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시연과 임유민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나머지 일행은 그 자리에 서서 멍하니 구성혁과 소희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소희가 성혁을 알고 있는 것이 너무나 놀라웠고 또한 그들 사이의 관계가 아주 좋아 보였다.시연이 앞으로 걸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소희야, 너랑 선생님이 서로 아는 사이였어?”소희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우리 선생님과 구성혁 선생님이 오랜 친구셨어. 몇 년 전, 나와 선생님이 구성혁 선생님댁에서 잠시 지냈었고 너무 오래된 일이라 구성혁 선생님이 저를 잊으셨을까 봐 이야기하지 않은 거야.”소희가 디자인을 배우기 시작한 첫 스승은 바로 성혁이었다. 그의 영향으로 소희의 스타일은 항상 고전적인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성혁은 웃으며 말했다. “내가 널 어떻게 잊을 수 있겠니? 그때 널 네 스승한테서 데려와 제 제자로 만들고 싶었어. 너도 옷 만들기를 좋아했으니까. 아쉽게도 네 스승님은 너를 놓아주기 싫어했지.”소희는 맑고 투명한 눈빛으로 성혁을 바라보았다. “제 마음속에는 선생님도 제 스승님이세요.”성혁이 물었다. “너 지금도 학교 다니고 있니?”“이미 졸업했어요. 선배의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일하고 있어요.” 소희는 공손하게 대답하자 성혁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네 선배도 잘 됐구나. 너희 두 사람 모두 너희 스승님께 큰 자랑이야.”이야기가 이어지자 구성혁은 다소 쓸쓸해졌다. 도경수 선생의 제자들은 많지만, 경수의 이 손기술은 이제 전승되기 어렵게 되였다.하인이 차를 가져오자, 구성혁은 소시연과 다른 이들에게도 자리에 앉으라고 했다.그리고 소희는 소개했다. “오늘은 시연을 데리고 선생님을 만나러 왔어요. 시연은 제 여동생이자 함께 일하는 친구고 얘가 참여하는 버라이어티 쇼에서 선생님을 출연시키길 바라고 있어요. 여러 번 방문했지만 성공하지 못했잖아요.”“그리고 선생님이 출연을 원하지 않으신다는 걸 알고 다른 스승님을 찾으려 했지만, 제작진이 동의하지 않았어요.”성혁은 시연을 바라보자 시연은 그에게 기대와
구성혁은 생각에 잠긴 것 같아 보였고 소희는 계속해서 성혁을 설득했다. “저는 믿어요, 이 프로그램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선생님의 독특한 수놓은 작품을 사랑하게 될 거예요.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을 거고, 그들은 희망의 씨앗이 될 겁니다.”“선생님은 그 씨앗들 가운데 좋은 것을 골라 심어서 재능을 키워야 하셔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선생님의 기술은 정말로 잊힐 거고, 우리 모두가 그걸 매우 아쉬워할 거예요. 그리고 가장 아쉬워할 사람은 바로 선생님이실 거고요.”성혁은 소희를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소희야, 너 언제부터 이렇게 말을 잘하게 된 거야? 너 예전에는 항상 혼자 있기 좋아하고 말 별로 안 했잖아. 사실 아까 내가 알던 너랑 너무 달라서 알아보지 못할 뻔했어.”임유민이 끼어들어 말했다. “소희 선생님이 이렇게 많은 말을 하는 건 정말 드문 일이에요!”유민의 말에 모두가 웃음을 참지 못했고 성혁은 잠시 생각한 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맞아. 아마 내가 너무 고집스러워서 계승자를 찾지 못한 걸지도 몰라.”소시연이 들떠서 말했다. “그럼 선생님 동의하시는 거예요?”성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동의할게. 프로그램 제작진에게 가서 말해요, 나 이 프로그램 촬영에 참여하겠다고.”“정말요!” 시연은 감개무량하여 펄쩍 뛰었고 흥분이 가득한 얼굴을 한 채 성혁에게 고개 숙여 고맙다고 연신 인사했다.“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해요!”유민과 소찬호도 서로 눈을 맞추며 기뻐했고 소희가 웃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구성혁 선생님.”성혁은 웃으며 말했다. “만약 이 프로그램을 통해 마음에 드는 제자를 찾게 된다면, 나야말로 너에게 감사해야지.”“분명히 찾으실 수 있을 거예요!” 소희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한편, 안단희와 소동은 밖에서 소희와 시연 일행이 나오기를 기다렸는데 한참 동안 기다려도 안 나오자 초조 해졌다. 단희는 조급해하며 말했다. “왜 이렇게 오래 걸리지?”소동은 미소 지으며 말
소유는 소시연의 손을 잡고 달려와서 흥분된 목소리로 물었다. “구성혁 선생님이 정말 동의하신 거예요?”“네, 모두 소희 덕분이에요!” 시연이 웃으며 대답하자 소유는 소희를 바라보며 다소 미안해하며 말했다. “방금 제가 상황을 잘못 이해했어요, 미안해요.”“괜찮아요!”소희가 소유의 말에 대답을 하고는 다시 성혁을 바라보며 말했다. “프로그램도 촬영이 있고, 편집도 해야 해서 시간이 촉박해요. 저는 선생님과 시연의 협업을 방해하지 않고 돌아가겠습니다.”“이번에는 네가 갑자기 왔지만, 다음에는 미리 알려줘. 여기서 며칠 더 머물고.” 성혁이 아쉬워하며 말했다.“시간이 되면 꼭 다시 찾아뵐게요!”“그래, 네 스승님께 안부 전해줘.”“네!”소희는 성혁과 정중하게 작별 인사를 나누고, 임유민과 소찬호를 데리고 떠났다.시연은 그들을 따라 나와 카메라가 없는 곳까지 가서 감사의 말을 전했다. “소희야, 정말 고마워. 구성혁 선생님과 함께 열심히 배우고, 좋은 옷을 만들어볼게!”“주말에 TV에서 네 작품 보기를 기대할게.”소희는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시연은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힘내요!”“누나 힘내!”임유민과 소찬호가 각각 소시연을 격려하며 행복한 마음으로 소희를 따라 떠났다.시연은 그들이 차에 탄 뒤에야 돌아서자 시연의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는 소동의 이름이 떴다.전화를 받자마자 소동이 물었다. “시연아, 소희가 어떻게 구성혁 선생님을 설득한 거야?”시연은 아직까지도 비밀을 유지하고 있었다.“소희가 그냥 대단한 거야. 단 몇 마디 말로 구성혁 선생님 마음을 돌려서 출연하시도록 만들었으니까. 네가 불만이 있어도 소용없어. 어차피 소희가 너보다 뛰어난 건 사실이니까!” 소동은 화가 나서 말했다. “소희가 아무리 대단해도, 나는 걔보다 더 유명하고, 우리 소씨 집안도 나를 더 좋아해!”그러자 시연은 비웃으며 말했다. “소희는 그런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걸 꺼려 해. 만약 소희가 참여하고 싶었다면, 네 자리는 없었을
소희는 임유민과 소찬호를 데리고 차를 몰아 시내로 돌아갔는데 찬호는 가는 길 내내 흥분하여 똑같은 말을 여러 번 하였다.“소희 누나, 누나 너무 대단한 거 같아요! 원래도 리스펙 했지만 더 리스펙해요!”흥분한 찬호와 달리 유민은 침착하게 말했다. “내가 말했잖아. 소희 선생님이 해결 못할 일은 없을 거라고. 도움이 필요하면 소희 선생님에게 부탁하는 게 최고야!”둘이 소희를 입이 침이 마르게 칭찬하자 소희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너희가 생각하는 것처럼 대단하지 않아. 그저 우연히 구성혁 선생님을 알고 있을 뿐이었지.”소찬호는 앞좌석으로 몸을 기울이며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누나, 구성혁 선생님을 어릴 때부터 아셨어요? 그분이 누나를 제자로 받아들이려고 했다고요?”“응, 예전에 구성혁 선생님댁에서 잠시 지냈어. 제자 얘기는 사실 농담이야. 구성혁 선생님도 내가 스승님이 있단 걸 알고 계셨으니까.” 소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찬호의 질문에 대답했다.“그럼 누나의 스승님이 더 대단하신 거야?” 소희의 답을 듣자 찬호는 더욱 궁금해져 꼬치꼬치 캐물었다.“예술 분야에선 누가 더 대단한지 비교하는 건 의미 없어. 구성혁 선생님은 단지 세속에서 벗어나시기를 바라실 뿐이지.”두 사람이 대화하는 동안, 유민은 차창 밖을 바라보며 미간이 찌푸려졌는데 소찬호도 알고 있는 소희의 스승님을 왜 자신만 모르는지 굉장히 불쾌했다.찬호와 소희가 즐겁게 이야기하며 말했다. “누나, 둘째 큰 아빠 집에 가지 말아요. 엄마가 동의하시게 내가 잘 말하면 누나도 우리의 진짜 누나가 될 수 있어요!”유민은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눈썹을 치켜 올렸으나 소희는 웃으며 말했다. “네 엄마가 나를 인정할까?”“물론이죠! 내가 동의하면 우리 엄마도 동의할 거예요.” 찬호가 진지하게 대답하였으나 소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나 생각해 주는 마음은 고마워, 난 너희의 그런 마음만으로도 충분하니까 걱정하지 마, 나는 이미 너희랑 소시연의 누나니까.”찬호는 조용히 말했
소희가 운전하며 후방 거울로 임유민을 바라보았다.“무슨 일이야?” 소희가 묻자 유민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랑 소찬호 중에 누구랑 더 친해요?” 소희는 뜬금없는 유민의 질문에 잠깐 놀라다가 질문 수준이 너무 하찮아 웃음을 터뜨렸다. “이거 때문에 기분이 나빴던 거야?”“기분 나쁘기는 무슨, 그냥 물어본 거예요!” 유민은 강하게 부정했지만 다들 알다시피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었다.“너희 둘 다 내 동생이야, 똑같이 친해.” “동생이라니, 저희 삼촌이 들으시면 또 혼내시겠네요.”유민이 툴툴거리며 말했다.“네 삼촌이 네가 이렇게 쪼잔한 줄 알면 너도 혼낼 거야.”소희가 웃으며 말하자 유민은 눈을 굴리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위험에 처하면 그때도 이렇게 걱정해 줄 거예요?”소희가 눈썹을 치켜 올리며 되물었다.“아니면 어쩔 거라고 생각하는데?”유민은 자신이 납치되었을 때 소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생각을 하자 차창 밖을 바라보면서도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다.“됐어요, 어차피 앞으로 소희 선생님은 우리 임씨 가문의 사람이 될 거니까. 일단은 찬호랑 비교하지는 않을게요.” 임씨 저택임구택은 집에서 물건을 찾아가려고 차를 주차하고 거실로 들어가자, 집사인 진수미가 맞이했다. “둘째 도련님, 고운서 씨가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으셨어요.”구택은 거실에 앉아 있는 여성을 보고 놀랐다. “무슨 일이야?”고운서는 일어서며 부드럽게 웃었다. “오늘 이모님과 큰형님 내외가 돌아올 예정이라 왔어요. 어머님과 큰형님을 오랫동안 못 뵈어서 한번 뵈려고요.”구택은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형님께서 일이 생겨서 내일 밤 비행기로 바꿨으니까 기다릴 필요 없어.”“그럼…….”운서는 눈이 반짝반짝해서 말했다.“괜찮아요, 당신한테 할 얘기도 있어서 온 거니까.”운서는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 “잠깐 올라가도 돼요?”구택은 무표정으로 말했다. “따라와.”두 사람은 3층으로 올라가 방에 들어갔고 구택은 책장에서 문서를 찾으며 말했다
임구택은 차가운 미소를 머금으며 대답했다. “난 너를 죽이지 않을 거야. 넌 내가 미워할 가치도 없으니까 나와 소희한테서 멀리 떨어져 있으면 돼.”고운서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나는 이미 당신과 충분히 멀어졌어요. 소희를 괴롭힌 적도 없어요. 오늘 여기 온 건 주시후를 용서해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예요. 내 이모님을 만나게 해주고 바로 떠나게 해주세요.”“불가능해.” 구택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신후가 돌아오면 나는 신후의 목숨을 노릴 거고 소희가 입은 모든 상처를 신후에게 되돌려줄 거야.”운서는 계속해서 눈물을 흘리며 애원했다.“우리 거의 30년을 알고 지냈어요. 내 얼굴을 봐서라도 조금의 여지를 주지 않을 건가요?”“우리의 우정은 네가 소희를 다치게 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이미 끝났어.”“소희, 소희!” 운서는 가슴이 찢어질 것처럼 아파왔다.“당신 마음속에 정말 나에 대한 조금의 마음도 없나요?”구택은 차갑게 대답했다. “그런 어리석은 질문은 하지 마.”운서는 눈물을 흘리며 절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말이 맞아요. 내가 정말 어리석었네요.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당신에 대한 기대를 가졌던 거요.”운서는 뒷걸음질 치며 손에 스프링 나이프를 들고, 날카로운 칼날을 손목 위에 대고 울어서 빨갛게 된 눈으로 구택을 응시했다.“내가 시후 오빠가 소희에게 빚진 것을 대신 갚을게요. 다 갚으면 당신은 만족할껀가요?”구택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나를 협박하는 거야?”“당신이 나를 신경 쓰지 않는데, 내가 무엇으로 당신을 협박할 수 있겠어요?” 운서는 구택을 아프게 바라보며 물었다. “내가 목숨으로 소희에게 했던 죄를 물을 수 있으면 시후 오빠를 용서해 줄 수 있나요?”위험해 보이는 운서의 모습이었지만 운서를 바라보는 구택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어 보였다.“고운서,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그럼 한 번 더 바보가 돼 보죠.”운서는 결연한 표정으로 손목을 세게 그었다. 구택이 운
고운서가 가장 슬펐던 것은, 운서가 아무리 극단적인 행동을 해도 임구택이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구택은 사랑에 빠졌을 때는 온 마음을 다 바치는 타입이라, 다른 사람들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었다. 왜 소희만 그렇게 운이 좋은 것일까? 운서는 정말로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진수미는 운서의 손을 치료하고, 운서를 일으켜 세웠는데 운서는 피를 많이 흘려서 그런지 얼굴이 창백해졌고 일어나자마자 어지러움을 느꼈다. “침대에 누워서 좀 쉬게 해주세요.” 운서가 약한 목소리로 부탁하자 수미는 운서가 이렇게 많은 피를 흘리고 슬픔에 잠겨 있는 것을 보고, 잠시 마음이 약해져서 운서를 침실로 안내했다. 침대에 누워서 운서는 눈앞이 어두워지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으나 눈물이 다시 흘러내렸다.운서는 이전에 자주 임씨 저택을 방문했고, 직원들에게 음식이나 선물을 가져다 주곤 한 그녀의 친절함을 기억하는 수미는 운서를 불쌍히 여기며 잠시 쉬라고 권했다.구택의 이불은 사용하지 않고, 수미는 새 얇은 담요를 가져다 운서에게 덮어주었다. 운서는 눈을 감고 눈물을 흘리며 담요를 끌어올려 자신의 처참한 모습을 가렸다.수미는 거실을 정리하러 갔는데 거실 바닥에는 피가 튀었고, 방 안에는 약간의 피 냄새가 나 창문을 열고, 바닥 카펫도 새것으로 교체했다.……소희는 임씨 저택으로 차를 몰고 가자 임유민은 집 밖에 주차된 차를 보고 기뻐하며 말했다. “삼촌이 집에 계시네요!”소희는 내리고 싶지 않았지만, 유민에게 끌려 집 안으로 들어갔다.수미는 세탁실에서 고운서의 피 묻은 옷을 빨고 있었고, 이선 아주머니만 집에 있었다.“삼촌은 어디 계세요?” 유민이 묻자 이선 아주머니는 소희와 인사를 나눈 뒤 웃으며 대답했다.“둘째 도련님은 위에 계세요.”유민은 소희의 손목을 잡고 3층으로 올라갔다. “우리 둘이서 삼촌을 놀래켜요.”“삼촌이 놀랄 거라고 생각해?” 소희가 웃으며 물었다.“누나도 함께 있잖아요. 놀라지 않는다면 다른 의미로 서프라이
고운서는 소희를 보고 얇은 담요로 몸을 가렸고 눈썹을 치켜올리며 소희를 바라보았다.“임구택을 찾으러 왔나요? 오해하지 마세요, 우리 사이엔 아무 일도 없었어요.”임유민의 눈에 분노가 번졌다. “삼촌 어디 계세요?”“전화 받고 옆 서재로 갔어요.” 운서가 대답하자 유민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고 주먹을 꽉 쥐었다.“당장 우리 집에서 나가!” 운서는 기분 나쁜 표정으로 대답했다. “임유민, 예전엔 나한테 이렇게 대하지 않았잖아!”“당신이 삼촌을 유혹한 거야, 맞지?” 유민이 차갑게 말하자 운서는 비웃으며 대답했다. “그 사람한테 직접 물어봐!”운서가 말을 마치자, 거실에서 걸어 들어오는 구택을 보았다. “봐, 왔네!”소희는 뒤를 돌아보자 구택과 눈이 마주쳤는데 구택이 놀라 하자 소희의 마음이 무너졌고 유민은 분노에 차 구택을 노려보았다. “삼촌,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구택은 잠시 당황하며 침대 위의 고운서를 바라보았다. “넌 왜 여기 있는 거야?”“다행히 안 갔네.”소희가 낮은 목소리로 말하고는 밖으로 나가려 하자 구택은 당황하여 소희의 손목을 붙잡았다.“소희야,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내 손 놔!”소희가 차갑게 말하고는 손목을 돌려 그의 손에서 벗어나 빠르게 밖으로 나갔다.구택은 큰 보폭으로 그녀를 따라가자 소희는 갑자기 멈춰 서더니 눈가가 빨개진 채로 말했다.“나 따라오지 마. 당신이 무슨 말을 하든 난 하나도 듣고 싶지 않으니까!”구택의 눈엔 당황한 기색으로 가득 찼다.“소희야, 네가 지금 오해를 하고 있어!”“나 좀 진정하게 내버려 둬!”소희는 마음이 굉장히 복잡한 상태로 몸을 돌려 계단을 내려가자 구택은 주저 없이 소희를 따라나섰고 유민은 문에서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고민에 잠겼다.진수미는 운서의 옷을 빨아 건조한 뒤 가져왔는데 문 앞에 서있는 유민을 보고 놀랐다. “작은 도련님, 언제 오셨어요?”유민의 표정은 차가웠고 화가 나서 말했다. “운서 옷을 왜 빨아주는 겁니까? 당신은
“역시 이런 식으로 문제가 될 줄 알았어요.”은서는 싸늘한 눈빛으로 말하자, 손기수가 물었다.[이제 어떻게 하죠?]구은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장말숙한테 손자가 있잖아요. 그 애를 데려가요. 안전한 곳에 숨겨두고 지켜여.”이에 손기수는 비죽 웃으며 말했다.[그건 납치 아닌가요?]“이건 우리 엄마 뜻이에요.”은서는 그 말을 강조하듯 단호하게 말했다.“일만 제대로 끝내면, 보수는 두 배로 줄 거예요.”그제야 손기수는 만족스레 웃으며 대답했다.[좋아요. 저한테 맡기세요.]은서는 다시 신신당부했다. “숨겨두기만 해야 해요. 절대 다치게 하면 안 돼요.”이에 손기수는 급히 말했다.[우리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하겠어요!]은서는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엄마 말씀만 잘 따르면,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거예요.”모든 게 은정을 내쫓는 날까지만 버티면 그만이었다. 장말숙의 아들이 위협되지 않게 만들어야 했고, 지금 중요한 건 은정을 최대한 빨리 강제로 떠나게 만드는 일이었다.두 시간 후.오현빈이 급히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형님, 큰일이에요. 장말숙 아주머니 손자가 납치당했어요!”은정의 눈빛이 차갑게 되었다. 그와 유진의 계획은 장말숙의 아들이 철없는 무뢰한이라는 걸 이용해, 서선영 쪽 사람들과 충돌이 일어나게 만들고 그 사이에서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었다.그런데 서선영은 한 수 더 앞질렀다. 직접 손자를 납치해 버린 것이다. 은정은 느긋한 듯 말했지만, 말투엔 서늘한 살기가 묻어났다.“왜 못 막았어?”현빈이 대답했다.[도착했을 땐 이미 데려가고 난 뒤였어요. 아이는 집에 혼자 있었고요.]장말숙은 요즘 일을 그만두고 손자를 돌보고 있었다. 자기 아들은 놀기 좋아하고 도박을 일삼으며 최근 큰 빚까지 졌고, 며느리는 친정으로 들어가 버렸다.장말숙이 서선영의 돈을 받은 것도 빚을 갚고 며느리를 다시 불러들이기 위한 것이었다.그날 점심을 먹고 잠시 슈퍼에 다녀온 사이, 손자가 납치된 것이다.은정은 알고 있
“아주머니는 분명 그날 일에 대해 알고 있어요. 그 사람한테 직접 확인하러 갈 거예요!”임유진은 말을 끝내자마자 그대로 뛰쳐나갔다.“유진아!”구은서는 몇 걸음 뒤쫓았지만, 유진은 이미 계단 아래로 사라지고 있었다. 은서는 굳게 이를 악물며 눈살을 찌푸렸다.서선영이 집에 없다는 걸 알자, 그녀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장말숙 아주머니 잘 지켜봐요. 유진이 그날 일 알아보려고, 지금 그 사람 찾으러 갔으니까.”그러나 서선영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걔가 뭘 안다고 찾아?]은서는 차분히 말했다.“유진은 임씨 집안 사람이야. 찾으려면 못 찾을 사람이 없죠.”이에 서선영의 말투도 조금 무거워졌다.[알았어. 내가 금방 사람 붙여서 장말숙 감시하라고 할게.]은서는 이어서 냉랭하게 따져 물었다.“절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는다면서요? 근데 걔는 어떻게 안 거예요?”유진이 알았다는 건, 임씨 가족들까지도 이미 감지했다는 뜻이었다. 이에 은서는 불안감에 입술을 꾹 눌렀다.서선영은 얼버무리며 말했다.[아마 도우미 중 누가 말실수했을 거야. 다시 철저히 단속해 둘게. 걱정하지 마. 소문 좀 난다 해도 너한테까지 영향은 안 가. 넌 그냥 조용히 대본 연습이나 해.][이번 영화, 내가 네 외삼촌 꼬드겨서 겨우 투자받은 거 알지? 이번 기회 잘 잡아야 해. 딴 건 신경 쓰지 마. 연기만 잘하면 돼.]은서는 그 말에 더욱 날카로워졌다. 이번 영화는 유명 감독의 대작이었고, 은서에게는 이미지 회복의 유일한 기회였다. 그렇기에 서선영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나 곧 촬영 들어가요. 그러니까 이번 일 절대 망치지 마요.”[알았어!]서선영은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유진은 급히 차로 돌아와 깊게 숨을 들이쉰 후, 곧장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서선영 쪽에서 곧 움직일 거예요.”[알고 있어. 이미 준비해 뒀어.]은정의 목소리는 침착했고, 유진은 안심하며 숨을 내쉬었다.이윽고,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고생 많았어.]이에 유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
“아파요!”유진은 짧은 비명을 내뱉으며 순식간에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팔을 뻗어 구은정의 목에 매달리듯 안으며, 자기 얼굴을 숨기려 했다.이에 은정은 그녀의 어깨를 쓸어내리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낮게 웃었다.“왜 예전 같지 않아? 예전엔 몰래라도 키스하려고 했으면서, 이젠 실컷 하라고 해도 도망치기 바쁘네.”유진은 은정을 꼭 안으며 눈가가 붉게 물들었지만 속은 터질 듯 행복했다. 이제는 몰래 키스할 필요가 없다. 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할 수 있었다.은정은 유진의 발그레한 귀에 입을 맞추며 낮게 속삭였다.“전에 난 늘 걱정했어. 네가 그냥 어린 마음에 나한테 끌리는 거라고. 그저 신기하고 새로워서, 가질 수 없으니까 더 마음이 가는 거라고.”“우리가 진짜로 사귀게 되면 금세 질릴 거라고. 나는 사실 정말 재미없는 사람이야. 총 쏘고 싸우는 것 빼곤 할 줄 아는 게 없어.”“요즘 애들이 좋아하는 것도 몰라. 마음도 더 이상 젊지 않아.”“그래서 넌 언젠가 내가 생각보다 별거 아니라는 걸 깨닫고, 그 마음이 식을까 봐 두려웠어.”유진은 목이 메어, 콧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내가 기억 잃었을 때, 왜 다시 나한테 다가왔어요?”은정은 예전엔 그렇게 차갑게 거절했던 사람인데, 교통사고 한 번 났다고 갑자기 사랑하게 된 걸까? 혹시 죄책감 때문은 아니었을까?그런 생각이 유진을 계속 불안하게 했다. 잠시 침묵하던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아마 너 없는 세상이, 정말로 견딜 수 없을 만큼 어둡고 차가웠기 때문일 거야.”그 말에 유진의 가슴은 요동쳤다. 그녀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마음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려는 듯, 어둠을 걷어내고 자신의 빛으로 은정의 세상을 덮어주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유진은 다시 한번, 은정에게 입을 맞췄는데, 이번엔 더욱 깊고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은정은 곧 유진을 세게 안았고, 불같이 뜨거운 열기가 유진을 감쌌다. 죽음 같은 어둠 속에서 되살아난 사람처럼, 은정의 키스는
“그 사람들이 설마...”유진은 커다란 눈을 뜨고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구은정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네가 생각한 그대로야.”유진은 믿기지 않는 듯 놀람과 동시에 깊은 자책의 기색을 띄웠다.“결국 내가 이렇게 만든 거잖아요.”“자꾸 그런 식으로 네 탓 하지 마.”은정은 그녀의 뺨을 다정하게 쓸어내리며 말했다.“너는 둘 사이의 더러운 사정도 몰랐잖아.”유진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서선영은 그래도 이해가 가. 근데 구은서는 왜 그렇게까지 자기 엄마한테 협조한 거예요?”“자기 명예가 달린 문제인데, 게다가 지금은 연예인이잖아요. 설령 피해자라 해도, 그런 얘기 퍼지는 게 좋을 리 없잖아요.”은정은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대답했다.“십몇 년 전 그 일 땐, 은서는 진짜로 몰랐던 것 같아. 내가 샤워 끝내고 나왔을 땐 자고 있었고, 서선영이 소리 지르고 난리 쳐도 안 일어났거든.”“그땐 그냥 서선영한테 이용당한 거지. 근데 이번엔 서선영이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나도 몰라.”유진은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서선영은 정말 너무 악랄했다. 자기 딸까지도 그런 식으로 이용한다면, 못 할 짓이 뭐가 있을까?더구나 서선영은 알고 있었다. 이런 식의 루머가 은정에게 가장 치명적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게 바로 구은태에게도 가장 아픈 약점이라는 것을. 그래서 서선영은 또다시 그 수를 썼다.유진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중얼거렸다.“그때 전화받은 아주머니, 그 사람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찾을 수는 있어. 하지만 서선영한테서 돈을 받았고, 아마 협박도 받았을 거야.솔직히 말해줄 가능성은 작아.”은정은 냉정하게 말하자, 유진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그래도 찾아봐야죠. 당장 데리고 가서 집에 가서 진실을 말하게 해야 해요!”은정은 유진의 손목을 붙잡았는데,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웠다.“서두르지 마.”“어떻게 안 서둘러요! 지금 이미 밖에선 온갖 소문이 돌고 있다고요!”유진이 답답해하며 소리치자,
“그날 밤 전화했을 때 말이야.”유진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그게 바로 그날이었어요?”“그래.”은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그는 서선영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 몰랐다. 혹시 다시는 유진을 볼 수 없게 될까 두려워, 마지막으로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사실은 유진에게 자기 집으로 와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그 말이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았다.유진은 자책하듯 말했다.“나도 그때 뭔가 이상하단 걸 느꼈어. 근데 안 찾아갔어요.”은정은 유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그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고, 유진은 단지 모호한 한 통의 전화로 구씨 저택까지 달려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유진의 마음속은 여전히 무겁고 미안했다.“내가 갔더라면, 그 여자의 계략이 통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요.”“유진아, 우리 이제 과거에 대해 그만 후회하자. 응?”은정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말하자,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중요한 건, 서선영 모녀의 거짓말을 어떻게 밝혀낼지였다.“그 여자가 떠나라고 하니까, 진짜 떠나려던 거예요? 도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됐어?”유진이 화가 난 듯 말하자, 은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차가운 듯 부드러운 눈빛으로 대답했다.“내 명예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어. 네가 그 일 알고 나서 날 더 미워할까 봐, 그게 무서웠지.”호텔에서 유진이 여씨 집안 가족 모임에 참석한 걸 봤을 때, 그는 마음이 무너졌다.자신은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앞으로도 더러운 과거 때문에 손가락질받을 인생인데, 그런 자신의 곁에 유진을 두는 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유진은 따뜻하면서도 가슴 아픈 눈빛으로 은정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유진은 두 손으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안개 낀 듯한 눈동자가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은정의 어두운 그림자를 밀어내고 그 마음속까지 빛으로 채우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이번에는 유진이 먼저 입을 맞췄는데, 그 키스는 애틋하고 따스했
“정말 못됐어요. 그런데도 난, 이렇게 좋아하니까.”유진은 코끝을 훌쩍이며 속삭이듯 말하자, 은정의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고, 유진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유진은 흐느낌 속에 물었다.“그래도 또 떠날 거예요?”“안 떠나.”은정은 마치 유진의 몸이 자기의 일부라도 된 것처럼 꼭 끌어안았다.유진은 입술을 꾹 다물었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도 입가엔 참을 수 없이 번지는 미소가 피어올랐다.멀찍이서 둘을 바라보던 소희는 마침내 안도한 듯 미소를 지었고, 잠시 바라보다 조용히 돌아섰다.은정은 티켓 환불을 마치고, 유진의 손을 꼭 잡고 공항 로비를 빠져나왔다.그때 소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유진이는 맡길게. 잘 달래줘. 난 먼저 갈게.]은정은 묵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소희, 정말 고마워.”[혹시 집안 문제, 도와줄 일 있으면 말해.]은정은 원래의 냉정한 눈빛을 되찾으며, 대답했다.“아니, 내 일은 내가 해결할게.”[그래.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 임씨 집안 쪽 설득도 내가 도와줄 수 있어.]은정은 낮게 웃었다.“혼자 힘으로 안 되면 그때 부탁할게.”전화를 끊은 뒤, 유진이 옆에서 물었다.“소희, 갔어요?”“응. 우리 집에 가자.”은정은 다시 유진의 손을 꼭 잡았다.유진은 그날 회사에 가지 않고, 전화를 걸어 휴가를 냈다. 이경 아파트로 돌아오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선 은정은 유진을 번쩍 안아 들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유진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고,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세게 은정을 끌어안고 입맞춤에 응했다.유진의 반응은 은정을 더욱 자극했고, 입술은 불꽃처럼 뜨거웠다. 은정은 강렬함과 부드러움을 오가며 끊임없이 유진의 반응을 확인했고,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었을 때에야 숨을 고르며 입술을 떼었다.유진은 숨을 헐떡이며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언제 기억난 거야?”은정은 유진의 입술 위에서 낮게 물었다.유진의 커다란 눈동자엔 얇은 안개 같은 물기가 맺혀 있었고, 눈가엔 눈물 자국이 남아 붉
“나쁜 놈!”유진은 이를 악물고 욕설을 내뱉으며, 손등으로 눈물을 거칠게 닦고는 그대로 뛰쳐나갔다.허둥지둥 엘리베이터를 내려가던 중, 예상치 못하게 1층 현관 앞에서 막 차에서 내리는 소희와 마주쳤다.유진은 달려가 소희를 끌어안으며, 눈물로 목소리가 떨렸다.“소희야. 그 사람, 갔어.”소희는 차가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손을 들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침착하게 말했다.“지금쯤 공항 도착했을 거야. 얼른 차 타. 우리가 가서 막자.”유진은 울먹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응.”차에 올라탄 후, 소희는 아침 출근길 교통체증을 피해 가능한 한 빠른 길로 달렸다. 조수석에 앉은 유진은 여전히 망연자실한 얼굴이었다.소희는 유진을 스치듯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두려워하지 마. 이번엔, 걔가 지구 반대편까지 도망친다 해도 내가 꼭 데려올게.”유진은 이를 악물며 눈물 맺힌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응.”공항에 도착하자, 소희는 시계를 확인했다.“지금쯤이면 막 보안 검색대 들어갔을 거야. 넌 안으로 들어가. 난 밖에서 기다릴게.”유진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들이 북적이는 공항 안을 정신없이 뛰어다녔다.탑승 게이트 앞, 마침내 수많은 인파 속에서 그토록 익숙하고, 아프도록 그리운 구은정의 뒷모습을 발견했다.너무 긴장한 탓일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은정이 거의 들어가려던 순간, 유진은 겨우 목을 눌러 뜨거운 한마디를 토해냈다.“서인!”이에 은정의 발걸음이 멈췄고, 순간 고개를 홱 돌렸다. 사람들 사이 너머로, 유진이 서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지나가는 사람들, 소음, 움직임. 모든 게 멀어지고, 과거와 현재가 한꺼번에 겹쳤다.처음 만났던 순간. 잃어버린 가방을 찾아 건네주던 은정의 등.“정말 대단해.”감탄하던 유진의 눈빛. 차가웠던 은정의 반응. 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은정이 궁금했고, 따랐고, 그렇게 샤브샤브집에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유진은
방연하는 어이없다는 듯 여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지금 진심이에요? 머리 괜찮아?”여진구는 연하를 째려보았다. 연하는 주변의 예쁘게 꾸며진 꽃길과 풍선을 둘러보며 부러움 섞인 말투로 말했다.“이거 진짜 예쁘네요. 나도 나중에 이런 대접 한번 받아볼 수 있을까요?”“너한테 고백할 남자가 이런 것도 못 하면, 내가 대신 해줄게.”진구는 시원하게 말하자, 연하는 헛웃음을 지으며 받아쳤다.“미리 감사 인사드릴게요, 여진구 사장님.”그 시각, 유진은 집에 돌아왔지만 마음은 여전히 뒤숭숭했고, 계속 뭔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그날 밤은 뒤척이기만 하다가, 새벽이 되자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아침 7시가 되자, 임유민이 방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문에 기대선 그는 느슨하게 말했다.“누나, 이번 주 금요일 우리 학교 축구 경기 있어. 내가 수비수로 나가는데, 학교에서 가족 참관 받는대. 올래?”유진은 고개를 들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좋지. 꼭 응원하러 갈게.”유민은 그녀가 짐을 싸는 걸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근데 누나, 짐은 왜 싸?”유진은 노트북을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이젠 다시 이경 아파트로 돌아가려고.”유민은 조금 놀랐다.“안 돌아가겠다고 하지 않았어?”유진은 눈을 내리깔며 담담하게 대답했다.“가고 싶어졌어.”유민은 문에 기댄 채 웃으며 중얼거렸다.“역시 내 예상이 맞았네. 근데 이번에는 그렇게 바보처럼 굴지 마.”유진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뭐라고?”이에 유민은 씩 웃었다.“엄마는 아침 일찍 나갔고, 할머니한테는 꼭 인사하고 가. 안 그러면 또 가출했다고 난리 나실걸.”유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집에 없을 땐, 네가 좀 더 착하게 굴어. 할머니 기분 잘 맞춰 드리고.”유민은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말했다.“그건 숙모한테나 하라고.”유진은 참지 못하고 푸흐 웃음을 터뜨렸다. 짐을 정리한 후, 운전기사에게 짐을 차에 실어달라 부탁하고 자신은 할머니에게 인사드리
유진은 은정이 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직접 보고 나서야 다시 호텔 위층으로 돌아갔다. 혹시나 여씨 집안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할까 봐 대비해야 했다.라운지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흩어졌고, 유진이 그 안으로 들어섰을 때, 여씨 집안의 두 명의 며느리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셋째네는 평소에 그렇게 거칠게 굴더니, 오늘 자기 아들이 그렇게 당했는데도 조용하네?”다른 여성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들었는데 인후가 아가씨를 모욕해서 그렇게 된 거라더라고요. 이 일, 임씨 쪽이 알게 되면 여인후 가만두지 않을걸요?”“그래서였구나! 근데 때린 사람이 누군데?”“그건 잘 모르겠어요.”유진은 고개를 돌려 벽에 기대었다. 그 순간, 조금 전 은정의 어두운 눈빛과 먹먹한 표정이 머릿속을 스쳤고, 가슴이 다시 시리게 아파왔다.그때 여진구가 메시지를 보내오자, 유진은 핸드백을 챙겨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유진아!”호텔 정원에서 진구가 유진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다가왔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꺼내려 했지만 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선배!”이에 진구는 웃으며 말했다.“먼저 말해봐.”유진은 진지한 표정으로 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전 늘 당신을 선배로, 좋은 친구로 생각했어요. 그 이상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요.”“오늘 가족 모임에 참석하면서 다들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부디 오해가 더 커지지 않도록, 할아버지랑 어른들께는 확실히 말씀드려 주세요.”진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직 아무 말도 꺼내지도 않았는데, 유진은 이미 자신의 마음을 간파하고,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선을 그어버린 것이다.유진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 표정엔 피곤함이 묻어났다.“조금 피곤해서 먼저 갈게요. 할아버지께는 대신 인사 부탁드려요.”유진은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몇 걸음만 걸었을까? 그 순간, 뒤쪽 정원에 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형형색색의 하트 모양 꽃장식이 환하게 빛났고, 수많은 풍선과 조명이 하늘로 떠올랐다. 몽환적이고 낭만적인 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