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원의 사건은 결국 조정에까지 보고되었고 그 여파는 생각보다 컸다.전하가 임가를 어떻게 벌할지 김단도 알 수 없었다.다만 최지습의 말에 따르면 며칠 안으로 임학이 그와 함께 전장에 나설 것이라고 했다.“그게 무슨 뜻입니까? 임학 도련님을 백 도령님의 종사관으로 임명할 생각인 가요?”김단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한 채 물었다.임학은 어릴 때부터 무예를 익히긴 했지만 최지습의 직속 종사관이 될 그릇은 아니었다.병법은 암기 수준에 머물렀을 뿐 내용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무엇보다 성격이 거칠고 성급하기에 감정에 잘 휘둘리는 편이었다.그런 그가 전장에 나가게 된다면 누군가의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었다.그러나 최지습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종사관이 아니라 솔선자.”그 한 마디에 김단의 눈빛이 흔들렸다.”솔선자?”잠시 숨이 멎을 듯한 침묵이 이어졌다.그녀는 임학이 걱정되어 미간이 살짝 찌푸러졌다.임가의 장남인 그가 솔선자라니.그가 전장에서 맨 앞자리에 선다는 것은 단순한 벌이 아니었다.말 그대로 인간 방패가 되는 거나 다름없는 일이었다.최지습은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 나갔다.“임원 낭자가 한양에 몰래 돌아온 일은 파장이 컸소. 동래 쪽에서도 이 일을 수습하느라 꽤 애 먹었거든. 다행히 임가에서 임원 낭자를 숨겨주었다는 증거는 불충분했고 전하는 그걸 받아들였소.”그 불충분한 증거는 김단이 직접 마련해 둔 것들이었다.두식이를 포함한 거지 무리들이 증인이 되어 임가를 감싸주었고 그 덕분에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만약 이 사건에 임가 전체가 연루되었다면 그 결과는 참혹했을 것이다.최지습은 김단을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하지만 임원 낭자가 임학의 저택에서 숨을 거둔 건 사실이오. 그 때문에 임학은 대역 죄인을 숨겨주었다는 의혹을 벗기 어려워졌지. 전하는 임학에게 솔선자라는 이름으로 책임을 묻으려고 하는 것이오. 일종의 형벌이라고 생각해도 좋소. 임학이 계속 한양에 남는다면 또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오. 그래서 전
술병이 자신의 손에 쥐어진 순간 임학은 그저 멍하니 그것을 내려다보았다.어쩌다 술병이 자신에게까지 전달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임학은 다시 김단을 쳐다보았다.그녀는 아주 미세하게, 그러나 분명히 그를 향해 웃고 있었다.그 웃음이 무슨 의미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용서였는지, 마지막 인사였는지, 아니면 아무 의미도 없는 웃음이었는지.하지만 그 짧은 미소에 임학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그녀가 여전히 자신에게 미소를 보여준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그는 손에 들린 술병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그리고 마지막 남은 한 모금을 꿀꺽 삼켜버렸다.김단이 직접 건넨 술이 아니어도 괜찮았다.오늘 이 자리에 김단이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위로받았다.어쩌면 오늘의 이 작별은 그를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전장으로 가야 할 시간이 다가오자 궐문이 열렸다.김단은 숙희와 함께 사람들 뒤편으로 물러났다.말고삐를 움켜잡은 최지습과 그의 뒤를 따르는 병사들을 묵묵히 지켜보았다그녀의 마음속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들이 밀물처럼 밀려왔다.그들은 이제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키러 갈 것이다.그중 누군가는 영영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김단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들의 뒷모습을 끝까지 눈에 담으려고 애썼다.그녀는 자신의 가슴을 부여잡은 채 그저 오래도록 바라보기만 했다.최지습의 모습이 궐문 너머로 사라지는 순간까지 그녀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그리고 천천히 몸을 돌리려던 찰나 그녀의 시야에 한 사람이 들어왔다.소한.오늘의 그는 전장에 나서는 병사들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단정한 도포 차림에 검은 머리를 단정히 묶은 채 조용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그녀를 발견한 소한은 조심스럽게 미소를 짔더니 천천히 그녀에게로 다가왔다.김단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소 장군, 평안하셨습니까?”그녀의 태도는 정중했지만 그 속엔 어떠한 감정도 실려있지 않았다.한발 물러선 거리만큼이나 그와 명확하게 선을 긋고 있었다.소한의 미소가 어색하게 굳어졌
다음 날 아침 김단은 급히 궐로 불려갔다.이유는 다름 아닌 임씨 부인 때문이었다.그녀를 안내하던 내시가 곧장 덕빈의 침전으로 향했다.그녀가 덕빈에게 인사를 올리기도 전에 수 어의가 허둥지둥 달려 나왔다.“임씨 부인께서 밤새 고열에 시달렸소. 어떻게 해도 열이 내리질 않아. 나도 어찌할 도리가 없어 낭자를 부르게 되었다네.”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어쩌다 임씨 부인이 덕빈의 침전에서 하룻밤을 지샜던 걸까?수많은 의문과 불안으로 뒤엉킨 채 그녀는 이를 악물고 방으로 들어섰다.침상 위엔 임씨 부인이 누워 있었다.그 곁에는 덕빈이 초췌한 얼굴로 눈물을 훔치며 앉아 있었다.“단아 어서 와서 네 어머니를 좀 살펴보거라.”김단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조심스럽게 임씨 부인의 맥을 짚어 보았다.덕빈은 떨리는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갔다.“원래는 너희 어머니 상태가 어떤지 궁금해서 불렀던 건데 나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더구나. 그래서 이곳에 며칠 함께 지내며 어의들에게 진료도 받게 했단다. 혹시 조금이라도 좋아지지 않을까 해서... 그런데 겨우 이틀이 지났을 뿐인데 갑자기 이렇게 열이 오른 것이다. 어의들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기에 너를 불렀어. 예전에 소 장군의 열을 내리게 한 적이 있다고 들었어.”말을 이어가던 그녀의 눈가가 점점 젖어갔고 목소리도 가늘게 떨렸다. “난 그저 너희 어머니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었을 뿐인데 이렇게 되어버렸으니... 내 무슨 염치로 너희 아버지한테 설명을 해주어야 할지...”김단은 말없이 침을 꺼내 들었다.그녀의 눈빛엔 슬픔도, 분노도, 원망도 없었다.그녀는 침착하게 은침을 꺼내들더니 임씨 부인의 두정부 혈자리에 침을 놓기 시작했다.이번 고열은 소한 때와는 달랐다.그러기에 다른 방식으로 침을 놓아야 했다.그렇게 꼬박 반 시진이 지난 후에야 임씨 부인의 열은 천천히 가라앉았다.곁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덕빈은 그제야 길게 한숨을 내쉬며 안도했다.“열이 내렸구나. 다행이야. 정말이지 못 본 사이에 네가 이렇게 뛰
덕빈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세상 부모 마음이란… 참 딱하지. 나는 이미 자식을 잃었다. 내 주위 사람들까지 나처럼 자식을 잃는 걸 보고 싶지 않구나. 너무 고통스럽거든.”그녀는 말끝을 흐리더니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았다.김단은 더 깊게 미간을 찌푸렸지만 가까스로 감정을 추슬렀다.“소녀, 마님께 드릴 약을 지으러 가겠습니다.”김단의 냉정한 태도에 덕빈은 아쉬운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그녀는 억지로 미소를 머금은 채 손을 내저었다.김단이 물러가자 그녀의 눈빛이 묘하게 달라졌다.임씨 부인은 위중한 고열에 시달렸지만 한 번의 침만으로 열이 거짓말처럼 내렸다.덕빈은 임씨 부인이 눈을 뜨자마자 진산군 댁으로 돌려보냈다.이제 자신도 궐을 떠날 수 있었기에 김단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러나 아직 궐문에 다다르기도 전에 그녀의 발걸음이 멈췄다.“김단 아가씨, 잠시만요!”김단이 고개를 돌리니 작고 왜소한 체구의 내시 하나가 정중히 다가와 허리 숙여 인사했다.“공주님께서 낭자를 뵙고 싶어 하십니다.”그 말에 김단의 심장이 조여들었다.왜 하필 지금 자신을 부르는 걸까?“무슨 일인지 알 수 있을까요?”그녀는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쓰며 물었다.“그저 주인의 뜻을 따르는 저희가 어찌 알겠습니까? 아가씨, 이쪽으로 가시죠.”그의 표정은 여전히 온화했고 말투도 부드러웠다.하지만 그 속에서 김단은 오싹한 위화감을 느꼈다.공주가 부르면 거절할 수 없었다.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공주의 침전에 들어섰을 때 서원 공주는 한 손에 다과를 든 채 여유롭게 앉아 있었다.김단이 조심스럽게 인사를 올리자 공주는 손에 들린 다과조차 내려놓지 않은 채 느긋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김 낭자, 앉으세요.”그녀가 손으로 가리킨 자리는 다름 아닌 자신의 바로 옆자리였다.김단은 순간 망설였지만 공주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기에 자리에 앉았다.“공주님께서 저를 부르신 이유가 무엇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공주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김단은 눈앞의 서원공주를 바라보며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망설였다.대체 어디서부터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것일까?있는 그대로 말했다간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었다.그렇다면 아무 이상 없다고 둘러대는 게 맞는 걸까?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진실이 드러나게 된다면 결과는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서원 공주는 즐겁다는 듯 웃고 있었다.김단은 결국 깊은 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공주님, 도대체 무엇을 원하시는 겁니까?”공주는 눈썹을 가볍게 치켜올리며 능청스럽게 웃었다.“그게 무슨 뜻이지? 난 그저 요즘 식욕이 너무 좋아서 낭자를 부른 것인데. 설마 진맥도 제대로 못하는 건 아니겠지?”김단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공주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공주님께서는 식욕이 강한 이유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공주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그림자가 드리웠다.그러나 이내 냉소적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보아하니 아직도 네 처지를 모르는 모양이구나.”말을 마친 공주가 주변 몸종들에게 눈짓을 보내자 일제히 물러났다.문이 닫히고 방 안에는 오직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공주는 김단에게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원군님께서는 이미 전장으로 가셨다지? 언제 돌아올지도 알 수 없고. 그렇다면 지금 이 궐안에 널 지켜줄 사람이 있을까?”그 말에 김단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차분한 상태를 유지하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공주님께서는 어찌하여 저를 이토록 미워하십니까?”진심이었다.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과거 소한 도련님과의 일 때문이라면 노여움을 푸세요. 이제 저는 그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아직도 저를 이토록 적대시하는 건가요?”서원 공주는 코웃음 치며 얘기했다.“사람을 미워하는데 꼭 이유가 있어야 하나? 나는 그냥 네가 싫다. 꼴 보기가 싫어. 말투도 행색도 전부 맘에 안 든단 말이다. 그냥 네 존재 자체가 싫은 걸 어떡하라고 그러는 것이냐?”김단은 깊은 숨을
“난 그런 거 모른다! 없으면 만들어 오거라! 아버지한테는 평양관저에서 며칠 머문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니 넌 내 아이를 없앨 방법을 찾아내. 안 그러면... 결과는 너도 잘 알고 있겠지.”서원공주의 말은 김단의 가슴을 후벼 파는 것 같았다.낙태,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공주는 알고 있을까?그런데 그 대상이 전하가 애지중지하는 공주라니...김단이 감당해야 할 무게는 더욱 막중했다.만약 일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모든 책임은 아무 잘못도 없는 최지습에게 돌아갈 것이다.김단은 이를 악물고 조심스럽게 말했다.“원군님께서 전장에 나가셨으니 저는 작은 저택으로 돌아갈 생각입니다.”그러나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원 공주는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끊어버렸다.“네가 어디에 있든 상관없어. 하지만 나는 반드시 평양관저에서 이 일을 끝낼 것이다.”그 말에 김단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꼭 쥐었다.서원공주는 알고 있었다.김단에게 최지습은 어떤 존재인지를 말이다.그래서 그를 미끼로 삼아 김단을 이용하려 했다.왕권 앞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선택은 그저 공주의 뜻을 따르는 것이었다.김단은 무너져 내리는 듯한 기분으로 공주의 침전에서 나와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그러나 몇 걸음 가지 않아 익숙한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금군총령의 관복을 입고 허리에 긴 검을 찬 소하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침상에 누워 지내던 지난 시간들이 무색할 만큼 그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김단을 발견한 소하가 먼저 다가왔다.“어땠소? 공주가 낭자를 곤란하게 하진 않았소?”그의 물음에 김단은 잠시 멈칫했다.“혹시 일부러 기다리고 계셨던 겁니까?”소하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녀가 공주의 침전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병사가 이 사실을 소하에게 알렸고 그 얘기를 듣자마자 단숨에 여기까지 달려왔다.남자인 그가 공주의 침전으로 들어갈 순 없었기에 그저 문밖에서 묵묵히 그녀가 나오기를 기다렸다.그 사실에 김단의 가슴속엔 알 수 없는 따뜻함과 감동이 차올랐다
이 궁궐 안에서 전하를 제외하고 감히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있는 존재는 단 하나, 바로 금군뿐이었다.김단의 말이 끝나자 소하의 눈빛이 매섭게 흔들렸다.그제야 김단이 공주의 침전에 불려간 이유를 알 것 같았다.그는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얼마나 되었소?”“석 달이 조금 넘었습니다.”김단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며칠 뒤 공주가 평양관저로 오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지울 수 있게 도와달라더군요.”“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이오?”그의 물음은 조심스러우면서도 단호했다.“어쩔 수 없습니다.”김단은 낮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평양관저에서 처리해야겠지요. 하지만 조금만 잘못되어도 목숨은 보장할 수 없습니다.”그 말에 소하는 싸늘한 눈빛으로 김단을 바라보았다.“잘 처리해도 목숨을 잃을 수 있소.”미혼인 공주가 임신을 했다는 것은 말 그대로 왕실의 치욕이었다.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공주는 그 누구든 없앨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그래서 이렇게 부탁드리는 겁니다. 그 남자를 꼭 찾아주세요.”그녀의 눈동자엔 흔들림이 없었다.“그 자를 찾아야만 합니다. 그래야 제가 살아남을 수 있어요.”소하는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좋소. 낭자는 이만 돌아가시오. 난 바로 움직일 거요.”“조심히 다녀오세요.”김단은 조용히 인사를 올리고 몸을 돌려 평양관저로 향했다.그녀가 돌아오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숙희가 급히 다가와 그녀를 맞이했다.숙희는 그녀의 얼굴빛을 살피더니 이내 불안한 눈빛으로 물었다.“아가씨, 또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김단은 고개를 저었다.곧 공주가 평양관저로 들이닥칠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워졌다.그녀는 가만히 숙희를 바라보다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작은 저택 말이다. 오랜만에 손 좀 봐야겠어. 며칠 동안 거기 가서 정리 좀 해주거라. 특히 그 붉은 매화. 병이 들었을지도 모르니 꼭 정원사를 불러서 확인해 보도록 하거라.”숙희는 자신을 이 저택에서 떼어내려는 김단의 의도를 단번에 파악했다
“열흘?”그 말에 서원공주는 콧방귀를 뀌며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그러고는 기세등등하게 발걸음을 옮겨 평양관저로 들어섰다.김단은 한 걸음 뒤에서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무거운 대문이 천천히 닫히더니 그들을 문밖의 세상과 단절시켜버렸다.이 안은 오롯이 공주의 뜻대로만 움직여야 하는 또 다른 세상이 되어버렸다.앞에서 걷고 있던 공주는 걸음을 멈추더니 몸을 돌려 김단을 바라보았다.“너에게 소개하지. 이 아이는 내 수발을 드는 나인, 윤이라고 한다.”김단은 고개를 들고 윤이를 바라보았다.그녀는 마치 자신이 공주라도 되는 양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거만한 눈빛으로 김단을 내려다보고 있었다.그 눈빛엔 오만함이 가득했고 김단은 그 눈길을 받아내며 담담히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그 모습에 윤이는 더욱 기세등등했고 김단은 속으로 조용히 한숨을 삼켰다.한낱 공주의 나인 주제에 이리도 뻔뻔하게 굴다니.자신이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우쭐거리는 그녀가 안쓰러웠다.김단이 자기 나인에게도 고개를 숙이는 모습에 서원공주는 기가 찼다.“네가 영리하다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충고 하나 해주지. 내 앞에서 잔머리는 그만 굴리 거라. 네 몸종을 멀리 보냈다고 해서 내가 어떻게 못할 거라 생각하느냐? 정말 우습기도 하지.”그녀는 또 한 번 콧방귀를 뀌더니 다시 우아하게 관저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관저 내의 하인이 공주를 난화당으로 안내했다.그곳은 평양관저 안에서 세 번째로 좋은 정원이었다.첫 번째는 당연히 평양원군인 최지습의 처소이고 두 번째는 현재 김단이 머무는 곳이었다.하지만 이 작은 난화당이 서원공주의 마음에 들 리 없었다.대문을 들어선 순간부터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그 모습을 눈치챈 윤이는 즉시 날선 목소리로 외쳤다.“이 정원은 누가 배정했느냐!”하인은 깜짝 놀라 황급히 앞으로 나서며 허리를 숙였다.“공주 자가, 제가 정한 것이옵니다. 이 난화당은 관저에서 비어 있는 정원 중 가장 좋은.
이튿날 아침, 김단은 궁무를 맡지 않았기에 평양관저에 머물며 맹영지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탓인지 맹영지의 눈빛에는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김단의 곁에 있을 때만큼은 그녀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조용한 정원, 김단은 맹영지와 함께 은은한 향기를 풍기는 계수나무 아래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숙희가 건네준 과자가 들려 있었고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번져있었다. 맹영지는 고개를 들어 만개한 계화를 바라보며 평온한 표정을 지었다. 어제 소하가 평양관저를 찾아왔으나 그는 맹영지와의 만남을 최대한 피하려 애썼다. 아마도 불필요한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함이었을 것이다.김단은 맹영지를 바라보며 과거 소하가 왜 그리도 그녀를 칭찬했는지 알 것 같았다. 한때 소하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여인답게 그녀는 고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하지만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그렇게 가까웠던 두 사람이었는데 맹영지는 어쩌다 소하에게 독을 먹이려 했던 것일까?김단은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맹영지의 몸과 마음이 회복되면 그때 자연스럽게 그 답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김단이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평양관저의 겸인이 급히 달려와 말했다.“아가씨, 맹가 사람들이 도착했습니다.”이런 큰일이 발생했으니 맹씨 집안에서 그녀를 보러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김단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겸인에게 말했다.“알겠소. 이리로 모셔오시오.”잠시 후, 맹씨 부인이 정원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김단에게 예를 갖추어 인사한 뒤 슬픈 눈으로 자신의 딸을 바라보았다. “김 의원님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의원님이 아니었다면 제 딸이 그 짐승 같은 자에게 학대받으며 살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입니다.”말을 마친 맹씨 부인의 눈동자가 붉어졌다.김단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맞이하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과찬이십니다, 맹씨 부인. 민태훈, 그 자의 말에 따르면 맹영지 아가씨의 병은 이미 4~5년 전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완전히 회
소한은 코웃음을 치며 말없이 등을 돌렸다.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소하의 조용한 목소리가 방안의 침묵을 깨뜨렸다.“이번에는 정말 잘했어.”영의정 저택에서 벌어진 일은 소한이 형벌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소하의 귀에 들어갔다. 만약 소한이 과감하게 영의정 저택에 침입하지 않았다면 김단은 쉽게 그곳을 빠져나오지 못했을 것이다.비록 민씨 사람들이 직접적으로 김단을 해치지 못한다고 해도 그녀가 겪었을 모욕과 고통은 상상하기 어려웠다.소하의 갑작스러운 칭찬에 소한은 많이 당황한 듯했다.“제가 충동적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때로는 그 충동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지.”소한은 아무 말 없이 그저 김단의 얼굴을 떠올렸다. 처음에 그녀도 자신을 발견하고 놀란 듯했지만 곧 냉랭한 표정으로 일관하였다. 김단은 마차에 오를 때까지 자신에게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다.과거의 그녀였다면 그가 나타나자마자 바로 그의 품에 안기며 그를 향해 미소 지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너무나도 차갑게 변해버렸다. 자신을 외면하는 그녀가 소한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그는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큰 실수를 저질렀는지를 다시금 깨달았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꽉 쥐며 굳게 결심했다.그는 잃어버린 것을 되찾기 위해 이미 어떤 대가든 치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반 시진 후, 김단은 방 안에서 멍하니 앉아 있었다.그러자 숙희가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아가씨?”김단은 정신을 차리고 숙희를 바라보았다.“무슨 일이냐?”“두 도련님께서는 모두 돌아가셨습니다.”김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방금 전 발생한 일을 되새겨 보았다. 그녀는 소한이 오랫동안 계획해 온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자신을 선택했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과거에도 그는 소가를 위해, 전하를 위해 심지어 임원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그러나 그녀만은 제외였다.그녀는 소한이 자신의 어머니를 걱정하는 척하며 평양관저로 따라온 것도 단지 자신의 동정심을 얻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상처
김단은 아무 말 없이 소한을 부축하며 걸었다. 궐에서 나오는 길은 유난히 길고 고요했다. 그들의 발걸음은 무겁고 느렸으며 말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다.궐문에 도착했을 때 소한의 마차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는 아마도 말을 타고 왔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의 상태로 다시 말을 타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된 김단은 곁에 있던 경씨에게 부탁했다.“도령님, 장군님을 먼저 집으로 모셔다 주실 수 있겠습니까?”그러자 소한이 놀란 듯 김단을 바라보며 물었다.“내게 약을 발라주지 않겠다는 것이오?”김단도 당황해하며 되물어 보았다.“소가에는 의원이 없습니까?”소한은 김단의 물음에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의 의도가 너무 노골적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어머니께서 내가 또 다쳤다는 걸 아시면 얼마나 걱정하겠소? 그러니 그냥 근처에서 치료받을 것이오. 낭자는 신경 쓰지 말고 먼저 돌아가시오.”김단은 그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그렇다면, 먼저 평양관저로 함께 가서 약을 바르시죠.”소한은 그녀의 제안에 놀란 기색을 내비쳤다.“불편하지 않겠소?”김단은 그를 바라보며 단호히 말했다.“괜찮습니다.”그렇게 소한은 김단과 함께 평양관저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들을 맞이한 것은 김단의 몸종 숙희였다.소한을 발견한 그녀는 깜짝 놀라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그러자 김단이 숙희를 달래는 듯한 목소리로 차분히 말했다.“숙희야, 장군님을 객실로 안내해 주거라. 나는 약을 준비하러 가야겠구나.”그녀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김단의 지시를 따랐다.객실에 혼자 남은 소한은 조심스럽게 상의를 벗고 등을 드러냈다. 그의 등에는 형벌로 인한 상처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그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등을 바라보며 오늘의 형벌이 생각보다 가볍지 않았음을 깨달았다.하지만 그는 김단이 이 상처를 보면 마음 아파할 것이라 생각하며 기대감으로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잠시 후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약을 들고
긴장감이 맴도는 분위기 속에서 전하는 이해 안 되는 듯한 어투로 물었다,“조선의 장군인 네가, 수많은 전공을 세운 네가, 원하는 여인 하나 얻는 것이 그리 어렵단 말이냐? 어찌 김단 하나 때문에 수년간 공들여 쌓아온 모든 것을 무너뜨리려 하는 것이야? 그 낭자가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느냐?”전하의 말투는 엄중했지만 그 속에는 실망과 안타까움이 섞여 있었다.그러자 소한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그렇습니다.”전하는 눈썹을 찌푸리며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김 의원, 들었소?”그 순간 소한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조용히 서있는 김단이 있었다. 그녀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담담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소한은 그녀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가 이 모든 대화를 들었다는 사실에 당황했지만 그녀의 표정에서는 어떠한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소한은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물었다.“김단, 왜 이곳에 있는 것이오?”그녀는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와 무릎을 꿇고 전하에게 예를 올렸다.“소녀 김단, 전하를 뵙습니다.”전하는 손짓으로 그녀를 일으키며 말했다.“일어나거라. 오늘 발생한 일에 대해 자세히 말해 보거라.”김단은 소한을 보지 않기 위해 시선을 정면에 고정한 채 차분하게 사건의 전말을 설명했다. “제가 직접 목격한 바는 없습니다. 하지만 민대부를 제외하고는 영의정 댁 장남의 부인에게 감히 손을 댈 수 있는 자는 없을 것입니다.”전하는 그녀의 말을 듣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맹 낭자의 상처를 확인하기 위해 두 명의 궁녀를 보내겠다. 평양관저에서 확인해 보도록 하거라.”학대의 이유가 무엇이든 맹영지는 필시 중전의 친척이었다. 만약 폭력을 가한 사람이 민대부라고 할지라도 이는 중전의 가문을 모욕하는 행위와 다름없었기에 결코 그를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전하는 소한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어쩌면 네 죄가 묻힐 수도 있겠구나.”민씨 가문의 잘못이 드러나게 된다면
소한은 곧바로 병사들과 함께 어서재에서 물러났다.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때는 이미 향 한 자루가 탈 정도의 시간이 흘러 있었다.소한이 걸어 들어오는 것을 본 전하는 하던 일을 멈추고 냉랭하게 물었다.“영의정이 너를 더 때리라고 명하지 않았느냐?”소한은 조용히 전하 앞으로 걸어가 무릎을 꿇고 허리를 곧게 세운 채 대답했다.“전하의 깊은 뜻을 아는 자입니다. 그러니 더 심한 처벌을 요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전하는 코웃음을 치며 다시 물었다.“그렇다면, 내 뜻이 무엇이더냐?”소한은 고개를 들어 전하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전하께서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대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을 겁니다. 그래서 영의정을 불러 제가 벌을 받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게 하셨죠. 그리고 동시에 제가 전하의 사람이라는 것을 명확히 하셨습니다. 전하께서는 영의정이 이 사실을 눈치채기 바라신 것 아니었습니까?”전하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손에 들고 있던 붓을 책상에 내던지며 소리쳤다.“이 불경한 자식아! 내 너를 아낀다고 해서 이렇게 제멋대로 행동해도 된다고 생각하느냐? 영의정 저택 외에 또 어디에 첩자를 심어두었느냐?”소한은 눈을 내리깔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3품 이상의 모든 관료의 집에 첩자를 두었습니다.”그 말을 들은 전하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소한을 가리켰지만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였다.그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짓더니 한참 동안 방안을 서성이었다.잠시 후 그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다시 한번 소리쳤다.“네가 감히! 그렇게 많은 곳에 첩자를 심어두고 무슨 일을 꾸미려는 것이냐? 이렇게 행동하면 내가 소씨 집안을 멸문시켜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소한은 여전히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조용히 말했다.“저도 위험한 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다섯 해 전, 저희 소가는 거의 멸문 당할 뻔했습니다.”그 해 소하가 지닌 병권은 다른 집안의 탐욕스러운 먹잇감이 되었고 그로 인해 조정의 문
김단은 그제야 잊고 있었던 민태훈을 떠올렸다.그녀는 맹영지를 몸종에게 맡기고 민태훈 곁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허벅지에 박힌 은침을 뽑아냈다.침이 빠져나가자마자 민태훈은 마치 고통에서 해방되기라도 한 듯 온몸의 긴장이 풀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한 가닥의 은침이 이토록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큰 마님은 김단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그녀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고 말이다.그때 경씨가 마차를 몰고 도착했다. 김단과 몸종이 맹영지를 부축하며 걸어 나오자 경씨는 놀란 얼굴로 다가와 안부를 물었다.“낭자, 괜찮소?”방금 전 김단이 영의정 저택에서 곤란한 상황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소한은 급히 그녀가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덕분에 한발 늦게 도착한 경씨는 자신이 더 일찍 김단을 챙기지 못한 것을 자책하며 말했다.“내가 미처 신경 쓰지 못했소.“김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럽게 대답했다.“저는 괜찮습니다. 먼저 맹 아가씨를 평양관저로 모시고 가야 할 것 같습니다.“그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김단과 몸종이 맹영지를 부축하며 마차에 오르자 경씨는 바로 마차를 출발 시켰다.김단은 마차에 오르기 전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조용히 서 있는 소한에게로 향했다. 소한은 그녀를 바라보며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김단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려버렸다. 소한은 그런 김단의 뒷모습을 씁쓸하게 바라보더니 옅은 미소를 지었다.그 후 소한은 곧장 궁으로 향했다.어서재에 도착한 그는 곧바로 무릎을 꿇고 앉아 오늘 영의정 저택에서 있었던 일을 전하에게 보고했다.그의 말을 들은 전하는 노여움을 감추지 못하며 소한을 꾸짖었다.“네가 감히 허락도 없이 영의정 저택을 침입했단 말이냐? 정말 대담하구나! 내가 너를 벌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느냐?”그러나 소한은 그저 묵묵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벌을 달게 받겠습니다.“전하는 그의 담담한 태도에 더 분노하며 외쳤다.“민가
김단은 민씨 부인의 말에 담긴 의미를 정확히 파악했다.보내서는 안 된다라...오늘 이 자리에서 맹영지뿐만 아니라 김단 자신도 민가를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김단은 민씨 부인이 자신의 아들을 위해 이런 결정을 내릴 줄 몰랐다.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어떤 선택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김단의 눈빛이 서서히 날카롭게 변해갔다. 그녀의 내면에서는 분노와 실망이 교차했다.큰 마님은 민씨 부인의 표정을 보고 심각한 상황임을 직감했다.맹영지의 몸에는 증거가 남아있었고 그 사실이 세간에 알려지게 된다면 엄청난 파장을 불러올 것이다.하지만 지금 김단을 보내지 않는다면 그녀는 분명 궐로 들어가 이 일을 고발할 게 뻔했다.지금 김단을 적으로 돌린다면 그에 따른 후과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큰 마님은 사랑하는 손자를 바라보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김단을 보내면 민태훈의 입지가 위험해질 것이고 보내지 않는다면 민가 전체가 위태로워질 수 있었다. 그러기에 그녀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그때, 한 하인이 급히 달려와 외쳤다.“큰 마님! 소 장군님께서 오셨습니다!”소 장군? 소한을 말하는 것인가?그의 이름이 언급되자 큰 마님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소한이 이렇게 빨리 이곳에 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김단도 그가 왜 이곳에 나타났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녀가 생각에 잠긴 사이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큰 마님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뵙게 되어 송구합니다.”모두들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보이는 것은 당당하게 정원으로 걸어 들어오는 소한의 모습이었다.“소한, 주인의 허락도 없이 들어오다니! 대체 영의정 저택을 무엇으로 보시는 것이오? 이곳은 마음대로 들락날락할 수 있는 곳이 아니오.”소한은 그 말을 한 사람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이런 무례를 범한 것은 제 잘못입니다. 곧 전하 앞에서 사죄드리지요.”그는 정원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더니 큰 마님에게 다가가 정중히 인사했다.
머뭇거리는 그들의 모습에 김단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마님, 만약 지금 이 자리에서 저를 막으신다면 저는 곧장 궐로 가 이 모든 일을 고할 것입니다.”그녀의 말은 칼날처럼 날카로웠고 그 안에는 확고한 결의가 담겨 있었다.김단의 말이 끝나자 민가의 사람들은 긴장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큰 마님은 눈썹을 찌푸리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그녀는 김단이 단순한 의원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김단은 진산군 댁의 적녀이자 평양원군의 의남매이다. 그리고 그녀는 소가의 두 형제와도 깊은 인연이 있었다. 지금 그녀를 적대시하는 것은 곧 여러 권세 있는 가문을 적으로 만드는 것과 다름없었다.큰 마님은 민태훈을 바라보았다. 그는 고통에 찬 얼굴로 땀을 흘리며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그녀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다.그러나 동시에 마음속에는 김단에 대한 의심도 피어올랐다. 만약 그녀의 말이 과장된 것이라면 민씨 가문은 부당한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한참을 고민하던 큰 마님은 굳게 결심한 듯 민씨 부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네가 직접 확인해 보거라. 만약 낭자의 말이 거짓이라면 반드시 그에 따른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민씨 부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김단과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김단은 조심스럽게 맹영지의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녀의 팔 안쪽에는 선명한 멍 자국이 여러 개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민씨 부인은 숨을 들이켰다.“이런 상처가… 정말로…”그녀가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자 김단은 차분하게 말했다.“다리 쪽은 더 심각합니다. 보시겠습니까?”민씨 부인은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이 상처, 정말로 태훈이의 짓입니까?”김단은 잠시 침묵하더니 그녀의 말에 대답해 주었다.“제가 직접 본 것은 아닙니다.”그 말에 민씨 부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우리 태훈이는 절대 그럴 애가 아닙니다. 어릴 적부터 착하고 작은 생명도 소중히 여기던 사람이었단 말입니다.”김단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지만 겉으로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공주의 이름이 거론되자 민씨 일가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스쳤다. 그러나 큰 마님은 여전히 태연한 표정을 유지한 채 입을 열었다.“낭자가 공주의 명을 받고 우리 영의정 저택에 들어와 병자를 돌보는 것은 알겠소. 허나 공주의 허락 없이 사람을 해치는 것은 무엄한 일이오. 공주라 할지라도 국법을 지켜야 하지 않겠소? 그러니 함부로 공주의 이름을 빌어 협박하지 마시오.”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김단은 박수를 치며 말했다.“참으로 옳은 말씀이십니다.”민가의 큰 마님은 김단이 드디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자신을 치켜세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김단의 입가에는 더욱 짙은 미소가 떠올랐고 눈빛에는 경멸이 스쳤다.“공주님께서도 국법을 지키셔야 하는데 민가의 사람들은 더욱 그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민가의 사람들은 일제히 소리를 높이며 반박했다.“그게 무슨 뜻이오? 우리 민씨 일가는 예로부터 법을 준수하며 국법에 어긋나는 일을 한 적이 없소!”“김 의원께서 자신의 잘못을 덮기 위해 우리 민가에 누명을 씌우려는 것 아니오?” 김단은 그저 조용히 서서 그들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두려운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김단의 이런 차분한 태도가 큰 마님의 신경을 건드렸다.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김단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큰 며늘 아씨는 중전마마의 친조카이시며 공주자가의 사촌이십니다. 그래서 제가 그분의 치료를 맡게 되었지요. 원래는 상태가 호전되고 있었으나 오늘 갑자기 증상이 악화되었습니다. 이는 분명 누군가가 큰 며늘 아씨의 회복을 방해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의원으로서 제 환자가 이곳에서 고통받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으니 제가 데려가야겠습니다. 만약 제 앞을 가로막으신다면 다음번에는 민대부님의 다리에 은침을 꽂아 버릴 것입니다.”이에 큰 마님은 지팡이를 바닥에 세게 내리치며 외쳤다.“허튼소리 마시오! 낭자의 의술이 부족해서 생긴 일을 왜 우리한테 덮어씌우려는 것이오?”“맞소! 무슨 명의의 제자라더니... 다 헛소리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