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친구로서 지승현의 세심함은 정말 나무랄 데가 없었다.“어젯밤 천둥이 심하게 쳤잖아. 사실 너에게 전화를 걸까 했는데, 네가 천둥소리에 깨어나지 않았다면 내 전화 때문에 깰까 봐 안 했어.”승현은 아심에게 음식을 집어주며 말했다.“아침에 잘 잤다고 하니 마음이 놓이더라.”아심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늘 나만 생각하지 않아도 돼. 나도 스스로 잘 챙길 수 있어. 그날 밤은 그저 우연이었어.”몇 년에 한 번 있을 법한 우연이었다. 그러자 승현은 가볍게 웃었다.“누군가를 생각하는 건 본능이야. 이건 의식적으로 조절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아심은 살짝 눈썹을 치켜올리고, 고개를 숙여 식사를 이어갔다. 승현은 계속 그녀에게 음식을 집어주고, 국을 떠주며 다정하게 말했다.“모레는 토요일이야. 할머니를 뵈러 가려고 하는데, 너도 같이 갈래?”“좋아. 토요일에 특별한 일은 없어. 있어도 미룰 수 있으니까.” 아심은 미소 지었다.“할머니의 휴식만 방해하지 않으면 돼.”“괜찮아. 어제 할머니가 전화하셔서 주말에 너랑 올 수 있냐고 물으셨어. 네가 안 오면 나도 오지 말라고 하시더라. 나이 드시면 아이처럼 변하신다니까.”승현은 부드럽게 웃었다.“우리 점심에 할머니와 함께 식사하고, 오후에는 음악회를 가자. 아주 유명한 악단인데, 티켓 구하기가 어렵더라. 다행히 친구한테 부탁해서 구했어.”“좋아!” 아심은 그의 계획에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자 승현은 소리 없이 미소 지었다. 사실, 때로는 아심이 자신의 계획에 반대하며 자기 생각을 말해주길 바랐다.이렇게 순응하는 모습은 오히려 여전히 자신과 거리를 두고 있다고 느끼게 하였다. 아심은 승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한 듯 고개를 들어 말했다.“이건 내 첫 연애라서 어색하게 굴 수 있어. 잘못하는 게 있으면 말해줘, 고칠게.”승현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아니야, 잘못하는 건 없어. 오히려 네가 더 의견을 말해줬으면 좋겠어. 예를 들어, 음악회가 싫다고 하면 다른 곳으로 약속 장소
“너와 함께 가지 못한다면, 가는 것도 안 가는 것도 다 헛수고야.”승현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상관없어. 마침 어제 사촌 여동생이 가족 채팅방에서 음악회 티켓 못 구했다고 투덜거렸거든.”“그때는 너와 가려는 욕심에 주지 않았는데, 지금 전화해서 티켓 주면 되겠네.”“좋네. 그럼 난 먼저 갈게.” 아심이 말했다.“고객과 어디서 만나기로 했어? 내가 데려다줄게.”“아니야, 시간도 촉박한데, 너는 빨리 표를 전해주러 가. 난 택시 타고 갈게.”“그럼 도착하면 알려줘.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고.”“알았어.”아심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택시를 잡아 떠났다. 아심이 떠난 후에야 승현은 사촌 여동생 지아윤에게 전화를 걸어, 음악회 티켓이 생겼다고 알렸다. 그러자 지아윤은 기뻐하며 물었다.[티켓 몇 장이야?]“두 장이야.” 승현의 대답에 아윤은 더욱 기뻐하며 연신 감사했다.[오빠, 정말 고마워! 다음에 내가 밥 살게!]그러자 승현은 웃으며 말했다.“우리가 무슨 남남이야. 너 어디야? 내가 티켓 가져다줄게.”아윤은 쇼핑 중이었고, 위치를 알려주자, 지승현은 가벼운 농담을 던졌다.“이렇게 신나 하는 거 보니, 혹시 남자친구 생긴 거야?”[아니야! 그냥 친한 친구랑 가는 거야.]아윤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남자친구는 아니었지만, 새로 사귄 친구와의 음악회였다. 상대방이 예술가 집안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그가 좋아할 만한 것을 찾아간 것이었다.그러자 승현은 더 묻지 않고, 전화를 끊은 뒤 티켓을 전하러 갔다....아심이 만난 사람은 오래된 고객이었다. 회사가 다음 주에 큰 변화를 앞두고 있어 관리가 필요했다. 아심은 그와 저녁 무렵까지 이야기를 나누며 초기 계획을 세웠다. 고객은 시간을 빼앗은 것이 미안해서, 저녁 식사를 청했다.아심이 거절하려던 순간, 성연희에게서 전화가 왔다. 연희는 저녁에 만나자고 하며, 일에 관해 할 이야기가 있다고 말했다. 덕분에 아심은 핑계가 생겨, 고객에게 양해를 구한 뒤 연희와 넘버나인에서 만나기로
연희가 아심의 팔을 끼고 조백림에게 말했다.“조백림, 여기 유정 씨도 있는데, 미인을 보면 꼬시고 싶어지는 마음을 좀 자제해야 하는 거 아니야?”유정이 옆에서 말했다.“천만에, 그걸 자제하면 조백림은 더 이상 그 유명한 조백림이 아니게 되잖아!”그러나 백림은 순진무구한 얼굴로 말했다.“무슨 소리야, 이건 정상적인 업무상 대화일 뿐인데, 어쩌다 이렇게 왜곡된 거야?”유정도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다들 너를 잘 아니까 그렇지!”백림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아직 날 충분히 잘 알지 못하는 거네. 너무 걱정하지 마, 너한테 기회를 줄 테니까.” 유정은 얼굴이 약간 달아오르며,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사람들은 한바탕 웃고 떠들다가, 임구택이 옆에 있는 소파에 앉아 있는 강시언을 바라보며 말했다.“가서 인사라도 하지 그래요?”시언은 담담하게 대답했다.“괜찮아.”구택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모두가 인사를 하는데, 형님만 안 하면 오히려 더 이상하지 않겠어요?”시언은 무심한 표정으로 말했다.“우리는 원래부터 정상적인 사이가 아니었어.”그 말에 구택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앉아서 웃고 떠들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술을 마실 수 있는 사람들은 술을 마시고, 술을 못 마시는 사람들은 주스를 마셨다.장명원은 요요를 안고 노래를 불렀다. 먼저 뽀로로 송을 부른 후, 자두 송을 불렀다. 요요와 그는 함께 합창했는데, 맑은 남성의 목소리와 귀여운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어우러져 사람들을 웃게 했다. 그러나 장시원이 명원을 향해 소리쳤다.“목소리 좀 낮춰, 그리 듣기 안 좋으니까 음도 틀리지 말고. 요요 목소리까지 이상하게 만들지 마!”명원은 마이크를 잡고 뒤돌아보며 말했다.“양심 좀 있어봐, 누가 누구를 틀리게 만든다는 거야?”요요는 그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말했다.“삼촌, 아빠한테 그렇게 큰 소리로 말하지 마요. 그러다 아빠한테 혼나요!”명원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
조용한 전주가 흐른 뒤, 클래식한 현악기가 울려 퍼지자 방 안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조명이 어두워지면서, 백림의 눈빛도 점점 깊어졌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고, 낮고 진지한 목소리는 마치 진심으로 누군가에게 마음을 고백하는 듯했다.“우울한 악장이 들릴 때마다기억 속의 상처가 떠오르고흰 달빛을 볼 때마다네 얼굴이 생각나생각하면 안 되는데, 생각할 수 없는데나는 자꾸 생각하게 되어 혼란스러워누가 나를 아프게 하고 누가 나를 그리워하게 했을까바로 너야.”...그 노랫소리에 강아심의 시선이 약간 흐려졌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한 방향을 바라보았고, 마침 강시언도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그러나 이내 각자 시선을 피했다.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그사이에 쌓인 묘한 교감은 여전히 아프고 쓸쓸했다. 방 안의 조명은 계속 반짝였고, 마치 혼란스러운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 같았다.“나의 많은 후회와 많은 바람들너는 알고 있니널 사랑해이렇게 명확하고, 이렇게 확고한 신앙널 사랑해이렇게 따뜻하고, 이렇게 용감한 힘.”...아심은 줄곧 듣고 싶어 했던 후반부 가사가 이렇게 가슴을 저미게 할 줄 몰랐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눈을 다른 곳으로 힘겹게 옮겼다. 어릴 적부터 연습해 온 습관이 있는데, 이렇게 하면 눈물이 흐르지 않기 때문이었다.이 노래는 부르기 쉽지 않았지만 백림은 자연스럽게 곡을 소화했다. 특히나 진심이 묻어나는 대목을 부를 때, 눈에 비치는 조명이 더욱 반짝여, 그 진심 어린 모습에 유정의 시선이 잠시 멈췄다.진지한 남자는 가장 매력적이고, 진지하게 노래를 부르는 남자는 더더욱 강렬한 매력을 발산하는 법이었다. 유정은 그가 이 매력을 이용해 여자를 속이는 일이 쉽겠다고 생각했다.오랜 세월 바람둥이로 살아온 그가 진심을 더하면 완벽해질 수밖에 없었다. 백림은 유정의 속마음 같은 건 알 리가 없었다. 노래를 마친 그는 큰 박수를 받으며 완벽하게 무대를 마무리했다.그 후 다른 사람들도 노래를 불렀지만, 백림의
강아심은 한 번 블랙잭을 해본 적이 있어서 약간의 경험은 있었다.손에 7, 8, 10 같은 카드가 들렸을 때, 그것도 같은 무늬가 아닐 경우, 그냥 던져버렸다. 결과적으로 연달아 이런 카드만 나왔고, 가장 큰 수가 10을 넘기지 못했다.다음 판이 되자 상황이 조금 나아져서 가장 큰 카드가 하트 K였다. 그래도 썩 좋은 패는 아니었다.“그거 남겨.”강시언이 아심의 옆에서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나 아심은 갑자기 반항심이 생겨, 일부러 못 들은 척하고 카드를 던져버렸다.이번 판은 성연희와 장명원이 마지막까지 대결을 펼쳤다. 결국 연희가 명원을 물리쳤지만, 공개된 카드는 하트 J가 최고였다.연희는 기쁨에 넘쳐 얼굴이 활짝 펴졌고, 명성에게 갑작스럽게 키스를 퍼부었다. 다른 사람들은 한숨을 쉬며 아쉬워했고, 명원의 탄식은 특히 더 컸다. 그러자 간미연은 그를 보며 투덜거렸다.“너 정말 게임을 할 줄 아는 거야?”명원은 억울한 듯 말했다.“이번엔 내가 실수했어. 기다려, 너를 위해 복수해 줄 테니까!” 아심도 이번엔 좀 더 버텼어야 했다고 생각하며 약간 아쉬워했다. 이윽고 아심의 뒤쪽에서 시언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말을 안 들으면 이런 결과가 나오는 거야.”아심은 뒤돌아보지 않은 채, 앞을 바라보며 작게 말했다.“소희도 페어를 들고 있었는데 결국 졌어요. 나도 버텼어도 결과는 똑같았을 거예요.”시언은 점점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그렇다면, 여전히 날 믿지 못하는 거네.” 아심은 말문이 막혀 더 이상 대꾸할 수 없었다. 시언은 아심이 침묵하는 모습을 보고, 방금 한 말이 너무 강했는지 고민하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시언은 아심의 옆모습을 가까이에서 보았다. 아심의 얼굴 윤곽은 매끄럽고, 옆에서 보면 얼굴이 도톰하고 눈꼬리가 약간 올라가 있어, 웃을 때는 순수하고, 집중할 때는 부드럽고 매혹적이었다.부드러운 곡선의 머리카락 한 가닥이 귀 옆으로 떨어져 있었다. 그녀의 귀는 하얗고 섬세했으며, 조명이 비쳐 반투명한 핑크빛이 맴돌았다.시
몇 라운드를 더 진행한 후, 이번에는 아심이 매우 좋은 패를 잡았다. 다른 사람들도 제법 좋은 패를 받은 것 같아서, 몇 번의 라운드가 지나도 유정이나 간미연 같은 사람들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시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아심은 그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해져서 차분하게 베팅을 이어갔다. 이때 갑자기 그녀의 휴대전화가 진동했다.아심은 화면을 한 번 보고는 순간적으로 마음이 무거워졌다. 아심은 카드를 내려놓으며 말했다.“전화 좀 받고 올게요.”시언은 그녀의 전화 화면에 반짝이는 이름을 보고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는 베팅을 멈추고, 좋은 패를 그대로 던져버렸다.전화는 지승현에게서 걸려온 것이었고,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아직 고객과 함께 있어? 언제 끝나? 내가 데리러 갈게.]“괜찮아, 내가 혼자 돌아갈 수 있어.”아심은 발코니로 나가 귀에 들리는 방의 소음과 함께 복잡한 마음을 느꼈다. 이때 승현은 갑자기 나직하게 말했다.[오늘 할머니가 쓰러지셨어.]아심은 순간적으로 멍해졌다.“지금은 어떠셔?”[이미 응급조치를 마쳤고, 지금은 잠들어 있어. 내가 곁에서 할머니를 지키고 있어.]“의사 말은 어때?”[이런 일이 앞으로 더 자주 생길 거라고 해. 언제든 떠날 수 있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하더라고.]아심은 김후연이 생각나 마음이 무거워졌다.“지금 당장 할머니를 뵈러 가도 될까?”[아냐, 주말에 내가 데리고 갈게.]“할머니를 잘 돌봐드리고, 너도 몸조심해.”[그럴게. 마음이 좀 답답해서 그런데, 너 바쁘지 않으면 나랑 조금만 더 얘기할 수 있을까?]아심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응, 그래.”...아심은 발코니에서 계속 지승현과 통화를 나누었고, 시언은 몇 판을 더 한 후 카드를 내려놓고 일어섰다.“난 일이 있어서 먼저 돌아갈게. 다들 즐겁게 놀아.”사람들은 카드를 내려놓으며 시언과 작별 인사를 했다.시언은 말했다.“다들 계속 즐겨. 난 혼자 나갈 테니까 아무도 따라오지 마.”연희는 아
강시언의 목소리는 더욱 깊어졌다.“그럼 나중에 할아버지를 만나면, 네가 직접 돌려드려. 그분이 너에게 주신 거지, 내가 대신 돌려줄 권리는 없어.”아심은 그를 바라보며, 손가락을 무의식적으로 움츠렸다.“내일 떠나는 거예요?”“응.”시언이 짧게 대답한 순간, 그의 시선이 갑자기 아심의 뒤쪽으로 향했다. 아심 옆의 방문이 열리더니, 술에 취한 네다섯 명의 남자가 비틀거리며 나왔다. 그중 한 명이 밀쳐져 아심 쪽으로 넘어졌다.시언은 아심을 잡아당겼고, 아심의 뒤에서 비틀거리던 남자는 그대로 넘어졌다. 시언은 아심을 끌어안으며 뒤로 물러났고, 아심은 그의 품에 부딪혔다.이와 동시에 시언은 벽에 몸을 부딪치며 아심 쪽으로 달려든 남자를 한 발로 걷어찼다. 그 남자는 체중이 100kg이 넘고, 키가 180cm가 넘는 거구였다. 시언의 발길질에 나가떨어진 그는 쿵! 소리와 함께 바닥에 무겁게 쓰러졌다.함께 있던 남자들은 술이 반쯤 깼고, 두 명은 쓰러진 남자에게 다가갔고, 다른 두 명은 시언 쪽으로 다가왔다.“이것 봐, 사람을 때려?”한 남자는 술에 취해 입이 비뚤어졌고, 얼굴의 살이 떨리며 시언의 옷깃을 잡으려 했다. 그러나 그의 손이 채 닿기도 전에, 아심이 재빠르게 몸을 돌려 한 발을 날렸다.쾅! 소리와 함께, 남자의 팔이 꺾이는 듯했고, 그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다른 남자들은 두 사람을 경계하며 둘러싸고 있었지만, 시언은 아심을 자신의 뒤로 끌어당기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나 시언의 강력한 압박감과 단단한 기세는 나머지 남자들의 정신을 번쩍 들게 하며, 기를 꺾어놓았다.“당신들, 왜 사람을 때리는 거야?”시언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남자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쓰러진 사람과 다친 사람을 부축하고, 비틀거리며 도망쳤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강자를 피하는 법이었고, 이것은 일종의 자기 보호 본능이었다.복도는 다시 조용해졌다. 지나가던 몇 명의 직원들도 아무 일도 못 본 척하며 재빨리 사라졌다. 시언은 아심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
강아심은 잠깐 멍해졌다가 마음을 다잡았다.‘난 단지 평범한 간호사일 뿐이야.’아심은 그렇게 자신을 다독이며 시언의 상처를 살펴보러 다가갔다. 그리고 시언과 너무 가까이 앉지 않으려고 애썼다.하지만 시언의 상처를 보자, 아심의 빠르게 뛰던 심장이 갑자기 움켜잡힌 듯 멈췄다. 아심은 반사적으로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어떻게 다친 거예요?”시언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조용히 대답했다.“노도의 부하 중 한 명이 하녀로 변장해 내 거처에 침입했어.” 아심의 미간은 여전히 펴지지 않았고, 아심은 소독솜으로 시언의 상처를 닦아내면서 조금 힘을 주었다.“분명 아주 예쁜 미녀 요원이었겠죠.”아심은 무심한 듯, 그러나 은근히 쏘아붙이는 어조로 말했다. 시언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상처가 깊었고, 제대로 치료하지 않아 이미 약간 염증이 생긴 상태였다. 아심은 마음을 다잡고, 신중하게 상처를 소독하며 약을 발랐다.둘 사이에는 더 이상 대화가 없었고, 방 안은 조용해졌다. 원래 시언은 말이 많은 편이 아니었고, 아심과 함께 있을 때도 주로 아심이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아심도 말을 멈췄기에, 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만이 남아 있었다.시언은 소파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상처가 마치 자신의 것이 아닌 듯, 상처를 소독할 때조차 미간을 찌푸리지 않았다. 대신 시언은 고개를 숙여 아심을 바라보았다.아심은 진지한 표정으로 치료에 집중하고 있었고, 아심의 하얗고 부드러운 손가락이 시언의 팔에 닿을 때마다 가벼운 전율이 느껴졌다. 마치 그에게 한 방의 마취제를 놓는 것 같았다.“상처 염증이 생겼어요. 그러니 절대 대충 넘기지 마요. 며칠간은 물에 닿지 않도록 하고, 매일 소독과 약 바르기를 잊지 말고요.”아심은 시언의 팔을 조심스럽게 들어올려 몇 번 감았다.“술도 절대 마시면 안 돼요!”“아심.”시언은 아심의 얼굴을 진지하게 바라보며 불쑥 물었다.“넌 지승현을 사랑해?”갑작스러운 질문에
“역시 이런 식으로 문제가 될 줄 알았어요.”은서는 싸늘한 눈빛으로 말하자, 손기수가 물었다.[이제 어떻게 하죠?]구은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장말숙한테 손자가 있잖아요. 그 애를 데려가요. 안전한 곳에 숨겨두고 지켜여.”이에 손기수는 비죽 웃으며 말했다.[그건 납치 아닌가요?]“이건 우리 엄마 뜻이에요.”은서는 그 말을 강조하듯 단호하게 말했다.“일만 제대로 끝내면, 보수는 두 배로 줄 거예요.”그제야 손기수는 만족스레 웃으며 대답했다.[좋아요. 저한테 맡기세요.]은서는 다시 신신당부했다. “숨겨두기만 해야 해요. 절대 다치게 하면 안 돼요.”이에 손기수는 급히 말했다.[우리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하겠어요!]은서는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엄마 말씀만 잘 따르면,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거예요.”모든 게 은정을 내쫓는 날까지만 버티면 그만이었다. 장말숙의 아들이 위협되지 않게 만들어야 했고, 지금 중요한 건 은정을 최대한 빨리 강제로 떠나게 만드는 일이었다.두 시간 후.오현빈이 급히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형님, 큰일이에요. 장말숙 아주머니 손자가 납치당했어요!”은정의 눈빛이 차갑게 되었다. 그와 유진의 계획은 장말숙의 아들이 철없는 무뢰한이라는 걸 이용해, 서선영 쪽 사람들과 충돌이 일어나게 만들고 그 사이에서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었다.그런데 서선영은 한 수 더 앞질렀다. 직접 손자를 납치해 버린 것이다. 은정은 느긋한 듯 말했지만, 말투엔 서늘한 살기가 묻어났다.“왜 못 막았어?”현빈이 대답했다.[도착했을 땐 이미 데려가고 난 뒤였어요. 아이는 집에 혼자 있었고요.]장말숙은 요즘 일을 그만두고 손자를 돌보고 있었다. 자기 아들은 놀기 좋아하고 도박을 일삼으며 최근 큰 빚까지 졌고, 며느리는 친정으로 들어가 버렸다.장말숙이 서선영의 돈을 받은 것도 빚을 갚고 며느리를 다시 불러들이기 위한 것이었다.그날 점심을 먹고 잠시 슈퍼에 다녀온 사이, 손자가 납치된 것이다.은정은 알고 있
“아주머니는 분명 그날 일에 대해 알고 있어요. 그 사람한테 직접 확인하러 갈 거예요!”임유진은 말을 끝내자마자 그대로 뛰쳐나갔다.“유진아!”구은서는 몇 걸음 뒤쫓았지만, 유진은 이미 계단 아래로 사라지고 있었다. 은서는 굳게 이를 악물며 눈살을 찌푸렸다.서선영이 집에 없다는 걸 알자, 그녀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장말숙 아주머니 잘 지켜봐요. 유진이 그날 일 알아보려고, 지금 그 사람 찾으러 갔으니까.”그러나 서선영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걔가 뭘 안다고 찾아?]은서는 차분히 말했다.“유진은 임씨 집안 사람이야. 찾으려면 못 찾을 사람이 없죠.”이에 서선영의 말투도 조금 무거워졌다.[알았어. 내가 금방 사람 붙여서 장말숙 감시하라고 할게.]은서는 이어서 냉랭하게 따져 물었다.“절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는다면서요? 근데 걔는 어떻게 안 거예요?”유진이 알았다는 건, 임씨 가족들까지도 이미 감지했다는 뜻이었다. 이에 은서는 불안감에 입술을 꾹 눌렀다.서선영은 얼버무리며 말했다.[아마 도우미 중 누가 말실수했을 거야. 다시 철저히 단속해 둘게. 걱정하지 마. 소문 좀 난다 해도 너한테까지 영향은 안 가. 넌 그냥 조용히 대본 연습이나 해.][이번 영화, 내가 네 외삼촌 꼬드겨서 겨우 투자받은 거 알지? 이번 기회 잘 잡아야 해. 딴 건 신경 쓰지 마. 연기만 잘하면 돼.]은서는 그 말에 더욱 날카로워졌다. 이번 영화는 유명 감독의 대작이었고, 은서에게는 이미지 회복의 유일한 기회였다. 그렇기에 서선영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나 곧 촬영 들어가요. 그러니까 이번 일 절대 망치지 마요.”[알았어!]서선영은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유진은 급히 차로 돌아와 깊게 숨을 들이쉰 후, 곧장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서선영 쪽에서 곧 움직일 거예요.”[알고 있어. 이미 준비해 뒀어.]은정의 목소리는 침착했고, 유진은 안심하며 숨을 내쉬었다.이윽고,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고생 많았어.]이에 유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
“아파요!”유진은 짧은 비명을 내뱉으며 순식간에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팔을 뻗어 구은정의 목에 매달리듯 안으며, 자기 얼굴을 숨기려 했다.이에 은정은 그녀의 어깨를 쓸어내리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낮게 웃었다.“왜 예전 같지 않아? 예전엔 몰래라도 키스하려고 했으면서, 이젠 실컷 하라고 해도 도망치기 바쁘네.”유진은 은정을 꼭 안으며 눈가가 붉게 물들었지만 속은 터질 듯 행복했다. 이제는 몰래 키스할 필요가 없다. 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할 수 있었다.은정은 유진의 발그레한 귀에 입을 맞추며 낮게 속삭였다.“전에 난 늘 걱정했어. 네가 그냥 어린 마음에 나한테 끌리는 거라고. 그저 신기하고 새로워서, 가질 수 없으니까 더 마음이 가는 거라고.”“우리가 진짜로 사귀게 되면 금세 질릴 거라고. 나는 사실 정말 재미없는 사람이야. 총 쏘고 싸우는 것 빼곤 할 줄 아는 게 없어.”“요즘 애들이 좋아하는 것도 몰라. 마음도 더 이상 젊지 않아.”“그래서 넌 언젠가 내가 생각보다 별거 아니라는 걸 깨닫고, 그 마음이 식을까 봐 두려웠어.”유진은 목이 메어, 콧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내가 기억 잃었을 때, 왜 다시 나한테 다가왔어요?”은정은 예전엔 그렇게 차갑게 거절했던 사람인데, 교통사고 한 번 났다고 갑자기 사랑하게 된 걸까? 혹시 죄책감 때문은 아니었을까?그런 생각이 유진을 계속 불안하게 했다. 잠시 침묵하던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아마 너 없는 세상이, 정말로 견딜 수 없을 만큼 어둡고 차가웠기 때문일 거야.”그 말에 유진의 가슴은 요동쳤다. 그녀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마음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려는 듯, 어둠을 걷어내고 자신의 빛으로 은정의 세상을 덮어주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유진은 다시 한번, 은정에게 입을 맞췄는데, 이번엔 더욱 깊고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은정은 곧 유진을 세게 안았고, 불같이 뜨거운 열기가 유진을 감쌌다. 죽음 같은 어둠 속에서 되살아난 사람처럼, 은정의 키스는
“그 사람들이 설마...”유진은 커다란 눈을 뜨고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구은정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네가 생각한 그대로야.”유진은 믿기지 않는 듯 놀람과 동시에 깊은 자책의 기색을 띄웠다.“결국 내가 이렇게 만든 거잖아요.”“자꾸 그런 식으로 네 탓 하지 마.”은정은 그녀의 뺨을 다정하게 쓸어내리며 말했다.“너는 둘 사이의 더러운 사정도 몰랐잖아.”유진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서선영은 그래도 이해가 가. 근데 구은서는 왜 그렇게까지 자기 엄마한테 협조한 거예요?”“자기 명예가 달린 문제인데, 게다가 지금은 연예인이잖아요. 설령 피해자라 해도, 그런 얘기 퍼지는 게 좋을 리 없잖아요.”은정은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대답했다.“십몇 년 전 그 일 땐, 은서는 진짜로 몰랐던 것 같아. 내가 샤워 끝내고 나왔을 땐 자고 있었고, 서선영이 소리 지르고 난리 쳐도 안 일어났거든.”“그땐 그냥 서선영한테 이용당한 거지. 근데 이번엔 서선영이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나도 몰라.”유진은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서선영은 정말 너무 악랄했다. 자기 딸까지도 그런 식으로 이용한다면, 못 할 짓이 뭐가 있을까?더구나 서선영은 알고 있었다. 이런 식의 루머가 은정에게 가장 치명적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게 바로 구은태에게도 가장 아픈 약점이라는 것을. 그래서 서선영은 또다시 그 수를 썼다.유진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중얼거렸다.“그때 전화받은 아주머니, 그 사람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찾을 수는 있어. 하지만 서선영한테서 돈을 받았고, 아마 협박도 받았을 거야.솔직히 말해줄 가능성은 작아.”은정은 냉정하게 말하자, 유진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그래도 찾아봐야죠. 당장 데리고 가서 집에 가서 진실을 말하게 해야 해요!”은정은 유진의 손목을 붙잡았는데,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웠다.“서두르지 마.”“어떻게 안 서둘러요! 지금 이미 밖에선 온갖 소문이 돌고 있다고요!”유진이 답답해하며 소리치자,
“그날 밤 전화했을 때 말이야.”유진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그게 바로 그날이었어요?”“그래.”은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그는 서선영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 몰랐다. 혹시 다시는 유진을 볼 수 없게 될까 두려워, 마지막으로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사실은 유진에게 자기 집으로 와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그 말이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았다.유진은 자책하듯 말했다.“나도 그때 뭔가 이상하단 걸 느꼈어. 근데 안 찾아갔어요.”은정은 유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그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고, 유진은 단지 모호한 한 통의 전화로 구씨 저택까지 달려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유진의 마음속은 여전히 무겁고 미안했다.“내가 갔더라면, 그 여자의 계략이 통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요.”“유진아, 우리 이제 과거에 대해 그만 후회하자. 응?”은정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말하자,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중요한 건, 서선영 모녀의 거짓말을 어떻게 밝혀낼지였다.“그 여자가 떠나라고 하니까, 진짜 떠나려던 거예요? 도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됐어?”유진이 화가 난 듯 말하자, 은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차가운 듯 부드러운 눈빛으로 대답했다.“내 명예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어. 네가 그 일 알고 나서 날 더 미워할까 봐, 그게 무서웠지.”호텔에서 유진이 여씨 집안 가족 모임에 참석한 걸 봤을 때, 그는 마음이 무너졌다.자신은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앞으로도 더러운 과거 때문에 손가락질받을 인생인데, 그런 자신의 곁에 유진을 두는 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유진은 따뜻하면서도 가슴 아픈 눈빛으로 은정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유진은 두 손으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안개 낀 듯한 눈동자가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은정의 어두운 그림자를 밀어내고 그 마음속까지 빛으로 채우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이번에는 유진이 먼저 입을 맞췄는데, 그 키스는 애틋하고 따스했
“정말 못됐어요. 그런데도 난, 이렇게 좋아하니까.”유진은 코끝을 훌쩍이며 속삭이듯 말하자, 은정의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고, 유진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유진은 흐느낌 속에 물었다.“그래도 또 떠날 거예요?”“안 떠나.”은정은 마치 유진의 몸이 자기의 일부라도 된 것처럼 꼭 끌어안았다.유진은 입술을 꾹 다물었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도 입가엔 참을 수 없이 번지는 미소가 피어올랐다.멀찍이서 둘을 바라보던 소희는 마침내 안도한 듯 미소를 지었고, 잠시 바라보다 조용히 돌아섰다.은정은 티켓 환불을 마치고, 유진의 손을 꼭 잡고 공항 로비를 빠져나왔다.그때 소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유진이는 맡길게. 잘 달래줘. 난 먼저 갈게.]은정은 묵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소희, 정말 고마워.”[혹시 집안 문제, 도와줄 일 있으면 말해.]은정은 원래의 냉정한 눈빛을 되찾으며, 대답했다.“아니, 내 일은 내가 해결할게.”[그래.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 임씨 집안 쪽 설득도 내가 도와줄 수 있어.]은정은 낮게 웃었다.“혼자 힘으로 안 되면 그때 부탁할게.”전화를 끊은 뒤, 유진이 옆에서 물었다.“소희, 갔어요?”“응. 우리 집에 가자.”은정은 다시 유진의 손을 꼭 잡았다.유진은 그날 회사에 가지 않고, 전화를 걸어 휴가를 냈다. 이경 아파트로 돌아오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선 은정은 유진을 번쩍 안아 들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유진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고,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세게 은정을 끌어안고 입맞춤에 응했다.유진의 반응은 은정을 더욱 자극했고, 입술은 불꽃처럼 뜨거웠다. 은정은 강렬함과 부드러움을 오가며 끊임없이 유진의 반응을 확인했고,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었을 때에야 숨을 고르며 입술을 떼었다.유진은 숨을 헐떡이며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언제 기억난 거야?”은정은 유진의 입술 위에서 낮게 물었다.유진의 커다란 눈동자엔 얇은 안개 같은 물기가 맺혀 있었고, 눈가엔 눈물 자국이 남아 붉
“나쁜 놈!”유진은 이를 악물고 욕설을 내뱉으며, 손등으로 눈물을 거칠게 닦고는 그대로 뛰쳐나갔다.허둥지둥 엘리베이터를 내려가던 중, 예상치 못하게 1층 현관 앞에서 막 차에서 내리는 소희와 마주쳤다.유진은 달려가 소희를 끌어안으며, 눈물로 목소리가 떨렸다.“소희야. 그 사람, 갔어.”소희는 차가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손을 들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침착하게 말했다.“지금쯤 공항 도착했을 거야. 얼른 차 타. 우리가 가서 막자.”유진은 울먹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응.”차에 올라탄 후, 소희는 아침 출근길 교통체증을 피해 가능한 한 빠른 길로 달렸다. 조수석에 앉은 유진은 여전히 망연자실한 얼굴이었다.소희는 유진을 스치듯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두려워하지 마. 이번엔, 걔가 지구 반대편까지 도망친다 해도 내가 꼭 데려올게.”유진은 이를 악물며 눈물 맺힌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응.”공항에 도착하자, 소희는 시계를 확인했다.“지금쯤이면 막 보안 검색대 들어갔을 거야. 넌 안으로 들어가. 난 밖에서 기다릴게.”유진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들이 북적이는 공항 안을 정신없이 뛰어다녔다.탑승 게이트 앞, 마침내 수많은 인파 속에서 그토록 익숙하고, 아프도록 그리운 구은정의 뒷모습을 발견했다.너무 긴장한 탓일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은정이 거의 들어가려던 순간, 유진은 겨우 목을 눌러 뜨거운 한마디를 토해냈다.“서인!”이에 은정의 발걸음이 멈췄고, 순간 고개를 홱 돌렸다. 사람들 사이 너머로, 유진이 서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지나가는 사람들, 소음, 움직임. 모든 게 멀어지고, 과거와 현재가 한꺼번에 겹쳤다.처음 만났던 순간. 잃어버린 가방을 찾아 건네주던 은정의 등.“정말 대단해.”감탄하던 유진의 눈빛. 차가웠던 은정의 반응. 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은정이 궁금했고, 따랐고, 그렇게 샤브샤브집에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유진은
방연하는 어이없다는 듯 여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지금 진심이에요? 머리 괜찮아?”여진구는 연하를 째려보았다. 연하는 주변의 예쁘게 꾸며진 꽃길과 풍선을 둘러보며 부러움 섞인 말투로 말했다.“이거 진짜 예쁘네요. 나도 나중에 이런 대접 한번 받아볼 수 있을까요?”“너한테 고백할 남자가 이런 것도 못 하면, 내가 대신 해줄게.”진구는 시원하게 말하자, 연하는 헛웃음을 지으며 받아쳤다.“미리 감사 인사드릴게요, 여진구 사장님.”그 시각, 유진은 집에 돌아왔지만 마음은 여전히 뒤숭숭했고, 계속 뭔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그날 밤은 뒤척이기만 하다가, 새벽이 되자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아침 7시가 되자, 임유민이 방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문에 기대선 그는 느슨하게 말했다.“누나, 이번 주 금요일 우리 학교 축구 경기 있어. 내가 수비수로 나가는데, 학교에서 가족 참관 받는대. 올래?”유진은 고개를 들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좋지. 꼭 응원하러 갈게.”유민은 그녀가 짐을 싸는 걸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근데 누나, 짐은 왜 싸?”유진은 노트북을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이젠 다시 이경 아파트로 돌아가려고.”유민은 조금 놀랐다.“안 돌아가겠다고 하지 않았어?”유진은 눈을 내리깔며 담담하게 대답했다.“가고 싶어졌어.”유민은 문에 기댄 채 웃으며 중얼거렸다.“역시 내 예상이 맞았네. 근데 이번에는 그렇게 바보처럼 굴지 마.”유진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뭐라고?”이에 유민은 씩 웃었다.“엄마는 아침 일찍 나갔고, 할머니한테는 꼭 인사하고 가. 안 그러면 또 가출했다고 난리 나실걸.”유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집에 없을 땐, 네가 좀 더 착하게 굴어. 할머니 기분 잘 맞춰 드리고.”유민은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말했다.“그건 숙모한테나 하라고.”유진은 참지 못하고 푸흐 웃음을 터뜨렸다. 짐을 정리한 후, 운전기사에게 짐을 차에 실어달라 부탁하고 자신은 할머니에게 인사드리
유진은 은정이 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직접 보고 나서야 다시 호텔 위층으로 돌아갔다. 혹시나 여씨 집안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할까 봐 대비해야 했다.라운지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흩어졌고, 유진이 그 안으로 들어섰을 때, 여씨 집안의 두 명의 며느리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셋째네는 평소에 그렇게 거칠게 굴더니, 오늘 자기 아들이 그렇게 당했는데도 조용하네?”다른 여성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들었는데 인후가 아가씨를 모욕해서 그렇게 된 거라더라고요. 이 일, 임씨 쪽이 알게 되면 여인후 가만두지 않을걸요?”“그래서였구나! 근데 때린 사람이 누군데?”“그건 잘 모르겠어요.”유진은 고개를 돌려 벽에 기대었다. 그 순간, 조금 전 은정의 어두운 눈빛과 먹먹한 표정이 머릿속을 스쳤고, 가슴이 다시 시리게 아파왔다.그때 여진구가 메시지를 보내오자, 유진은 핸드백을 챙겨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유진아!”호텔 정원에서 진구가 유진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다가왔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꺼내려 했지만 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선배!”이에 진구는 웃으며 말했다.“먼저 말해봐.”유진은 진지한 표정으로 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전 늘 당신을 선배로, 좋은 친구로 생각했어요. 그 이상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요.”“오늘 가족 모임에 참석하면서 다들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부디 오해가 더 커지지 않도록, 할아버지랑 어른들께는 확실히 말씀드려 주세요.”진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직 아무 말도 꺼내지도 않았는데, 유진은 이미 자신의 마음을 간파하고,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선을 그어버린 것이다.유진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 표정엔 피곤함이 묻어났다.“조금 피곤해서 먼저 갈게요. 할아버지께는 대신 인사 부탁드려요.”유진은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몇 걸음만 걸었을까? 그 순간, 뒤쪽 정원에 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형형색색의 하트 모양 꽃장식이 환하게 빛났고, 수많은 풍선과 조명이 하늘로 떠올랐다. 몽환적이고 낭만적인 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