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사촌 대신 맞선에 나간 윤채이는 그 자리에서 회사 대표 서도진에게 정체를 들킨다. 해고를 각오한 그녀에게 돌아온 건 1년짜리 계약결혼 제안. 빚을 갚기 위해 계약서부터 고쳐 쓴 채이는 낮에는 그의 부하 직원, 밤에는 아내가 되는데...
Ver más윤채이가 남의 이름으로 할 일은 딱 하나였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바쁜 남자에게, 다시는 만나기 싫은 여자로 남는 것.
성공하면 오천만 원의 빚이 사라졌다. 실패해도 월요일에는 출근해야 했다. 그 두 가지가 동시에 문제가 될 줄은, 아르덴호텔 라운지의 남자가 고개를 들기 전까지 몰랐다.
***
금요일 오후, 회의실 화면에는 웃는 고객의 얼굴이 떠 있었다.
“반응은 좋습니다. 체험 신청도 늘었고요.”
이현수 과장이 다음 장을 넘기려 하자 채이가 손을 들었다.
“설치 취소 문의도 같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화면 아래에 가려졌던 표를 열었다. 민재가 급하게 프로젝터 선을 건드려 화면이 한번 꺼졌다. 누군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채이는 출력물을 가운데로 밀었다.
“여기 파란색 칸이요. 신청할 때 무료라고 생각했는데 설치 조건에 따라 비용이 생긴다는 걸 나중에 안 분들입니다.”
“그건 상세 안내에 있잖아.”
“네. 그런데 신청 버튼보다 아래에 있어서 안 읽는 거죠.”
현수가 볼펜으로 표를 짚었다.
“버튼 위로 올리면 신청이 줄 수도 있어.”
“설치 직전에 취소하면 기사님 일정하고 상담 시간이 같이 나갑니다. 신청 수만 남고 실제로 써본 사람은 없어져요.”
김은정 팀장이 팔짱을 풀었다.
“그럼 어디까지 바꾸자는 거야?”
채이는 준비해 온 종이를 한 장 더 냈다. 작은 식기세척기 옆에 설치 공간, 추가 비용, 회수 신청 방법을 같은 크기로 놓은 화면이었다.
“고객이 결제 전에 알았으면 좋았겠다는 내용을 신청 전에 보여주려고요. 일주일만 비교해 보면 어떨까요?”
팀장은 맨 위에 날짜와 검토 의견을 적었다.
“초안 올려. 유나 씨가 문구 보고, 현수 과장이 운영 쪽 확인하고.”
“네.”
채이가 종이를 챙기는 동안 휴대폰이 여섯 번째 울렸다. 화면의 이름은 윤세리였다.
회의실을 나와 파일을 팀 공유 폴더에 올렸다. 제목 뒤에 초안과 작성 날짜를 붙이고 나서야 전화를 받았다.
“언니, 나 일하는 중이야.”
“그 일 월급으로 우리 아빠 돈 언제 갚을 건데?”
귀에 대고 있던 전화가 갑자기 차가워졌다.
“오늘 저녁에 잠깐 와. 너한테 좋은 일이야.”
***
세리가 내민 종이에는 숙부의 서명이 있었다.
채무 면제 확약서. 채무자 윤채이. 금액 오천만 원.
채이는 종이를 테이블에 내려놓지 않고 마지막 줄까지 읽었다. 어머니 수술비와 회복하는 동안의 생활비로 빌린 돈이었다. 카드 두 장과 예금을 먼저 비웠지만 그것으로는 모자랐다. 숙부는 차용증을 써야 서로 편하다고 했고, 채이는 그때 고맙다는 말을 세 번 했다.
“정말 숙부가 아시는 거야?”
“아빠가 사인한 거 안 보여? 내일 나 대신 나가서 혼담만 깨면 돼.”
“그냥 언니가 안 만나겠다고 해.”
“우리 아빠 거래처랑 얽혔어. 내가 싫다고 하면 아빠 체면이 뭐가 돼.”
채이는 다시 조건을 읽었다. 상대가 혼담을 진행하지 않겠다는 뜻을 전달하면 면제한다. 참석만으로 되는 게 아니었다.
“상대가 계속 만나자고 하면?”
“그렇게 안 만들면 되지. 넌 일할 때 말 잘하잖아.”
세리가 쇼핑백을 발끝으로 밀었다. 안에는 붉은 원피스와 금색 귀고리가 있었다. 채이 취향과는 멀었다. 발목이 불편할 만큼 굽이 높은 구두도 들어 있었다.
“대표라며. 이름이 뭔데?”
“바빠서 대리인만 줄줄이 보내던 사람이야. 이번엔 본인이 나온대. 사진은 못 받았어.”
“이름은 받았을 거 아니야.”
“비서가 예약해놨어. 아르덴 라운지, 두 시, 윤세리. 직원한테 그거 말하면 돼.”
세리는 대답 대신 채이의 귀 옆으로 귀고리를 대봤다.
“다정하게 웃지 마. 돈 많이 쓴다고 해. 일도 결혼하면 그만두고 싶다고 하고.”
“언니는 왜 그렇게까지 싫은데?”
“무서운 사람이래. 결혼할 집 회사까지 다 들여다본대. 피곤하잖아.”
소파 옆에 쌓인 쇼핑백에 법인카드 영수증이 붙어 있었다. 세리가 채이의 시선을 알아차리고 발로 쇼핑백을 안쪽으로 밀었다.
“못 하겠으면 말아. 아빠도 이번 달엔 돈 들어올 데가 있어야 한댔어.”
채이는 휴대폰을 켰다. 어머니가 보낸 사진에는 베란다에서 핀 작은 꽃이 있었다. 그 아래에는 다음 치료일에 반차를 내지 말라는 문자가 붙어 있었다. 혼자 다녀올 수 있다는 말이었다.
은행 앱의 잔액을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어제 봤고, 오늘은 월급날이 아니었다.
“원본 줘.”
채이가 손을 내밀었다.
“맞선을 깨면 오천만 원 전액. 내가 듣기로는, 이 아니라 글씨대로 할 거야.”
세리는 잠깐 입술을 삐죽였다가 종이를 넘겼다.
“그럼. 가족끼리 속이겠어?”
***
토요일 호텔 화장실에서 채이는 귀고리 한쪽을 다시 걸었다. 무거워서 고개를 돌릴 때마다 딸랑거렸다. 거울 속 여자는 일주일 전 편의점에서 할인 도시락을 집던 자신과 꽤 달랐다.
그래도 이름까지 바뀌는 건 아니었다. 삼십 분만 버티면 된다. 휴대폰에는 세리의 지시가 새로 와 있었다.
밥 먹을 때 직원한테 좀 까칠하게 굴어. 그런 거 남자들이 싫어해.
채이는 답장을 쓰지 않았다. 맞선남에게 미움을 사는 일과 일하는 사람을 괴롭히는 건 다른 일이었다. 안내 직원이 예약 이름을 확인했다.
“윤세리 님, 이쪽입니다.”
채이는 타인의 이름에 고개를 끄덕였다. 구두 뒤축이 발꿈치를 긁자 직원이 그녀에게 보폭을 맞췄다.
창가 테이블에는 검은 수트 차림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휴대폰을 뒤집어 놓는 손, 잔을 옆으로 비켜두는 동작, 누군가 오는 순간 정확히 올라오는 시선. 채이는 멈췄다.
태주이노베이션 대표이사 서도진.
엊그제 전사 메일 맨 위에 있던 이름. 자신의 보고서에 ‘분모를 다시 확인할 것’이라는 의견을 남긴 사람. 작년 말 실무 보고 자리에서 잘못 잡힌 상담 인력 감축안을 두고 십 분 동안 질문했던 사람.
남자가 일어났다.
“앉으시죠.”
그가 모를 수도 있었다. 직원이 수백 명이었다. 그 보고 때 채이는 안경을 썼고, 오늘은 귀가 곧 떨어질 정도로 화려했다. 사람이 귀고리에 가려 보이지 않는 기적도 아주 없지는 않을 것이다.
채이는 앉다가 무릎으로 테이블 다리를 쳤다. 찻잔이 달그락거렸다.
“괜찮습니까?”
“아유, 네. 이런 데 의자가 좀 불편하네요.”
평소보다 반 음 높은 목소리가 나왔다. 직원이 메뉴를 건네자 채이는 끝쪽에 적힌 가격부터 봤다. 세리가 말한 ‘제일 비싼 거’는 두 사람의 주말 장보기 비용을 합친 것보다 비쌌다.
“저는…… 이 디저트 세트요.”
“차는 어떤 것으로 드릴까요?”
“카페인 없는 걸로 부탁드려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는 왜 했어. 채이는 지나가는 직원의 앞치마 끈이 의자에 걸리지 않도록 의자를 당겨주다가 눈을 감았다. 망치는 데도 재능이 필요했다.
도진은 아무 말 없이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저, 미리 말씀드릴 게 있어요.”
채이가 등을 폈다.
“결혼하면 일은 안 할 거고요. 집안일도 못 해요. 품위 유지비가 월 삼천만 원은 필요한데요.”
발끝이 구두 안에서 오그라들었다. 도진의 눈썹이 조금 올라갔다.
“삼천만 원.”
“최소요. 그리고 주말에는 늦잠을 자니까 아침 식사 같은 건 기대하시면 안 돼요.”
아침 식사. 고르고 골라 낸 결격 사유가 아침 식사였다.
도진이 천천히 잔을 내려놓았다. 그 소리가 금요일 회의실에서 들었던 볼펜 소리처럼 선명했다.
“견적은 받았고요.”
채이는 손가락에 힘을 줬다. 그가 거절하기만 하면 됐다. 월요일에 마주치지 않도록 층계를 쓰면 될 일이다.
도진의 입가가 움직였다.
“윤 대리, 오늘은 이 기획안으로 밀고 가는 겁니까?”
사무실 달력에 여름휴가 표시가 하나둘 늘어났다. 채이는 빈자리에 놓인 선풍기 소리를 들으며 지난 캠페인의 체험 기록을 열었다. 재출범안에 기존 실적을 인용하기 전에, 문의 유형별로 고객 경험을 나눠보려던 참이었다.민재가 정산 담당자에게 받은 파일을 공유했다. 유성컴퍼니의 체험완료 명세였다.“종료 보고서랑 건별 목록 같이 왔어요. 총 삼천 건이라는데요.”“고마워요. 설치 기록이랑 먼저 맞춰볼게요.”채이는 파일을 내려받아 읽기 전용 사본을 만들었다. 예전에 표본에서 발견했던 이상이 마음에 남아 있었다. 그때는 서로 다른 집계 기준 때문일 수도 있어 필요한 자료를 추가 요청해둔 상태였다. 이번에는 종료 명세 전체가 들어왔다.첫 화면은 깨끗했다. 체험완료 삼천 건. 건당 십만 원. 청구액 삼억 원. 굵은 글씨 아래로 마스킹된 고객 번호와 접수 번호, 완료일이 이어졌다.채이는 고객 번호로 정렬하다가 스크롤을 멈췄다. 같은 번호가 네 번 나왔다. 제품을 여러 번 썼을 수도 있었다. 그녀는 곧바로 이상이라고 표시하지 않고 설치 번호를 확인했다.설치 번호도 같았다.완료일만 달랐다. 하루 간격으로 두 줄, 다음 주에 두 줄. 채이는 자기 쪽 고객 응대 화면에서 해당 설치 건을 열었다. 방문은 한 번이었다.“민재 씨, 이 접수 번호 기억나요?”그가 의자를 밀고 다가왔다.“어, 이거 취소 사유 분류할 때 봤어요. 설치 공간 때문에.”“그건 다른 번호죠?”“끝 두 자리만 달라요. 같은 고객이 다시 신청해서 묶었거든요.”채이는 두 화면을 나란히 놓았다. 고객이 다시 신청한 건과 이전에 취소한 건이 업체 보고서에서는 각각 체험완료로 남아 있었다. 민재가 자
“돈이 생기면 겁나는 것도 같이 없어질 줄 알았어요.”채이는 도진에게 잡힌 손을 내려다보았다. 세리 앞에서는 또박또박 말했는데, 집에 돌아오니 첫 문장부터 목이 잠겼다. 도진은 손에 힘을 조금 더해주었다.“그런데 오늘은 좋은 가방 들고 있는 게 들킨 일 같더라고요.”“네가 좋아하는 걸 쓴 건데.”“알아요. 그래서 더 화났어요. 나한테도.”채이는 웃으려다 그만뒀다. 도진이 물잔을 조금 가까이 옮겨줬다. 잠깐 마시고 나니 속도가 늦춰졌다.“엄마 수술할 때요. 병원비도 무서웠는데, 그다음 날이 더 무서웠어요. 회복하는 동안 밥은 어떻게 해드리지, 병원은 누가 같이 가지, 내가 휴가를 다 쓰면 어떡하지.”도진의 표정이 조용해졌다. 채이는 그가 듣고 있다는 걸 확인한 뒤 말을 이었다.“돈만 있으면 다 해결된다는 뜻은 아닌데, 돈이 없으면 해결할 방법부터 줄어들잖아요.”그녀는 엄지로 손가락 마디를 문질렀다. 예전에 버스 시간을 계산하던 습관이었다. 도진이 그 움직임을 보았지만 멈추게 하지는 않았다.“퇴근하고 병원에 가면 저녁 시간이 애매했어요. 엄마는 제가 먹고 왔다고 하면 믿는 척했어요. 나중에는 알더라고요. 제가 늘 같은 편의점 봉투를 들고 와서.”“식사할 돈을 아낀 거야?”“처음엔요. 나중에는 그냥 제대로 먹을 시간이 없었어요. 어디 앉으면 그때부터 일어나기 싫을 것 같아서.”도진은 아무 말 없이 그녀 곁으로 조금 가까이 앉았다. 채이는 그의 어깨에 기댔다가 다시 바로 앉았다. 오늘은 얼굴을 보고 말하고 싶었다.“숙부한테 부탁하러 가던 날, 문 앞에서 말을 세 번
백화점 생활용품 매장에서 채이는 얇은 여름 이불 두 장을 번갈아 만졌다. 어머니는 에어컨 바람을 오래 쐬면 춥다며 자꾸 끄곤 했다. 가볍고 세탁하기 쉬운 쪽을 고른 뒤 계산대에 섰다.“윤채이.”익숙한 목소리에 돌아보니 세리가 서 있었다. 새로 산 듯한 선글라스가 머리 위에 얹혀 있었다. 손에 든 쇼핑백은 하나였지만, 시선은 채이의 가방과 신발 사이를 빠르게 움직였다.“세리 언니.”“여기서 다 보네. 이제 생활 수준이 맞아지니까 만나는 데도 바뀐다?”채이는 직원에게 포장을 부탁한 뒤 세리를 보았다.“엄마 이불 사러 왔어.”“큰엄마 것도 여기서 사? 많이 편해졌나 보네.”세리의 말투는 웃고 있었지만 채이는 그 웃음에 맞춰 웃지 않았다. 계산을 마치고 쇼핑백을 받자 세리가 옆 카페를 가리켰다.“잠깐 앉아. 할 말 있어.”“어떤 얘긴데?”“친척끼리 잠깐 차도 못 마셔?”채이는 시간을 확인했다. 어머니를 만나기로 한 시간까지 삼십 분 정도 남아 있었다.“십오 분만.”세리는 대답하지 않고 먼저 걸었다. 채이는 그 뒤에서 쇼핑백 손잡이를 고쳐 잡았다. 예전 같으면 어머니에게 늦는다고 전화부터 했을 것이다. 오늘은 알람을 맞췄다.카페에 앉자 세리가 메뉴판을 밀었다.“네가 사. 잘살잖아.”“내 차는 내가 살게.”그녀는 직원에게 각자 계산을 요청했다. 세리의 눈썹이 올라갔다. 하지만 주변에 사람이 많아서인지 금방 웃는 얼굴을 만들었다.“많이 컸네. 옛날에는 이런
성북동 저택의 여름 식사는 해가 기울고 나서야 끝났다. 친척 몇 사람이 현관에서 인사를 나누는 동안 채이는 식탁 위에 남은 유리잔을 살폈다. 얼음이 녹아 받침 바깥으로 물이 흘러 있었다. 무심코 냅킨을 접어 닦는데 태석이 그녀를 불렀다.“그건 두고 나와라. 너희 둘은 차나 한 잔 더 마시고.”채이는 접었던 냅킨을 내려놓았다. 도진이 옆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친척 중 한 사람이 웃으며 말했다.“다음 모임은 채이가 음식도 하나 정해봐. 이제 집안 안주인 노릇도 배워야지.”채이는 웃음을 잃지 않고 대답했다.“날짜를 먼저 알려주시면 가능한지 보고 말씀드릴게요. 제가 주말 현장 일정이 생길 때가 있어서요.”“회사 일이 아직 그렇게 바빠?”“제가 맡은 일이 아직 많이 남았어요.”덧붙일 설명이 떠올랐지만 채이는 거기서 멈췄다. 도진도 대신 설명하지 않았다. 현관문이 닫히고 나서야 그가 손등으로 그녀의 팔을 살짝 건드렸다.“잘 말했어.”채이가 작게 웃었다. 가끔은 길게 이해시키려 하지 않아도 됐다.태석은 응접실이 아니라 작은 테라스에 앉아 있었다. 옆에는 화분 몇 개가 놓여 있었고, 낮은 줄기에 토마토가 달려 있었다. 며칠 더 익어야 할 듯한 초록 열매 사이에서 빨간 한 알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이거 직접 키우세요?”채이가 묻자 태석이 턱을 들었다.“물은 내가 준다.”옆에서 차를 놓던 직원이 조용히 웃고 물러났다. 도진이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물 너무 많이 주셔서 한 번 옮겨 심었다면서요.”“회복 중인 노인한테 그런 것까지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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