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시각, 장시원은 차를 몰고 임구택의 집으로 갔다.위층으로 올라가 문을 여니 임유민이 즉시 마중을 나왔다. 그러다 눈빛이 기대에서 놀라움으로 변했다."시원 삼촌!""소희 씨가 오라고 해서 온 거야. 네 둘째 삼촌은 어때?"장시원이 위로하듯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임유민이 의기소침해져서 대답했다."둘째 삼촌이 여전히 약을 먹으려 하지 않아요."장 의사도 다가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임 대표님이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 모습은 저도 처음 봅니다.""괜찮아요, 내가 할게요."장시원이 다정하게 웃으며 거실을 지나 침실로 걸어갔다.침실에는 침대 옆 헤드라이트만 켜져 있었다. 넓은 어깨와 등을 드러낸 채 침대에 엎드려 있던 임구택이 발자국 소리에 순간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다시 눈살을 찌푸린 채 긴 속눈썹을 소리 없이 늘어뜨렸다.이상할 정도로 붉어져 있는 얼굴을 봐서는 열이 심하게 나고 있는 게 분명했다. 평소에 예리하고 칠흑같이 어둡던 눈동자에마저 피곤한 빛이 띠고 있었다."나를 보니까 실망했지?"장시원이 웃으며 물었다.임구택은 말하기 귀찮을 정도로 너무 아파 아예 소리를 내지 않았다."비록 소희 씨가 직접 오지는 않았지만 나에게 전화를 한 걸 보면 여전히 너를 관심하고 있는게 틀림없어.""정말 관심하고 있었으면 직접 왔겠지."쉬어있는 임구택의 목소리에서는 아무런 정서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이에 장시원이 한숨을 쉬었다."일단 약부터 먹어.""안 먹어."임구택이 시선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너 지금 누구한테 성질을 부리는 거야?"장시원이 듣더니 키득거리며 침대 앞으로 다가가 약을 임구택에게 건네주었다."네가 주동적으로 소희 씨를 품속에 감싼 거잖아. 그런데 왜 이제 와서 약을 먹지 않겠다는 건데?""누구와도 상관없어. 그냥 먹고 싶지 않아."임구택이 눈을 감고 코 막힌 소리로 대답했다."유민이도 너보다는 철이 들었겠다. 빨리 약 먹어. 그렇지 않으면 네 입에 강제로 주입할 거야.""안 먹어, 안 죽어."임구택이 고
장시원은 또 한 시간을 기다렸다가 임구택이 곤히 잠든 후 다시 체온을 재주었다. 그러다 열이 내려간 걸 확인하고 나서야 일어나 방을 떠났다.줄곧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임유민과 장 의사는 임구택이 이미 열이 내렸다는 말을 듣고 드디어 한숨을 내쉬었다.시간이 많이 늦은 탓에 장시원은 운전 기사더러 장 의사를 집까지 모셔다 드리라고 분부했다.그리고 장시원은 임유민과 함께 밖으로 걸어가고 있었다."왜 너와 네 둘째 삼촌 두 사람만 집에 있는 거야?""할아버지는 경성에 회의하러 가셔야 된다고 할머니를 데리고 함께 가셨고요, 저희 부모님도 출장을 가셨어요. 그리고 누나는 학교에 행사가 있어서 학교에서 지내고 있고요.""네 둘째 삼촌은 괜찮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네, 시원 삼촌 고마워요. 삼촌도 어서 돌아가서 쉬어요.""일이 있으면 나한테 전화해.""네!"장시원을 보내고 임유민은 또 3층으로 올라가 임구택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리고 그가 편안하게 자고 있는 모습을 확인하고서야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방으로 돌아온 임유민은 한참 고민을 하다가 결국 소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소희 쌤, 둘째 삼촌이 이미 약도 먹고 열도 내렸어.]이미 새벽 2시가 되었으니 소희가 내일 아침에야 그의 메시지를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몇 분 후 소희가 바로 답장이 왔다.[그래, 너도 일찍 쉬어.][응, 잘 자.][잘 자.]임유민도 확실히 많이 졸린 상태라 바로 침대에 쓰러져 잠들었다.다음 날 아침임유민은 주방에서 만든 아침밥을 들고 3층으로 왔다.임구택은 금방 깨어나 침대머리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임유민이 보더니 바로 눈살을 찌푸렸다."병이 난 사람이 담배를 피우면 어떡해요?"예전에 소희와 있을 때 임구택은 거의 담배를 피우지 않았는데, 근 2년 동안에 담배를 피우는 차수가 점점 많아졌다.임구택이 담배를 끄고 덤덤한 표정으로 물었다."왜 아직도 학교로 가지 않은 거야?""곧 갈 거예요!"임유민이 죽과 야채전을 그의 앞에
그렇게 3일이 지난 후에야 이현은 다시 제작팀으로 돌아왔고, 파파라치도 마침 임씨 그룹 빌딩 밖에서 회사로 돌아와 출근하는 임구택의 모습을 포착했다.이렇게 두 사람이 요 며칠간 줄곧 함께 있었다는 사실은 더욱 실증을 얻게 되었다.소희가 분장실에 옷을 정리하고 있는데 커튼을 사이에 두고 저쪽에서 이현과 여민의 이야기 소리가 들려왔다."이현 씨, 며칠 동안 못 봤더니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잖아요."여민이 비위를 맞추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이에 이현이 단아하고 다정하게 웃었다."일이 좀 있어서 며칠을 지체하는 바람에 촬영 진도에 영향을 끼치게 되었네요, 정말 미안해요.""아무도 이현 씨를 탓하지 않았어요!"여민이 애교를 부리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나한테까지 숨길 필요 없어요. 어서 사실대로 말해봐요. 요 며칠 임 대표님과 함께 있었죠?"이현이 옅은 파란색 커튼을 한 번 힐끗 보고는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도 어쩔 수 없었어요. 내가 없다고 약도 먹으려 하지 않는다니까요. 마치 어린애 같아요."여민이 듣더니 입을 가리고 웃었다."임 대표님이 분명 일부러 핑계를 대가면서 이현 씨와 함께 있고 싶어 하는 거잖아요. 그것도 모르겠어요?""알죠!"이현이 눈빛에 쑥스러움을 머금고 간드러진 목소리로 대답했다."그래서 그와 함께 있을 수밖에 없었어요.""임 대표님이 이현 씨를 이렇게 사랑하는데, 곧 있으면 이현 씨 임씨 사모님이 되는 거 아니에요?"그런데 이현이 의외로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나 아직 그와 결혼을 할지 말지 생각하지 못했단 말이에요. 나에게 있어서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작품에 전념하는 거거든요!"여민이 듣더니 놀라서 물었다."그럼 임 대표님이 이미 이현 씨에게 청혼했다는 거예요?""아니에요, 함부로 말하지 마요!"그러나 무언가를 덮으려는 이현의 말투는 여민의 물음을 더욱 인정해 주는 것 같았다.여민이 그녀에게 눈짓을 하며 말했다."알았어요. 말하지 않을게요. 이제 임 대표님이 성대한 프러포즈를 준비하여 국내를 혼
이 감독은 소희와 이현이 서로에게 안 좋은 감정이라도 생길까 봐 한쪽으로 이현을 달래면서 또 한쪽으로는 조감독을 찾아 소희를 많이 타이르라고 분부했다. 소희가 개인적인 원한을 일에까지 끌어들이지 말고 이현과 잘 협조하라고.30대 미혼인 류 조감독은 전에도 소희를 몇 번 찾은 적이 있었는데 여러 번의 대화를 통해 의외로 소희에게 다른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이날 조감독은 소희를 찾아 이야기를 나누며 업무에 관해 토론하고 있었다. 그러다 사방을 둘러보고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 갑자기 소희에게 다가가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며 물었다."소희 씨, 이렇게 예쁘게 생겼는데 배우로 데뷔할 생각은 없어?"소희가 담담한 표정으로 거절했다."네."그러자 조감독이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소희 씨의 얼굴로 배우가 되지 않으면 정말 아까운데. 진짜야, 연예계 같은 곳에는 딱 소희 씨처럼 순수하고 천연적인 미녀가 필요해."소희는 여전히 관심이 없어 보였다."하지만 저 전문적으로 연기를 배워본 적도 없고 연기에 재능도 없어요."조감독이 곧장 말했다."배워본 적이 없어도 상관없어. 천부적인 재능이 없어도 후천적으로 양성할 수 있는 거고. 소희 씨 모르지, 엄청 많은 배우들이 내가 직접 키워낸 거야. 그러니 연기하고 싶다면 얼마든지 나에게 말해!"그러다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고 말을 이어갔다."그러지 말고 오늘 밤에 바로 곳을 잡고 이야기할까? 내가 연극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려줄게. 소희 씨가 어떤 배역에 적합한지도 알려주고. 난 말한 대로 하는 사람이야, 바로 소희 씨에게 안배해 줄 수 있어."소희는 얼굴에 탐욕을 전혀 숨기지 않은 조감독을 힐끗 쳐다보고는 차갑게 입을 열었다."제작진 스태프를 희롱했다가 맞아 죽는 씬도 안배해 줄 수 있어요?"조감독이 듣더니 안색이 순간 변했다.소희는 그러는 그를 보지도 않고 돌아섰다.소희의 가녀린 뒷모습을 보며 조감독은 이를 갈았다.‘고집이 이렇게 세다니! 정말 사회를 금방 나왔다고 겁도 없이 달려드네.’그는 마
여민이 선글라스를 한 번 올리고는 입을 삐죽거리며 웃는 듯 마는 듯 한 표정으로 말했다."이 드레스는 딱 봐도 인위적으로 파괴된 거잖아요. 그리고 이 드레스 위에 박힌 다이아몬드들이 전부 진품이라 엄청 귀중하다는 걸 알 사람들은 다 아는데. 그러니까 누군가 진주와 다이아몬드가 마음에 들어 일부러 저렇게 만든 거 아닐까요?"이현이 눈을 깜박이더니 바로 고개를 저었다."그럴 리가 없어요. 다이아몬드와 진주들이 비록 전부 떨어졌지만, 아직 여기에 있잖아요."그러자 여민이 냉소하며 바로 말했다."다 훔쳐 가면 너무 뻔하잖아요. 누군가가 고의로 다이아몬드를 쉽게 떨어지게 만들었을 거예요. 드레스를 상자에서 꺼내는 순간 다이아몬드와 진주들이 땅에 떨어지게 될 거고, 마지막에 전부 찾아내지 못하더라도 풀숲이나 어느 틈에 떨어져 찾을 수가 없다고 하면 그만이니까요."이현은 순간 알아들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가인에게 물었다."이 드레스 전에 어디에 놓여 있었죠?"가인은 소희를 힐끗 쳐다보고는 바로 고개를 숙이고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이에 소희가 고개를 들고 말했다."내 캐비닛에 있었어."여민은 의미심장하게 눈썹을 올린 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하지만 이현이 류 조감독을 바라보며 말했다."난 소희 씨를 믿어요. 쉽게 들킬 걸 알면서도 멍청하게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은 없을 거니까요."그러자 여민이 바로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이현 씨, 정말 아량이 넓네요. 전에 그렇게 뺨을 맞고도 저 여인의 편을 드는 거예요? 저 여인은 다들 그런 바보짓을 하는 사람이 없을 거라고 믿고 있다는 걸 알고 위험을 무릅쓰고 이런 짓을 한 거라고요!"하지만 이현은 여전히 이전의 일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사람처럼 걱정하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소희 씨, 어서 해명해 봐요.""내가 한 짓은 아닙니다. 하지만 진실을 밝히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거고, 이 드레스는 이미 사용할 수 없게 되었으니 바로 다른 드레스를 찾아올게요. 촬영 진도에 영향을 줘서는
이현의 눈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소희가 누구의 도움을 청했는지 속으로 추측하고 있었다.‘장시원? 아니면 조백림?’그러나 그녀가 유일하게 확신할 수 있는 건 소희가 절대 임구택의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는 점이다.이때 이정남이 소식을 듣고 달려와 숨을 헐떡이며 멈추었다. 그러고는 무슨 일이 일어났냐며 물었다.소희가 대답했다."드레스가 망가졌어요. 그래서 새것으로 바꿔야 해요."이정남이 망가진 드레스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누가 그랬어?"여민이 자신의 손톱을 긁으며 입을 삐죽거렸다."내적 외에 또 누가 있겠어?""괜찮아요."소희가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내 방에 CCTV가 설치되어 있거든요. 그러니 곧 있으면 범인을 알 수 있을 거예요."그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주위의 사람들 속 몇 사람의 안색이 순간 변했다.류 조감독이 의아해하며 말했다."CCTV? 그 방에는 CCTV가 없을 건데.""제가 직접 설치했습니다. 이 드레스가 너무 귀중한 거라 저도 무슨 사고가 날까 봐 제작진에게 알리지 않고 눈에 띄지 않는 CCTV를 설치했거든요. CCTV 영상은 바로 제 컴퓨터 안에 있으니까, 나중에 찾아보면 알 수 있을 겁니다."이정남이 듣더니 순간 안심이 되어 얼굴색이 각기 다른 여러 직원들을 보며 냉소했다"소희야, 역시 넌 똑똑하다니까."얼마 지나지 않아 류 조감독은 GK 측의 사람이 드레스를 보내왔다는 전화를 받게 되었다.류 조감독은 경악한 표정으로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정말 GK 측 사람이야?""네!류 조감독은 반짝이는 눈빛으로 소희를 힐끗 쳐다보고는 말했다."GK 측 사람을 이쪽으로 모셔 와!""네."직원이 대답하고는 떠났다.GK 측에서는 모두 두 사람이 왔는데 그 중 손에 트렁크를 든 한 사람이 도착하자마자 먼저 누가 소희인지를 묻고,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 공손하게 말했다."소희 아가씨, 하 총감독님께서 드레스가 아가씨의 마음에 드시는지 먼저 물으시라고 특별히 당부하셨습니다."다들 경악하여 소희를 쳐다보
이때 남주역을 맡은 조문이 앞으로 걸어와 입을 열었다."너무 예쁜 드레스네요."이정남이 조용히 소희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소희야, 너 진짜 대단해. 정말 드레스를 구해 오다니!"류 조감독은 여전히 눈에 의문을 가득 품고 물었다."어떻게 한 거야?"하지만 소희는 대답하지 않고 맑은 눈동자로 되물었다."제가 새 드레스를 가져왔으니 촬영을 시작해도 되죠?""그건 나중에."류 조감독이 시선을 돌려 이현을 바라보았다."이현 씨, 먼저 드레스를 입어 볼까?""아니요."이현이 일어서서 새 드레스 앞으로 다가가더니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입을 열었다."저 이 드레스 별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전의 것이 더 좋아요."이현의 말에 소희의 눈빛은 순간 차가워졌고, 이정남은 화를 참지 못하고 말했다."이현, 너무 지나치지 마. 괴롭히고 싶으면 날 괴롭히라고!"이에 이현이 뒤돌아보며 무고한 표정으로 말했다."뭐가 지나쳤는데요? 전의 드레스는 특별히 나를 위해 주문한 거고, 나도 그 드레스가 나에게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오늘에 찍을 씬에도 그 드레스가 더 잘 어울리기도 하고. 난 오로지 작품을 위해서 그러는 건데, 뭐가 잘못된 건가요?"이때 여민도 맞장구를 쳤다."나도 전에 그 드레스가 더 예쁘다고 생각하는데."이정남이 분노하며 이현을 쳐다보았다."이현, 네 덕분에 난 매번 인간성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가지게 돼."이현이 듣더니 눈썹을 올리며 말했다."인간성에 대한 인식이 정말 천박했나 보네요.""젠장!"이정남이 욕설을 퍼부으려는 순간 소희가 그의 팔을 잡고 뒤로 끌어당겼다.류 조감독이 보더니 바로 굳어진 얼굴색으로 소리쳤다."이정남 씨, 뭐 하는 거야? 하기 싫어?"이에 이정남이 냉소하며 말했다."드레스가 고의로 손상되어 소희가 새 드레스를 가져왔는데도 당신들이 물고 놓지 않는 걸 보니, 다 같이 짜고 들어 소희를 괴롭히려는 거네?"류 조감독이 듣더니 바로 화를 냈다."너 헛소리 하지 마. 누가 소희 씨를 괴롭
류 조감독이 화난 얼굴로 소리를 쳤다."아니! 오늘 딱 이 씬만 찍을 거니까, 의견이 있는 놈들은 당장 꺼져!"얼굴색마저 파랗게 질린 이정남은 바로 소희의 손목을 잡고 떠나려고 했다.그런데 이때 뒤에서 차가운 남자의 소리가 들려왔다."왜들 이래?"그리고 남자의 목소리에 소희는 저도 모르게 몸이 굳어졌다.이현이 고개를 들어 쳐다보더니 바로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구택 씨!"류 조감독도 뒤따라 고개를 돌려보고는 순식간에 웃음을 얼굴에 걸고 상대방을 맞이했다."임 대표님, 어떻게 오셨습니까?"주위에 스태프들이 둘러싸인 걸 고려한 듯 이현은 임구택에게 너무 가까이 가지는 못했다. 그러고는 걱정스럽게 물었다."상처는 어떻게 됐어요?""괜찮아."임구택이 덤덤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다 소희와 그녀의 조수가 안고 있는 드레스를 쳐다보며 물었다."무슨 일이죠?"류 조감독은 바삐 있는 일 없는 일까지 보태가며 자초지종을 말했다. 그러면서 모든 책임을 소희에게 돌려 패션 디자이너로서 중요한 드레스를 잘 보관하지 못했다고, 심지어는 자신이 맡고 있는 물건을 탐내고 있다고 덧붙였다.류 조감독이 말을 마치자마자 이현이 즉시 정색했다."소희 씨는 분명 고의가 아니었을 거예요. 이 일은 그냥 넘어가죠. 난 새로 보내온 드레스를 입어도 돼요, 새 드레스가 더 예쁘기도 하고.""허!"이정남이 듣더니 냉소하며 조롱하는 표정을 지었다.순간 이현이 방금 한 말에 인정을 표했다. 그는 확실히 인간성에 대한 인식이 너무 천박했다.다른 두 얼굴과 고약한 심보를 이렇게 남김없이 표현하는 사람도 있다니.하지만 임구택의 눈빛은 이정남의 팔을 잡고 있는 소희의 손에 떨어졌다. 그러고는 차가운 눈동자로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이런 작은 일에도 논쟁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겁니까? 류 조감독은 이런 식으로 촬영장을 돌보는 겁니까?"류 조감독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그럼 임 대표님은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죠?"임구택의 말투는 차고 무거웠다."아
“역시 이런 식으로 문제가 될 줄 알았어요.”은서는 싸늘한 눈빛으로 말하자, 손기수가 물었다.[이제 어떻게 하죠?]구은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장말숙한테 손자가 있잖아요. 그 애를 데려가요. 안전한 곳에 숨겨두고 지켜여.”이에 손기수는 비죽 웃으며 말했다.[그건 납치 아닌가요?]“이건 우리 엄마 뜻이에요.”은서는 그 말을 강조하듯 단호하게 말했다.“일만 제대로 끝내면, 보수는 두 배로 줄 거예요.”그제야 손기수는 만족스레 웃으며 대답했다.[좋아요. 저한테 맡기세요.]은서는 다시 신신당부했다. “숨겨두기만 해야 해요. 절대 다치게 하면 안 돼요.”이에 손기수는 급히 말했다.[우리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하겠어요!]은서는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엄마 말씀만 잘 따르면,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거예요.”모든 게 은정을 내쫓는 날까지만 버티면 그만이었다. 장말숙의 아들이 위협되지 않게 만들어야 했고, 지금 중요한 건 은정을 최대한 빨리 강제로 떠나게 만드는 일이었다.두 시간 후.오현빈이 급히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형님, 큰일이에요. 장말숙 아주머니 손자가 납치당했어요!”은정의 눈빛이 차갑게 되었다. 그와 유진의 계획은 장말숙의 아들이 철없는 무뢰한이라는 걸 이용해, 서선영 쪽 사람들과 충돌이 일어나게 만들고 그 사이에서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었다.그런데 서선영은 한 수 더 앞질렀다. 직접 손자를 납치해 버린 것이다. 은정은 느긋한 듯 말했지만, 말투엔 서늘한 살기가 묻어났다.“왜 못 막았어?”현빈이 대답했다.[도착했을 땐 이미 데려가고 난 뒤였어요. 아이는 집에 혼자 있었고요.]장말숙은 요즘 일을 그만두고 손자를 돌보고 있었다. 자기 아들은 놀기 좋아하고 도박을 일삼으며 최근 큰 빚까지 졌고, 며느리는 친정으로 들어가 버렸다.장말숙이 서선영의 돈을 받은 것도 빚을 갚고 며느리를 다시 불러들이기 위한 것이었다.그날 점심을 먹고 잠시 슈퍼에 다녀온 사이, 손자가 납치된 것이다.은정은 알고 있
“아주머니는 분명 그날 일에 대해 알고 있어요. 그 사람한테 직접 확인하러 갈 거예요!”임유진은 말을 끝내자마자 그대로 뛰쳐나갔다.“유진아!”구은서는 몇 걸음 뒤쫓았지만, 유진은 이미 계단 아래로 사라지고 있었다. 은서는 굳게 이를 악물며 눈살을 찌푸렸다.서선영이 집에 없다는 걸 알자, 그녀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장말숙 아주머니 잘 지켜봐요. 유진이 그날 일 알아보려고, 지금 그 사람 찾으러 갔으니까.”그러나 서선영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걔가 뭘 안다고 찾아?]은서는 차분히 말했다.“유진은 임씨 집안 사람이야. 찾으려면 못 찾을 사람이 없죠.”이에 서선영의 말투도 조금 무거워졌다.[알았어. 내가 금방 사람 붙여서 장말숙 감시하라고 할게.]은서는 이어서 냉랭하게 따져 물었다.“절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는다면서요? 근데 걔는 어떻게 안 거예요?”유진이 알았다는 건, 임씨 가족들까지도 이미 감지했다는 뜻이었다. 이에 은서는 불안감에 입술을 꾹 눌렀다.서선영은 얼버무리며 말했다.[아마 도우미 중 누가 말실수했을 거야. 다시 철저히 단속해 둘게. 걱정하지 마. 소문 좀 난다 해도 너한테까지 영향은 안 가. 넌 그냥 조용히 대본 연습이나 해.][이번 영화, 내가 네 외삼촌 꼬드겨서 겨우 투자받은 거 알지? 이번 기회 잘 잡아야 해. 딴 건 신경 쓰지 마. 연기만 잘하면 돼.]은서는 그 말에 더욱 날카로워졌다. 이번 영화는 유명 감독의 대작이었고, 은서에게는 이미지 회복의 유일한 기회였다. 그렇기에 서선영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나 곧 촬영 들어가요. 그러니까 이번 일 절대 망치지 마요.”[알았어!]서선영은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유진은 급히 차로 돌아와 깊게 숨을 들이쉰 후, 곧장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서선영 쪽에서 곧 움직일 거예요.”[알고 있어. 이미 준비해 뒀어.]은정의 목소리는 침착했고, 유진은 안심하며 숨을 내쉬었다.이윽고,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고생 많았어.]이에 유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
“아파요!”유진은 짧은 비명을 내뱉으며 순식간에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팔을 뻗어 구은정의 목에 매달리듯 안으며, 자기 얼굴을 숨기려 했다.이에 은정은 그녀의 어깨를 쓸어내리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낮게 웃었다.“왜 예전 같지 않아? 예전엔 몰래라도 키스하려고 했으면서, 이젠 실컷 하라고 해도 도망치기 바쁘네.”유진은 은정을 꼭 안으며 눈가가 붉게 물들었지만 속은 터질 듯 행복했다. 이제는 몰래 키스할 필요가 없다. 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할 수 있었다.은정은 유진의 발그레한 귀에 입을 맞추며 낮게 속삭였다.“전에 난 늘 걱정했어. 네가 그냥 어린 마음에 나한테 끌리는 거라고. 그저 신기하고 새로워서, 가질 수 없으니까 더 마음이 가는 거라고.”“우리가 진짜로 사귀게 되면 금세 질릴 거라고. 나는 사실 정말 재미없는 사람이야. 총 쏘고 싸우는 것 빼곤 할 줄 아는 게 없어.”“요즘 애들이 좋아하는 것도 몰라. 마음도 더 이상 젊지 않아.”“그래서 넌 언젠가 내가 생각보다 별거 아니라는 걸 깨닫고, 그 마음이 식을까 봐 두려웠어.”유진은 목이 메어, 콧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내가 기억 잃었을 때, 왜 다시 나한테 다가왔어요?”은정은 예전엔 그렇게 차갑게 거절했던 사람인데, 교통사고 한 번 났다고 갑자기 사랑하게 된 걸까? 혹시 죄책감 때문은 아니었을까?그런 생각이 유진을 계속 불안하게 했다. 잠시 침묵하던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아마 너 없는 세상이, 정말로 견딜 수 없을 만큼 어둡고 차가웠기 때문일 거야.”그 말에 유진의 가슴은 요동쳤다. 그녀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마음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려는 듯, 어둠을 걷어내고 자신의 빛으로 은정의 세상을 덮어주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유진은 다시 한번, 은정에게 입을 맞췄는데, 이번엔 더욱 깊고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은정은 곧 유진을 세게 안았고, 불같이 뜨거운 열기가 유진을 감쌌다. 죽음 같은 어둠 속에서 되살아난 사람처럼, 은정의 키스는
“그 사람들이 설마...”유진은 커다란 눈을 뜨고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구은정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네가 생각한 그대로야.”유진은 믿기지 않는 듯 놀람과 동시에 깊은 자책의 기색을 띄웠다.“결국 내가 이렇게 만든 거잖아요.”“자꾸 그런 식으로 네 탓 하지 마.”은정은 그녀의 뺨을 다정하게 쓸어내리며 말했다.“너는 둘 사이의 더러운 사정도 몰랐잖아.”유진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서선영은 그래도 이해가 가. 근데 구은서는 왜 그렇게까지 자기 엄마한테 협조한 거예요?”“자기 명예가 달린 문제인데, 게다가 지금은 연예인이잖아요. 설령 피해자라 해도, 그런 얘기 퍼지는 게 좋을 리 없잖아요.”은정은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대답했다.“십몇 년 전 그 일 땐, 은서는 진짜로 몰랐던 것 같아. 내가 샤워 끝내고 나왔을 땐 자고 있었고, 서선영이 소리 지르고 난리 쳐도 안 일어났거든.”“그땐 그냥 서선영한테 이용당한 거지. 근데 이번엔 서선영이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나도 몰라.”유진은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서선영은 정말 너무 악랄했다. 자기 딸까지도 그런 식으로 이용한다면, 못 할 짓이 뭐가 있을까?더구나 서선영은 알고 있었다. 이런 식의 루머가 은정에게 가장 치명적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게 바로 구은태에게도 가장 아픈 약점이라는 것을. 그래서 서선영은 또다시 그 수를 썼다.유진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중얼거렸다.“그때 전화받은 아주머니, 그 사람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찾을 수는 있어. 하지만 서선영한테서 돈을 받았고, 아마 협박도 받았을 거야.솔직히 말해줄 가능성은 작아.”은정은 냉정하게 말하자, 유진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그래도 찾아봐야죠. 당장 데리고 가서 집에 가서 진실을 말하게 해야 해요!”은정은 유진의 손목을 붙잡았는데,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웠다.“서두르지 마.”“어떻게 안 서둘러요! 지금 이미 밖에선 온갖 소문이 돌고 있다고요!”유진이 답답해하며 소리치자,
“그날 밤 전화했을 때 말이야.”유진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그게 바로 그날이었어요?”“그래.”은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그는 서선영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 몰랐다. 혹시 다시는 유진을 볼 수 없게 될까 두려워, 마지막으로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사실은 유진에게 자기 집으로 와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그 말이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았다.유진은 자책하듯 말했다.“나도 그때 뭔가 이상하단 걸 느꼈어. 근데 안 찾아갔어요.”은정은 유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그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고, 유진은 단지 모호한 한 통의 전화로 구씨 저택까지 달려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유진의 마음속은 여전히 무겁고 미안했다.“내가 갔더라면, 그 여자의 계략이 통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요.”“유진아, 우리 이제 과거에 대해 그만 후회하자. 응?”은정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말하자,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중요한 건, 서선영 모녀의 거짓말을 어떻게 밝혀낼지였다.“그 여자가 떠나라고 하니까, 진짜 떠나려던 거예요? 도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됐어?”유진이 화가 난 듯 말하자, 은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차가운 듯 부드러운 눈빛으로 대답했다.“내 명예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어. 네가 그 일 알고 나서 날 더 미워할까 봐, 그게 무서웠지.”호텔에서 유진이 여씨 집안 가족 모임에 참석한 걸 봤을 때, 그는 마음이 무너졌다.자신은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앞으로도 더러운 과거 때문에 손가락질받을 인생인데, 그런 자신의 곁에 유진을 두는 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유진은 따뜻하면서도 가슴 아픈 눈빛으로 은정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유진은 두 손으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안개 낀 듯한 눈동자가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은정의 어두운 그림자를 밀어내고 그 마음속까지 빛으로 채우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이번에는 유진이 먼저 입을 맞췄는데, 그 키스는 애틋하고 따스했
“정말 못됐어요. 그런데도 난, 이렇게 좋아하니까.”유진은 코끝을 훌쩍이며 속삭이듯 말하자, 은정의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고, 유진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유진은 흐느낌 속에 물었다.“그래도 또 떠날 거예요?”“안 떠나.”은정은 마치 유진의 몸이 자기의 일부라도 된 것처럼 꼭 끌어안았다.유진은 입술을 꾹 다물었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도 입가엔 참을 수 없이 번지는 미소가 피어올랐다.멀찍이서 둘을 바라보던 소희는 마침내 안도한 듯 미소를 지었고, 잠시 바라보다 조용히 돌아섰다.은정은 티켓 환불을 마치고, 유진의 손을 꼭 잡고 공항 로비를 빠져나왔다.그때 소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유진이는 맡길게. 잘 달래줘. 난 먼저 갈게.]은정은 묵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소희, 정말 고마워.”[혹시 집안 문제, 도와줄 일 있으면 말해.]은정은 원래의 냉정한 눈빛을 되찾으며, 대답했다.“아니, 내 일은 내가 해결할게.”[그래.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 임씨 집안 쪽 설득도 내가 도와줄 수 있어.]은정은 낮게 웃었다.“혼자 힘으로 안 되면 그때 부탁할게.”전화를 끊은 뒤, 유진이 옆에서 물었다.“소희, 갔어요?”“응. 우리 집에 가자.”은정은 다시 유진의 손을 꼭 잡았다.유진은 그날 회사에 가지 않고, 전화를 걸어 휴가를 냈다. 이경 아파트로 돌아오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선 은정은 유진을 번쩍 안아 들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유진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고,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세게 은정을 끌어안고 입맞춤에 응했다.유진의 반응은 은정을 더욱 자극했고, 입술은 불꽃처럼 뜨거웠다. 은정은 강렬함과 부드러움을 오가며 끊임없이 유진의 반응을 확인했고,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었을 때에야 숨을 고르며 입술을 떼었다.유진은 숨을 헐떡이며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언제 기억난 거야?”은정은 유진의 입술 위에서 낮게 물었다.유진의 커다란 눈동자엔 얇은 안개 같은 물기가 맺혀 있었고, 눈가엔 눈물 자국이 남아 붉
“나쁜 놈!”유진은 이를 악물고 욕설을 내뱉으며, 손등으로 눈물을 거칠게 닦고는 그대로 뛰쳐나갔다.허둥지둥 엘리베이터를 내려가던 중, 예상치 못하게 1층 현관 앞에서 막 차에서 내리는 소희와 마주쳤다.유진은 달려가 소희를 끌어안으며, 눈물로 목소리가 떨렸다.“소희야. 그 사람, 갔어.”소희는 차가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손을 들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침착하게 말했다.“지금쯤 공항 도착했을 거야. 얼른 차 타. 우리가 가서 막자.”유진은 울먹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응.”차에 올라탄 후, 소희는 아침 출근길 교통체증을 피해 가능한 한 빠른 길로 달렸다. 조수석에 앉은 유진은 여전히 망연자실한 얼굴이었다.소희는 유진을 스치듯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두려워하지 마. 이번엔, 걔가 지구 반대편까지 도망친다 해도 내가 꼭 데려올게.”유진은 이를 악물며 눈물 맺힌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응.”공항에 도착하자, 소희는 시계를 확인했다.“지금쯤이면 막 보안 검색대 들어갔을 거야. 넌 안으로 들어가. 난 밖에서 기다릴게.”유진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들이 북적이는 공항 안을 정신없이 뛰어다녔다.탑승 게이트 앞, 마침내 수많은 인파 속에서 그토록 익숙하고, 아프도록 그리운 구은정의 뒷모습을 발견했다.너무 긴장한 탓일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은정이 거의 들어가려던 순간, 유진은 겨우 목을 눌러 뜨거운 한마디를 토해냈다.“서인!”이에 은정의 발걸음이 멈췄고, 순간 고개를 홱 돌렸다. 사람들 사이 너머로, 유진이 서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지나가는 사람들, 소음, 움직임. 모든 게 멀어지고, 과거와 현재가 한꺼번에 겹쳤다.처음 만났던 순간. 잃어버린 가방을 찾아 건네주던 은정의 등.“정말 대단해.”감탄하던 유진의 눈빛. 차가웠던 은정의 반응. 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은정이 궁금했고, 따랐고, 그렇게 샤브샤브집에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유진은
방연하는 어이없다는 듯 여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지금 진심이에요? 머리 괜찮아?”여진구는 연하를 째려보았다. 연하는 주변의 예쁘게 꾸며진 꽃길과 풍선을 둘러보며 부러움 섞인 말투로 말했다.“이거 진짜 예쁘네요. 나도 나중에 이런 대접 한번 받아볼 수 있을까요?”“너한테 고백할 남자가 이런 것도 못 하면, 내가 대신 해줄게.”진구는 시원하게 말하자, 연하는 헛웃음을 지으며 받아쳤다.“미리 감사 인사드릴게요, 여진구 사장님.”그 시각, 유진은 집에 돌아왔지만 마음은 여전히 뒤숭숭했고, 계속 뭔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그날 밤은 뒤척이기만 하다가, 새벽이 되자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아침 7시가 되자, 임유민이 방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문에 기대선 그는 느슨하게 말했다.“누나, 이번 주 금요일 우리 학교 축구 경기 있어. 내가 수비수로 나가는데, 학교에서 가족 참관 받는대. 올래?”유진은 고개를 들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좋지. 꼭 응원하러 갈게.”유민은 그녀가 짐을 싸는 걸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근데 누나, 짐은 왜 싸?”유진은 노트북을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이젠 다시 이경 아파트로 돌아가려고.”유민은 조금 놀랐다.“안 돌아가겠다고 하지 않았어?”유진은 눈을 내리깔며 담담하게 대답했다.“가고 싶어졌어.”유민은 문에 기댄 채 웃으며 중얼거렸다.“역시 내 예상이 맞았네. 근데 이번에는 그렇게 바보처럼 굴지 마.”유진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뭐라고?”이에 유민은 씩 웃었다.“엄마는 아침 일찍 나갔고, 할머니한테는 꼭 인사하고 가. 안 그러면 또 가출했다고 난리 나실걸.”유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집에 없을 땐, 네가 좀 더 착하게 굴어. 할머니 기분 잘 맞춰 드리고.”유민은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말했다.“그건 숙모한테나 하라고.”유진은 참지 못하고 푸흐 웃음을 터뜨렸다. 짐을 정리한 후, 운전기사에게 짐을 차에 실어달라 부탁하고 자신은 할머니에게 인사드리
유진은 은정이 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직접 보고 나서야 다시 호텔 위층으로 돌아갔다. 혹시나 여씨 집안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할까 봐 대비해야 했다.라운지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흩어졌고, 유진이 그 안으로 들어섰을 때, 여씨 집안의 두 명의 며느리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셋째네는 평소에 그렇게 거칠게 굴더니, 오늘 자기 아들이 그렇게 당했는데도 조용하네?”다른 여성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들었는데 인후가 아가씨를 모욕해서 그렇게 된 거라더라고요. 이 일, 임씨 쪽이 알게 되면 여인후 가만두지 않을걸요?”“그래서였구나! 근데 때린 사람이 누군데?”“그건 잘 모르겠어요.”유진은 고개를 돌려 벽에 기대었다. 그 순간, 조금 전 은정의 어두운 눈빛과 먹먹한 표정이 머릿속을 스쳤고, 가슴이 다시 시리게 아파왔다.그때 여진구가 메시지를 보내오자, 유진은 핸드백을 챙겨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유진아!”호텔 정원에서 진구가 유진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다가왔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꺼내려 했지만 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선배!”이에 진구는 웃으며 말했다.“먼저 말해봐.”유진은 진지한 표정으로 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전 늘 당신을 선배로, 좋은 친구로 생각했어요. 그 이상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요.”“오늘 가족 모임에 참석하면서 다들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부디 오해가 더 커지지 않도록, 할아버지랑 어른들께는 확실히 말씀드려 주세요.”진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직 아무 말도 꺼내지도 않았는데, 유진은 이미 자신의 마음을 간파하고,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선을 그어버린 것이다.유진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 표정엔 피곤함이 묻어났다.“조금 피곤해서 먼저 갈게요. 할아버지께는 대신 인사 부탁드려요.”유진은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몇 걸음만 걸었을까? 그 순간, 뒤쪽 정원에 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형형색색의 하트 모양 꽃장식이 환하게 빛났고, 수많은 풍선과 조명이 하늘로 떠올랐다. 몽환적이고 낭만적인 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