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소씨 부인은 두 손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닭국 그릇을 들고 있다가 그 말을 듣자 더욱 다급해져 황급히 그릇을 내려놓고 부드럽게 달랬다.“우리 공주님, 이건 정말 그러시면 아니 되옵니다.산후에 바람을 들이면 그게 평생 가는 법이지요.조금만 더 참아 보시겠어요, 예?”마침 그때 시녀가 발을 들추고 들어와 김 낭자가 도착했다고 알렸다.소씨 부인은 구원의 손길을 본 듯 재빨리 일어나 마중을 나가 얼굴 가득 진심 어린 웃음을 띠었다.“김 낭자, 마침 잘 왔구나. 어서 들어와라.운이가 내내 너를 찾고 있었단다.”그러나 그녀의 시선이 천천히 들어서는 김단에게로, 무엇보다 폭포처럼 흘러내린 그 눈부신 설백의 머리카락에 닿는 순간 그 웃음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순식간에 커다란 놀람으로, 그리고 눈빛을 스치듯 지나가는 어색함으로 바뀌었다.예전 일을 돌이켜 보면 끝내 자신이 김단에게 죄를 지은 셈이었다.당초부터 자신이 아니었더라면, 지금 저 침상에 누워 산후조리를 하고 있는 이가 김단이었을지도 모른다.김단이 그동안 나름 평안히 지내 왔다면 그래도 마음을 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하지만 이렇게 어린 나이에 온 머리가 눈처럼 새하얗게 변한 채 서 있는 모습을 보니 가슴 깊은 곳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미안함이 치밀어 올랐다.온갖 감정이 한데 뒤섞여 미리 준비해 두었던 인사말이 목에서 턱 막혀 나오질 않았고 얼굴빛만 은근히 붉어졌다.“소씨 부인께서 늘 염려해 주신 덕분에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김단은 소씨 부인의 난처함을 보지 못한 듯 예를 따라 살짝 무릎을 굽혀 흠잡을 데 없는 인사를 올렸다.목소리는 잔잔하고 온화했다.마치 호수 위를 스치는 바람처럼 조금의 물결도 남기지 않았다.그리고 곧, 소씨 부인을 지나쳐 침상 위에 누워 있는 고지운에게로 시선을 곧장 돌렸다.“단이!”고지운이 놀라 이름을 불렀다.이미 소하에게서 이야기를 들었건만, 막상 눈앞에서 단이의 그 눈부신 백발을 마주하니 가슴이 보이지 않는 손에 세게 움켜쥐어진 듯 죄어 왔다.푸른
김단은 치우친 사랑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은 아니었다.다만 자신이 밀려나, 아무렇지 않게 희생당하고 죄를 떠안는 버려진 자리가 되는 것만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그때부터였다.미움과 원망이 덩굴처럼 자라나 그녀의 심장을 촘촘히 감아 조이기 시작한 것은.그녀는 다시는 그들을 향해 아버지, 어머니라 부르지 않았다.나중에서야, 정작 친딸이 자신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조차도 입을 열지 않았다.하지만 이제, 진산군과 임씨 부인은 모두 그녀를 지키려다 세상을 떠났다.그들은 자기 목숨을 찢어 바치며 그녀에게 한 줄기 살길을 열어 주었다.사람을 집어삼키는 궁궐과 한양에서 벗어나 달아날 수 있도록 몸으로 길을 틔워 준 것이다.그러니 예전의 그 날카롭던 미움과 원망은 생과 사 앞에서는 너무도 창백하고 힘없이 느껴질 뿐, 더는 아무 무게도 갖지 못했다.사람의 목숨은 등불이 꺼지듯 사라진다.끝내 남는 것은 끝이 보이지 않는, 가슴을 파먹는 슬픔뿐이었다.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콧등이 시큰거려 오는 것을 더는 누를 수 없었다.눈앞은 몰아치는 눈물에 순식간에 흐려졌다.뜨거운 눈물이 예고도 없이 흘러내렸다.한 방울, 두 방울, 줄지어 이어지며 앞에 펼쳐진 축축한 흙바닥으로 떨어져 스며들었다.그 자리에 짙은 얼룩이 하나둘 번져 갔다.지전을 쥔 손이 허공에서 멈춰 섰다.어깨가 제멋대로 가늘게 떨렸다.꾹 눌러 참던, 부서질 듯한 흐느낌이 이 적막한 무덤 앞에서는 유난히 또렷하고 아프게, 귀에 박히듯 들려 왔다.임학은 김단의 등 뒤 몇 걸음 떨어진 곳에 가만히 서 있었다.한 줄기 바람만 스쳐도 넘어질 것 같은 그 여린 등과, 눈을 찌를 듯한 새하얀 머리카락을 바라보는 사이 눈가가 또다시 제멋대로 붉어졌다.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힘을 너무 준 탓에 손마디가 하얗게 질렸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조용히 서 있을 뿐이었다.가슴속에서 거세게 치밀어 오르는 감정과 말없이 건네고 싶은 곁을 내어 주는 마음을 모두 삼켜 내려가며.하루가 더
임학은 김단의 차가운 눈동자에도 물기가 번져 오르는 것을 보고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그는 황급히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서며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단이야, 그렇게 생각하지 마. 이건 네 잘못이 아니야. 아버지, 어머니… 두 분은 한 번도 너를 원망하신 적이 없다. 그리고… 그리고 두 분이 아신다면, 네가 다시 아버지, 어머니라고 불러 주겠다고 마음을 돌렸다는 걸 아신다면, 얼마나 기뻐하실지 몰라.”그 말을 들으며 김단의 눈물은 더욱 거세게 흘러내렸다.예전의 그녀는 끝까지 고집을 부리며 두 사람을 인정하지 않았다.입에서 ‘아버지, 어머니’라는 말 한 번 꺼내는 것이 차라리 자신을 죽이는 것만큼이나 괴롭게 느껴질 정도였다.진산군.임씨 부인.그 두 호칭이야말로 그녀에게는 가장 편안하고, 가장 익숙한 부름이었다.그러나 이제 이 세상 어디에도 그 둘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 지금,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그 두 호칭에서는 싸늘한 허전함 말고는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오히려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몰라 망설이게 만들던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말이이제 와 곱씹어 보면 가장 알맞은 부름이 되어 있었다.최지습은 지금 이 순간, 분명 울음을 참고 버티려 애쓰고 있으나 도무지 버텨 내지 못하는 김단의 모습을 바라보며 가슴이 미어질 듯 아려 왔다.그는 천천히 다가가 가볍게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원래 말이 많은 사람도 아니었다.지금 이 순간에도 무슨 말을 해 줘야 할지 알 수 없었다.다만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일은 한 번 안아 주는 것, 기댈 어깨 하나 내주는 것이라는 사실만은 또렷이 알고 있었다.언제든지,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간에, 그녀 곁에는 늘 자신이 서 있다는 것을 그렇게 전하고 싶었다.김단은 최지습의 품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처음에는 어깨만 조용히 떨릴 뿐이었지만, 오랫동안 눌러 두었던 슬픔과 놀람, 서러움과 깊은 무력감이 무너진 둑을 헤집고 쏟아져 나온 물처럼 더는 막을 수 없게 되었다.그녀는 얼굴을 깊숙이 파고들 듯 최지습의 옷깃에
임학의 목소리에는 울음이 섞여 있었다.“아버지와 어머니의 원수는 오라버니가 이미 갚았다. 그날 너는 나라와 조선을 위한 대의를 위해 그 자리에 있었고, 아버지께서 너를 구하신 것도 조선과 주상을 위한 일이었다. 어머니 또한 결코 너 때문에 돌아가신 것이 아니다. 그러니 제발 이 모든 일을 네 어깨 위에만 올려놓지 마라. 결국 잘못은 오라버니인 나에게 있다. 진산군 댁의 짐을 짊어지지 못한 것도, 다 나의 무능 때문이다. 원망이 있다면… 전부 나에게 쏟아라. 더 이상 너 자신을 괴롭히지 말아라…”말을 이어 갈수록 그의 목소리에는 서러운 기색까지 배어 나왔다.“너는 겨우… 겨우 다시 한 번 나를 봐 주기 시작했는데… 이제는 예전처럼 그렇게까지 나를 미워하지도 않게 되었는데… 또 내가 다 망쳐 버렸다. 단이야, 나를 원망해라. 마음껏 나를 욕해라. 모두 다 내 잘못이다…”방 안에서 김단은 차가운 문짝에 등을 기댄 채 천천히 바닥으로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문 밖에서 들려오는 임학의 목소리, 고통과 자책이 뒤섞인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또렷하게 그녀의 귓가에 스며들었다.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 있는 그 사람이 지금 얼마나 절망에 가까운 곳에서 얼마나 낮고 비굴한 기도로 매달리고 있는지, 그 감정까지도 고스란히 느껴졌다.그녀는 울지 않았다.그저 얼굴을 깊이 무릎 사이에 파묻었다.갑자기 들이닥친 진실과 거대한 슬픔이 속을 휘저으며 가슴과 오장육부를 마구 쳐 올려도 그저 그 자리에 웅크리고 있을 뿐이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를 만큼 긴 침묵 끝에, 마침내 최지습이 거의 억지로 문을 부수고 들어가려 할 즈음에서야—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안에서 열렸다.문간에 선 김단의 얼굴에는 눈물 자국 하나 없었다.다만 모든 것이 다 닳아 없어져 버린 듯한 피곤한 고요만이 어려 있었다.그녀의 시선은 최지습을 지나 바로 임학에게로 가 닿았다.문이 열리는 순간, 임학은 숨조차 쉬지 못하고 굳어 버렸다.문 안에 선 사람을 똑똑히 알아본 순간, 벼락을 맞
왕철은 그 말을 듣고 얼굴에 뚜렷한 당혹이 스쳤다.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갸웃했다.“진산군 댁 말씀이십니까? 아씨, 혹시… 이미 돌아가신 진산군이랑 임씨 부인 말씀입니까? 무덤에 가서 제를 올리시려는 겁니까?” 이미 돌아가셨다는 말은 벼락처럼 김단의 귓가에 떨어졌다.그녀의 온몸이 순식간에 굳어 버렸다.소매를 정리하던 손동작이 허공에서 그대로 멈췄다.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왕철을 바라보았다.동공이 가늘게 좁혀졌다.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그녀 자신도 눈치 채지 못한 떨림을 머금고 있었다.“왕철… 방금 뭐라고 했느냐? 이미… 돌아가셨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왕철은 김단의 반응에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얼굴에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 가득했다.“아씨, 정말 모르고 계셨습니까? 진산군과 임씨 부인 두 분께서 돌아가신지 벌써 일 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그때 아씨께서 한양을 떠나실 때 있었던 일이잖습니까.진산군께서 아씨를 지켜 내시겠다고 두 팔을 문빗장처럼 걸고 성문을 버티셨습니다. 그러다 그 죽일 놈이 그 두 팔을 몽땅 잘라 버렸고요. 종은… 당연히 아씨께서 알고 계신 줄로만 알았습니다.”“왕철!”숙희가 놀라 소리쳤다.그의 말을 막아 보려 했지만, 왕철의 입은 이미 너무 빨랐다.하지 말아야 할 말까지 쏟아낸 뒤였다.그 순간 김단의 머릿속은 새하얘졌다.모든 소리와 풍경이 한순간에 멀어져 가는 듯했다.왕철과 숙희가 그 뒤로도 무언가를 계속 떠들어 대고 있었지만,그녀의 귀에는 한 마디도 들어오지 않았다.벌써… 일 년이 넘었다고…?그럴 리가.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그녀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저녁바람이 그녀의 눈처럼 새하얀 머리카락을 스쳐 지나갔다.맑고 고왔던 얼굴은 땅거미 속에서 순식간에 핏기를 잃어 갔다.남은 것은 거대하고, 거의 텅 비어 버린 듯한 막막함뿐이었다.그녀는 숨 쉬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가슴 깊은 곳에서 숨 막히는 듯한 답답함이 서서히 치밀어 올랐다.그제야 그녀는 숨을 거세게 한 번 들
우직한 왕철은 너무 다급한 나머지 말까지 꼬여 버렸다.금세라도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이를 본 숙희가 재빨리 한 걸음 나서며 웃음 띤 얼굴로 달랬다.“아이고 왕철, 그렇게까지 허둥대지 마. 아씨께서 아무 일도 없으셔. 내가 말해 줄게. 아씨 머리카락은 공을 깊이 닦으시고 내공이 더 정진하셔서 이렇게 된 거야. 좋은 징조라니까. 아씨가 더 강해지셨다는 뜻이지. 이렇게 멀쩡히 서 계시잖아.”거짓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둘러대는 것이 가장 빠르다고 숙희는 생각했다.김단도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왕철, 나 정말 괜찮아.”왕철은 선뜻 믿지 못한 눈길로 김단을 위아래로 찬찬히 훑어보았다.안색은 곱게 상기되어 있고, 눈빛은 맑았다.도무지 병든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자 그제야 마음 한구석이 조금 놓였다.투박한 손등으로 눈가를 대충 훔치며 중얼거렸다.“괜찮으시다니 다행입니다, 다행입니다… 정말 간 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그는 그렇게 쉴 새 없이 중얼거리면서도 서둘러 김단과 숙희를 집 안으로 모셔 들였다.떨어뜨렸던 빗자루를 주워 들고는 두 사람 뒤를 따르며 줄줄이 말을 이었다.“아씨, 이제야 돌아오셨습니다. 한양을 떠나신 지도 벌써 일 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이 종은 날마다 여기서 기다리고 또 기다리며, 언제나 아씨만 손꼽아 왔습니다. 맞다, 작년 가을에는 옆집 장 숙모네에서 며느리를 들였는데, 우리 쪽에도 떡을 보내 왔습니다. 종이 예법대로 답례도 해 두었으니 이따 한번 보시고, 아씨 눈에도 흡족한지 살펴보십시오. 또 봄만 되자 어디서 굴러온지 모를 길고양이들이 담장 위에서 싸움을 벌이다가 기와 두 장을 부숴 먹었습니다. 종이 얼른 사다리를 가져와 지붕에 올라가 막아 두었더니 비 한 방울 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또, 앞거리의 가게 관리자가 우리 집 길가에 면한 그 작은 방을 빌려 잡화점을 내고 싶다고 하더이다. 전에 그 방은 남에게 빌려 주지 말라 하신 아씨 말씀이 생각나서, 종이 단번에 거절해 버렸습니다…”김단은 왕철이 자질구레한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