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부인은 가문 사람들의 얼굴을 쓱 훑더니 결국 진산군을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말했다.“넌 내가 단이만 예뻐한다고 했지? 그러면 너희들은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것이냐? 다들 원이만 예뻐하고 편애하잖아! 나까지 그 아이를 아끼고 지켜주지 않으면 그 아이가 이 집안에서 숨이라도 편하게 쉴 수 있을까?”말을 하던 노부인은 한숨을 푹 내쉬며 천천히 대문 밖으로 걸어갔다.“아무리 친딸이 아니라고 해도 이렇게 오랫동안 함께 살았으면 감정이라는 게 생기는 것이야. 감정이 생기면 마음이 쓰이기 마련이고.”집안에 서있던 사람들은 노부인이 멀어져가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다가 노부인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진산군이 미간을 확 찌푸리며 물었다.“오늘 이 일을 누가 어르신한테까지 알린 것이냐?”임학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고 머릿속에는 여전히 조금 전에 자신을 오라버니라고 부르던 김단의 모습만 가득 차있었다.임씨 부인도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이때,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던 임원이 우물쭈물하며 입을 열었다.“제, 제 곁을 지키던 시녀가 의원에게 약을 가지러 갔다가 실수로 말을 흘린 것 같습니다.”노부인 곁에 있는 시녀는 거의 매일 의원에게 찾아가 약을 구했기에 거기서 마주쳤을 수도 있다.임원의 말에 진산군이 화가 잔뜩 난 표정이었고 눈치를 보던 임원은 진산군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다급하게 말을 이어갔다.“제가 잘못했습니다. 일부러 할머니께 이 일을 알리려고 했던 건 아닙니다. 돌아가서 시녀를 제대로 교육하겠습니다. 아버님, 제발 노여움 푸세요.”눈시울이 빨개진 임원이 가여운 모습으로 진산군을 쳐다보자 진산군은 마음이 약해져서 화를 낼 수도 없었다.“너희들 할머니는 이제 몸이 안 좋아서 이런 일들을 신경 쓰게 만들면 안 돼. 그러니까 앞으로 절대 할머니에게 괜한 얘기를 해서는 안 된다!”진산군이 엄숙한 표정으로 경고했고 조금 전 어머니의 말이 떠오르자 괜히 마음이 불편해졌다.“단이도 한 달 외출 금지를 받았으니까 이 일은 이쯤에서 마무리 짓고 앞으로
이날 밤, 김단은 꿈을 꾸었다.꿈속에서 김단은 3년 전 임원이 유리잔을 깨트렸던 상황으로 돌아갔고 공주 마마의 질타에 소한과 임학은 김단 앞에 막아서서 김단을 든든하게 지켜주었다.꿈속의 김단이 두 오라버니에게 감동하던 그때, 두 사람 뒤에 서있는 사람은 김단이 아닌 임원으로 바뀌었다.결국 김단은 세답방에 끌려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다른 무수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나인이 휘두른 채찍에 맞고 있었다.화들짝 놀란 김단은 두 눈을 번쩍 떴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으며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줄줄 흘렀고 심장도 빠르게 뛰었다.세답방 그곳은 아직까지도 김단에게 지옥보다 더 두려운 곳이다.인기척에 놀란 숙희가 방으로 달려왔고 침대에 걸터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김단을 보자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아씨, 악몽을 꾸신 겁니까?”깊게 숨을 들이마신 김단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조금 안 좋은 꿈을 꾸었을 뿐이야. 이제 괜찮아졌어.”꿈속에서도 소한과 임학이 자신의 편에 서지 않았다는 생각에 김단은 씁쓸하게 웃다가 조금씩 밝아오는 창밖을 보며 물었다.“지금 몇 시인 것이냐?”“이제 묘시 조금 넘었습니다. 조금 더 주무십시오.”숙희가 하품을 하며 대답하자 김단이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다 잤어.”조금 전에 꾼 꿈으로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리고 있기에 다시 눕는다고 해도 잠이 오지 않을 것이다.숙희는 여전히 졸린 듯 눈을 비비며 물었다.“그럼 지금 일어나시겠습니까?”김단은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아직 너무 이른 시간이고 어차피 그녀는 지금 외출 금지이기에 지금 일어나도 딱히 할 일은 없다.“그럼 뭐 하실 거예요?”숙희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묻자 김단은 멈칫했다.그녀는 아직 뭘 해야 할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명정 대군은 이미 사망했고 이대로 진산군 관저에 가만히 있으면 임씨 가문에서는 또다시 그녀에게 결혼 상대를 찾아줄 것이다.이용당하는 기분은 그리 좋지 않았기에 김단은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으며 자신을 위해 뭔가를 시작해야
두 번의 시도에도 입에 댈 수 없을 만큼 엉망진창이었기에 정암은 바로 돈을 들여 전문가한테서 배우기로 했다.쉬워 보였던 대창 요리는 실제로 만들려 하니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며칠 간의 노력 끝에 드디어 성공한 정암은 대창을 사들여 한 그릇을 만들어 보았으나, 식으면 맛이 떨어질까 봐 바로 김단에게 달려온 것이었다.하지만 문을 두드리고 나서야 정암은 자신이 너무 이른 시간에 찾아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심지어는 그는 대문이 아닌 담을 타고 몰래 들어온 것이었다.뭐 대단한 것도 아니라 대창을 맛보게 하려고 말이다!자신이 큰 실수를 저질렀다는 생각에 정암은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으나, 이제는 되돌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한편, 김단도 정암이 이 시간에 대창을 주러 왔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저번에 그저 지나가는 말로 대창을 좋아한다고 하였고, 심지어 그녀는 까맣게 잊고 있었건만, 정암은 그 말을 기억하고 이렇게 직접 만들어 별당에 가지고 온 것이었다.정암의 얼굴이 점점 더 빨개지자 김단은 참다못해 피식 웃으며 말했다.“종사관 나리께서는 제가 지금 배고프다는 걸 어떻게 아셨습니까?”말을 하던 김단은 숙희에게 찬합을 받아오라고 눈치를 줬고,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에 넋을 잃은 채 멍하니 서있던 정암은 숙희가 손을 내밀자 바로 찬합을 건넸다.숙희는 찬합에서 대창을 꺼냈고 김단은 바로 한 점을 집어 입에 넣었다.정암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김단을 빤히 쳐다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맛은 어떻습니까?”“너무 맛있습니다.”환하게 웃던 김단은 한 점을 집어 숙희 입에 넣어주었고, 숙희도 이내 눈이 휘둥그레졌다.“정말 너무 맛있습니다!”정암은 그제야 긴장이 풀린 듯 안도의 한숨을 살짝 내쉬었고 편한 미소도 지었다.“다행입니다. 제가 이 요리를 며칠이나 배웠는데 낭자의 입에 안 맞을까 봐 엄청 걱정했습니다.”김단은 한없이 조심스러운 정암의 모습을 보며 왠지 마음이 씁쓸했고 정암의 진심을 알 것만 같았다.만약 진심이
정암이 발견된 것인가?김단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씨, 여기 계세요. 소인이 나가보겠습니다.”숙희는 미처 내려놓지 못한 대창 그릇을 김단 손에 쥐여주며 빠르게 밖으로 향했고 그러다가 한참 지나고 나서야 돌아왔다.“아씨! 호위병들이 정사관 나리를 발견한 게 맞아요! 하지만 걱정하실 필요는 없어요. 정사관 나리께서 빠르게 도망가셔서 호위병들이 못 잡으셨어요.”숙희의 말에 김단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만약 정암이 김단 때문에 안 좋은 소문이라도 나면 그녀는 큰 죄책감에 시달릴 것이다.하지만 30분도 채 되지 않은 사이, 별당 대문이 벌컥 열리며 임학이 씩씩거리며 들어왔고, 김단은 갑자기 나타난 임학을 보고 미간을 확 찌푸렸다.“도련님, 저는 지금 별당 안에서 벌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조모께서는 절대 아무도 이곳에 발을 들이지 마시라고 명확하게 말씀을 하셨고요. 그런데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도련님께서는 무슨 일로 이곳에 오신 겁니까?”임학은 자신을 환영하지 않는 김단을 힐끗 쳐다보며 엄숙하고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아침 한 남자가 별당 담을 넘어서 도망치는 걸 봤다고 호위병이 나한테 보고를 했소.”김단은 순간 표정이 살짝 굳어졌지만 이내 담담하게 대꾸했다.“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그럼 그 남자는 잡혔습니까?”임학은 김단의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제 그 일이 있은 뒤로부터 화를 참아야 한다는 생각에 여전히 차분하게 말했다.“아니, 잡지 못했소. 하지만 호위병들은 그 자를 정암 종사관으로 의심하고 있소.”임학의 말에 김단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정암은 소한의 부하로써 평소에 호위병들과 마주치는 일이 많기에 호위병들이 정암을 알아봤을 것이다.하지만…김단은 임학을 힐끗 쳐다보다가 이내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물었다.“종사관 나리께서 이른 아침에 이곳에 올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임학은 뻔히 알면서 묻는 김단을 보며 속으로 어이없어서 코웃음을 쳤지만 결국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는 말했다.“그동안 낭자가 서럽고
이런 생각에 임학은 화가 점점 치밀었다.“어찌 됐든 낭자는 여인으로써 자신의 명성을 더럽히는 일을 저지르는 건 절대 안 되는 일이오. 낭자와 원이는 아직 혼인을 하지도 않은 처녀인데 안 좋은 소문이라도 퍼지면 낭자나 원이에게 좋을 게 하나도 없소.”김단이 자신의 별당에서 밤새 남자와 함께 있었다는 소문이 퍼지기라도 하면 사람들이 김단을 어떻게 생각하고 또한 진산군 관저의 딸들을 어떻게 생각할까?그러다가 결국 임원의 명성도 김단 때문에 더럽혀질 수도 있다.한편, 김단은 임학의 말을 조용하게 듣고 있다가 그제야 임학의 본심을 알게 되었다.“어쩐지, 도련님께서는 사람을 시켜 저를 묶어놓고 저에게 약까지 먹였는데 이제 와서 갑자기 왜 제 명성을 걱정하시나 의아했는데 결국 도련님께서는 임원을 위해 저를 찾아온 것이군요.”흠칫하던 임학은 예전에 자신이 저지른 황당한 일들이 떠올라 마음이 조금 뜨끔했다.“난 오늘 낭자와 말다툼을 하러 온 게 아니오. 조모께서 낭자에게 벌을 준 건 낭자가 별당 안에서 다른 남자와 몰래 만나라는 뜻이 아니니 정신을 똑바로 차리시오.”그렇게 임학은 있지도 않은 죄명을 김단에게 강제로 씌웠다.임학이 돌아서서 떠나려고 할 때, 뒤에서 그릇 하나가 날아와 그의 왼쪽 어깨에 정확하게 맞았다.미간을 확 찌푸린 임학은 고개를 돌려 손에 그릇을 들고 있는 김단을 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미친 것이오?”걱정하는 마음에 충고를 했는데 김단은 그 마음을 알아주지도 못하는 망정, 그에게 이렇게 그릇까지 던지다니!하지만 김단은 멈추지 않고 계속 그릇을 던졌다. 그러다가 식탁 위에 있던 그릇을 전부 던지고 나서야 김단을 임학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제 명성을 가장 더럽힌 사람은 도련님입니다! 그리고 나서 제가 여인의 몸을 잘 간수하지 못했다고 손가락질하는 것도 당신이고요! 뻔뻔하게 저를 위해서 하는 말이라고 하지만 도련님께서는 별당에 들어선 순간부터 지금까지 저에게 괜찮은 지,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전혀 묻지 않았습니다. 되려 저에게
임학이 군영에 찾아갔을 때, 정암은 서재에서 소한에게 군무를 보고하고 있었다.문을 벌컥 열고 들어간 임학은 다짜고짜 정암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지만 눈치가 빠른 정암은 몸을 옆으로 살짝 돌려 임학의 주먹을 피했다.임학은 포기하지 않고 이번에는 정암을 향해 발을 뻗었지만 정암은 여전히 쉽게 쓱 피했다.한편, 돌발 상황에 미간을 확 찌푸린 소한은 책상을 뛰어넘어 정암을 향해 주먹을 날리는 임학의 손을 덥석 잡았다.그러고는 낮게 깔린 목소리로 임학에게 말했다.“지금 이게 무슨 짓이오?”임학은 소한의 손을 홱 뿌리치더니 화가 잔뜩 난 눈빛으로 정암을 노려보았다.“저자에게 물어보시오.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소한은 고개를 돌려 정암을 쳐다보았지만 정암은 당당하게 허리를 쭉 편 채 대답했다.“소인은 임 도련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김단에게 대창 요리를 줬을 뿐인데 그게 이렇게까지 화를 낼 일인가?한편, 정암의 대답에 임학은 다시 주먹을 꽉 쥐었다.“오늘 아침 정암 당신이 단이 별당 담을 넘어 도망을 쳤소. 우리 관저를 지키던 호위병들도 당신의 뒷모습을 알아봤는데 계속 모른 척할 셈이오?”임학의 말에 소한도 주먹을 꽉 쥐었다. 하지만 정암은 소한의 부하로 오랫동안 함께 일을 했기에 임학의 한 마디로 죄를 단정 질 수는 없었다.“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소한의 물음에 정암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되레 임학을 쳐다보며 물었다.“설마 김단 낭자에게 찾아가신 겁니까?”정암의 물음에 흠칫하던 임학은 버럭 화를 냈다.“내가 내 동생을 찾아가는 게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소!”“낭자에게 무슨 말을 하셨습니까?”정암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임학을 쳐다보며 언성을 높이자 임학도 화가 나서 또다시 정암을 때릴 기세로 말했다.“그건 나랑 내 동생 사이의 일이오! 당신은 끼어들 문제가 아니란 말이오!”정암도 기세 등등한 모습으로 한 걸음 다가가 임학의 멱살을 확 잡았다.“경고하는데 김단 낭자 앞에서 헛소리하시지 마십시오. 안 그러
정암은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자신의 오른손을 꾹꾹 누르며 담담하게 대꾸했다.“그럼 혹시 김단 낭자는 그저 장군님이 사줘서 좋아한 게 아닐까요? 만약 정말 다과를 좋아했다면 그렇게 사람들에게 다 나눠줬을까요?”예전에 정암도 김단이 나눠준 다과를 먹은 적이 있다.한편, 임학은 정암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고 자세히 생각해 보니 김단은 늘 남에게 다과를 나눠주곤 했었다.그때 당시에는 김단이 단순히 나눔을 좋아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암의 말을 듣고 보니 일리가 있었다. 만약 정말 다과를 매우 좋아했다면 아까워서 남들에게 그렇게 많이 나눠주지 않았을 것이다.한편, 임학만큼 당황한 소한은 정암을 잡고 있던 손을 스르르 놓았다.소한은 지금까지 김단이 다과를 좋아한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예전에 김단에게 다과를 선물할 때마다 김단은 잔뜩 신난 표정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선물을 받은 듯 기뻐했다.하지만 언젠가부터 김단은 소한이 마차 안에 넣어둔 다과를 전혀 입에 대지도 않았고 바로 임원에게 주었다.소한은 김단이 아직 그를 원망하고 화가 풀리지 않아서 그가 준 음식을 먹지 않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김단이 애초에 다과를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어렸을 때부터 두 살 어린 김단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그 아이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김단이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정암은 말 없는 두 사람을 보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서서 계속 말을 이어갔다.“장군님도 아실 겁니다. 소인이 어젯밤 군영을 떠났을 때 이미 술시였습니다. 취향각에서 주방장에게 두 시간 정도 요리를 배운 뒤 바로 대창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대창 손질만 해도 꽤 오래 걸렸고 도중에 고기를 태워서 다시 만들기도 했습니다. 소인이 취향각을 떠났을 때 이미 묘시였습니다. 장군님께서 소인을 못 믿으시겠다면 취향각에 직접 찾아가셔서 물으셔도 됩니다. 소인은 겨우 성공한 대창 음식이 식을까 봐 급하게 진산군 관저로 들고 간 겁니다.
임학은 정암의 말을 듣고 어리둥절하더니, 순간 격노했다.“네까짓 게 감히 단이를 넘 봐? 종사관이 뭐 대수라고? 잘 들어, 넌 단이를 좋아할 자격도 없어!”임학의 이렇게 얕잡아 보고 모욕하는 말은 틀림없이 정암을 분노시킨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정암은 그저 낮은 소리로 말했다.“알고 있습니다.”그의 표정은 담담하고 말투는 차분했다. 조금의 부끄러워하고 노여워하는 모습이 없었다.임학과 소한은 멍해졌다.침묵 속에서 정암은 말문을 열었다. 눈빛은 땅을 바라보는 데, 마치 아주 오래전을 회상하는 것 같았다.“예전의 김단 아씨는 하늘의 밝은 달이었습니다. 당신들은 모두 그녀를 총애하고 보호했지요. 저는 아씨와 신분 차이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단지 멀리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뿐, 넘볼 생각은 아예 없었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어느 날, 아씨는 구름 위에서 진흙탕으로 떨어졌고, 당신들은 모두 그녀를 버렸습니다!”임학은 눈썹을 찌푸리며 콧방귀를 뀌더니 조롱했다.“그래서 지금은 감히 넘볼 수 있다는 거야?”정암은 그저 고개를 저었을 뿐이다.“저는 단지 김단 아씨를 아낄뿐입니다.”“분명히 장군과 죽마고우인 사람은 김단 아씨이고, 결혼해야 할 사람도 그녀인데, 지금은 오히려 임원 아씨가 되었죠! 도련님은 김단 아씨의 오라버니이시니 언제 어디서나 그녀를 보호하셔야 하십니다. 그런데 이번에 몇 차례 김단 아가씨께서 위험에 처한 것은 모두 도련님이 직접 초래하신 일입니다! 도련님께서 그날 제가 장군댁에 가지 않았더라면, 김단 아씨는 얼마나 처참한 상황에 빠졌을지 아십니까?”모든 말은 임학의 말문을 막히게 했다.정암은 또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저는 아씨를 아끼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마지막 한 마디에는 힘이 없었다.그는 단지 종사관뿐이다...그녀에게 부귀영화를 줄 수 없고, 더군다나 그녀를 잘 보호할 수도 없다.이를 생각하니, 정암의 마음은 너무나도 아팠다.그는 객잔에서 방금 탈출한 김단의 모습과 탈출을 위해 피범벅이 된 그녀의
이튿날 아침, 김단은 궁무를 맡지 않았기에 평양관저에 머물며 맹영지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탓인지 맹영지의 눈빛에는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김단의 곁에 있을 때만큼은 그녀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조용한 정원, 김단은 맹영지와 함께 은은한 향기를 풍기는 계수나무 아래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숙희가 건네준 과자가 들려 있었고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번져있었다. 맹영지는 고개를 들어 만개한 계화를 바라보며 평온한 표정을 지었다. 어제 소하가 평양관저를 찾아왔으나 그는 맹영지와의 만남을 최대한 피하려 애썼다. 아마도 불필요한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함이었을 것이다.김단은 맹영지를 바라보며 과거 소하가 왜 그리도 그녀를 칭찬했는지 알 것 같았다. 한때 소하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여인답게 그녀는 고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하지만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그렇게 가까웠던 두 사람이었는데 맹영지는 어쩌다 소하에게 독을 먹이려 했던 것일까?김단은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맹영지의 몸과 마음이 회복되면 그때 자연스럽게 그 답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김단이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평양관저의 겸인이 급히 달려와 말했다.“아가씨, 맹가 사람들이 도착했습니다.”이런 큰일이 발생했으니 맹씨 집안에서 그녀를 보러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김단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겸인에게 말했다.“알겠소. 이리로 모셔오시오.”잠시 후, 맹씨 부인이 정원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김단에게 예를 갖추어 인사한 뒤 슬픈 눈으로 자신의 딸을 바라보았다. “김 의원님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의원님이 아니었다면 제 딸이 그 짐승 같은 자에게 학대받으며 살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입니다.”말을 마친 맹씨 부인의 눈동자가 붉어졌다.김단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맞이하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과찬이십니다, 맹씨 부인. 민태훈, 그 자의 말에 따르면 맹영지 아가씨의 병은 이미 4~5년 전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완전히 회
소한은 코웃음을 치며 말없이 등을 돌렸다.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소하의 조용한 목소리가 방안의 침묵을 깨뜨렸다.“이번에는 정말 잘했어.”영의정 저택에서 벌어진 일은 소한이 형벌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소하의 귀에 들어갔다. 만약 소한이 과감하게 영의정 저택에 침입하지 않았다면 김단은 쉽게 그곳을 빠져나오지 못했을 것이다.비록 민씨 사람들이 직접적으로 김단을 해치지 못한다고 해도 그녀가 겪었을 모욕과 고통은 상상하기 어려웠다.소하의 갑작스러운 칭찬에 소한은 많이 당황한 듯했다.“제가 충동적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때로는 그 충동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지.”소한은 아무 말 없이 그저 김단의 얼굴을 떠올렸다. 처음에 그녀도 자신을 발견하고 놀란 듯했지만 곧 냉랭한 표정으로 일관하였다. 김단은 마차에 오를 때까지 자신에게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다.과거의 그녀였다면 그가 나타나자마자 바로 그의 품에 안기며 그를 향해 미소 지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너무나도 차갑게 변해버렸다. 자신을 외면하는 그녀가 소한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그는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큰 실수를 저질렀는지를 다시금 깨달았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꽉 쥐며 굳게 결심했다.그는 잃어버린 것을 되찾기 위해 이미 어떤 대가든 치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반 시진 후, 김단은 방 안에서 멍하니 앉아 있었다.그러자 숙희가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아가씨?”김단은 정신을 차리고 숙희를 바라보았다.“무슨 일이냐?”“두 도련님께서는 모두 돌아가셨습니다.”김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방금 전 발생한 일을 되새겨 보았다. 그녀는 소한이 오랫동안 계획해 온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자신을 선택했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과거에도 그는 소가를 위해, 전하를 위해 심지어 임원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그러나 그녀만은 제외였다.그녀는 소한이 자신의 어머니를 걱정하는 척하며 평양관저로 따라온 것도 단지 자신의 동정심을 얻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상처
김단은 아무 말 없이 소한을 부축하며 걸었다. 궐에서 나오는 길은 유난히 길고 고요했다. 그들의 발걸음은 무겁고 느렸으며 말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다.궐문에 도착했을 때 소한의 마차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는 아마도 말을 타고 왔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의 상태로 다시 말을 타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된 김단은 곁에 있던 경씨에게 부탁했다.“도령님, 장군님을 먼저 집으로 모셔다 주실 수 있겠습니까?”그러자 소한이 놀란 듯 김단을 바라보며 물었다.“내게 약을 발라주지 않겠다는 것이오?”김단도 당황해하며 되물어 보았다.“소가에는 의원이 없습니까?”소한은 김단의 물음에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의 의도가 너무 노골적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어머니께서 내가 또 다쳤다는 걸 아시면 얼마나 걱정하겠소? 그러니 그냥 근처에서 치료받을 것이오. 낭자는 신경 쓰지 말고 먼저 돌아가시오.”김단은 그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그렇다면, 먼저 평양관저로 함께 가서 약을 바르시죠.”소한은 그녀의 제안에 놀란 기색을 내비쳤다.“불편하지 않겠소?”김단은 그를 바라보며 단호히 말했다.“괜찮습니다.”그렇게 소한은 김단과 함께 평양관저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들을 맞이한 것은 김단의 몸종 숙희였다.소한을 발견한 그녀는 깜짝 놀라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그러자 김단이 숙희를 달래는 듯한 목소리로 차분히 말했다.“숙희야, 장군님을 객실로 안내해 주거라. 나는 약을 준비하러 가야겠구나.”그녀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김단의 지시를 따랐다.객실에 혼자 남은 소한은 조심스럽게 상의를 벗고 등을 드러냈다. 그의 등에는 형벌로 인한 상처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그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등을 바라보며 오늘의 형벌이 생각보다 가볍지 않았음을 깨달았다.하지만 그는 김단이 이 상처를 보면 마음 아파할 것이라 생각하며 기대감으로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잠시 후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약을 들고
긴장감이 맴도는 분위기 속에서 전하는 이해 안 되는 듯한 어투로 물었다,“조선의 장군인 네가, 수많은 전공을 세운 네가, 원하는 여인 하나 얻는 것이 그리 어렵단 말이냐? 어찌 김단 하나 때문에 수년간 공들여 쌓아온 모든 것을 무너뜨리려 하는 것이야? 그 낭자가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느냐?”전하의 말투는 엄중했지만 그 속에는 실망과 안타까움이 섞여 있었다.그러자 소한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그렇습니다.”전하는 눈썹을 찌푸리며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김 의원, 들었소?”그 순간 소한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조용히 서있는 김단이 있었다. 그녀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담담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소한은 그녀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가 이 모든 대화를 들었다는 사실에 당황했지만 그녀의 표정에서는 어떠한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소한은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물었다.“김단, 왜 이곳에 있는 것이오?”그녀는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와 무릎을 꿇고 전하에게 예를 올렸다.“소녀 김단, 전하를 뵙습니다.”전하는 손짓으로 그녀를 일으키며 말했다.“일어나거라. 오늘 발생한 일에 대해 자세히 말해 보거라.”김단은 소한을 보지 않기 위해 시선을 정면에 고정한 채 차분하게 사건의 전말을 설명했다. “제가 직접 목격한 바는 없습니다. 하지만 민대부를 제외하고는 영의정 댁 장남의 부인에게 감히 손을 댈 수 있는 자는 없을 것입니다.”전하는 그녀의 말을 듣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맹 낭자의 상처를 확인하기 위해 두 명의 궁녀를 보내겠다. 평양관저에서 확인해 보도록 하거라.”학대의 이유가 무엇이든 맹영지는 필시 중전의 친척이었다. 만약 폭력을 가한 사람이 민대부라고 할지라도 이는 중전의 가문을 모욕하는 행위와 다름없었기에 결코 그를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전하는 소한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어쩌면 네 죄가 묻힐 수도 있겠구나.”민씨 가문의 잘못이 드러나게 된다면
소한은 곧바로 병사들과 함께 어서재에서 물러났다.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때는 이미 향 한 자루가 탈 정도의 시간이 흘러 있었다.소한이 걸어 들어오는 것을 본 전하는 하던 일을 멈추고 냉랭하게 물었다.“영의정이 너를 더 때리라고 명하지 않았느냐?”소한은 조용히 전하 앞으로 걸어가 무릎을 꿇고 허리를 곧게 세운 채 대답했다.“전하의 깊은 뜻을 아는 자입니다. 그러니 더 심한 처벌을 요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전하는 코웃음을 치며 다시 물었다.“그렇다면, 내 뜻이 무엇이더냐?”소한은 고개를 들어 전하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전하께서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대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을 겁니다. 그래서 영의정을 불러 제가 벌을 받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게 하셨죠. 그리고 동시에 제가 전하의 사람이라는 것을 명확히 하셨습니다. 전하께서는 영의정이 이 사실을 눈치채기 바라신 것 아니었습니까?”전하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손에 들고 있던 붓을 책상에 내던지며 소리쳤다.“이 불경한 자식아! 내 너를 아낀다고 해서 이렇게 제멋대로 행동해도 된다고 생각하느냐? 영의정 저택 외에 또 어디에 첩자를 심어두었느냐?”소한은 눈을 내리깔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3품 이상의 모든 관료의 집에 첩자를 두었습니다.”그 말을 들은 전하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소한을 가리켰지만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였다.그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짓더니 한참 동안 방안을 서성이었다.잠시 후 그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다시 한번 소리쳤다.“네가 감히! 그렇게 많은 곳에 첩자를 심어두고 무슨 일을 꾸미려는 것이냐? 이렇게 행동하면 내가 소씨 집안을 멸문시켜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소한은 여전히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조용히 말했다.“저도 위험한 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다섯 해 전, 저희 소가는 거의 멸문 당할 뻔했습니다.”그 해 소하가 지닌 병권은 다른 집안의 탐욕스러운 먹잇감이 되었고 그로 인해 조정의 문
김단은 그제야 잊고 있었던 민태훈을 떠올렸다.그녀는 맹영지를 몸종에게 맡기고 민태훈 곁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허벅지에 박힌 은침을 뽑아냈다.침이 빠져나가자마자 민태훈은 마치 고통에서 해방되기라도 한 듯 온몸의 긴장이 풀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한 가닥의 은침이 이토록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큰 마님은 김단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그녀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고 말이다.그때 경씨가 마차를 몰고 도착했다. 김단과 몸종이 맹영지를 부축하며 걸어 나오자 경씨는 놀란 얼굴로 다가와 안부를 물었다.“낭자, 괜찮소?”방금 전 김단이 영의정 저택에서 곤란한 상황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소한은 급히 그녀가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덕분에 한발 늦게 도착한 경씨는 자신이 더 일찍 김단을 챙기지 못한 것을 자책하며 말했다.“내가 미처 신경 쓰지 못했소.“김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럽게 대답했다.“저는 괜찮습니다. 먼저 맹 아가씨를 평양관저로 모시고 가야 할 것 같습니다.“그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김단과 몸종이 맹영지를 부축하며 마차에 오르자 경씨는 바로 마차를 출발 시켰다.김단은 마차에 오르기 전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조용히 서 있는 소한에게로 향했다. 소한은 그녀를 바라보며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김단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려버렸다. 소한은 그런 김단의 뒷모습을 씁쓸하게 바라보더니 옅은 미소를 지었다.그 후 소한은 곧장 궁으로 향했다.어서재에 도착한 그는 곧바로 무릎을 꿇고 앉아 오늘 영의정 저택에서 있었던 일을 전하에게 보고했다.그의 말을 들은 전하는 노여움을 감추지 못하며 소한을 꾸짖었다.“네가 감히 허락도 없이 영의정 저택을 침입했단 말이냐? 정말 대담하구나! 내가 너를 벌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느냐?”그러나 소한은 그저 묵묵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벌을 달게 받겠습니다.“전하는 그의 담담한 태도에 더 분노하며 외쳤다.“민가
김단은 민씨 부인의 말에 담긴 의미를 정확히 파악했다.보내서는 안 된다라...오늘 이 자리에서 맹영지뿐만 아니라 김단 자신도 민가를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김단은 민씨 부인이 자신의 아들을 위해 이런 결정을 내릴 줄 몰랐다.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어떤 선택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김단의 눈빛이 서서히 날카롭게 변해갔다. 그녀의 내면에서는 분노와 실망이 교차했다.큰 마님은 민씨 부인의 표정을 보고 심각한 상황임을 직감했다.맹영지의 몸에는 증거가 남아있었고 그 사실이 세간에 알려지게 된다면 엄청난 파장을 불러올 것이다.하지만 지금 김단을 보내지 않는다면 그녀는 분명 궐로 들어가 이 일을 고발할 게 뻔했다.지금 김단을 적으로 돌린다면 그에 따른 후과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큰 마님은 사랑하는 손자를 바라보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김단을 보내면 민태훈의 입지가 위험해질 것이고 보내지 않는다면 민가 전체가 위태로워질 수 있었다. 그러기에 그녀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그때, 한 하인이 급히 달려와 외쳤다.“큰 마님! 소 장군님께서 오셨습니다!”소 장군? 소한을 말하는 것인가?그의 이름이 언급되자 큰 마님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소한이 이렇게 빨리 이곳에 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김단도 그가 왜 이곳에 나타났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녀가 생각에 잠긴 사이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큰 마님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뵙게 되어 송구합니다.”모두들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보이는 것은 당당하게 정원으로 걸어 들어오는 소한의 모습이었다.“소한, 주인의 허락도 없이 들어오다니! 대체 영의정 저택을 무엇으로 보시는 것이오? 이곳은 마음대로 들락날락할 수 있는 곳이 아니오.”소한은 그 말을 한 사람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이런 무례를 범한 것은 제 잘못입니다. 곧 전하 앞에서 사죄드리지요.”그는 정원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더니 큰 마님에게 다가가 정중히 인사했다.
머뭇거리는 그들의 모습에 김단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마님, 만약 지금 이 자리에서 저를 막으신다면 저는 곧장 궐로 가 이 모든 일을 고할 것입니다.”그녀의 말은 칼날처럼 날카로웠고 그 안에는 확고한 결의가 담겨 있었다.김단의 말이 끝나자 민가의 사람들은 긴장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큰 마님은 눈썹을 찌푸리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그녀는 김단이 단순한 의원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김단은 진산군 댁의 적녀이자 평양원군의 의남매이다. 그리고 그녀는 소가의 두 형제와도 깊은 인연이 있었다. 지금 그녀를 적대시하는 것은 곧 여러 권세 있는 가문을 적으로 만드는 것과 다름없었다.큰 마님은 민태훈을 바라보았다. 그는 고통에 찬 얼굴로 땀을 흘리며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그녀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다.그러나 동시에 마음속에는 김단에 대한 의심도 피어올랐다. 만약 그녀의 말이 과장된 것이라면 민씨 가문은 부당한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한참을 고민하던 큰 마님은 굳게 결심한 듯 민씨 부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네가 직접 확인해 보거라. 만약 낭자의 말이 거짓이라면 반드시 그에 따른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민씨 부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김단과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김단은 조심스럽게 맹영지의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녀의 팔 안쪽에는 선명한 멍 자국이 여러 개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민씨 부인은 숨을 들이켰다.“이런 상처가… 정말로…”그녀가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자 김단은 차분하게 말했다.“다리 쪽은 더 심각합니다. 보시겠습니까?”민씨 부인은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이 상처, 정말로 태훈이의 짓입니까?”김단은 잠시 침묵하더니 그녀의 말에 대답해 주었다.“제가 직접 본 것은 아닙니다.”그 말에 민씨 부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우리 태훈이는 절대 그럴 애가 아닙니다. 어릴 적부터 착하고 작은 생명도 소중히 여기던 사람이었단 말입니다.”김단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지만 겉으로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공주의 이름이 거론되자 민씨 일가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스쳤다. 그러나 큰 마님은 여전히 태연한 표정을 유지한 채 입을 열었다.“낭자가 공주의 명을 받고 우리 영의정 저택에 들어와 병자를 돌보는 것은 알겠소. 허나 공주의 허락 없이 사람을 해치는 것은 무엄한 일이오. 공주라 할지라도 국법을 지켜야 하지 않겠소? 그러니 함부로 공주의 이름을 빌어 협박하지 마시오.”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김단은 박수를 치며 말했다.“참으로 옳은 말씀이십니다.”민가의 큰 마님은 김단이 드디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자신을 치켜세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김단의 입가에는 더욱 짙은 미소가 떠올랐고 눈빛에는 경멸이 스쳤다.“공주님께서도 국법을 지키셔야 하는데 민가의 사람들은 더욱 그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민가의 사람들은 일제히 소리를 높이며 반박했다.“그게 무슨 뜻이오? 우리 민씨 일가는 예로부터 법을 준수하며 국법에 어긋나는 일을 한 적이 없소!”“김 의원께서 자신의 잘못을 덮기 위해 우리 민가에 누명을 씌우려는 것 아니오?” 김단은 그저 조용히 서서 그들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두려운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김단의 이런 차분한 태도가 큰 마님의 신경을 건드렸다.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김단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큰 며늘 아씨는 중전마마의 친조카이시며 공주자가의 사촌이십니다. 그래서 제가 그분의 치료를 맡게 되었지요. 원래는 상태가 호전되고 있었으나 오늘 갑자기 증상이 악화되었습니다. 이는 분명 누군가가 큰 며늘 아씨의 회복을 방해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의원으로서 제 환자가 이곳에서 고통받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으니 제가 데려가야겠습니다. 만약 제 앞을 가로막으신다면 다음번에는 민대부님의 다리에 은침을 꽂아 버릴 것입니다.”이에 큰 마님은 지팡이를 바닥에 세게 내리치며 외쳤다.“허튼소리 마시오! 낭자의 의술이 부족해서 생긴 일을 왜 우리한테 덮어씌우려는 것이오?”“맞소! 무슨 명의의 제자라더니... 다 헛소리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