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지금의 미소는 억지웃음에 가까웠다.김단을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안 소한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원이가 실종되었소.”“뭐라고요?!”김단은 깜짝 놀랐고, 순간 강한 불안감이 엄습했다. “정원 낭자가 실종되었다고요? 언제 일어난 일입니까?”“30분 전이오.”“그럼 왜 정원 낭자를 찾으러 가지 않고 여기 계시는 겁니까!” 김단은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만약 낭자가 산적들의 손에 들어간 거면 어떡합니까!”그 말을 들은 소한의 얼굴이 완전히 굳어졌다.그는 그녀를 바라보며 흔들린 마음을 숨긴 채 말했다. “낭자는 산적들의 소행이란 걸 어찌 안 것이오?”“도련님이 전에 말하지 않으셨습니까? 당우리의 산적들이 한양에 출몰했다고.” 김단은 심호흡을 한 뒤 말을 이었다. “지금은 제가 어찌 알고 있는지 따질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만약 정원 낭자가 정말로 산적들에게 잡힌 것이라면 정말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빨리 낭자를 찾으러 가시지요!”소한의 마음이 흔들렸다.소정원은 그의 친여동생이었으니, 그가 그녀를 걱정하지 않을 리 없었다.그 산적들은 과거 돈을 빼앗기 위해 마을 사람들을 몰살하고 심지어 갓난아이까지 죽였었다. 그런 자들이 그에게 앙금을 품은 지금, 소정원에게 무슨 짓을 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이에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하지만 낭자가...”“저는 제 스스로 지킬 수 있습니다.” 김단은 소한의 말을 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산적을 죽인 적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지요. 게다가 도련님께서 저렇게 많은 사람들을 두어 저를 보호하고 계시니 저는 괜찮을 겁니다.”그 말을 들은 소한은 끝내 결심을 굳혔다.그는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내 김단에게 건넸다. “낭자의 비녀보다 쓸모 있을 것이오.”김단은 순간 멈칫하며 소한을 바라보았고, 이내 단검을 받아 들었다.그녀가 단검을 받는 순간 소한은 몸을 돌려 떠났다.그녀가 애써 가져온 꿀물은 결국 한 모금도 마시지 못했다.드넓은 서재에 김단 홀로
초아가 돌아왔을 때 혜인은 문 밖에 서 있었다.김단의 방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초아는 이를 의아하게 생각했다. “부인께서는?”혜인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부인께서 조금 피곤하다고 하시며 일찍 잠에 드셨어.”그 말을 들은 초아는 방문을 바라보며 더욱 의아하게 여겼다. “부인께서 몸이 불편하신 건 아닐까? 의원을 불러서 진찰을 받아 보시게 하는 게 어때?”혜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어젯밤 잠을 잘 못 주무셨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말고 부인께서 푹 주무시게 두자.”혜인의 모습을 본 초아는 의심스러웠다. 그녀는 혜인의 표정이 매우 부자연스럽다는 것을 눈치챘다.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듯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부인께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야?”혜인은 초아가 바로 알아차릴 줄은 몰랐기에 순간적으로 동공이 흔들렸다. “아, 아무 일도 없어. 걱정하지 마!”하지만 초아는 그녀의 말을 믿지 않고 들고 있던 꿀물을 혜인의 손에 쥐여준 뒤 몸을 돌려 문을 두드렸다. “부인, 들어가도 될까요?”말이 끝나고도 아무런 대답이 없자 초아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김단은 방 안 어디에도 없었다.“너 미쳤어?!”초아는 곧장 고개를 돌려 방 안으로 들어온 혜인에게 큰 소리로 호통쳤다. “부인은 어디 계시는 거야?”혜인은 급히 방문을 닫고 꿀물을 한쪽에 내려놓고 초아에게 말했다. “부인께서는 내 모습으로 변장하고 떠나셨어.”“너!”초아는 화가 나서 당장 그녀를 쫓아가려고 했지만 이를 혜인이 막아섰다. “가지 마! 어차피 이젠 쫓아갈 수 없어!”초아는 혜인의 얼굴을 가리키며 꾸짖었다. “장군님께서 아시면 네 머리 몇 개를 베어도 화를 풀지 못 하실 거야!”“그러니 네가 나를 도와줘야 해!” 혜인은 그 말과 함께 품 안에서 단검을 꺼냈다.방금 전 소한이 김단에게 준 바로 그 단검이었다!초아는 눈을 크게 떴다. “너, 너 지금 뭘 하려는 거야?”“나를 찔러. 그러고 부인께서 나를 찌르고 내 모습으로 변장한
소정원은 겁에 질려 붉어진 눈을 하고 소하를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릴 뻔했으나, 소한과 임학을 보곤 눈물이 들어갔다.오히려 그녀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왜 모두 오신겁니까? 김단 낭자는요? 산적들의 목표는 김단 낭자이지 않습니까!”상대는 단 두 명이었다. 그들은 그녀를 이곳으로 데려온 후 김단을 찾으러 서둘러 떠났었다!그녀는 그저 미끼였을 뿐이다. 소한을 한양 외각 별장에서 밖으로 유인해 내기 위한 미끼!그가 자리를 비우도록 유인한 것이다!소한은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가슴속에서 느껴지는 공포가 그를 완전히 장악했다.그들의 전략에 정신이 혼미해진 것 같았다.그는 소정원이 산적들에게 잡혀 끔찍한 일을 당할까 걱정되어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왔다!소하도 매우 놀랐지만, 마음속으로 한 줄기 희망을 품었다.손헌에게서 빌려온 사람들도 군대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인 사람들이었다. 그의 사람들이 함께 소한의 별장 밖을 지키고 있었다.만약 산적들이 정말로 소한의 별장으로 쳐들어간다면 그 자들이 시간을 벌어줄 수 있을 것이다.적어도 그들이 구하러 갈 때까지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다!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몸을 돌려 빠른 걸음으로 현장을 떠나며 옆에 있던 사람들에게 외쳤다. “아씨를 집으로 모셔라!”임학은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듯 황급히 그를 뒤따라갔다.세 사람은 말을 타고 소한의 한양 외각 별장으로 다급히 달려갔다.하지만 그들이 대문에 들어섰을 땐 어깨에 상처를 입은 혜인과 마주했다.소한이 갑자기 돌아온 것을 본 혜인은 깜짝 놀라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초아도 따라 무릎을 꿇고 매우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장, 장군님...”소한의 얼굴은 순식간에 험악해졌다.혜인의 상처를 본 그의 마음은 완전한 절망으로 바뀌었다.그는 분노를 억누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 있느냐?”혜인은 계속해 입을 다물고 있다가 이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부, 부인께서 소인을 찌르고 하고 소인의 모습으로 변장한 채 도망치셨습니다.”초아
이 무렵 장양강 강가에 있던 김단은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얼굴에 턱수염이 가득한 남자가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그녀는 깜짝 놀라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 쳤으나, 뒤에 아무것도 없었기에 자칫 넘어질 뻔했다. 그때 턱수염의 남자가 그녀를 잡아주어 몸을 바로 세울 수 있었다.그녀는 자신의 뒤로 끝없이 넓은 강만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이곳은 장양강이 아닌가?김단이 채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다른 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함부로 움직이지 마시오. 장양강은 매우 깊어 한번 빠지면 다시 올라오기 힘들 것이니!”김단은 말하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17, 18살 밖에 안 되어 보이는 소년이었다.그는 손에 든 장검을 닦고 있었다.김단은 그제야 기억이 났다.그녀는 하녀로 변장하여 저택 안팎의 호위병들을 속이고 탈출에 성공했다.하지만 한양으로 돌아가는 좁은 길에서 이 두 사람을 만났다.턱수염의 남자가 먼저 그녀를 알아보았다.김단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당신들이 당우리의 산적이오?”그들이 정암을 죽인 것이다!소년은 그녀를 흘끗 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턱수염의 남자는 냉소했다. “맞소, 바로 이 몸이오. 자네 서방에게 복수하러 왔소!”그들은 소한을 김단의 배우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그들의 말을 들은 김단은 어이가 없었다.온 마을 사람들을 몰살하고 갓난아이까지 죽인 자들이 복수를 운운하다니?피로 물든 악마 놈들은 지옥에 떨어져야 마땅하다!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금 당장은 이 두 사람을 화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그녀는 눈을 돌려 사방을 둘러보았다.옆에 있던 소년이 말했다. “둘러볼 필요 없소. 우리밖에 없으니.”산채가 파괴된 뒤 도망친 산적들은 많았지만, 복수를 하러 온 사람은 그 자들뿐이었다.왜냐하면 그때의 산적 두목이 바로 이 소년의 친아버지이자 턱수염 남자의 친형이었기 때문이다!그들은 소한의 목숨을 빼앗으러 온 것이다!턱수염의 남자도 입을 열었다.
“진정하거라!” 가장 먼저 말에서 내린 소하가 산적들을 향해 소리쳤다.선명한 핏기가 김단의 목에 서린 것을 본 소하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그의 뒤로 소한과 임학이 말에서 뛰어내렸다.소한의 얼굴은 어두워졌고 단단하게 쥔 주먹에는 점점 힘이 실렸다.어째서 그때 저 산적들을 모두 해치우지 못했을까.만약 그때 상황을 해결했더라면 김단이 다치는 일은 면할 수 있었을 텐데.더구나 어찌하여 자신이 이런 함정에 빠지게 된 것일까.임학은 붙잡혀 있는 김단을 초조하게 바라보며 다급하게 외쳤다.“원하는 게 무엇이든 다 들어줄 터이니 내 누이를 풀어주거라!”김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설마 임학까지 왔을 줄이야.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그녀는 임학을 보고 싶지 않았다.더구나 그의 입에서 나온 ‘누이’라는 말조차 듣기 싫었다.도대체 언제부터였을까?그토록 의지했던 오라버니에 대한 감정이 미움으로 변해버린 것이그녀가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덥수룩한 수염을 가진 산적 두목이 소리쳤다.“풀어주길 원해? 간단하지! 소한의 목을 가져와!”이 말을 들은 소하와 임학은 깜짝 놀랐다.그러나 눈 깜빡할 사이에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소한이 허리에 찬 장검을 뽑아 들고, 주저 없이 그 검을 자신의 목에 대었다.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소하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그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소한을 향해 작은 돌멩이를 튕겼고 그것이 소한의 손목을 강하게 가격했다.극심한 통증 속, 칼이 소한의 손에서 떨어졌다.하지만 그의 목에는 이미 피가 흐르고 있었다.“미쳤어?”소하는 경악하며 소한을 향해 소리쳤다.조금이라도 늦었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옆에 있던 임학 역시 큰 충격을 받았다.설마 소한이 고민조차 없이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려 했을 줄이야.놀란건 김단 쪽도 마찬가지였다.그 짧은 순간, 소한이 자기 목숨을 끝내려 했다는 사실이 그녀를 얼어붙게 만들었다.그는 산적들과 협상을 하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너무나도 단호하
“단아!”“단아!”“안돼!”세 명의 외침 소리가 동시에 울려 퍼졌다.소하와 임학은 장검을 뽑아 들고는 순식간에 산적과 소년의 목을 베어버렸다.한편 소한은 망설임 없이 장양강으로 몸을 던졌다.이를 본 소하와 임학은 재빠르게 달려가 그를 강가로 끌어올렸다.“이거 놓으시오!”소한은 낮은 목소리로 외치며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그는 잔잔하게 흘러가는 강물만을 응시하며 김단의 모습을 찾으려고 애썼다.곁에서 소한의 몸을 붙잡고 있는 두 사람에 의해 강물 속으로 뛰어들려던 그의 시도는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소한은 계속해서 자신을 뒤로 당기고 있는 손들을 뿌리쳐야만 했다.김단은 아직도 강 속에 있는데. 그녀를 구해야만 하는데“짝!”날카롭고도 선명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단단한 손길이 소한의 뺨을 세차게 내리쳤다.소하는 소한의 옷깃을 단단히 움켜쥔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김단은 수영할 줄 아니까 괜찮을 거야! 네가 할 일은 무작정 강가로 뛰어드는 게 아니라 하류로 가서 김단을 찾는 거야!”만약 소한까지 뛰어든다면 그들은 둘 중 한 명을 선택해야 할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임학도 곧장 말을 이었다.“맞소! 강물이 이렇게 고요하잖소. 전혀 위험해 보이지 않으니 김단은 분명 무사할 거요!”김단은 원래부터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녀는 분명 아무 문제 없을 것이다.소한은 그제야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그래, 김단은 수영을 할 줄 아니까 괜찮을 거야.그러니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류로 가서 김단을 맞이하는 거겠지.생각을 정리한 소한은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하지만 빠르게 사라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는 소하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그는 천천히 몸을 돌려 잔잔한 강물을 바라보았다.방금 전까지만 해도 확신에 차 있었는데 지금은 모르겠다. 그냥 불안하기만 했다.그는 그녀가 떨어지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강물이 그녀를 삼키는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김단은 정말 괜찮은 것일까?세 사람은
그는 더 이상 생각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그저 억지로 마음을 다잡으며 불안한 생각들을 억눌렀다.소한은 이미 쓰러지기 직전이라 그마저 무너지면 안 될 것 같았다.그는 숨을 깊게 들이마신 후 고개를 끄덕였다.“무사할 거요.”대답을 듣고 나서야 임학은 겨우 기운을 되찾은 듯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섰다.그래, 무사할 거야.잠시 쉬고 다시 김단을 찾으러 오면 돼.임학은 말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김단이 강물에 떨어지던 장면을 떠올렸다.너무 멀었다.그녀와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그녀의 얼굴조차 똑똑히 볼 수 없었다.그런데 어쩌다 둘 사이는 이렇게까지 멀어져 버린 걸까?혹시 그가 조금씩 그녀를 밀어내고 있었던 걸까?“도련님.”갑자기 들려온 부드러운 목소리에 임학은 정신을 차렸다.순간적으로 멈춰 서서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새 자신의 집 앞에 도착해 있었다“도련님!”다시 한번 들려온 부름에 그는 고개를 돌렸다. 멀지 않은 곳에 한 여인이 서 있었다.그는 그녀를 알지 못했으나 그녀는 임학을 알고 있는 듯했다.그가 시선을 마주하자 여인은 그에게 가볍게 달려왔다.“도련님께 문안 올립니다. 소녀를 류 나인으로 불러주시면 됩니다. 큰 아가씨께서 궐에 계실 때… 친구였습니다.”‘친구’라는 단어를 말할 때 류 나인은 약간 머뭇거렸다.사실 그녀와 김단은 세답방에 있을 때 거의 말을 나눈 적이 없었다.나중에 그녀가 김단에게 몰래 소식을 전해준 것은 단지 김단이 자신을 그 암흑 같은 곳에서 구해주었기 때문이었다.만약 김단이 덕빈에게 청을 넣지 않았다면 그녀는 이미 그곳에서 죽었을 것이다.생각을 마친 류 나인은 손에 들고 있던 작은 보따리를 임학에게 내밀었다.“소녀는 덕빈마님의 자비로 궐에서 나와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원래 아가씨께 작별 인사를 드리려 했으나 이미 며칠 전에 실종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사실 그녀도 세간의 소문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김단이 소 장군에게 붙잡혀 갔다는 사실을 말이다.하지만 소 장군 같은 사람한
임학의 몸이 휘청거렸다.마치 삼 년 전 김단이 세답방으로 끌려가며 울부짖던 모습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했다.그녀는 절대 굴복하지 않았다.그곳에 남기를 원하지 않았다.그래서 세답방의 나인들은 그녀를 채찍으로 수없이 내리쳤다.그리고 그녀는 비바람이 들이치는 허름한 방 안에서 몸에 걸친 너덜너덜한 옷을 찢어냈다.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손가락에 적셔 한 글자 한 글자 써 내려갔다.“오라버니, 구해주세요.”가슴이 너무도 아파 숨을 쉬는 것조차 고통스러웠다.임학은 떨리는 손으로 그 조각난 천들을 하나하나 뒤집었다.거의 모든 천 조각에 피로 쓰인 글자들이 새겨져 있었다.“오라버니, 구해주세요.”“오라버니, 데리러 와 주세요.”“오라버니, 제발 저 좀 살려주세요.”삼 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 피 묻은 천 조각들은 그녀가 보낸 수많은 구조 요청이었다.그녀가 의지할 사람은 오직 그뿐이었다.그렇다면 그는?그녀가 차가운 나무 바닥 위에서 피로 글씨를 새기며 도움을 요청할 때 그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그는 전하에게 청원하기 위해 궐로 향하려 했지만 아버지가 그를 막으며 대국를 생각하라고 했다.대국이란 무엇인가?진산군 관저의 명예와 임씨 가문의 번영.하지만 그 속에 그녀의 목숨은 없었다.그녀는 그가 어릴 적부터 애지중지 아끼던 여동생이었다.그런데 그는 직접 그녀를 지옥 속으로 던져 넣었다.그녀가 학대 당하고 고통받도록 내버려두었다.그녀가 구해달라고 절박하게 외치고 있을 때, 그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술잔을 기울이며 웃고 있었는가?혹은 임원을 달래며 다정한 말을 건네고 있었는가?그녀가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애타게 그를 부를 때, 그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그는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인가!떨리는 손으로 마지막 남은 천 조각을 집어 들었다.그 순간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임학은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그는 넋이 나간 채로 천 조각을 바라보았다.눈물이 한 방울,또 한 방울,그의 손에 쥔
머뭇거리는 그들의 모습에 김단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마님, 만약 지금 이 자리에서 저를 막으신다면 저는 곧장 궐로 가 이 모든 일을 고할 것입니다.”그녀의 말은 칼날처럼 날카로웠고 그 안에는 확고한 결의가 담겨 있었다.김단의 말이 끝나자 민가의 사람들은 긴장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큰 마님은 눈썹을 찌푸리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그녀는 김단이 단순한 의원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김단은 진산군 댁의 적녀이자 평양원군의 의남매이다. 그리고 그녀는 소가의 두 형제와도 깊은 인연이 있었다. 지금 그녀를 적대시하는 것은 곧 여러 권세 있는 가문을 적으로 만드는 것과 다름없었다.큰 마님은 민태훈을 바라보았다. 그는 고통에 찬 얼굴로 땀을 흘리며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그녀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다.그러나 동시에 마음속에는 김단에 대한 의심도 피어올랐다. 만약 그녀의 말이 과장된 것이라면 민씨 가문은 부당한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한참을 고민하던 큰 마님은 굳게 결심한 듯 민씨 부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네가 직접 확인해 보거라. 만약 낭자의 말이 거짓이라면 반드시 그에 따른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민씨 부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김단과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김단은 조심스럽게 맹영지의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녀의 팔 안쪽에는 선명한 멍 자국이 여러 개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민씨 부인은 숨을 들이켰다.“이런 상처가… 정말로…”그녀가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자 김단은 차분하게 말했다.“다리 쪽은 더 심각합니다. 보시겠습니까?”민씨 부인은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이 상처, 정말로 태훈이의 짓입니까?”김단은 잠시 침묵하더니 그녀의 말에 대답해 주었다.“제가 직접 본 것은 아닙니다.”그 말에 민씨 부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우리 태훈이는 절대 그럴 애가 아닙니다. 어릴 적부터 착하고 작은 생명도 소중히 여기던 사람이었단 말입니다.”김단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지만 겉으로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공주의 이름이 거론되자 민씨 일가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스쳤다. 그러나 큰 마님은 여전히 태연한 표정을 유지한 채 입을 열었다.“낭자가 공주의 명을 받고 우리 영의정 저택에 들어와 병자를 돌보는 것은 알겠소. 허나 공주의 허락 없이 사람을 해치는 것은 무엄한 일이오. 공주라 할지라도 국법을 지켜야 하지 않겠소? 그러니 함부로 공주의 이름을 빌어 협박하지 마시오.”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김단은 박수를 치며 말했다.“참으로 옳은 말씀이십니다.”민가의 큰 마님은 김단이 드디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자신을 치켜세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김단의 입가에는 더욱 짙은 미소가 떠올랐고 눈빛에는 경멸이 스쳤다.“공주님께서도 국법을 지키셔야 하는데 민가의 사람들은 더욱 그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민가의 사람들은 일제히 소리를 높이며 반박했다.“그게 무슨 뜻이오? 우리 민씨 일가는 예로부터 법을 준수하며 국법에 어긋나는 일을 한 적이 없소!”“김 의원께서 자신의 잘못을 덮기 위해 우리 민가에 누명을 씌우려는 것 아니오?” 김단은 그저 조용히 서서 그들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두려운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김단의 이런 차분한 태도가 큰 마님의 신경을 건드렸다.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김단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큰 며늘 아씨는 중전마마의 친조카이시며 공주자가의 사촌이십니다. 그래서 제가 그분의 치료를 맡게 되었지요. 원래는 상태가 호전되고 있었으나 오늘 갑자기 증상이 악화되었습니다. 이는 분명 누군가가 큰 며늘 아씨의 회복을 방해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의원으로서 제 환자가 이곳에서 고통받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으니 제가 데려가야겠습니다. 만약 제 앞을 가로막으신다면 다음번에는 민대부님의 다리에 은침을 꽂아 버릴 것입니다.”이에 큰 마님은 지팡이를 바닥에 세게 내리치며 외쳤다.“허튼소리 마시오! 낭자의 의술이 부족해서 생긴 일을 왜 우리한테 덮어씌우려는 것이오?”“맞소! 무슨 명의의 제자라더니... 다 헛소리구
김단은 며칠 동안 정성을 다해 맹영지의 상태를 호전시켰건만 민태훈의 갑작스러운 악행으로 인해 그간의 수고가 수포로 돌아갈 위기에 처했다.맹영지가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면 해독제를 찾는 일도 어려워질 것이다.김단은 맹영지를 영의정 저택에 더 머물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마음을 다잡고 곁에 있던 몸종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맹가 사람들에게 전하거라. 내가 맹영지를 데려가겠다고 말이다.”몸종은 놀란 눈으로 김단을 바라보았다. 그녀도 지금 맹영지를 민대감한테서 떨어뜨리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으나 김단이 그녀를 데려가겠다는 사실을 민가 사람들이 받아들일 리 없었다.“김 의원님께서 몰래 모셔가시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제가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김단은 냉정하게 대답했다.“네가 도와준다 한들 민가 사람들에게 들키게 된다면 너의 신분으로는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어서 민가 사람들을 불러오거라. 누구든 상관없다. 내가 알아서 판단하고 행동할 것이다.”몸종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예.”얼마 지나지 않아 맹영지의 뜰은 소란스러워졌다. 조정에서 전하와 정무를 논의 중인 영의정 대감을 제외하고 민가의 주요 인물들이 모두 모였다.특히 민태훈은 소식을 듣자마자 가장 먼저 달려와 김단에게 따지려 하였다. 그러나 그가 방에 들어서기도 전에 안에서 날아온 은침이 그의 허벅지를 정확히 찔렀다. 그는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쓰러지며 신음을 토했다.민가의 큰 마님은 몇몇 마님들의 부축을 받으며 도착하였다.맹영지의 뜰에 도착한 그녀가 본 장면은 자신이 가장 아끼는 장손이 땅에 쓰러져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즉시 분노를 터뜨리며 지팡이로 땅을 세차게 내리쳤다.“어디 이런 무례한 의원이 다 있단 말이오? 감히 우리 영의정 저택에서 사람을 해치다니! 이 자를 당장 붙잡거라! 내가 직접 궐에 데려가 이 무엄한 짓이 누구의 명령인지 따져 물을 것이다!”영의정 저택의 병사들은 즉시 명령에 따라 방으로 돌진하려 하였다. 그러나 방 안에서 또
김단은 다시금 영의정 저택을 찾았다. 평소와 다름없이 맹영지를 문병하기 위해서였다. 얼마 전 서원공주한테 호되게 꾸지람을 들은 탓이었을까?김단이 몇 차례 영의정 저택에 들렀음에도 불구하고 민태훈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오늘 김단이 문을 열고 들어가기도 전에 맹영지 방에서 나오는 그를 마주치게 되었다.김단은 무의식중에 얼굴빛이 굳어졌다. 그 바람에 마땅히 올려야 할 예까지 잊고 말았다. 민태훈은 그런 김단의 무례한 태도에 눈살을 찌푸렸다. “김 의원은 공주님을 모시더니 자기 위치를 잊은 것이오? 어찌 본관을 보고도 예를 갖추지 않는단 말이오?”김단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두 손을 모아 공손히 인사했다.“민 대감을 뵙습니다.”민태훈은 코웃음을 치더니 발걸음을 옮겨 그 자리를 떠나버렸다.그가 눈앞에서 사라지자마자 김단은 급히 방 안으로 들어갔다. 가슴속에 품었던 우려가 결국 현실이 되고야 말았다.맹영지는 침대 구석에 웅크린 채 두 팔로 어깨를 감싸안고 몸을 떨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생기를 잃었고 옷은 심하게 구겨져 있었다. 김단은 섣불리 다가갔다가 맹영지를 놀라게 할까 두려워 선뜻 가까이 가지 못했다.그때 맹영지의 몸종 하나가 탕약 한 사발을 들고 조심스레 방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맹영지의 상태를 보고 깜짝 놀란 나머지 손에 든 약그릇을 떨어뜨리고 말았다.그 소리에 맹영지는 격렬하게 반응하며 소리쳤다.“때리지 마세요! 잘못했어요! 제발…”몸종은 그 자리에서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맹영지를 안아주려고 했지만 그녀는 더욱 격렬하게 저항하며 몸종을 때리고 할퀴었다.이 광경을 본 김단은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재빨리 앞으로 달려들어 맹영지한테서 몸종을 떼어내고 그녀의 목덜미를 내리쳐 기절시켜 버렸다.그러자 몸종은 땅바닥에 풀썩 주저앉아 오열하기 시작했다.“모두 다 소인의 불찰입니다. 큰 며늘 아씨께서 과자를 드시고 싶다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부엌으로 가 준비를 하던 참이었는데 그 사이에 대감님께서
김단은 여전히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자신이 직접 겪어보지 않는 이상 모를 것이다.세상 사람들은 남의 고통을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남의 불행 앞에서도 해맑게 웃을 수 있는 것이겠지.그때 소정원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하지만, 그럼에도 도련님을 걱정하고 계신 거 아니었습니까? 그렇지 않았다면 진산군 댁의 의원과 그렇게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눴을 리 없잖아요.”김단은 여전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입술을 꾹 다문 채 묵묵히 그녀의 말을 들어주고 있었다.“뭐 어떻게 되었든, 도련님께서는 낭자를 걱정하고 계십니다. 방금 약을 마시고 잠들었는데 잠결에 부르는 이름도 낭자였거든요. 예전에는 사이좋은 남매였는데... 지금 이렇게 되어버린 건 정말 안타까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도련님에게도 잘못이 있지만 피를 나눈 사이인데 꼭 이렇게 멀어져야만 하나요?” “소정원 낭자.”김단은 결국 참지 못하고 그녀의 말을 끊어버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결 단호하고 날이 서 있었다.생각보다 묵직한 음성에 소정원은 당황한 듯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김단은 길게 한숨을 내쉰 뒤 허리춤에서 작은 손목 염주 하나를 꺼내 들었다.“이것은 소한 장군님의 물건입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그분에게 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이 염주는 그녀가 시간 날 때마다 손수 꿰어 만든 것이었다. 소정원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이게 정말 소한 오라버니의 것이 맞나요? 제 기억으로는 큰 오라버니도 비슷한 염주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아서요.”김단은 작게 눈썹을 찌푸릴 뿐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그러자 소정원이 다시 물었다.“그런데 한이 오라버니 물건을 왜 낭자가 가지고 있는 겁니까?”그 물음에는 짙은 의문과 약간의 의심이 담겨 있었다.김단은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낭자,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시오. 제 실수로 소한 장군님의 염주를 끊어버렸소. 그에 대한 보상으로 손수 꿰어 만든 것일 뿐이오.”소정원은 그제야 고개를 끄
소정원은 순간 당황했다. 김단이 이렇게 나올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진산군 앞에서 친히 임학에게 약을 먹이라니... 자신의 마음을 숨김없이 보여줘라는 뜻 아닌가?그녀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웠으나 무의식적으로 약그릇을 받아들고 있었다.김단은 몸을 돌려 진산군을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진산군께서는 모르시겠지만 도련님을 깨운 건 소정원 낭자입니다.”그 말에 진산군의 얼굴에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그게 정말이냐?”그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연신 임학과 소정원을 번갈아 쳐다보았다.“그럼 너희 둘은...”소정원의 두 뺨은 어느새 붉게 물들었고 임학에게 약을 먹이던 손마저 긴장으로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부자연스러운 그녀의 행동을 바라보는 임학의 눈에는 따스함이 서려있었다. 그가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머금자 소정원의 얼굴은 더욱 빨갛게 달아올랐다.그 장면을 말없이 바라보던 김단과 진산군은 눈치껏 조용히 방을 빠져나왔다.그러나 밖으로 나온 진산군의 얼굴빛은 여전히 밝지 않았다. 보다 못한 김단이 조심스럽게 물었다.“도련님께서는 이제 눈을 뜨셨고 거기에 좋은 인연까지 맺게 되셨으니 기뻐해야 할 일 아닙니까?”현재 진산군의 집안 사정을 헤아려봤을 때 혼인과 같은 경사로 액운을 풀 수만 있다면 더없이 행복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 진산군의 미간에는 여전히 주름이 깊게 잡혀있었다.“소정원 낭자가 싫다는 게 아니다. 다만 너도 알지 않느냐? 우리 집안은 소씨 가문과 이미 두 번이나 혼례를 맺으려다 결국...”그는 임학과 소정원도 안 좋은 결말을 맞이하게 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김단은 잠시 망설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이번은 다릅니다. 그 두 번의 혼사는 모두 거짓이었잖아요.”애초에 김단과 소하의 혼사는 거짓된 약조에 불과했다. 허울뿐인 인연인데 어찌 아름다운 결말이 따를 수 있겠는가?진산군은 김단의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한참 동안 생각을 정리하던 그는 마침내 굳어있던 표정을 풀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 기억은 아마 평생 잊히지 않을 것이다.김단 역시 그 일을 떠올렸다. 그날 임학은 소정원의 치맛자락에 붙은 불을 끄느라 여념이 없어 김단을 챙겨주지 못했었다.김단은 그것도 모르고 등불회장 한가운데서 임학을 찾아 헤맸고 결국 소한이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주었다.그 때문에 김단은 오랫동안 임학에게 서운함을 품고 있었다.왜 말도 없이 사라졌냐고 여러번 따져 물었지만 임학은 그날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어쩌면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감정이 싹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소정원은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그때부터였습니다. 도련님만 떠올리면 괜히 웃음이 나고 그러더군요.”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김단은 임학의 긴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보았다.깜짝 놀란 그녀는 즉시 은침을 꺼내 임학의 두정혈에 찔렀다.은침의 자극이 신경을 자극하자 임학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소정원은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임학 도련님...”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중상을 입고 막 깨어난 임학은 눈꺼풀을 드는 것조차 힘겨워 보였다.그는 가장 먼저 소정원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자신에게 그런 마음을 품고 있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자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그녀의 모습을 보자 임학의 마음도 흔들리기 시작했다.그는 미약하게나마 소정원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그 모습을 본 소정원은 더욱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깨어나셨다니 정말 다행이에요.”임학은 말할 기운이 없어 대답하지 못했지만 시선은 어느샌가 김단에게로 옮겨졌다.그녀는 침대 곁에 앉아 있었기에 소정원보다 훨씬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방금 전 꿈속에서 들었던 그녀의 목소리들이 다시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그는 입술을 간신히 움직여 마른 목구멍에서 겨우 한 마디를 뱉었다.“단아...”“방금 깨어났으니 말을 아끼세요.”그녀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임학을 내려다보며 차분하게 얘기했다.“저는 약을 달이러
그러다 문득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김단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큰 아가씨, 소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소 아가씨? 소정원을 그러는 것일까? 김단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김단은 긴가민가하며 문을 열었고 마당에는 어린 시절 자신의 경쟁자였던 소정원이 서 있었다.두 사람은 그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다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그녀가 이곳을 찾은 이유는 임학 때문일 것이다. 김단은 조심스레 그녀를 방 안으로 들였다.“사실 일찍 오고 싶었는데 오라버니들이 말리셨습니다. 임학 도련님의 상태가 너무 위중해서 제가 와봤자 방해만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오늘에야...”그녀는 말을 흐리며 침대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더니 다시 김단을 바라보며 물었다.“임학 도련님은… 지금은 어떠세요?”김단은 살짝 웃으며 얘기했다.“맥박은 안정되었고 상처도 서서히 아물고 있소. 그런데 이상하게도 계속 깨어나질 않소.”그 말을 들은 소정원의 이마가 즉시 찌푸려졌다. 김단은 그녀가 임학을 아끼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녀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김단은 부드럽게 말했다.“도련님을 좀 봐주시오. 나는 물 한 잔 가져오겠소.”김단이 찻잔을 들고 물을 따르는 순간 소정원의 외침 소리가 방을 가득 채웠다.“김단 낭자! 어서 와서 보세요!”갑작스럽게 들리는 큰 목소리에 김단은 놀라 물을 흘리고 말았다.하지만 김단은 물 따위는 신경 쓸 틈도 없이 황급히 침대 옆으로 뛰어갔다.김단은 임학에게 무슨 큰일이 생긴 줄 알았다.하지만 소정원은 임학의 얼굴을 가리키며 말했다.“이거 보세요. 도련님께서 울고 계십니다.”임학의 눈가에는 투명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김단은 그가 혼수상태에 빠졌기에 자신이 했던 말은 들리지 않을 거라 믿었다.하지만 그의 눈물을 보니 어쩌면 김단이 방금 전에 했던 모든 말들, 즉 그를 향한 분노와 원망, 그리고 그 간절한 바람들이 그의 가슴을 울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소정원은 어리둥절해하며 나
그는 소한의 거침없는 기질이 가끔 부러울 때도 있었다. 사람들 눈치 보지 않고 자기 뜻대로 살아간다면 얼마나 편할까?하지만 사람의 본성은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다.자신이 소한처럼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자신의 방식대로 소한을 강요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서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대로 두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삼일 뒤, 김단은 평소처럼 임학의 상태를 보기 위해 진산군 댁을 찾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스승이 임학의 맥을 짚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그녀는 조용히 걸음을 옮겨 침상 곁으로 다가갔다.“스승님, 어떻습니까?”그는 수염을 쓸어내리며 낮고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독은 이미 다 해독되었고 맥도 안정적이오. 그래서 호흡도 고르고 안색도 며칠 전보다 훨씬 좋아졌소. 그런데 이상하오. 이쯤 되면 일어나야 하는 게 정상인데 말이지...”김단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진맥해보았을 때도 아무 이상이 없었다.깨어나야 할 시점인데 아직도 깊은 잠에 빠져있는 임학을 바라보며 스승은 미간을 찌푸렸다.그 모습을 본 김단은 조심스레 물었다.“스승님께서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신가요?”그는 김단을 한 번 바라보더니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직접 겪은 적은 없지만 예전에 약왕곡 주인께서 비슷한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소.”그의 목소리는 천천히, 그러나 명확하게 이어졌다.“만약 어떤 이가 스스로 죽음을 간절히 바란다면 아무리 육신이 다 나았다 해도 정신은 죽음의 문턱에 머물러 있다고 했소. 우리가 온 힘을 다해 끌어내려 해도 본인이 거부하면 방법이 없다는 뜻이오.”지금 임학이 바로 그런 상태였다.김단은 그 말을 듣고 가슴이 묵직하게 가라앉았다.그녀의 시선은 다시금 임학의 얼굴로 향했다.까무잡잡한 피부와 앙상한 빰이 병사의 길을 걸었던 그의 지난 세월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화려한 옷을 입고 도련님이라는 소리를 듣던 진산군 댁의 장남은 그렇게 모든 것을 버리고 돌아왔다.“낭자, 잠시 이 아이를 봐주시오. 나는 약로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