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석준의 시선이 흔들리며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머뭇거리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마심호가 단호하게 말했다.“이제 와서 숨길 게 뭐가 있나? 전부 말해요!”오석준은 난처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보상금 총액의 10%를 저에게 주기로 약속했어요.”“허!”정휘현이 비웃음을 터뜨렸다. 임유진과 서인은 눈을 마주친 뒤, 유진이 오석준을 향해 말했다.“일단 여기까지 듣죠. 나머지는 나중에 이야기하시죠.”그러고는 오석준의 비서를 바라보며 지시했다.“안토니네 가족이 맞은편 식당에 있다고 하더군요. 지금 당장 그 사람들을 데려오세요. 안주설도 포함해서 모두 오게 하세요.”마심호가 도착하기 전, 서인은 이미 이한우를 시켜 토니 가족을 시내로 데려오게 했다. 안토니 가족을 맞은편 식당에 대기시켜 두었는데, 진실을 밝히려면 관련된 모든 사람이 있어야 했다.비서가 오석준을 바라보자, 그는 깊게 찡그린 채 짧게 말했다.“가서 데려와요!”이에 비서는 즉시 밖으로 나갔다.몇 분 뒤, 토니네 가족이 도착했고, 옆집 민박집 주인 박민란도 따라왔다.박민란은 토니 가족이 불려 간다는 소식을 듣자, 철거 보상금 문제를 몰래 처리하는 게 아닌지 걱정돼서 어떻게든 따라오려 했다.운전기사가 말렸지만, 그녀가 완강하게 버티자 결국 데려오게 됐다. 사무실 문을 열기 전부터 박민란은 소리를 질렀다.“또 우리한테 강제로 철거 계약서에 서명하라고 하는 거예요? 저 서인이라는 사람, 당신 도대체 우리 돈 받아서 어디로 사라진 거예요?”하지만 사무실에 들어서고 난 후, 방 안을 가득 채운 정장 차림의 사람들을 보자마자,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토니는 서인을 보자 반갑게 외쳤다.“서인 형!”그러나 토니의 옆에 서 있던 주설은 냉소적인 태도로 말했다.“아직도 형이라고 부르네? 눈치 좀 챙겨. 형이 아니라 호텔 측 사람이야. 넌 진짜 바보야. 누가 좋은 사람이고 누가 나쁜 사람인지도 모른다고!”토니는 눈살을 찌푸렸다.“서인 형은 그런 사람이 아니야!”주설은 화를 내며 말
오석준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제가 철거 담당자들에게 안토니 가족을 압박하라고 지시하고 있을 때, 도련님이 흥성에 오셨어요. 그러자 안주설이 다시 전화를 걸어왔고요.”“어떻게든 도련님을 쫓아내지 않으면 계약이 성사되지도 않고, 집도 철거할 수 없을 거라고 했죠. 그리고 바로 다음 날, 이한우 씨가 저를 찾아왔어요.”“그래서 저는 계략을 꾸몄습니다. 우선 도련님께 안토니네 민박을 철거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어요.”“그리고 식사 자리에서 일부러 차를 건네는 척하며 사진을 찍게 했죠.”“안주설과 저의 계획은 이랬어요. 도련님이 흥성을 떠나면, 즉시 안토니네 민박을 철거하는 것.”“하지만 도련님이 떠나지 않으면, 그 사진을 안주설에게 보내 안주설이 안토니 가족에게 보여주면서 도련님이 호텔 측으로부터 뇌물을 받았다고 모함한다.”“그렇게 해서 안토니 가족이 도련님을 믿지 못하게 만들고, 결국 흥성을 떠나게 할 생각이었어요.”오석준의 말을 들은 토니의 가족은 모두 경악했다. 주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더니, 곧바로 오석준을 가리키며 소리쳤다.“당신 지금 헛소리하는 거잖아요! 난 그런 일 전혀 몰라요! 근데 왜 나를 모함하는 거죠? 혹시 서인 사장님이 시킨 거 아녜요? 당신들 한 패잖아요!”하지만 오석준은 싸늘한 시선으로 주설을 내려다보았다.“처음 나를 찾아온 건 당신이었어. 일이 끝나면 보상금의 10%를 주겠다고 했지.”“그리고 도련님께서 철거를 막으려고 하자, 당신이 더 급해져서 나와 철거 계약까지 따로 체결했잖아.”유진은 모든 게 이해된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서 철거 담당자들이 더 이상 안토니 가족을 압박하지 않았던 거군. 이미 안주설이 가족을 사칭하고 계약했으니까.’그 순간, 박민란의 얼굴도 점점 변했고 마침내 작게 중얼거렸다.“사진, 그 사진은 안주설이 나한테 준 거예요. 서인이 호텔 측에서 돈을 받아서 자기 남자친구네는 철거하지 않을 거지만, 우리 집은 곧 철거될 거라고 했어요.”“그래서 다른 민박집 주인들과 함께 가서 소란을 피우
서인은 유진의 손을 잡고 사무실을 나섰다. 다른 사람들도 뒤따라 나가자, 방 안에는 오직 안토니 가족만이 남게 되었다....옆 사무실에서 이한우가 웃으며 서인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야, 너 진짜 구씨 집안 사람이었어?”서인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그냥 서인이라고 부르는 게 편할 거예요.”이한우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나설 필요도 없었겠네?”서인은 쓴웃음을 지었다.“처음엔 이 호텔이 우리 가족 소유인 줄 몰랐어요. 형이 담당자를 찾아 해결할 수 있다고 하길래, 괜히 일을 더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그냥 맡긴 거예요.”“그런데 뒤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 줄은 몰랐죠.”그는 지난 일들을 떠올렸다.토요일에 이한우와 만났고, 일요일에 유진과 함께 흥성을 둘러보던 중 우연히 호텔을 지나쳤다. 그때야 호텔의 로고를 보고, 이곳이 구씨 그룹의 리조트 개발 프로젝트라는 걸 알았다.월요일에 오석준을 만나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기에, 더 이상 문제를 만들지 않고 조용히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하게 주설과 오석준이 손을 잡고 일을 꾸미고 있었던 것이다.서인과 한우는 과거 함께 훈련받고 임무를 수행했던 사이다. 목숨을 맡길 수 있는 사이는 되어도, 서로의 사적인 신분에 대해서는 깊이 묻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한우도 그런 서인의 태도를 이해하고, 그런 사실을 숨겼다고 해서 따지지는 않았다. 대신 웃으며 말했다.“어쨌든 해결됐으니 다행이지. 더 중요한 건, 이 일 덕분에 우리가 다시 만났다는 거야. 그리고 서로가 잘 지내고 있다는 걸 확인했다는 것도.”서인은 미소를 짓고 이한우와 손을 단단히 맞잡았다....한편, 토니는 끝내 주설을 용서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향해 분노를 터뜨렸고, 주설은 울면서 사무실을 뛰쳐나왔다. 하지만 억울한 마음을 이기지 못한 주설은 분을 삭이지 못한 채 유진을 찾아가 따지기로 했다. 마침 사무실 맞은편 회의실 문이 살짝 열려 있었고, 주설은 안을 들여다보았다.그곳
오석준은 결국 해고되었고, 정휘현도 부하 직원 관리 소홀의 책임을 물어 징계받았다. 그리고 안토니네 민박집은 철거되지 않기로 확정되었으며, 주변의 다른 민박들도 철거 대상에서 제외되었다.이 소식을 들은 박민란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활짝 웃었다. 모든 일이 해결되자, 서인은 마심호에게 먼저 강성으로 돌아가라고 지시한 뒤, 직접 차를 몰아 안토니네 가족을 집까지 데려다주었다.토니의 부모와 박민란은 서인의 차에 타고, 토니는 다른 차를 탔다. 돌아가는 길에, 오직 박민란만이 계속 떠들었다.“윤석경 씨, 솔직히 작은 안주설 같은 여자는 절대 며느리로 받아들이면 안 돼요. 헤어진 게 잘된 일이죠. 저런 애는 속이 너무 안 좋아요!”“그 애가 저도 속이려고 했어요. 저는 처음부터 서인 씨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죠!”“이번 일은 정말 서인 씨 덕분이에요. 덕분에 우리 집도 철거되지 않게 됐고요. 그런데 서인 씨, 그 오석준이 왜 당신을 도련님이라고 부르던 거예요?”조수석에 앉아 있던 임유진이 뒤를 돌아보며 웃으며 말했다.“도련님은 말 그대로 뜻하는 거죠!”박민란은 의심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아가씨, 나를 속이려는 거 아니죠? 난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아니야!”유진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그러면 왜 물어보셨나요?”박민란은 순간 말문이 막히더니 멋쩍게 웃으며 말을 돌렸다. 그러면서도 서인의 정체를 어느 정도 짐작한 듯, 태도는 더욱 공손해졌다.“아가씨도 참 대단해요!”유진은 여전히 밝은 미소로 말했다.“칭찬은 됐고요. 제가 선생님네 난초를 꺾은 걸 용서해 주시기만 하면 돼요!”박민란은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민망하게 웃었다. 토니네 집에 도착한 후, 가족들은 모두 서인에게 미안해했다.비록 주설이 가족은 아니지만, 그녀는 약혼자나 다름없었기에 그녀의 행동이 곧 가족의 잘못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서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어차피 주설이 사진 몇 장으로 나를 모함하려고 했을 때도, 여러분은 저를 의심하지 않았잖아요.
“이번 일은 서인 형 덕분이에요. 이 잔은 우리 가족을 대표해서 감사의 의미로 드리는 거예요!”서인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고마울 것까지야, 그냥 네 형이 집안을 위해 한 일이라고 생각하면 돼.”두 사람이 술을 마시는 동안, 임유진도 잔을 들고 조심스럽게 한 모금 머금었다. 입안에 퍼지는 매실 향이 은은했지만, 마실 때는 생각보다 강한 알코올 향이 확 올라왔다. 이에 유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서둘러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서인은 그녀를 흘끗 바라보더니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조금 맛이라도 보게 해야지. 괜히 못 마시게 하면 자꾸 마시고 싶어질 테니까. 직접 마셔보고 얼마나 독한지 알면 다시는 손대지 않겠지.’동혁의 이야기가 나오자, 동혁의 가족들은 자랑스럽고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윤석경은 계속해서 유진과 서인에게 반찬을 집어 주며 말했다.“만약 너희가 우리 동혁이를 만나게 되면,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줘. 우리 다 잘 지내고 있으니까.”“그리고 매달 그렇게 많은 돈을 부치지 않아도 돼. 자기 몫도 좀 남겨두라고 해.”서인은 목이 메어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유진은 그런 서인을 한 번 바라보고는 윤석경을 향해 미소 지으며 말했다.“서인 오빠도 동혁 오빠를 자주 만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그래도 만날 기회가 생기면 꼭 전할게요. 동혁 오빠도 잘 지내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윤석경은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그래, 다들 잘 지내면 그걸로 된 거야!”서인은 단호하게 말했다.“동혁이 돌아올 순 없지만, 저는 계속 강성에 있을 거예요. 언제든 필요하시면 연락하세요.”안토니가 말을 받으며 말했다.“우리 집에는 아직 나도 있어요. 이번에 해성에서 일을 정리하고 흥성으로 돌아가려고요. 부모님도 연세가 있으시니까, 이제 곁에서 모시려고 해요.”서인은 그런 토니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어쩌면 동혁은 이미...그래서 이제는 자신이 가정을 책임져야 한다는 걸 직감한 거겠지.’서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좋은 생각이야.”
안토니의 휴대폰이 몇 번이나 울렸지만, 그는 계속해서 전화를 끊었다. 그러자 서인이 입을 열었다.“받아.”토니는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전화를 받으러 갔다. 이에 유진은 가볍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안주설이에요?”사실 주설이 토니를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건 눈에 보였다. 다만, 주설에게는 계산이 많을 뿐이었다.서인은 입에 들풀 한 가닥을 물고 느긋한 태도로 말했다.“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어.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실수도 아니잖아.”“참 관대하시네요?”임유진은 코웃음을 치며 바위 위에 앉아 두 다리를 살랑거렸다.서인은 멀리 산을 바라보며 무심하게 말했다.“안주설과 사귀는 건 토니지, 내가 아니잖아. 내가 신경 쓸 이유가 없지.”유진은 눈을 가늘게 뜨고 서인을 바라보며 물었다.“그럼 만약 당신이라면? 용서할 수 있어요?”서인은 깊은 눈빛을 드리우며 낮고 거친 목소리로 대답했다.“그럴 일은 없어.”“그렇겠죠.”유진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적어도 당신한테 해가 되는 선택은 안 할 테니까.”서인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유진을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가, 코웃음을 쳤다.“점점 뻔뻔해지네.”유진은 서인을 흘긋 쳐다보았다. 귀끝이 살짝 뜨거워졌지만, 동시에 서인의 말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들어 말이 점점 거리낌 없이 나오고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토니가 돌아왔다. 그는 화가 난 듯하면서도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주설이 전화를 걸어와서 자기 잘못을 인정했어요. 순간적으로 판단을 잘못했다고요.”유진이 물었다.“그래서 뭐라고 했어요?”토니는 맥주 캔을 집어 들어 한 모금 벌컥 들이켰다.“해성에서 일을 그만두고 흥성으로 돌아가겠다고 했어요.”그는 다시 맥주를 한 모금 더 삼켰다.“그랬더니, 헤어지지만 않는다면 자기도 따라와서 같이 살겠대요.”서인은 덤덤하게 말했다.“잊지 못하겠으면 다시 만나는 것도 방법이지.”토니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젖히고 술을 들이켰다.이야기
닫힌 방문을 바라보다가, 다시 방 안의 두 개의 침대를 보고는 임유진이 쑥스럽게 웃으며 말했다.“그냥 이렇게 자요. 밤에 쥐라도 나오면 또 사장님을 깨우러 갈 수도 있으니까. 게다가, 호텔에서도 이렇게 잤잖아요.”서인은 문득 예전에 유진이 쥐를 보고 이불 속으로 파고들던 모습이 떠올랐다. 생각해 보니 그냥 내버려둘 수도 없었다. 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러면 네가 먼저 씻어. 난 나가서 담배 좀 피우고 올게.”그렇게 말한 뒤, 서인은 문을 열고 방을 나섰다.유진은 두 다리를 툭 튕기며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얼굴을 감싼 채 웃음이 터졌다.샤워를 마친 유진이 침대에 누웠을 때쯤, 서인이 돌아왔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옷을 챙겨 바로 욕실로 들어갔다. 이내 샤워기의 물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물이 흐르는 소리에 유진의 머릿속은 점점 더 복잡해졌다. 알 수 없는 상상이 떠오르고, 얼굴이 점점 달아올랐다. 가슴 속에서 알 수 없는 뜨거운 감정이 차올랐다.잠시 후,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유진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서인은 유진이 이미 잠들었다고 생각한 듯 조용히 침대로 가서 누웠고, 방의 불을 껐다.방 안이 암흑으로 변하자, 유진은 조용히 숨을 들이마셨다. 그런데 자기 심장 소리가 너무나도 또렷하게 들렸다.‘호텔에서도 같은 방을 썼는데, 왜 이번엔 이렇게 긴장되는 걸까?’게다가 묘하게 기대되는 기분까지 들었다. 아마도 이 방이 좁아서 서로 더 가까이 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어쩌면 오늘이 서인과 함께하는 마지막 밤일지도 몰라서일까?어둠에 익숙해질수록, 달빛에 비친 방 안의 야경이 점점 또렷하게 보였다.산속의 밤은 유난히 고요했다. 풀숲에서 들려오는 귀뚜라미 소리, 숲속을 스쳐 지나가는 밤새의 날갯짓 소리, 심지어 어디선가 속삭이는 듯한 소리마저 들려왔다.달빛이 창살을 통해 들어와 바닥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 자체로 하나의 운치를 자아냈다. 서인이 곁에 있다는 사실이 유진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
임유진이 깊이 잠든 것을 확인한 서인은 그녀를 살짝 밀어내고, 이불을 사이에 두고 거리를 두었다. 그러나 그는 좀처럼 잠들 수 없었다.몸속을 타고 도는 술기운이 이제야 본격적으로 올라오는 듯했고, 유진에게서 은은하게 풍기는 향기가 술기운을 더욱 자극했다.잠시 후, 서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찬물로 샤워를 한 뒤, 창가에 서서 한동안 밤바람을 맞았다. 시간이 흐르고, 어느덧 한 시간이 지나 있었다. 동이 틀 무렵이 되어서야 서인은 다시 침대로 돌아갔다.그 사이, 유진은 이불을 걷어차고 있었다. 그녀는 두 개의 베개 사이에 머리를 묻고, 가느다란 숨소리를 내며 깊이 잠들어 있었다.이 순간만큼은 꽤 얌전해 보였다. 그러나 서인이 자리에 눕자마자, 유진이 몸을 뒤척이며 다시 그의 품으로 굴러들어 왔다.‘오늘 밤, 잠은 포기해야겠군.’다음 날 아침, 유진이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해가 훤히 떠 있었는데, 침대에는 유진 혼자뿐이었고, 서인은 보이지 않았다.유진은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밖에서 사람들의 이야기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창문을 열어 내다보니, 서인과 안토니가 산길을 따라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서인은 검은색 운동복 차림이었다. 아침 햇살이 서인의 어깨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으며, 평소의 거친 분위기를 감싸 안았다.서인에게서 풍기는 느슨한 여유가 사라지고, 더없이 당당하고 매력적인 모습으로 빛나고 있었다. 유진은 창틀에 두 팔을 올려 기대며 그를 바라보았다.맑고 영롱한 유진의 눈동자에는 오직 서인만 담겨 있었고, 입가에는 은근한 미소가 떠올랐다.둘이 가까이 다가오자, 유진이 소리쳤다.“어디 갔다 오는 길이에요?”서인은 고개를 들어 유진을 올려다보았다. 차갑고 깊은 눈빛이 그녀를 향할 때, 그 안에는 자신도 깨닫지 못한 부드러움이 깃들어 있었다.유진 또한 서인을 향해 눈길을 내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얇은 아침 안개 너머에서 조용히 마주쳤다.산속의 안개가 아직 완전히 걷히지 않은 채 산봉우리를 감싸고 있었
“역시 이런 식으로 문제가 될 줄 알았어요.”은서는 싸늘한 눈빛으로 말하자, 손기수가 물었다.[이제 어떻게 하죠?]구은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장말숙한테 손자가 있잖아요. 그 애를 데려가요. 안전한 곳에 숨겨두고 지켜여.”이에 손기수는 비죽 웃으며 말했다.[그건 납치 아닌가요?]“이건 우리 엄마 뜻이에요.”은서는 그 말을 강조하듯 단호하게 말했다.“일만 제대로 끝내면, 보수는 두 배로 줄 거예요.”그제야 손기수는 만족스레 웃으며 대답했다.[좋아요. 저한테 맡기세요.]은서는 다시 신신당부했다. “숨겨두기만 해야 해요. 절대 다치게 하면 안 돼요.”이에 손기수는 급히 말했다.[우리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하겠어요!]은서는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엄마 말씀만 잘 따르면,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거예요.”모든 게 은정을 내쫓는 날까지만 버티면 그만이었다. 장말숙의 아들이 위협되지 않게 만들어야 했고, 지금 중요한 건 은정을 최대한 빨리 강제로 떠나게 만드는 일이었다.두 시간 후.오현빈이 급히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형님, 큰일이에요. 장말숙 아주머니 손자가 납치당했어요!”은정의 눈빛이 차갑게 되었다. 그와 유진의 계획은 장말숙의 아들이 철없는 무뢰한이라는 걸 이용해, 서선영 쪽 사람들과 충돌이 일어나게 만들고 그 사이에서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었다.그런데 서선영은 한 수 더 앞질렀다. 직접 손자를 납치해 버린 것이다. 은정은 느긋한 듯 말했지만, 말투엔 서늘한 살기가 묻어났다.“왜 못 막았어?”현빈이 대답했다.[도착했을 땐 이미 데려가고 난 뒤였어요. 아이는 집에 혼자 있었고요.]장말숙은 요즘 일을 그만두고 손자를 돌보고 있었다. 자기 아들은 놀기 좋아하고 도박을 일삼으며 최근 큰 빚까지 졌고, 며느리는 친정으로 들어가 버렸다.장말숙이 서선영의 돈을 받은 것도 빚을 갚고 며느리를 다시 불러들이기 위한 것이었다.그날 점심을 먹고 잠시 슈퍼에 다녀온 사이, 손자가 납치된 것이다.은정은 알고 있
“아주머니는 분명 그날 일에 대해 알고 있어요. 그 사람한테 직접 확인하러 갈 거예요!”임유진은 말을 끝내자마자 그대로 뛰쳐나갔다.“유진아!”구은서는 몇 걸음 뒤쫓았지만, 유진은 이미 계단 아래로 사라지고 있었다. 은서는 굳게 이를 악물며 눈살을 찌푸렸다.서선영이 집에 없다는 걸 알자, 그녀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장말숙 아주머니 잘 지켜봐요. 유진이 그날 일 알아보려고, 지금 그 사람 찾으러 갔으니까.”그러나 서선영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걔가 뭘 안다고 찾아?]은서는 차분히 말했다.“유진은 임씨 집안 사람이야. 찾으려면 못 찾을 사람이 없죠.”이에 서선영의 말투도 조금 무거워졌다.[알았어. 내가 금방 사람 붙여서 장말숙 감시하라고 할게.]은서는 이어서 냉랭하게 따져 물었다.“절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는다면서요? 근데 걔는 어떻게 안 거예요?”유진이 알았다는 건, 임씨 가족들까지도 이미 감지했다는 뜻이었다. 이에 은서는 불안감에 입술을 꾹 눌렀다.서선영은 얼버무리며 말했다.[아마 도우미 중 누가 말실수했을 거야. 다시 철저히 단속해 둘게. 걱정하지 마. 소문 좀 난다 해도 너한테까지 영향은 안 가. 넌 그냥 조용히 대본 연습이나 해.][이번 영화, 내가 네 외삼촌 꼬드겨서 겨우 투자받은 거 알지? 이번 기회 잘 잡아야 해. 딴 건 신경 쓰지 마. 연기만 잘하면 돼.]은서는 그 말에 더욱 날카로워졌다. 이번 영화는 유명 감독의 대작이었고, 은서에게는 이미지 회복의 유일한 기회였다. 그렇기에 서선영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나 곧 촬영 들어가요. 그러니까 이번 일 절대 망치지 마요.”[알았어!]서선영은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유진은 급히 차로 돌아와 깊게 숨을 들이쉰 후, 곧장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서선영 쪽에서 곧 움직일 거예요.”[알고 있어. 이미 준비해 뒀어.]은정의 목소리는 침착했고, 유진은 안심하며 숨을 내쉬었다.이윽고,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고생 많았어.]이에 유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
“아파요!”유진은 짧은 비명을 내뱉으며 순식간에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팔을 뻗어 구은정의 목에 매달리듯 안으며, 자기 얼굴을 숨기려 했다.이에 은정은 그녀의 어깨를 쓸어내리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낮게 웃었다.“왜 예전 같지 않아? 예전엔 몰래라도 키스하려고 했으면서, 이젠 실컷 하라고 해도 도망치기 바쁘네.”유진은 은정을 꼭 안으며 눈가가 붉게 물들었지만 속은 터질 듯 행복했다. 이제는 몰래 키스할 필요가 없다. 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할 수 있었다.은정은 유진의 발그레한 귀에 입을 맞추며 낮게 속삭였다.“전에 난 늘 걱정했어. 네가 그냥 어린 마음에 나한테 끌리는 거라고. 그저 신기하고 새로워서, 가질 수 없으니까 더 마음이 가는 거라고.”“우리가 진짜로 사귀게 되면 금세 질릴 거라고. 나는 사실 정말 재미없는 사람이야. 총 쏘고 싸우는 것 빼곤 할 줄 아는 게 없어.”“요즘 애들이 좋아하는 것도 몰라. 마음도 더 이상 젊지 않아.”“그래서 넌 언젠가 내가 생각보다 별거 아니라는 걸 깨닫고, 그 마음이 식을까 봐 두려웠어.”유진은 목이 메어, 콧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내가 기억 잃었을 때, 왜 다시 나한테 다가왔어요?”은정은 예전엔 그렇게 차갑게 거절했던 사람인데, 교통사고 한 번 났다고 갑자기 사랑하게 된 걸까? 혹시 죄책감 때문은 아니었을까?그런 생각이 유진을 계속 불안하게 했다. 잠시 침묵하던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아마 너 없는 세상이, 정말로 견딜 수 없을 만큼 어둡고 차가웠기 때문일 거야.”그 말에 유진의 가슴은 요동쳤다. 그녀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마음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려는 듯, 어둠을 걷어내고 자신의 빛으로 은정의 세상을 덮어주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유진은 다시 한번, 은정에게 입을 맞췄는데, 이번엔 더욱 깊고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은정은 곧 유진을 세게 안았고, 불같이 뜨거운 열기가 유진을 감쌌다. 죽음 같은 어둠 속에서 되살아난 사람처럼, 은정의 키스는
“그 사람들이 설마...”유진은 커다란 눈을 뜨고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구은정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네가 생각한 그대로야.”유진은 믿기지 않는 듯 놀람과 동시에 깊은 자책의 기색을 띄웠다.“결국 내가 이렇게 만든 거잖아요.”“자꾸 그런 식으로 네 탓 하지 마.”은정은 그녀의 뺨을 다정하게 쓸어내리며 말했다.“너는 둘 사이의 더러운 사정도 몰랐잖아.”유진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서선영은 그래도 이해가 가. 근데 구은서는 왜 그렇게까지 자기 엄마한테 협조한 거예요?”“자기 명예가 달린 문제인데, 게다가 지금은 연예인이잖아요. 설령 피해자라 해도, 그런 얘기 퍼지는 게 좋을 리 없잖아요.”은정은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대답했다.“십몇 년 전 그 일 땐, 은서는 진짜로 몰랐던 것 같아. 내가 샤워 끝내고 나왔을 땐 자고 있었고, 서선영이 소리 지르고 난리 쳐도 안 일어났거든.”“그땐 그냥 서선영한테 이용당한 거지. 근데 이번엔 서선영이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나도 몰라.”유진은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서선영은 정말 너무 악랄했다. 자기 딸까지도 그런 식으로 이용한다면, 못 할 짓이 뭐가 있을까?더구나 서선영은 알고 있었다. 이런 식의 루머가 은정에게 가장 치명적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게 바로 구은태에게도 가장 아픈 약점이라는 것을. 그래서 서선영은 또다시 그 수를 썼다.유진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중얼거렸다.“그때 전화받은 아주머니, 그 사람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찾을 수는 있어. 하지만 서선영한테서 돈을 받았고, 아마 협박도 받았을 거야.솔직히 말해줄 가능성은 작아.”은정은 냉정하게 말하자, 유진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그래도 찾아봐야죠. 당장 데리고 가서 집에 가서 진실을 말하게 해야 해요!”은정은 유진의 손목을 붙잡았는데,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웠다.“서두르지 마.”“어떻게 안 서둘러요! 지금 이미 밖에선 온갖 소문이 돌고 있다고요!”유진이 답답해하며 소리치자,
“그날 밤 전화했을 때 말이야.”유진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그게 바로 그날이었어요?”“그래.”은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그는 서선영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 몰랐다. 혹시 다시는 유진을 볼 수 없게 될까 두려워, 마지막으로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사실은 유진에게 자기 집으로 와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그 말이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았다.유진은 자책하듯 말했다.“나도 그때 뭔가 이상하단 걸 느꼈어. 근데 안 찾아갔어요.”은정은 유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그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고, 유진은 단지 모호한 한 통의 전화로 구씨 저택까지 달려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유진의 마음속은 여전히 무겁고 미안했다.“내가 갔더라면, 그 여자의 계략이 통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요.”“유진아, 우리 이제 과거에 대해 그만 후회하자. 응?”은정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말하자,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중요한 건, 서선영 모녀의 거짓말을 어떻게 밝혀낼지였다.“그 여자가 떠나라고 하니까, 진짜 떠나려던 거예요? 도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됐어?”유진이 화가 난 듯 말하자, 은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차가운 듯 부드러운 눈빛으로 대답했다.“내 명예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어. 네가 그 일 알고 나서 날 더 미워할까 봐, 그게 무서웠지.”호텔에서 유진이 여씨 집안 가족 모임에 참석한 걸 봤을 때, 그는 마음이 무너졌다.자신은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앞으로도 더러운 과거 때문에 손가락질받을 인생인데, 그런 자신의 곁에 유진을 두는 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유진은 따뜻하면서도 가슴 아픈 눈빛으로 은정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유진은 두 손으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안개 낀 듯한 눈동자가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은정의 어두운 그림자를 밀어내고 그 마음속까지 빛으로 채우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이번에는 유진이 먼저 입을 맞췄는데, 그 키스는 애틋하고 따스했
“정말 못됐어요. 그런데도 난, 이렇게 좋아하니까.”유진은 코끝을 훌쩍이며 속삭이듯 말하자, 은정의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고, 유진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유진은 흐느낌 속에 물었다.“그래도 또 떠날 거예요?”“안 떠나.”은정은 마치 유진의 몸이 자기의 일부라도 된 것처럼 꼭 끌어안았다.유진은 입술을 꾹 다물었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도 입가엔 참을 수 없이 번지는 미소가 피어올랐다.멀찍이서 둘을 바라보던 소희는 마침내 안도한 듯 미소를 지었고, 잠시 바라보다 조용히 돌아섰다.은정은 티켓 환불을 마치고, 유진의 손을 꼭 잡고 공항 로비를 빠져나왔다.그때 소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유진이는 맡길게. 잘 달래줘. 난 먼저 갈게.]은정은 묵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소희, 정말 고마워.”[혹시 집안 문제, 도와줄 일 있으면 말해.]은정은 원래의 냉정한 눈빛을 되찾으며, 대답했다.“아니, 내 일은 내가 해결할게.”[그래.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 임씨 집안 쪽 설득도 내가 도와줄 수 있어.]은정은 낮게 웃었다.“혼자 힘으로 안 되면 그때 부탁할게.”전화를 끊은 뒤, 유진이 옆에서 물었다.“소희, 갔어요?”“응. 우리 집에 가자.”은정은 다시 유진의 손을 꼭 잡았다.유진은 그날 회사에 가지 않고, 전화를 걸어 휴가를 냈다. 이경 아파트로 돌아오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선 은정은 유진을 번쩍 안아 들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유진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고,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세게 은정을 끌어안고 입맞춤에 응했다.유진의 반응은 은정을 더욱 자극했고, 입술은 불꽃처럼 뜨거웠다. 은정은 강렬함과 부드러움을 오가며 끊임없이 유진의 반응을 확인했고,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었을 때에야 숨을 고르며 입술을 떼었다.유진은 숨을 헐떡이며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언제 기억난 거야?”은정은 유진의 입술 위에서 낮게 물었다.유진의 커다란 눈동자엔 얇은 안개 같은 물기가 맺혀 있었고, 눈가엔 눈물 자국이 남아 붉
“나쁜 놈!”유진은 이를 악물고 욕설을 내뱉으며, 손등으로 눈물을 거칠게 닦고는 그대로 뛰쳐나갔다.허둥지둥 엘리베이터를 내려가던 중, 예상치 못하게 1층 현관 앞에서 막 차에서 내리는 소희와 마주쳤다.유진은 달려가 소희를 끌어안으며, 눈물로 목소리가 떨렸다.“소희야. 그 사람, 갔어.”소희는 차가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손을 들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침착하게 말했다.“지금쯤 공항 도착했을 거야. 얼른 차 타. 우리가 가서 막자.”유진은 울먹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응.”차에 올라탄 후, 소희는 아침 출근길 교통체증을 피해 가능한 한 빠른 길로 달렸다. 조수석에 앉은 유진은 여전히 망연자실한 얼굴이었다.소희는 유진을 스치듯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두려워하지 마. 이번엔, 걔가 지구 반대편까지 도망친다 해도 내가 꼭 데려올게.”유진은 이를 악물며 눈물 맺힌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응.”공항에 도착하자, 소희는 시계를 확인했다.“지금쯤이면 막 보안 검색대 들어갔을 거야. 넌 안으로 들어가. 난 밖에서 기다릴게.”유진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들이 북적이는 공항 안을 정신없이 뛰어다녔다.탑승 게이트 앞, 마침내 수많은 인파 속에서 그토록 익숙하고, 아프도록 그리운 구은정의 뒷모습을 발견했다.너무 긴장한 탓일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은정이 거의 들어가려던 순간, 유진은 겨우 목을 눌러 뜨거운 한마디를 토해냈다.“서인!”이에 은정의 발걸음이 멈췄고, 순간 고개를 홱 돌렸다. 사람들 사이 너머로, 유진이 서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지나가는 사람들, 소음, 움직임. 모든 게 멀어지고, 과거와 현재가 한꺼번에 겹쳤다.처음 만났던 순간. 잃어버린 가방을 찾아 건네주던 은정의 등.“정말 대단해.”감탄하던 유진의 눈빛. 차가웠던 은정의 반응. 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은정이 궁금했고, 따랐고, 그렇게 샤브샤브집에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유진은
방연하는 어이없다는 듯 여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지금 진심이에요? 머리 괜찮아?”여진구는 연하를 째려보았다. 연하는 주변의 예쁘게 꾸며진 꽃길과 풍선을 둘러보며 부러움 섞인 말투로 말했다.“이거 진짜 예쁘네요. 나도 나중에 이런 대접 한번 받아볼 수 있을까요?”“너한테 고백할 남자가 이런 것도 못 하면, 내가 대신 해줄게.”진구는 시원하게 말하자, 연하는 헛웃음을 지으며 받아쳤다.“미리 감사 인사드릴게요, 여진구 사장님.”그 시각, 유진은 집에 돌아왔지만 마음은 여전히 뒤숭숭했고, 계속 뭔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그날 밤은 뒤척이기만 하다가, 새벽이 되자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아침 7시가 되자, 임유민이 방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문에 기대선 그는 느슨하게 말했다.“누나, 이번 주 금요일 우리 학교 축구 경기 있어. 내가 수비수로 나가는데, 학교에서 가족 참관 받는대. 올래?”유진은 고개를 들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좋지. 꼭 응원하러 갈게.”유민은 그녀가 짐을 싸는 걸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근데 누나, 짐은 왜 싸?”유진은 노트북을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이젠 다시 이경 아파트로 돌아가려고.”유민은 조금 놀랐다.“안 돌아가겠다고 하지 않았어?”유진은 눈을 내리깔며 담담하게 대답했다.“가고 싶어졌어.”유민은 문에 기댄 채 웃으며 중얼거렸다.“역시 내 예상이 맞았네. 근데 이번에는 그렇게 바보처럼 굴지 마.”유진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뭐라고?”이에 유민은 씩 웃었다.“엄마는 아침 일찍 나갔고, 할머니한테는 꼭 인사하고 가. 안 그러면 또 가출했다고 난리 나실걸.”유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집에 없을 땐, 네가 좀 더 착하게 굴어. 할머니 기분 잘 맞춰 드리고.”유민은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말했다.“그건 숙모한테나 하라고.”유진은 참지 못하고 푸흐 웃음을 터뜨렸다. 짐을 정리한 후, 운전기사에게 짐을 차에 실어달라 부탁하고 자신은 할머니에게 인사드리
유진은 은정이 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직접 보고 나서야 다시 호텔 위층으로 돌아갔다. 혹시나 여씨 집안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할까 봐 대비해야 했다.라운지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흩어졌고, 유진이 그 안으로 들어섰을 때, 여씨 집안의 두 명의 며느리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셋째네는 평소에 그렇게 거칠게 굴더니, 오늘 자기 아들이 그렇게 당했는데도 조용하네?”다른 여성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들었는데 인후가 아가씨를 모욕해서 그렇게 된 거라더라고요. 이 일, 임씨 쪽이 알게 되면 여인후 가만두지 않을걸요?”“그래서였구나! 근데 때린 사람이 누군데?”“그건 잘 모르겠어요.”유진은 고개를 돌려 벽에 기대었다. 그 순간, 조금 전 은정의 어두운 눈빛과 먹먹한 표정이 머릿속을 스쳤고, 가슴이 다시 시리게 아파왔다.그때 여진구가 메시지를 보내오자, 유진은 핸드백을 챙겨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유진아!”호텔 정원에서 진구가 유진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다가왔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꺼내려 했지만 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선배!”이에 진구는 웃으며 말했다.“먼저 말해봐.”유진은 진지한 표정으로 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전 늘 당신을 선배로, 좋은 친구로 생각했어요. 그 이상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요.”“오늘 가족 모임에 참석하면서 다들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부디 오해가 더 커지지 않도록, 할아버지랑 어른들께는 확실히 말씀드려 주세요.”진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직 아무 말도 꺼내지도 않았는데, 유진은 이미 자신의 마음을 간파하고,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선을 그어버린 것이다.유진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 표정엔 피곤함이 묻어났다.“조금 피곤해서 먼저 갈게요. 할아버지께는 대신 인사 부탁드려요.”유진은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몇 걸음만 걸었을까? 그 순간, 뒤쪽 정원에 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형형색색의 하트 모양 꽃장식이 환하게 빛났고, 수많은 풍선과 조명이 하늘로 떠올랐다. 몽환적이고 낭만적인 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