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 조감독이 화난 얼굴로 소리를 쳤다."아니! 오늘 딱 이 씬만 찍을 거니까, 의견이 있는 놈들은 당장 꺼져!"얼굴색마저 파랗게 질린 이정남은 바로 소희의 손목을 잡고 떠나려고 했다.그런데 이때 뒤에서 차가운 남자의 소리가 들려왔다."왜들 이래?"그리고 남자의 목소리에 소희는 저도 모르게 몸이 굳어졌다.이현이 고개를 들어 쳐다보더니 바로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구택 씨!"류 조감독도 뒤따라 고개를 돌려보고는 순식간에 웃음을 얼굴에 걸고 상대방을 맞이했다."임 대표님, 어떻게 오셨습니까?"주위에 스태프들이 둘러싸인 걸 고려한 듯 이현은 임구택에게 너무 가까이 가지는 못했다. 그러고는 걱정스럽게 물었다."상처는 어떻게 됐어요?""괜찮아."임구택이 덤덤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다 소희와 그녀의 조수가 안고 있는 드레스를 쳐다보며 물었다."무슨 일이죠?"류 조감독은 바삐 있는 일 없는 일까지 보태가며 자초지종을 말했다. 그러면서 모든 책임을 소희에게 돌려 패션 디자이너로서 중요한 드레스를 잘 보관하지 못했다고, 심지어는 자신이 맡고 있는 물건을 탐내고 있다고 덧붙였다.류 조감독이 말을 마치자마자 이현이 즉시 정색했다."소희 씨는 분명 고의가 아니었을 거예요. 이 일은 그냥 넘어가죠. 난 새로 보내온 드레스를 입어도 돼요, 새 드레스가 더 예쁘기도 하고.""허!"이정남이 듣더니 냉소하며 조롱하는 표정을 지었다.순간 이현이 방금 한 말에 인정을 표했다. 그는 확실히 인간성에 대한 인식이 너무 천박했다.다른 두 얼굴과 고약한 심보를 이렇게 남김없이 표현하는 사람도 있다니.하지만 임구택의 눈빛은 이정남의 팔을 잡고 있는 소희의 손에 떨어졌다. 그러고는 차가운 눈동자로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이런 작은 일에도 논쟁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겁니까? 류 조감독은 이런 식으로 촬영장을 돌보는 겁니까?"류 조감독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그럼 임 대표님은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죠?"임구택의 말투는 차고 무거웠다."아
곧 아무도 없는 영상 속에서 문 닫는 소리가 났고, 누군가 노트북 앞으로 다가왔다. 손가락이 재빨리 노트북 위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CCTV를 검색하는 듯했다.그리고 노트북 속의 사람을 알아본 후 다들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일제히 여민의 뒤쪽을 바라보았다.영상 속에 등장한 사람은 파란색과 흰색 줄무늬가 간 상의를 입고 있었고, 손톱에는 연핑크색의 매니큐어를 하고 있었으며 약지에는 은색 하트 반지를 끼고 있었다.바로 여민의 조수, 왕연이었다.왕연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나와 상관없는 일이에요! 나와 상관없는 일입니다!"임구택이 매서운 눈빛으로 왕연을 쳐다보며 물었다."너와 상관없는 일인데, 소희의 노트북은 왜 건드린 거지?""나, 난......"왕연이 놀라 눈빛을 피하며 우물쭈물하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설명했다."난 그냥 누가 드레스를 훼손했는지 궁금해서 먼저 CCTV를 보러 갔을 뿐입니다."여전히 차갑고 무거운 임구택의 목소리는 사람에게 무언의 압박을 주고 있었다."내가 다시 한번 물을게, 너 맞아?"왕연은 순간 놀라서 울음을 터뜨렸다."아니요, 나 아닙니다!"그러자 임구택이 냉소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이정남 씨, 지금 당장 경찰에 신고하세요. 훼손된 드레스에 틀림없이 범인의 지문이 남아있을 겁니다. 이 드레스는 적어도 수백만의 가치를 가지고 있으니, 형사처벌을 받기엔 충분할 겁니다.""네!"이정남이 대답하면서 바로 휴대폰을 꺼내 경찰에 신고하려 했다."경찰에 신고하지 마요! 신고하지 말라고!"왕연이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창백해진 얼굴로 말했다."제발 경찰에 신고하지 마요, 내가 다 말할게요!""정말 너야?"이정남이 눈을 가늘게 뜨고 왕연을 바라보며 물었다.왕연은 놀란 나머지 울부짖으며 대답했다."여, 여민 씨가 시켰어요!"짝-여민은 듣자마자 일어나 왕연에게 뺨을 날렸다. 그러고는 놀란 얼굴로 화를 내며 소리쳤다."헛소리하지 마! 누가 너더러 드레스를 훼손하라고 했어! 정말 네가 한
이현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렸다."여민 씨, 그만 해요.""뭘 그만 해요!"여민이 고개를 돌려 왕연을 노려보았다."내가 평소에 너한테 못 해준 게 있어? 왜 나를 모함하는 건데?"왕연은 고개를 숙인 채 울고만 있었다."나도 잠시 머리가 잘못돼서 너의 말을 믿은 거지."여민은 달려들어 왕연을 때리려 했지만 옆에 있던 사람들이 여민을 말렸다.여민은 왕연를 가리키며 노발대발하여 말했다."너 딱 기다려, 나 반드시 너를 가만두지 않을 거야!""여민 씨!"이현이 여민의 손을 잡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그만하라고요. 류 조감독님도 여민 씨를 어떻게 하겠다고 아직 말하지 않았잖아요. 계속 이렇게 소란을 피웠다간 정말로 좋게 끝나지 않을 거예요."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임구택을 바라보았다."구택 씨, 왕연 씨만 해고하고 이 일은 여기서 끝내요. 틀림없이 왕연 씨가 여민 씨를 종용해서 여민 씨가 이런 어리석은 일을 했을 거예요."여민은 할 말이 많은 듯했지만 결국 이를 악물고 삼켰다.임구택이 차가운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 입을 열었다."난 단지 의견을 제출해 이 얼어붙은 분위기를 깨주고 싶었을 뿐이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는 제작팀의 일이고, 난 끼어들지 않을 거야. 그러나......"임구택이 말하다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풀숲에서 반짝이는 다이아몬드를 보며 다시 말을 이어갔다."이렇게 많은 다이아몬드가 너무 아깝네. 방금 누가 소희에게 다이아몬드를 하나씩 주우라고 했죠?"류 조감독이 즉각 대답했다."여민 씨가요.""그럼 말한 사람이 주워요, 낭비하지 말고."류 조감독이 듣더니 바로 여민에게 말했다."여민 씨와 왕연 씨! 다이아몬드를 하나씩 다 주워!"왕연은 고분고분 쪼그리고 앉아 다이아몬드를 줍기 시작했다. 여민은 비록 달갑지 않았지만 또 임구택이 정말 화를 내게 되면 고명계조차도 그녀를 보호할 수 없을 것 같아 다이아몬드를 주을 수 밖에 없었다.이때 임구택이 조감독을 힐끗 쳐다보더니 갑자기 웃었다."이번 일은 류 조감독님의 불찰도
그는 소희와 여민을 전부 증오했다. 그러나 여민은 고 사장의 사람이라 감히 미움을 살 수가 없었다. 그래서 화난 어투로 여민에게 말했다."직접 다이아몬드를 소희 씨에게 가져다줘. 나머지 일은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고."류 조감독이 떠나자 여민은 바로 손을 들어 왕연의 머리카락을 잡았다."네 이 년......"하지만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왕연이 비명을 질렀고 그 비명에 옆에 있던 스태프들이 분분히 쳐다보았다.여민은 힘껏 왕연을 밀쳤다."천한 년!"왕연은 바닥에 쓰러져 고개를 숙인 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여민은 그러는 그녀를 매섭게 노려보고는 다이아몬드가 든 상자를 들고 소희 찾으러 갔다.소희는 노트북에 마주 앉아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여민은 밖에 한참 서 있다 차가운 얼굴로 들어가 다이아몬드가 담긴 상자를 책상 위에 놓았다."전부 여기에 있어."한 시간 동안 햇볕을 쬐고 나니 여민의 머리카락은 이미 땀에 젖었고, 얼굴의 메이크업도 번져서 유난히 낭패해 보였다.소희는 그녀를 한번 힐끗 쳐다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여민은 바로 고개를 돌려 밖으로 나갔다. 그러다 다시 발길을 멈추고 돌아서서 입을 열었다."난 왕연에게 그런 일을 시킨 적이 없어. 네가 믿든 말든 알아서 해."그러고는 발길에 화를 담고 방을 나갔다.소희는 마우스에 손을 얹은 채 옆에 놓인 다이아몬드 상자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이때 방으로 들어온 이정남이 여민의 뒷모습을 보며 물었다."저 여인이 왜 왔어?""다이아몬드를 가져다주러요."소희가 담담하게 말했다."뭐라고 하던?"이정남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난 류 조감독이 너를 괴롭히려는 줄 알았는데, 여민일 줄은 정말 몰랐네. 너 언제 저 여인에게 미움을 산 거야?"소희는 그날 밤의 광경을 생각하며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오해였어요.""여민은 그렇다 치고. 이현이 정말 너무 어이없는 거 아니야?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일부러 너를 난처하게 만들더니, 임 대표가 오자마자 바로 표정을
임구택은 줄곧 소희의 뒷모습을 주시하고 있다가 차가 멀리 떠나고서야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이현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가자."그러는 그의 모습에 이현의 눈동자에 순간 빛이 번쩍였다. 그러고는 빠른 걸음으로 임구택을 따라갔다.......이튿날, 소희가 일하고 있는데 구은서가 손에 커피 한잔을 들고 들어와서는 창가에 기대 말했다."내가 오지 않은 사이에 또 재밌는 구경을 놓친 것 같던데?"소희가 종이 위에 설계도를 그리며 담담하게 말했다."그렇게 보고 싶으면 스스로 찍던가."구은서가 소희를 보며 냉소했다."설마 너도 정말 여민 씨가 너를 해치려 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소희의 펜끝이 순간 멈추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구은서가 콧방귀를 한번 뀌고는 말을 이어갔다."내가 장담하는데, 이 일은 무조건 이현이 한 짓이야. 먼저 여민 곁에 붙어있는 왕연을 매수한 후 류 조감독의 손을 빌려 너를 제작팀에서 쫓아내고 싶었던 거겠지. 그런데 네가 그렇게 똑똑할 줄은 몰랐던 거야. 게다가 구택 씨의 도움으로 일이 들통나자 아예 또 왕연더러 모든 일을 여민 씨에게 뒤집어씌우게 하고 자신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처럼 구경만 하고, 겸사 겸사 구택 씨 앞에서 좋은 사람 역할을 한 거지."구은서가 "쯧쯧"거리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어린애가 속은 참 깊네."소희가 듣더니 비웃듯이 물었다."은서 씨의 진수를 전수받은 게 아닐까?""그런 말은 넣어둬. 난 그렇게 오랫동안 계획했는데도 구택 씨를 얻지 못했으니 감히 그 여인과 비교할 수 없는 거야.""겁 먹지말고 다시 한 번 겨뤄봐.""뭐야, 지금 이간질하는 거야?""아니, 둘 중에 누가 이기든 나와 상관없거든."구은서가 듣더니 갑자기 다가와 짙은 메이크업을 한 눈으로 소희를 쳐다보았다."구택 씨가 사실 너를 해치려고 한 게 이현이라는 걸 알고 있을까?"소희는 조용히 구은서를 바라보았다.그러자 구은서가 눈썹을 올린 채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나도 눈치챌 수 있는 일을
조백림이 전화를 끊고 바로 임구택에게 전화를 걸었다."구택 형, 회사에 있어요?"임구택은 방금 회의를 마치고 책상에 앉아 공문을 보고 있었다."왜?""전에 구택 형을 다치게 한 일 때문에 내내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요. 저녁에 우리 같이 밥 먹어요, 내가 조용하게 구택 형에게 밥 살게요."조백림이 아주 진지한 말투로 말했다."관둬."하지만 임구택이 담담하게 거절했다."우리 사이에 그런 인사치레는 필요 없어.""인사치레가 아니에요!"조백림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희 씨도 부를 거거든요. 유정이 줄곧 소희 씨에게 직접 감사의 인사를 표하고 싶다던데, 저녁에 같이 만나요."임구택이 손에 쥐고 있던 펜이 순간 멈추었다."그럼 저녁에 다시 결정하지.""그래요, 내가 저녁에 전화할게요!""응."전화를 끊은 후 임구택이 잠시 생각하고는 사무실 안의 전화를 눌러 분부했다."저녁에 나 다른 볼일이 있으니까 호명의 파티엔 네가 가."진우행이 대답했다."네, 대표님!"전화를 내려놓고 임구택은 의자에서 일어나 천천히 창문 앞으로 걸어갔다.창밖의 햇빛은 따듯했지만 그의 깊고 차가운 눈동자를 녹여주지는 못했다.그의 눈빛은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빛 깊은 곳에는 유감스러운 정서가 비쳐져 있었지만 그 유감스러움은 점점 초조함으로 바뀌었다.......오후에 유정이 소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날 구해준 일에 대해 감사를 표하기 위해 저녁을 대접하겠다고.소희가 웃으며 완곡하게 거절했다."정말 그럴 필요 없어요. 그날 룸안의 모든 사람이 위협을 받게 되었고, 나도 나 자신의 안위를 위해 나선 거였으니까."유정이 부드럽게 말을 이어갔다."그러나 당시 가장 위험했던 사람이 나였잖아요. 그러니까 밥은 무조건 대접할 겁니다. 백림 씨의 뜻이기도 하고요. 밥만 먹는 건데, 친구 한 명 사귀는 셈 치고 나오면 안 될까요?"소희가 잠깐 뜸을 들이더니 결국 웃으며 말했다."그래요, 위치가 어디죠?""내가 주소를 보내드릴게요.""네."전화를 끊자
"늦지 않았어요. 우리도 방금 도착했는걸요!"조백림이 다정하게 웃으며 대답했다.이때 유정이 자리에서 일어나 조백림의 곁으로 가서 앉았다.임구택은 아무 말도 없이 소희의 옆쪽 의자에 앉았다.붙어 앉은 순간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가 갑자기 미묘해졌다.유정이 메뉴판을 들고 주문하기 시작했다."소희 씨, 뭐 드시고 싶으세요?"조백림이 웃으며 대신 말했다."소희 씨는 단 음식을 좋아하니까 디저트 같은 것들을 많이 주문해 줘.""단 음식을 좋아하는 건 아마 우리 여자들의 공통성일 거예요. 이곳의 아이스크림이 괜찮은데, 우리 한 사람당 2인분씩 주문하는 게 어때요?"먹는 얘기가 나오니 유정의 눈이 순간 빛나고 있었다.하지만 소희가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옆에 있던 임구택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1인분이면 됩니다. 소희가 요 며칠 차가운 걸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되거든요."다들 어린애도 아니라 순간 임구택의 뜻을 알아차렸다.유정은 멍하니 소희와 임구택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관계를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소희는 줄곧 소외감이 묻은 얼굴을 하고 있어 임구택과의 관계가 자신과 조백림과의 관계보다는 친밀하지 않은것 같았지만 임구택의 말을 들으면 또 왠지 이유 모를 정이 묻어있는 것 같았다.그러다 유정은 갑자기 그날 넘버 나인에서 소희가 폭탄을 들고 베란다로 달려갈 때 필사적으로 같이 달려들어 위험을 무릅쓰고 소희를 품으로 감싼 임구택의 모습이 생각났다.그런 본능적인 보호는 절대 일시적인 것이 아니다.‘설마 임구택 씨가 소희 씨를 좋아하는 건가?’이때 소희가 유정만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2인분으로 주문해 줘요."임구택이 눈을 길게 뜨고 소희를 흘겨보았다."1인분.""2인분."임구택이 실눈을 뜨고 차갑게 물었다."꼭 그렇게 나와 맞서야 해?"이에 소희가 평온하게 대답했다."임 대표님께서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요. 저의 일을 제가 알아서 결정하는 건데, 맞선다고는 할 수 없죠."임구택이 조용하게 어두운 눈빛으로 소
조백림이 듣더니 고개를 돌려 매혹적인 눈으로 유정을 쳐다보았다. 눈빛에는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자기야, 우리 이미 약혼까지 했어. 그런데 자기는 날 뽀뽀도 못하게 하고, 잠자리도 같이 들려 하지 않는 것도 모자라 이제 손도 못 잡게 하는 거야?"조백림의 잘생긴 외모에 전혀 넘어가지 않은 유정은 두 손을 뒤로 한 채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저기요, 조수정의 일이 해결되긴 했나요? 그리고 우리의 혼사가 계속될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니까 그렇게 다정하게 부르지 마요. 난 그쪽과 그렇게 친하지 않거든요."조백림은 소녀의 눈에 비친 야유를 보며 담담하게 웃었다."누구나 다 과거가 있는 법이잖아. 듣자니, 너에게도 죽도록 사랑했던 전 남자친구가 있었다며? 다 같은 사랑에 얽매여 있는 사람으로서 누구도 누구를 비웃지는 말지?"‘전 남자친구’라는 단어가 소녀의 마음을 건드렸는지 소녀의 얼굴색이 조금씩 어두워졌다."입맛이 없네요. 먼저 돌아가겠습니다."조백림이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왜, 전 남자친구 얘기에 바로 화를 내고, 아직도 그 사람을 좋아하는 거야?"유정의 뒤에 선 조백림은 앞으로 다가가 유정을 자신의 품과 벽 사이에 가두고 천천히 몸을 숙였다. 매혹적인 두 눈은 여전히 우아하고 다정했다."성질을 그만 부려. 나에게도 과거가 있으니까 네가 마음속에 다른 남자를 품고 있는 걸 허락해 줄게. 우리는 누구도 누구를 멸시할 자격이 없어."유정의 눈빛 깊은 곳에는 침통이 묻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바로 시선을 떨구었다. 남자에게 자신의 연약함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저 배고파요."그러는 유정의 모습에 조백림은 왠지 연민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몸을 일으키고 유정을 놓아주며 웃었다."가자, 밥 먹으러."유정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조백림의 뒤를 따랐다.조백림이 앞에서 두 걸음 걷다가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그런데 왜 헤어진 거야?"유정의 눈동자는 그윽해 있었다. 그녀는 한참 침묵을 지키다가 조소하듯 웃으며 말했다.
“역시 이런 식으로 문제가 될 줄 알았어요.”은서는 싸늘한 눈빛으로 말하자, 손기수가 물었다.[이제 어떻게 하죠?]구은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장말숙한테 손자가 있잖아요. 그 애를 데려가요. 안전한 곳에 숨겨두고 지켜여.”이에 손기수는 비죽 웃으며 말했다.[그건 납치 아닌가요?]“이건 우리 엄마 뜻이에요.”은서는 그 말을 강조하듯 단호하게 말했다.“일만 제대로 끝내면, 보수는 두 배로 줄 거예요.”그제야 손기수는 만족스레 웃으며 대답했다.[좋아요. 저한테 맡기세요.]은서는 다시 신신당부했다. “숨겨두기만 해야 해요. 절대 다치게 하면 안 돼요.”이에 손기수는 급히 말했다.[우리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하겠어요!]은서는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엄마 말씀만 잘 따르면,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거예요.”모든 게 은정을 내쫓는 날까지만 버티면 그만이었다. 장말숙의 아들이 위협되지 않게 만들어야 했고, 지금 중요한 건 은정을 최대한 빨리 강제로 떠나게 만드는 일이었다.두 시간 후.오현빈이 급히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형님, 큰일이에요. 장말숙 아주머니 손자가 납치당했어요!”은정의 눈빛이 차갑게 되었다. 그와 유진의 계획은 장말숙의 아들이 철없는 무뢰한이라는 걸 이용해, 서선영 쪽 사람들과 충돌이 일어나게 만들고 그 사이에서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었다.그런데 서선영은 한 수 더 앞질렀다. 직접 손자를 납치해 버린 것이다. 은정은 느긋한 듯 말했지만, 말투엔 서늘한 살기가 묻어났다.“왜 못 막았어?”현빈이 대답했다.[도착했을 땐 이미 데려가고 난 뒤였어요. 아이는 집에 혼자 있었고요.]장말숙은 요즘 일을 그만두고 손자를 돌보고 있었다. 자기 아들은 놀기 좋아하고 도박을 일삼으며 최근 큰 빚까지 졌고, 며느리는 친정으로 들어가 버렸다.장말숙이 서선영의 돈을 받은 것도 빚을 갚고 며느리를 다시 불러들이기 위한 것이었다.그날 점심을 먹고 잠시 슈퍼에 다녀온 사이, 손자가 납치된 것이다.은정은 알고 있
“아주머니는 분명 그날 일에 대해 알고 있어요. 그 사람한테 직접 확인하러 갈 거예요!”임유진은 말을 끝내자마자 그대로 뛰쳐나갔다.“유진아!”구은서는 몇 걸음 뒤쫓았지만, 유진은 이미 계단 아래로 사라지고 있었다. 은서는 굳게 이를 악물며 눈살을 찌푸렸다.서선영이 집에 없다는 걸 알자, 그녀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장말숙 아주머니 잘 지켜봐요. 유진이 그날 일 알아보려고, 지금 그 사람 찾으러 갔으니까.”그러나 서선영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걔가 뭘 안다고 찾아?]은서는 차분히 말했다.“유진은 임씨 집안 사람이야. 찾으려면 못 찾을 사람이 없죠.”이에 서선영의 말투도 조금 무거워졌다.[알았어. 내가 금방 사람 붙여서 장말숙 감시하라고 할게.]은서는 이어서 냉랭하게 따져 물었다.“절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는다면서요? 근데 걔는 어떻게 안 거예요?”유진이 알았다는 건, 임씨 가족들까지도 이미 감지했다는 뜻이었다. 이에 은서는 불안감에 입술을 꾹 눌렀다.서선영은 얼버무리며 말했다.[아마 도우미 중 누가 말실수했을 거야. 다시 철저히 단속해 둘게. 걱정하지 마. 소문 좀 난다 해도 너한테까지 영향은 안 가. 넌 그냥 조용히 대본 연습이나 해.][이번 영화, 내가 네 외삼촌 꼬드겨서 겨우 투자받은 거 알지? 이번 기회 잘 잡아야 해. 딴 건 신경 쓰지 마. 연기만 잘하면 돼.]은서는 그 말에 더욱 날카로워졌다. 이번 영화는 유명 감독의 대작이었고, 은서에게는 이미지 회복의 유일한 기회였다. 그렇기에 서선영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나 곧 촬영 들어가요. 그러니까 이번 일 절대 망치지 마요.”[알았어!]서선영은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유진은 급히 차로 돌아와 깊게 숨을 들이쉰 후, 곧장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서선영 쪽에서 곧 움직일 거예요.”[알고 있어. 이미 준비해 뒀어.]은정의 목소리는 침착했고, 유진은 안심하며 숨을 내쉬었다.이윽고,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고생 많았어.]이에 유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
“아파요!”유진은 짧은 비명을 내뱉으며 순식간에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팔을 뻗어 구은정의 목에 매달리듯 안으며, 자기 얼굴을 숨기려 했다.이에 은정은 그녀의 어깨를 쓸어내리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낮게 웃었다.“왜 예전 같지 않아? 예전엔 몰래라도 키스하려고 했으면서, 이젠 실컷 하라고 해도 도망치기 바쁘네.”유진은 은정을 꼭 안으며 눈가가 붉게 물들었지만 속은 터질 듯 행복했다. 이제는 몰래 키스할 필요가 없다. 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할 수 있었다.은정은 유진의 발그레한 귀에 입을 맞추며 낮게 속삭였다.“전에 난 늘 걱정했어. 네가 그냥 어린 마음에 나한테 끌리는 거라고. 그저 신기하고 새로워서, 가질 수 없으니까 더 마음이 가는 거라고.”“우리가 진짜로 사귀게 되면 금세 질릴 거라고. 나는 사실 정말 재미없는 사람이야. 총 쏘고 싸우는 것 빼곤 할 줄 아는 게 없어.”“요즘 애들이 좋아하는 것도 몰라. 마음도 더 이상 젊지 않아.”“그래서 넌 언젠가 내가 생각보다 별거 아니라는 걸 깨닫고, 그 마음이 식을까 봐 두려웠어.”유진은 목이 메어, 콧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내가 기억 잃었을 때, 왜 다시 나한테 다가왔어요?”은정은 예전엔 그렇게 차갑게 거절했던 사람인데, 교통사고 한 번 났다고 갑자기 사랑하게 된 걸까? 혹시 죄책감 때문은 아니었을까?그런 생각이 유진을 계속 불안하게 했다. 잠시 침묵하던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아마 너 없는 세상이, 정말로 견딜 수 없을 만큼 어둡고 차가웠기 때문일 거야.”그 말에 유진의 가슴은 요동쳤다. 그녀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마음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려는 듯, 어둠을 걷어내고 자신의 빛으로 은정의 세상을 덮어주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유진은 다시 한번, 은정에게 입을 맞췄는데, 이번엔 더욱 깊고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은정은 곧 유진을 세게 안았고, 불같이 뜨거운 열기가 유진을 감쌌다. 죽음 같은 어둠 속에서 되살아난 사람처럼, 은정의 키스는
“그 사람들이 설마...”유진은 커다란 눈을 뜨고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구은정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네가 생각한 그대로야.”유진은 믿기지 않는 듯 놀람과 동시에 깊은 자책의 기색을 띄웠다.“결국 내가 이렇게 만든 거잖아요.”“자꾸 그런 식으로 네 탓 하지 마.”은정은 그녀의 뺨을 다정하게 쓸어내리며 말했다.“너는 둘 사이의 더러운 사정도 몰랐잖아.”유진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서선영은 그래도 이해가 가. 근데 구은서는 왜 그렇게까지 자기 엄마한테 협조한 거예요?”“자기 명예가 달린 문제인데, 게다가 지금은 연예인이잖아요. 설령 피해자라 해도, 그런 얘기 퍼지는 게 좋을 리 없잖아요.”은정은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대답했다.“십몇 년 전 그 일 땐, 은서는 진짜로 몰랐던 것 같아. 내가 샤워 끝내고 나왔을 땐 자고 있었고, 서선영이 소리 지르고 난리 쳐도 안 일어났거든.”“그땐 그냥 서선영한테 이용당한 거지. 근데 이번엔 서선영이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나도 몰라.”유진은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서선영은 정말 너무 악랄했다. 자기 딸까지도 그런 식으로 이용한다면, 못 할 짓이 뭐가 있을까?더구나 서선영은 알고 있었다. 이런 식의 루머가 은정에게 가장 치명적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게 바로 구은태에게도 가장 아픈 약점이라는 것을. 그래서 서선영은 또다시 그 수를 썼다.유진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중얼거렸다.“그때 전화받은 아주머니, 그 사람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찾을 수는 있어. 하지만 서선영한테서 돈을 받았고, 아마 협박도 받았을 거야.솔직히 말해줄 가능성은 작아.”은정은 냉정하게 말하자, 유진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그래도 찾아봐야죠. 당장 데리고 가서 집에 가서 진실을 말하게 해야 해요!”은정은 유진의 손목을 붙잡았는데,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웠다.“서두르지 마.”“어떻게 안 서둘러요! 지금 이미 밖에선 온갖 소문이 돌고 있다고요!”유진이 답답해하며 소리치자,
“그날 밤 전화했을 때 말이야.”유진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그게 바로 그날이었어요?”“그래.”은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그는 서선영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 몰랐다. 혹시 다시는 유진을 볼 수 없게 될까 두려워, 마지막으로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사실은 유진에게 자기 집으로 와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그 말이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았다.유진은 자책하듯 말했다.“나도 그때 뭔가 이상하단 걸 느꼈어. 근데 안 찾아갔어요.”은정은 유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그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고, 유진은 단지 모호한 한 통의 전화로 구씨 저택까지 달려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유진의 마음속은 여전히 무겁고 미안했다.“내가 갔더라면, 그 여자의 계략이 통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요.”“유진아, 우리 이제 과거에 대해 그만 후회하자. 응?”은정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말하자,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중요한 건, 서선영 모녀의 거짓말을 어떻게 밝혀낼지였다.“그 여자가 떠나라고 하니까, 진짜 떠나려던 거예요? 도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됐어?”유진이 화가 난 듯 말하자, 은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차가운 듯 부드러운 눈빛으로 대답했다.“내 명예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어. 네가 그 일 알고 나서 날 더 미워할까 봐, 그게 무서웠지.”호텔에서 유진이 여씨 집안 가족 모임에 참석한 걸 봤을 때, 그는 마음이 무너졌다.자신은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앞으로도 더러운 과거 때문에 손가락질받을 인생인데, 그런 자신의 곁에 유진을 두는 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유진은 따뜻하면서도 가슴 아픈 눈빛으로 은정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유진은 두 손으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안개 낀 듯한 눈동자가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은정의 어두운 그림자를 밀어내고 그 마음속까지 빛으로 채우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이번에는 유진이 먼저 입을 맞췄는데, 그 키스는 애틋하고 따스했
“정말 못됐어요. 그런데도 난, 이렇게 좋아하니까.”유진은 코끝을 훌쩍이며 속삭이듯 말하자, 은정의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고, 유진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유진은 흐느낌 속에 물었다.“그래도 또 떠날 거예요?”“안 떠나.”은정은 마치 유진의 몸이 자기의 일부라도 된 것처럼 꼭 끌어안았다.유진은 입술을 꾹 다물었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도 입가엔 참을 수 없이 번지는 미소가 피어올랐다.멀찍이서 둘을 바라보던 소희는 마침내 안도한 듯 미소를 지었고, 잠시 바라보다 조용히 돌아섰다.은정은 티켓 환불을 마치고, 유진의 손을 꼭 잡고 공항 로비를 빠져나왔다.그때 소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유진이는 맡길게. 잘 달래줘. 난 먼저 갈게.]은정은 묵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소희, 정말 고마워.”[혹시 집안 문제, 도와줄 일 있으면 말해.]은정은 원래의 냉정한 눈빛을 되찾으며, 대답했다.“아니, 내 일은 내가 해결할게.”[그래.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 임씨 집안 쪽 설득도 내가 도와줄 수 있어.]은정은 낮게 웃었다.“혼자 힘으로 안 되면 그때 부탁할게.”전화를 끊은 뒤, 유진이 옆에서 물었다.“소희, 갔어요?”“응. 우리 집에 가자.”은정은 다시 유진의 손을 꼭 잡았다.유진은 그날 회사에 가지 않고, 전화를 걸어 휴가를 냈다. 이경 아파트로 돌아오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선 은정은 유진을 번쩍 안아 들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유진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고,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세게 은정을 끌어안고 입맞춤에 응했다.유진의 반응은 은정을 더욱 자극했고, 입술은 불꽃처럼 뜨거웠다. 은정은 강렬함과 부드러움을 오가며 끊임없이 유진의 반응을 확인했고,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었을 때에야 숨을 고르며 입술을 떼었다.유진은 숨을 헐떡이며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언제 기억난 거야?”은정은 유진의 입술 위에서 낮게 물었다.유진의 커다란 눈동자엔 얇은 안개 같은 물기가 맺혀 있었고, 눈가엔 눈물 자국이 남아 붉
“나쁜 놈!”유진은 이를 악물고 욕설을 내뱉으며, 손등으로 눈물을 거칠게 닦고는 그대로 뛰쳐나갔다.허둥지둥 엘리베이터를 내려가던 중, 예상치 못하게 1층 현관 앞에서 막 차에서 내리는 소희와 마주쳤다.유진은 달려가 소희를 끌어안으며, 눈물로 목소리가 떨렸다.“소희야. 그 사람, 갔어.”소희는 차가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손을 들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침착하게 말했다.“지금쯤 공항 도착했을 거야. 얼른 차 타. 우리가 가서 막자.”유진은 울먹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응.”차에 올라탄 후, 소희는 아침 출근길 교통체증을 피해 가능한 한 빠른 길로 달렸다. 조수석에 앉은 유진은 여전히 망연자실한 얼굴이었다.소희는 유진을 스치듯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두려워하지 마. 이번엔, 걔가 지구 반대편까지 도망친다 해도 내가 꼭 데려올게.”유진은 이를 악물며 눈물 맺힌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응.”공항에 도착하자, 소희는 시계를 확인했다.“지금쯤이면 막 보안 검색대 들어갔을 거야. 넌 안으로 들어가. 난 밖에서 기다릴게.”유진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들이 북적이는 공항 안을 정신없이 뛰어다녔다.탑승 게이트 앞, 마침내 수많은 인파 속에서 그토록 익숙하고, 아프도록 그리운 구은정의 뒷모습을 발견했다.너무 긴장한 탓일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은정이 거의 들어가려던 순간, 유진은 겨우 목을 눌러 뜨거운 한마디를 토해냈다.“서인!”이에 은정의 발걸음이 멈췄고, 순간 고개를 홱 돌렸다. 사람들 사이 너머로, 유진이 서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지나가는 사람들, 소음, 움직임. 모든 게 멀어지고, 과거와 현재가 한꺼번에 겹쳤다.처음 만났던 순간. 잃어버린 가방을 찾아 건네주던 은정의 등.“정말 대단해.”감탄하던 유진의 눈빛. 차가웠던 은정의 반응. 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은정이 궁금했고, 따랐고, 그렇게 샤브샤브집에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유진은
방연하는 어이없다는 듯 여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지금 진심이에요? 머리 괜찮아?”여진구는 연하를 째려보았다. 연하는 주변의 예쁘게 꾸며진 꽃길과 풍선을 둘러보며 부러움 섞인 말투로 말했다.“이거 진짜 예쁘네요. 나도 나중에 이런 대접 한번 받아볼 수 있을까요?”“너한테 고백할 남자가 이런 것도 못 하면, 내가 대신 해줄게.”진구는 시원하게 말하자, 연하는 헛웃음을 지으며 받아쳤다.“미리 감사 인사드릴게요, 여진구 사장님.”그 시각, 유진은 집에 돌아왔지만 마음은 여전히 뒤숭숭했고, 계속 뭔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그날 밤은 뒤척이기만 하다가, 새벽이 되자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아침 7시가 되자, 임유민이 방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문에 기대선 그는 느슨하게 말했다.“누나, 이번 주 금요일 우리 학교 축구 경기 있어. 내가 수비수로 나가는데, 학교에서 가족 참관 받는대. 올래?”유진은 고개를 들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좋지. 꼭 응원하러 갈게.”유민은 그녀가 짐을 싸는 걸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근데 누나, 짐은 왜 싸?”유진은 노트북을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이젠 다시 이경 아파트로 돌아가려고.”유민은 조금 놀랐다.“안 돌아가겠다고 하지 않았어?”유진은 눈을 내리깔며 담담하게 대답했다.“가고 싶어졌어.”유민은 문에 기댄 채 웃으며 중얼거렸다.“역시 내 예상이 맞았네. 근데 이번에는 그렇게 바보처럼 굴지 마.”유진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뭐라고?”이에 유민은 씩 웃었다.“엄마는 아침 일찍 나갔고, 할머니한테는 꼭 인사하고 가. 안 그러면 또 가출했다고 난리 나실걸.”유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집에 없을 땐, 네가 좀 더 착하게 굴어. 할머니 기분 잘 맞춰 드리고.”유민은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말했다.“그건 숙모한테나 하라고.”유진은 참지 못하고 푸흐 웃음을 터뜨렸다. 짐을 정리한 후, 운전기사에게 짐을 차에 실어달라 부탁하고 자신은 할머니에게 인사드리
유진은 은정이 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직접 보고 나서야 다시 호텔 위층으로 돌아갔다. 혹시나 여씨 집안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할까 봐 대비해야 했다.라운지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흩어졌고, 유진이 그 안으로 들어섰을 때, 여씨 집안의 두 명의 며느리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셋째네는 평소에 그렇게 거칠게 굴더니, 오늘 자기 아들이 그렇게 당했는데도 조용하네?”다른 여성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들었는데 인후가 아가씨를 모욕해서 그렇게 된 거라더라고요. 이 일, 임씨 쪽이 알게 되면 여인후 가만두지 않을걸요?”“그래서였구나! 근데 때린 사람이 누군데?”“그건 잘 모르겠어요.”유진은 고개를 돌려 벽에 기대었다. 그 순간, 조금 전 은정의 어두운 눈빛과 먹먹한 표정이 머릿속을 스쳤고, 가슴이 다시 시리게 아파왔다.그때 여진구가 메시지를 보내오자, 유진은 핸드백을 챙겨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유진아!”호텔 정원에서 진구가 유진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다가왔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꺼내려 했지만 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선배!”이에 진구는 웃으며 말했다.“먼저 말해봐.”유진은 진지한 표정으로 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전 늘 당신을 선배로, 좋은 친구로 생각했어요. 그 이상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요.”“오늘 가족 모임에 참석하면서 다들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부디 오해가 더 커지지 않도록, 할아버지랑 어른들께는 확실히 말씀드려 주세요.”진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직 아무 말도 꺼내지도 않았는데, 유진은 이미 자신의 마음을 간파하고,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선을 그어버린 것이다.유진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 표정엔 피곤함이 묻어났다.“조금 피곤해서 먼저 갈게요. 할아버지께는 대신 인사 부탁드려요.”유진은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몇 걸음만 걸었을까? 그 순간, 뒤쪽 정원에 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형형색색의 하트 모양 꽃장식이 환하게 빛났고, 수많은 풍선과 조명이 하늘로 떠올랐다. 몽환적이고 낭만적인 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