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채이는 탈의실 거울 앞에서 옆으로 돌아섰다.
푸른색 원피스 자락이 무릎 아래에서 부드럽게 흔들렸다. 허리를 조이지 않는데도 모양이 잡혔다. 좋은 옷에는 자신이 몰랐던 여유가 있었다. 숨을 참을 필요가 없는 옷이라는 게 좋았다.
직원이 커튼을 열며 물었다.
“어떠세요?”
“너무 예뻐요.”
채이는 이번에는 가격부터 묻지 않았다. 가족 소개 행사에 입을 옷을 사러 왔고, 비용은 미리 합의했다. 마음에 드는 옷 앞에서까지 죄송할 일은 없었다.
소파에 앉아 있던 도진이 고개를 들었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채이는 치맛자락을 살짝 잡았다.
“별로예요?”
“아닙니다.”
“그럼 왜 대답이 늦으세요?”
도진이 휴대폰을 완전히 내려놓았다.
“잘 어울려서 보고 있었습니다.”
직원의 입가가 올라갔다. 채이는 거울 쪽으로 눈을 돌렸다. 입어본 색깔을 확인하는 척했지만 귀가 먼저 붉어졌다.
“이걸로 할게요. 앉아봐도 되나요?”
직원이 의자를 가져왔다. 채이는 앉아서 무릎이 편한지, 팔을 들었을 때 당기지 않는지 확인했다. 도진은 그 과정을 흥미롭게 보았다.
“실용성 검사군요.”
“세 시간 예쁘려면 삼십 분 뒤부터 힘들면 안 되거든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직원은 어울리는 가방과 구두를 가져왔다. 채이는 낮은 굽 구두를 골랐고 작은 귀고리 하나를 대봤다. 밝은 진주가 얼굴 옆에서 조용히 빛났다. 세리가 준 무거운 금색 귀고리와는 달랐다.
추가로 나온 목걸이에는 가격표가 없었다. 채이는 잠깐 넋을 놓고 보다가 용도를 물었다.
“이것도 가족 식사 때 하는 거예요?”
직원이 설명하려는데 도진이 말했다.
“원하시면 일상에도 하셔도 됩니다.”
“회사 프린터 앞에서 이걸 하고 걸린 종이 뽑으면 좀 이상할 것 같아요.”
직원이 웃음을 참았다. 채이는 목걸이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오늘은 이 귀고리가 더 좋아요.”
도진은 다른 것을 더 고르라고 하지 않았다. 결제하는 동안 채이는 휴대폰에 적어둔 송금 계좌를 확인했다. 숙부와의 정산 약속까지 삼십 분 남았다.
“같이 갈까요?”
그의 질문에 채이는 고개를 저었다.
“제 돈 빌린 일이니까 제가 끝낼게요. 문제가 생기면 연락드릴게요.”
“어디서 만나는지만 알려주세요.”
“호텔 카페요. 저쪽 창문에서 보이는 곳.”
도진은 건너편을 확인하고 가방을 건넸다. 채이는 포장 상자 중 원피스가 든 것만 차에 두고, 작은 쇼핑백을 들었다. 거울 앞에서 마음에 들었던 자신을 조금 더 오래 데리고 있고 싶었다.
***
윤경수는 채이가 앉기도 전에 커피잔을 옆으로 밀었다.
“갑자기 돈이 어디서 났냐?”
그 옆의 세리는 채이가 들고 온 쇼핑백부터 봤다. 로고를 확인한 눈길이 손가락으로 옮겨갔다. 혼인신고 뒤 함께 고른 단순한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너 그거 뭐야?”
채이는 반지를 가리지 않았다.
“내 얘기는 오늘 정산부터 끝내고 할게.”
“어른이 물으면 대답부터 해야지.”
경수의 말에 채이는 준비한 서류를 꺼냈다. 원래 차용증 사본, 송금할 계좌를 확인한 문자, 장수현의 검토를 받아 준비한 정산서였다.
“오천만 원입니다. 차용증에 적힌 금액이고, 추가 이자 약정은 없습니다. 이 돈 받으시면 그 차용에 관한 채무는 모두 정리되는 걸로 확인해주세요.”
경수가 종이를 들었다.
“가족끼리 이게 뭐냐. 내 사인을 또 받아?”
“빌릴 때도 썼잖아요. 끝날 때도 써야죠.”
세리가 컵 받침을 건드렸다.
“면제해준다니까 그것도 못 해놓고. 언니가 기회 줬을 때 잘하지.”
채이는 가방에서 확약서를 꺼냈다. 종이에 접힌 자국이 두 줄 남아 있었다.
“조건이 맞선을 망쳐서 혼담을 끝내는 거였지. 난 실패했다고 말했어. 그래서 면제해달라고 안 해. 갚겠다고 온 거야.”
세리는 돈 이야기를 하려던 입을 다물었다. 채이가 빚을 없애달라며 부탁해야 가능한 대화가 있었다. 오늘은 그 자리가 비어 있었다.
경수는 정산서를 살피다가 채이를 봤다.
“네 엄마는 알아?”
“제가 갚는다고 말씀드렸어요.”
“무슨 돈인지도 아시고?”
“불법적인 돈 아닙니다. 숙부께 빌린 돈을 돌려드리는 데 필요한 건 이쪽이에요.”
채이는 금액과 계좌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무례해 보일까 봐 목소리를 낮췄지만 말을 거두지는 않았다.
경수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는 화면을 보고 통화를 끊었다. 곧바로 같은 번호가 다시 떴다. 채이는 모르는 이름을 훔쳐보지 않았다. 다만 그가 정산서에 사인하는 속도가 빨라진 것은 알 수 있었다.
“입금부터 해라.”
“서명 확인했어요. 지금 보낼게요.”
채이는 그 앞에서 계좌와 예금주를 다시 읽었다. 숫자를 입력한 손가락이 조금 굳었다. 오천만 원을 보내고도 잔액이 남는 화면이 아직 낯설었다.
송금 완료.
경수의 전화에 알림이 떴다. 채이는 정산서의 수령 확인란까지 받아 자신이 가져갈 원본을 봉투에 넣었다. 경수에게도 사본 한 부를 건넸다.
“그동안 빌려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말은 진심이었다. 급할 때 돈을 빌린 덕에 어머니가 필요한 치료를 받았다. 그 고마움과 앞으로도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는 의무는 같은 것이 아니었다.
채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세리가 쇼핑백을 턱으로 가리켰다.
“그거 선물 받았어? 누구한테?”
“행사 때 쓸 거야.”
“못 알아들어서 묻는 줄 알아?”
“지금 설명하고 싶지 않아.”
처음으로 대답을 거절하는 것이 돈을 갚는 일보다 어려웠다. 채이는 봉투를 가방 깊이 넣었다. 세리의 시선이 날카로워져도 자리에 다시 앉지 않았다.
경수의 전화가 또 울렸다. 세리는 아버지가 통화하러 일어나는 틈에 몸을 기울였다.
“다음 주에 태주 쪽 가족 자리 있거든. 아빠 초대받았어. 너 혹시 거기 갈 생각 하는 거 아니지?”
채이는 눈을 들었다.
“난 초대받았어.”
세리의 입술이 조금 벌어졌다.
“누가 널?”
“초대한 분한테 가서 확인해.”
차가운 말투를 연습해온 건 아니었다. 더 말하면 다시 허락을 구하게 될 것 같아 짧게 끊었을 뿐이었다. 채이는 목례하고 카페를 나왔다.
***
집에 돌아와 채이는 가장 먼저 정산서를 스캔했다. 송금 내역과 같은 폴더에 넣고, 원본은 방 안 서류함에 보관했다. 어머니에게는 빚을 전액 갚았다는 메시지와 정산 완료 부분만 찍은 사진을 보냈다.
정숙의 답장은 조금 늦었다. 수고했어. 오늘은 밥 꼭 먹어.
채이는 그 짧은 말 앞에서 한참 화면을 봤다. 돈을 갚으면 날아갈 것 같을 줄 알았다. 실제로는 의자에 앉아 있고 싶었다. 오래 들고 있던 짐을 내려놓자 손바닥이 뒤늦게 아픈 느낌이었다.
문밖에서 노크가 들렸다.
“식사는 했습니까?”
채이는 눈가를 손등으로 한번 쓸고 문을 열었다.
“아직이요.”
도진은 들고 있던 작은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호텔 라운지에서 먹었던 것과 비슷한 딸기 케이크가 들어 있었다.
“오늘은 먹어도 되는지 묻지 않으셔도 됩니다.”
채이는 그를 봤다. 첫날 자신이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밥부터 먹으래요, 엄마가.”
“그러면 순서대로 하죠.”
그가 주방 쪽으로 비켜섰다. 채이는 서류함을 닫고 따라나갔다.
세리에게서 전화가 왔지만 받지 않았다. 대신 소리를 끄고 식탁 위에 뒤집어두었다. 오늘은 밥이 식기 전에 먹고 싶었다.
사무실 달력에 여름휴가 표시가 하나둘 늘어났다. 채이는 빈자리에 놓인 선풍기 소리를 들으며 지난 캠페인의 체험 기록을 열었다. 재출범안에 기존 실적을 인용하기 전에, 문의 유형별로 고객 경험을 나눠보려던 참이었다.민재가 정산 담당자에게 받은 파일을 공유했다. 유성컴퍼니의 체험완료 명세였다.“종료 보고서랑 건별 목록 같이 왔어요. 총 삼천 건이라는데요.”“고마워요. 설치 기록이랑 먼저 맞춰볼게요.”채이는 파일을 내려받아 읽기 전용 사본을 만들었다. 예전에 표본에서 발견했던 이상이 마음에 남아 있었다. 그때는 서로 다른 집계 기준 때문일 수도 있어 필요한 자료를 추가 요청해둔 상태였다. 이번에는 종료 명세 전체가 들어왔다.첫 화면은 깨끗했다. 체험완료 삼천 건. 건당 십만 원. 청구액 삼억 원. 굵은 글씨 아래로 마스킹된 고객 번호와 접수 번호, 완료일이 이어졌다.채이는 고객 번호로 정렬하다가 스크롤을 멈췄다. 같은 번호가 네 번 나왔다. 제품을 여러 번 썼을 수도 있었다. 그녀는 곧바로 이상이라고 표시하지 않고 설치 번호를 확인했다.설치 번호도 같았다.완료일만 달랐다. 하루 간격으로 두 줄, 다음 주에 두 줄. 채이는 자기 쪽 고객 응대 화면에서 해당 설치 건을 열었다. 방문은 한 번이었다.“민재 씨, 이 접수 번호 기억나요?”그가 의자를 밀고 다가왔다.“어, 이거 취소 사유 분류할 때 봤어요. 설치 공간 때문에.”“그건 다른 번호죠?”“끝 두 자리만 달라요. 같은 고객이 다시 신청해서 묶었거든요.”채이는 두 화면을 나란히 놓았다. 고객이 다시 신청한 건과 이전에 취소한 건이 업체 보고서에서는 각각 체험완료로 남아 있었다. 민재가 자
“돈이 생기면 겁나는 것도 같이 없어질 줄 알았어요.”채이는 도진에게 잡힌 손을 내려다보았다. 세리 앞에서는 또박또박 말했는데, 집에 돌아오니 첫 문장부터 목이 잠겼다. 도진은 손에 힘을 조금 더해주었다.“그런데 오늘은 좋은 가방 들고 있는 게 들킨 일 같더라고요.”“네가 좋아하는 걸 쓴 건데.”“알아요. 그래서 더 화났어요. 나한테도.”채이는 웃으려다 그만뒀다. 도진이 물잔을 조금 가까이 옮겨줬다. 잠깐 마시고 나니 속도가 늦춰졌다.“엄마 수술할 때요. 병원비도 무서웠는데, 그다음 날이 더 무서웠어요. 회복하는 동안 밥은 어떻게 해드리지, 병원은 누가 같이 가지, 내가 휴가를 다 쓰면 어떡하지.”도진의 표정이 조용해졌다. 채이는 그가 듣고 있다는 걸 확인한 뒤 말을 이었다.“돈만 있으면 다 해결된다는 뜻은 아닌데, 돈이 없으면 해결할 방법부터 줄어들잖아요.”그녀는 엄지로 손가락 마디를 문질렀다. 예전에 버스 시간을 계산하던 습관이었다. 도진이 그 움직임을 보았지만 멈추게 하지는 않았다.“퇴근하고 병원에 가면 저녁 시간이 애매했어요. 엄마는 제가 먹고 왔다고 하면 믿는 척했어요. 나중에는 알더라고요. 제가 늘 같은 편의점 봉투를 들고 와서.”“식사할 돈을 아낀 거야?”“처음엔요. 나중에는 그냥 제대로 먹을 시간이 없었어요. 어디 앉으면 그때부터 일어나기 싫을 것 같아서.”도진은 아무 말 없이 그녀 곁으로 조금 가까이 앉았다. 채이는 그의 어깨에 기댔다가 다시 바로 앉았다. 오늘은 얼굴을 보고 말하고 싶었다.“숙부한테 부탁하러 가던 날, 문 앞에서 말을 세 번
백화점 생활용품 매장에서 채이는 얇은 여름 이불 두 장을 번갈아 만졌다. 어머니는 에어컨 바람을 오래 쐬면 춥다며 자꾸 끄곤 했다. 가볍고 세탁하기 쉬운 쪽을 고른 뒤 계산대에 섰다.“윤채이.”익숙한 목소리에 돌아보니 세리가 서 있었다. 새로 산 듯한 선글라스가 머리 위에 얹혀 있었다. 손에 든 쇼핑백은 하나였지만, 시선은 채이의 가방과 신발 사이를 빠르게 움직였다.“세리 언니.”“여기서 다 보네. 이제 생활 수준이 맞아지니까 만나는 데도 바뀐다?”채이는 직원에게 포장을 부탁한 뒤 세리를 보았다.“엄마 이불 사러 왔어.”“큰엄마 것도 여기서 사? 많이 편해졌나 보네.”세리의 말투는 웃고 있었지만 채이는 그 웃음에 맞춰 웃지 않았다. 계산을 마치고 쇼핑백을 받자 세리가 옆 카페를 가리켰다.“잠깐 앉아. 할 말 있어.”“어떤 얘긴데?”“친척끼리 잠깐 차도 못 마셔?”채이는 시간을 확인했다. 어머니를 만나기로 한 시간까지 삼십 분 정도 남아 있었다.“십오 분만.”세리는 대답하지 않고 먼저 걸었다. 채이는 그 뒤에서 쇼핑백 손잡이를 고쳐 잡았다. 예전 같으면 어머니에게 늦는다고 전화부터 했을 것이다. 오늘은 알람을 맞췄다.카페에 앉자 세리가 메뉴판을 밀었다.“네가 사. 잘살잖아.”“내 차는 내가 살게.”그녀는 직원에게 각자 계산을 요청했다. 세리의 눈썹이 올라갔다. 하지만 주변에 사람이 많아서인지 금방 웃는 얼굴을 만들었다.“많이 컸네. 옛날에는 이런
성북동 저택의 여름 식사는 해가 기울고 나서야 끝났다. 친척 몇 사람이 현관에서 인사를 나누는 동안 채이는 식탁 위에 남은 유리잔을 살폈다. 얼음이 녹아 받침 바깥으로 물이 흘러 있었다. 무심코 냅킨을 접어 닦는데 태석이 그녀를 불렀다.“그건 두고 나와라. 너희 둘은 차나 한 잔 더 마시고.”채이는 접었던 냅킨을 내려놓았다. 도진이 옆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친척 중 한 사람이 웃으며 말했다.“다음 모임은 채이가 음식도 하나 정해봐. 이제 집안 안주인 노릇도 배워야지.”채이는 웃음을 잃지 않고 대답했다.“날짜를 먼저 알려주시면 가능한지 보고 말씀드릴게요. 제가 주말 현장 일정이 생길 때가 있어서요.”“회사 일이 아직 그렇게 바빠?”“제가 맡은 일이 아직 많이 남았어요.”덧붙일 설명이 떠올랐지만 채이는 거기서 멈췄다. 도진도 대신 설명하지 않았다. 현관문이 닫히고 나서야 그가 손등으로 그녀의 팔을 살짝 건드렸다.“잘 말했어.”채이가 작게 웃었다. 가끔은 길게 이해시키려 하지 않아도 됐다.태석은 응접실이 아니라 작은 테라스에 앉아 있었다. 옆에는 화분 몇 개가 놓여 있었고, 낮은 줄기에 토마토가 달려 있었다. 며칠 더 익어야 할 듯한 초록 열매 사이에서 빨간 한 알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이거 직접 키우세요?”채이가 묻자 태석이 턱을 들었다.“물은 내가 준다.”옆에서 차를 놓던 직원이 조용히 웃고 물러났다. 도진이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물 너무 많이 주셔서 한 번 옮겨 심었다면서요.”“회복 중인 노인한테 그런 것까지 보
“대표님 손에 물고기 있다.”월요일 아침, 민재의 목소리에 팀원들이 고개를 들었다. 채이는 아이스커피를 입에 댄 채 멈췄다. 사내 소식란에 부산 협력사 방문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도진이 센터 대표와 악수하는 사진이 맨 앞이었다.사진 아래 댓글은 업무 성과보다 밴드에 먼저 반응했다. ‘귀여운 거 좋아하시는구나.’ ‘직접 고르셨을까.’ 민재는 화면을 확대하다가 웃었다.“이거 저랑 같은 겁니다. 조카가 맨날 붙이는 거.”유나가 몸을 돌렸다.“채이도 그거 붙였었잖아. 출장 다녀온 날.”채이는 커피를 내려놓았다. 빨대 끝에서 얼음이 달그락거렸다.“센터에서 받았어.”“거기 밴드까지 홍보용으로 뿌렸어?”“아니. 구급함에 있던 거야. 기사님 댁 아이가 좋아해서 사뒀다고 하셨어.”그건 사실이었다. 다만 도진의 손가락에 누가 붙였는지는 사실에 포함하지 않았다. 유나는 제 턱을 괴고 대표 사진을 다시 보았다.“다행이다. 대표님이 물고기 무늬 콕 집어 고르셨으면 오늘 회의 때 집중 못 할 뻔.”현수가 지나가다 화면을 보고 웃었다.“센터 구급함이 아주 알차더라. 나도 파도 붙였어.”그가 팔목 안쪽을 보여주었다. 이미 밴드는 뗐지만 직사각형으로 희미한 자국이 남아 있었다. 채이는 하마터면 안도의 한숨을 소리 내 쉴 뻔했다.민재가 대표 사진 옆에 현수의 손을 갖다 댔다.“세트네요. 이번 출장 복지는 밴드였습니까?”“복지는 없고 작업대 모서리는 날카로웠어.”은정이 커피를 들고
일곱 시 이십 분, 채이는 자기 객실에서 출장 가방을 들고 나왔다. 거울을 세 번 확인했지만 남들이 알아볼 만큼 달라 보이는 건 없었다.엘리베이터에서 현수를 만났다. 그는 종이컵을 두 개 들고 있었다.“아침 먹었어?”“아직요.”“이거 미숫가루. 조식 먹을 시간 없겠다.”채이가 고맙다며 컵을 받았다. 혹시 표정이 이상한지 눈치를 보았는데, 현수는 휴대폰에 뜬 설치 사진만 들여다보고 있었다.“어제 기사님이 보내주셨는데 이것 좀 봐. 이 집은 연결부가 아예 안 보여.”일 얘기가 나오자 채이의 어깨가 저절로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녀는 컵을 가방 옆주머니에 끼우고 사진을 확대했다.“사진으로 판단 못 하는 집은 전화 상담으로 넘어가는 경로가 있어야겠어요. 사진 안 올리면 다음 화면으로 못 가는 건 빼고요.”“그러면 전화가 늘 텐데.”“방문 취소가 줄어드는지 같이 봐야죠.”호텔 문을 나설 때 휴대폰이 울렸다. 도진이었다.‘잘 내려갔어?’채이는 현수가 차를 찾는 사이 답장을 보냈다.‘네. 현수 과장님과 이동해요.’보내고 보니 회사 메신저와 다를 게 없었다. 한 줄을 더 쓰려는데 현수가 차 문을 열었다. 채이는 휴대폰을 넣고 탔다.센터의 작은 회의실에는 어제 만난 기사 둘과 상담 담당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채이는 새 안내지를 나눠주었다. 기사 한 명이 고개를 갸웃했다.“예상 비용이라고 하면 또 정확히 얼마냐고 물으실 텐데요.”“정확한 비용을 알 수 없는 경우는 왜 그런지 적었습니다. 추가 확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