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은 윤우현의 메시지에 답장을 보냈다.[아쉽게도, 요즘은 새로운 작품 구상 자체가 어려울 것 같아요. 미안해요.]윤우현은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괜찮아요. 다만 언제든 다시 그리고 싶은 생각이 생기면 꼭 나한테 먼저 얘기해줘요.]유정은 짧게 웃으며 대답했다.[알겠어요. 약속할게요.]다음 날 아침.유정은 부동산 중개인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오늘 부동산 소유권 이전 등기를 하러 가야 한다는 내용이었다.아침 식사를 마치고 외출하려는데, 차가 웬일인지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센터에 전화를 걸자, 담당 직원이 한 시간 뒤에 도착할 수 있다고 했다.그때, 유정의 곁에 차 한 대가 멈췄고, 백림이 내리며 다가왔다.“무슨 일이야?”유정은 어쩔 수 없이 말끝을 흐렸다.“차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아.”백림은 시계를 슬쩍 확인한 뒤 말했다.“예약한 시간 다 됐어. 내 차 타고 같이 가자.”유정은 움직이지 않자,백림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직원 기다릴 거야, 아니면 택시 잡을 거야? 지금 시간에 택시 잡으려면 한 시간은 걸릴걸?”유정은 백림의 말이 맞다는 걸 알았기에 결국 그의 차에 타기로 했다. 백림은 조수석에서 만화책 한 권을 꺼내 건넸다.“이건 돌려줄게. 나는 새로 주문했어.”그 책은 유정이 오래전부터 간직해온, 그녀에게 의미 깊은 소장본이었다. 유정은 책의 표지를 조심스레 손끝으로 쓰다듬다가 조백림을 향해 말했다.“소셜 네트워크에서 후원은 그만해. 물 흐려지게 하지 마.”백림은 그런 유정을 슬쩍 쳐다보고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 네가 하라면 해야지.”유정은 어젯밤 윤우현이 언급했던 일이 떠올라 의심스러워졌다.“혹시, 너 내 전화 막았어?”백림은 눈썹을 살짝 올렸다.“이번엔 눈치 빠른데?”“진짜 네가 그런 거야?”유정이 놀란 듯 되물었다.백림은 낮게 웃었다.“걱정하지 마. 귀찮은 일은 내가 다 처리해. 너는 그냥, 무대 뒤에서 조용히 빛나기만 하면 돼.”유정은 속으로 생각했다.‘귀찮은 일이긴 해도 그
전에 감히 자신이 칠성의 와이프라고 주장하던 1호 팬 계정을 막지 누구를 막겠는가?유정은 말했다.“만화는 그냥 보면 되지, 무슨 후원을 그렇게 해? 돈 많아?”[나 원래 돈 많아.]백림은 태연하게 답하자 유정은 너무 맞는 말에 할 말을 잃었다. 잠시 말을 잇던 유정은 문득 뭔가 떠올랐다.“설마, 만화 판권 얘기도 너야?”백림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이렇게 훌륭한 작품, 더 많은 사람에게 보여줘야지. 내 와이프가 얼마나 대단한지, 모두가 알아야 하니까.]“누가 네 와이프야?”유정이 바로 쏘아붙였으나, 백림은 그저 담담하게 웃을 뿐이었다. 그가 말하는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유정아, 다시 만화 그리고 싶지 않아? 너 하고 싶은 일, 내가 다시 할 수 있게 해줄게.]유정은 그 말에 순간 말을 잃었다.그때 비서가 서류를 들고 들어와 사인을 요청했고, 유정은 정신을 차려 말했다.“나 일 있어, 전화 끊는다. 제발 진정하고 내 소셜 네트워크에서 그만 장난쳐.”그러자 백림이 또 말했다.[진심이야. 그 누구보다도, 네 새 작품을 다시 보고 싶은 건 나니까.]유정은 시선을 떨군 채 길게 속눈썹을 내렸다. 말투는 차분했지만, 눈빛엔 감정이 묻어났다.“끊을게.”전화를 끊은 유정은 한참 멍하니 앉아 있다가, 문득 서류에 사인해야 한다는 걸 떠올리고 마음을 다잡았다.‘별생각 말자, 일에 집중하자.’하지만 백림은 전혀 진정되지 않았다.이번엔 만화 사이트에 직접 들어가 또다시 후원 폭탄을 터뜨렸다. 결국 칠성은 단숨에 사이트의 후원 랭킹 1위로 올라섰고, 2위와의 차이는 무려 20억 원 이상 벌어졌다.월간 랭킹은 물론, 연간 랭킹, 사이트 종합 랭킹까지 그야말로 올킬이었다. 그리고 닉네임은 여전히 칠성남편이었다.이 사태에 만화를 안 보던 사람들까지 사이트로 몰려들었고, 사이트 자체도 트래픽 폭주로 검색어 상위권에 올랐다.유정은 그걸 보며 어이없어 중얼거렸다.‘후원금의 절반은 사이트 수익으로 빠지는데, 정말 돈 쓸데가 없는 건가?’그러
조백림은 차 안에서 한참 동안 기다렸지만 유정에게서 아무런 답장이 오지 않자, 결국 차 문을 열고 내렸다.집으로 올라갔다가, 유정에게서 받아온 만화책이 차 안에 그대로 있다는 걸 떠올리고는 다시 내려가 들고 왔다.샤워를 마치고 침대 머리맡에 기대앉은 그는 몇 개의 메시지를 확인하고 답장을 보냈다.문득 눈 끝에 책상 위에 놓인 만화책이 들어오자, 남자는 책을 들어 펼쳤다.그런데, 한 장 두 장 넘기다 보니 금세 빠져들었다.유정의 콘티 구성은 탄탄하고 박진감 있었고, 그가 몰랐던 또 다른 세계가 그 안에 펼쳐져 있었다.내용은 상상력을 한껏 자극하는 판타지였고, 이야기 구조도 탄탄해 흡인력이 대단했다.한 장, 또 한 장 손이 멈추질 않았다. 시간 가는 줄도 몰랐고, 책 한 권을 다 읽고 나니 어느새 새벽 네 시가 넘은 뒤였다.남자는 묘한 흥분에 잠도 오지 않아, 서재로 가 컴퓨터를 켜고 원본을 찾아보기 시작했다.이 만화는 꽤 오래된 작품이라 자료 찾는 데 애를 먹었지만, 결국 온라인에서 원본을 찾아냈다.일부 삭제되었던 장면들은 오히려 제본된 책보다 더 강렬했고, 감정을 뒤흔들 만큼 강한 장면들도 있었다.그렇게 웹상 원본까지 전부 읽어버렸고, 하늘은 벌써 밝아오고 있었다. 그렇게 백림은 꼬박 밤을 새웠다. 만화 속 세계를 따라가다 보니, 그는 또 다른 유정을 마주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낯설고도 익숙한 그런 유정이었다.오전, 유정은 회의실에서 막 나오는 길이었다. 그때 낯선 번호로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칠성, 안녕? 나 예전에 너 담당했던 편집자 류수야. 기억나?]유정은 잠시 멍했지만 곧 반가운 표정으로 말했다.“류수님, 안녕하세요!”그는 유정의 첫 번째 담당 편집자였다.이어 류수는 정중하게 말을 이었다.[네가 예전에 연재했던 그 만화, 누가 애니메이션 판권을 사고 싶어 해.][지금 우리 사이트랑 그쪽 제작사에서 협의 중인데, 작가로서 네 협조가 좀 필요할 것 같아서 연락했어. 괜찮을까?]유정은 더욱 놀랐다. 그 작품은 이미
영상 통화가 연결되자, 화면엔 외할아버지 서정후가 뜨더니 마당 한가운데 서 있는 모습이 나왔다.유정이 보내준 두툼한 패딩을 입고 있었고, 큰 소리로 외쳤다.[유정아, 무슨 일이냐?]유정은 의아해서 물었다.“이렇게 추운데 마당에서 뭐 하세요?”“장석호랑 그 노인네들이랑 한잔하고 있지!”말하면서 휴대폰을 돌려 마당 풍경을 보여줬다.‘헉!’마당 한복판에 테이블 하나 놓여 있고, 그 위에는 동동주와 각종 고기, 술, 그리고 동그란 구리냄비 속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전골이 올려져 있었다.그 주변엔 네댓 명이 둘러앉아 흥겨운 표정으로 술잔을 주고받고 있었다.그중 한 어르신이 휴대폰 화면 속 유정을 발견하곤 손을 흔들며 말했다.[유정이 왔냐, 밥은 먹었어?]유정은 따뜻한 미소로 손을 흔들었다.“칠촌 할아버지, 요즘 건강은 어떠세요?”[좋지! 아직은 팔팔해!]서정후가 다시 휴대폰을 자기 쪽으로 돌리더니 유정을 보며 말했다.[그래, 무슨 일 있냐?]이에 유정은 어색하게 웃었다.“아뇨, 별일 아니에요. 계속 드세요. 술은 좀 줄이시고요.”“그래, 네 말 들을게. 딱 두 잔만 마실게!”화면 속 서정후는 웃는 얼굴로 말했다.“그 조백림이랑은 이제 완전히 끝난 거냐? 정리했으면 바로 경성으로 와. 우리 둘이 오붓하게 설 쇠자.”그 말에 유정은 고개를 끄덕였다.“칠촌 할아버지랑 장석호 할아버지랑 이야기 계속하세요. 너무 늦게 주무시진 마시고요.”[알았어, 알았어!]전화를 끊은 뒤, 유정은 휴대폰을 옆에 던지듯 내려놨다.‘역시 엄마 말은 한마디도 믿으면 안 되네. 저게 고독하다고? 저게 외로움을 타는 거라고?’옷을 갈아입고 샤워하고 나온 유정은, 욕실 문을 열자마자 다시 울리는 벨 소리에 고개를 들자, 또 외할아버지였다.영상 통화를 받으니, 이번엔 술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조용한 마당 구석이었고, 말소리는 멀리서 아련하게 들렸다.서정후가 물었다.[아까 전화 건 거, 혹시 무슨 얘기 하려고 했던 거냐?]술도 놓고, 일부러 자리까지 피해
놀란 것도 잠시, 유정은 금세 따라 나갔다.“조백림, 당장 안 멈춰?”계단을 막 오르던 서은혜가 유정을 노려보며 말했다.“또 왜 그렇게 소란이야?”백림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오해 마세요, 어머님. 유정이가 제가 가는 게 아쉬워서 그러는 거예요. 붙잡느라 다급해서요.”유정은 그 자리에서 백림을 발로 차서 굴려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서은혜는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그랬구나. 괜찮아, 일이 있으면 얼른 다녀와.”그러고는 유정을 돌아보며 꾸짖듯 말했다.“너도 좀 철들어. 남자한테 너무 들러붙지 말고.”유정은 기가 차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고, 백림은 웃음을 살짝 참으며 말했다.“그러면 먼저 가볼게요.”그러고는 유정을 바라보며 덧붙였다.“일 끝나면 전화할게.”그러나 유정은 딱 잘라 말했다.“필요 없어. 그 시간엔 나 자고 있을 거야.”백림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그래도 걸 거야.”유정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맘대로 해.”백림이 떠난 뒤, 서은혜는 단단히 화가 난 얼굴로 유정을 방 안으로 데리고 들어왔다.“너희 둘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백림이는 지금 최대한 낮은 자세로 나오고 있잖아. 그런데 왜 넌 그렇게 끝도 없이 몰아붙이는 거야?”유정은 소파에 앉아 차분히 말했다.“엄마, 엄마야말로 태도가 문제 있는 거 아냐? 예전에 나랑 삼촌네 사이 안 좋았을 땐 항상 그쪽 편만 들었잖아.”“그러다 겨우 좀 달라진 줄 알았는데, 이제 와서 또 조백림 편이야.”“항상 이성적으로 판단한다고 말은 하지만, 정작 엄마가 다치게 만드는 건 제일 가까운 사람이라는 건 생각해 본 적 있어?”“내가 뭘 그렇게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 적어도 제일 먼저 내 편을 들어야 할 사람은 엄마잖아.”이 세상 부모는 둘 중 하나였다. 자식이 무슨 짓을 해도 감싸고 도는 과보호형, 아니면 자기는 이성적이라는 자의식에 빠져 자식과 남이 다투면 무조건 자식부터 혼내는 유형.전자는 끝없는 편애고, 후자는 위선적인 공정
유정은 몸을 돌려 책상에 기대섰다.“잘됐네. 나 너한테 물어볼 게 있어. 이나현이 몽유병처럼 날 놀라게 한 일, 네가 시킨 거지?”오늘 점심, 한 고객과 식사 자리를 가졌는데 우연히 예전에 살던 아파트 이웃이었던 나현을 만났다.고객이 말하길, 예전 대학 시절에 이나현과 같은 과에 같은 기숙사 방을 썼다고 했다.그땐 조용하고 얌전한 성격이었는데, 지금은 완전히 일 처리 빠른 커리어우먼이 되었다며 웃었다.유정은 무심히 물었다.“그분, 원래 몽유병 같은 증상 있어요?”고객은 단호히 말했다.“없었어.”그 말을 들은 순간부터, 모든 게 머릿속에서 딱 맞아떨어졌다. 더는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그제야 백림도 유정이 왜 이토록 날을 세우는지 감이 오는 듯, 미간을 좁혔다.“그 사람이 널 놀래킨 거야?”유정은 비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계속 그렇게 모르는 척해?”백림은 가볍게 웃었다.“정말 내가 시킨 거 아니야. 나 이나현 씨는 알아. 2,3년 전쯤 우리 회사 일 도와줬었어.”“그때 그 사람이 집을 살까 생각했거든. 갑자기 왜 그 집을 사려는 거냐고 물어서, 솔직하게 말했지.”“여자친구랑 싸웠고, 그 여자가 바로 너고, 네가 그 집 맞은편에 산다고.”“그랬더니 그녀가 집은 안 팔아도 된다고, 자기가 도와주겠다고 했어. 그 이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진 나도 몰라.”남자는 이미 나현에게 유정이 자기 여자친구라고 밝혔고, 어느 정도의 눈치는 충분히 있어서 유정을 해칠 일은 안 하리라 확신했다. 그랬기에 큰 걱정도 안 했다.며칠 뒤 유정이 다시 이사했다는 얘기를 들었고, 그는 고마운 마음에 나현에게 전화를 걸어 감사 인사도 전했다.나현이 어떻게 설득했는지 궁금해서 물었지만, 그녀는 끝까지 말하지 않았고, 그래서 더 묻지 않았다.유정은 일단 그 말에 조금 마음이 누그러졌고, 차분히 물었다.“그래서 오늘 우리 집엔 왜 온 거야?”백림은 방 안을 둘러보며 부드럽게 말했다.“네가 어릴 때 살던 집이 궁금했어. 이건 믿을 수 있겠어?”유정이 눈썹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