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시간이 좀 지난 다음에 집에 데려올게요.”임구택도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말했다.“어느 집 자제야?”“그냥 평범한 여자예요. 아버지도 좋아하실 거예요.”“그래.”임구택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더 묻지 않았다.“차 조심해.”“네.”임구택이 차를 몰고 별장을 빠져나가는 것을 지켜본 후에야 임구택 아버지는 다시 위층으로 올라갔다.침실에 들어서자 고용인은 이미 그의 잠옷과 족욕 물품들을 준비해 놓았다. 그는 소파에 앉아 족욕을 하면서 옆에 있는 신문을 집어 들었다.“방금 구택이랑 아래층에서 무슨 말을 했어요?”그때, 그의 아내가 안방에서 나오면서 물었다.임구택 아버지는 신문을 내려놓고 굳은 표정으로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구택이가 만나는 여자가 있다고 했어.”“어쩐지 몇 달 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더라니, 역시 여자친구가 생겼던 거였군요. 어느 집 아가씨래요?”그의 아내는 약간 놀라는 것 같기도 하고, 어느 정도 예상했던 것 같기도 했다. “그건 말하지 않았어. 이제 사람을 시켜서 조사해야지.”임구택 아버지가 말했다.임구택은 어릴 때부터 자기주장이 강해 다른 사람이 그의 일에 끼어드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그의 아버지도 항상 그의 결정을 존중해 왔기 때문에 그는 아직도 몰래 조사를 할지 말지 망설이고 있다.그때, 그의 아내가 그에게로 다가와 맞은편에 앉아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여보, 조사하지 않으면 안 돼요? 이건 구택 본인의 일이니까 알아서 하게 놔둬요. 당신이 이러면 오히려 반감을 품을지도 몰라요. 우리는 구택이를 믿어야 해요. 이미 한 번 소씨 가문과의 혼사에서 그를 다치게 했으니 이젠 본인이 자신의 감정을 잘 처리할 거라고 전 믿어요.”임구택 아버지는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아내는 항상 그를 존경했기 때문에 그에게 무슨 일이든 부탁하는 일이 드물었다. 하지만 이번엔 그녀의 눈빛이 꽤 간절해 보이는 것 같아 그는 저도 모르게 마음이 누그러져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구택이가 먼저 여자친
……이튿날 저녁, 백림이 불러서 많은 사람들이 케이슬에서 모였다.소희와 구택은 일찍 도착하여 백림의 여자친구 등과 함께 카드놀이를 했다.그리고 시원과 진수 등도 도착했고, 구택은 자신의 위치를 양보하고 소희에게 가르쳐 주는데 전념했다.시원은 그들과 놀지 않고 전화 한 통을 받은 후 소파에 앉아 문자에 답장을 했는데, 아마 회사의 일인 것 같다.황정아는 유민율이란 여자를 데리고 왔는데, 무척 아름답게 생겼고, 민성 사람인데 가문이 강성에 있는 지사를 인수하러 왔다고 한다.소희는 민율이 줄곧 시원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는데, 그녀의 시선은 한시도 시원을 떠나려 하지 않았고 사냥감을 노리는 그런 눈빛이었다.시원이 핸드폰을 내려놓고 탁자 위의 담뱃갑을 가지러 갈 때, 민율은 걸어가서 그의 옆에 앉아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난 유민율이라고 하는데, 정아의 친구예요. 처음 강성에 왔으니 앞으로 장 대표와 사업상의 합작이 있길 바라네요. 앞으로 잘 부탁할게요!"시원은 눈빛이 그녀의 손을 스치며 담담하게 웃었다."사업은 사업, 친구는 친구죠, 놀 때는 사업에 대해 이야기하지 말죠.""그래요!" 민율은 별다른 생각하지 않고 대범하게 손을 거두고 웃으며 말했다."사업은 그렇다쳐도, 나는 장 대표와 친구가 되고 싶은데, 정아 그들은 모두 당 대표를 시원 오빠라고 부르니까 나도 이렇게 부를 수 있나요?"시원은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고마워요 시원 오빠!" 민율은 생김새가 밝고 정교한 화장을 하고 있었고 웃을 때 빛이 났다.소희는 수시로 시원의 방향을 바라보았는데, 구택은 손바닥으로 그녀의 머리를 누르고 낮게 웃었다."남자친구가 여기 있는데 자꾸 어디를 보는 거예요?"소희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시원 오빠 요즘 여자친구 사귀었어요?""내가 알기로는,"구택은 그녀를 대신해서 카드를 하나 내고서야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말했다."없어요.»소희는 참지 못하고 또 뒤돌아보았다. 시원이 무슨 말을 하는지 민율은 몸을 살짝 기
이때 다른 사람들도 잇달아 시후와 악수를 하며 분위기는 점점 달아올랐다.백림은 호스티스를 몇 명 불렀고, 시후는 비록 이런 장소에 거의 오지 않았지만 호스티스들이 술을 권할 때,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여유롭게 대응했다. 특히 온몸에 뿜어내는 군인의 기운은 그 호스티스들을 두렵게 하면서도 매혹시켜 갖은 방법을 써서 그에게 접근하려 했다.중간에 소희가 화장실에 갔을 때, 나오자마자 복도에 기대어 서 있는 시후를 보았다.어두컴컴한 등불 아래 시후는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소희의 얼굴을 쳐다보았고, 차갑게 입을 열었다."소희 씨, 우리 어디서 본 적 있지 않은가?"소희는 어두움에서 천천히 걸어 나와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그래요? 난 기억이 안 나는데요.""소희 씨는 남스에 가 본 적이 있나?" 시후가 물었고 눈은 늑대처럼 소희를 쳐다보며 그녀의 표정 하나도 놓치려 하지 않았다.남스는 삼각주 동남쪽에 있는 바다와 인접한 작은 나라로, 지리적인 이유로 그곳에는 일년 내내 각 방면의 세력이 도사리고 있다.소희는 여전히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가 본 적 없어요.""그런데 난 거기서 당신을 본 것 같은데." 시후는 벽에 등을 기대고 상체를 살짝 앞으로 기울이며 공격 자세를 취했다.“자기야!”누군가가 그녀를 불렀다.소희가 고개를 들어 보니 구택이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구택은 온몸에 차가운 기운이 배어 있었고, 소희의 손을 잡고 그녀를 뒤로 감싸며 시후를 바라보았다."소개하는 것을 잊었군, 소희 씨는 내 여자친구거든."시후는 몸을 곧게 펴고 소희를 쳐다보며 씩 웃었다."나는 그냥 소희 씨가 낯이 익어서 어디서 본 것 같아서 물어보고 싶었어.""소희 씨는 아직 학생이고 줄곧 강성에 계속 있었는데." 구택은 목소리가 차갑고 다소 불쾌해했는데, 마치 시후가 소희를 보는 눈빛을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시후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것 같군. 실례했군!"말을 마치고 돌아섰다.구택은 차가운 눈빛으로 시후가
"류 부인, 이제 약속한 거예요, 앞으로 류 부인의 주얼리 디자인은 모두 우리 연이 디자인 작업실에 맡겨요!""그래요, 허 부인, 조심히 가요!"......소희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려 반투명한 나무칸 막이를 통해 진원이 손님을 배웅하고 있는 것을 보았고 그녀는 열정적으로 사람들과 작별인사를 했다.그녀는 갑자기 오늘이 10일, 소연의 작업실이 개업하는 날이라는 것이 생각났다.며칠 전 시연은 진원이 본가에서 소연이 곧 개인 작업실을 열 것이라고 자랑했다는 문자를 보냈는데, 전에 소연이 표절한 일을 완전히 잊은 것 같았다.오늘 정식으로 개업했으니, 소가네는 많은 귀한 손님을 초대했는데, 마침 케이슬에 왔던 것이다.이때 연회가 끝나고 진원은 소정인과 함께 손님을 배웅하고 있었다.어떤 사람은 이미 떠났고 또 어떤 사람은 거기에 서서 진원과 한담을 나누었다.이때 흰색 치마를 입은 한 부인이 칭찬했다."연이는 정말 대단하군요. 졸업하자마자 자신의 작업실을 열었다니!"진원은 겸손하고 싶었지만 또 자랑하고 싶었다."연이는 어릴 때부터 일을 열심히 해서, 그녀가 무엇을 하고 싶다면 우리도 다 지지해야죠!"다른 한 부인이 말했다."앞으로 연이가 자신의 사업을 가지게 되면, 소 부인과 소 대표도 이제 복을 누리겠네요.»진원은 웃음기가 더욱 깊어졌다."사업이 어떻게 되든 중요하지 않죠. 어차피 우리가 그녀를 뒷받침해 주니까. 연이가 즐겁기만 하면 돼요!""참, 연이는요?" 누군가가 물었다.진원은 자애로운 말투로 말했다."연이는 또 몇몇 학우를 초대했는데, 지금 학우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요!"몇 사람은 또 몇 마디 나누다 손님들은 모두 속속 떠났다.진원은 말을 해서 갈증이 생겼는지, 옆에 탕비실이 있는 것을 보고 와서 차를 따라 마셨다.그러나 들어오자마자 그녀는 소파에 앉아 휴대전화를 보고 있는 소희를 보았고, 갑자기 안색이 가라앉았더니 심지어 소희가 소란을 피우러 왔을까 봐 약간 경계하기도 했다.그녀는 무슨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시원의 기사가 이미 도착해서 그는 먼저 차에 올랐다.민율은 남자의 차가 떠나는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나름 실망했다.이때 황정아가 다가와 웃으며 말했다."민율아, 왜 시원 오빠랑 같이 안 갔어?""그걸 왜 나한테 물어!"민율은 한숨을 쉬며 다소 좌절감을 느꼈다."너 장시원이 나한테 쉽게 넘어올 수 있다고 하지 않았어? 내가 매력이 부족한가?"황정아는 미소를 지었다."네가 매력이 부족하면 우리는 여자라고 부를 자격이 없어!"그녀는 멈칫하다 생각에 잠긴 듯 말했다."시원 오빠는 최근에 확실히 좀 잠잠해졌지. 새 여자친구 사귀는 소식도 듣지 못했고. 그러나 네가 이렇게 예쁜 이상, 분명히 기회가 있을 거야."민율은 눈썹을 들며 부인하자 않았다."넌 어떻게 가니?""진수 씨 차로, 너는?"민율은 손에 든 벤츠 차 열쇠를 흔들었다."나 혼자 차 몰고 왔어. 넌 남자친구가 데려다 주는 이상, 나도 방해하지 않을게. 어쨌든 나를 데리고 장시원을 만나게 해줘서 고마워.""고맙긴!" 황정아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나 먼저 갈게, 시간 있으면 연락해.""좋아!"민율은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했다.그녀는 강성에서 자리를 잡고 싶었으니 강성의 지사에서 업적을 내려면 반드시 장 씨네 집안과 합작해야 했다. 이것은 그녀가 오늘 모임에 온 목적이기도 했다.원래 그녀는 자신의 매력으로 시원을 꼬시려고 했는데, 뜻밖에도 그는 전혀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그러나 그럴수록 그녀의 승부욕이 불타올랐고, 그녀는 자신의 이런 용모와 몸매로 시원을 꼬실 수 없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민율은 입가에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차를 향해 걸어갔다.시원은 차에 앉아 창밖에서 휙 지나가는 야경을 보고 가슴이 텅 빈 채, 마치 밤바람이 들어간 듯 메아리가 울려 퍼지면서 말할 수 없는 초조함을 자아냈다.이때 기사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대표님, 주문하신 물건이 도착했는데 이미 분부하신대로 보내라고 했습니다.""응," 시원은 대답을 한 다음
점심이 되자 소희는 양 조감독까지 불러 함께 서인의 샤브샤브 가게에 가서 샤브샤브를 먹었다. 마침 그녀는 설 후에 아직 서인을 보지 못했다.유림도 가게에 있었는데, 핑크 그레이 운동복을 입고 앞뒤로 바쁘게 뛰어다니며 앙증맞은 얼굴에 땀방울이 맺혀 청춘의 활력이 넘쳤다.이문 이 사람들은 유림과 친해져서 계속 "림이"라는 호칭으로 그녀를 불렀다.소희가 주방으로 갔을 때, 서인은 뒷문에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어린 강아지 한 마리가 달려와 그를 에워싸고 "멍멍"하고 소리쳤다.서인은 발자국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아보니 소희인 것을 보고 즉시 웃었다."출근했어?""응." 소희는 개를 무서워해서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서인 뒤에 서서 물었다."웬 개야?"서인은 말했다."영화성 쪽 촬영팀의 소품인 것 같아. 다 쓴 후 이곳에 버려졌고. 임유림이 항상 얘한테 먹을 것을 줬는데, 그 후부터 자주 와서 음식을 달라고 하고 있어."그는 소희가 개를 무서워한다는 것을 알고 강아지에게 뼈다귀를 던져 멀리 가게 했다.강아지를 쫓아내자 서인은 상의 주머니에서 카드 한 장을 꺼내 소희에게 주었다."이것은 샤브샤브 가게가 요 몇 달 번 돈이야. 이문 그들에게 줄 돈은 내가 다 줬고, 나머지는 모두 너에게 줄게.""왜 줘, 싫어!" 소희는 거절했다."난 네가 매 달 백양 그들의 가족에게 돈을 보내고 있다는 거 다 알아. 이것은 우리 두 사람의 일이어야 하니까 너 혼자 짊어지게 할 수는 없어. 빨리 받아!"서인은 카드를 소희이 손에 넣어주었다.소희는 다시 그에게 돌려주며 담담하게 말했다."내가 한 일은 바로 우리 두 사람의 몫이야. 나에게 돈을 주려고 하는 것은 나와 앞으로 만나지 말자는 거야?"서인은 눈썹을 찡그렸다."너는 내가 이런 뜻이 아니라는 거 잘 알잖아!"그는 단지 그녀가 돈이 부족할까 봐 걱정했을 뿐, 설령 그녀가 구택과 함께 있다 하더라도, 그는 그녀가 돈 때문에 임가에게 기대게 하고 싶지 않았다.소희는 옅게 웃었다."내
소희는 앞으로 돌아와 유림이 손님에게 주문을 받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것은 가게의 단골손님으로서 유림과 농담을 하고 있었다.밥을 먹고 소희는 이현과 양 조감독더러 먼저 가라고 한 다음 스스로 남아서 잠시 도와주었다.가게에 손님이 적을 때 소희는 기회를 찾아 유림에게 물었다."너 가게에서 언제까지 일할 예정이니?»유림은 작은 얼굴로 앙증맞게 웃으며 말했다."계속 할건데!""너 가족들은 네가 여기서 웨이터로 일하는 거 알고 있어?"유림은 고개를 저었다."몰라!""만약 그들이 알았다면?"유림은 신경 쓰지 않았다."아무도 나 상관 안 하는데!"소희가 말했다."그건 그들이 네가 여기서 일하는 거 몰라서 그래."유림은 얼굴의 웃음을 거두었다."소희야, 너 그게 무슨 뜻이야?""내 말은 너 여기에 있지 말고 집에 가서 네 부모님의 안배에 따르거나 네가 좋아하는 일을 하라고."유림은 다급하게 말했다."나 여기서 일하는 게 좋단 말이야."그녀는 잠시 멈추다 목소리를 늦추었다."솔직히 말하지만, 우리 부모님은 확실히 나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세워 주셨지만, 나는 그들의 안배에 따라 살고 싶지 않아. 나 자신의 인생은 당연히 내가 스스로 결정해야 하지 않겠어?"“이게 네가 원하는 인생이라고?”유림은 입을 삐죽거리며 말을 하지 않았다."가게에 오지 마. 너희 부모님의 안배에 따라 일을 하지 않더라도 네가 해야 할 일을 해야지."유림은 눈알을 굴리더니 갑자기 물었다."사장님이 뭐라고 했니? 날 쫓아내려는 거야?""아니, 내가 그에게 말한 거야. 넌 더 이상 여기에 있으면 안 된다고." 유림은 잠시 입술을 깨물고 침묵했다."잘 생각해볼게!""응!" 소희는 말을 마친 다음 손목 시계를 한 번 보았고, 시간이 다 된 거 같아 일어나서 말했다."나 먼저 촬영팀으로 돌아갈게. 일이 있으면 나한테 전화해.""잘가!" 유림은 고운 눈을 깜박거리며 그녀와 작별 인사를 했다.소희는 간 다음 유림은 스스로 의자에 앉아 생각할수록 이상하고
"사장님,"서인은 변기 앞에 서서 그녀를 등지고 있었는데, 옷을 걷고 있어 햇빛에 탄 건강한 살빛의 튼튼한 허리를 드러냈다.유림은 얼굴을 붉히더니 즉시 몸을 돌렸고 화가 나면서도 또 뻘쭘했다."왜 문을 잠그지 않는 거예요?"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2층에는 손님이 올라오지 않았고, 평소에 그와 이문 몇 사람들만 화장실을 사용했으니, 여자도 아닌 이상 무슨 문을 잠근단 말인가?유림은 난감한 표정으로 어찌할 바를 몰랐다."밖에서 기다릴게요."말을 마친 후 그녀는 잽싸게 뛰쳐나갔고 겸사겸사 문을 닫았다.서인은 문 닫는 소리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다 당황하지 않고 바지를 올리고 손을 깨끗이 씻은 뒤 문을 열고 나갔다.바깥 거실에는 소파 하나밖에 놓여 있지 않았는데, 소파에는 포커와 술병이 있었다. 남자들이 사는 방에는 발 디딜 틈도 없었다.유림은 처음으로 올라왔는데 또 서인이 볼일 보는 이런 난감한 일에 부딪쳐 앉아있지도 서 있지도 못했다.서인은 태연하게 소파에 털썩 앉아 담뱃갑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고서야 물었다."무슨 일이야?"유림은 그를 보면서 될수록 방금 전의 난감함을 무시하고 화가 난 말투로 말했다."지금 나 쫓아내려는 거예요?""응!" 서인은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이번 달 월급은 내가 오현빈더러 한 달치 돈으로 결산하라고 할 테니까 내일 부터 올 필요 없어!"유림은 입술을 깨물고 남자를 똑바로 쳐다보았다."내가 뭘 잘못했는데요? 왜 나를 해고하는 거냐고요?""그런 거 아니야. 넌 단지 여기에 어울리지 않아서 그래." 서인은 담뱃재를 떨고 눈살을 찌푸렸다."아까처럼 말이야. 넌 여자로서 우리 한 무리의 남자들 사이에 끼면 너무 많은 불편함을 느끼잖아."그는 전부터 말하고 싶었지만, 그녀가 가게에서 아주 즐겁게 일하는 것을 보고 입을 열지 않고 줄곧 설후로 미루었다."방금은 사고였어요." 유림은 그의 맞은편에 앉아 고집을 부리며 말했다."난 월급을 원하지 않고 가고 싶지도 않아요!"서인은 눈살을 찌푸리며
“역시 이런 식으로 문제가 될 줄 알았어요.”은서는 싸늘한 눈빛으로 말하자, 손기수가 물었다.[이제 어떻게 하죠?]구은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장말숙한테 손자가 있잖아요. 그 애를 데려가요. 안전한 곳에 숨겨두고 지켜여.”이에 손기수는 비죽 웃으며 말했다.[그건 납치 아닌가요?]“이건 우리 엄마 뜻이에요.”은서는 그 말을 강조하듯 단호하게 말했다.“일만 제대로 끝내면, 보수는 두 배로 줄 거예요.”그제야 손기수는 만족스레 웃으며 대답했다.[좋아요. 저한테 맡기세요.]은서는 다시 신신당부했다. “숨겨두기만 해야 해요. 절대 다치게 하면 안 돼요.”이에 손기수는 급히 말했다.[우리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하겠어요!]은서는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엄마 말씀만 잘 따르면,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거예요.”모든 게 은정을 내쫓는 날까지만 버티면 그만이었다. 장말숙의 아들이 위협되지 않게 만들어야 했고, 지금 중요한 건 은정을 최대한 빨리 강제로 떠나게 만드는 일이었다.두 시간 후.오현빈이 급히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형님, 큰일이에요. 장말숙 아주머니 손자가 납치당했어요!”은정의 눈빛이 차갑게 되었다. 그와 유진의 계획은 장말숙의 아들이 철없는 무뢰한이라는 걸 이용해, 서선영 쪽 사람들과 충돌이 일어나게 만들고 그 사이에서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었다.그런데 서선영은 한 수 더 앞질렀다. 직접 손자를 납치해 버린 것이다. 은정은 느긋한 듯 말했지만, 말투엔 서늘한 살기가 묻어났다.“왜 못 막았어?”현빈이 대답했다.[도착했을 땐 이미 데려가고 난 뒤였어요. 아이는 집에 혼자 있었고요.]장말숙은 요즘 일을 그만두고 손자를 돌보고 있었다. 자기 아들은 놀기 좋아하고 도박을 일삼으며 최근 큰 빚까지 졌고, 며느리는 친정으로 들어가 버렸다.장말숙이 서선영의 돈을 받은 것도 빚을 갚고 며느리를 다시 불러들이기 위한 것이었다.그날 점심을 먹고 잠시 슈퍼에 다녀온 사이, 손자가 납치된 것이다.은정은 알고 있
“아주머니는 분명 그날 일에 대해 알고 있어요. 그 사람한테 직접 확인하러 갈 거예요!”임유진은 말을 끝내자마자 그대로 뛰쳐나갔다.“유진아!”구은서는 몇 걸음 뒤쫓았지만, 유진은 이미 계단 아래로 사라지고 있었다. 은서는 굳게 이를 악물며 눈살을 찌푸렸다.서선영이 집에 없다는 걸 알자, 그녀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장말숙 아주머니 잘 지켜봐요. 유진이 그날 일 알아보려고, 지금 그 사람 찾으러 갔으니까.”그러나 서선영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걔가 뭘 안다고 찾아?]은서는 차분히 말했다.“유진은 임씨 집안 사람이야. 찾으려면 못 찾을 사람이 없죠.”이에 서선영의 말투도 조금 무거워졌다.[알았어. 내가 금방 사람 붙여서 장말숙 감시하라고 할게.]은서는 이어서 냉랭하게 따져 물었다.“절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는다면서요? 근데 걔는 어떻게 안 거예요?”유진이 알았다는 건, 임씨 가족들까지도 이미 감지했다는 뜻이었다. 이에 은서는 불안감에 입술을 꾹 눌렀다.서선영은 얼버무리며 말했다.[아마 도우미 중 누가 말실수했을 거야. 다시 철저히 단속해 둘게. 걱정하지 마. 소문 좀 난다 해도 너한테까지 영향은 안 가. 넌 그냥 조용히 대본 연습이나 해.][이번 영화, 내가 네 외삼촌 꼬드겨서 겨우 투자받은 거 알지? 이번 기회 잘 잡아야 해. 딴 건 신경 쓰지 마. 연기만 잘하면 돼.]은서는 그 말에 더욱 날카로워졌다. 이번 영화는 유명 감독의 대작이었고, 은서에게는 이미지 회복의 유일한 기회였다. 그렇기에 서선영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나 곧 촬영 들어가요. 그러니까 이번 일 절대 망치지 마요.”[알았어!]서선영은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유진은 급히 차로 돌아와 깊게 숨을 들이쉰 후, 곧장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서선영 쪽에서 곧 움직일 거예요.”[알고 있어. 이미 준비해 뒀어.]은정의 목소리는 침착했고, 유진은 안심하며 숨을 내쉬었다.이윽고,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고생 많았어.]이에 유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
“아파요!”유진은 짧은 비명을 내뱉으며 순식간에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팔을 뻗어 구은정의 목에 매달리듯 안으며, 자기 얼굴을 숨기려 했다.이에 은정은 그녀의 어깨를 쓸어내리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낮게 웃었다.“왜 예전 같지 않아? 예전엔 몰래라도 키스하려고 했으면서, 이젠 실컷 하라고 해도 도망치기 바쁘네.”유진은 은정을 꼭 안으며 눈가가 붉게 물들었지만 속은 터질 듯 행복했다. 이제는 몰래 키스할 필요가 없다. 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할 수 있었다.은정은 유진의 발그레한 귀에 입을 맞추며 낮게 속삭였다.“전에 난 늘 걱정했어. 네가 그냥 어린 마음에 나한테 끌리는 거라고. 그저 신기하고 새로워서, 가질 수 없으니까 더 마음이 가는 거라고.”“우리가 진짜로 사귀게 되면 금세 질릴 거라고. 나는 사실 정말 재미없는 사람이야. 총 쏘고 싸우는 것 빼곤 할 줄 아는 게 없어.”“요즘 애들이 좋아하는 것도 몰라. 마음도 더 이상 젊지 않아.”“그래서 넌 언젠가 내가 생각보다 별거 아니라는 걸 깨닫고, 그 마음이 식을까 봐 두려웠어.”유진은 목이 메어, 콧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내가 기억 잃었을 때, 왜 다시 나한테 다가왔어요?”은정은 예전엔 그렇게 차갑게 거절했던 사람인데, 교통사고 한 번 났다고 갑자기 사랑하게 된 걸까? 혹시 죄책감 때문은 아니었을까?그런 생각이 유진을 계속 불안하게 했다. 잠시 침묵하던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아마 너 없는 세상이, 정말로 견딜 수 없을 만큼 어둡고 차가웠기 때문일 거야.”그 말에 유진의 가슴은 요동쳤다. 그녀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마음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려는 듯, 어둠을 걷어내고 자신의 빛으로 은정의 세상을 덮어주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유진은 다시 한번, 은정에게 입을 맞췄는데, 이번엔 더욱 깊고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은정은 곧 유진을 세게 안았고, 불같이 뜨거운 열기가 유진을 감쌌다. 죽음 같은 어둠 속에서 되살아난 사람처럼, 은정의 키스는
“그 사람들이 설마...”유진은 커다란 눈을 뜨고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구은정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네가 생각한 그대로야.”유진은 믿기지 않는 듯 놀람과 동시에 깊은 자책의 기색을 띄웠다.“결국 내가 이렇게 만든 거잖아요.”“자꾸 그런 식으로 네 탓 하지 마.”은정은 그녀의 뺨을 다정하게 쓸어내리며 말했다.“너는 둘 사이의 더러운 사정도 몰랐잖아.”유진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서선영은 그래도 이해가 가. 근데 구은서는 왜 그렇게까지 자기 엄마한테 협조한 거예요?”“자기 명예가 달린 문제인데, 게다가 지금은 연예인이잖아요. 설령 피해자라 해도, 그런 얘기 퍼지는 게 좋을 리 없잖아요.”은정은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대답했다.“십몇 년 전 그 일 땐, 은서는 진짜로 몰랐던 것 같아. 내가 샤워 끝내고 나왔을 땐 자고 있었고, 서선영이 소리 지르고 난리 쳐도 안 일어났거든.”“그땐 그냥 서선영한테 이용당한 거지. 근데 이번엔 서선영이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나도 몰라.”유진은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서선영은 정말 너무 악랄했다. 자기 딸까지도 그런 식으로 이용한다면, 못 할 짓이 뭐가 있을까?더구나 서선영은 알고 있었다. 이런 식의 루머가 은정에게 가장 치명적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게 바로 구은태에게도 가장 아픈 약점이라는 것을. 그래서 서선영은 또다시 그 수를 썼다.유진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중얼거렸다.“그때 전화받은 아주머니, 그 사람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찾을 수는 있어. 하지만 서선영한테서 돈을 받았고, 아마 협박도 받았을 거야.솔직히 말해줄 가능성은 작아.”은정은 냉정하게 말하자, 유진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그래도 찾아봐야죠. 당장 데리고 가서 집에 가서 진실을 말하게 해야 해요!”은정은 유진의 손목을 붙잡았는데,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웠다.“서두르지 마.”“어떻게 안 서둘러요! 지금 이미 밖에선 온갖 소문이 돌고 있다고요!”유진이 답답해하며 소리치자,
“그날 밤 전화했을 때 말이야.”유진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그게 바로 그날이었어요?”“그래.”은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그는 서선영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 몰랐다. 혹시 다시는 유진을 볼 수 없게 될까 두려워, 마지막으로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사실은 유진에게 자기 집으로 와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그 말이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았다.유진은 자책하듯 말했다.“나도 그때 뭔가 이상하단 걸 느꼈어. 근데 안 찾아갔어요.”은정은 유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그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고, 유진은 단지 모호한 한 통의 전화로 구씨 저택까지 달려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유진의 마음속은 여전히 무겁고 미안했다.“내가 갔더라면, 그 여자의 계략이 통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요.”“유진아, 우리 이제 과거에 대해 그만 후회하자. 응?”은정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말하자,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중요한 건, 서선영 모녀의 거짓말을 어떻게 밝혀낼지였다.“그 여자가 떠나라고 하니까, 진짜 떠나려던 거예요? 도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됐어?”유진이 화가 난 듯 말하자, 은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차가운 듯 부드러운 눈빛으로 대답했다.“내 명예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어. 네가 그 일 알고 나서 날 더 미워할까 봐, 그게 무서웠지.”호텔에서 유진이 여씨 집안 가족 모임에 참석한 걸 봤을 때, 그는 마음이 무너졌다.자신은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앞으로도 더러운 과거 때문에 손가락질받을 인생인데, 그런 자신의 곁에 유진을 두는 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유진은 따뜻하면서도 가슴 아픈 눈빛으로 은정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유진은 두 손으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안개 낀 듯한 눈동자가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은정의 어두운 그림자를 밀어내고 그 마음속까지 빛으로 채우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이번에는 유진이 먼저 입을 맞췄는데, 그 키스는 애틋하고 따스했
“정말 못됐어요. 그런데도 난, 이렇게 좋아하니까.”유진은 코끝을 훌쩍이며 속삭이듯 말하자, 은정의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고, 유진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유진은 흐느낌 속에 물었다.“그래도 또 떠날 거예요?”“안 떠나.”은정은 마치 유진의 몸이 자기의 일부라도 된 것처럼 꼭 끌어안았다.유진은 입술을 꾹 다물었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도 입가엔 참을 수 없이 번지는 미소가 피어올랐다.멀찍이서 둘을 바라보던 소희는 마침내 안도한 듯 미소를 지었고, 잠시 바라보다 조용히 돌아섰다.은정은 티켓 환불을 마치고, 유진의 손을 꼭 잡고 공항 로비를 빠져나왔다.그때 소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유진이는 맡길게. 잘 달래줘. 난 먼저 갈게.]은정은 묵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소희, 정말 고마워.”[혹시 집안 문제, 도와줄 일 있으면 말해.]은정은 원래의 냉정한 눈빛을 되찾으며, 대답했다.“아니, 내 일은 내가 해결할게.”[그래.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 임씨 집안 쪽 설득도 내가 도와줄 수 있어.]은정은 낮게 웃었다.“혼자 힘으로 안 되면 그때 부탁할게.”전화를 끊은 뒤, 유진이 옆에서 물었다.“소희, 갔어요?”“응. 우리 집에 가자.”은정은 다시 유진의 손을 꼭 잡았다.유진은 그날 회사에 가지 않고, 전화를 걸어 휴가를 냈다. 이경 아파트로 돌아오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선 은정은 유진을 번쩍 안아 들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유진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고,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세게 은정을 끌어안고 입맞춤에 응했다.유진의 반응은 은정을 더욱 자극했고, 입술은 불꽃처럼 뜨거웠다. 은정은 강렬함과 부드러움을 오가며 끊임없이 유진의 반응을 확인했고,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었을 때에야 숨을 고르며 입술을 떼었다.유진은 숨을 헐떡이며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언제 기억난 거야?”은정은 유진의 입술 위에서 낮게 물었다.유진의 커다란 눈동자엔 얇은 안개 같은 물기가 맺혀 있었고, 눈가엔 눈물 자국이 남아 붉
“나쁜 놈!”유진은 이를 악물고 욕설을 내뱉으며, 손등으로 눈물을 거칠게 닦고는 그대로 뛰쳐나갔다.허둥지둥 엘리베이터를 내려가던 중, 예상치 못하게 1층 현관 앞에서 막 차에서 내리는 소희와 마주쳤다.유진은 달려가 소희를 끌어안으며, 눈물로 목소리가 떨렸다.“소희야. 그 사람, 갔어.”소희는 차가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손을 들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침착하게 말했다.“지금쯤 공항 도착했을 거야. 얼른 차 타. 우리가 가서 막자.”유진은 울먹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응.”차에 올라탄 후, 소희는 아침 출근길 교통체증을 피해 가능한 한 빠른 길로 달렸다. 조수석에 앉은 유진은 여전히 망연자실한 얼굴이었다.소희는 유진을 스치듯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두려워하지 마. 이번엔, 걔가 지구 반대편까지 도망친다 해도 내가 꼭 데려올게.”유진은 이를 악물며 눈물 맺힌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응.”공항에 도착하자, 소희는 시계를 확인했다.“지금쯤이면 막 보안 검색대 들어갔을 거야. 넌 안으로 들어가. 난 밖에서 기다릴게.”유진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들이 북적이는 공항 안을 정신없이 뛰어다녔다.탑승 게이트 앞, 마침내 수많은 인파 속에서 그토록 익숙하고, 아프도록 그리운 구은정의 뒷모습을 발견했다.너무 긴장한 탓일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은정이 거의 들어가려던 순간, 유진은 겨우 목을 눌러 뜨거운 한마디를 토해냈다.“서인!”이에 은정의 발걸음이 멈췄고, 순간 고개를 홱 돌렸다. 사람들 사이 너머로, 유진이 서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지나가는 사람들, 소음, 움직임. 모든 게 멀어지고, 과거와 현재가 한꺼번에 겹쳤다.처음 만났던 순간. 잃어버린 가방을 찾아 건네주던 은정의 등.“정말 대단해.”감탄하던 유진의 눈빛. 차가웠던 은정의 반응. 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은정이 궁금했고, 따랐고, 그렇게 샤브샤브집에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유진은
방연하는 어이없다는 듯 여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지금 진심이에요? 머리 괜찮아?”여진구는 연하를 째려보았다. 연하는 주변의 예쁘게 꾸며진 꽃길과 풍선을 둘러보며 부러움 섞인 말투로 말했다.“이거 진짜 예쁘네요. 나도 나중에 이런 대접 한번 받아볼 수 있을까요?”“너한테 고백할 남자가 이런 것도 못 하면, 내가 대신 해줄게.”진구는 시원하게 말하자, 연하는 헛웃음을 지으며 받아쳤다.“미리 감사 인사드릴게요, 여진구 사장님.”그 시각, 유진은 집에 돌아왔지만 마음은 여전히 뒤숭숭했고, 계속 뭔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그날 밤은 뒤척이기만 하다가, 새벽이 되자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아침 7시가 되자, 임유민이 방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문에 기대선 그는 느슨하게 말했다.“누나, 이번 주 금요일 우리 학교 축구 경기 있어. 내가 수비수로 나가는데, 학교에서 가족 참관 받는대. 올래?”유진은 고개를 들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좋지. 꼭 응원하러 갈게.”유민은 그녀가 짐을 싸는 걸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근데 누나, 짐은 왜 싸?”유진은 노트북을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이젠 다시 이경 아파트로 돌아가려고.”유민은 조금 놀랐다.“안 돌아가겠다고 하지 않았어?”유진은 눈을 내리깔며 담담하게 대답했다.“가고 싶어졌어.”유민은 문에 기댄 채 웃으며 중얼거렸다.“역시 내 예상이 맞았네. 근데 이번에는 그렇게 바보처럼 굴지 마.”유진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뭐라고?”이에 유민은 씩 웃었다.“엄마는 아침 일찍 나갔고, 할머니한테는 꼭 인사하고 가. 안 그러면 또 가출했다고 난리 나실걸.”유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집에 없을 땐, 네가 좀 더 착하게 굴어. 할머니 기분 잘 맞춰 드리고.”유민은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말했다.“그건 숙모한테나 하라고.”유진은 참지 못하고 푸흐 웃음을 터뜨렸다. 짐을 정리한 후, 운전기사에게 짐을 차에 실어달라 부탁하고 자신은 할머니에게 인사드리
유진은 은정이 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직접 보고 나서야 다시 호텔 위층으로 돌아갔다. 혹시나 여씨 집안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할까 봐 대비해야 했다.라운지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흩어졌고, 유진이 그 안으로 들어섰을 때, 여씨 집안의 두 명의 며느리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셋째네는 평소에 그렇게 거칠게 굴더니, 오늘 자기 아들이 그렇게 당했는데도 조용하네?”다른 여성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들었는데 인후가 아가씨를 모욕해서 그렇게 된 거라더라고요. 이 일, 임씨 쪽이 알게 되면 여인후 가만두지 않을걸요?”“그래서였구나! 근데 때린 사람이 누군데?”“그건 잘 모르겠어요.”유진은 고개를 돌려 벽에 기대었다. 그 순간, 조금 전 은정의 어두운 눈빛과 먹먹한 표정이 머릿속을 스쳤고, 가슴이 다시 시리게 아파왔다.그때 여진구가 메시지를 보내오자, 유진은 핸드백을 챙겨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유진아!”호텔 정원에서 진구가 유진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다가왔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꺼내려 했지만 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선배!”이에 진구는 웃으며 말했다.“먼저 말해봐.”유진은 진지한 표정으로 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전 늘 당신을 선배로, 좋은 친구로 생각했어요. 그 이상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요.”“오늘 가족 모임에 참석하면서 다들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부디 오해가 더 커지지 않도록, 할아버지랑 어른들께는 확실히 말씀드려 주세요.”진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직 아무 말도 꺼내지도 않았는데, 유진은 이미 자신의 마음을 간파하고,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선을 그어버린 것이다.유진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 표정엔 피곤함이 묻어났다.“조금 피곤해서 먼저 갈게요. 할아버지께는 대신 인사 부탁드려요.”유진은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몇 걸음만 걸었을까? 그 순간, 뒤쪽 정원에 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형형색색의 하트 모양 꽃장식이 환하게 빛났고, 수많은 풍선과 조명이 하늘로 떠올랐다. 몽환적이고 낭만적인 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