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하영아!”하윤성은 힘없이 쓰러지는 서하영을 품에 안았다.그녀의 팔에 박힌 화살을 보는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결국 성문이 함락되었다.전장은 이미 아비규환이었다.혼란 속에서 하윤성은 부상을 입은 서하영을 품에 안고 퇴각했다.하지만 골목에 들어선 순간, 북적 병사들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호위무사들이 하나둘 쓰러졌다.하윤성은 서하영을 자신의 뒤에 감춘 채 바닥에 떨어진 칼을 주워들었다.검술을 익힌 적 없는 몸이었지만, 그녀를 지키겠다는 의지만큼은 누구보다 강했다.그는 매서운 눈빛으로 적을 노려보았다.적의 일격이 날아들었다.하윤성은 이를 악물고 막아냈고, 그 충격에 손아귀가 찢어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그러나 숨 돌릴 틈도 없이, 곁에서 또 다른 칼날이 서하영을 향해 날아들었다.하윤성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그는 곧바로 몸을 돌려 그녀를 품듯 감싸안고 자신의 등으로 칼날을 받아냈다.날카로운 칼날이 살을 꿰뚫었고, 뜨거운 피가 솟구쳐 올라 서하영의 시야를 붉게 물들였다. “하윤성!”하윤성은 온몸을 파고드는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그는 그대로 몸을 던져 그녀를 바닥에 눕히고 온몸으로 그녀를 감싼 채, 등으로 모든 칼날을 받아내며 그녀를 지켰다.더 많은 북적 병사들이 몰려들었다. 곧 수많은 칼날이 두 사람을 향해 높이 치켜들렸다.바로 그때, 화살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들더니 박문수가 적진을 뚫고 나타났다.하윤성의 등을 마주한 순간, 박문수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칼날에 찢긴 상처는 뼈가 보일 정도로 깊었다. “하영이를 데리고 가시게! 어서!”하윤성은 피를 토하듯 외치며 서하영을 박문수 쪽으로 밀어냈다.“함께 가야 합니다!”“아니... 나는 더 이상 버티기 힘들어...”하윤성이 고개를 저었다.입가에는 피거품이 맺혀 있었다.하윤성은 박문수 뒤에 서 있는 서하영를 바라보았다.눈물로 젖은 서하영의 얼굴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는 다정함과 그리움, 그리고 끝내 놓지 못한 미련이 담겨 있었다.“어서 가시오!”박
또 자신 때문이었다.또다시 자신으로 인해 그녀는 억울하게 옥사에 갇히고, 적국과 내통했다는 누명까지 써야 했다.어쩌면 그는 늘 그녀에게 재앙만 안겨주는 사람인지도 몰랐다.서하영은 잠시 하윤성을 바라보았다.그 눈빛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마치 아무 상관없는 사람을 보는 듯 담담했다. “승상 대인께서는 국법에 따라 처리하셨을 뿐인데,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그 말을 남긴 뒤, 그녀는 그의 곁을 지나 멀지 않은 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버지와 박문수에게로 걸어갔다.박문수는 몇 걸음 다가와 그녀의 어깨 위에 두툼한 두루마기를 걸쳐주었다.“이제 괜찮다.”서하영은 외투를 여미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수척하고 창백한 얼굴 위로, 오랜만에 진심 어린 미소가 떠올랐다.하윤성은 그 미소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직 서하영의 어깨 위에 머물러 있는 박문수의 손을 보았다.순간, 가슴 한구석이 텅 빈 듯 아려 왔다.그는 이제 미안하다는 말조차 건넬 자격이 거의 남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적국과 내통했다는 소동이 가라앉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변방에 또다른 위기가 닥쳐왔다.겨울이 깊어질 무렵, 북적이 마침내 칼을 빼 들었다.대군을 집결한 북적군이 변방을 향해 대대적으로 쳐들어왔다.꺼졌던 봉화가 다시 타올랐다.전고가 울리는 가운데, 칼날 부딪히는 소리와 병사들의 함성이 하늘을 찔렀다.하윤성은 병든 몸을 이끌고 성루에 올라 전황을 살폈다.하지만 그의 시선은 자꾸만 자신도 모르게 군의처 쪽으로 향했다.그날, 북적은 불화살을 쏘아 올렸다.불붙은 화살은 성벽 가까이에 있던 군막과 군의처 약재 막사를 덮쳤다.순식간에 불길이 하늘로 치솟고, 짙은 연기가 사방을 뒤덮었다.그 안에는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중상병들도 있었다.하윤성은 서하영이 입과 코를 막은 채, 인파를 거슬러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모습을 보았다.순간, 하윤성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아무것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그는 망설임 없이 수 장 높이의 성벽에서 뛰어내렸
날이 갈수록 변방의 분위기는 더욱 팽팽해졌다.북적의 기병들이 국경을 넘나들며 도발하는 일이 점점 잦아졌고, 전쟁이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군영 안에는 살벌한 긴장감이 감돌았다.그런 폭풍 전야와 같은 순간, 하윤성이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사람이 변방에 모습을 드러냈다.고예진이었다.그녀는 무슨 방법을 썼는지, 고씨 가문과 친분이 있는 어느 왕실 종친을 설득해 변방 위문 허가를 받아냈다.연한 색 비단 옷차림에 두툼한 여우 털 외투를 걸친 채, 시녀의 부축을 받으며 마치 가녀린 버드나무처럼 변방 수비군 군영에 나타난 그녀의 모습에, 모두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하윤성은 그녀를 보자마자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곧바로 군의처로 시선을 돌렸다.아니나 다를까, 때마침 서하영은 대야를 들고 군막 밖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고예진을 마주한 순간, 서하영의 발걸음이 잠시 멈췄다.하지만 그녀의 표정에는 어떠한 변화도 없었다.이내 담담히 시선을 거둔 서하영은, 마치 스쳐 지나가는 사람을 본 듯 몸을 돌려 다시 군막 안으로 들어갔다.그 평온한 태도가 오히려 하윤성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한편 고예진은 하윤성의 굳어진 표정을 보고도 모른 척하며 천천히 다가왔다.눈가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고, 그 모습은 애처롭기 그지없었다.“윤성 오라버니... 변방이 춥고 힘들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곳에서 고생하고 계실 생각을 하니 마음이 놓이지 않았습니다... 해서 영왕야께 간청한 끝에 겨우 이곳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말을 마치자, 고예진은 예전처럼 하윤성의 소매를 잡으려 손을 뻗었다.하지만 하윤성은 곧바로 한 걸음 물러나 그녀의 손길을 피했다.그의 목소리는 차갑게 굳어 있었다.“휴서(休書)는 이미 네게 전했다. 너는 애초에 이곳에 오지 말았어야 했다. 곧 전쟁이 시작될 터라 어디든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허니 내일 호위무사들과 함께 경성으로 돌아가거라.”허공에 멈춘 고예진의 손이 그대로 굳었다.애써 짓고 있던 연약한 표정이 순
하윤성은 변방을 떠나지 않았다.그는 흠차의 신분으로 변방에 머물며 군영을 순찰하고, 군량의 출납을 살피며, 각종 업무를 처리했다.누구도 그를 책잡을 수 없었다. 그는 오히려 이전 어느 때보다 성실하고 빈틈없이 일을 처리했다.그러나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매일 산더미 같은 공무를 끝낸 뒤, 하윤성의 시선은 언제나 같은 곳에 머물렀다.그곳은 바로 군의처가 자리한 군막이었다.하윤성은 더 이상 서하영에게 섣불리 다가가지 못했다. 서하영의 눈에 담긴 차가운 혐오를 다시 마주할까 두려웠고, 그녀가 예전처럼 이름을 불러 주는 대신 차갑게 “승상 대인”이라 부르는 것을 듣게 될까 두려웠다.하여 그는 그저 어둠 속 그림자처럼 숨죽인 채, 적당한 거리를 두고 그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그는 서하영이 부상병들 사이를 오가며 상처를 씻어주고, 붕대를 감아주고, 약을 발라주는 모습을 보았다. 처음에는 서툴렀던 손길이 어느새 능숙해져 있었다.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핏기 없이 창백했고, 가느다란 몸은 바람만 불어도 쓰러질 듯 여렸다.하지만 그녀의 등은 곧았고, 눈빛은 누구보다 굳건했다.그녀가 소매를 걷어 올려 팔뚝에 남은 흉측한 흉터를 드러낼 때마다, 하윤성의 심장은 세차게 움켜쥐인 듯 아려 왔다. 숨 쉬는 것조차 힘들었다.그것은 그가 그녀에게 남긴 흔적이었다.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치욕과 고통의 자국이었다.그는 또 박문수라는 젊은 장군이 거의 매일 군의처에 들르는 모습도 보았다.어떤 날에는 중상을 입은 병사를 함께 옮겼다.말없이 힘을 보태는 손길은 침착했고, 다친 이를 다루는 모습에는 조심스러움이 배어 있었다.또 어떤 날에는 귀한 금창약(金瘡藥)이나 보약을 가져오기도 했다. 군에서 지급한 것인데, 다 쓰지 못해 남은 것뿐이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대부분의 날에는 그저 군막 밖에 서서,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서 서하영을 바라보다 가끔 몇 마디 말을 건네는 정도였다.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은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하윤성의
서하영이 한마디 내뱉을 때마다 하윤성의 얼굴은 더욱 창백해졌고, 온몸의 떨림은 더욱 심해졌다. “헌데 이제 와서...”서하영은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순간, 그녀의 눈빛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하지만 그것은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미련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깨달은 뒤 찾아온 씁쓸함과, 너무 오랜 시간 버텨 온 끝에 남은 깊은 피로였다.“저를 연모한다고 하시는 겁니까?”그녀는 아주 옅게 웃었다. 그 미소는 너무 창백하고 허무해서, 금방이라도 바람 속으로 사라질 것만 같았다. “허나 제 사랑은 이미 당신이 몇 번이고 보여준 차가움과 의심, 버림과 상처 속에서 조금씩 닳아 없어졌습니다. 다 소진되었고... 완전히 죽어버렸습니다.”그녀는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이곳의 모든 것, 그리고 눈앞의 이 사내까지도 그녀에게는 그저 숨 막히는 존재와도 같았다.“하영아!”하윤성은 다급히 앞으로 달려 들어온 힘을 다해 그녀의 다리를 붙잡고, 마치 의지할 곳 없는 아이처럼 소리 내어 울부짖었다.“가지 말거라! 한 번만 더 기회를 다오! 제발 한 번만! 맹세하마. 남은 생을 다 바쳐 너에게 잘하겠다. 네가 겪은 고통을 모두 갚아주겠다. 예전보다 천 배, 만 배 더 잘하겠다... 부탁이다, 하영아. 내가 부탁한다... 네가 없으면 나는 죽는다...”서하영은 몸부림치지 않았다. 그저 그가 붙잡은 채로 두었다.그녀의 시선은 저 멀리 아득한 하늘과 땅이 맞닿은 곳을 향했다. 목소리는 담담하기만 했지만, 그 안에는 단호한 결심이 담겨 있었다.“하윤성, 놓으십시오.”“싫다! 죽어도 놓지 않겠다!”하윤성은 오히려 그녀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마치 손을 놓는 순간, 그녀가 완전히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그때였다.멀리서부터 한 사내의 호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하영아, 네가 부탁한 상처약을 다 달여왔다. 서 의원께서 가져다드리라고 하셔서...”그러나 눈앞의 광경을 본 순간, 그의 목소리는 뚝 끊겼다.하윤성이 흠칫 고개를 들었다.핏발 선 눈이 날카로운 시
하윤성은 비틀거리며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서영배를 향해서, 그리고 군의처가 있는 방향을 향해서 머리를 거듭 바닥에 조아렸다. 거친 모래와 자갈이 이마를 짓눌렀고, 그의 목소리는 처참하게 갈라져 있었다.“서 장군...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정말 잘못했습니다... 제가 눈이 멀었습니다. 전 짐승만도 못한 놈입니다... 부디, 부디 하영이를 한 번만 만나게 해주십시오... 제가 직접 머리를 조아리고 사죄하겠습니다. 목숨으로라도 갚을 생각이니 제발 부탁드립니다...”서영배는 등을 돌린 채 더 이상 그를 바라보지 않았다. 그리고 차갑게 말했다.“썩 물러가게. 내 딸은 자네를 만나고 싶어 하지 않네. 자네가 고예진을 택하고 내 딸을 버린 그 순간부터, 자네는 이미 내 딸의 마음속에서 죽은 사람이야.”하윤성의 가슴이 칼로 찢기는 듯,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웠다.그는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일어나지 않았다. 이렇게라도 하면 자신이 저지른 죄의 만분의 일이라도 씻어낼 수 있을 것처럼.그때, 한 여인의 차분하고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차갑고 맑은 음성이 얼어붙은 듯한 분위기를 단숨에 깨뜨렸다.“아버지, 들여보내십시오.”하윤성은 온몸을 흠칫 떨며 급히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서하영이 곁에 있던 군의관 천막에서 걸어 나왔다.그녀는 많이 수척해져 있었다. 원래도 가녀린 체구였지만, 지금은 더욱 여위고 힘없이 보여 마치 바람만 불어도 날아갈 것 같았다.게다가 햇빛을 오래 보지 못한 사람처럼 얼굴빛은 창백했고, 입술에도 핏기가 없었다.하지만 그녀의 등은 곧게 펴져 있었고, 눈빛은 고요하고 흔들림이 없었다.더는 예전처럼 자신을 바라보던 눈빛 속에 조심스러운 기대와 반짝이는 빛이 담겨 있지 않았다.그녀는 변방 여인들이 흔히 입는 거친 베옷을 걸치고 있었다. 여러 번 빨아 색이 조금 바랜 옷이었고, 소매는 걷어 올려져 있었으며, 손에는 약재를 찧다가 남은 푸른빛 풀즙이 묻어 있었다.긴 머리는 가장 평범한 나무 비녀 하나로 대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