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희가 듣더니 이해할 수 없어 물었다."이선이라는 분은 왜 굳이 도발하러 온 거죠?"이치에 따르면 이선이 성준을 빼앗아 갔으니 유정을 피해 다녀야 하는 게 맞는 건데 굳이 도발하러 유정을 찾으러 갔다는 게 말이 안 되었다.유정이 냉소하며 대답했다."일부러 자랑하려고 그랬을 거예요. 전에 성준 씨가 우리 두 사람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을 때 성준 씨의 어머니가 이선의 존재를 알고 사람을 데리고 이선의 집까지 찾아가 이선을 때렸거든요. 그리고 이선은 지금까지 내가 중간에서 부추긴 줄로 알고 있고요. 이제 성준 씨가 드디어 이선의 것으로 되었으니 당연히 복수하고 싶었겠죠."소희가 갑자기 무엇이 생각이 났는지 고개를 돌려 임구택에게 물었다."축구 경기, 백림 씨가 임시로 조직한 거야?""아마도? 전에는 축구 경기에 대해 들은 게 없었거든."소희는 순간 확신이 들었다. 조백림이 고의로 이번 축구 경기를 조직한 게 분명했다.‘재밌겠는데?’곧 두 팀의 팀원이 경기장에 나타났다.비록 임시로 조직한 축구 경기라고는 하지만 고객들은 열정과 기대가 넘쳐났고 심지어 짧은 시간 내에 플래카드도 만들어 자신의 친구나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응원하고 함성을 질렀다.선수들이 출전하자마자 관중석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소희는 단번에 조백림을 찾아냈다. 12번이 찍힌 검은색 유니폼을 입은 조백림은 오늘따라 평소의 온화하고 우아한 모습과는 달리 더욱 밝고 멋있어 보였다.그리고 그 모습에 많은 소녀들도 12번을 외치며 높은 소리로 응원했다.어제 성준을 만났을 때 저녁이라 소희는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래서 선수들 무리를 한참 훑고 서야 겨우 성준을 찾았다.그는 흰색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분명 같은 운동복이었지만 조백림보다 키가 큰 것도 아니고 몸매가 좋은 것도 아니라 조백림만큼 눈에 띄지는 않았다.날씨가 덥고 또 경기 보러 온 게 전부 다 관광객이라 조백림은 경기를 전반전과 후반전으로 나누지 않고 45분짜리 경기 한판으로 승부를 가릴 계획이었다.그렇게
이때 장승이 성준의 어깨를 감싸고 웃으며 말했다."이봐요, 대단한데요?"이에 성준이 억지로 웃음을 드러냈다.조백림의 행위는 반칙에 속하지 않아 시합은 계속되었다.그러나 10분도 안되어 공은 재차 성준의 머리에 부딪쳤고, 조백림 쪽의 선수는 결국 반칙으로 인해 옐로카드를 받았다.성준은 얼굴이 이미 반쯤 부어올랐지만 계속 경기를 견지했다.하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관중석의 일부 관중들은 점차 이상함을 눈치채게 되었다. 조백림이 첫 골을 넣은 후로 두 팀 모두 더는 골을 넣지 못했고, 성준이 오히려 과녁이 되었다. 20분 사이에 성준은 얼굴이며 다리며 곳곳이 공에 부딪혀 온몸에 상처를 입지 않은 곳이 없었다.하필 심판은 조백림 팀이 반칙했다는 증거를 전혀 잡아내지 못했다는 거다.그리고 성준은 부상이 너무 심해 동작도 느려졌다. 공에 맞지 않으면 같은 팀 선수에게 부딪히고, 온몸이 상처투성이로 되었지만 그는 그래도 끝까지 버텼다.관중들은 순간 그의 체육 정신에 감동되어 박수를 날렸다.그러나 관중들의 감동은 둘째치고 성준은 점점 조급했다. 45분이 거의 다 되어가고 있는데 한 골도 넣지 못했으니 그의 1억은 그대로 다른 사람의 호주머니로 들어갈 게 분명했다.걱정하고 있는 건 관중석에 앉은 이선도 마찬가지였다.하지만 그녀가 걱정하고 있는 건 성준의 몸이 아니라 자신이 골인한 백만 원이었다.성준은 집에 돈이 많으니 1억이 아무것도 아닐 수 있겠지만 그녀의 백만 원은 엄청 힘들게 모은 것이었다.성준과 사귀게 된 후, 자신이 성준의 돈이 탐나서 성준과 사귀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성준의 가족에게 보여주기 위해 이선은 매번 성준이보고 자신에게 돈을 쓰지 말라고 당부했고, 귀중한 물건도 사지 못하게 했다. 그러니 그 백만 원은 그녀의 모든 재산이었다.줄곧 긴장하여 경기장을 주시하고 있던 유정은 성준의 온몸에 난 상처를 보고서야 문득 깨달았다, 조백림이 자신을 위해 복수해 주겠다던 게 무엇이었는지.마지막 1분, 조백림이 다시 한번 드리블을 하며 민첩하고
예전에 유정과 사귀고 있었을 때 그가 유정의 곁으로 다가가기만 해도 그녀는 긴장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마치 맹수를 마주하고 있는 사람처럼. 그리고 그는 당연히 유정이가 부끄러움을 타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었다.그런데 지금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 다른 남자와 키스하고 있었으니.성준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나머지 눈앞이 어두워지더니 그대로 자신을 부축하고 있는 사람한테 쓰러졌다.관중석에 앉아있던 이선도 벌떡 일어나 놀란 표정으로 유정을 바라보았다.그녀는 줄곧 자신이 성준을 빼앗은 것 때문에 유정을 이겼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유정이와 키스하고 있는 남자는 누구인 거지?방금 경기를 하고 있을 때부터 이선은 조백림을 발견했다. 키 크고 덩치 좋고 선수들 중에서 제일 생긴 그가 팀원을 이끌어가며 경기를 컨트롤했었고, 체력과 능력이 그야말로 완전히 성준을 깔아뭉갰다.‘그런데 그렇게 잘 난 남자가 유정의 남자친구라고?’‘유정이 성준 씨를 사랑하는 거 아니었나? 왜 벌써 이렇게 훌륭한 남자친구로 갈아탄 거지?’한참이 지나서야 조백림이 유정을 놓아주고 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술 끝을 가볍게 문질렀다. 그러고는 흐리멍덩하던 두 눈이 점차 붉어져가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웃으면서 말했다."내가 자기를 위해 복수도 해줬는데, 이 정도의 장려는 받아가도 괜찮잖아?"아직도 머릿속이 어지러운 유정은 남자의 웃음기를 머금은 얼굴을 바라보며 사고하는 방식을 잊은 사람마냥 멍하니 서 있었다.조백림이 옆에 있는 임구택, 장시원 등과 인사를 하고는 몸을 돌려 떠났다.그리고 유정이 문득 무엇이 생각났는지 무의식적으로 왼쪽을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이선이 두 눈에 독을 품은 채 유정을 노려보고 있었다.하지만 유정은 이선을 신경 쓸 기분이 나지 않아 멍하니 제자리에 앉았다.소희가 그러는 유정이에게 물을 건네주며 덤덤하게 웃었다."당황하지 마요."유정은 찬물을 한 모금 마시고 나서야 겨우 평정심을 되찾았다. 그러다 갑자기 방금 그녀에게 키스할 때 장난기가 묻
경기가 끝난 후 조백림은 회식할 겸 장시원, 오진수 등 친한 친구들과 방금 경기에서 같은 팀을 했던 팀원들을 전부 응접실로 초대했다.조백림과 같은 팀을 했던 팀원들 중에는 여행객 중에서 임시로 뽑은 이들도 있는가 하면 전부터 조백림과 알고 지냈던 친구들도 있어 다들 친해지는 데에는 시간이 별로 걸리지 않았다.그렇게 다 같이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중 임구택은 통화하러 나갔고 장시원이 바로 소희의 곁에 앉아 담담하게 물었다."요요는 괜찮아? 그날 많이 놀랐지?"이에 소희가 다정하게 웃으며 대답했다."아니요. 요요 담이 엄청 커요.""맞아, 요요는 용감한 아이지."‘그의 엄마처럼.’갑자기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누군가의 얼굴에 장시원이 잠시 뜸을 들이다 다시 물었다."언제 떠난대?""계획대로라면 청아 오빠의 결혼식이 끝난 후에 떠나는 건데, 아줌마께서 퇴원하시면 바로 떠나야 할 것 같다네요."소희의 대답에 장시원의 눈빛이 순간 어두워졌다."나 때문에?"이에 소희가 잠깐 멍해지더니 반 박자 늦게 입을 열었다."아니요. 아줌마께서 갑자기 병원에 입원하시는 바람에 일정이 너무 오래 지체됐거든요, 그래서 학교 쪽에서도 청아를 재촉하고 있고."분명 그럴듯한 대답이었는데 장시원의 눈빛에 묻은 냉기는 더욱 짙어졌다. 자신 때문이 아니라는 게 그를 더욱 화나게 했던 것이다.하지만 그는 아무런 기색도 드러내지 않고 다시 물었다."올해에 졸업하는 거야?""네.""그럼 그 후엔 무슨 계획이래? 졸업하면 바로 귀국한대, 아니면 치카고에 남는대?""당분간은 치카고에 머물 거예요."소희의 대답에 장시원은 눈을 아래로 드리운 채 한참 아무 말을 안 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요요 아빠, 누구야? 왜 그들 모녀를 버렸어?"소희가 듣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난감한 표정을 드러내며 대답했다."그건 상황이 많이 복잡해서, 저도 잘 모르겠네요."장시원이 듣더니 갑자기 차가운 미소를 드러냈다."쓰레기 인간한테 속아 그런 꼴이 나다니, 정말 대단하기
"쉿!"장명원의 말에 소희가 바로 목소리를 낮추라고 손짓을 했다. 그러다 좌우를 한 번 살펴보고 나서 자신의 손목을 뒤로 빼며 말했다."뭔 의뢰를 받아요? 미연 씨랑 약혼 안 할 거예요?"이에 장명원이 잠깐 멍해 있더니 다시 소희의 손을 잡았다."기간이 짧은 의뢰를 맡으면 되잖아요. 아무튼 난 의뢰받고 싶어요.""약혼식이 끝나면 다시 얘기해요.""장말이에요?""네.""그래도 되고! 그럼 그때 가서 꼭 나한테 줘야 해요!""크흠!"장명원이 격동되어 말하고 있는데 갑자기 두 사람 뒤에서 가벼운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뒤쪽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임구택이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소희의 팔을 잡고 있는 장명원의 손을 쳐다보고 있었다.장명원은 순간 팔이 따끔해진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한사코 손을 놓지 않았다."구택 형, 나와 보스의 감정까지 질투하는 건 아니겠죠?"임구택이 다가와서는 장명원을 밀어냈다."난 여자조차도 질투하는데, 넌 뭐가 다르지?"임구택의 놀라운 힘에 하마터면 뒤로 넘어질 뻔한 장명원이 임구택의 논리에 어이없어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음식이 다 차려지고 다들 하나둘씩 식탁 쪽으로 가서 착석했다. 도중에 소희는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았고 우민율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발견하게 되었다.‘어제 종일 장시원 옆에 달라붙어 있었던 우민율이 오늘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는 건, 장시원과 무슨 일이 있은 게 분명해.’소희의 입맛을 알고 있던 친구들은 소희가 좋아할 것 같은 음식을 전부 소희의 앞으로 밀어주었다.임구택 덕분에 소희는 그들 무리 중에서 제일 이쁨 받는 한 명으로 된 셈이었다.이에 황정아 등은 너무 질투 났지만 감히 표현하지도 못하고 가만히 앉아있기만 했다. 그리고 유정은 워낙 소희를 좋아해서 그런 점에 있어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그러다 중도에 화장실을 가려고 룸에서 나온 유정은 마침 복도에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는 조백림을 발견하게 된다. 오전 경기장에서 공공연
‘그래, 틀림없이 조백림 꼬시러 온 걸 거야!’‘경기장에 있을 때부터 조백림을 노렸던 거지. 그래서 일부러 옷 갈아입고, 메이크업까지 하고 와서 저렇게 불쌍한 모습을 하고 있는 거고. 남자들이 저런 스타일을 제일 좋아하니까.’‘예전에 성준 씨도 저렇게 유혹해 낸 거겠지?’‘불쌍한 성준 씨, 온몸이 상처투성이로 되어 병상에 누워있을 때 네 마음속에서 가장 순결하고 가장 예쁜 소녀는 지금 다른 남자를 꼬시고 있다고.’유정은 오만가지 생각에 웃음만 나왔다.식견이 넓고 만나본 사람도 많은 조백림은 이선의 꿍꿍이를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기색도 드러내지 않고 덤덤하게 웃으며 말했다."성준 씨라는 분이 그쪽을 꼬드겼으니, 꼬드긴 사람을 찾아가야 하는 거 아닌가요?"이에 이선이 잠깐 멍해 있더니 즉시 늠름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기개를 드러냈다."저 비록 성준 씨와 사귀고 있지만 그이의 돈은 한 푼도 쓰지 않았습니다. 그 몇백만 원도 제가 열심히 일해서 모은 거고요.""그래요?"조백림이 눈썹을 한 번 올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남자친구의 돈을 쓰지 않는 모습은 기개 넘쳐 보이지만 그렇다고 나한테 찾아와 돈을 달라고 요구하는 건 또 어떻게 해석해야죠? 내가 그쪽에게 빚을 졌나요? 내가 생태원의 사장인 건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돈이 하늘에서 떨어진 거 아닙니다."이선에게 속기는커녕 오히려 인정사정없이 디스 해버린 조백림의 태도에 유정은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심지어 오늘 경기장에서 그가 했던 행동을 용서해주고 싶을 지경이었다.이선은 갑자기 얼굴색이 하얗게 질려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다 더 아련해진 얼굴을 들어 조백림을 쳐다보며 말했다."그럼 저에게 돈을 좀 빌려줄 수 있을까요? 20만이면 돼요. 제가 매달 4만 원씩 반년 안에 반드시 다 갚을 게요."‘헐......’유정은 순간 이선이가 남달라 보였다. 20만 원을 반년으로 나눠서 갚겠다니.‘그럼 매달 조백림에게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후 그 기회를 타서 조백림을
이선이 멀리 떠나가서야 유정의 표정이 다시 덤덤해졌다. 그러고는 화장실 가려고 몸을 돌리는데 조백림이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점잖고 잘 생긴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너 정말 저 여인한테 돈 빌려줄 생각이었어?""그럴 리가요?"유정이 냉소 한 번 하고는 말을 이어갔다."뺨을 몇 대 날려줘도 모자랄 판에 돈은 왜 빌려줘요?"유정의 대답에 조백림의 얼굴에 걸린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분명 이렇게 대단한데 어떻게 저 여인한테 진 거야?"유정이 듣더니 눈빛이 순간 어두워져서는 자조하 듯 대답했다."예전에 난 사랑은 진심을 다 해서 대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태생으로 바보처럼 성질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단지 비겁한 수단을 쓰고 싶지 않았을 뿐이지. 저 여인만이 남보다 더 똑똑해서 세상 사람을 손아귀에 넣고 놀 수 있는 게 아니라고요.""일리가 있네. 그럼 우리 둘이 결혼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나랑 있으면 넌 영원히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고, 가끔 너의 그 지력을 발휘할 수도 있고."유정은 당연히 조백림의 뜻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지 않으니 진심을 다 해 대할 필요도 없고, 더욱 자아와 이성을 잃지 않아도 될 게 분명했다.사실 전에 유정은 이미 조씨 가문과 파혼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조백림을 이용하여 이선을 화나게 할 수 있다면 그것도 의외의 수확일 것 같아서.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조백림이 엄청 똑똑하다는 거다."나 이미 이선한테 제대로 찍혔어요. 그리고 한 여인을 망쳐버리는 가장 좋은 방법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걸 빼앗는 것이죠. 이선은 반드시 다시 백림 씨를 찾아올 거예요. 정말 이선의 미인계에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어요?""솔직히 그 여인의 외모와 수단으로 나를 꼬시기엔 한참 멀었어."조백림의 대답에 유정이 기뻐하며 손바닥을 쳐들었다."좋아요! 거래가 성사!"이에 조백림이 웃으며 덩달아 손을 들어 유정과 하이파이브를 했다."이번엔 백림 씨가 나를
워낙 주위에 친구가 별로 없던 소희가 모처럼 잘 맞는 친구를 만난 것 같아 임구택도 속으로 많이 기뻐했다. 그래서 조백림에게 앞으로 모임에 꼭 유정도 같이 데리고 참석하라고 했다.이에 조백림이 웃으며 대답했다."당연하죠. 앞으로 자주 만나요!"그렇게 다들 서로 작별 인사하고 각자 차에 올라타 생태원을 떠났다.그러다 넓은 도로에 들어서니 오후의 햇빛이 차창을 뚫고 따스하게 스며들어왔다.따스한 햇볕을 쬐며 은은한 노래를 한참 듣고 있던 소희는 온몸이 나른해지기 시작하더니 점점 졸음이 몰려와 곧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이에 임구택은 일부러 속도를 늦추고 뒤에서 자신의 외투를 가져와 그녀에게 덮어 주었다.그 순간, 임구택은 고요함 속에서 무한한 행복을 느끼게 되었다.그렇게 한 시간 정도 자다 다시 깨어났을 땐 차는 이미 낯선 곳에 멈추어 있었다. 임구택은 차 안에 없었고 주위의 경치를 봐서는 아직 강성 시내에 들어서지도 않은 것 같았다.소희는 즉시 미끄러져 내려간 양복 외투를 잡고 일어나 앉았다. 그러다 차에서 내려 임구택 찾으러 가려는데 마침 길가의 디저트 가게 밖에서 줄을 서고 있는 임구택을 발견하게 되었다.디저트 가게 밖에는 4~5명이 줄 서 있었고 그중 고급진 셔츠와 양복바지를 차려입고 같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임구택이 유독 눈에 띄었다.그리고 남다른 기질을 풍기고 있는 임구택을 의자 등받이에 기댄 채 구경하고 있던 소희는 갑자기 수줍어하는 표정을 지으며 임구택의 앞으로 다가가 휴대폰 번호를 묻는 소녀를 발견하게 되었다.하지만 임구택의 표정은 여전히 덤덤하고 차가웠다. 소녀를 거절했는지 소녀는 결국 난감한 얼굴로 사과하고는 떠났다.얼마 지나지 않아 임구택의 순서가 되었고, 임구택은 음식을 주문하고 돈까지 지불한 후 한쪽으로 가서 음식을 기다렸다. 그러다 갑자기 고개를 돌려 차 쪽을 쳐다보았다.이에 소희는 곧바로 뒤로 등받이에 기댄 채 계속 자고 있는 척했다.오분 정도 지난 후, 임구택이 종이봉투를 들고 돌아왔다. 그러
“역시 이런 식으로 문제가 될 줄 알았어요.”은서는 싸늘한 눈빛으로 말하자, 손기수가 물었다.[이제 어떻게 하죠?]구은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장말숙한테 손자가 있잖아요. 그 애를 데려가요. 안전한 곳에 숨겨두고 지켜여.”이에 손기수는 비죽 웃으며 말했다.[그건 납치 아닌가요?]“이건 우리 엄마 뜻이에요.”은서는 그 말을 강조하듯 단호하게 말했다.“일만 제대로 끝내면, 보수는 두 배로 줄 거예요.”그제야 손기수는 만족스레 웃으며 대답했다.[좋아요. 저한테 맡기세요.]은서는 다시 신신당부했다. “숨겨두기만 해야 해요. 절대 다치게 하면 안 돼요.”이에 손기수는 급히 말했다.[우리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하겠어요!]은서는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엄마 말씀만 잘 따르면,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거예요.”모든 게 은정을 내쫓는 날까지만 버티면 그만이었다. 장말숙의 아들이 위협되지 않게 만들어야 했고, 지금 중요한 건 은정을 최대한 빨리 강제로 떠나게 만드는 일이었다.두 시간 후.오현빈이 급히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형님, 큰일이에요. 장말숙 아주머니 손자가 납치당했어요!”은정의 눈빛이 차갑게 되었다. 그와 유진의 계획은 장말숙의 아들이 철없는 무뢰한이라는 걸 이용해, 서선영 쪽 사람들과 충돌이 일어나게 만들고 그 사이에서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었다.그런데 서선영은 한 수 더 앞질렀다. 직접 손자를 납치해 버린 것이다. 은정은 느긋한 듯 말했지만, 말투엔 서늘한 살기가 묻어났다.“왜 못 막았어?”현빈이 대답했다.[도착했을 땐 이미 데려가고 난 뒤였어요. 아이는 집에 혼자 있었고요.]장말숙은 요즘 일을 그만두고 손자를 돌보고 있었다. 자기 아들은 놀기 좋아하고 도박을 일삼으며 최근 큰 빚까지 졌고, 며느리는 친정으로 들어가 버렸다.장말숙이 서선영의 돈을 받은 것도 빚을 갚고 며느리를 다시 불러들이기 위한 것이었다.그날 점심을 먹고 잠시 슈퍼에 다녀온 사이, 손자가 납치된 것이다.은정은 알고 있
“아주머니는 분명 그날 일에 대해 알고 있어요. 그 사람한테 직접 확인하러 갈 거예요!”임유진은 말을 끝내자마자 그대로 뛰쳐나갔다.“유진아!”구은서는 몇 걸음 뒤쫓았지만, 유진은 이미 계단 아래로 사라지고 있었다. 은서는 굳게 이를 악물며 눈살을 찌푸렸다.서선영이 집에 없다는 걸 알자, 그녀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장말숙 아주머니 잘 지켜봐요. 유진이 그날 일 알아보려고, 지금 그 사람 찾으러 갔으니까.”그러나 서선영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걔가 뭘 안다고 찾아?]은서는 차분히 말했다.“유진은 임씨 집안 사람이야. 찾으려면 못 찾을 사람이 없죠.”이에 서선영의 말투도 조금 무거워졌다.[알았어. 내가 금방 사람 붙여서 장말숙 감시하라고 할게.]은서는 이어서 냉랭하게 따져 물었다.“절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는다면서요? 근데 걔는 어떻게 안 거예요?”유진이 알았다는 건, 임씨 가족들까지도 이미 감지했다는 뜻이었다. 이에 은서는 불안감에 입술을 꾹 눌렀다.서선영은 얼버무리며 말했다.[아마 도우미 중 누가 말실수했을 거야. 다시 철저히 단속해 둘게. 걱정하지 마. 소문 좀 난다 해도 너한테까지 영향은 안 가. 넌 그냥 조용히 대본 연습이나 해.][이번 영화, 내가 네 외삼촌 꼬드겨서 겨우 투자받은 거 알지? 이번 기회 잘 잡아야 해. 딴 건 신경 쓰지 마. 연기만 잘하면 돼.]은서는 그 말에 더욱 날카로워졌다. 이번 영화는 유명 감독의 대작이었고, 은서에게는 이미지 회복의 유일한 기회였다. 그렇기에 서선영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나 곧 촬영 들어가요. 그러니까 이번 일 절대 망치지 마요.”[알았어!]서선영은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유진은 급히 차로 돌아와 깊게 숨을 들이쉰 후, 곧장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서선영 쪽에서 곧 움직일 거예요.”[알고 있어. 이미 준비해 뒀어.]은정의 목소리는 침착했고, 유진은 안심하며 숨을 내쉬었다.이윽고,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고생 많았어.]이에 유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
“아파요!”유진은 짧은 비명을 내뱉으며 순식간에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팔을 뻗어 구은정의 목에 매달리듯 안으며, 자기 얼굴을 숨기려 했다.이에 은정은 그녀의 어깨를 쓸어내리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낮게 웃었다.“왜 예전 같지 않아? 예전엔 몰래라도 키스하려고 했으면서, 이젠 실컷 하라고 해도 도망치기 바쁘네.”유진은 은정을 꼭 안으며 눈가가 붉게 물들었지만 속은 터질 듯 행복했다. 이제는 몰래 키스할 필요가 없다. 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할 수 있었다.은정은 유진의 발그레한 귀에 입을 맞추며 낮게 속삭였다.“전에 난 늘 걱정했어. 네가 그냥 어린 마음에 나한테 끌리는 거라고. 그저 신기하고 새로워서, 가질 수 없으니까 더 마음이 가는 거라고.”“우리가 진짜로 사귀게 되면 금세 질릴 거라고. 나는 사실 정말 재미없는 사람이야. 총 쏘고 싸우는 것 빼곤 할 줄 아는 게 없어.”“요즘 애들이 좋아하는 것도 몰라. 마음도 더 이상 젊지 않아.”“그래서 넌 언젠가 내가 생각보다 별거 아니라는 걸 깨닫고, 그 마음이 식을까 봐 두려웠어.”유진은 목이 메어, 콧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내가 기억 잃었을 때, 왜 다시 나한테 다가왔어요?”은정은 예전엔 그렇게 차갑게 거절했던 사람인데, 교통사고 한 번 났다고 갑자기 사랑하게 된 걸까? 혹시 죄책감 때문은 아니었을까?그런 생각이 유진을 계속 불안하게 했다. 잠시 침묵하던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아마 너 없는 세상이, 정말로 견딜 수 없을 만큼 어둡고 차가웠기 때문일 거야.”그 말에 유진의 가슴은 요동쳤다. 그녀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마음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려는 듯, 어둠을 걷어내고 자신의 빛으로 은정의 세상을 덮어주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유진은 다시 한번, 은정에게 입을 맞췄는데, 이번엔 더욱 깊고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은정은 곧 유진을 세게 안았고, 불같이 뜨거운 열기가 유진을 감쌌다. 죽음 같은 어둠 속에서 되살아난 사람처럼, 은정의 키스는
“그 사람들이 설마...”유진은 커다란 눈을 뜨고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구은정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네가 생각한 그대로야.”유진은 믿기지 않는 듯 놀람과 동시에 깊은 자책의 기색을 띄웠다.“결국 내가 이렇게 만든 거잖아요.”“자꾸 그런 식으로 네 탓 하지 마.”은정은 그녀의 뺨을 다정하게 쓸어내리며 말했다.“너는 둘 사이의 더러운 사정도 몰랐잖아.”유진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서선영은 그래도 이해가 가. 근데 구은서는 왜 그렇게까지 자기 엄마한테 협조한 거예요?”“자기 명예가 달린 문제인데, 게다가 지금은 연예인이잖아요. 설령 피해자라 해도, 그런 얘기 퍼지는 게 좋을 리 없잖아요.”은정은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대답했다.“십몇 년 전 그 일 땐, 은서는 진짜로 몰랐던 것 같아. 내가 샤워 끝내고 나왔을 땐 자고 있었고, 서선영이 소리 지르고 난리 쳐도 안 일어났거든.”“그땐 그냥 서선영한테 이용당한 거지. 근데 이번엔 서선영이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나도 몰라.”유진은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서선영은 정말 너무 악랄했다. 자기 딸까지도 그런 식으로 이용한다면, 못 할 짓이 뭐가 있을까?더구나 서선영은 알고 있었다. 이런 식의 루머가 은정에게 가장 치명적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게 바로 구은태에게도 가장 아픈 약점이라는 것을. 그래서 서선영은 또다시 그 수를 썼다.유진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중얼거렸다.“그때 전화받은 아주머니, 그 사람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찾을 수는 있어. 하지만 서선영한테서 돈을 받았고, 아마 협박도 받았을 거야.솔직히 말해줄 가능성은 작아.”은정은 냉정하게 말하자, 유진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그래도 찾아봐야죠. 당장 데리고 가서 집에 가서 진실을 말하게 해야 해요!”은정은 유진의 손목을 붙잡았는데,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웠다.“서두르지 마.”“어떻게 안 서둘러요! 지금 이미 밖에선 온갖 소문이 돌고 있다고요!”유진이 답답해하며 소리치자,
“그날 밤 전화했을 때 말이야.”유진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그게 바로 그날이었어요?”“그래.”은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그는 서선영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 몰랐다. 혹시 다시는 유진을 볼 수 없게 될까 두려워, 마지막으로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사실은 유진에게 자기 집으로 와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그 말이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았다.유진은 자책하듯 말했다.“나도 그때 뭔가 이상하단 걸 느꼈어. 근데 안 찾아갔어요.”은정은 유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그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고, 유진은 단지 모호한 한 통의 전화로 구씨 저택까지 달려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유진의 마음속은 여전히 무겁고 미안했다.“내가 갔더라면, 그 여자의 계략이 통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요.”“유진아, 우리 이제 과거에 대해 그만 후회하자. 응?”은정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말하자,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중요한 건, 서선영 모녀의 거짓말을 어떻게 밝혀낼지였다.“그 여자가 떠나라고 하니까, 진짜 떠나려던 거예요? 도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됐어?”유진이 화가 난 듯 말하자, 은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차가운 듯 부드러운 눈빛으로 대답했다.“내 명예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어. 네가 그 일 알고 나서 날 더 미워할까 봐, 그게 무서웠지.”호텔에서 유진이 여씨 집안 가족 모임에 참석한 걸 봤을 때, 그는 마음이 무너졌다.자신은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앞으로도 더러운 과거 때문에 손가락질받을 인생인데, 그런 자신의 곁에 유진을 두는 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유진은 따뜻하면서도 가슴 아픈 눈빛으로 은정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유진은 두 손으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안개 낀 듯한 눈동자가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은정의 어두운 그림자를 밀어내고 그 마음속까지 빛으로 채우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이번에는 유진이 먼저 입을 맞췄는데, 그 키스는 애틋하고 따스했
“정말 못됐어요. 그런데도 난, 이렇게 좋아하니까.”유진은 코끝을 훌쩍이며 속삭이듯 말하자, 은정의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고, 유진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유진은 흐느낌 속에 물었다.“그래도 또 떠날 거예요?”“안 떠나.”은정은 마치 유진의 몸이 자기의 일부라도 된 것처럼 꼭 끌어안았다.유진은 입술을 꾹 다물었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도 입가엔 참을 수 없이 번지는 미소가 피어올랐다.멀찍이서 둘을 바라보던 소희는 마침내 안도한 듯 미소를 지었고, 잠시 바라보다 조용히 돌아섰다.은정은 티켓 환불을 마치고, 유진의 손을 꼭 잡고 공항 로비를 빠져나왔다.그때 소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유진이는 맡길게. 잘 달래줘. 난 먼저 갈게.]은정은 묵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소희, 정말 고마워.”[혹시 집안 문제, 도와줄 일 있으면 말해.]은정은 원래의 냉정한 눈빛을 되찾으며, 대답했다.“아니, 내 일은 내가 해결할게.”[그래.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 임씨 집안 쪽 설득도 내가 도와줄 수 있어.]은정은 낮게 웃었다.“혼자 힘으로 안 되면 그때 부탁할게.”전화를 끊은 뒤, 유진이 옆에서 물었다.“소희, 갔어요?”“응. 우리 집에 가자.”은정은 다시 유진의 손을 꼭 잡았다.유진은 그날 회사에 가지 않고, 전화를 걸어 휴가를 냈다. 이경 아파트로 돌아오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선 은정은 유진을 번쩍 안아 들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유진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고,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세게 은정을 끌어안고 입맞춤에 응했다.유진의 반응은 은정을 더욱 자극했고, 입술은 불꽃처럼 뜨거웠다. 은정은 강렬함과 부드러움을 오가며 끊임없이 유진의 반응을 확인했고,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었을 때에야 숨을 고르며 입술을 떼었다.유진은 숨을 헐떡이며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언제 기억난 거야?”은정은 유진의 입술 위에서 낮게 물었다.유진의 커다란 눈동자엔 얇은 안개 같은 물기가 맺혀 있었고, 눈가엔 눈물 자국이 남아 붉
“나쁜 놈!”유진은 이를 악물고 욕설을 내뱉으며, 손등으로 눈물을 거칠게 닦고는 그대로 뛰쳐나갔다.허둥지둥 엘리베이터를 내려가던 중, 예상치 못하게 1층 현관 앞에서 막 차에서 내리는 소희와 마주쳤다.유진은 달려가 소희를 끌어안으며, 눈물로 목소리가 떨렸다.“소희야. 그 사람, 갔어.”소희는 차가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손을 들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침착하게 말했다.“지금쯤 공항 도착했을 거야. 얼른 차 타. 우리가 가서 막자.”유진은 울먹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응.”차에 올라탄 후, 소희는 아침 출근길 교통체증을 피해 가능한 한 빠른 길로 달렸다. 조수석에 앉은 유진은 여전히 망연자실한 얼굴이었다.소희는 유진을 스치듯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두려워하지 마. 이번엔, 걔가 지구 반대편까지 도망친다 해도 내가 꼭 데려올게.”유진은 이를 악물며 눈물 맺힌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응.”공항에 도착하자, 소희는 시계를 확인했다.“지금쯤이면 막 보안 검색대 들어갔을 거야. 넌 안으로 들어가. 난 밖에서 기다릴게.”유진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들이 북적이는 공항 안을 정신없이 뛰어다녔다.탑승 게이트 앞, 마침내 수많은 인파 속에서 그토록 익숙하고, 아프도록 그리운 구은정의 뒷모습을 발견했다.너무 긴장한 탓일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은정이 거의 들어가려던 순간, 유진은 겨우 목을 눌러 뜨거운 한마디를 토해냈다.“서인!”이에 은정의 발걸음이 멈췄고, 순간 고개를 홱 돌렸다. 사람들 사이 너머로, 유진이 서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지나가는 사람들, 소음, 움직임. 모든 게 멀어지고, 과거와 현재가 한꺼번에 겹쳤다.처음 만났던 순간. 잃어버린 가방을 찾아 건네주던 은정의 등.“정말 대단해.”감탄하던 유진의 눈빛. 차가웠던 은정의 반응. 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은정이 궁금했고, 따랐고, 그렇게 샤브샤브집에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유진은
방연하는 어이없다는 듯 여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지금 진심이에요? 머리 괜찮아?”여진구는 연하를 째려보았다. 연하는 주변의 예쁘게 꾸며진 꽃길과 풍선을 둘러보며 부러움 섞인 말투로 말했다.“이거 진짜 예쁘네요. 나도 나중에 이런 대접 한번 받아볼 수 있을까요?”“너한테 고백할 남자가 이런 것도 못 하면, 내가 대신 해줄게.”진구는 시원하게 말하자, 연하는 헛웃음을 지으며 받아쳤다.“미리 감사 인사드릴게요, 여진구 사장님.”그 시각, 유진은 집에 돌아왔지만 마음은 여전히 뒤숭숭했고, 계속 뭔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그날 밤은 뒤척이기만 하다가, 새벽이 되자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아침 7시가 되자, 임유민이 방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문에 기대선 그는 느슨하게 말했다.“누나, 이번 주 금요일 우리 학교 축구 경기 있어. 내가 수비수로 나가는데, 학교에서 가족 참관 받는대. 올래?”유진은 고개를 들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좋지. 꼭 응원하러 갈게.”유민은 그녀가 짐을 싸는 걸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근데 누나, 짐은 왜 싸?”유진은 노트북을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이젠 다시 이경 아파트로 돌아가려고.”유민은 조금 놀랐다.“안 돌아가겠다고 하지 않았어?”유진은 눈을 내리깔며 담담하게 대답했다.“가고 싶어졌어.”유민은 문에 기댄 채 웃으며 중얼거렸다.“역시 내 예상이 맞았네. 근데 이번에는 그렇게 바보처럼 굴지 마.”유진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뭐라고?”이에 유민은 씩 웃었다.“엄마는 아침 일찍 나갔고, 할머니한테는 꼭 인사하고 가. 안 그러면 또 가출했다고 난리 나실걸.”유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집에 없을 땐, 네가 좀 더 착하게 굴어. 할머니 기분 잘 맞춰 드리고.”유민은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말했다.“그건 숙모한테나 하라고.”유진은 참지 못하고 푸흐 웃음을 터뜨렸다. 짐을 정리한 후, 운전기사에게 짐을 차에 실어달라 부탁하고 자신은 할머니에게 인사드리
유진은 은정이 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직접 보고 나서야 다시 호텔 위층으로 돌아갔다. 혹시나 여씨 집안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할까 봐 대비해야 했다.라운지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흩어졌고, 유진이 그 안으로 들어섰을 때, 여씨 집안의 두 명의 며느리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셋째네는 평소에 그렇게 거칠게 굴더니, 오늘 자기 아들이 그렇게 당했는데도 조용하네?”다른 여성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들었는데 인후가 아가씨를 모욕해서 그렇게 된 거라더라고요. 이 일, 임씨 쪽이 알게 되면 여인후 가만두지 않을걸요?”“그래서였구나! 근데 때린 사람이 누군데?”“그건 잘 모르겠어요.”유진은 고개를 돌려 벽에 기대었다. 그 순간, 조금 전 은정의 어두운 눈빛과 먹먹한 표정이 머릿속을 스쳤고, 가슴이 다시 시리게 아파왔다.그때 여진구가 메시지를 보내오자, 유진은 핸드백을 챙겨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유진아!”호텔 정원에서 진구가 유진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다가왔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꺼내려 했지만 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선배!”이에 진구는 웃으며 말했다.“먼저 말해봐.”유진은 진지한 표정으로 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전 늘 당신을 선배로, 좋은 친구로 생각했어요. 그 이상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요.”“오늘 가족 모임에 참석하면서 다들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부디 오해가 더 커지지 않도록, 할아버지랑 어른들께는 확실히 말씀드려 주세요.”진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직 아무 말도 꺼내지도 않았는데, 유진은 이미 자신의 마음을 간파하고,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선을 그어버린 것이다.유진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 표정엔 피곤함이 묻어났다.“조금 피곤해서 먼저 갈게요. 할아버지께는 대신 인사 부탁드려요.”유진은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몇 걸음만 걸었을까? 그 순간, 뒤쪽 정원에 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형형색색의 하트 모양 꽃장식이 환하게 빛났고, 수많은 풍선과 조명이 하늘로 떠올랐다. 몽환적이고 낭만적인 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