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암 말기?’진승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의사를 쳐다봤다.“확실합니까?”“네.”의사는 잠깐 망설이다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게다가 위 세척도 해야 합니다.”“위 세척이요?”진승윤은 또 한 번 당황했다.“네. 식중독인 데다가 비누도 반 조각 먹었고 며칠 전에는 바닷물에도 빠졌었습니다.”의사마저 안타까워했다.“이러다가는 환자분이 6개월도 버티지 못할 겁니다.”진승윤은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알겠어요. 일단 다른 사람한테는 말하지 마세요.”“알겠습니다. 간호사한테 일단 피부터 뽑으라고 할게요.”진승윤은
배정우에게 세게 밀쳐진 임슬기는 캐비닛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히고 말았다. 갑작스러운 통증에 저도 모르게 아픈 신음을 냈다.그녀는 미간을 찌푸리고 아픔을 참으며 뒷머리를 만져보았다. 오른손은 이미 피투성이였고 너덜거리는 살점이 더욱 섬뜩하게 보였다. 하지만 배정우는 전혀 보지 못했다.그는 임슬기가 연다인을 때리려는 줄 알고 본능적으로 다시 그녀를 밀쳤다.“그 더러운 손 치워.”그러고는 연다인을 안고 밖으로 나갔다.그는 문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바닥에 쓰러진 여자를 차갑게 노려보며 경고했다.“임슬기, 이번이 마지막이야. 다
임슬기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배정우가 이렇게 일찍 들어올 줄은 생각지 못했다.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진승윤이 먼저 나서서 말했다.“아침 먹을 거 좀 가져왔어. 너도 같이 먹자.”‘같이?’배정우의 눈빛이 무서울 정도로 어두워지더니 몸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그는 진승윤을 지나 임슬기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입은 잠옷이 눈에 너무도 거슬렸다.임슬기가 퇴원했다는 소리를 듣고 바로 집으로 왔다. 그런데 임슬기는 옷도 제대로 입지 않은 채 다른 남자와 아침을 먹고 있었다.배정우는 진승윤을 스쳐지나 임슬기의 머리채를 잡고 식탁에
“나더러 다인이를 챙기라고?”“무슨 문제 있어? 다인이 환자니까 밥할 때 신경 좀 써. 그리고 내가 시간 날 때마다 들를 테니까 밥은 꼭 해두고.”그 말에 임슬기는 이상한 생물체를 보듯 눈을 크게 뜨고 배정우를 쳐다봤다. 배정우는 마치 은혜를 베푸는 것처럼 말했다. 임슬기가 그 고마움을 모르면 큰일이라도 날 것만 같았다.‘내 결혼 생활에 끼어들고 집안을 망하게 한 여자 시중이나 들라고? 나한테 모욕을 주는 방법도 정말 가지가지네.’그녀의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배정우가 미간을 찌푸렸다.“임슬기, 거절하려고? 네 동생 생
임슬기는 폐가 움츠러드는 듯한 고통에 기침이 나왔지만 애써 참으며 대답했다.“그래. 알았어.”그러고는 캐리어를 가지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가뜩이나 몸이 약한 데다가 병까지 걸렸고 또 복부의 상처도 아물지 않은 상태라 28인치 캐리어를 혼자 들려니 두 걸음도 못 가서 온몸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하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고 멈추지 않았다.반쯤 갔을 때 배정우의 목소리가 들렸다.“짐 갖다 놓은 다음에 밥 준비해. 점심은 집에서 먹을 거야.”임슬기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하지만 배정우가 임종현에게 해를 끼칠까 봐 발걸음을 멈추고
목이 가벼워지자 임슬기는 몇 번 기침을 했다. 기침하다 나온 피는 몰래 검은 옷에 닦은 다음 고개를 들고 배정우를 보며 웃었다.“정우야, 얼마나 더 말을 들어야 해? 난 내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고 너한테 2년 동안 괴롭힘을 당했어. 이젠 너한테 자유를 주고 두 사람이 당당하게 만날 수 있도록 하겠다는데 날 보내주지도 않잖아. 배정우, 내가 뭘 더 어떻게 말을 들어야 하는 건데?”배정우는 어두운 눈으로 임슬기를 쳐다봤다.“아직 부족해. 임슬기, 넌 아직 빚을 채 갚지 못했어.”그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는 사람을 두려움
그 말에 연다인이 분노를 터트렸다. 조금 전 연약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임슬기, 누가 내연녀라는 건데?”“당연히 너지. 여기 너 말고 더 있어? 나랑 정우는 정략결혼이 아니라 연애하고 결혼했어. 넌 뭔데?”예전에 임슬기는 명인시의 가시 돋친 장미라 불릴 정도로 아무도 감히 건드리지 못했다.왜냐하면 독설을 잘했고 안하무인인 데다가 세상에 두려움이 없었다. 배정우 같은 사람 말고는 그녀에게 다가갈 수 있는 남자가 없을 것이다.하지만 지난 2년 동안 그녀는 하도 괴롭힘을 당해서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조차 까맣게 잊을 뻔했
임슬기는 그 자리에 굳어버린 채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몸뿐만이 아니라 마음도 벌벌 떨렸다.2년 전 아버지가 자살했다는 사실을 그녀는 TV를 통해 알게 되었다. 유언도 듣지 못했고 아버지의 시신조차 보지 못했다. 그녀가 갔을 땐 이미 재만 남아 있었다.지금 생각해보니 그때 너무 단순했고 연다인과 배정우를 철석같이 믿은 게 잘못이었다. 아버지의 죽음은 절대 임슬기의 생각처럼 간단하지 않을 것이다.“연다인, 혹시 우리 아빠를 죽인 사람이 너야?”연다인이 코웃음을 쳤다.“상상력이 참 풍부하구나, 너. 난 그렇게 한가하지 않아.
‘진성한?’임슬기는 얼떨떨했다.“그게 어떻게 너희 아버지랑 관련 있어?”진승윤은 미간을 찌푸렸다.“전에 파티장에서 우리 아버지 널 따로 불러냈었지?”“응.”“그 사람, 절대 신사 같은 인물 아니야. 자기 계획에 방해가 되는 사람은 전부 제거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야. 넌 그 사람 눈에 발목 잡는 존재였을 뿐이야.”진승윤의 눈빛 속에 이전과는 다른 차가움이 스쳤다.“방해가 된다 싶으면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없애버려.”이미 직접 전화로 확인하긴 했지만 그 위선적인 인간을 진승윤은 끝내 믿을 수 없었다.임슬기도 진
육문주의 발걸음이 멈췄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그날 밤, 연다인이 김현정이 마시던 술에 약을 탔어요.”말을 끝낸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배정우를 바라봤다. 그리고 또박또박 말했다.“그건 그 여자가 직접 인정한 말이에요.”그렇게 말한 육문주는 곧바로 문을 열고 나갔다.여러 해를 함께한 사이였기에, 그는 이 일에 배정우가 직접 관련되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하지만 임슬기가 그렇게까지 의심하고 원망한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터.그래서 그 역시 배정우를 위해 변명해 줄 생각은 없었다.배정우의
배정우는 권민에게 임종현을 병원에 데려다주라고 지시한 뒤 자리에 남았다.바닥에 쓰러져 기절해 있는 남자를 바라보던 그는 곁에 놓인 양동이를 들었다.차가운 물 한 통을 그대로 퍼부었다.남자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고개를 들자마자 배정우의 핏기 어린 눈빛과 마주쳤다. 그 순간 겁에 질려 온몸을 떨며 허둥지둥 손을 내저었다. 뭔가 말하려 입을 벌렸지만, 끝내 단 한 마디도 내뱉지 못했다.배정우는 이 남자와 쓸데없는 신경전을 벌일 기분이 아니었다. 그는 조용히 칼을 꺼내 남자의 목에 갖다 댔다.“말해. 누가 시킨 거야? 목적이
임종현은 그 남자가 당장이라도 끔찍한 짓을 저지를 것만 같아 목이 터질 듯한 절규가 가슴 깊은 데서부터 쏟아져 나왔다.“누나! 임슬기, 정신 차려. 제발 눈 좀 뜨라고!”도저히 버틸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임슬기는 마지막 남은 기운을 다해 오른손을 겨우 들어 임종현에게 신호를 보냈다.무언의 손짓이었다. 마치 무서워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리고 임슬기는 힘겹게 웃음을 지어 보이더니 입 모양으로 말했다.‘기회 봐서 너라도 도망쳐’임종현은 그 자리에서 완전히 굳어버렸다.연다인이 했던 말. 임슬기는 임씨 가문의 죄인이라는
연다인은 임슬기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걸 보곤 그녀가 완전히 속아 넘어갔다는 걸 단숨에 눈치챘다.“임슬기, 너 이렇게 무너지는 모습 배정우도 꼭 봤어야 하는데.”임슬기는 고개를 돌려 연다인을 외면했지만 눈물은 마치 연다인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듯 흘러내렸다.다리가 부러졌을 때도 임슬기는 울지 않았다.하지만 배정우가 자신의 죽음을 원했다는 걸 들은 순간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애써 괜찮은 척해봤지만 17년을 사랑한 그 남자가 자신의 원수에게 자길 죽여달라고 했다는 걸 들었을 땐 결국 무너져버리고 말았다.임슬기는 자
“혼자 와. 한 시간 줄게. 안 오면 지금 당장 임종현 한쪽 팔부터 박살 낸다.”속으론 수상하다고 느꼈지만 종현이를 걸고 도박을 할 순 없었다.임슬기는 전화를 끊자마자 곧바로 임종현에게 전화를 걸었다.임슬기는 열 번도 넘게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기 너머에서는 계속 전원이 꺼져 있다는 안내음뿐이었다.이쯤 되자 임슬기는 완전히 패닉에 빠졌다.결국 임슬기는 어쩔 수 없이 강재호를 불러 김현정 곁을 지켜달라고 부탁했다.강재호는 도착하자마자 급히 나가려는 임슬기를 덥석 붙잡았다.“임슬기 씨, 어디 가세요?”강재호가 보기에도 어딘가
“슬기 언니, 매일 내 곁에 있지 않아도 돼요. 주말엔 종현이 데리고 잠깐 놀러 다녀와요.”임슬기는 김현정을 흘낏 쳐다보며 말했다.“네가 자꾸 나 보내려고 하니까 더 마음이 쓰여. 종현이도 이제 중3이라 주말에도 공부하느라 바쁠 거야.”김현정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정말이예요. 슬기 언니, 나 다시는 그런 바보 같은 짓 안 해요.”“밥 먹자, 반찬 다 식겠다.”그 말에 김현정은 고개를 숙이고 마지못해 자리에 앉았다.임슬기는 몰래 그녀를 흘낏 바라보곤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최근 들어 밤마다 피투성이가 된 김현정이 욕조에
아파트.연다인이 막 집에 들어서자마자 노크소리가 들려왔다.그녀는 콧노래를 흥얼대며 들뜬 마음으로 문을 열었다.그런데 문 앞에 선 얼굴을 본 순간, 그녀의 표정이 굳어버렸다.“배정우, 너 여기 왜 왔어?”“내 집인데, 내가 오면 안 돼?”연다인은 애써 웃으며 말했다.“그런 뜻이 아니라 나는 네가...”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배정우는 싸늘한 눈빛으로 쏘아보며 말했다.“네가 김현정한테 그런 짓을 한 거야?”“무슨 짓?”연다인은 잽싸게 그의 팔을 감싸며 새침하게 말했다.“배정우, 설마 너도 날 의심해? 날 믿는다고
배정우는 날카로운 눈을 가늘게 뜨며 흥미롭다는 듯 그녀를 바라봤다.“지금 질투하는 거야?”...질투?임슬기는 한동안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예전 같았으면 분명 질투하고 속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마음은 한없이 차분했다.굳이 말하자면 남은 감정이라곤 혐오뿐이었다.“배정우 씨, 참 재밌네요. 다른 건 몰라도 세상에 두 다리 달린 남자는 널렸어요. 내가 연다인이 남자를 가졌다고 부러워할 이유라도 있어요?”배정우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손을 뻗어 임슬기의 손목을 움켜쥐고 그대로 끌어당겨 품에