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희는 웃으며 말했다. “손가락에 좀 더 힘을 줘서 다시 한번 해봐!”“좋아!”아심은 흥미롭게 소희의 말대로 힘을 주었지만, 이번에는 성냥이 불이 붙었지만 너무 세게 튕겨서 정확하지 않았다. 이에 강시언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너의 실수를 내가 직접 바로 잡아야겠군.”아심은 성냥을 시언에게 건네며 기대에 찬 표정을 지었다. 시언은 성냥 상자와 성냥을 한 손으로 잡고, 마치 보지도 않는 것처럼 성냥을 튕겨 불꽃놀이에 정확히 점화했다. 불꽃은 하늘로 치솟아 거대한 모란꽃이 터졌다.“와!” 아심은 감탄하며 고개를 들었고 시언은 아심을 바라보며 말했다. “본인이 능숙하지 않다는 걸 인정할래?”아심은 눈을 반짝이며 손을 등 뒤로 하고 미소를 지었다. “이건 분명 당신의 잘못이에요!”“어떻게 내 잘못이야?”시언이 묻자 아심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봐봐요. 내가 못 하는 일마다 누군가가 대신해 주니까, 내가 왜 능숙해질 필요가 있겠어요?”팩트에 시언은 할 말을 잃었다. 임구택은 소희의 어깨를 감싸며 조금 멀리 떨어지지자 소희는 그런 구택을 의아하게 쳐다보았다.“우리가 보면 형님이 마음껏 못할까 봐.”소희는 두 사람을 보며 웃었고 내년의 시끌벅적한 장면이 더욱 기대되었다. 구택도 한 번 시도하여 가장 먼 곳에 있는 불꽃놀이를 점화했다. 이에 소희는 불만을 품고 성냥을 들고 구택과 경쟁했다.시언도 합류하여 성냥을 하나 점화하여 불꽃놀이에 던져 두 번째 불꽃놀이를 점화했다. 두 불꽃놀이가 연달아 하늘로 치솟자 소희도 질세라 세 번 시도했다.결국, 마지막 불꽃놀이는 기술 과시의 장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아심은 시언의 손을 빌려 겨우 성냥을 튕겨 불꽃놀이를 점화하게 되었다. 이에 아심은 아이처럼 기뻐하며 시언을 끌어안고 방방 뛰었다.시언은 지금이 더 창피한 것 같았지만, 아심의 허리에 손을 얹었고 밀어내려던 손은 결국 그대로 멈추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강아심, 좀 차분해!”아심은 숨을 고르며 시언의 목을 감싸고, 눈에 불꽃이
몇 사람은 새벽이 가까워져서야 서로 작별 인사를 하고 휴식을 취하러 갔다. 헤어질 때 강아심은 소희를 살짝 안아주며 말했다. “소희, 새해 복 많이 받아!”소희는 아심의 스킨쉽을 싫어하지 않았고, 오히려 가볍게 안아주며 말했다. “새해 복 많이 받아!”그제야 아심은 소희를 놓아주고, 정교하고 예쁜 봉투를 건네며 말했다. “나도 좀 준비했어. 작은 성의지만 꼭 받아줘.”“먼저 나에게 어떤 자격으로 받아야 하는지 알려줘. 친구 관계라면 내가 너보다 한 살 많아서 받을 수 없어. 다른 관계라면 몰라도.”이에 아심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 어떤 관계가 되든, 오늘 강씨 저택에서 설을 보낼 수 있어서 이 세뱃돈은 당연히 네게 줘야 해.”둘 다 똑똑해서 굳이 말을 길게 할 필요는 없었다. 소희는 아심이 자신과 오빠의 미래를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마음이 묘하게 무거워졌다. 소희는 그 봉투를 받아 들고 다시 아심을 안으며 말했다.“그럼, 내년에도 받을 수 있길 바랄게!”아심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소희는 아심을 놓아주고 말했다. “잘 자!”“잘 자!” 아심은 가볍게 손을 흔들며, 소희가 임구택에게로 걸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아심 역시 기다리고 있던 강시언에게로 걸어갔다.불꽃놀이가 끝나자, 찬란했던 하늘은 다시 밤하늘의 본래의 어둡고 고요한 모습을 되찾았다. 이것은 화려함을 잃었다는 뜻이 아니라, 밤하늘이 자신만의 새벽을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었다....아심과 시언은 서원으로 돌아왔고 아심이 말했다. “졸려요? 나는 전혀 졸리지 않은데 조금 더 같이 있어 줄래요?”아심은 이 밤이 이렇게 빨리 지나가는 게 아쉬웠고, 잠들기도 아쉬웠다. 불빛 아래서, 시언의 이목구비는 잘생기고 뚜렷했다. 아심의 말에 시언은 조용히 말했다. “잠깐 기다려.”아심은 방으로 돌아갔다가 나올 때, 손에 홍목 상자를 들고 있었다. 그러고는 상자를 아심에게 건네며 말했다. “너와 소희를 위해 준비한 선물이고 이건 네게 주
오랜 시간이 지나, 시언은 아심을 꽉 껴안았다.“이 선물은 계속 간직해. 언제든 원할 테니까.” 시언의 목소리는 어둡고 깊었고 아심은 시언의 옷을 꽉 잡으며 말했다. “정말로 이제 신경 쓰지 않아요!”예의에 어긋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에게 경멸받을 수도 있지만, 지금 아심은 아무것도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그렇게 급해?” 시언이 허스키한 목소리로 웃자 아심은 눈썹을 찡그리며, 시언의 외투를 젖히고 입으로 물었다. 약간의 통증이 느껴지자 시언은 약간 눈살을 찌푸리며, 화난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작은 야생 고양이같아!”아심은 심하게 물지는 못하고, 곧바로 몸을 일으켜 시언의 옷을 다듬고 이마를 기대었다. 시언은 아심을 품에 안고, 두 사람은 조용히 서로를 껴안고 있었다. 그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희미한 폭죽 소리와 새해 첫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를 들며, 이 순간 두 사람은 하나가 된 것 같았다....다음 날 아침, 아심은 세수하고 나서 나가려다 테이블 위에 놓인 강재석이 준 상자를 보았다. 아심은 상자를 열어 안에 든 것을 꺼내 보았는데 그것은 옥으로 만든 팔찌였다. 원석 사이사이의 색감이 우아하고, 재질이 세밀하여 비싸 보였다. 아심이 그것을 들고 있을 때, 시언이 들어와 아심이 든 팔찌를 보고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게 어젯밤에 할아버지가 준 거야?”“네!” 아심은 시언의 표정이 조금 이상해 보이자 물었다. “뭔가 특별한 의미가 있어요?”시언은 깊은 뜻이 담긴 눈빛으로 말했다. “이건 할머니의 혼수품 중 하나야.”아심은 놀라서 숨을 들이쉬며, 그 값어치를 느꼈다. “할머님의 혼수품을 왜 나한테 주신 거죠?”시언은 아심을 바라보며 말했다. “왜일까?”아심은 시언의 눈을 깜빡이며 응시했다. “그럼 나 이거 받아야 해요?”시언은 그 팔찌를 아심의 손목에 걸어주며 말했다. “받아.”아심은 자기 손목을 내려다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이 팔찌와 당신이 준 것까지. 전 이제 값어치가 어마어마해졌어!”“넌 원래부
소희가 따뜻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아주버님과 형님에게는 일일이 연락하지 않을 거니까 어머님이 대신 전해주세요.”[걱정하지 마라!] 노정순이 사랑스럽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방금 너의 시아버님이 강재석 어르신에게 전화했으니 네가 나 대신 안부를 전해주면 돼.”“그럴게요.”[임구택이랑 즐겁게 지내고, 서둘러 돌아오지 않아도 돼.]“네!”소희는 전화를 끊고 강재석을 바라보며 말했다. “전할 말은 다 했어요. 어머니가 대신 할아버지께 안부를 전해 달라고 하시네요.”“이미 일찍 전화 받았어!” 강재석이 기쁜 표정으로 소희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자, 너희 오빠랑 강아심이 왔는지 보러 가자, 아침 먹으러 가자.”“아참!” 강재석이 돌아보며 말했다. “보내준 설날 선물 봤니?”“찾아보니까 장수를 기원하는 그런 거던데요?” 소희는 조금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희는 왜 이걸 보내줬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자 강재석이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건 너에게 준 게 아니야. 너와 구택이의 아이에게 준 거야.”너무 앞서나가는 강재석에 소희는 할 말을 잃었다. ‘정말 성급하시네요!’...설 명절이라 요요가 무척 들떠서 일찍 일어났다. 우청아가 내려왔을 때, 요요와 김화연은 이미 마당에서 요요의 동물들에게 먹이를 주고 돌아왔다. 김화연이 청아를 보며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사준 옷 왜 안 입었니?”설 명절 때, 김화연은 청아와 요요에게 새 옷을 사줬다. 명절에 새 옷을 입는 것은 꼭 지켜야 할 규칙 같은 것이었다. 특히 청아의 경우에는 옷, 장신구, 신발, 가방까지 모두 새로 사주었다.청아는 사실 김화연이 옷을 선물하고 싶어 하면서도 자신이 거절할까 봐 핑계를 댄 것을 알고 있었다. 이에 청아는 웃으며 말했다. “나중에 입을게요!”장시원이 청아 뒤에서 계단을 내려오며 청아의 어깨를 감싸 안고 말했다. “뭘 어짼다고?”김화연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너를 갈아치우라고!”그러자 시원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
시원이 말하지 않자, 청아도 조급해하지 않고 뒤에서 요요와 함께 손가락 놀이를 했다. 시원이 차를 요양원으로 들어가자, 청아는 놀란 눈으로 바라봤고, 곧 감동과 따스함이 밀려왔다. 세 사람은 차에서 내려 간호사가 다가와 그들을 안내하며 웃으며 말했다. “우임승 씨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카드놀이를 하고 계세요. 아주 잘하시더라고요.”청아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카지노에서 그렇게 오래 지냈으니 잘할 수밖에 없지.’물론 간호사는 내막을 모르고 계속 우임승의 카드 실력을 칭찬했다. 곧이어 청아는 불현듯 뭔가 생각났는지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 “돈 내기는 아니겠죠?”“당연히 아니죠!” 간호사가 바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우리 요양원에서는 도박이 금지되어 있어요. 그냥 아저씨들이 모여서 카드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내는 거예요.”청아는 그제야 안심했다. 시원은 한 손으로 요요를 안고 다른 손으로 청아의 손을 잡으며 부드럽게 웃었다. “괜찮아. 내가 아버님을 특별히 신경 쓰게 했으니 너무 예민하게 굴지 마.”청아는 시언의 깊고 온화한 눈빛을 보며 입술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고맙긴 뭐가 고마워.” 시원이 청아를 강하게 품에 끌어안고는 머리를 한 번 툭 치며 말했다. “고맙다면, 빨리 나랑 결혼해 줘. 맨날 걱정하게 하지 말고!”청아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안 도망갈 텐데 뭐가 걱정이야?”요요도 청아의 머리를 살짝 치며 말했다. “빨리 아빠랑 결혼해요! 아빠는 정말 좋아요!”시원이 손을 들자 요요도 작은 손을 들어 함께 박수를 쳤다. 둘의 호흡이 아주 잘 맞았다. 청아는 두 사람을 보며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이미 방에 도착했다. 따뜻하고 편안한 방 안에서 우임승은 휠체어에 앉아 다른 노인과 체스를 두고 있었다.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구경하며 웃고 떠들고 있었다.방에는 창문 장식이 붙어있고, 등불이 걸려 있으며, 옆 테이블에는 다양한 간식과 과일이 놓여 있었다. 설 명절 분위기가
우임승은 우청아가 찾아올 줄은 몰랐지만, 그래도 세뱃돈을 준비해 두었다. 청아는 세뱃돈 봉투에 적어도 20만원이 들어 있는 것을 보고 경계하며 물었다. “이 돈 어디서 난 거예요?”요양원에 있으면 돈 쓸 곳이 없었고, 그랬기에 청아는 우임승에게 돈을 따로 주지 않았다. 다시 도박에 빠질까 봐서였다. 그러자 우임승은 급히 청아에게 설명했다. “설 명절 때 주방에 몇 가지 요리법을 적어줬어. 그 보수로 받은 돈이야. 내가 받기 싫다고 했지만, 그들이 억지로 주길래 받아둔 거야.”장시원은 청아의 손을 살며시 쥐며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지 말고, 흥분하지 말라고 일깨워 주었다. 청아는 마음속에 깊은 상처가 있어서인지, 나쁜 쪽으로만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시원의 따뜻하고 강한 손길이 청아를 금세 진정시켰고, 얼굴빛도 차분해졌다.“그냥 가지고 계세요. 요요는 돈 쓸 일이 없어요.”“나는 여기서 먹고 마시는 걱정이 없고, 옷도 제때 새로 갈아입으니까 돈 쓸 일이 없어.” 우임승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요요가 돈 쓸 일이 없다는 건 나도 알아. 그러니까 그 돈을 모아둬.”청아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시원이 일어나서 요요에게 말했다. “아빠랑 잠깐 나가 놀자. 외할아버지랑 엄마가 얘기 좀 하게.”요요는 아빠의 말을 이해하고, 작은 손을 내밀어 시원에게 안겼다. 시원은 청아를 한번 쳐다보고, 요요를 안고 밖으로 나갔다. 둘이 나가자, 우임승은 더 긴장한 듯이 청아에게 물었다. “과일 좀 먹을래? 이 사과 정말 달고, 포도도 맛있어. 네가 어릴 때부터 포도를 좋아했잖아.”청아는 사과를 하나 집어 들고, 천천히 껍질을 깎으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서 잘 지내고 있어요?”“왜 안 좋겠니? 내가 얼마나 살쪘는지 봐!” 우임승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여기 오는 사람들은 다 부유하거나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야. 내가 여기 살 수 있는 건 다 너 덕분이야. 나는 만족해.”“시원 씨에게 감사해야 해요.”“알고 있어, 다 알고 있어!”
우임승은 말했다. “네가 항상 너만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알아. 네가 좋다면 좋은 거야. 하지만, 너는 장시원과 잘 지내야 해. 제멋대로 굴지 말고, 또...”“또 시작이네요!” 청아는 우임승을 노려보며 말했다. “나는 어린애가 아니에요. 아무 이유 없이 화내지 않아요.”그러자 우임승은 고개를 숙이며 혼자서 웃으며 말했다. “내 눈에는, 너는 여전히 어린 애야.”청아는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가슴이 아팠고, 눈길을 돌렸다. 곧이어 우임승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너는 운이 나빴어. 나 같은 아빠를 만나고, 그런 엄마를 만났으니까. 사실 네 엄마도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어. 나중에 왜 그렇게 변했는지 모르겠어.”“아마도 내가 가장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네 엄마가 너무 큰 부담을 느껴서 점점 더 이기적으로 변했을 거야.”청아는 차분하게 말했다. “사람은 선택의 순간에 항상 선택해야 해요. 그리고 엄마는 오빠를 선택했을 뿐이고요.”우임승은 다시 말했다. “어제 네 오빠가 나에게 전화했어. 나는 네게 문제를 일으킬까 봐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말하지 않았어.”“그저 네가 빌려준 집에 아직도 살고 있다고 했어. 네 오빠가 나를 보러 오려고 했지만, 오지 말라고 했고.”청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오빠 보고 싶어요? 오빠가 보러 오게 해도 돼요.”“나는 네 오빠가 너를 해치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아. 하지만 걔는 마음이 약해서 네 엄마가 조금만 달래면 네 상황을 말해줄지도 몰라.”“그리고 네 엄마가 네가 장시원과 함께 있는 걸 알게 되면 너는 평화로운 날이 없을 거야. 그래서 너희들 외에는 아무도 만나지 않을 거야!”청아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 더 대화를 나눈 후, 우임승은 청아에게 떠나라고 재촉했다. “설날이니까 장씨 집안에 분명 많은 손님이 있을 거야. 그러니 돌아가자고 해. 여기서 너무 오래 있지 말고, 나는 여기서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마침 시원이 요요를 데리고
“그럼 나는 안 만날래요!” 시언은 단호하게 거절하자 강재석이 말했다. “멀리서 일부러 찾아온 분인데, 우리 둘 다 만나지 않으면 예의가 아니지. 그냥 얼굴 한 번 보는 거야, 너한테 뭘 하라는 것도 아니고!”하지만 시언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렇게 정중하게 찾아온 거라면, 저는 더더욱 만나지 않을 거예요.”강재석은 시언을 설득하지 못해 조금 초조해졌다. “너는 내가 말하는 것도 안 듣는구나?”시언은 단호했다. “다른 건 다 괜찮지만, 이건 안 돼요!”“너 이 자식!” 강재석은 갑자기 꽃병에 꽂힌 깃털 먼지떨이를 집어 들고 때릴 듯이 자세를 취했다. “네가 삼각주에서는 진언이지만, 집에서는 내 손자야. 말을 안 들으면 때릴 거야!”시언이 막 말을 하려던 찰나, 뒤에서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시언이 고개를 돌리자, 강아심이 문 앞에서 웃음을 참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심이 돌아서서 웃음을 참으려는 모습을 보고 시언은 점점 얼굴이 어두워졌다. 자신의 이미지가 완전히 망가진 것이다.“아심아, 들어와라!” 강재석이 웃으며 부르자 아심은 들어오며 말했다. “할아버지, 저를 부르셨어요?”“그래, 아심아. 네가 시언이랑 같이 가라.” 강재석은 아심이 사랑스럽다는 듯 말했고 그 말에 시언은 잠시 멈칫하며 물었다.“데려가라고요?”그러자 강재석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아심이랑 같이 가.”시언은 할아버지를 보며 어이없어했다.“왜 미리 말하지 않으셨어요?”“미리 말하면 아심이가 재밌는 장면을 못 보잖아?” 강재석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하자 시언은 할 말을 잃었다. 아심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손으로 입을 가리며 돌아섰다. 원래는 너무 편하게 웃고 싶지 않았지만, 참을 수가 없었다. 정말 귀여운 할아버지였다. 시언은 시간을 확인하고 말했다.“거기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오면, 아마 해가 질 거예요.”“걱정 마라, 내일 돌아와도 늦지 않아.” 강재석이 웃으며 말하자 시언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심에게 물
구은서의 말은 애절했고, 눈물 가득한 얼굴은 누가 보아도 가련했다. 구은태는 자신이 이십 년 넘게 아끼고 사랑해온 딸을 바라보며 격했던 감정이 점차 가라앉기 시작했다.임유진과 구은정은 눈빛을 마주쳤다. 오늘 이 자리에서 반드시 서선영 모녀를 끝장내야 한다는 예감이 동시에 스쳤다. 다시는 숨 쉴 틈을 줘선 안 된다.유진이 입을 열려던 찰나, 휴게실 문이 갑자기 열리고 몇 명의 경찰이 들어왔다. 방 안 상황을 본 경찰들은 잠시 놀란 듯했지만, 곧 차분히 물었다.“서선영 씨는 누구시죠?”서선영은 여전히 바닥에 무릎 꿇고 있던 참이라 얼굴에 눈물이 범벅된 채로 당황스럽게 대답했다.“저예요. 무슨 일이죠?”경찰은 단호하게 말했다.“현재 한 유괴 사건에 연루되셔서, 저희와 함께 경찰서로 가주셔야겠네요.”“유, 유괴 사건이요?”서선영은 얼이 빠진 듯 말을 더듬었고, 은서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경찰이 왜 여길 찾아온 거지?’‘분명히 손기수를 시켜 장말숙 가족에게 절대 신고하지 말라고 위협했고, 따로 사람도 붙여 감시하게 했는데, 분명 신고는 없었어. 그런데 대체 어떻게 경찰이?’유진은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때가 왔고, 이번에는 절대 놓치지 않을 것이다. 이번만큼은 서선영 모녀에게서 도망칠 구멍조차 허락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이에 구은태도 놀라 물었다.“유괴라니, 무슨 소리죠?”경찰은 구은태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지금 서선영 씨께서 유괴 사건에 관련된 정황이 있어 조사 차 동행을 요청드려요. 협조 부탁드릴게요.”은태는 다시 서선영을 바라보았다.“또 뭘 꾸민 거야, 이 악마 같은 여자가.”은태의 목소리는 얼어붙은 듯 차가웠다. 서선영은 얼굴이 창백해진 채 입을 벌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때, 은정이 나섰다.“같이 가죠. 조금 전까진 은서가 우리 가족이라며 감쌌잖아요? 가족이면 함께 있어야죠.”그 말에 구은서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무언가 아주 불길한 일이 다가오고 있었다.원래 오늘 구씨 파티가 끝
서선영은 곧장 구은태에게 달려가 그를 붙잡았다.“여보!”구은태는 휘청였지만 몸을 간신히 지탱했고, 그녀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쉰 목소리로 고함쳤다.“꺼져, 이 악독한 년!”서선영은 힘없이 문 쪽으로 내동댕이쳐졌고, 그 순간 문이 열리며 구은서가 들어왔다. 방 안의 참혹한 광경을 본 은서는 당황한 듯 물었다.“무슨 일이에요?”구은태는 핏발 선 눈으로 서선영을 가리키며 외쳤다.“네 엄마한테 물어봐. 대체 뭘 한 건지!”은서는 아버지의 분노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혹시 은정을 모함한 일이 들킨 건 아닌가 싶어 애써 표정을 감추고 서선영을 바라보며 물었다.“엄마, 무슨 일이야?”서선영은 그저 얼굴을 감싸 쥐고 울고 있을 뿐이었다.그때, 구은태는 갑자기 은서를 향해 시선을 돌리더니 서선영을 바라보고 물었다.“사실대로 말해. 은서, 이 애가 정말 내 딸이 맞아?”“맞아요!”서선영은 지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은서는 당신 딸이에요. 그건 정말 확실해요!”“좋아. 지금 제대로 말 안 했다가 내가 친자 검사로 진실을 알게 되면, 그땐 죽여버릴 거야!”구은태는 분노로 이를 갈며 말하자, 서선영은 흐느끼며 소리쳤다.“정말이에요! 제 목숨 걸고 맹세해요. 제가 거짓말이면 천벌을 받아도 좋아요!”그제야 은서는 상황이 점점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느꼈다. 이건 은정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문제였다.은서는 구은정에게 맞아 쓰러져 있는 최이석을 돌아보았다. 그 순간, 어떤 장면이 뇌리를 스쳐갔고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지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서선영은 엉금엉금 기어가며 구은태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애원했다.“여보, 제가 배신하고 잘못한 건 맞아요. 하지만 은서는 정말 당신 딸이에요. 그렇게 똑똑하고 예쁜 아이잖아요.”“당신도 얼마나 예뻐했어요. 은서 봐서, 제발 이번만 용서해 주세요!”그제야 은서는 모든 걸 직감했다. 온몸에서 힘이 빠지며,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그러나 임유진은 이를 꽉 물고 단호하게
최이석도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멍하니 있다가, 순간 정신을 차리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곧장 도망치려는 듯 문을 열었는데, 그 문 너머에는, 구은정의 날렵하고도 위압적인 실루엣이 서 있었다.은정은 말없이 다가오더니 그대로 발을 들어 최이석의 가슴팍을 걷어찼다.“컥!”이석은 뒤로 넘어지며 카펫 위에 엎어졌다. 가슴을 움켜쥐며 고통스러운 신음을 냈지만, 그 울음은 진짜인지 연기인지 분간되지 않았다.그때, 숨을 거칠게 내쉬며 구은태가 천천히 걸어왔다. 그의 얼굴은 철저히 일그러져 있었고, 그 눈빛은 분노로 이글거렸다.그리고, 구은태는 서선영 앞에 멈춰서더니 아무 말 없이 손을 들어 서선영의 뺨을 세차게 내리쳤다.뺨을 후려치는 소리와 함께 서선영은 그 충격에 그대로 몸이 비틀어졌고, 얼굴을 감싸 안으며 온몸을 떨기 시작했다.“이 더러운 년!”구은태는 서선영의 옷깃을 거칠게 움켜쥐고 또다시 손을 들어 그녀의 반대쪽 뺨을 갈겼다.“제가 잘못했어요. 한순간, 제가 정신이 나갔었어요.”서선영은 털썩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구은태의 손을 붙잡고 오열했다. 그녀의 두 볼은 이미 시퍼렇게 부어오르고 있었다.“대체 너희 둘, 언제부터 이런 짓을 벌인 거야!”구은태는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물었다.그 순간, 최이석이 조롱 섞인 웃음을 흘리며 비틀비틀 일어섰다.“솔직히 말해줄까요? 서선영이 당신 만나기 전부터 벌써 나랑 자고 있었어요. 회사 들어간 이후로는 매주 만나서 몸 섞었고요.”“입 닥쳐!”서선영은 미쳐 날뛰듯 소리쳤지만, 최이석은 그녀를 보지도 않고 구은태만을 노려봤다.“저 여자는 당신을 사랑한 적 없어요. 사랑한 건 당신 지갑뿐이고요. 30년 전, 당신이 술 마시고 덮쳤다고 생각했죠?”“웃기지 마요. 전부 미리 짜놓은 대본이었으니까. 그때 은서가 생겼고, 도망친 척하면서도 사실 계속 강성에 있었어요.”“당신 바로 곁에서, 우릴 속이고 있었던 거죠. 참, 당신 원래 부인 왜 갑자기 병세가 악화됐는 줄 알아요?”“서선영이 일부러 임신한 배를
구은서는 서선영보다 훨씬 더 잔인했기에, 임유진은 점점 불안해졌다.“혹시 그 애까지 다치게 되는 건 아닐까요?”이번 일은 유진이 먼저 제안한 계획이었다. 그런데 은서가 장말숙을 압박하기 위해 그 손자를 납치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그럴 일 없어.”그러나 구은정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 아이는 절대 다치지 않을 거야.”유진은 그제야 조금 안심했고, 은정은 이어서 설명했다.“장말숙은 처음부터 독을 품은 호랑이와 손잡은 셈이지. 이건 스스로 자초한 일이야.”“은서가 장말숙의 손자를 납치했다는 건 이미 그 집안을 완전히 조사해 놓았다는 뜻이야.”“내가 강성을 떠나지 않는 한, 언젠가는 아이를 이용해서 조종하려 했을 거야.”“그런데 네가 먼저 움직여준 덕분에 우린 미리 조치할 수 있었고, 결국 아이도 지켜냈지.”유진은 고개를 갸웃하며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은정을 바라봤다.“예전과 완전 딴사람이 된 것 같아요. 위로까지 이렇게 부드럽게 하다니?”은정은 애옹이를 옆으로 밀어내고 유진을 품에 끌어당겼다.“질문 하나 해도 돼? 너는 서인을 좋아해, 아니면 구은정을 좋아해?”유진은 입술을 깨물며 웃었다.“둘 다 같은 사람 아닌가요?”은정은 묵직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분명히 다르다고 생각했잖아.”유진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중얼거렸다.“사실 처음부터 한 사람이었어. 다른 건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않느냐의 차이였을 뿐이죠.”그리고 고개를 들며 은정의 눈을 마주 봤다.“내 말 맞죠?”이에 은정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그럼, 예전의 내가 널 사랑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유진은 고개를 저으며 촉촉히 빛나는 눈으로 미소 지었다.“아니요. 오히려 시언 사장님이 날 사랑하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나는 그게 정말 고맙거든요.”은정의 눈빛이 깊고 짙어졌다. 가슴이 저릿할 만큼 미안함과 애틋함이 가득 차올랐다. 은정은 고개를 숙여, 유진에게 입을 맞췄다.“유진아. 난 늘 널 사랑했어.”은정은 언제나 유진만을 마음에
“역시 이런 식으로 문제가 될 줄 알았어요.”은서는 싸늘한 눈빛으로 말하자, 손기수가 물었다.[이제 어떻게 하죠?]구은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장말숙한테 손자가 있잖아요. 그 애를 데려가요. 안전한 곳에 숨겨두고 지켜여.”이에 손기수는 비죽 웃으며 말했다.[그건 납치 아닌가요?]“이건 우리 엄마 뜻이에요.”은서는 그 말을 강조하듯 단호하게 말했다.“일만 제대로 끝내면, 보수는 두 배로 줄 거예요.”그제야 손기수는 만족스레 웃으며 대답했다.[좋아요. 저한테 맡기세요.]은서는 다시 신신당부했다. “숨겨두기만 해야 해요. 절대 다치게 하면 안 돼요.”이에 손기수는 급히 말했다.[우리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하겠어요!]은서는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엄마 말씀만 잘 따르면,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거예요.”모든 게 은정을 내쫓는 날까지만 버티면 그만이었다. 장말숙의 아들이 위협되지 않게 만들어야 했고, 지금 중요한 건 은정을 최대한 빨리 강제로 떠나게 만드는 일이었다.두 시간 후.오현빈이 급히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형님, 큰일이에요. 장말숙 아주머니 손자가 납치당했어요!”은정의 눈빛이 차갑게 되었다. 그와 유진의 계획은 장말숙의 아들이 철없는 무뢰한이라는 걸 이용해, 서선영 쪽 사람들과 충돌이 일어나게 만들고 그 사이에서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었다.그런데 서선영은 한 수 더 앞질렀다. 직접 손자를 납치해 버린 것이다. 은정은 느긋한 듯 말했지만, 말투엔 서늘한 살기가 묻어났다.“왜 못 막았어?”현빈이 대답했다.[도착했을 땐 이미 데려가고 난 뒤였어요. 아이는 집에 혼자 있었고요.]장말숙은 요즘 일을 그만두고 손자를 돌보고 있었다. 자기 아들은 놀기 좋아하고 도박을 일삼으며 최근 큰 빚까지 졌고, 며느리는 친정으로 들어가 버렸다.장말숙이 서선영의 돈을 받은 것도 빚을 갚고 며느리를 다시 불러들이기 위한 것이었다.그날 점심을 먹고 잠시 슈퍼에 다녀온 사이, 손자가 납치된 것이다.은정은 알고 있
“아주머니는 분명 그날 일에 대해 알고 있어요. 그 사람한테 직접 확인하러 갈 거예요!”임유진은 말을 끝내자마자 그대로 뛰쳐나갔다.“유진아!”구은서는 몇 걸음 뒤쫓았지만, 유진은 이미 계단 아래로 사라지고 있었다. 은서는 굳게 이를 악물며 눈살을 찌푸렸다.서선영이 집에 없다는 걸 알자, 그녀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장말숙 아주머니 잘 지켜봐요. 유진이 그날 일 알아보려고, 지금 그 사람 찾으러 갔으니까.”그러나 서선영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걔가 뭘 안다고 찾아?]은서는 차분히 말했다.“유진은 임씨 집안 사람이야. 찾으려면 못 찾을 사람이 없죠.”이에 서선영의 말투도 조금 무거워졌다.[알았어. 내가 금방 사람 붙여서 장말숙 감시하라고 할게.]은서는 이어서 냉랭하게 따져 물었다.“절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는다면서요? 근데 걔는 어떻게 안 거예요?”유진이 알았다는 건, 임씨 가족들까지도 이미 감지했다는 뜻이었다. 이에 은서는 불안감에 입술을 꾹 눌렀다.서선영은 얼버무리며 말했다.[아마 도우미 중 누가 말실수했을 거야. 다시 철저히 단속해 둘게. 걱정하지 마. 소문 좀 난다 해도 너한테까지 영향은 안 가. 넌 그냥 조용히 대본 연습이나 해.][이번 영화, 내가 네 외삼촌 꼬드겨서 겨우 투자받은 거 알지? 이번 기회 잘 잡아야 해. 딴 건 신경 쓰지 마. 연기만 잘하면 돼.]은서는 그 말에 더욱 날카로워졌다. 이번 영화는 유명 감독의 대작이었고, 은서에게는 이미지 회복의 유일한 기회였다. 그렇기에 서선영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나 곧 촬영 들어가요. 그러니까 이번 일 절대 망치지 마요.”[알았어!]서선영은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유진은 급히 차로 돌아와 깊게 숨을 들이쉰 후, 곧장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서선영 쪽에서 곧 움직일 거예요.”[알고 있어. 이미 준비해 뒀어.]은정의 목소리는 침착했고, 유진은 안심하며 숨을 내쉬었다.이윽고,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고생 많았어.]이에 유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
“아파요!”유진은 짧은 비명을 내뱉으며 순식간에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팔을 뻗어 구은정의 목에 매달리듯 안으며, 자기 얼굴을 숨기려 했다.이에 은정은 그녀의 어깨를 쓸어내리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낮게 웃었다.“왜 예전 같지 않아? 예전엔 몰래라도 키스하려고 했으면서, 이젠 실컷 하라고 해도 도망치기 바쁘네.”유진은 은정을 꼭 안으며 눈가가 붉게 물들었지만 속은 터질 듯 행복했다. 이제는 몰래 키스할 필요가 없다. 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할 수 있었다.은정은 유진의 발그레한 귀에 입을 맞추며 낮게 속삭였다.“전에 난 늘 걱정했어. 네가 그냥 어린 마음에 나한테 끌리는 거라고. 그저 신기하고 새로워서, 가질 수 없으니까 더 마음이 가는 거라고.”“우리가 진짜로 사귀게 되면 금세 질릴 거라고. 나는 사실 정말 재미없는 사람이야. 총 쏘고 싸우는 것 빼곤 할 줄 아는 게 없어.”“요즘 애들이 좋아하는 것도 몰라. 마음도 더 이상 젊지 않아.”“그래서 넌 언젠가 내가 생각보다 별거 아니라는 걸 깨닫고, 그 마음이 식을까 봐 두려웠어.”유진은 목이 메어, 콧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내가 기억 잃었을 때, 왜 다시 나한테 다가왔어요?”은정은 예전엔 그렇게 차갑게 거절했던 사람인데, 교통사고 한 번 났다고 갑자기 사랑하게 된 걸까? 혹시 죄책감 때문은 아니었을까?그런 생각이 유진을 계속 불안하게 했다. 잠시 침묵하던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아마 너 없는 세상이, 정말로 견딜 수 없을 만큼 어둡고 차가웠기 때문일 거야.”그 말에 유진의 가슴은 요동쳤다. 그녀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마음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려는 듯, 어둠을 걷어내고 자신의 빛으로 은정의 세상을 덮어주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유진은 다시 한번, 은정에게 입을 맞췄는데, 이번엔 더욱 깊고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은정은 곧 유진을 세게 안았고, 불같이 뜨거운 열기가 유진을 감쌌다. 죽음 같은 어둠 속에서 되살아난 사람처럼, 은정의 키스는
“그 사람들이 설마...”유진은 커다란 눈을 뜨고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구은정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네가 생각한 그대로야.”유진은 믿기지 않는 듯 놀람과 동시에 깊은 자책의 기색을 띄웠다.“결국 내가 이렇게 만든 거잖아요.”“자꾸 그런 식으로 네 탓 하지 마.”은정은 그녀의 뺨을 다정하게 쓸어내리며 말했다.“너는 둘 사이의 더러운 사정도 몰랐잖아.”유진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서선영은 그래도 이해가 가. 근데 구은서는 왜 그렇게까지 자기 엄마한테 협조한 거예요?”“자기 명예가 달린 문제인데, 게다가 지금은 연예인이잖아요. 설령 피해자라 해도, 그런 얘기 퍼지는 게 좋을 리 없잖아요.”은정은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대답했다.“십몇 년 전 그 일 땐, 은서는 진짜로 몰랐던 것 같아. 내가 샤워 끝내고 나왔을 땐 자고 있었고, 서선영이 소리 지르고 난리 쳐도 안 일어났거든.”“그땐 그냥 서선영한테 이용당한 거지. 근데 이번엔 서선영이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나도 몰라.”유진은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서선영은 정말 너무 악랄했다. 자기 딸까지도 그런 식으로 이용한다면, 못 할 짓이 뭐가 있을까?더구나 서선영은 알고 있었다. 이런 식의 루머가 은정에게 가장 치명적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게 바로 구은태에게도 가장 아픈 약점이라는 것을. 그래서 서선영은 또다시 그 수를 썼다.유진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중얼거렸다.“그때 전화받은 아주머니, 그 사람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찾을 수는 있어. 하지만 서선영한테서 돈을 받았고, 아마 협박도 받았을 거야.솔직히 말해줄 가능성은 작아.”은정은 냉정하게 말하자, 유진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그래도 찾아봐야죠. 당장 데리고 가서 집에 가서 진실을 말하게 해야 해요!”은정은 유진의 손목을 붙잡았는데,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웠다.“서두르지 마.”“어떻게 안 서둘러요! 지금 이미 밖에선 온갖 소문이 돌고 있다고요!”유진이 답답해하며 소리치자,
“그날 밤 전화했을 때 말이야.”유진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그게 바로 그날이었어요?”“그래.”은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그는 서선영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 몰랐다. 혹시 다시는 유진을 볼 수 없게 될까 두려워, 마지막으로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사실은 유진에게 자기 집으로 와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그 말이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았다.유진은 자책하듯 말했다.“나도 그때 뭔가 이상하단 걸 느꼈어. 근데 안 찾아갔어요.”은정은 유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그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고, 유진은 단지 모호한 한 통의 전화로 구씨 저택까지 달려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유진의 마음속은 여전히 무겁고 미안했다.“내가 갔더라면, 그 여자의 계략이 통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요.”“유진아, 우리 이제 과거에 대해 그만 후회하자. 응?”은정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말하자,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중요한 건, 서선영 모녀의 거짓말을 어떻게 밝혀낼지였다.“그 여자가 떠나라고 하니까, 진짜 떠나려던 거예요? 도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됐어?”유진이 화가 난 듯 말하자, 은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차가운 듯 부드러운 눈빛으로 대답했다.“내 명예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어. 네가 그 일 알고 나서 날 더 미워할까 봐, 그게 무서웠지.”호텔에서 유진이 여씨 집안 가족 모임에 참석한 걸 봤을 때, 그는 마음이 무너졌다.자신은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앞으로도 더러운 과거 때문에 손가락질받을 인생인데, 그런 자신의 곁에 유진을 두는 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유진은 따뜻하면서도 가슴 아픈 눈빛으로 은정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유진은 두 손으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안개 낀 듯한 눈동자가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은정의 어두운 그림자를 밀어내고 그 마음속까지 빛으로 채우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이번에는 유진이 먼저 입을 맞췄는데, 그 키스는 애틋하고 따스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