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 뒤에서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곧 유정의 어깨 위로 외투 하나가 조심스럽게 덮였다.뒤를 돌아보니 조백림이 그녀 곁으로 다가와, 팔을 난간에 기대고 바깥의 눈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이게 네가 보고 싶다고 했던 그 큰 눈 아니야? 좀 이따 조지까지 불러서 마당에서 눈싸움할래?”유정은 피식 웃었다.“어른 세 명이 눈싸움한다고?”백림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말했다.“그게 어때서? 우리가 재밌으면 된 거지. 남들 눈치를 왜 봐?”유정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그 나이를 지나면, 마음도 달라져. 거기 서 있어도, 예전처럼은 못 돼.”백림은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시도도 안 해보고 어떻게 알아?”유정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그냥 하고 싶지 않아.”백림은 유정을 깊이 바라보았다.“왜?”유정은 눈을 돌려 백림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어깨에 걸친 외투를 벗어 남자에게 건넸다.“한 번 넘어졌으면, 두 번은 넘기고 싶지 않으니까.”그렇게 말한 유정은 몸을 돌려 거실로 돌아갔다. 백림은 유정의 외투를 품에 안은 채, 묘한 의미가 담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하늘에서 쏟아지는 눈을 바라보며 혼자 조용히 웃었다.그날 밤, 조지는 백림의 집에 묵었고, 시간이 늦어지자 유정은 인사하고 집으로 돌아갔다.유정이 집에 돌아간 후, 조지는 백림에게 물었다.“내가 다시 돌아올 땐, 너희 둘 다시 잘 지내고 있을까?”백림은 확신에 찬 눈빛으로 대답했다.“물론이지.”남자는 조지와 가볍게 잔을 부딪쳤다.“너도 올 땐 네 여자친구 데리고 와.”조지는 눈썹을 치켜올렸다.“같이 노력해 보자.”백림은 잔을 들고 고개를 젖혀, 남김없이 들이켰다.유정은 집으로 돌아와 베란다에 섰다.바깥에는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었고, 문득 기분이 이끌려 두꺼운 패딩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섰다.단지 안의 화단과 길은 모두 하얗게 덮여 있었고, 온 세상이 은빛으로 감싸여 있었다.저 멀리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는데, 정말로 눈싸움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두 명의
유정은 그 그림 위에, 그 한 줄도 적어두었다. 백림이 성큼성큼 걸어간 건, 단지 스쳐 지나간 한순간일 뿐이었는데, 여자는 백림의 옷차림과 옆모습을 그렇게까지 정교하게 그려냈다.부정할 수 없었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면 모두 아는 사실이었다. 머릿속에, 마음속에 깊이 각인되어야만, 실제로 보지 않고도 그 사람을 온전히 그려낼 수 있다는걸.유정의 마음은 순간 시려왔고, 처음엔 이 노트를 가져가려 했다. 하지만 잠시 고민 끝에, 아무것도 보지 못한 척 다시 원래대로 두었다.그 순간, 거실에서 갑작스레 조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백림! 우리한테 노래 한 곡 불러 줘!”조지는 서재에서 기타를 하나 찾아내 백림에게 던졌다. 그때 백림은 바 홈의 높은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남자는 팔을 뻗어 기타를 정확히 받아낸 뒤, 담배를 꺼버리고 몇 음을 가볍게 튕겼다. 그리고 웃으며 물었다.“뭘 불러줘?”조지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아무거나!”백림은 기타를 두 팔에 안고 음을 조율하더니,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난 지붕 위에 서 있어, 황혼의 빛이 퍼지고사랑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묘한 반응, 문득 네가 생각났어이 감정, 마치 수수께끼 같아마음이 좀 급하고, 약간 화도 나그러니까 제발 포기하지 마, 알겠지”...기타 소리는 섬세하면서도 묵직했다. 그리고 백림의 낮고 매력적인 음성과 어우러져, 겨울밤의 적막 속을 조용히 파고들었다.“요즘 너도 나도 비슷한 감정을 느끼지사랑과 비슷한 그런 감정 말이야같은 날, 사랑이 가까워졌다는 걸 알았어그건 사랑이야, 부정할 수 없는 거야”...“우리 둘, 낯설지만 익숙해사랑은 아주 조심스럽게 다가오고 있어그래서 묻고 싶은 거야넌 믿고 있어사랑이 오는 이 느낌, 참 예쁘지 않아”...“이 세상은 참 매정하지그래서 더 고마워사랑해 그 한마디 말을 듣고 싶었어”...백림은 고개를 약간 숙이고 있었다.머리 위 조명이 희미하게 그를 비추는 가운데, 빛과 어
조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는 눈동자가 살짝 흔들리는 걸 보니, 어떻게 말할지 고민하는 눈치였다.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그는 자국 언어 억양이 섞인 서툰 말로 천천히 말을 이었다.“학생 때 좋아하던 여자가 있었어요. 그 애도 절 좋아했죠. 우린 서로 다른 대학에 진학하게 됐는데, 졸업하면 다시 만나자고 약속했어요.”“하지만 졸업 후 제가 찾아갔을 땐, 그 애는 이미 다른 남자와 사귀고 있더군요. 우리의 약속은, 그 애한테만 잊혀진 거였어요.”“그 일을 오랫동안 잊지 못했어요. 그 애에게 남자친구가 있다는 현실도 받아들이기 힘들었죠.”“그래서 아예 상처를 떨쳐내려고 한국으로 왔어요. 그 아이가 없는 곳에서 다시 살고 싶어서요.”“그런데 며칠 전, 그 애가 전화를 했어요. 저를 많이 그리워했다고, 생일 파티에 꼭 와 달라고 하더라고요.”“그래서 지인들에게 물어봤는데, 몇 달 전에 남자친구랑 헤어졌다는 거예요. 아마 다시 잘해보자고 부른 것 같아요.”조지는 간절한 눈빛으로 유정을 바라봤다.“만약 우리가 다시 만나서, 그 애가 저한테 아직 좋아한다고 하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남자의 푸른 눈은 마치 맑은 하늘처럼 투명했고, 유정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이건 정말 어려운 질문이었다. 자신의 감정조차 엉망진창인 마당에, 남의 사랑 문제까지 판단한다는 건 버거운 일이었다.조지는 다시 물었다.“유정 씨라면 다시 받아줄 건가요?”유정은 조금 생각하다가 물었다.“아직 그 사람을 좋아해요?”조지는 한참 말이 없더니, 고개를 끄덕였다.“사실 그 뒤로도 몇 명 만났지만 항상 그 애가 떠오르더라고요.”유정은 시원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럼 다시 돌아가요. 서로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는 거예요.”“어린 시절의 약속은 가볍고 미숙했을 수 있지만, 지금은 서로를 정말 아는 나이잖아요. 지금 선택한다면, 그건 진심일 거예요.”조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되뇌었다.“맞는 말이에요. 고마워요.”조지는 술잔을 들어 올렸다.“고민을 해결해
노영인은 조백림의 태도가 확실히 달라졌다는 걸 느꼈다. 예전처럼 다정하게 웃어주지도 않았고, 말투도 더 이상 따뜻하지 않았다.이에 영인은 서운한 마음을 애써 누르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바닥에 있던 기러기인 초밥을 안아 들고 조용히 자리를 떴다.월요일. 하루종일 바쁘게 일한 유정이 집에 돌아왔을 때는 시각은 밤 아홉 시가 넘어서였다.곧장 주방으로 들어가 칵테일 한 병을 꺼내 마셨고, 두어 모금 마셨을 무렵, 누군가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잔을 내려놓고 문을 열자, 낯익은 얼굴이 서 있었는데, 몇 차례 마주친 적 있는 조지였다.남자는 흰색 캐릭터 티셔츠 차림에,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공손하게 인사했다.“백림이네 집에서 술 한잔하고 있는데요, 혹시 같이하실래요?”유정은 정중히 거절했다.“방금 퇴근해서요. 좀 피곤하네요. 두 분이 마시세요.”이에 조지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피곤할 땐 오히려 한잔이 더 좋아요. 내일 다시 돌아가거든요. 설 지나고 나서야 다시 올 텐데, 오늘은 작별 파티라 생각하고 와 주세요. 네?”유정은 더는 마땅한 거절 이유를 찾지 못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술 몇 병 챙겨 갈게요.”“기다릴게요!”조지는 특유의 환한 미소로 손을 흔들었다. 남자를 돌려보낸 뒤 유정은 옷을 갈아입고, 작은 손가방에 술 몇 병을 넣고는 건너편 백림의 집 앞에 섰다.이 상황이 어딘가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잠시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마음을 정리하고 노크하자, 문을 연 건 백림이었다.남자는 깊고 어두운 눈빛으로 유정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웃었다.“비밀번호 알려줄게. 다음엔 그냥 들어와.”“아니야. 다시 올 일 없을 테니까.”유정은 툭 던지듯 말하고 안으로 들어섰다.간결하고 세련된 인테리어, 백림의 성격답게 깔끔하면서도 감각적인 집이었다.조지는 반갑게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건넸다. 유정은 가져온 술을 거실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담담히 말했다.“잠깐만 있다가 갈게요. 두 분이 편하게 노세
여경은 고개를 숙인 채 얼굴을 감싸고 울었다.자신이 왜 이렇게까지 변해버렸는지, 왜 조변우는 그것조차 이해하지 못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이 오랜 세월 동안, 여경은 조변우가 주윤숙과 이혼하길 기다리며 살아왔다. 자신과 아들 시안에게 정식으로 이름을 붙여주길 바랐다.하지만 세월은 너무도 무심하게 흘렀고,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는 이미 지나가 버렸다. 결국 그녀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여경은 햇볕 아래 설 수도 없는 여자였다.또한 조변우는 늘 여경을 주윤숙 앞에 세우지 않았다. 혹여 마주치더라도, 먼저 자리를 피해야 하는 건 항상 그녀였다.여경은 대체 뭐란 말인가? 조선시대의 첩보다도 못한 존재 아닌가?끝이 보이지 않는 기다림 속에서, 여자로서 가장 아름다운 시절은 다 없어져 버렸다. 그런데도 조변우는 아직도 여경에게 여전히 포용과 너그러움을 바라는 건가?여경의 마음은 점점 더 미움으로 가득 찼다.“지금 주윤숙이 가진 모든 건 원래 내가 가져야 했던 거예요. 내가 얼마나 참았는지 알기나 해요? 난 무려 20년을 넘게 꾹 참고 살아왔어요.”“그리고 이제는 정말 더 이상 못 참겠어요! 그러니 더 이상 날 몰아붙이지 마요. 나도 내가 어떤 짓을 할지 모르겠으니까!”여경은 말을 마치자마자 전화를 끊었다.조변우가 바로 다시 전화했지만, 여경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끊어버렸다.20년을 참고 또 참으며 살아온 인생이었다. 그랬기에 이번만큼은, 단 한 번만큼은 이기적으로 굴고 싶었다.더는, 자신을 억지로 굽히며 조변우의 기분을 맞춰줄 필요는 없었다.조변우는 결국 전화를 포기하고 메시지를 보냈다.[너랑 시안이 한 일은 더 이상 따지지 않을거고, 예전처럼 대할 거야.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둬. 주윤숙에게 해를 끼치진 마.]여경은 그 메시지를 보고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울다가 웃는 그녀의 얼굴은 일그러졌고, 고통스러워 보였다.반평생을 사랑해온 그 사람은 결국 다른 여자를 마음에 품었고, 그 여자가 바로 주윤숙이었다.
조백림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식사가 끝난 뒤, 주윤숙은 소파에 앉았고 조백림은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눌러드렸다.“엄마, 다음에 유정이 또 오면 저한테 미리 한마디만 해주세요.”주윤숙의 목소리는 늘 그랬듯 부드러웠지만, 말투엔 분명한 불만이 서려 있었다.“너는 왜 온 거니? 네가 안 왔으면 유정이랑 나랑 저녁이라도 같이 먹었을 거 아냐?” “너만 오면 유정이는 꼭 가버려. 그러니까 앞으로 특별한 일 아니면 굳이 안 와도 돼.”너무나도 매몰차게 말하는 주윤숙에 백림은 말없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조금 억울한 듯 백림이 말했다.“엄마, 너무 티나게 편애하시는 거 아니에요? 엄마가 먼저 저 같은 아들이 있었으니까 며느리도 생기는 거잖아요.”그러나 주윤숙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했다.“너희 둘이 파혼하면 나는 유정을 그냥 양딸로 삼을 거야.”그 말에 백림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유정이 엄마 딸이면 가끔밖에 못 오잖아요. 며느리면 매일이라도 올 수 있는데요?”그러나 주윤숙은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내 딸이면 그래도 가끔이라도 보겠지. 며느리면, 언제 화가 나서 영영 안 볼 수도 있어.”왜인지 모르게 설득되는 말에 백림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표정이었다.“엄마, 진짜 저한텐 이제 아무 관심도 없어진 거예요?”그러자 주윤숙은 깊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이제 보니까 말이야, 네가 없으니까 유정이랑 내 사이가 훨씬 평온하고 좋아.”촌철살인에 백림은 또 한 번 말이 막혔고, 그는 더 서운한 목소리로 말했다.“제가 잘못했어요.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어요. 엄마가 예전부터 하신 말, 안정을 찾으라고 하신 그 말, 이제야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이에 주윤숙은 고개를 돌려 아들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갑자기 말했다.“오늘 유정이랑 얘기 나누느라 정신 팔렸더니, 경전 필사를 못 했네?”이에 백림이 바로 대답했다.“지금 하러 갈게요.”그렇게 말하고 남자는 재빨리 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