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가 사람들은 임원의 말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때 마침내 김단이 입을 열었다.“그래. 나도 알고 싶소. 낭자는 임가에 얹혀살아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왜 어머니를 때린 것이오?”질문식으로 물어본 말이지만 김단은 이미 임원의 죄를 단정 지어버렸다.임원은 그 말에 깜짝 놀라며 다급히 외쳤다.“아니오! 난 아니오! 왜 나를 억울하게 몰아가는 것이오?”“억울하다고?”김단은 비웃으며 얘기했다.그녀는 근처에 서 있던 몇 명의 몸종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너희들, 나와서 말해보거라.”김단의 명령이 떨어지자 몸종들은 주춤거리며 앞으로 나섰다.“아가씨는 매일 밤마다 저희를 잠시 밖으로 내보내셨습니다. 어느 날은 너무 궁금해서 몰래 문밖에 남아 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마님의 울음소리가 들렸어요. 문틈으로 살짝 들여다보니 아가씨께서 부인의 목을 조르고 계셨습니다.”“거짓말!”임원은 눈을 부릅뜨며 절규했다.그녀는 사람들을 모두 내보낸 후에야 임씨 부인에게 손을 댔기에 그걸 증언해 줄 사람이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그때 또 다른 몸종이 다급히 나섰다.“저도 봤습니다! 그리고 아가씨께서는 저희에게 마님을 차가운 물로 목욕시키라고 명령하셨어요. 마님은 차가운 물을 싫어하시는데도 억지로 욕조에 눌러 넣고 나오지 못하게 했습니다.”임원은 서둘러 변명했다.그녀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눈동자는 심하게 흔들렸다.“그건 어머니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였어요! 오라버니, 제가 말했잖아요! 어머니를 치료하기 위해 그런 거라고!”그러자 한 몸종이 무심코 중얼거렸다.“아가씨가 무슨 의원도 아니면서…”그 말은 날카로운 비수처럼 진산군의 가슴에 꽂혔다.그는 임씨 부인을 부둥켜안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의원의 의술이 그렇게 뛰어난데도 냉수욕으로 경혈을 자극해 병을 치료한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다. 도대체 어디서 그런 얘기를 들은 거냐?”임원은 순간적으로 머리를 굴리며 재빨리 대답했다.“제가 한양으로 돌아오는 길에 명의 한 분을 만났습니다
“헛소리하지 마세요!”옆에 있던 몸종이 그녀의 변명 따위는 들어주지 못하겠다는 듯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그녀의 얼굴에는 억울함과 분노가 섞여있었다.“저희에게 먼저 막말을 한 건 아가씨였습니다! 그래서 한 번 혼내준 것이 다지요. 저희가 언제 매일 아가씨를 때렸나요?”“맞아요! 저희가 주는 빵은 맛이 없다고 투덜대기만 하시니 음식물 찌꺼지를 준 겁니다.”다른 몸종들도 하나둘씩 중얼거리며 불만을 토로했다.이들은 제대로 된 가문의 몸종들이 아니었다. 임학이 약탈꾼들한테서 사들여 온 아이들이라 기본 예법조차 배우지 못한 채 억지로 몸종 노릇을 하고 있었다.그런 이들이 임원에게 반항한 건 단순한 충동 때문 만은 아니었다.유배형을 당한 그녀가 탈주하여 나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혹여라도 자신들이 그녀를 도왔다가 공범으로 몰릴까 두려워 더욱 가혹하게 대했던 것이다.게다가 임원은 평소에도 이들을 멸시하고 모욕했다.어느 날 참다못한 몸종들은 작은 사내아이들과 함께 나무 막대기를 들고 임원을 한차례 두들겨 팼었다. 물론 심하게 때린 것은 아니었다.몸종 중 한 명은 이를 갈며 비웃듯 눈을 흘겼다. 그 눈빛 속에는 혐오와 경멸이 가득했다.그러나 임원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외쳤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절박함과 공포가 뒤엉켜 있었다.“거짓말! 다 저를 모함하고 있는 것입니다!”“김단 낭자! 낭자가 몸종들을 매수한 것이오? 이들을 협박하여 나를 몰아가라고 했소? 낭자는 할머니의 죽음이 나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내 목숨을 노리는 거잖소.”“닥쳐라!”진산군의 고함이 대청에서 울려 퍼졌다.그 거친 외침에 임씨 부인마저 깜짝 놀라며 몸을 움츠렸다.진산군은 얼른 부인의 등을 토닥거리며 진정시켰지만 눈빛은 여전히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네가 그렇게 김단을 탓한다고 해서 진실이 변하더냐! 내 어머니의 죽음이 네 잘못이 아니라고 우길 수 있느냐? 그리고 네가 김단을 비난하는 것도 참 웃기지 않느냐? 기억하거라. 김 씨는 단이가 아니라 너라는 사실을 말이다.
김단은 서늘한 눈빛으로 임학을 바라보며 차갑게 물었다.“낭자가 도련님께 뭐라고 말하던가요?”임학은 순간 얼어붙은 듯 멍하니 서 있었다.그날 밤 눈물로 얼룩진 얼굴로 임원이 했던 말을 되새기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임원 낭자는… 포졸들이 자신을 더럽히려 했다고 말했소. 그래서 필사적으로 도망쳐 나와 거지처럼 구걸하며 한양에 돌아왔고 그 과정에 도적에게 정조를 잃었다고 했소.”그는 덤덤하게 얘기했지만 임원을 놓고 말하면 이 모든 비극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깊은 상처였을 것이다.임학은 그 말을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 한쪽이 미어지듯 아팠다.멀리 앉아 있던 최지습도 그 말을 듣고 잠시 눈빛이 어두워졌다.찻잔을 손에 들고 가볍게 한 모금 마시더니 낮고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렇게 짧은 시간에 구걸만으로 한양까지 돌아오다니... 임 아가씨도 참 대단하군.”그 말을 들은 김단은 미소를 감추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임학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어 최지습을 쳐다보았다.그러더니 불안한 눈빛으로 시선을 다시 임원에게로 돌렸다.동래에서 한양까지 오는 길은 험난하고 복잡했다.어림잡아 계산해 보아도 지금쯤 한양에 도착해야 시간이 맞아떨어지는데 벌써 한양에 와 있다니...임학은 머릿속에서 생각을 정리하며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닫고 있었다.그날 밤, 술에 취해 흐릿했던 기억을 되짚으며 자책했다.임원이 눈물을 머금고 평안 고리를 건네주던 순간의 따뜻한 감동이 이제는 배신감으로 변하며 그의 가슴을 옥죄었다.임학은 떨리는 목소리로 임원에게 물었다.“낭자… 대체 어떻게 돌아온 것이오?”임원은 그 질문에 굳어버린 채 눈물을 흘렸다.이제 더는 변명할 여지가 없다는 걸 직감했지만 어떻게든 눈물로 동정을 유도하려 애썼다.하지만 그녀의 눈물도 이제는 무용지물이었다.그때 김단이 부드럽지만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제가 낭자 대신 대답해드리지요.”그녀는 시선을 당혹감과 두려움으로 일그러진 임원의 얼굴에 고정시켰다.“포졸들의 손에서 도망친 후
김단이 말한 증인은 바로 두식이를 포함한 거지들이었다.김단은 임원을 나뭇간에 가둔 다음 날 곧바로 두식이를 찾아갔다.조심스레 임원의 정체를 알려주자 두식이는 얼굴이 창백해지며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분노와 허탈함에 몸을 떨던 두식이는 그간의 일을 모조리 털어놓았다.그 과정에 그 유랑 상인의 이름도 자연스레 밝혀졌다.그 후 김단은 직접 그 유랑 상인을 찾아갔다.운이 좋게도 그가 한양을 떠나기 바로 전날 그를 만날 수 있었다.그렇게 모든 진실을 알아낸 김단은 그제야 비로소 승리를 직감했지만 그로부터 오는 감정은 기쁨이 아닌 차가운 비애였다.그렇게 모든 진실이 드러나자 임원은 더 이상 변명할 힘조차 잃고 말았다.하지만 가장 충격을 받은 사람은 임학이었다.그는 믿기지 않는 듯 허리춤에 소중히 간직해온 평안 고리를 꺼내 들었다.그는 고리에 묻은 혈흔을 지그시 바라보더니 격앙된 목소리로 물었다.“그러니까... 이 평안 고리는 훔친 돈으로 만든 것이오? 나를 속이기 위해서 일부러 글씨도 정교하게 새기지 않은 것이고? 그럼 이 핏자국은... 설마 이것도 낭자가 일부러 흘린 것이오?”임원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그 눈빛은 이미 모든 걸 포기한 듯 무기력하고 공허했다.그녀는 더 이상 숨기려 하지 않았고 연기하려 하지 않았다.“이미 그렇게 믿고 있으면서 왜 물어보십니까?”그 순간 임원은 본 모습을 드러냈다.그동안 쥐어짜내며 연기했던 가련함과 애처로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더는 거짓으로 감정을 가장할 필요도, 애써 눈물을 흘릴 필요도 없었다.진산군은 분노로 몸을 떨며 소리쳤다.“네가 이렇게 음험하고 악독한 사람인 줄은 몰랐다! 이 배은망덕한 것!”그러자 임원은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비웃었다.“제가 음험하다고요? 제가 악독하다고 했습니까? 그게 과연 제 잘못일까요? 다 당신들 탓 아닙니까?”그녀의 목소리에는 비통함과 억울함이 뒤섞여 있었다.“3년 전, 제가 친딸이라고 말하자마자 아무런 의심조차 하지 않고 제 말을 믿었었죠. 어
그 순간 진산군은 임원의 눈 속에서 진득하게 얽힌 증오를 보았다.그는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고 떨리는 입술로 물었다.“그래서… 네가 그리도 잔인하게 어머니를 학대했다는 거냐?”임원은 분노에 찬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내가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습니까? 그 여자는 내 어머니가 아니라고!”울컥 솟아오르는 감정에 그녀는 거칠게 눈물을 닦아내며 소리쳤다.“그 여자는 저를 기억하지도 못했습니다. 입만 열면 김단, 김단... 김단이 그렇게 좋으면 김단한테 맡기지 왜 제가 그 미친 여자를 돌봐야 합니까?”임학은 그 말을 듣고 숨이 턱 막혔다.자신이 그토록 아끼고 사랑했던 누이가 이렇게 추악하고 잔혹한 모습을 드러내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그는 분노와 허탈함이 얽혀 그저 말없이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하지만 그때였다.무기력하게 앉아 있던 임씨 부인은 갑자기 정신을 차린 듯 눈을 크게 떴다.그녀는 눈물 자국이 가득한 임원의 얼굴을 바라보며 손을 내밀었다.“원이? 왜 이렇게 울고 있는 것이냐? 무슨 일 있었느냐?”임씨 부인은 천천히 다가가 임원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속삭였다.“우리 원아, 얼굴이 왜 이렇게 엉망인 것이냐? 무슨 일 있었느냐? 이 어미를 못 찾아서 울고 있었던 게지? 괜찮다… 난 네 옆에 있으니 다 괜찮아. 이 어미가 널 사랑하고 아껴줄 테니 울지 말거라.”그 온화한 손길과 따스한 목소리에 임원은 정신이 멍해졌다.그녀는 한순간 마음속에 높이 쌓은 벽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았다.복잡한 감정을 모두 토로하던 임원은 망설임 없이 임씨 부인의 품으로 뛰어들어갔다.“엄마… 엄마…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방금까지 “미친 여자”라고 욕하던 사람이 이제는 애타게 “엄마”를 부르며 목 놓아 울고 있었다.그 갑작스러운 태세 전환에 모두가 말문이 막혔다.심지어 김단조차 그녀의 가식적인 모습에 눈살을 찌푸리며 혐오감을 드러냈다.참다못한 최지습은 찻잔을 탁자에 놓고 나직이 말했다.“진산군, 이 일을 어찌 처리할 생각인가?”진산군은 깊은 한숨을 내
하지만 임원은 김단에게 닿기도 전에 공중으로 날아올랐다.쿵!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그녀는 그대로 바닥에 나뒹굴었다.임학이었다.그는 번개처럼 빠르게 몸을 던져 김단 앞을 막아섰다.이글거리는 눈빛엔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이루 말할 수 없는 실망이 얽혀 있었다.“이 망할 년이... 감히 내 눈앞에서 내 누이를 해치려 들어? 죽고 싶어?”김단은 임학의 넓은 등 너머로 과거의 아름다운 추억을 회상했다.그 시절, 김단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임학은 거침없이 서화청을 때려눕혔다.그 어떤 위협 앞에서도 늘 자신을 지켜주던 그 따뜻하고 든든한 오라버니의 뒷모습이었다.하지만 지금 눈앞의 임학은 달랐다.그때처럼 자신을 보호해 주기 위해 나섰지만 과거의 오라버니 모습은 아니었다.예전으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렸다.임학의 발길질은 가혹했고 거침없었다.임원은 피를 토하며 괴로운 듯 몸을 뒤틀었지만 입가에는 여전히 섬뜩한 미소가 그려졌다.“오라버니 앞에서 김단 낭자를 해한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닐 텐데요. 몇 번은 오라버니께서 직접 낭자에게 손을 댔었죠? 이제 와서 저를 벌하신다고 해서 누가 오라버니를 성인군자로 생각해 준답니까?”그 말에 임학의 얼굴이 굳어졌다.임원의 비웃음 섞인 조소에 임학은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하지만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임원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김단을 가장 먼저 밀쳐낸 것도, 그녀를 가혹하게 몰아붙인 것도 모두 임학이었다.자신의 누이에게 해를 끼치면 그 누구든 가만두지 않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지만 정작 그녀에게 가장 깊은 상처를 입힌 사람은 본인이었다.말문이 막힌 그를 바라보던 임원은 헛웃음을 터뜨렸다.그러나 소름 돋던 그 비웃음 소리는 어느새 흐느낌으로 바뀌었다.웃다가 울기를 반복한 그녀는 힘없이 바닥에 누워 하늘을 쳐다보았다.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겨우 살아남았고 힘들게 한양으로 돌아왔는데,이제야 좋은 날이 올 줄 알았는데,어째서 이 모든 것이 한순간에
오늘 명희를 죽이려고 사람을 사주했던 임원 또한 그녀와 똑같은 모습으로 생을 마감했다.이런 걸 인과응보라고 했던가?임원이 저지른 모든 죄악들은 결국 그녀의 피와 죽음으로 돌아왔다.주변을 둘러싼 몸종들과 하인들은 이미 공포에 질려 꼼짝도 하지 못했다.이 대낮에 대청 한복판에서 피 튀기는 살인이 벌어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그 와중에도 임씨 부인은 임학의 품에 안겨 조용히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방금 전까지 짐승처럼 울부짖던 사람이 맞나 싶었다.그녀는 이제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순진한 얼굴로 임학을 바라보며 조용히 물었다.“학아, 우리 단이는? 단이가 사라졌어... 내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가 않아.”그 말에 임학의 가슴은 칼로 도려내듯 아팠다.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김단을 바라보았다.김단은 그 자리에 말없이 서 있었다.임씨 부인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슬픔이 담겨 있었다.그때 임씨 부인의 시선이 김단에게로 향했다.그녀는 마치 무언가를 떠올린 듯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기억났소! 낭자는 우리 큰 마님의 친척이지 않소?”그 말에 김단은 가볍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녀는 조용히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맞습니다 마님. 기억력이 정말 좋으시군요.”임씨 부인의 얼굴에는 한 줄기 빛이 번졌다.“그럼 혹시 우리 단이를 본 적 있소? 우리 단이가 안 보여서 말이오.”그 순간 김단의 얼굴은 아주 미세하게 굳어졌다.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그녀의 물음에 대답해 주었다.“못 봤습니다.”임씨 부인이 찾는 단이는 지금의 자신이 아닐 것이다.그녀가 기억하는 단이는 여전히 어린 시절의 사랑스러운 딸일 것이다.자신의 품에 안겨 환하게 웃던 바로 그 아이.임씨 부인의 얼굴은 금세 실망감으로 물들었다.그 쓸쓸함은 진산군과 임학의 눈에 그대로 번졌다.그때 날이 선 목소리가 들려왔다.“오늘 있었던 일, 부디 명확하게 처리하거라. 전하께서 아시게 된다면 무고한 이들까지 해를 입을 수 있다.”최지습이었다.그는 조용히
임원의 사건은 결국 조정에까지 보고되었고 그 여파는 생각보다 컸다.전하가 임가를 어떻게 벌할지 김단도 알 수 없었다.다만 최지습의 말에 따르면 며칠 안으로 임학이 그와 함께 전장에 나설 것이라고 했다.“그게 무슨 뜻입니까? 임학 도련님을 백 도령님의 종사관으로 임명할 생각인 가요?”김단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한 채 물었다.임학은 어릴 때부터 무예를 익히긴 했지만 최지습의 직속 종사관이 될 그릇은 아니었다.병법은 암기 수준에 머물렀을 뿐 내용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무엇보다 성격이 거칠고 성급하기에 감정에 잘 휘둘리는 편이었다.그런 그가 전장에 나가게 된다면 누군가의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었다.그러나 최지습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종사관이 아니라 솔선자.”그 한 마디에 김단의 눈빛이 흔들렸다.”솔선자?”잠시 숨이 멎을 듯한 침묵이 이어졌다.그녀는 임학이 걱정되어 미간이 살짝 찌푸러졌다.임가의 장남인 그가 솔선자라니.그가 전장에서 맨 앞자리에 선다는 것은 단순한 벌이 아니었다.말 그대로 인간 방패가 되는 거나 다름없는 일이었다.최지습은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 나갔다.“임원 낭자가 한양에 몰래 돌아온 일은 파장이 컸소. 동래 쪽에서도 이 일을 수습하느라 꽤 애 먹었거든. 다행히 임가에서 임원 낭자를 숨겨주었다는 증거는 불충분했고 전하는 그걸 받아들였소.”그 불충분한 증거는 김단이 직접 마련해 둔 것들이었다.두식이를 포함한 거지 무리들이 증인이 되어 임가를 감싸주었고 그 덕분에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만약 이 사건에 임가 전체가 연루되었다면 그 결과는 참혹했을 것이다.최지습은 김단을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하지만 임원 낭자가 임학의 저택에서 숨을 거둔 건 사실이오. 그 때문에 임학은 대역 죄인을 숨겨주었다는 의혹을 벗기 어려워졌지. 전하는 임학에게 솔선자라는 이름으로 책임을 묻으려고 하는 것이오. 일종의 형벌이라고 생각해도 좋소. 임학이 계속 한양에 남는다면 또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오. 그래서 전
이튿날 아침, 김단은 궁무를 맡지 않았기에 평양관저에 머물며 맹영지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탓인지 맹영지의 눈빛에는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김단의 곁에 있을 때만큼은 그녀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조용한 정원, 김단은 맹영지와 함께 은은한 향기를 풍기는 계수나무 아래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숙희가 건네준 과자가 들려 있었고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번져있었다. 맹영지는 고개를 들어 만개한 계화를 바라보며 평온한 표정을 지었다. 어제 소하가 평양관저를 찾아왔으나 그는 맹영지와의 만남을 최대한 피하려 애썼다. 아마도 불필요한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함이었을 것이다.김단은 맹영지를 바라보며 과거 소하가 왜 그리도 그녀를 칭찬했는지 알 것 같았다. 한때 소하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여인답게 그녀는 고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하지만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그렇게 가까웠던 두 사람이었는데 맹영지는 어쩌다 소하에게 독을 먹이려 했던 것일까?김단은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맹영지의 몸과 마음이 회복되면 그때 자연스럽게 그 답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김단이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평양관저의 겸인이 급히 달려와 말했다.“아가씨, 맹가 사람들이 도착했습니다.”이런 큰일이 발생했으니 맹씨 집안에서 그녀를 보러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김단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겸인에게 말했다.“알겠소. 이리로 모셔오시오.”잠시 후, 맹씨 부인이 정원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김단에게 예를 갖추어 인사한 뒤 슬픈 눈으로 자신의 딸을 바라보았다. “김 의원님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의원님이 아니었다면 제 딸이 그 짐승 같은 자에게 학대받으며 살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입니다.”말을 마친 맹씨 부인의 눈동자가 붉어졌다.김단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맞이하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과찬이십니다, 맹씨 부인. 민태훈, 그 자의 말에 따르면 맹영지 아가씨의 병은 이미 4~5년 전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완전히 회
소한은 코웃음을 치며 말없이 등을 돌렸다.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소하의 조용한 목소리가 방안의 침묵을 깨뜨렸다.“이번에는 정말 잘했어.”영의정 저택에서 벌어진 일은 소한이 형벌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소하의 귀에 들어갔다. 만약 소한이 과감하게 영의정 저택에 침입하지 않았다면 김단은 쉽게 그곳을 빠져나오지 못했을 것이다.비록 민씨 사람들이 직접적으로 김단을 해치지 못한다고 해도 그녀가 겪었을 모욕과 고통은 상상하기 어려웠다.소하의 갑작스러운 칭찬에 소한은 많이 당황한 듯했다.“제가 충동적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때로는 그 충동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지.”소한은 아무 말 없이 그저 김단의 얼굴을 떠올렸다. 처음에 그녀도 자신을 발견하고 놀란 듯했지만 곧 냉랭한 표정으로 일관하였다. 김단은 마차에 오를 때까지 자신에게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다.과거의 그녀였다면 그가 나타나자마자 바로 그의 품에 안기며 그를 향해 미소 지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너무나도 차갑게 변해버렸다. 자신을 외면하는 그녀가 소한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그는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큰 실수를 저질렀는지를 다시금 깨달았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꽉 쥐며 굳게 결심했다.그는 잃어버린 것을 되찾기 위해 이미 어떤 대가든 치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반 시진 후, 김단은 방 안에서 멍하니 앉아 있었다.그러자 숙희가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아가씨?”김단은 정신을 차리고 숙희를 바라보았다.“무슨 일이냐?”“두 도련님께서는 모두 돌아가셨습니다.”김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방금 전 발생한 일을 되새겨 보았다. 그녀는 소한이 오랫동안 계획해 온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자신을 선택했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과거에도 그는 소가를 위해, 전하를 위해 심지어 임원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그러나 그녀만은 제외였다.그녀는 소한이 자신의 어머니를 걱정하는 척하며 평양관저로 따라온 것도 단지 자신의 동정심을 얻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상처
김단은 아무 말 없이 소한을 부축하며 걸었다. 궐에서 나오는 길은 유난히 길고 고요했다. 그들의 발걸음은 무겁고 느렸으며 말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다.궐문에 도착했을 때 소한의 마차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는 아마도 말을 타고 왔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의 상태로 다시 말을 타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된 김단은 곁에 있던 경씨에게 부탁했다.“도령님, 장군님을 먼저 집으로 모셔다 주실 수 있겠습니까?”그러자 소한이 놀란 듯 김단을 바라보며 물었다.“내게 약을 발라주지 않겠다는 것이오?”김단도 당황해하며 되물어 보았다.“소가에는 의원이 없습니까?”소한은 김단의 물음에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의 의도가 너무 노골적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어머니께서 내가 또 다쳤다는 걸 아시면 얼마나 걱정하겠소? 그러니 그냥 근처에서 치료받을 것이오. 낭자는 신경 쓰지 말고 먼저 돌아가시오.”김단은 그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그렇다면, 먼저 평양관저로 함께 가서 약을 바르시죠.”소한은 그녀의 제안에 놀란 기색을 내비쳤다.“불편하지 않겠소?”김단은 그를 바라보며 단호히 말했다.“괜찮습니다.”그렇게 소한은 김단과 함께 평양관저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들을 맞이한 것은 김단의 몸종 숙희였다.소한을 발견한 그녀는 깜짝 놀라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그러자 김단이 숙희를 달래는 듯한 목소리로 차분히 말했다.“숙희야, 장군님을 객실로 안내해 주거라. 나는 약을 준비하러 가야겠구나.”그녀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김단의 지시를 따랐다.객실에 혼자 남은 소한은 조심스럽게 상의를 벗고 등을 드러냈다. 그의 등에는 형벌로 인한 상처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그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등을 바라보며 오늘의 형벌이 생각보다 가볍지 않았음을 깨달았다.하지만 그는 김단이 이 상처를 보면 마음 아파할 것이라 생각하며 기대감으로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잠시 후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약을 들고
긴장감이 맴도는 분위기 속에서 전하는 이해 안 되는 듯한 어투로 물었다,“조선의 장군인 네가, 수많은 전공을 세운 네가, 원하는 여인 하나 얻는 것이 그리 어렵단 말이냐? 어찌 김단 하나 때문에 수년간 공들여 쌓아온 모든 것을 무너뜨리려 하는 것이야? 그 낭자가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느냐?”전하의 말투는 엄중했지만 그 속에는 실망과 안타까움이 섞여 있었다.그러자 소한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그렇습니다.”전하는 눈썹을 찌푸리며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김 의원, 들었소?”그 순간 소한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조용히 서있는 김단이 있었다. 그녀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담담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소한은 그녀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가 이 모든 대화를 들었다는 사실에 당황했지만 그녀의 표정에서는 어떠한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소한은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물었다.“김단, 왜 이곳에 있는 것이오?”그녀는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와 무릎을 꿇고 전하에게 예를 올렸다.“소녀 김단, 전하를 뵙습니다.”전하는 손짓으로 그녀를 일으키며 말했다.“일어나거라. 오늘 발생한 일에 대해 자세히 말해 보거라.”김단은 소한을 보지 않기 위해 시선을 정면에 고정한 채 차분하게 사건의 전말을 설명했다. “제가 직접 목격한 바는 없습니다. 하지만 민대부를 제외하고는 영의정 댁 장남의 부인에게 감히 손을 댈 수 있는 자는 없을 것입니다.”전하는 그녀의 말을 듣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맹 낭자의 상처를 확인하기 위해 두 명의 궁녀를 보내겠다. 평양관저에서 확인해 보도록 하거라.”학대의 이유가 무엇이든 맹영지는 필시 중전의 친척이었다. 만약 폭력을 가한 사람이 민대부라고 할지라도 이는 중전의 가문을 모욕하는 행위와 다름없었기에 결코 그를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전하는 소한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어쩌면 네 죄가 묻힐 수도 있겠구나.”민씨 가문의 잘못이 드러나게 된다면
소한은 곧바로 병사들과 함께 어서재에서 물러났다.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때는 이미 향 한 자루가 탈 정도의 시간이 흘러 있었다.소한이 걸어 들어오는 것을 본 전하는 하던 일을 멈추고 냉랭하게 물었다.“영의정이 너를 더 때리라고 명하지 않았느냐?”소한은 조용히 전하 앞으로 걸어가 무릎을 꿇고 허리를 곧게 세운 채 대답했다.“전하의 깊은 뜻을 아는 자입니다. 그러니 더 심한 처벌을 요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전하는 코웃음을 치며 다시 물었다.“그렇다면, 내 뜻이 무엇이더냐?”소한은 고개를 들어 전하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전하께서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대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을 겁니다. 그래서 영의정을 불러 제가 벌을 받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게 하셨죠. 그리고 동시에 제가 전하의 사람이라는 것을 명확히 하셨습니다. 전하께서는 영의정이 이 사실을 눈치채기 바라신 것 아니었습니까?”전하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손에 들고 있던 붓을 책상에 내던지며 소리쳤다.“이 불경한 자식아! 내 너를 아낀다고 해서 이렇게 제멋대로 행동해도 된다고 생각하느냐? 영의정 저택 외에 또 어디에 첩자를 심어두었느냐?”소한은 눈을 내리깔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3품 이상의 모든 관료의 집에 첩자를 두었습니다.”그 말을 들은 전하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소한을 가리켰지만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였다.그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짓더니 한참 동안 방안을 서성이었다.잠시 후 그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다시 한번 소리쳤다.“네가 감히! 그렇게 많은 곳에 첩자를 심어두고 무슨 일을 꾸미려는 것이냐? 이렇게 행동하면 내가 소씨 집안을 멸문시켜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소한은 여전히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조용히 말했다.“저도 위험한 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다섯 해 전, 저희 소가는 거의 멸문 당할 뻔했습니다.”그 해 소하가 지닌 병권은 다른 집안의 탐욕스러운 먹잇감이 되었고 그로 인해 조정의 문
김단은 그제야 잊고 있었던 민태훈을 떠올렸다.그녀는 맹영지를 몸종에게 맡기고 민태훈 곁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허벅지에 박힌 은침을 뽑아냈다.침이 빠져나가자마자 민태훈은 마치 고통에서 해방되기라도 한 듯 온몸의 긴장이 풀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한 가닥의 은침이 이토록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큰 마님은 김단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그녀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고 말이다.그때 경씨가 마차를 몰고 도착했다. 김단과 몸종이 맹영지를 부축하며 걸어 나오자 경씨는 놀란 얼굴로 다가와 안부를 물었다.“낭자, 괜찮소?”방금 전 김단이 영의정 저택에서 곤란한 상황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소한은 급히 그녀가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덕분에 한발 늦게 도착한 경씨는 자신이 더 일찍 김단을 챙기지 못한 것을 자책하며 말했다.“내가 미처 신경 쓰지 못했소.“김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럽게 대답했다.“저는 괜찮습니다. 먼저 맹 아가씨를 평양관저로 모시고 가야 할 것 같습니다.“그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김단과 몸종이 맹영지를 부축하며 마차에 오르자 경씨는 바로 마차를 출발 시켰다.김단은 마차에 오르기 전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조용히 서 있는 소한에게로 향했다. 소한은 그녀를 바라보며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김단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려버렸다. 소한은 그런 김단의 뒷모습을 씁쓸하게 바라보더니 옅은 미소를 지었다.그 후 소한은 곧장 궁으로 향했다.어서재에 도착한 그는 곧바로 무릎을 꿇고 앉아 오늘 영의정 저택에서 있었던 일을 전하에게 보고했다.그의 말을 들은 전하는 노여움을 감추지 못하며 소한을 꾸짖었다.“네가 감히 허락도 없이 영의정 저택을 침입했단 말이냐? 정말 대담하구나! 내가 너를 벌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느냐?”그러나 소한은 그저 묵묵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벌을 달게 받겠습니다.“전하는 그의 담담한 태도에 더 분노하며 외쳤다.“민가
김단은 민씨 부인의 말에 담긴 의미를 정확히 파악했다.보내서는 안 된다라...오늘 이 자리에서 맹영지뿐만 아니라 김단 자신도 민가를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김단은 민씨 부인이 자신의 아들을 위해 이런 결정을 내릴 줄 몰랐다.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어떤 선택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김단의 눈빛이 서서히 날카롭게 변해갔다. 그녀의 내면에서는 분노와 실망이 교차했다.큰 마님은 민씨 부인의 표정을 보고 심각한 상황임을 직감했다.맹영지의 몸에는 증거가 남아있었고 그 사실이 세간에 알려지게 된다면 엄청난 파장을 불러올 것이다.하지만 지금 김단을 보내지 않는다면 그녀는 분명 궐로 들어가 이 일을 고발할 게 뻔했다.지금 김단을 적으로 돌린다면 그에 따른 후과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큰 마님은 사랑하는 손자를 바라보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김단을 보내면 민태훈의 입지가 위험해질 것이고 보내지 않는다면 민가 전체가 위태로워질 수 있었다. 그러기에 그녀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그때, 한 하인이 급히 달려와 외쳤다.“큰 마님! 소 장군님께서 오셨습니다!”소 장군? 소한을 말하는 것인가?그의 이름이 언급되자 큰 마님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소한이 이렇게 빨리 이곳에 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김단도 그가 왜 이곳에 나타났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녀가 생각에 잠긴 사이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큰 마님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뵙게 되어 송구합니다.”모두들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보이는 것은 당당하게 정원으로 걸어 들어오는 소한의 모습이었다.“소한, 주인의 허락도 없이 들어오다니! 대체 영의정 저택을 무엇으로 보시는 것이오? 이곳은 마음대로 들락날락할 수 있는 곳이 아니오.”소한은 그 말을 한 사람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이런 무례를 범한 것은 제 잘못입니다. 곧 전하 앞에서 사죄드리지요.”그는 정원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더니 큰 마님에게 다가가 정중히 인사했다.
머뭇거리는 그들의 모습에 김단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마님, 만약 지금 이 자리에서 저를 막으신다면 저는 곧장 궐로 가 이 모든 일을 고할 것입니다.”그녀의 말은 칼날처럼 날카로웠고 그 안에는 확고한 결의가 담겨 있었다.김단의 말이 끝나자 민가의 사람들은 긴장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큰 마님은 눈썹을 찌푸리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그녀는 김단이 단순한 의원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김단은 진산군 댁의 적녀이자 평양원군의 의남매이다. 그리고 그녀는 소가의 두 형제와도 깊은 인연이 있었다. 지금 그녀를 적대시하는 것은 곧 여러 권세 있는 가문을 적으로 만드는 것과 다름없었다.큰 마님은 민태훈을 바라보았다. 그는 고통에 찬 얼굴로 땀을 흘리며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그녀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다.그러나 동시에 마음속에는 김단에 대한 의심도 피어올랐다. 만약 그녀의 말이 과장된 것이라면 민씨 가문은 부당한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한참을 고민하던 큰 마님은 굳게 결심한 듯 민씨 부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네가 직접 확인해 보거라. 만약 낭자의 말이 거짓이라면 반드시 그에 따른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민씨 부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김단과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김단은 조심스럽게 맹영지의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녀의 팔 안쪽에는 선명한 멍 자국이 여러 개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민씨 부인은 숨을 들이켰다.“이런 상처가… 정말로…”그녀가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자 김단은 차분하게 말했다.“다리 쪽은 더 심각합니다. 보시겠습니까?”민씨 부인은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이 상처, 정말로 태훈이의 짓입니까?”김단은 잠시 침묵하더니 그녀의 말에 대답해 주었다.“제가 직접 본 것은 아닙니다.”그 말에 민씨 부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우리 태훈이는 절대 그럴 애가 아닙니다. 어릴 적부터 착하고 작은 생명도 소중히 여기던 사람이었단 말입니다.”김단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지만 겉으로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공주의 이름이 거론되자 민씨 일가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스쳤다. 그러나 큰 마님은 여전히 태연한 표정을 유지한 채 입을 열었다.“낭자가 공주의 명을 받고 우리 영의정 저택에 들어와 병자를 돌보는 것은 알겠소. 허나 공주의 허락 없이 사람을 해치는 것은 무엄한 일이오. 공주라 할지라도 국법을 지켜야 하지 않겠소? 그러니 함부로 공주의 이름을 빌어 협박하지 마시오.”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김단은 박수를 치며 말했다.“참으로 옳은 말씀이십니다.”민가의 큰 마님은 김단이 드디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자신을 치켜세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김단의 입가에는 더욱 짙은 미소가 떠올랐고 눈빛에는 경멸이 스쳤다.“공주님께서도 국법을 지키셔야 하는데 민가의 사람들은 더욱 그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민가의 사람들은 일제히 소리를 높이며 반박했다.“그게 무슨 뜻이오? 우리 민씨 일가는 예로부터 법을 준수하며 국법에 어긋나는 일을 한 적이 없소!”“김 의원께서 자신의 잘못을 덮기 위해 우리 민가에 누명을 씌우려는 것 아니오?” 김단은 그저 조용히 서서 그들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두려운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김단의 이런 차분한 태도가 큰 마님의 신경을 건드렸다.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김단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큰 며늘 아씨는 중전마마의 친조카이시며 공주자가의 사촌이십니다. 그래서 제가 그분의 치료를 맡게 되었지요. 원래는 상태가 호전되고 있었으나 오늘 갑자기 증상이 악화되었습니다. 이는 분명 누군가가 큰 며늘 아씨의 회복을 방해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의원으로서 제 환자가 이곳에서 고통받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으니 제가 데려가야겠습니다. 만약 제 앞을 가로막으신다면 다음번에는 민대부님의 다리에 은침을 꽂아 버릴 것입니다.”이에 큰 마님은 지팡이를 바닥에 세게 내리치며 외쳤다.“허튼소리 마시오! 낭자의 의술이 부족해서 생긴 일을 왜 우리한테 덮어씌우려는 것이오?”“맞소! 무슨 명의의 제자라더니... 다 헛소리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