면 맞은편 편의점에 들르곤 했는데, 그러다 보면 거리에서 박지영을 마주칠 수 있었다.박지영은 한 번도 자신을 돌아보지 않았지만,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김동건에게는 충분했다.건물 아래로 내려가자마자 박지영이 꽃집에서 나오는 것이 보였다.연한 하늘색 원피스를 입은 박지영은 해 질 무렵의 빛 아래 유난히 맑고 고와 보였다.김동건은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도 잊은 채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멀어지는 박지영의 뒷모습을 한참 눈에 담았다.박지영은 기분이 좋은 듯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지하철역으로 향했다.김동건은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를 두고 뒤를 따랐다.이러는 자신이 얼마나 추한지 알지만 멈출 수 없었다.그때였다.교차로에서 승용차 한 대가 갑자기 튀어나와 박지영을 향해 곧장 돌진했다.김동건의 머릿속은 새하얘졌지만, 몸은 먼저 움직였다.김동건은 박지영을 힘껏 밀쳐 냈고, 그 대신 차에 부딪혀 멀리 내던져졌다.시간이 한순간 멈춘 듯했다.바닥에 넘어진 박지영은 무릎이 화끈거리는 통증을 느꼈다. 고개를 들자 몇 걸음 떨어진 곳에 김동건이 쓰러져 있었는데 몸 아래로 선명한 피가 번져 나갔다.“김동건!”박지영은 저도 모르게 그의

  • 다하지 못한 인연   제15화

    그 뒤로 며칠 동안 김동건은 박지영의 일상에서 좀처럼 모습을 감추지 않았다.그는 매일 아침 박지영이 사는 건물 아래에서 기다리며 아침을 챙겨 왔다. 박지영이 본체만체해도 한쪽에 앉아 말없이 박지영을 바라보기만 했다.처음에는 없는 사람처럼 무시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날들이 계속되자, 박지영은 더는 참을 수 없었다.어느 날, 박지영은 결국 김동건에게 다가갔다.그녀가 다가오는 것을 본 순간 김동건의 눈빛이 환해졌다. 하지만 정작 입을 연 박지영의 얼굴에는 싸늘한 기색만이 어려 있었다.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우린 이제 아무 관계도 아니라고 분명 말했잖아.”김동건은 고개를 숙인 채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난 그냥 네가 보고 싶었어 그랬어. 지영아, 내가 잘못한 거 알아. 하지만 널 놓을 수가 없어.”박지영은 기막히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놓을 수 없다고? 김동건, 당신이 나한테 어떻게 했는지 벌써 잊었어?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한들 무슨 소용이야?”김동건은 말없이 입을 다물었다.변명할 수 없었다. 자신이 남긴 상처는 이미 너무 컸고, 박지영의 마음은 그 상처로 너덜너덜해져 있었다.“이제 그만 가.”박지영은 등을 돌렸다.“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김동건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이미 박지영을 잃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박지영이 자신에게 완전히 마음을 닫고 그를 원망할지라도 김동건은 포기할 수 없었다. 그날부터 김동건은 박지영의 일상에 한층 더 깊이 끼어들었다.말없이 멀리서 바라보던 데서 그치지 않았다. 집 앞에 불쑥 나타나 박지영의 걸음을 막고, 룸메이트와 함께 나설 때면 일부러 끼어들어 대화를 끊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박지영이 현관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따라왔다.그러던 어느 날이었다.박지영은 가게 창밖으로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바라보았다. 유리창을 타고 흐르는 빗방울은 가로등 불빛에 닿아 반짝였다.박지영은 전날 임제윤에게 생일 선물로 받은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작은 다이아몬드가 불빛 아래에서 은은하게 빛났

  • 다하지 못한 인연   제14화

    박지영은 임무의 세계를 겪어 본 사람이라, 김동건이 이곳에 나타난 사실이 아주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다만, 이제는 그와 조금도 얽히고 싶지 않았다.김동건도 강요하지 않았다. 그저 박지영의 뒤를 바짝 따라붙을 뿐이다.지나가는 사람들의 이상한 시선이 계속 따라붙었다. 이대로 꽃집에 갈 수는 없다는 걸 안 박지영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다른데 가서 얘기하자.”두 사람은 근처 카페에 마주 앉았다.김동건은 줄곧 박지영만 바라보았다. 자신이 그녀에게 큰 잘못을 저질렀으니, 박지영의 차가운 눈빛도 묵묵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대체 뭘 하려는 거야?”박지영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여기까지 따라온 게 정말 의미 있다고 생각해?”“조예진은 어쩌고? 그 여자 곁에서 지극정성으로 돌보지 않고, 날 찾아와서 뭘 하겠다는 건데?”“여긴 당신한테 낯선 세상이야. 여기서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내가 떠나기로 한 순간부터 당신과는 완전히 끝낼 생각이었어. 그런데 왜 이러는 거야?”김동건이 조심스레 박지영의 손을 잡으려 하자, 박지영은 곧바로 손을 빼냈다.김동건은 시선을 떨군 채 말했다.“지영아, 내가 잘못한 거 알아. 한 번만, 딱 한 번만 만회할 기회를 주면 안 될까? 난 정말 널 사랑해.”“조예진의 본모습도 알았어. 내가 그동안 네게 얼마나 큰 상처를 줬는지도 알아. 네가 떠나고 나서야, 내가 진짜 사랑한 사람이 너였다는 걸 깨달았어.”“이곳에서 살아가는 법도 다 알아봤어. 나도 여기 사람들처럼 살 수 있어. 나 혼자 두지 마. 응?”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김동건을 박지영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속이 울렁거렸다.‘곁에 있을 때는 온갖 수를 써서 나를 괴롭히다가, 이제 와서 사랑했다고 말하고 있다니.’“됐어.”박지영은 냅킨으로 김동건이 닿았던 손을 깨끗이 닦아 냈다.“당신을 사랑했던 박지영은 이제 없어. 김동건, 난 당신을 미워하지 않아. 진심으로 사랑했으니까, 후회도 없어.”“하지만 이제 나는 나 자신을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