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유진은 가볍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어 구은정을 바라봤다.“왜 그렇게 큰 반응을 보인 거예요?”은정은 대답하지 않고, 대신 유정의 팔에 남은 상처를 한 번 훑어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말없이 유진의 손을 잡아 차로 데려갔다.“일단 차에 타. 샤부샤부 가게에 약 있으니까 돌아가서 소독해.”차에 오르자 유진은 다시 옆으로 고개를 돌려 물었다.“도대체 왜 그래요?”은정은 한 팔을 핸들에 걸치고 전방을 바라봤다. 그의 깊은 눈빛 속에서 낮고 단단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별거 아냐. 난 원래 낯선 사람을 안 좋아해.”유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게 무슨 이유예요?”은정은 곧장 그녀의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모르는 사람,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은 최악의 의도를 갖고 있다고 생각해야 해. 냉정해 보일지 몰라도, 그래야 위험을 막을 수 있어.”유진은 눈을 굴리며 장난스럽게 반문했다.“그 정도까지 심각해요?”그러나 은정의 표정은 단호했다.“심각하지. 열 번 중 아홉 번은 우연히 별일이 없을 수도 있어. 하지만 단 한 번, 그 한 번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난 감당 못 해.”유진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순간 심장이 두근거렸고, 동시에 기묘한 기쁨이 번져왔다.“알겠어요. 기억할게요.”그제야 은정은 다시 물었다.“아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유진은 차분히 방금 일을 설명했다. 말이 끝나자 문득 무언가 떠올라 창밖을 크게 뜬 눈으로 살폈다.“여기 근처에 맥도날드나 KFC 같은 햄버거집 있어요?”은정이 고개를 끄덕였다.“앞 사거리 모퉁이에 하나 있어.”“지금 바로 거기로 가요!”유진이 급히 말하자 은정은 이유를 묻지 않고 차를 돌렸다.가게에 들어가자 두 사람은 곧장 그곳을 뒤졌다. 근데 정말로, 조금 전 아이를 데리고 있던 두 여자가 앉아 있었다.여자들은 임유진이 서늘한 기세의 남자와 함께 다가오자 순간 긴장한 기색을 보였다.“왜 또 왔죠? 아까 일은 다 끝난 거 아니었어요?”유진은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걱
또 다른 여자가 유진의 손목을 꼭 움켜쥔 채 놓지 않았다.“경찰서로 가요. 이런 인신매매범을 그냥 풀어줄 수는 없어!”“나도 같이 가겠다니까. 대신 손부터 놓으세요!”유진이 손목을 힘껏 비틀며 외치자, 아이를 안은 여자가 고함을 질렀다.“안 돼, 풀면 너는 바로 도망칠 거잖아!”유진은 어쩔 수 없이 시선을 아이에게 돌렸다.“너 이름이 정정이지? 네가 직접 네 엄마한테 말해봐. 내가 널 데려간 게 맞니?”남자아이는 눈을 크게 뜬 채 멍하니 임유진을 바라보았다. 겁먹은 듯 입을 열지 못했다.“그럼 경찰서로 같이 가죠.”유진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가긴 가야겠지만, 저 먼저 남자친구한테 전화 좀 할게요.”주변에는 이미 구경꾼이 잔뜩 몰려들었다. 누군가는 손가락질하며 인신매매범은 죽어 마땅하다고 욕했다.그러나 또 누군가는 얼굴 하얗고 단정한 차림의 유진을 보며 도저히 인신매매범 같아 보이지 않는다며 수군거렸다.“유진 씨!”익숙한 목소리가 인파 속에서 들려왔고, 유진이 고개를 돌리자 뜻밖에도 구연이 다가오고 있었다.구연은 상황을 보고 곧장 다가와 물었다.“무슨 일이에요?”유진을 붙잡고 있던 여자가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이 여자, 우리 조카를 훔쳐 간 인신매매범이에요!”“인신매매범?”구연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더니 여자의 손을 거칠게 쳐내며 차갑게 말했다.“말은 근거 있게 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명예훼손이자 무고죄에 해당해요.”“애초에 아이를 제대로 챙기지 못한 건 당신들인데, 제 친구가 호의를 베풀어 챙겼을 뿐이죠. 그런데도 이렇게 누명을 씌우죠?”구연의 눈빛은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경찰서로 가는 건 좋지만 거기서 당신들이 무고한 걸로 드러나면, 저희는 반드시 법적으로 대응할 거예요.”맞은편에 있던 두 여자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고, 서로 눈치를 주고받더니 억지로 웃으며 얼버무렸다.“아이가 무사하니 됐죠. 이번 일은 그냥 없던 일로 해요.”그렇게 말하곤 두 여자는 아이를 안고 도망치듯
유진의 볼이 붉게 물들었다.“우리 약혼 준비는 어떻게 되고 있어요?”은정이 고개를 끄덕였다.“아버지가 날짜를 골랐어. 이번 주말에 너희 할아버지를 찾아뵙고 상의할 거야.”“정말요?” 유진의 눈빛이 반짝였고 설렘이 얼굴 가득 번졌다.“그럼 우리가 지금 약혼하면, 10월엔 결혼식 할 수 있는 거예요?”은정은 유진의 조급함에 웃음이 났지만, 결국 손을 꼭 잡아주며 단호히 답했다.“할 수 있어.”그 한마디에 유진의 가슴은 더 크게 뛰었고, 또한 10월까지 남은 시간이 한없이 길게만 느껴졌다.차가 드디어 영화촬영장 근처에 들어서자 도로에 차량이 부쩍 늘었다. 관광 기간은 아니었지만, 촬영장을 찾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았다.유진은 길가의 과자 가게를 보며 눈을 반짝였다.“이문 오빠는 저 집 밤빵을 좋아하잖아요. 우리도 사 가요.”“차에 있어. 내가 사 올게.”은정은 차를 세우고 안전벨트를 풀면서 다시 한번 단단히 말했다.“움직이지 말고 기다려.”“알았어요.” 유진은 손을 흔들며 은정을 안심시켰다.은정이 가게 안에서 줄을 서는 동안, 유진은 과즙 음료 뚜껑을 열어 한 모금 마셨다.그러나 곧 시선이 창밖에 고정되었다.길 건너 인파 속에 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꼬마가 울먹이며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작은 입에서 엄마를 부르는 다급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고 부모와 떨어진 게 분명했다.유진은 주저하지 않고 차에서 내려 달려갔다. 그러고는 꼬마 앞에 무릎을 굽히고 목소리를 낮췄다.“엄마를 못 찾은 거야?”아이 눈에 금방 눈물이 맺히더니, 두려움이 섞인 눈빛으로 유진을 올려다보았다.“혹시 엄마나 아빠 전화번호 기억하니?” 유진은 휴대폰을 꺼내며 부드럽게 말했다.“누나가 전화해 줄게. 그러면 금방 오실 거야.”“몰라요.” 꼬마는 고개를 흔들며 작게 대답했다.“괜찮아요.”유진은 다정하게 웃었다.“누나가 같이 기다려 줄게. 부모님이 못 찾으면 경찰에 신고할 테니까 곧 오실 거야.”유진은 꼬마의 손을 잡아 근처 벤치에 앉았다.
우정숙은 2층에서 내려와 일부러 소희를 찾았다.“좋은 마음으로 한 일이었는데, 괜히 일을 그르친 것 같아.”소희는 담담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형남 잘못 아니에요. 모두가 이해하고 있어요.”우정숙도 따라 웃었다.“오늘 이렇게 분명히 말해준 것도 잘된 거야. 앞으로 내가 굳이 유민이 가정교사 문제로 더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네.”소희는 미안한 듯 고개를 숙였다.“사실 저도 가끔은 제가 유민이 공부를 방해하는 게 아닐지 걱정돼요.”“몇 년 동안 네가 가르쳐주면서 좋은 학습 습관을 길러준 게 가장 소중한 거지. 다른 건 하나도 걱정 안 해.”우정숙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그저 네 몸이 힘들까 봐 그게 걱정이지.”소희의 눈빛이 따뜻하게 젖어 들었다.“형님, 고마워요.”“한 식구끼리 무슨 그런 말을 해.” 우정숙은 다시 환하게 웃더니, 거실 쪽을 흘깃 보았다.“그나저나 유진이는? 아까까진 집에 있던 것 같은데.”소희가 웃으며 대답했다.“남자친구 돌아왔잖아요. 약속 잡고 바로 나갔어요.”우정숙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어쩌다 저렇게 연애밖에 모르는 딸이 됐는지 원.”비록 보수적인 생각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딸이 한없이 깊이만 빠져드는 모습은 달갑지 않았다.그러나 소희는 차분하게 말했다.“유진이 연애에만 눈먼 게 아니에요. 전에 사귀던 사람도 배신이 드러나자 미련도 없이 끊어냈잖아요. 감정에 휘둘리면서도 순간순간 아주 냉정해질 줄 아는 애예요.”우정숙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그러면 이번엔 내가 운이 좋은 거겠지. 상대가 구은정이니.”소희의 눈빛은 맑게 빛났다.“형님, 안심하세요. 유진이가 아무리 적극적이어도 은정은 결코 가볍게 대하지 않아요.”“그 사람은 누구보다 진중하고, 또 유진이처럼 따뜻한 사람이 옆에 꼭 필요해요.”우정숙은 소희의 세심한 말에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 말이 맞지.”그러고는 소희의 팔을 살며시 끼었다.“나랑 뜰에 좀 걸을까?”이틀 뒤, 유진과 은정은 퇴근하자마자 함께
임구택의 눈빛이 짙게 내려앉았다.딸은 자신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존재였다. 그런 아이를 어떻게 남에게 맡길 수 있겠는가?유민은 말없이 고개를 젖히며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고, 맞은편에 있던 유진은 배꼽 잡고 웃음을 터뜨렸다. 소희 또한 시선을 떨구며 미소를 감추었다.유민은 결국 참지 못하고 말했다.“엄마는 숙모가 힘들까 봐, 구연 이모를 제 가정교사로 데려오려 했어요. 그런데 전 거절했어요.”구택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네 가정교사 문제는 네가 선택할 일이지만 네 엄마 생각도 틀리진 않다. 앞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숙모가 더는 네 공부를 봐 주지 못할 거야.”유민의 이목구비는 굳건하게 빛났다.“그래도 전 다른 사람은 싫어요. 숙모 말고는 누구도 가르칠 수 없어요.”구택은 두 손을 소희 어깨에 올리더니 몸을 숙여 웃음을 보였다.“들으면 들을수록, 나보다도 숙모한테 더 의지하는 것 같네?”소희는 당당하게 턱을 들었다.“그럼 이제 반성 좀 해야겠네?”구택의 시선이 소희에게 고정됐는데 그 눈빛은 유난히 깊고 따뜻했다.“무슨 반성? 내가 너무 뛰어난 아내를 얻은 걸 반성하라는 건가?”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말에 소희는 순간 말이 막혔다.유진은 고개를 저으며 못 견디겠다는 듯 유민의 팔을 잡아끌었다.“그만 보자, 정말 삼촌의 닭살 멘트는 차마 못 듣겠어.”잠시 후, 유민은 자신의 방 책상 앞에 앉아 과제를 풀고 있었다.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리자 우정숙이 들어왔다.유민이 먼저 돌아봤다.“제가 구연 이모를 거절한 거 엄마를 곤란하게 한 건 아니죠?”우정숙은 고개를 저으며 다가와 유민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전혀 아니야. 네가 어릴 땐 네가 너무 산만해서 네 뜻과 상관없이 억지로 가정교사를 붙였지만, 이젠 중학생이잖아.”“가정교사를 둘지 말지는 네가 결정할 일이야.”우정숙은 말을 멈추었다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이번에 미리 상의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데려온 건 내 실수였어. 과학 대회며, 승마며, 쇼핑까지.”“네가 백 비
우정숙은 백구연을 대문 앞까지 배웅하며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오늘 일은 미안해요. 유민이가 고집도 세고 또 정에 끌리는 성격이라 제가 미리 말을 해 줬어야 했는데.”구연은 담담히 미소 지었다.“괜찮아요. 유민이가 이모와 정이 깊어 가정교사를 바꾸고 싶지 않은 건 당연한 일이에요. 앞으로 힘들 땐 공부 문제로 언제든 저를 찾으셔도 돼요.”“고마워요.” 우정숙이 진심 어린 눈빛으로 답했다.“별말씀을요, 사모님께서는 이만 들어가세요.”백구연은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천천히 대문 밖으로 걸어 나갔다.자신의 차에 올라탄 뒤, 양손으로 운전대를 잡은 채 한동안 가만히 앉아 전방을 바라보았다. 그때 가방 속 휴대전화가 울렸고, 화면에 뜬 이름은 수민이었다.[이모, 오늘 시간 있어요? 저 공부 자료 사러 가고 싶은데 같이 가 주시면 안 돼요?]구연의 얼굴에는 평소의 온화함이 사라진 상태였다. 목소리조차 냉랭했다.“미안해. 오늘은 할아버지를 모시고 행사에 가야 해서.”요즘 들어 거의 자매처럼 가까이 지내던 이모가 이렇게 선을 긋자 수민은 순간 놀랐다. 이윽고 조금 풀이 죽은 듯 대답했다.[알겠어요, 그럼 엄마랑 갈게요.]“그래.” 짧게 대답한 뒤, 다른 전화가 들어오자 바로 수민의 전화를 끊고 새 전화를 받았다.[구연아, 임씨 집안 작은 도련님이랑은 잘 지내고 있냐?]백호균의 너그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이에 구연은 입술을 꼭 다물었다가 낮게 고개를 숙였다.“할아버지, 유민이가 가정교사를 바꾸기 싫어해서요. 전 지금 임씨 저택에서 나와 집으로 가는 길이에요.”[그렇구나.] 백호균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죄송해요. 제가 부족했어요.”[네 잘못은 아니야.] 백호균이 호탕하게 웃었다.[아이란 본래 익숙한 사람에게 의지하는 법이지, 낯선 이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잘됐다. 집으로 와서 나랑 함께 있어라.]“곧 돌아갈게요.”이내 구연은 시동을 걸고 차를 몰기 시작했다.임씨 저택 거실.구연과 우정숙이 나가자 유민은 곧장 소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