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정이 집에 돌아왔을 때, 거실 테이블 위에 놓인 청첩장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는 손에 들고 내용을 한 번 훑어본 뒤, 그대로 주방으로 걸음을 옮겼다.그곳에서는 임유진이 애옹이 저녁을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캔 사료를 으깨 고양이 사료 위에 얹고, 거기에 직접 만든 토마토 소스를 뿌려 마무리하고 있었는데, 얼핏 보면 영락없는 악마의 요리처럼 보였다.손은 바쁘게 움직였지만, 애옹이는 옆에서 계속 장난을 치며 방해했고, 주방은 온통 난장판이었다. 하지만 은정은 그 엉망진창의 풍경을 지켜보며 묘하게 마음이 따뜻해졌다.혼잣말처럼, 은정은 그 순간 유진이 얼마나 귀엽고 생기 넘치는 사람인지 새삼 느꼈다. 잠시 그대로 서 있던 은정은 조용히 다가가 말했다.“내가 할게.”유진은 은정이 온 줄도 모르고 있다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언제 왔어요?”“방금.”은정의 몸에서는 은은한 술 향이 났고, 목소리도 낮고 부드러워져 있었다. 그는 휴지를 들어 유진의 손끝에 묻은 토마토 소스를 닦아주었다.유진은 은정이 잡고 있던 손목을 얼른 빼며 말했다.“괜찮아요, 씻으면 돼요!”유진은 서둘러 싱크대로 가 손을 씻으며, 자연스럽게 그가 주는 긴장감을 피했다.“앞으로 내가 늦게 들어오면, 아주머니 오시게 하든가. 아니면, 너는 애옹이랑 놀고 있어. 고양이 밥은 내가 만들어줄게.”은정의 말에 유진은 잠시 멈칫했다. 쏟아지는 수돗물 소리 아래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멍하니 서 있다가, 고개를 돌리며 미소 지었다.“괜찮아요. 이제는 손에 익어서 나름 익숙해졌거든요.”진지하게 말하는 유진을 보며 은정은 아까 주방에서 정신없이 우왕좌왕하던 모습을 떠올렸고, 웃음이 절로 나올 뻔했다.은정은 그릇에 담은 고양이 밥을 애옹이에게 건네주며 물었다.“이번 주말, 너 여씨그룹 회장님 생신파티 간다고 했지?”유진은 은정이 초대장을 본 걸 알고 고개를 끄덕였다.“응. 원래도 회장님 알고 있었고, 선배가 청첩장 안 줬어도 가족이랑 같이 갈 생각이었거든요.”잠시 뜸을
“그럼 나 가요, 또 봐요!”연하는 손을 흔들며 동료들 쪽으로 돌아가려 했다.“그리고...”진구가 갑자기 그녀를 불러 세웠다.“이번 주 일요일 우리 할아버지 생신 파티인데, 놀러 올래? 유진도 올 거야.”“좋죠! 꼭 갈게요!”연하는 밝게 웃었고, 진구는 따뜻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내일 초대장 보내줄게.”연하는 농담처럼 말했다.“감사해요, 사장님의 특별한 배려!”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고, 연하는 손가락으로 멀리 다가오는 차량을 가리켰다.“차 온 거 같은데요? 얼른 타세요.”진구는 살짝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태워줄까?”“아뇨, 괜찮아요. 대리 불렀어요.”진구는 더 말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차로 향했고, 연하는 손을 흔들며 그의 차량이 다른 차들과 섞여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일요일, 유진은 가족들과 함께 여씨 집안이 파티를 여는 호텔로 향했다. 소희는 임신 중이라 임구택은 그녀가 피곤할까 봐 걱정되어, 아예 청원에 남아 함께 시간을 보내고 행사에는 참석하지 않았다.호텔에 도착하자마자 노정순은 곧장 귀빈 구역으로 안내받았고, 우정숙은 지인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대화를 나눴다.유진은 얌전하게 우정숙 곁을 지키며 함께 다녔다.잠시 후, 오늘의 주인공인 여신학 회장이 호텔에 도착하자, 우정숙은 유진을 데리고 위층으로 향했다.그곳에는 임시호와 노정순이 상석에 앉아 여 회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여신학은 개량한복 차림으로, 머리는 반쯤 백발이었지만 기운 넘치고 눈빛도 선명했다. 우정숙과 임유진이 도착하자, 여씨 집안 사람들은 모두 일어나 따뜻하게 맞이했다.“여사님, 유진 씨도 왔네요!”유진은 예의 바르고 자연스럽게 여신학에게 축하 인사를 전했고, 이후 각 어른에게도 차례로 인사를 드렸다.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진구는 장난기 섞인 미소로 말했다.“오늘 옷 정말 예쁘다. 안목이 좋은데?”유진은 웃으며 말했다.“그건 우리 엄마 칭찬이죠. 오늘 스타일링 도와주셨으니까.”진구는 눈빛이 한층 부드러워
우정숙은 조용히 진구 옆에서 유진을 챙기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진구 혼자서 여씨그룹을 끌어 나가는 거, 정말 대단해요. 다시 보게 되네요.”그러자 여사는 자랑스러우면서도 애틋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얘가 감당해야 하는 책임이 정말 커요. 근데 유진이가 있어서 다행이에요. 유진이가 없었으면 우리 진구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상상도 하기 싫어요.”우정숙은 잔잔하게 웃으며 말했다.“우리 유진이는 전엔 좀 아이 같았는데, 진구 옆에서 많이 성숙해졌어요. 둘이 서로 좋은 영향을 주고받는 것 같아요.”“맞아요, 제가 하고 싶던 말이 그거예요!”그녀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살짝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그때 서선영이 말을 끼어들었고, 정숙에게 아부하듯 웃으며 말했다.“유진 씨는 진짜 공주님처럼 예쁘고 단정하네요. 여진구 사장이랑 함께 있으니까 꼭 천생연분 같아요!”서선영은 직감적으로, 유진과 은정 사이에 뭔가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오히려 유진이 여씨 집안에 시집가는 게 낫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그 말은 여신학 회장 부인의 마음을 정통으로 건드렸다.“우리 진구는 유진이한테 비할 수가 없어요. 나한텐 유진이 같은 딸 하나만 있으면, 아들은 없어도 돼요!”서선영은 바로 웃으며 덧붙였다.“그럼 유진 씨를 진구 씨에게 시집보내세요. 그러면 따님도 생기고 아들도 그대로잖아요!”뒤쪽에 앉아 다른 사람들과 대화 중이던 은정은 수다를 흘끗 들으며 점점 표정을 굳혔다. 회장 부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귀에 그대로 꽂혔다.“그거 정말 좋죠!”회장 부인이 즐거워하며 말했다.“문제는 우정숙 여사님이 과연 유진이를 쉽게 내보내주시겠느냐는 거예요.”우정숙도 은정의 존재를 의식해서인지, 애써 웃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유진이가 좋다고 하면, 저희는 언제든 응원할 거예요.”“들었죠?”서선영이 바로 말했다.“이제 여사님께서 청혼하러 가셔야겠네요!”은정은 뒤에서 듣고 있다가, 유진과 진구가 웃으며 다정하게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고는 마음이
유진이 막 거절하려던 순간, 갑자기 손목이 누군가에게 붙잡혔다. 그 순간, 키가 크고 단단한 남자가 유진의 앞을 막아섰다. 그 남자의 기세는 날카롭고 냉철했으며, 차가운 눈매로 여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얘한테서 떨어져. 아니면, 나도 가만있지 않을 거야.”여인후는 놀란 눈으로 되물었다.“구은정 사장님?”아까 위층 거실에서 잠깐 마주쳤던 인물이었다. 은정은 그를 싸늘하게 한 번 흘겨보곤, 유진의 손을 이끌고 성큼성큼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인후는 두 사람이 맞잡은 손을 바라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유진은 은정의 뒤를 따라가며 걸었다. 바로 앞이 파티장이었기에 유진은 급히 손을 빼내려 했다.그 순간, 은정이 갑자기 뒤를 돌아봤다. 남자의 눈빛은 반항심 어린 깊은 어둠을 품고 있었고, 마치 말로는 담아낼 수 없는 무언가를 감추고 있는 듯했다.유진은 그 시선을 받고 순간 얼어붙었고, 은정은 방향을 틀어 옆으로 그녀를 이끌었다.좁은 복도를 지나자 끝에 조용한 휴게실이 있었다. 방은 작았고, 다섯 칸짜리 서랍장 하나, 천장까지 닿는 장식용 책장, 그리고 소파 두 개가 놓여 있었다.은정은 방 안으로 들어선 뒤, 유진의 허리를 잡아 올려 그대로 서랍장 위에 앉혔다. 유진은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지만, 아직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은정의 뜨거운 입맞춤이 이어졌다.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젖혔지만, 뒤는 벽이라 더는 물러날 수 없었다. 유진은 두 손으로 은정의 어깨를 밀며 저항했지만, 유진의 힘은 그에게 아무런 저항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그 반작용으로 은정이 더 가까이 다가왔다.“으음!”입술과 혀가 거칠게 섞였다. 은정은 거의 이성을 잃은 듯한 키스로 그녀를 삼켰고, 마치 분출구를 찾은 감정처럼 거침없었다.은정은 유진이 허우적대는 손을 움켜쥐어 서랍장 위에 눌렀고, 온몸에서 분노로 가득 찬 야수 같은 기운이 흘러나왔다.유진의 심장은 북처럼 쿵쾅거렸고, 그의 뜨거운 체온과 억센 힘에 겁이 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삐친 감정에 지쳐, 끝내 눈을
방은 반쯤 열려 있는 구조였다. 바깥쪽 복도는 다른 휴게실들과도 이어져 있어 사람들이 계속 오가고 있었고, 누가 조금만 다가와도 두 사람을 바로 들킬 수 있는 상황이었다.오늘은 여진구네 집에서 초대한 손님들이 하나같이 재력과 지위를 갖춘 이들이었고, 대부분이 임유진과 구은정을 알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발각되기라도 하면 그 파장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다.발소리가 가까워지는 순간, 유진의 온몸이 긴장으로 굳어졌다.“유진이 봤어?”진구의 목소리가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들려오자, 연하가 곧바로 대답했다.“유진이 화장실 갔으니까 내가 찾을게요. 선배는 선배 볼일 봐요!”이에 진구가 말했다.“그래, 뭐 있으면 전화해!”유진은 긴 속눈썹을 살짝 떨며, 꼭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리고 바로 그 앞에 있던 은정의 깊고 어두운 눈동자와 마주쳤다.그 순간, 마치 깊은 심연에 빠져드는 기분이었고, 빠져나오려 해도 이미 늦었다. 언제 누가 다가왔고, 언제 다시 자리를 떴는지도 유진은 전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숨이 가빠질 정도로 몰아쉬고 있던 그때, 은정은 유진의 입술에서 천천히 떨어지며 낮고 묵직한 목소리로 물었다.“정말로, 나한테 아무 감정도 없어?”유진은 얼굴까지 붉게 달아올라, 눈에는 부끄러움과 분노가 뒤섞인 감정이 스쳤다. 순간적으로 은정을 밀쳐내고는 서랍장에서 훌쩍 뛰어내려 도망치듯 문 쪽으로 달려갔다.“구은정 씨, 다시는 당신 보고 싶지도 않아!”말은 강하게 했지만, 그 목소리는 오히려 부드럽고 달콤하게 들려, 마치 애교처럼 느껴질 정도였다.이에 은정은 입꼬리를 올리며 태연하게 말했다.“도망쳐봐야 어디로 가겠어?”은정이 그렇게 느긋하게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유진은 심장이 요동쳤고, 생각도 흐려졌다. 유진은 두 걸음 물러나더니 곧장 몸을 돌려 허겁지겁 달아났다.또 도망치자, 은정은 유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확신했다. 유진은 분명 자신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을.아까 그 상황에서 그녀가 단 한마디만 외쳤더라면, 누군가는 달려왔을 것이었으나,
연하가 짐작하듯 말했다.“진구 선배 때문인 것 같아. 어른들이 계속 너랑 여진구를 엮으려는 얘기 하더라. 너도 계속 그 사람이랑 같이 있었고. 그래서 그분이 질투한 거 아냐?”임유진은 걸음을 멈췄고, 그제야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랑 진구 선배는 어른들이 생각하는 그런 관계 아니야.”이에 연하가 살짝 떠봤다.“그럼 넌 선배를 좋아해? 아니면 오늘 너한테 키스한 그 남자?”유진은 곧바로 대답했다.“선배 안 좋아해!”연하는 예상했다는 듯 조용히 여진구를 위해 묵념하며, 웃으며 말했다.“그러면 결국 구은정 씨 쪽이네?”유진의 눈빛에 복잡한 감정이 어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연하는 그 이상 깊게 묻지 않고, 분위기를 적당히 넘기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괜히 유진을 자극해 은정에게 곤란을 주는 건 피하고 싶었다.늦은 오후, 파티가 끝난 뒤 임씨 가족은 함께 자리를 떠났다. 집에 도착하자, 유진은 우정숙의 팔짱을 낀 채 2층으로 올라갔다.방 앞에 도착한 그녀는 팔짱을 풀며 말했다.“엄마, 나 옷 좀 갈아입고 올게요.”“유진아.”우정숙이 유진을 불러 세우며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오늘 여사님이 너 얘기를 특별히 하시더라. 뜻은 알겠는데, 넌 어떻게 생각해? 진구 마음에 들어?”유진은 조금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저랑 선배, 그냥 친구예요.”“근데 말이야, 너희 얘기하는 거 보면 꽤 잘 통하는 것 같던데?”유진은 피식 웃었다.“잘 통한다고 다 연애하라는 법은 없잖아요? 저 방연하나 장효성이랑도 잘 얘기해요.”우정숙도 웃음을 터뜨렸다.“그건 다르지. 그런 친구들이랑은 다르잖아.”“다를 거 하나도 없어요.”유진은 더 이상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저 좀 피곤해서요.”우정숙은 그녀를 안쓰럽게 껴안아 주며 말했다.“그래, 그만하자. 가서 씻고 푹 쉬어.”유진은 고개를 끄덕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우정숙은 한참 그 자리에 서서 딸의 뒷모습을 바라봤는데, 거짓말을
유진은 몇 걸음 더 다가가 남자를 내려다보며 물었다.“술 마신 거예요?”은정은 눈을 천천히 떴다. 목소리는 낮고 거칠게 갈라져 있었다.“유진아.”유진은 얼굴을 굳히며 반쯤 무릎을 꿇고 앉았다.“대체 왜 이렇게 술을 많이 마셨어요?”은정의 짙고 어두운 눈동자가 곧장 유진을 바라보았고, 그 시선에 유진의 마음이 한없이 흔들렸다.유진은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여전히 거칠고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너 볼 수 있다면, 죽어도 괜찮아.”그 말에 유진의 눈가에 눈물이 갑자기 맺혔으나, 눈이 붉게 물든 채로 말했다.“그럼 안심해요. 죽어도 나는 쳐다도 안 볼 거니까요.”그러고는 벌떡 일어나 돌아서려 했지만 유진의 손목이 갑자기 꽉 붙잡혔다. 힘이 세서 도무지 빠져나갈 수 없었다.유진은 차갑게 고개를 돌려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놓으세요.”그러자 은정은 갑자기 목소리를 낮췄다.“나 열 나는 거 같지 않아? 만져봐.”유진은 순간 당황했다. 은정은 머리를 쿠션에 기댄 채, 유진의 손을 잡아 자기 이마 위에 올렸다.뜨겁게 달아오른 열기에 유진의 얼굴빛이 달라졌다. 그녀는 손바닥 전체를 이마에 붙이며 다시 확인했다. 정말 점점 더 뜨거웠다.“아픈 거예요?”유진이 놀란 목소리로 묻자, 은정은 유진의 얼굴을 바라보며 대답했다.“그런 것 같아.”“어디가 더 아파요?”유진이 걱정스레 물었다.“머리가 아파. 그리고...”은정은 유진의 손을 내려 가슴팍 위에 얹었다.“여기도 많이 아파.”셔츠 너머로 느껴지는 단단한 근육과 거친 심장 박동. 쿵, 쿵, 쿵, 그 격한 두근거림이 고스란히 유진의 손바닥에 전해졌다.유진은 놀라 손을 황급히 빼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구은정.”은정은 깊게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내 이름 그렇게 불러주는 거, 제일 좋아.”속으로는 바랐다. 언젠가 유진이 다시 자신을 사장님이라 부르는 날이 오기를.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저 일어서서 단호하게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문을 나섰다
유진은 은정이 갑자기 태도를 바꾼 데 놀라 잠시 멍해졌다. 그러고는 작게 중얼거리듯 말했다.“잘못한 거 알면 고치면 되죠. 전 일단, 예전 일은 용서할게요.”유진은 해열제를 찾아내고는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다행이다. 할머니가 미리 약들을 챙겨두셨거든요.”노정순이 각 약의 효능과 복용량을 따로 포스트잇에 적어 붙여놓았고, 유진은 방금 몇 번이고 확인했다. 이 정도면 문제없을 것이었다.유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가 따뜻한 물을 받아왔고, 해열제를 구은정에게 건네며 말했다.“아까 의사 선생님한테 전화했어요. 감기몸살일 가능성이 크대요. 우선 이거 먹어요. 열이 안 내리면 병원 갈 거예요.”은정은 눈앞에 놓인 약을 보며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체온 안 재봐도 돼?”“체온? 만져보면 알죠!”유진은 다시 은정의 이마를 만지고, 곧바로 자기 이마와 비교해 봤다, 그러고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괜찮아요. 안 재도 돼요. 확실히 열나요.”하지만 은정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약 안 먹어도 돼. 뜨거운 물 좀 마시면 곧 나을 거야.”“안 돼요. 꼭 먹어야 해요.”유진은 단호하게 약을 내밀었으나, 은정은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았다. 유진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혹시 약 먹는 거 무서워요?”은정은 유진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약을 받아 입에 털어 넣더니, 물을 크게 한 모금 마시고 꿀꺽 삼켰다.그 급한 모습이 너무 긴장돼 보여서, 유진은 웃음을 참느라 애를 먹었다.‘진짜 약 먹는 거 무서운 거였네.’아프기도 하니까, 그냥 웃지 않기로 했다.유진은 다시 몸을 돌려 거실 테이블 위의 약상자를 정리하려고 했다. 약을 넣으려다 상자 뒷면에 적힌 문구가 눈에 띄었다.유진은 고개를 돌려 물었다.“관장약? 관장이 무슨 뜻이에요?”은정은 그 말을 듣고 잠시 멍하더니, 갑자기 얼굴이 확 굳어졌다. 그러고는 몸을 숙여 목 안에 손가락을 집어넣으려 했다.유진은 그 모습을 보자마자 배를 쥐고 웃기 시작했다. 소파에
구은서의 말은 애절했고, 눈물 가득한 얼굴은 누가 보아도 가련했다. 구은태는 자신이 이십 년 넘게 아끼고 사랑해온 딸을 바라보며 격했던 감정이 점차 가라앉기 시작했다.임유진과 구은정은 눈빛을 마주쳤다. 오늘 이 자리에서 반드시 서선영 모녀를 끝장내야 한다는 예감이 동시에 스쳤다. 다시는 숨 쉴 틈을 줘선 안 된다.유진이 입을 열려던 찰나, 휴게실 문이 갑자기 열리고 몇 명의 경찰이 들어왔다. 방 안 상황을 본 경찰들은 잠시 놀란 듯했지만, 곧 차분히 물었다.“서선영 씨는 누구시죠?”서선영은 여전히 바닥에 무릎 꿇고 있던 참이라 얼굴에 눈물이 범벅된 채로 당황스럽게 대답했다.“저예요. 무슨 일이죠?”경찰은 단호하게 말했다.“현재 한 유괴 사건에 연루되셔서, 저희와 함께 경찰서로 가주셔야겠네요.”“유, 유괴 사건이요?”서선영은 얼이 빠진 듯 말을 더듬었고, 은서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경찰이 왜 여길 찾아온 거지?’‘분명히 손기수를 시켜 장말숙 가족에게 절대 신고하지 말라고 위협했고, 따로 사람도 붙여 감시하게 했는데, 분명 신고는 없었어. 그런데 대체 어떻게 경찰이?’유진은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때가 왔고, 이번에는 절대 놓치지 않을 것이다. 이번만큼은 서선영 모녀에게서 도망칠 구멍조차 허락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이에 구은태도 놀라 물었다.“유괴라니, 무슨 소리죠?”경찰은 구은태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지금 서선영 씨께서 유괴 사건에 관련된 정황이 있어 조사 차 동행을 요청드려요. 협조 부탁드릴게요.”은태는 다시 서선영을 바라보았다.“또 뭘 꾸민 거야, 이 악마 같은 여자가.”은태의 목소리는 얼어붙은 듯 차가웠다. 서선영은 얼굴이 창백해진 채 입을 벌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때, 은정이 나섰다.“같이 가죠. 조금 전까진 은서가 우리 가족이라며 감쌌잖아요? 가족이면 함께 있어야죠.”그 말에 구은서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무언가 아주 불길한 일이 다가오고 있었다.원래 오늘 구씨 파티가 끝
서선영은 곧장 구은태에게 달려가 그를 붙잡았다.“여보!”구은태는 휘청였지만 몸을 간신히 지탱했고, 그녀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쉰 목소리로 고함쳤다.“꺼져, 이 악독한 년!”서선영은 힘없이 문 쪽으로 내동댕이쳐졌고, 그 순간 문이 열리며 구은서가 들어왔다. 방 안의 참혹한 광경을 본 은서는 당황한 듯 물었다.“무슨 일이에요?”구은태는 핏발 선 눈으로 서선영을 가리키며 외쳤다.“네 엄마한테 물어봐. 대체 뭘 한 건지!”은서는 아버지의 분노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혹시 은정을 모함한 일이 들킨 건 아닌가 싶어 애써 표정을 감추고 서선영을 바라보며 물었다.“엄마, 무슨 일이야?”서선영은 그저 얼굴을 감싸 쥐고 울고 있을 뿐이었다.그때, 구은태는 갑자기 은서를 향해 시선을 돌리더니 서선영을 바라보고 물었다.“사실대로 말해. 은서, 이 애가 정말 내 딸이 맞아?”“맞아요!”서선영은 지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은서는 당신 딸이에요. 그건 정말 확실해요!”“좋아. 지금 제대로 말 안 했다가 내가 친자 검사로 진실을 알게 되면, 그땐 죽여버릴 거야!”구은태는 분노로 이를 갈며 말하자, 서선영은 흐느끼며 소리쳤다.“정말이에요! 제 목숨 걸고 맹세해요. 제가 거짓말이면 천벌을 받아도 좋아요!”그제야 은서는 상황이 점점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느꼈다. 이건 은정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문제였다.은서는 구은정에게 맞아 쓰러져 있는 최이석을 돌아보았다. 그 순간, 어떤 장면이 뇌리를 스쳐갔고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지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서선영은 엉금엉금 기어가며 구은태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애원했다.“여보, 제가 배신하고 잘못한 건 맞아요. 하지만 은서는 정말 당신 딸이에요. 그렇게 똑똑하고 예쁜 아이잖아요.”“당신도 얼마나 예뻐했어요. 은서 봐서, 제발 이번만 용서해 주세요!”그제야 은서는 모든 걸 직감했다. 온몸에서 힘이 빠지며,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그러나 임유진은 이를 꽉 물고 단호하게
최이석도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멍하니 있다가, 순간 정신을 차리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곧장 도망치려는 듯 문을 열었는데, 그 문 너머에는, 구은정의 날렵하고도 위압적인 실루엣이 서 있었다.은정은 말없이 다가오더니 그대로 발을 들어 최이석의 가슴팍을 걷어찼다.“컥!”이석은 뒤로 넘어지며 카펫 위에 엎어졌다. 가슴을 움켜쥐며 고통스러운 신음을 냈지만, 그 울음은 진짜인지 연기인지 분간되지 않았다.그때, 숨을 거칠게 내쉬며 구은태가 천천히 걸어왔다. 그의 얼굴은 철저히 일그러져 있었고, 그 눈빛은 분노로 이글거렸다.그리고, 구은태는 서선영 앞에 멈춰서더니 아무 말 없이 손을 들어 서선영의 뺨을 세차게 내리쳤다.뺨을 후려치는 소리와 함께 서선영은 그 충격에 그대로 몸이 비틀어졌고, 얼굴을 감싸 안으며 온몸을 떨기 시작했다.“이 더러운 년!”구은태는 서선영의 옷깃을 거칠게 움켜쥐고 또다시 손을 들어 그녀의 반대쪽 뺨을 갈겼다.“제가 잘못했어요. 한순간, 제가 정신이 나갔었어요.”서선영은 털썩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구은태의 손을 붙잡고 오열했다. 그녀의 두 볼은 이미 시퍼렇게 부어오르고 있었다.“대체 너희 둘, 언제부터 이런 짓을 벌인 거야!”구은태는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물었다.그 순간, 최이석이 조롱 섞인 웃음을 흘리며 비틀비틀 일어섰다.“솔직히 말해줄까요? 서선영이 당신 만나기 전부터 벌써 나랑 자고 있었어요. 회사 들어간 이후로는 매주 만나서 몸 섞었고요.”“입 닥쳐!”서선영은 미쳐 날뛰듯 소리쳤지만, 최이석은 그녀를 보지도 않고 구은태만을 노려봤다.“저 여자는 당신을 사랑한 적 없어요. 사랑한 건 당신 지갑뿐이고요. 30년 전, 당신이 술 마시고 덮쳤다고 생각했죠?”“웃기지 마요. 전부 미리 짜놓은 대본이었으니까. 그때 은서가 생겼고, 도망친 척하면서도 사실 계속 강성에 있었어요.”“당신 바로 곁에서, 우릴 속이고 있었던 거죠. 참, 당신 원래 부인 왜 갑자기 병세가 악화됐는 줄 알아요?”“서선영이 일부러 임신한 배를
구은서는 서선영보다 훨씬 더 잔인했기에, 임유진은 점점 불안해졌다.“혹시 그 애까지 다치게 되는 건 아닐까요?”이번 일은 유진이 먼저 제안한 계획이었다. 그런데 은서가 장말숙을 압박하기 위해 그 손자를 납치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그럴 일 없어.”그러나 구은정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 아이는 절대 다치지 않을 거야.”유진은 그제야 조금 안심했고, 은정은 이어서 설명했다.“장말숙은 처음부터 독을 품은 호랑이와 손잡은 셈이지. 이건 스스로 자초한 일이야.”“은서가 장말숙의 손자를 납치했다는 건 이미 그 집안을 완전히 조사해 놓았다는 뜻이야.”“내가 강성을 떠나지 않는 한, 언젠가는 아이를 이용해서 조종하려 했을 거야.”“그런데 네가 먼저 움직여준 덕분에 우린 미리 조치할 수 있었고, 결국 아이도 지켜냈지.”유진은 고개를 갸웃하며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은정을 바라봤다.“예전과 완전 딴사람이 된 것 같아요. 위로까지 이렇게 부드럽게 하다니?”은정은 애옹이를 옆으로 밀어내고 유진을 품에 끌어당겼다.“질문 하나 해도 돼? 너는 서인을 좋아해, 아니면 구은정을 좋아해?”유진은 입술을 깨물며 웃었다.“둘 다 같은 사람 아닌가요?”은정은 묵직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분명히 다르다고 생각했잖아.”유진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중얼거렸다.“사실 처음부터 한 사람이었어. 다른 건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않느냐의 차이였을 뿐이죠.”그리고 고개를 들며 은정의 눈을 마주 봤다.“내 말 맞죠?”이에 은정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그럼, 예전의 내가 널 사랑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유진은 고개를 저으며 촉촉히 빛나는 눈으로 미소 지었다.“아니요. 오히려 시언 사장님이 날 사랑하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나는 그게 정말 고맙거든요.”은정의 눈빛이 깊고 짙어졌다. 가슴이 저릿할 만큼 미안함과 애틋함이 가득 차올랐다. 은정은 고개를 숙여, 유진에게 입을 맞췄다.“유진아. 난 늘 널 사랑했어.”은정은 언제나 유진만을 마음에
“역시 이런 식으로 문제가 될 줄 알았어요.”은서는 싸늘한 눈빛으로 말하자, 손기수가 물었다.[이제 어떻게 하죠?]구은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장말숙한테 손자가 있잖아요. 그 애를 데려가요. 안전한 곳에 숨겨두고 지켜여.”이에 손기수는 비죽 웃으며 말했다.[그건 납치 아닌가요?]“이건 우리 엄마 뜻이에요.”은서는 그 말을 강조하듯 단호하게 말했다.“일만 제대로 끝내면, 보수는 두 배로 줄 거예요.”그제야 손기수는 만족스레 웃으며 대답했다.[좋아요. 저한테 맡기세요.]은서는 다시 신신당부했다. “숨겨두기만 해야 해요. 절대 다치게 하면 안 돼요.”이에 손기수는 급히 말했다.[우리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하겠어요!]은서는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엄마 말씀만 잘 따르면,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거예요.”모든 게 은정을 내쫓는 날까지만 버티면 그만이었다. 장말숙의 아들이 위협되지 않게 만들어야 했고, 지금 중요한 건 은정을 최대한 빨리 강제로 떠나게 만드는 일이었다.두 시간 후.오현빈이 급히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형님, 큰일이에요. 장말숙 아주머니 손자가 납치당했어요!”은정의 눈빛이 차갑게 되었다. 그와 유진의 계획은 장말숙의 아들이 철없는 무뢰한이라는 걸 이용해, 서선영 쪽 사람들과 충돌이 일어나게 만들고 그 사이에서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었다.그런데 서선영은 한 수 더 앞질렀다. 직접 손자를 납치해 버린 것이다. 은정은 느긋한 듯 말했지만, 말투엔 서늘한 살기가 묻어났다.“왜 못 막았어?”현빈이 대답했다.[도착했을 땐 이미 데려가고 난 뒤였어요. 아이는 집에 혼자 있었고요.]장말숙은 요즘 일을 그만두고 손자를 돌보고 있었다. 자기 아들은 놀기 좋아하고 도박을 일삼으며 최근 큰 빚까지 졌고, 며느리는 친정으로 들어가 버렸다.장말숙이 서선영의 돈을 받은 것도 빚을 갚고 며느리를 다시 불러들이기 위한 것이었다.그날 점심을 먹고 잠시 슈퍼에 다녀온 사이, 손자가 납치된 것이다.은정은 알고 있
“아주머니는 분명 그날 일에 대해 알고 있어요. 그 사람한테 직접 확인하러 갈 거예요!”임유진은 말을 끝내자마자 그대로 뛰쳐나갔다.“유진아!”구은서는 몇 걸음 뒤쫓았지만, 유진은 이미 계단 아래로 사라지고 있었다. 은서는 굳게 이를 악물며 눈살을 찌푸렸다.서선영이 집에 없다는 걸 알자, 그녀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장말숙 아주머니 잘 지켜봐요. 유진이 그날 일 알아보려고, 지금 그 사람 찾으러 갔으니까.”그러나 서선영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걔가 뭘 안다고 찾아?]은서는 차분히 말했다.“유진은 임씨 집안 사람이야. 찾으려면 못 찾을 사람이 없죠.”이에 서선영의 말투도 조금 무거워졌다.[알았어. 내가 금방 사람 붙여서 장말숙 감시하라고 할게.]은서는 이어서 냉랭하게 따져 물었다.“절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는다면서요? 근데 걔는 어떻게 안 거예요?”유진이 알았다는 건, 임씨 가족들까지도 이미 감지했다는 뜻이었다. 이에 은서는 불안감에 입술을 꾹 눌렀다.서선영은 얼버무리며 말했다.[아마 도우미 중 누가 말실수했을 거야. 다시 철저히 단속해 둘게. 걱정하지 마. 소문 좀 난다 해도 너한테까지 영향은 안 가. 넌 그냥 조용히 대본 연습이나 해.][이번 영화, 내가 네 외삼촌 꼬드겨서 겨우 투자받은 거 알지? 이번 기회 잘 잡아야 해. 딴 건 신경 쓰지 마. 연기만 잘하면 돼.]은서는 그 말에 더욱 날카로워졌다. 이번 영화는 유명 감독의 대작이었고, 은서에게는 이미지 회복의 유일한 기회였다. 그렇기에 서선영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나 곧 촬영 들어가요. 그러니까 이번 일 절대 망치지 마요.”[알았어!]서선영은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유진은 급히 차로 돌아와 깊게 숨을 들이쉰 후, 곧장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서선영 쪽에서 곧 움직일 거예요.”[알고 있어. 이미 준비해 뒀어.]은정의 목소리는 침착했고, 유진은 안심하며 숨을 내쉬었다.이윽고,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고생 많았어.]이에 유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
“아파요!”유진은 짧은 비명을 내뱉으며 순식간에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팔을 뻗어 구은정의 목에 매달리듯 안으며, 자기 얼굴을 숨기려 했다.이에 은정은 그녀의 어깨를 쓸어내리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낮게 웃었다.“왜 예전 같지 않아? 예전엔 몰래라도 키스하려고 했으면서, 이젠 실컷 하라고 해도 도망치기 바쁘네.”유진은 은정을 꼭 안으며 눈가가 붉게 물들었지만 속은 터질 듯 행복했다. 이제는 몰래 키스할 필요가 없다. 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할 수 있었다.은정은 유진의 발그레한 귀에 입을 맞추며 낮게 속삭였다.“전에 난 늘 걱정했어. 네가 그냥 어린 마음에 나한테 끌리는 거라고. 그저 신기하고 새로워서, 가질 수 없으니까 더 마음이 가는 거라고.”“우리가 진짜로 사귀게 되면 금세 질릴 거라고. 나는 사실 정말 재미없는 사람이야. 총 쏘고 싸우는 것 빼곤 할 줄 아는 게 없어.”“요즘 애들이 좋아하는 것도 몰라. 마음도 더 이상 젊지 않아.”“그래서 넌 언젠가 내가 생각보다 별거 아니라는 걸 깨닫고, 그 마음이 식을까 봐 두려웠어.”유진은 목이 메어, 콧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내가 기억 잃었을 때, 왜 다시 나한테 다가왔어요?”은정은 예전엔 그렇게 차갑게 거절했던 사람인데, 교통사고 한 번 났다고 갑자기 사랑하게 된 걸까? 혹시 죄책감 때문은 아니었을까?그런 생각이 유진을 계속 불안하게 했다. 잠시 침묵하던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아마 너 없는 세상이, 정말로 견딜 수 없을 만큼 어둡고 차가웠기 때문일 거야.”그 말에 유진의 가슴은 요동쳤다. 그녀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마음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려는 듯, 어둠을 걷어내고 자신의 빛으로 은정의 세상을 덮어주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유진은 다시 한번, 은정에게 입을 맞췄는데, 이번엔 더욱 깊고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은정은 곧 유진을 세게 안았고, 불같이 뜨거운 열기가 유진을 감쌌다. 죽음 같은 어둠 속에서 되살아난 사람처럼, 은정의 키스는
“그 사람들이 설마...”유진은 커다란 눈을 뜨고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구은정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네가 생각한 그대로야.”유진은 믿기지 않는 듯 놀람과 동시에 깊은 자책의 기색을 띄웠다.“결국 내가 이렇게 만든 거잖아요.”“자꾸 그런 식으로 네 탓 하지 마.”은정은 그녀의 뺨을 다정하게 쓸어내리며 말했다.“너는 둘 사이의 더러운 사정도 몰랐잖아.”유진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서선영은 그래도 이해가 가. 근데 구은서는 왜 그렇게까지 자기 엄마한테 협조한 거예요?”“자기 명예가 달린 문제인데, 게다가 지금은 연예인이잖아요. 설령 피해자라 해도, 그런 얘기 퍼지는 게 좋을 리 없잖아요.”은정은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대답했다.“십몇 년 전 그 일 땐, 은서는 진짜로 몰랐던 것 같아. 내가 샤워 끝내고 나왔을 땐 자고 있었고, 서선영이 소리 지르고 난리 쳐도 안 일어났거든.”“그땐 그냥 서선영한테 이용당한 거지. 근데 이번엔 서선영이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나도 몰라.”유진은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서선영은 정말 너무 악랄했다. 자기 딸까지도 그런 식으로 이용한다면, 못 할 짓이 뭐가 있을까?더구나 서선영은 알고 있었다. 이런 식의 루머가 은정에게 가장 치명적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게 바로 구은태에게도 가장 아픈 약점이라는 것을. 그래서 서선영은 또다시 그 수를 썼다.유진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중얼거렸다.“그때 전화받은 아주머니, 그 사람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찾을 수는 있어. 하지만 서선영한테서 돈을 받았고, 아마 협박도 받았을 거야.솔직히 말해줄 가능성은 작아.”은정은 냉정하게 말하자, 유진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그래도 찾아봐야죠. 당장 데리고 가서 집에 가서 진실을 말하게 해야 해요!”은정은 유진의 손목을 붙잡았는데,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웠다.“서두르지 마.”“어떻게 안 서둘러요! 지금 이미 밖에선 온갖 소문이 돌고 있다고요!”유진이 답답해하며 소리치자,
“그날 밤 전화했을 때 말이야.”유진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그게 바로 그날이었어요?”“그래.”은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그는 서선영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 몰랐다. 혹시 다시는 유진을 볼 수 없게 될까 두려워, 마지막으로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사실은 유진에게 자기 집으로 와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그 말이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았다.유진은 자책하듯 말했다.“나도 그때 뭔가 이상하단 걸 느꼈어. 근데 안 찾아갔어요.”은정은 유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그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고, 유진은 단지 모호한 한 통의 전화로 구씨 저택까지 달려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유진의 마음속은 여전히 무겁고 미안했다.“내가 갔더라면, 그 여자의 계략이 통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요.”“유진아, 우리 이제 과거에 대해 그만 후회하자. 응?”은정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말하자,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중요한 건, 서선영 모녀의 거짓말을 어떻게 밝혀낼지였다.“그 여자가 떠나라고 하니까, 진짜 떠나려던 거예요? 도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됐어?”유진이 화가 난 듯 말하자, 은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차가운 듯 부드러운 눈빛으로 대답했다.“내 명예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어. 네가 그 일 알고 나서 날 더 미워할까 봐, 그게 무서웠지.”호텔에서 유진이 여씨 집안 가족 모임에 참석한 걸 봤을 때, 그는 마음이 무너졌다.자신은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앞으로도 더러운 과거 때문에 손가락질받을 인생인데, 그런 자신의 곁에 유진을 두는 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유진은 따뜻하면서도 가슴 아픈 눈빛으로 은정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유진은 두 손으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안개 낀 듯한 눈동자가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은정의 어두운 그림자를 밀어내고 그 마음속까지 빛으로 채우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이번에는 유진이 먼저 입을 맞췄는데, 그 키스는 애틋하고 따스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