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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한 이별의 끝

아득한 이별의 끝

By:  슬이Completed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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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자 전하, 정말로 연우 낭자 몰래 심장의 피를 뽑아 설희 낭자를 살리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단검을 쥔 나이 든 어의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일렁이는 촛불이 그의 이마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비췄다. 침상 위 비단 이불에 파묻힌 강연우의 왜소한 체구는 흡사 한겨울의 초설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때, 침전 밖의 잔설보다도 시린 서제겸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그래. 마비산(麻沸散)을 먹였으니 깨어나지 못할 것이다. 어서 서두르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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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제1장

어의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이윽고 목소리가 사시나무처럼 떨려왔다.

"태자 전하, 소신은... 도저히 못 하겠사옵니다. 연우 낭자께서는 전하와 함께 삼천 리 유배길을 버텨내시느라 이미 몸이 만신창이이옵니다. 여기서 심장의 피까지 뽑으신다면, 설령 깨어나신다 한들... 그 고통에 숨이 끊어지실 것이옵니다..."

"그만."

서제겸의 목소리가 어의의 말을 가차 없이 끊었다.

그의 눈빛은 얼음보다 차가웠다. 그 시선 하나에 방 안 공기까지 얼어붙는 듯했다.

"네가 못 하겠다면."

그가 어의의 손에서 단검을 낚아챘다.

"내가 하면 될 일이다."

망설임 따위는 없었다. 칼끝이 그대로 강연우의 심장을 향해 내리꽂혔다.

"윽..."

침상 위, 다 꺼져가는 불씨 같던 여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으나 침소 안의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다.

울컥, 선혈이 쏟아졌다.

서제겸이 그릇을 기울여 재빨리 피를 받아냈다.

그릇이 가득 차자, 그는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냉정하게 침전을 나섰다.

어의 역시 비틀거리며 그 뒤를 쫓았다.

쾅.

무거운 문이 닫히고 멀어지는 발소리가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고요해진 침상 위에서, 강연우가 천천히 눈을 떴다.

살이 찢기는 통증에 관자놀이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비명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그녀는 아랫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어 삼켰다.

'아파. 너무 아파...'

아무도 몰랐다. 그녀가 애초에 잠든 적이 없었다는 걸.

반 시진 전, 서제겸이 손수 가져온 약탕. 그 한 모금을 삼키자마자 속이 뒤틀리는 위화감이 느껴져 그녀는 몰래 다 게워냈었다.

'마비산...'

'나를 재워놓고 심장의 피를 뽑아, 모설희를 살리려 했던 거였어.'

강연우는 떨리는 손을 들어 피가 뿜어져 나오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손가락 틈새로 붉은 피가 끊임없이 배어 나와 새하얀 옷을 붉게 물들였다.

우습기 짝이 없었다.

삼 년 전, 태자 서제겸이 황제의 노여움을 사 변방으로 유배당했을 때, 조정의 대신들은 앞다투어 그를 외면했었다. 왕손귀족들 역시 그를 독사 보듯 멀리했고, 죽마고우이자 정혼녀였던 모설희조차 연좌될까 두려워 만인이 보는 앞에서 파혼을 선언했었다.

그때 그를 따라나선 건 강연우, 오직 그녀 하나였다.

집안의 반대를 뿌리치고, 삼천 리 유배길에 함께 올랐다.

산적이 칼을 휘두르면 몸으로 막아섰다. 눈보라 치는 겨울, 먹을 게 없으면 제 몫을 덜어 그에게 먹였다. 그가 고열에 시달리던 밤엔 제 손목을 그어, 그 피로 약을 지어 먹인 것도 그녀였다.

그와 함께 썩은 밥을 나눠 먹고, 짚더미 위에서 함께 잠들며, 삼천 리의 모진 풍파를 온몸으로 버텨냈다.

하지만 동궁의 자리를 되찾은 지금, 모든 것이 변해버렸다.

모설희가 궁문 앞에 꿇어앉아 눈물 몇 방울로 하소연하자, 그의 마음은 단숨에 녹아내렸다. 그리고 끝내, 강연우를 사지로 몰아넣으며 심장의 피까지 바치게 만들었다.

잠시 후, 강연우는 비틀거리며 침상에서 내려왔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칼날 위를 걷는 듯 가슴의 상처가 찢어질 것처럼 아팠지만, 그 고통도 속에서 일렁이는 아픔에는 비할 바가 못 되었다.

한편, 모설희의 처소는 대낮처럼 환했다.

반쯤 열린 창문 너머로 끔찍한 광경이 강연우의 눈에 들어왔다.

서제겸이 보물이라도 다루듯 조심스럽게, 강연우의 피가 담긴 그릇을 모설희의 입가로 가져가고 있었다.

"아파요..."

모설희가 눈을 감은 채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

"제겸 오라버니, 저 너무 아파요..."

순간, 서제겸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이윽고 그가 억눌린 목소리로 낮게 속삭였다.

"금방 나아질 것이다. 조금만 참거라."

피를 다 마신 모설희가 그의 품에 안겼다. 아니나 다를까 안색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곧 그녀가 부스스 눈을 뜨자마자, 애틋한 서제겸의 눈빛과 마주쳤다.

"제겸 오라버니!"

모설희가 몸을 떨며 그의 옷소매를 다급히 붙잡았다.

"절 용서해주신 건가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때는 제가 너무 나약해서, 그 고생을 견딜 수가 없었어요... 하지만 후회했어요, 정말 뼈저리게 후회했다고요! 오라버니가 절 버리신다면, 전 차라리 죽어버릴래요!"

모설희가 벽으로 머리를 들이받으려는 순간, 서제겸이 그녀를 붙잡아 침상에 눕히고는 거칠게 입을 맞췄다.

다정함 따위는 없는 입맞춤이었다.

지난 삼 년간 쌓인 분노와 고통, 그리고 어찌할 수 없는 갈망이 뒤섞인, 난폭한 감정의 배설이었다.

그는 그녀를 집어삼킬 듯 탐닉했다. 마치 제 살과 뼈 안에 욱여넣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격렬한 입맞춤 끝에 그가 짓눌린 목소리로 낮게 읊조렸다.

"모설희. 내 마음을 볼모로 잡고 이렇게 방자하게 굴다니."

"내가 어찌 널 버리겠느냐. 어찌 널 원하지 않겠어. 이미 어제 아바마마께 청을 올렸다. 연우와 같은 날 동궁으로 들이겠다고. 그 아이는 태자비가 되고, 너는 측비가 될 것이다."

"측비요?"

모설희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눈망울로 그를 바라보았다.

"오라버니는 제게 평생 단 한 사람만을 곁에 두겠다고 약속하셨잖아요."

"연우가 나에게 바친 희생이 너무 크다. 내 손으로 그 아이를 저버릴 수는 없다. 하지만 설희야, 내 마음속 유일한 정인은 오직 너뿐이라는 것만 기억해다오."

말을 마친 서제겸이 모설희를 품에 안고, 그녀의 쇄골 위로 입술을 내리눌렀다.

그 눈빛엔, 삼 년간 눌러왔던 애증과 그리움이 한꺼번에 쏟아지고 있었다.

강연우는 얇은 휘장 너머로 뒤엉키는 두 사람의 그림자를 멍하니 응시했다.

그 순간, 가슴의 상처가 혹독하게 아려와 그녀는 결국 몸을 웅크렸다.

상처를 움켜쥔 손가락 사이로 붉은 피가 바닥에 뚝, 뚝 떨어졌다.

몸이 찢기는 고통도, 심장을 수천 개의 화살이 관통하는 이 배신감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서제겸...'

'그 아득했던 삼천 리 유배길 내내, 당신은 날 사랑한 적이 없었구나.'

'그렇다면 나도, 굳이 태자비 자리에 연연할 이유가 없지.'

십 년을 뼛속까지 사랑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지독했던 사랑을 내려놓는 데는, 단 한 순간이면 충분했다.

강연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걸어가는 회랑 위로 뚝뚝 떨어진 선혈이 핏빛 꽃처럼 처연하게 피어났다.

길을 지나던 궁인들이 피투성이가 된 그녀를 보고 경악하며 비켜섰지만, 강연우는 그것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황제의 침전을 향해 곧장 걸어갔다.

"연우 낭자?"

문을 지키던 태감이 온몸이 피로 물든 그녀를 보고 소스라쳤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십니까..."

"소인 강연우, 폐하를 뵙고자 하옵니다. 양국의 국교가 걸린 중대사이오니 지체 없이 아뢰어 주십시오!"

곧 묵직한 문이 열렸다.

어서각 안, 무릎을 꿇고 앉은 강연우를 내려다보는 황제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연우야, 네 몰골이 어찌..."

그때, 강연우가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무겁게 고개를 숙였다.

"북적(北狄)에서 황실의 여인을 아내로 청해왔다 들었사옵니다. 소인이 자원하여 그 땅으로 시집가 화친을 도모하겠사오니, 부디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변방의 안녕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소인이어야 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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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어의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이윽고 목소리가 사시나무처럼 떨려왔다."태자 전하, 소신은... 도저히 못 하겠사옵니다. 연우 낭자께서는 전하와 함께 삼천 리 유배길을 버텨내시느라 이미 몸이 만신창이이옵니다. 여기서 심장의 피까지 뽑으신다면, 설령 깨어나신다 한들... 그 고통에 숨이 끊어지실 것이옵니다...""그만."서제겸의 목소리가 어의의 말을 가차 없이 끊었다.그의 눈빛은 얼음보다 차가웠다. 그 시선 하나에 방 안 공기까지 얼어붙는 듯했다."네가 못 하겠다면."그가 어의의 손에서 단검을 낚아챘다."내가 하면 될 일이다."망설임 따위는 없었다. 칼끝이 그대로 강연우의 심장을 향해 내리꽂혔다."윽..."침상 위, 다 꺼져가는 불씨 같던 여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으나 침소 안의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다.울컥, 선혈이 쏟아졌다. 서제겸이 그릇을 기울여 재빨리 피를 받아냈다.그릇이 가득 차자, 그는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냉정하게 침전을 나섰다.어의 역시 비틀거리며 그 뒤를 쫓았다.쾅.무거운 문이 닫히고 멀어지는 발소리가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고요해진 침상 위에서, 강연우가 천천히 눈을 떴다.살이 찢기는 통증에 관자놀이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비명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그녀는 아랫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어 삼켰다.'아파. 너무 아파...'아무도 몰랐다. 그녀가 애초에 잠든 적이 없었다는 걸.반 시진 전, 서제겸이 손수 가져온 약탕. 그 한 모금을 삼키자마자 속이 뒤틀리는 위화감이 느껴져 그녀는 몰래 다 게워냈었다.'마비산...''나를 재워놓고 심장의 피를 뽑아, 모설희를 살리려 했던 거였어.'강연우는 떨리는 손을 들어 피가 뿜어져 나오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손가락 틈새로 붉은 피가 끊임없이 배어 나와 새하얀 옷을 붉게 물들였다.우습기 짝이 없었다.삼 년 전, 태자 서제겸이 황제의 노여움을 사 변방으로 유배당했을 때, 조정의 대신들은 앞다투어 그를 외면했었다. 왕손귀족들 역시 그를 독사 보듯 멀리했고, 죽마고우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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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주필을 쥔 황제의 손이 뚝 멎었다. 먹물이 상소문 위로 툭 번져나갔다.이윽고 그가 고개를 들었다. 대전 한가운데 무릎 꿇은 여인을 바라보는 미간에 곤혹스러움이 짙게 배어났다."연우야. 제겸이가 모설희를 측비로 들이려 한다는 소식을 들은 게로구나. 안심하거라. 교지는 아직...""폐하."강연우가 나지막이 말허리를 잘랐다. 그녀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처연하다 못해 참담했다."소인은 이제 태자 전하와 부부의 연을 맺고 싶지 않사옵니다."그녀가 차가운 바닥에 이마를 짓찧었다. "소인이 화친(和親)을 떠나려 하옵니다. 이 한 몸 바쳐 양국의 안녕을 사겠습니다."황제는 오래도록 말이 없었다. 무겁고 긴 탄식만이 전각을 채울 뿐이었다."정녕 마음을 굳힌 것이냐? 북적은 산세가 험하고 척박한 땅이다. 한 번 떠나면 다시는 이 도성으로 돌아오지 못한다.""예, 이미 마음을 굳혔사오니 부디 굽어살펴 주시옵소서."황제가 다시 한번 깊게 숨을 내쉬고는, 마침내 붓을 들어 성지 위에 옥새를 눌렀다.콰앙.묵직한 소리가 대전을 울렸다."정 그렇다면, 짐이 황실에서 낼 수 있는 가장 고귀한 혼수를 준비하마. 한 달 뒤 가장 번듯한 모습으로 화친 길에 오르게 하겠다."동궁으로 돌아왔을 때, 강연우는 밀려드는 통증에 눈앞이 아득해져 있었다.간신히 침소에 몸을 뉘었을 때.콰당.문이 거칠게 열렸다."연우야! 깼느냐?"서제겸의 목소리가 방 안을 파고들었다. 강연우가 고개를 돌리자 일렁이는 촛불 속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은실로 수놓인 흑색 포가 훤칠한 몸을 따라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옷자락엔 아직 차가운 밤이슬이 맺혀 있었다.그녀가 가슴을 움켜쥔 걸 본 순간, 서제겸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어젯밤 동궁에 자객이 들었다. 내가 미처 널 지키지 못해 상처를 입혔구나."강연우는 하마터면 웃음이 터질 뻔했다.'자객이라니. 제법 그럴듯한 핑계군.'그가 손을 뻗어 상처를 만지려다, 통증을 더할까 두려운 듯 허공에서 멈췄다."많이 아프냐?"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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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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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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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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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강연우는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나 서제겸의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지기가 무섭게, 모설희가 콧소리를 섞어가며 간살스럽게 속삭였다."언니, 저 말을 타고 싶사옵니다."강연우가 미간을 찌푸렸다."너는 태기를 품은 몸이다. 말을 타는 것은 격에 맞지 않아.""하지만 전하께서 직접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저를 잘 돌보아라고요."모설희는 무고한 척 생글거렸다."설마 태자 전하의 명을 거역하시려는 심산입니까?"강연우는 침묵을 지켰다. 이윽고 다가오는 파란을 예감하면서도, 끝내 걸음을 옮겨 고삐를 쥐었다.그때, 모설희는 안장 위에 엉덩이를 붙이기 바쁘게...퍽!말의 배를 사정없이 걷어찼다."히히히힝!"고통에 말이 앞발을 번쩍 들며 거칠게 울부짖었다."아아악! 내 아이, 내 아이가!"날카로운 교성과 함께, 모설희의 몸이 말등에서 바닥으로 가차 없이 처박혔다.쿵!사냥터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곧이어 서제겸이 돌아왔다.그가 사냥한 백여우의 몸은 아직 핏물도 채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이윽고 어의가 사시나무 떨듯 떨며 고개를 조아렸다."설희 낭자께서는 뼈가 한 대 부러지셨사오나… 천만다행으로 평소 기력을 보해둔 덕에 아이는 무사하옵니다…"때마침 적절한 시기에 모설희가 번뜩 눈을 떴다.그녀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서제겸의 소매를 처절하게 붙들었다."제겸 오라버니… 언니께서 저를 미워하시는 건 진작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래도 우리 아이를 이리 죽이려 드실 줄은 몰랐습니다!"순간, 서제겸의 눈빛이 무섭게 가라앉았다."그게 무슨 소리냐.""전하께서 자리를 비우시자마자 언니가 제게 억지로 말에 오르라 윽박질렀습니다! 제 몸을 보십시오. 이 성치 않은 몸으로 어찌 말을 탄단 말입니까?"모설희가 애처롭게 흐느꼈다."그것도 모자라 고삐를 잡아주기는커녕… 은침으로 말의 둔부를 찔렀사옵니다!"서제겸은 재빨리 고개를 돌려 강연우를 쏘아보았다. 눈 밭에 일어난 불길은 당장에라도 그녀를 태워 죽일 듯 맹렬하기 그지없었다."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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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궁으로 돌아가는 길, 모설희는 서제겸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강연우의 앞을 가로막았다.그녀는 제 관자놀이쪽 장신구를 가만히 만지작거리며, 간사하면서도 오만한 미소를 흘렸다. "언니, 명목뿐인 태자비 자리를 쥐고 있으면 무얼 합니까? 전하의 마음을 차지한 것은 결국 저인 것을요. 예나 지금이나 연모 받지 못하는 인간만큼 처량한 건 없는 법이지요."모설희가 강연우의 귓가로 은밀하게 상체를 기울였다. "요 며칠 흘러가는 꼴을 보아하니 언니께서는 영 현실을 분간하지 못하시는 듯싶어… 제가 오늘, 특별히 판을 벌였습니다. 전하의 심장 깊숙한 곳에 박힌 이가 누구인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시라고요."순간, 강연우의 가슴 저편에서 서늘한 조짐이 일었다.모설희가 제게 해를 가하려 들 줄 알았다. 그렇기에 옷소매 틈새로 서슬 퍼런 비수까지 숨겨두지 않았던가. 여차하면 황실의 안위 따위 처박아 두고 어전에서 함께 핏빛을 볼 요량이었다.그러나 예상과 달리 마차가 달리는 내내 모설희는 기이할 정도로 얌전히 있었다. 단 한 자락의 미동조차 없이.대열이 궁으로 이어지는 산길 초입에 접어들었을 무렵이었다. 마차 외부에서 돌연 천지를 찢는 듯한 고함과 비명이 터져 나왔다.콰아아앙!어디선가 날아든 날카로운 화살 한 대가 마차의 두꺼운 휘장을 단숨에 찢어발기며 강연우의 귀밑을 스쳐 나무에 깊숙이 박혔다. 뒤이어 사방에서 호위무사들의 다급한 고함이 난무했다."자객이다! 전하를 호위하라!"강연우가 거칠게 휘장을 걷어 젖혔다. 맨 후미에 늘어선 마차 주위로 번뜩이는 그림자가 사정없이 몰아치고 있었다. 호위무사들은 이미 검은 복면을 쓴 자객들과 뒤엉켜 가차 없는 살행을 벌이고 있었다.그 혈로의 중심에서 서제겸의 자태는 유독 눈이 시렸다. 장검을 휘두르는 그의 발걸음마다 자객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나갔다.그러나 살육이 종극에 달해 가던 그 순간. 강연우의 시선 끝에 기이한 광경이 맺혔다.모설희가 돌연 사지를 떨며 자객 중 한 명을 향해 스스로 몸을 날린 것이었다. 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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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청음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멍하니 굳어버렸다."예?""내 이미 폐하께 주청하여 교지를 받았단다. 내일 날이 밝는 대로 북적의 땅으로 화친을 떠날 것이다.""아가씨!" 콰당탕.청음이 황급히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아가씨! 노비도 함께 가겠습니다!"강연우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청음의 여윈 어깨를 조용히 부축해 일으키며 나지막이 속삭였다."네 몸값 문서는 방금 전 화로에 넣어 불태웠단다. 내가 이미 도성 외곽에 심성이 바른 가문 한 곳을 물색해 두었으니 내일 날이 밝으면 가서 한번 살펴보거라. 그 사내가 마음에 들면 혼인을 맺고 만약 싫다면… 보따리 안에 든 은표만으로도 네 한평생은 족히 안온하게 채우고도 남을 게다."청음은 흐느끼다 못해 숨을 쉴 때마다 꺽꺽거리는 소리를 냈다. 죽어도 아가씨의 뒤를 따르겠다며 바닥을 긁는 아이의 머리칼을, 강연우는 가만히 쓸어내릴 뿐이었다."청음아. 말 듣거라."결국 청음은 숨이 넘어가기 직전까지 오열하다가 강연우를 향해 무겁게 세 번 절을 올렸다. "아가씨… 부디, 부디 고통 없이 평안하셔야 하옵니다…"묵직한 처소의 문이 굳게 닫히는 순간 강연우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지독하게 서늘한 이 궁 안에서 제게 허락되었던 마지막 온기 한 자락이, 그렇게 황량하게 꺼져버렸다.화친의 대열이 오르기 전날 밤. 서제겸이 예고도 없이 그녀의 처소 문을 거칠게 밀치고 들어왔다.사방이 황량할 정도로 텅 빈 내부를 둘러보던 서제겸은 뒤늦게 위화감을 느낀 듯 물었다. "네 곁을 지키던 그 극성맞은 시녀는 어디로 치웠느냐?"강연우는 고개를 숙인 채, 붉은 혼례복 위로 담담하게 바늘귀를 꿸 뿐이었다. "그 아이는 심부름을 보냈사옵니다."서제겸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의 시선은 오직 강연우의 무릎 위에 펼쳐진 붉은 비단 혼례복에 닿아 있었다."다 수놓았느냐?"강연우는 나지막이 고개를 끄덕이며 마지막 자수 실을 가위로 톡 잘라내었다.이윽고 서제겸이 한 걸음 다가왔다. 그의 낯빛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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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장
모설희가 가마에서 내려설 때였다. 발걸음이 흔들리더니 하마터면 바닥으로 고꾸라질 뻔했다.지척에 서 있던 서제겸이 황급히 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안아 받쳤다. "조심하거라. 아이를 생각해야지."모설희는 그 품에 기댄 채 콧소리를 섞어가며 토라진 체 했다. "제겸 오라버니, 저는 괜찮사옵니다. 오늘 국혼의 정비는 엄연히 연우 언니가 아니십니까. 오라버니께서는 마땅히 언니와의 대례를 행하셔야지요."서제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심성이 참으로 갸륵하구나."그는 문득 고개를 돌려 궁문 초입을 응시했다. 저도 모르게 미간이 흉폭하게 뒤틀려 내려앉았다. "헌데, 정비의 가마는 도대체 왜 이리 기척조차 없는 것이냐."바로 그 순간, 혼례의 전반을 관장하던 태감이 땀을 뻘뻘 흘리며 뛰어왔다. "전하! 태자비 마마께서 입궁하시던 도중 혼례복이 크게 찢어진 것을 발견하셨다 하옵니다! 대례의 초입부터 흉조가 들까 염려하시어 급히 처소로 돌아가 의복을 갈아입으시느라 지체하고 계시옵니다!"서제겸의 낯빛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이윽고 눈빛에 노기가 일렁였다. "만약 길시를 어지럽힌다면 내 네놈들의 목을 치더라도 결코 원망치 말거라!"그때, 눈치를 보던 나이 든 어멈이 서제겸의 귀를 향해 은밀하게 상체를 굽혔다. "전하, 대례의 시각이 코앞이옵니다. 이대로 옥체를 세워둘 수는 없으니, 우선 급한 대로 측비 마마를 정실의 자리에 세워 식을 먼저 올리심이 어떠할런지요. 길시를 놓치면 후일이 번잡하옵니다."서제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한동안 입술을 짓씹으며 침묵을 고수했다.그때,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모설희가 서제겸의 두꺼운 소맷자락을 잡아끌었다."제겸 오라버니… 정녕 저 따위와는 식을 올리기 싫으신 것입니까?" 곧이어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차올랐다. "하긴, 제 배 속의 핏줄이 아무리 전하의 씨라 한들, 천출인 제가 감히…""그만하거라. 어멈의 말대로 하겠다. 정비의 지체로 국혼을 망칠 수는 없으니 우리끼리 먼저 식을 올리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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