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유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알겠어요!”그는 다시 서인을 향해 손짓했다.“삼촌, 저랑 가요!”서인은 미소로 응답하며 우정숙에게 가볍게 인사한 후, 유민과 함께 그의 방으로 향했다. 유진도 따라가려는 듯 움직였으나, 우정숙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 막았다.“어딜 가려고? 방금 내가 여진구 온 거 봤어. 가서 여진구랑 얘기 좀 나눠봐. 유민이 방해하지 말고.”유진은 대답 대신 얼굴을 찡그리며 투덜댔다.“선배는 맨날 회사에서 보는데 뭐요.”“오늘은 손님으로 왔잖니.” 우정숙은 단호하게 말했지만, 유진은 여전히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손님이면 어때요. 내가 손님 접대하는 담당도 아니고. 게다가 아까 술 좀 마셨더니 머리가 약간 어지러워요.”우정숙은 그녀의 핑계를 흘려듣고 정색하며 말했다.“핑계 대지 마. 네가 지금 유민이 방에 가고 싶은 것 같은데, 안 돼!”우정숙은 유진의 손을 놓지 않고 단호히 끌고 다시 잔치가 벌어지는 마당으로 내려갔다.2층의 방 안.유민은 방문을 닫고 서인에게 물 한 병을 건넸다.“우리 엄마가 워낙 눈치가 빨라요. 그래서 제가 삼촌을 데려왔어요.”“삼촌이랑 우리 누나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엄마한테는 비밀로 하는 게 좋겠어요.”서인은 물병을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맙다.”“별말씀을요!” 유민은 웃으며 말했다. 변성기가 와서 낮고 묵직해진 목소리였다.“그런데 제 방에 조금 더 계세요. 엄마가 의심하지 않게요.”서인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그러면 잠시 시간을 빼앗을게.”“저야 괜찮아요. 숙제는 벌써 다 했고, 내일은 학교도 안 가거든요.” 유민은 스마트폰을 들고 발코니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돌아보며 서인에게 물었다.“게임 하실래요? 삼촌이랑 같이하면 더 재밌을 텐데.”서인은 발코니로 따라가며 미소를 지었다.“소희가 지금도 게임을 할 시간이 있을까?”유민은 장난스럽게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이틀 동안 가장 한가한 사람이 삼촌이랑 숙모예요.”서인은 웃음으로
임유민의 말은 표면적으로는 임유진을 나무라는 듯했지만, 서인에게는 묘하게 자신이 지적당한 느낌을 들게 했다. 서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알겠어.”유민도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게임에 집중했다.서인은 무심코 고개를 들어 밖을 보았다. 그 순간, 정원 한가운데에서 연한 파란색 셔츠를 입은 남성과 이야기하고 있는 유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서인은 그 남자를 알고 있었다. 여진구였다. 예전에 가게에 유진을 찾아온 적도 있고, 성연희의 결혼식에서도 봤던 사람이었다.그리고 현재 유진이 다니는 회사 역시 진구의 회사였다.유진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연신 웃음을 터뜨리며 몸을 앞으로 젖히고 있었다. 손에 든 과일 주스가 거의 쏟아질 지경이었다.서인은 다시 시선을 스마트폰으로 돌리고 게임에 집중하려 했지만, 알 수 없는 초조함이 그를 덮쳤다.결국 연이어 두 번이나 게임 속 캐릭터가 죽고 말았다.서인은 옆에 놓인 얼음물이 든 병을 집어 들어 목을 축였다. 물을 들이키며 다시금 밖을 보았지만, 유진은 여전히 진구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서인은 얼음물을 마셨음에도 식혀주지 못하는 짜증과 답답함에 휩싸였다. 억지로 스마트폰에 집중해 게임을 끝내자, 유민이 말했다.“시간이 늦었어요. 삼촌, 이제 집에 가세요. 제가 누나에게는 잘 얘기해 둘게요.”서인은 차분히 대답했다.“괜찮아. 조금 더 같이하자.”유민은 서인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미소를 지으며 정원의 유진을 한번 쓱 바라봤다. 이윽고, 그의 눈빛에는 어딘가 장난기가 섞여 있었다.“알겠어요. 그럼 한 판 더요.”...한 시간쯤 뒤, 유진이 2층으로 올라왔고, 아주 자연스럽게 유민의 방으로 향했다. 그런데 기대와 달리 서인은 이미 떠난 뒤였다. 방 안에는 유민만 남아 여전히 게임을 하고 있었다.“그 사람, 언제 갔어?” 유진은 문에 기대어 물었다.“방금 갔어.” 유민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담담히 대답했다.“그래?” 유진은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속으로는 약
강재석은 얼굴 가득 미소를 띠며 주변을 둘러보았다.“요요는 어딨어? 왜 안 보이냐?”우청아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요요는 아빠랑 같이 있어요. 지금쯤 운성에 도착했을 거예요. 아마 별장에 묵고 있을 거예요.”성연희가 덧붙였다.“요요는 화동으로 나올 예정이에요. 할아버지, 내일이면 보실 수 있을 거예요.”“그래, 그래!” 강재석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흐뭇하게 웃었다.그때 강솔이 다가오며 장난스럽게 말했다.“스승님, 요요만 찾으시고 저, 강솔이는 안 찾으시나요?”강재석은 웃으며 강솔을 가리키며 도경수에게 말했다.“이 아이 좀 봐. 결혼을 앞둔 주제에 요요랑 애들처럼 관심을 얻으려고 하네!”도경수는 얼굴에 자애로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어쩌겠어, 사람은 커도 마음은 여전히 아이 같은걸.”방 안은 순식간에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양재아 역시 함께 웃으며 강솔을 쳐다봤지만, 그 시선의 끝은 어딘가 차가웠다.대화가 이어지던 중, 소희는 연희와 청아, 유정을 데리고 뒷마당 숙소로 안내했다.그 사이 강재석은 도경수와 계속 이야기를 나눴다. 강재석은 재아에게 일행과 어울려 시간을 보내라고 권했으나, 재아는 고개를 저었다.“잘 모르는 사이에요. 차라리 외할아버지와 강재석 할아버지와 함께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요.”그 말에 강재석은 더 이상 강요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도경수를 보며 말했다.“오늘 아침에 도도희와 통화했어. 내일 소희의 결혼식에 참석한다고 하더군.”도경수는 차를 들던 손이 미세하게 떨리더니, 곧 고개를 들어 물었다.“도희가 온다고?”강재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운성에 온 지 조금 됐다고 하더라고. 아이들에게 강의하고 있다던데, 수업이 끝나면 강성으로 돌아가서 양재아와 친자 확인도 할 예정이라 했어.”도경수는 눈시울이 붉어지며 말했다.“그런 건 나중에 해도 돼. 그저 돌아와 주기만 하면 돼.”그러고는 재아를 바라보며 덧붙였다.“재아야, 내일 네가 엄마를 볼 수 있을 거야.”재아는 전화에서
도경수는 강재석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알면 됐어. 아직 친자 확인도 안 했는데, 도도희가 양재아에게 감정이 없는 건 당연한 일이지. 모든 건 결과가 나온 후에 결정해야지.”“괜히 조바심 내서 도도희를 다시 화나게 하지 말게.” 강재석은 한숨을 내쉬며 단호히 말하자, 도경수도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구었다.“네가 보기에도 내가 그때 잘못한 건가?”강재석은 그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그런 말을 하다니 의외인데.”도경수는 깊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때는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어. 하지만 이렇게 시간이 지나고 나니, 지금의 결과를 보면서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됐던 건지 생각하게 돼.”강재석은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천천히 말했다.“당신 잘못이 아니라, 그저 운명이 잔인했던 거지.”도경수는 찻잔을 들고 천천히 한 모금 마시며, 쓴맛을 꾹 삼켜냈다....양재아는 강씨 집안의 자단목으로 만들어진 긴 회랑을 찍어 자신의 SNS에 올렸다.“강씨 집안에 도착. 내일 소희의 결혼식 준비 완료.”재아의 SNS에는 이미 많은 친구가 등록되어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댓글이 폭발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양재아, 너 운성 강씨 집안에 있다고? 너 King을 아는 거야?][같이 일한 지 오래됐는데, 너 재벌이었어? 헐, 내 인생 다시 생각해야겠네.][강씨 집안이 회랑을 전부 자단목으로 만들었다고 들었는데, 진짜야? 게다가 연못에 있는 연꽃 항아리도 전부 골동품이라던데? 사진 좀 더 찍어줘 봐!]...권수영과 지아윤 역시 댓글로 반가움을 표현했다.[양재아, 우리 집도 초대장 받았어. 내일 결혼식에서 보자!][재아야, 셀카 하나 찍어줘요. 이틀 동안 못 봤더니 너무 보고 싶네요!]재아는 계속 알림이 뜨는 메시지를 보며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서원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메시지에 답장을 보내고 있었다.후원에 도착하자, 툇마루에서 전화를 하고 있는 강솔과 마주쳤다.“나
“강솔!”성연희가 마당을 지나며 다가왔다. 그녀의 밝은 눈빛이 강솔의 굳은 얼굴을 스치며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아까 소희가 널 찾더라. 가 봐.”“응.”강솔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양재아를 쳐다보지도 않고 곧장 걸음을 옮겼다. 연희는 바로 떠나지 않고, 여유로운 웃음을 머금고 재아를 바라보았다.“재아 씨는 강솔을 어떻게 생각해요?”재아는 연희의 의도를 알 수 없었지만, 눈빛이 잠깐 흔들리더니 순진한 미소로 대답했다.“강솔 언니는 참 좋아요. 성격도 좋고, 참 따뜻한 사람이죠.”연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강솔이 성격이 좋은 건, 어려서부터 잘 배워왔고, 진석에게 보호받아 왔기 때문이에요.”“갖은 권모술수와 갈등을 겪지 않아서 사람과 다투는 걸 잘 못하죠. 하지만.”그녀의 눈빛이 날카로워지며 미소가 변했다.“성격이 좋다고 약하다는 뜻은 아니에요. 결국 강솔은 강 씨 집안의 외동딸이고, 진 씨 집안의 며느리가 될 사람이죠.”“이렇게 든든한 배경이 있으니, 만약 강솔을 만만히 본다면, 그건 뇌를 다쳤거나, 생각이 없는 거겠죠.”재아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었으나, 연희는 개의치 않다는 듯 말을 이어갔다.“소희의 좋은 날인데, 더 말은 안 할게요. 재아 씨도 이 중요한 날에 소희를 곤란하게 하지 말아요.”“다른 사람한테 잘못할 수는 있어도, 소희에게는 절대로 그러면 안 되잖아요?”재아는 얼굴빛이 푸르스름해졌다가 하얘지기를 반복하더니,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연희 씨가 너무 걱정하시는 것 같네요. 저는 강솔 언니랑 대화를 나눴을 뿐이고, 소희의 결혼식을 방해할 리 없어요.”“그러면 다행이네요.”연희는 우아하고 화려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도경수 할아버지를 잘 모셔요. 그게 당신의 유일한 역할이니까요.”재아는 마음이 단단하다고 자부했지만, 연희의 말에 얼굴빛이 변하지 않을 수 없었다.연희는 어깨에 닿는 짧은 머리를 부드럽게 웨이브로 말고, 화려한 귀걸이를 낀 채 당당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또각또각 연희가 신은 하
소희는 문득 심명을 처음 만났던 순간을 떠올렸다.강성대학교 정문 앞에서였다. 그날도 지금처럼 깔끔하게 차려입고, 의도적으로 사람들 앞에서 소희에게 고백했다. 그리고 한가득 실린 꽃을 받아달라고 강요했다.그날을 떠올리면, 아직도 그 차 한가득 담긴 붉고 화려한 장미들이 떠오른다. 마치 그의 존재처럼 불타오르는 듯 강렬했다.만약 그날이 시작이었다면, 오늘은 끝이리라. 심명은 여전히 인생을 놀이처럼 살아가도 좋고, 누군가와 사랑하며 한 명의 따뜻한 여자를 사랑해도 좋았다. 그러나 더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머물러 있지 않았으면 했다.고요한 복도에서 두 사람의 눈길이 마주쳤다. 심명은 느긋하게 몸을 기둥에 기대고 있었다. 희미한 빛이 심명의 길고 선명한 속눈썹에 드리우며 교차했고, 그 순간 그의 눈동자엔 물결이 이는 듯했다. 또한, 연한 분홍빛이 눈가에 스쳐 지나가며 한 폭의 아름다운 풍경화를 연상케 했다. 심명은 눈을 깜빡이지 않고 소희를 바라보았다. 소희는 분홍과 흰색 줄무늬 티셔츠를 입고, 어깨에 닿는 검은 머리를 흩날리며 걸어왔다. 그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았고, 여전히 순수하고 맑은 기운을 내뿜었다.그 순간, 주변의 시끌벅적한 축제 분위기는 모두 멀어졌다. 내일 있을 결혼식도, 바깥의 축하객들도 사라진 듯했다. 그는 단지 이곳 운성에 들렀다가 우연히 소희를 보러 온 것 같았다.소희는 그를 차갑게 쫓아낼 수도 있었고, 아니면 한 끼 식사하자며 그를 초대할 수도 있었다. 만약 식사하게 된다면, 두 사람은 거리낌 없이 웃고 떠들며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이었다. 소희는 심명을 바람둥이라 조롱하고, 심명은 소희가 자신처럼 완벽한 남자를 두고 임구택 같은 쓰레기를 선택한다고 비웃었을지도 모른다.소희가 점점 가까워질수록 현실이 빠르게 다가왔다. 의식이 뚜렷해지며 심명의 마음을 일깨웠다. 심명이 사랑하는 이 여자는 내일 다른 사람과 결혼한다는 사실을! 심명은 선명하게 미소를 지었다. 안경 너머의 눈동자가 빛났다.“원래는 내일 결혼식에 바로 가려고 했
“내가 결혼할 땐 아무런 감정이 없었는데, 네가 결혼하려고 하니 마음이 묘하네.”소희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그냥 하나의 의식일 뿐이야.”그러자 연희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결혼식은 단순히 의식이 아니야.”소희는 잔 속의 술을 가만히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연희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으며 물었다.“소희야, 우리가 안 지 얼마나 됐지?”소희는 대답했다.“굉장히 오래됐지. 굳이 정확한 숫자를 기억할 필요는 없어.”연희는 잔을 들어 소희와 부딪치며 말했다.“그 말이 맞아!”연희는 잔을 비우고 웃으며 말했다.“아직도 기억나. 네가 강성에 처음 왔을 때 우리가 같이 밥을 먹던 날. 네가 결혼했다고 해서 내가 너무 놀라 마시고 있던 물을 뿜었잖아!”“그리고 네가 임구택과 결혼했다고 했을 때, 나는 당장이라도 네 집에 달려가 때려주고 싶었어. 그런데 네가 말렸지. 네가 자발적으로 결혼한 거라면서.”“그때는 정말 믿기지 않았어.”연희는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소희야, 내가 가장 존경하는 게 바로 너의 그 침착함이야!”소희는 잔을 쥔 채로 미소를 지었다.“한 번에 성공할 수 없을 때는 기다려야 해. 가장 좋은 시기를 잡을 때까지.”연희는 찡그리며 물었다.“그런데 만약 그 3년 동안 임구택이 다른 여자를 좋아하게 되면 어쩌려고?”소희는 시선을 낮추며 답했다.“그 사람은 자신이 결혼했다는 걸 알고 있었어. 그러지 않았을 거야.”연희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그렇게 자신 있어?”소희는 낮게 웃으며 대답했다.“아니, 나도 도박을 한 거야.”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고, 이때 우청아가 다가와 물었다.“둘이 무슨 얘기길래 웃어? 크게 웃어봐. 우리도 듣게.”연희는 눈을 들어 맑게 웃으며 말했다.“너, 왜 아직도 장시원 오빠랑 결혼 안 해?”그녀는 말을 마치고 유정을 쳐다보며 말했다.“나랑 소희는 결혼했으니, 다음은 누구 차례지?”유정은 바로 대답했다.“난 절대 아니야!”유정은 조백림과의
모두가 서로의 말을 이해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우청아 역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서 내가 신비한 대기업 사장을 경계해야겠네. 빈틈을 보여선 안 되겠어!”연희가 웃으며 대답했다.“하지만 그가 빈틈을 노리는 걸 막긴 어려울걸!”청아는 장난스럽게 말했다.“그렇다면 차라리 내가 작업실을 안 여는 게 낫겠어!”연희는 농담처럼 말했다.“그러면 시원 오빠가 네 회사를 인수해 버릴지도 몰라!”청아는 어깨를 으쓱하며 한숨을 쉬었다.“결국 평생 그 사람 밑에서 일해야 하는 운명인가 봐?”연희는 청아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내가 좋은 방법 하나 알려줄게. 그 사람과 결혼해서 네 밑에서 일하게 만들어.”이에 청아는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보다 더 좋은 방법을 생각해 줄 수 없어?”유정이 대화를 이어받으며 말했다.“연희의 방법은 간단해. 침대에서 이기는 거야!”연희는 유정을 향해 눈길을 보내며 환하게 웃었다.“침대에서 이기는 게 뭐가 나빠? 간단하고 확실하지. 너 지금은 웃고 있지만, 언젠간 너도 그 맛을 알게 될걸?”유정은 급히 대답했다.“아니, 나는 절대 비웃는 게 아니라 정말로 존경하는 거야!”연희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물었다.“그럼 내가 방법 하나 가르쳐줄까? 확실히 조백림이 너에게 무릎 꿇게 만들 수 있어!”유정은 얼굴을 붉히며 손을 저었다.“됐어. 나는 그 사람을 굴복시킬 생각도 없어.”옆에서 강솔은 음료를 조심스레 홀짝이며 얼굴이 살짝 붉어져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에 화영이 웃으며 말했다.“너희들 다 술에 취한 거 아니야? 이런 대화까지 하다니! 강솔은 이제 막 남자친구를 사귄 순수한 아가씨인데, 너희 말 때문에 얼굴이 빨개졌잖아!”“어?”강솔은 갑자기 고개를 들며 더욱 붉어진 얼굴로 당황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그녀의 순진한 모습에 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웃음이 잦아든 뒤, 청아가 물었다.“그런데 양재아는? 오늘 여기 안 오기로 했어?”소희는 느긋하게 의자에 기대며 대답했
“그날 밤 전화했을 때 말이야.”유진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그게 바로 그날이었어요?”“그래.”은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그는 서선영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 몰랐다. 혹시 다시는 유진을 볼 수 없게 될까 두려워, 마지막으로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사실은 유진에게 자기 집으로 와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그 말이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았다.유진은 자책하듯 말했다.“나도 그때 뭔가 이상하단 걸 느꼈어. 근데 안 찾아갔어요.”은정은 유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그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고, 유진은 단지 모호한 한 통의 전화로 구씨 저택까지 달려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유진의 마음속은 여전히 무겁고 미안했다.“내가 갔더라면, 그 여자의 계략이 통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요.”“유진아, 우리 이제 과거에 대해 그만 후회하자. 응?”은정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말하자,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중요한 건, 서선영 모녀의 거짓말을 어떻게 밝혀낼지였다.“그 여자가 떠나라고 하니까, 진짜 떠나려던 거예요? 도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됐어?”유진이 화가 난 듯 말하자, 은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차가운 듯 부드러운 눈빛으로 대답했다.“내 명예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어. 네가 그 일 알고 나서 날 더 미워할까 봐, 그게 무서웠지.”호텔에서 유진이 여씨 집안 가족 모임에 참석한 걸 봤을 때, 그는 마음이 무너졌다.자신은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앞으로도 더러운 과거 때문에 손가락질받을 인생인데, 그런 자신의 곁에 유진을 두는 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유진은 따뜻하면서도 가슴 아픈 눈빛으로 은정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유진은 두 손으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안개 낀 듯한 눈동자가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은정의 어두운 그림자를 밀어내고 그 마음속까지 빛으로 채우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이번에는 유진이 먼저 입을 맞췄는데, 그 키스는 애틋하고 따스했
“정말 못됐어요. 그런데도 난, 이렇게 좋아하니까.”유진은 코끝을 훌쩍이며 속삭이듯 말하자, 은정의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고, 유진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유진은 흐느낌 속에 물었다.“그래도 또 떠날 거예요?”“안 떠나.”은정은 마치 유진의 몸이 자기의 일부라도 된 것처럼 꼭 끌어안았다.유진은 입술을 꾹 다물었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도 입가엔 참을 수 없이 번지는 미소가 피어올랐다.멀찍이서 둘을 바라보던 소희는 마침내 안도한 듯 미소를 지었고, 잠시 바라보다 조용히 돌아섰다.은정은 티켓 환불을 마치고, 유진의 손을 꼭 잡고 공항 로비를 빠져나왔다.그때 소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유진이는 맡길게. 잘 달래줘. 난 먼저 갈게.]은정은 묵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소희, 정말 고마워.”[혹시 집안 문제, 도와줄 일 있으면 말해.]은정은 원래의 냉정한 눈빛을 되찾으며, 대답했다.“아니, 내 일은 내가 해결할게.”[그래.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 임씨 집안 쪽 설득도 내가 도와줄 수 있어.]은정은 낮게 웃었다.“혼자 힘으로 안 되면 그때 부탁할게.”전화를 끊은 뒤, 유진이 옆에서 물었다.“소희, 갔어요?”“응. 우리 집에 가자.”은정은 다시 유진의 손을 꼭 잡았다.유진은 그날 회사에 가지 않고, 전화를 걸어 휴가를 냈다. 이경 아파트로 돌아오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선 은정은 유진을 번쩍 안아 들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유진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고,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세게 은정을 끌어안고 입맞춤에 응했다.유진의 반응은 은정을 더욱 자극했고, 입술은 불꽃처럼 뜨거웠다. 은정은 강렬함과 부드러움을 오가며 끊임없이 유진의 반응을 확인했고,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었을 때에야 숨을 고르며 입술을 떼었다.유진은 숨을 헐떡이며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언제 기억난 거야?”은정은 유진의 입술 위에서 낮게 물었다.유진의 커다란 눈동자엔 얇은 안개 같은 물기가 맺혀 있었고, 눈가엔 눈물 자국이 남아 붉
“나쁜 놈!”유진은 이를 악물고 욕설을 내뱉으며, 손등으로 눈물을 거칠게 닦고는 그대로 뛰쳐나갔다.허둥지둥 엘리베이터를 내려가던 중, 예상치 못하게 1층 현관 앞에서 막 차에서 내리는 소희와 마주쳤다.유진은 달려가 소희를 끌어안으며, 눈물로 목소리가 떨렸다.“소희야. 그 사람, 갔어.”소희는 차가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손을 들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침착하게 말했다.“지금쯤 공항 도착했을 거야. 얼른 차 타. 우리가 가서 막자.”유진은 울먹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응.”차에 올라탄 후, 소희는 아침 출근길 교통체증을 피해 가능한 한 빠른 길로 달렸다. 조수석에 앉은 유진은 여전히 망연자실한 얼굴이었다.소희는 유진을 스치듯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두려워하지 마. 이번엔, 걔가 지구 반대편까지 도망친다 해도 내가 꼭 데려올게.”유진은 이를 악물며 눈물 맺힌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응.”공항에 도착하자, 소희는 시계를 확인했다.“지금쯤이면 막 보안 검색대 들어갔을 거야. 넌 안으로 들어가. 난 밖에서 기다릴게.”유진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들이 북적이는 공항 안을 정신없이 뛰어다녔다.탑승 게이트 앞, 마침내 수많은 인파 속에서 그토록 익숙하고, 아프도록 그리운 구은정의 뒷모습을 발견했다.너무 긴장한 탓일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은정이 거의 들어가려던 순간, 유진은 겨우 목을 눌러 뜨거운 한마디를 토해냈다.“서인!”이에 은정의 발걸음이 멈췄고, 순간 고개를 홱 돌렸다. 사람들 사이 너머로, 유진이 서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지나가는 사람들, 소음, 움직임. 모든 게 멀어지고, 과거와 현재가 한꺼번에 겹쳤다.처음 만났던 순간. 잃어버린 가방을 찾아 건네주던 은정의 등.“정말 대단해.”감탄하던 유진의 눈빛. 차가웠던 은정의 반응. 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은정이 궁금했고, 따랐고, 그렇게 샤브샤브집에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유진은
방연하는 어이없다는 듯 여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지금 진심이에요? 머리 괜찮아?”여진구는 연하를 째려보았다. 연하는 주변의 예쁘게 꾸며진 꽃길과 풍선을 둘러보며 부러움 섞인 말투로 말했다.“이거 진짜 예쁘네요. 나도 나중에 이런 대접 한번 받아볼 수 있을까요?”“너한테 고백할 남자가 이런 것도 못 하면, 내가 대신 해줄게.”진구는 시원하게 말하자, 연하는 헛웃음을 지으며 받아쳤다.“미리 감사 인사드릴게요, 여진구 사장님.”그 시각, 유진은 집에 돌아왔지만 마음은 여전히 뒤숭숭했고, 계속 뭔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그날 밤은 뒤척이기만 하다가, 새벽이 되자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아침 7시가 되자, 임유민이 방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문에 기대선 그는 느슨하게 말했다.“누나, 이번 주 금요일 우리 학교 축구 경기 있어. 내가 수비수로 나가는데, 학교에서 가족 참관 받는대. 올래?”유진은 고개를 들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좋지. 꼭 응원하러 갈게.”유민은 그녀가 짐을 싸는 걸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근데 누나, 짐은 왜 싸?”유진은 노트북을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이젠 다시 이경 아파트로 돌아가려고.”유민은 조금 놀랐다.“안 돌아가겠다고 하지 않았어?”유진은 눈을 내리깔며 담담하게 대답했다.“가고 싶어졌어.”유민은 문에 기댄 채 웃으며 중얼거렸다.“역시 내 예상이 맞았네. 근데 이번에는 그렇게 바보처럼 굴지 마.”유진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뭐라고?”이에 유민은 씩 웃었다.“엄마는 아침 일찍 나갔고, 할머니한테는 꼭 인사하고 가. 안 그러면 또 가출했다고 난리 나실걸.”유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집에 없을 땐, 네가 좀 더 착하게 굴어. 할머니 기분 잘 맞춰 드리고.”유민은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말했다.“그건 숙모한테나 하라고.”유진은 참지 못하고 푸흐 웃음을 터뜨렸다. 짐을 정리한 후, 운전기사에게 짐을 차에 실어달라 부탁하고 자신은 할머니에게 인사드리
유진은 은정이 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직접 보고 나서야 다시 호텔 위층으로 돌아갔다. 혹시나 여씨 집안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할까 봐 대비해야 했다.라운지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흩어졌고, 유진이 그 안으로 들어섰을 때, 여씨 집안의 두 명의 며느리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셋째네는 평소에 그렇게 거칠게 굴더니, 오늘 자기 아들이 그렇게 당했는데도 조용하네?”다른 여성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들었는데 인후가 아가씨를 모욕해서 그렇게 된 거라더라고요. 이 일, 임씨 쪽이 알게 되면 여인후 가만두지 않을걸요?”“그래서였구나! 근데 때린 사람이 누군데?”“그건 잘 모르겠어요.”유진은 고개를 돌려 벽에 기대었다. 그 순간, 조금 전 은정의 어두운 눈빛과 먹먹한 표정이 머릿속을 스쳤고, 가슴이 다시 시리게 아파왔다.그때 여진구가 메시지를 보내오자, 유진은 핸드백을 챙겨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유진아!”호텔 정원에서 진구가 유진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다가왔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꺼내려 했지만 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선배!”이에 진구는 웃으며 말했다.“먼저 말해봐.”유진은 진지한 표정으로 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전 늘 당신을 선배로, 좋은 친구로 생각했어요. 그 이상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요.”“오늘 가족 모임에 참석하면서 다들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부디 오해가 더 커지지 않도록, 할아버지랑 어른들께는 확실히 말씀드려 주세요.”진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직 아무 말도 꺼내지도 않았는데, 유진은 이미 자신의 마음을 간파하고,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선을 그어버린 것이다.유진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 표정엔 피곤함이 묻어났다.“조금 피곤해서 먼저 갈게요. 할아버지께는 대신 인사 부탁드려요.”유진은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몇 걸음만 걸었을까? 그 순간, 뒤쪽 정원에 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형형색색의 하트 모양 꽃장식이 환하게 빛났고, 수많은 풍선과 조명이 하늘로 떠올랐다. 몽환적이고 낭만적인 풍
“여진구 제대로야. 임씨 집안 딸이랑 결혼하면 우리 집안의 공신 되는 거지. 할아버지도 계속 웃고만 계시잖아. 아이, 우린 왜 그런 복이 없을까.”“네가 저 아가씨랑 결혼했으면, 진구 대신 네가 후계자 됐겠지.”누군가 농담을 건네자. 여인후는 코웃음을 치며 비꼬듯 말했다.“너희는 저 여자가 뭐 대단한 줄 아는 모양인데, 내 눈엔 그냥 싸구려야. 한쪽으론 우리 집안 며느리 노릇하려 들고, 한쪽으론 구씨그룹 사장한테 붙어먹고 있다니까?”순간 주변이 조용해졌고, 다른 한 명이 조심스레 물었다.“그거 어떻게 알아?”“내가 봤다니까, 거짓말일 것 같아? 할아버지 생신 잔치 때, 임유진이 구은정이랑 서로 잡고 끌고 하는 장면 내가 직접 목격했어.”인후는 비웃듯 말했다.“진구는 그걸 모르고 좋아 죽고 있겠지. 이미 유진한테 다른 남자가 생긴 줄도 모르고.”이에 사람들 사이에선 탄식이 터져 나왔다.“저 아가씨는 겉으론 참 청순해 보였는데, 의외네.”인후는 유진이 자신을 무시했던 걸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고, 진구에 대한 질투도 더해져 그의 말은 점점 도를 넘었다.“겉으로 고상하고 순해 보이는 애들이, 뒤로는 더 음란한 거 몰라? 저런 여자가 제일 문란하게 노는 법이지.”“쾅!”갑작스레 문이 거칠게 열렸고, 인후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지만,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기도 전에 강한 주먹이 얼굴을 가격했다.그 한 방에 코뼈가 부러지고, 머릿속은 울려댔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아찔했다.문 안으로 들어온 남자는 등줄기를 타고 내려오는 살기 서린 기운을 뿜어내며, 냉혹한 기세로 여인후를 주먹질하고 발길질했다.순식간에 그 자리에 있던 몇몇 여씨 집안 사촌 형제들도 함께 맞았다. 차례차례 쓰러져 바닥을 뒹굴었다.유진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중, 옆방에서 들려온 날카로운 비명과 고통스러운 신음을 듣고 깜짝 놀라 즉시 방향을 틀어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러고는 멍하니 굳어버렸다.바닥엔 네댓 명이 쓰러져 있었고, 은정은 여인후의 머리채를 붙잡고
그날 밤, 여씨 집안의 한 어르신이 귀국해, 강성의 모 유명 5성급 호텔에서 가족 만찬이 열렸다.임유진은 여진구와 함께 도착했다. 메인 테이블은 여씨 직계 가족들로만 채워져 있었고, 무려 30명 가까이 앉을 수 있는 커다란 원탁이었다.진구의 할아버지 옆자리에 앉아 있던 백발의 노인은 그의 큰할아버지였다. 회장님의 친형으로, Y국에서 거주하다 이번에 가족을 데리고 일시 귀국한 것이다. 그만큼 이번 가족 모임은 여씨 집안에서 굉장히 중요한 자리였다.유진은 처음에는 단순히 가족들끼리 조용히 저녁식사를 하는 줄 알고 있었다. 자신을 초대한 것도 분위기만 맞춰주면 될 줄 알았다.하지만 파티장에 들어서자, 진구는 유진을 이끌고 바로 메인 테이블로 향해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렸다.한혜란 여사와 여순호도 유진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고 따뜻하게 인사를 건넸다.여순호는 직접 자신의 큰형에게 유진을 소개하며 자애로운 웃음을 지었다.“우리 진구가 신뢰하는 아가씨야.”그러고는 자기 옆자리에 의자를 추가해 유진이 외부인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옆에 앉게 했다.물론 유진은 임씨 집안의 딸이라는 명확한 신분이 있긴 하지만, 이토록 특별하게 대우하는 것을 보며, 진구와 유진의 관계는 이미 대부분의 사람 머릿속에서 확정된 분위기가 되었다.순식간에 파티장 안은 칭찬과 축하, 아첨의 말들로 가득 찼고, 진구와 동년배의 친척 중 몇몇은 눈에 띄게 부러움과 질투를 숨기지 못하며 억지로 웃는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유진은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자리는 단순한 가족 식사가 아니었다. 이에 유진은 재빨리 핸드백을 챙겨 나갈 구실을 찾고 파티장을 빠져나왔다.호텔 복도 쪽으로 나와서야 숨을 돌린 유진은 진구에게 따졌다.“선배 왜 말 안 했어요? 오늘 선배 큰할아버지 귀국한 날이고, 집안 전체가 다 모이는 행사였다는 걸요. 처음부터 알았으면 나 안 왔을 거예요.”“할아버지가 꼭 널 데려오라고 했어. 부탁이라기보단 명령이었지.”진구는 웃으며 말했으나, 유진은 고개
정현준은 업무 능력은 있었지만, 결국 남녀 문제로 스스로 무너졌다. 임유진과 관련된 일이 정리되자 여진구는 한결 가벼운 표정으로 말했다.“오늘 저녁, 우리 집에서 가족 모임 있어. 같이 가자.”그러자 유진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가족 모임에 내가 왜 가요?”이에 진구는 반짝이는 눈으로 말했다.“우리 할아버지가 널 보고 싶대. 지난번 생신 때는 제대로 인사도 못 했다면서, 꼭 데리고 오라고 하셨어. 그리고 나도 할 말이 있어.”사실 진구는 오늘 저녁, 유진에게 고백할 계획이었다. 유진은 진구의 할아버지가 보고 싶어 한다는 말에 더는 거절하지 않았다.“몇 시에 가면 돼요?”“저녁 7시쯤. 내가 호텔로 데려다줄게.”“그래요.”진구는 미리 소혜와 시양의 해고를 결정해 두었기에, 두 사람의 자리를 대신할 인력을 미리 배치해 두었고, 업무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유진이 사무실로 돌아오자, 마케팅 부서 직원들이 하나둘 들어와 그녀에게 사과를 전했다.“팀장님, 저희가 소혜 씨한테 휘둘려서 그랬어요. 정말 죄송해요.”“앞으론 함부로 휩쓸리지 않을게요. 이번 일로 크게 깨달았어요.”“눈으로 본 게 다가 아니더라고요. 그깟 사진 몇 장으로 괜한 오해 했네요.”...유진은 담담하게 모두의 사과를 받아주며 말했다.“괜찮아요. 이미 지난 일이고, 전 이 일로 누구 미워하지 않아요. 앞으로 일에만 집중하죠.”유진의 대인배적인 반응에 부서 내에서의 평판은 확 올라갔다. 유진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신뢰와 존재감을 동시에 확보했다.더 이상 누구도 진구 라인이라는 말로 그녀의 실력을 깎아내리려 하지 않았다. 어쩌면 현준이 사직과 업무 인수인계를 하러 다시 회사에 오게 된다면, 자신이 예전에 소혜에게 했던 말을 떠올릴지도 모른다.타협이 안 되면, 뿌리째 잘라낸다는 그 말, 소혜는 그 말을 흘려들었다. 그리고 현준도 이와 얽히고설켜 끝내 유진이 베어내야 할 대상이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업무를 마치기 전, 진구는 방연하에게 메
곽시양은 임유진의 사무실에서 30분 넘게 있다가 나왔다. 복도로 나서자 동료들의 시선이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졌다.시양은 다들 자신이 승진한 걸로 수군대는 줄 알고 웃으며 지나치려 했지만, 평소 친하게 지내던 동료 한 명이 다급하게 말했다.“시양 씨, 얼른 회사 이메일 확인해 봐요.”시양은 곧장 사내 메일함을 열어봤고, 그 내용을 확인한 뒤 3분 넘게 멍하니 서 있었다.그러고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눈에 잡히는 물건을 움켜쥐고 그대로 진소혜를 향해 달려들며 집어던졌다.소혜도 가만히 있지 않았고, 두 사람은 한순간에 몸싸움으로 번졌다. 동료들이 달려와 가까스로 둘을 떼어놓자, 시양은 눈에 광기를 담고 소리쳤다.“진소혜, 이 악랄한 년! 팀장님도 모함하고, 나도 똑같은 수법으로 뒤통수 쳐? 너 같은 건 세상에서 그냥 사라져버려야 해!”소혜도 물러서지 않았다.“미쳤어? 그게 왜 내 탓인데? 그딴 더러운 짓을 해놓고 몰래 찍혔다고 나한테 화를 내?”“너야! 너밖에 없잖아!”시양은 미친 사람처럼 소혜에게 다시 달려들려 했다. 이때, 현준이 달려 나와 그녀를 막으며 말했다.“진정 좀 해!”“꺼져!”시양은 손을 뻗어 정현준의 뺨을 그대로 후려쳤고, 그녀의 눈에선 눈물이 그렁그렁했다.“당신이 날 찍었지! 그리고 진소혜한테 넘겼지! 둘 다 정말 비열해!”현준도 결국 폭발했다.“유혹한 건 당신이 먼저였잖아!”시양은 그대로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아악!”유진은 사무실 문 앞에 서서 이 난장판을 조용히 지켜봤다. 몇 마디 오가는 대화를 듣는 것만으로도 상황이 어찌 돌아간 건지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시양은 입사 이후 내내 소혜에게 눌려 지냈다. 겉으론 아첨하며 따라다녔지만, 소혜가 자신을 무시하고 조롱하듯 대하던 걸 속으로는 원망하고 있었다.시양은 현준이 소혜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회사에서도 소혜에게 특혜를 줬던 그를 시양은 일부러 유혹했다. 현준을 차지해 소혜를 공격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현준은 시양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